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두환 전.대통령부부 백담사 은둔.
1988년 2월25일 전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 치려진 대선결과 총 투표수 2천306만6천419표 중 노태우후보 828만273표(36.6%) 김영삼 후보 633만7581표(28.0%) 김대중 후보 611만3375표(27.0%)김종필 후보182만 3067표(8.1%)로 노태우 후보가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민주적 정권교체라는 정치사적 의미를 담고 노태우 대통령이 이끄는 제6공화국정부는 군사정부 연장선상이란 오명을 빗댄 표현을 감수하며 출범했다.
그러나 제6공화국은 누적된 지난 정부의 유산인 어려웠던 상황이나 고통따위를 달게 안고 출범하면서
군사정부의 연장선상이라는 소문이 퍼졌고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선거는 난타전으로 격돌하기도 했다.
1988년 4월26일 총선결과는 전체의석 299석의 과반수에 미달한 민정당은 125석에 그첬고 야당인 평민당71석,민주당60석,공화당35을 차지해 어느 한 당의 협조 없이는 의회정치를 이끌어 갈수 없는 4당 체제로 제6공화국은 험난한 정치국면에 직면하게 됐다.
이와 떼를 같이한 대학가에서 제기된 통일논의는 6.10 평화대행진 및 남북학생 국토순례를 위한 대규모 학생시위로 이어진 통일문제는 전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르며 5.18 민주항쟁 시위를 떠올리게 했다.
1988년 7월7일 제6공화국 정부는 이에 따른 7.7.선언인 대북개방선언으로 우리사회의 인식전환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1988년 9월부터 시작된 서울88올림픽은 노태우 대통령의 7.7선언과 더불어 12만 인류가 모인 가운데 열린 가장 완벽한 대회로 세계 160개국이 참가한 사상최대 규모였던 이 대회에서 한국은 금메달 12개로 올림픽사상 처음 세계4위로 부상하는 감격을 누렸다.
7.7선언과 성공적인 올림픽의 여세를 몰아 정부는 북방외교의 일환으로 헝거리정부와 상주대표부 설치를 기점으로 공산종주국인 소련과 중국관계자들의 방한으로 정.재계인사들이 소련방문 및 중국방문의 길을 통해 경제관계 만이 아닌 정치관계 설정에 문호을 개방하는 가능성을 열면서 우리경재는 급성장세로 빠르게 전환하였고 그 규모의 발전속도는 눈부시게 속도를 내면서 북한과의 격차는 상상을 초월했다
1988년 9월 여소,야대속에 열린 정기국회가 5.18 청문회를 시작하며 전.전대통령 친인척비리가 밝혀져 동생 전경환씨가 구속됐다
이렇게 시작된 5.18광주 민주화운동 유혈진압에 대한 전.전두환 대통령의 청문회 답변을 요약해 정리해 보면 10.26사건 이후 적화통일의 결정적 기회를 노리고 있던 북한이 이 시점이 되면서 대규모 기동훈련, 전쟁물자점검, 전투태세 강화, 등 심싱치 않은 동향 첩보사항으로 파악되어 국가 존망을 위태롭게 했다.
이 같은 상황이 메스컴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그나마 일반 국민들의 동요를 막기 위한 것이며 위기상황에서는 그 당사자가 누구이든 국가는 스스로의 자위조치를 취하지 않을수 없었다는 청문회 답변요지다.
그결과 국가의 자위조치는 당연한 비상계엄조치의 전국확대였고 5.18사태는 지극히 불행한 사태로 경미한 군.경의 충돌이 상황악화에 따른 계엄사령부의 무력진압이 이처럼 엄청난 비극이 일어날줄 몰랐다고 술회하자 제5공화국 권력비리에 대한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의원들의 원성이 높아졌다.
전두환 전.대통령은 이에 대한 답변에서 모든 책임은 본인에게 있고 책임을 통감한다는 증언이후 계속된 제5공화국 비리문제로 우리사회는 잠잠해질 날이 없었고 노태우대통령의 적극적인 대처를 기대했다
1988년 11월23일 전두환 전.대통령부부는 8년 간의 권위주의 통치와 그 속에 숨겨졌던 비리로 국민적 분노가 일어나면서 연희동 자택을 떠나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던 만해선생이 머물던 백담사로 은둔의 길을 떠나면서 우리의 근로자가 부럽다는 그 한마디의 모습은 국민들의 마음을 안탑갑게 하였고 일부 신문에 보도된 노태우당선 축하 모임 일화로 김옥숙여사는"우리는 국민이 직접투표로 뽑아준 대통령어어서 체육관 대통령하고는 다르다고 한 말에 이순자여사는 소름이 끼처 세상의 변화를 실감했다고 한다.
