장정일의 시를 시나리오화 했던 박철수 감독의 [301 302]를 보면 시나리오에 이서군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이서군은 뉴욕대 영화과 재학중이던 23살에 안재욱 이지은 주연의 [러브 러브]를 감독하면서 최연소 여성감독으로 데뷔했다. 영화는 아직 치기가 강했고 흥행에도 대실패했다. 재능 있는 감독의 재능을, 성숙되기도 전에 너무 일찍 터트려서 소모시킨 것같다는 느낌이었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하이야트 호텔에서 열린 이서군 감독의 거대한 결혼식에 참석한 적이 있지만(아마 백여개가 훨씬 넘는 디너 테이블이 거대한 홀을 가득 메웠으니까 천여명이 넘는 인원이 초대되었고, 식후에는 테이블 사이의 홀에서 외국영화의 한 장면같은 우아한 댄스 파티까지 있었다) 그 이후 영화판에서는 얼굴 보기가 힘들어졌다. 절치부심, 새로운 영화를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 줘]의 모지은 감독은 26살이다. 이서군 감독 이후 최연소 여성 감독의 등장인데, 충무로에서 데뷔하는 감독들의 면면을 보면 확실히 도제 시스템은 완전히 무너졌고, 이제는 좋은 시나리오를 쓸줄 아는 능력이 되면 곧바로 감독 데뷔도 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모지은 감독은 스토리보드 작가 출신이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해적 디스코왕 되다]같은 영화의 스토리 보드 작업과정을 눈여겨봤던 씨네 2000의 이춘연 사장이 감독 제의를 하면서 이루어진 모지은 감독의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는 흔한 로맨틱 코미디이다. [웨딩 플래너]처럼 결혼식 뒷면에 있는 사람들을 전면으로 등장시켜서 사건을 만들어나간다.
결혼 정보회사(종로 2가 국세청 건물에 있는 [듀오]가 영화속 배경이다. 요즘 영화들은 화면을 이용해서 관객들에게 상품 광고 마케팅을 시도하는 PPL 기법을 너무 끌어들여서 자연스런 영화감상의 방해가 되고 있기도 한다)에 근무하는 능력있는 결혼설계사 김효진(신은경 분)이 자신의 회원인 박현수(정준호 분)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너무나 흔해서, 기발한 상상력과 아이디어가 넘쳐나는 세상에 저런 이야기로 영화를 찍으려고 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로맨틱 코미디의 뻔한 과정을, 모지은 감독은 미리 선수치고 관객들에게 전달하면서 상투적 내러티브의 전개에 기대지 말고 그 과정에서 펼쳐지는 아기자기함에 기대해 달라고 말하는 것 같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신은경의 친구들을 극장과 결혼식 장면 등에 등장시켜 영화의 전개에 대한 암시를 던져준다. 역시 데뷔작답게 극적 구성이나 전달방법은 어설프고 많이 모자라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전달이 된다.
뻔한 이야기를 뻔하지 않게 만들어가는 것은 전적으로 감독의 능력이다. 모지은 감독이 새로운 영상을 창출하는데 있어서 감각적이고, 상황을 장악하는 능력이 뛰어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녀의 유일한 장점, 한눈 팔지 않고, 잔재주 부리지 않고, 정공법으로 섬세하게 변화하는 등장인물의 심리를 그래도 손에 잡힐듯 관객들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는 것, 이것이 너무나 상투적인 이 영화를 구제한 특효약이었다.
[파이란] 이후 부쩍 얼굴 내미는 영화가 많아진 감초 연기자 공형진(정준 역)의 호연이 돋보인다. 오히려 주인공인 정준호보다 공형진이 주인공처럼 생각된다. 정준호의 연기는 실망이다. 사람 좋게 생긴 얼굴에 그런 웃음만 띄는 연기는 연기라고 할 수도 없다. 반성하라. 대오 각성하라. 그런 연기로는 더이상 충무로밥을 먹지 못하게 될 것이다.
반면에 공형진은 필사즉생, 에너지 넘치는 연기를 선보인다. 로맨틱 코미디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를 재미있게 만드는 일등공신은 단연 공형진이다. 특히 신은경이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훔쳐다주는 행동은 관객들의 가슴을 짠하게 만든다. 압권은 결혼반지다. 신은경도 눈에 힘주는 중성적 역할보다는 이런 배역이 훨씬 잘 어울린다.
유하 감독의 [결혼은 미친 짓이다]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당초 영화사 싸이더스의 예상은 전국 60만이었지만 120만이 넘는 스코어로 끝났다) 성공을 거두면서 결혼이나 섹스에 관한 재담 넘치는 로맨틱 코미디류의 영화가 많이 기획되고 있는데, 그래도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는 아류작의 범주에 머물지 않고 개성있는 조연 덕분에 인상적인 영화로 마무리됐다. 모지은 감독으로서는 무난한 데뷔전을 치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