이런 권력의 습성과 권력의 맛을 깨달은 김일성은 후한이 두려워 김씨 왕조국 건설에 미친짓을 하고 있다 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일부 북한 추종자들은 느끼지 못하는 두뇌로 똑 같이 미치려 하고 있었다.
1989년 1월 연초부터 수출전선에 이상조짐이 나타나 당초 목표했던 690억달러에 헐씬 못미치는 620억달러 수준에 머물 것이라는 어두운 수출전망에 빨간 경고 등을 발표하면서 3년째 지속된 결렬한 노사분규는 수출경쟁력을 둔화시키고 근로자들의 작업질서를 파괴하는 일로 국내 경기마저 침체국면에 빠저들게 만들어 이에 대한 처방과 진단을 둘러싼 논쟁은 소잃고 외양간 고치기었다.
1989년 2월1일 공산권인 헝가리와 국교수립을 시발로 한 동구권 진출로 폴란드를 비롯해 12월8일 소련과 영사관계를 맺으며 절정에 이르러 12월28일에는 유고슬리아와도 국교가 수립되어 대한민국의 공산권 진출 확대는 가속패달을 밟는 기회가 되기시작했다
1989년 3월25일 평민당 소속 서경원의원이 한겨레 신문공동 대표이며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이며 13대 국회의원 신분으로 88년8월19일 북한을 방북해 김일성과 면담한 뒤를 이은 문익환 목사가 89년3월25일 밀입국하자 임수경양도 6월30일 내용이 논리적이거나 구체적이지 못한 어정쩡한 밀입국으로 북방외교 화해무드에 들떠있던 우리사회 전반에 미친 영향은 큰 충격을 주었다.
이를 계기로 공안정국이 조성되면서 평민당 김대중 총재를 불구속 기소 단계까지 이르게 하는 등 정치권을 들쑤셔 놓았던 서의원은 상고심에서 징역10년, 문익환 목사는 7년을 선고 받았고 임수경양은 5년을 선고 받으면서 맹목적인 방북사태는 북한 위정자들의 지위와 튼튼한 기반만 딱아 줄뿐 소득이 없다.
1989년 5월3일 대학입시 부정을 항의하던 동의대생들이 전경 5명을 납치,감금해 이를 구출하려던 경찰관 7명이 석유와 신나통
위에 화염병을 던져 불에 타 숨지자, 온 나라를 경악게 한 이 참사 이후 연세대에서 발생한 동양전공생의 경찰관 각목치사 사건
과 함께 대학운동권 학생들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면서 국민들은 대학생들의 시위를 맹비난하며 저지하는 분위로 바뀌고 있었다.
이 시기에 직업경찰관들로 구성된 전투경찰대(전경)를 창설한 1967년 9월에 구성된 배경은 68년 북한인민군 31명이 청와대를 기습하다 실패한 김신조 사건이 전경제와 향토예비군을 창설한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시위가 절정인 1980년을 기점으로 집회 시위진압 병력으로 투입되면서 경찰봉과 방패 및 최류탄을 들고 시위에 나선 학생들과 얼굴을 마주 한 것도 이때며 1982년 도입된 의무경찰(의경)이 대민업무와 치안보조를 전담하면서 이들의 역할이 집회시위현장에 집중 투입되면서 시위대학생들에게 납치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대학생들의 고질적 시위문화는 근절되어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대세를 이루웠다.
1989년 12월31일 노태우 대통령이 이끄는 제6공화국의 최대쟁점 이었던 제5공화국 청산문제가 전두환 전.대통령의 증언을 끝으로 1년10개월이라는 긴세월을 허비하며 사실상 종결상태로 갔다.
1990년 1월22일 구.민정, 민주, 공화,3당이 통합을 선언하면서 거대한 민자당이 탄생해 출범하면서 88년4.26일 총선에서 형성된 불안정한 정치구도를 해소하고 중도 민주세력을 통합해 남북통일에 대비하겠다고 내건 슬로건으로 3당이 전격통합 절차를 밟았다.
1990년 5월9일 민정당 창당대회를 앞두고 벌어진 김영삼 최고위원과 노태우 대통령의 실세로 알려진 박철원 정무 제1장관과의 내각제 합의각서 파문에 따른 세대결이 빚어지자 민자당 김영삼 대표가 당무를 거부하며 마산행으로 칩거에 들어가자 민자당 내분은 정치권 정세에 파급되면서 그 영향은 정국을 흔들었고 우리국민들도 어리둥절해 하며 혼란스러워 했다.
파문이 커지면서 노태우 대통령은 김영삼 대표 최고위원과의 회동을 갖고 내각책임제는 우리정치발전과 선진화를 위해 많은 장점을 가진 제도이나 국민이 반대하는 개헌은 하지 않는다고 발표하면서 봉합되었지만 내각책임제는 좀처럼 수그러 들지 않는 불씨를 남겨 놓게 되었다.
그렇다면 내각책임제란 내각의 성립과 존속에 있어 국회의 신임을 묻고 내각 불신임이 있을 시에는 사퇴하며 국회를 해산시켜 국민들에게 신임을 묻는 총선거를 실시하고 그 결과에 따라 진퇴를 결정해야 하는 제도로 우리나라는 제2공화국시절 의원 내각제를 실시한 적이 있었지만 결실을 맺지 못했다.
4.19혁명으로 집권한 민주당 장면내각은 1960년 11월29일 4차개헌을 단행하여 의원내각제를 실시하였으나 민주당 신.구파 분쟁인 노장파와 소장파가 대립해 9개월만에 3차례나 개각하는 혼란을 초래하자 정국혼란을 초래하고 실패로 끝난 내각책임제로 또 다시 우리사회가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질뻔 했다.
1990년 6월4일 한국과 소련의 두정상은 샌프란 시스코에서 만나 정상회담을 한후 9월30일 한국과 소련 양국 외무장관이 수교협정문에 서명을 하면서 노태우 대통령이 소련을 방문해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한반도 문제해결에 군사력 사용을 배제하며 평화적 대화를 통해 신뢰를 구축하고 이를 바탕으로 단계적인 협력관계를 발전시켜 나간다는 의견을 같이 한다는 모스코바 선언을 발표하고 양국관계 기본을 규정하게 될 모스코바 선언문에 양국정상이 서명을 하면서 한.소냉전시대의 종말을 고했다.
이 서명으로 북한과 소련의 밀월관계에 이상기류를 감지한 북한 위정자들의 동향이 결실을 맺었다.
1990년 10월초부터 시작한 1차 서울회담에서 남북을 왕래하며 진행한 3차에 걸친 남북총리회담과 통일축구대회, 통일음악회 등의 잇다른 개최는 6.25전쟁 이후 남북대화 및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진 해로 북한을 바라보던 국민들의 시각도 부드러워 진 해였다.
그러나 남북고위급 회담에서 북측은 실질적인 남북개선 보다 불가침 선언을 주장하며 정치,군사 문제에 치중하자 회담자체가 답보상태를 면치 못했지만 양측의 만남으로 91년2월에 다음 회담일정을 합의했다.
이에 대한 우리국민들의 기대는 평화무드에 젖었으나 북한은 91년 새해가 닥아오면서 묵묵부답이었다.
1991년 3월26일 1988년에 개정된 지방자치법에 따라 30년 만에 지방의회 선거가 부활되면서 기대와 다른 후보들의 비리와 지역 이기주의 대두 등이 국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으며 지방자치제 제도를 못 마땅해 하는 이유로 세금 낭비라는 것이다.
지방의회 자치제를 살펴보면 1972년 유신헌법은 지방의회구성을 지방재정자립도를 감안하여 순차적으로 하되 그 구성시기는 법률로 정한다는 부칙조항을 두었지만 1987년 헌법은 지방의회 규정은 철폐됐고 1988년에 지방의회 자치법이 전면 개정되면서 1991년 상반기에 부활되면서 지방의회가 구성된 것이다.
1991년 4월19일 소련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국가원수 자격으로 대한민국을 최초로 방한하면서 한.소관계가 급진전되었고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귀국한 후 소련연방은 급진파 공산주의자들이 브레즈네프 식의 국가로 희귀할 것을 요구하는 구테타로 끝내 자유 민주주의을 추진한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열망한 민주주의는 햇볕을 보지 못하고 조문은 살아 있으나 실직적인 효력은 갖지 못했다.
1917년부터 러시아라는 국명의 강국은 1922년 소련으로 개명한 공산주의자들이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구금하자 의회를 장악하고 있던 엘친은 자신의 의회 해산요구에 반대하며 유혈시위와 의사당 농성에 대항해 강경파를 장갑차와 중화기를 동원해 구테타 세력에 맞섰고 구테타는 며칠 버티지 못하고 실패하면서 엘친은 전임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구해 냈지만 소련연방의 통치기구는 완전히 소멸됐다.
민주주의 방식으로 국민투표에 의해 소련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엘친은 75년이라는 긴 세월을 상징하던 붉은 깃발의 낫과 망치가 사라지게 만들고 15개 독립공화국이 각각의 독립된 깃발로 대체되면서 12월25일 최고회의에서 러시아라는 국명으로 희규하면서 공산권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선호하면서 돌아섰다.
철권 통치의 공산주의가 무너지자 자유를 외치며 길거리로 뛰처나온 러시아 국민들은 새로운 러시아 깃발을 흔들며 춤추는 길거리 모습이 방영된 방송화면은 최강의 공산주의가 무너지는 자유의 승리였다.
1991년 9월17일 세계최강의 공산주의가 무너지면서 소집된 제46차 유엔총회에서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이 만장일치로 승인됐다.
한반도에 불어닥친 이념대립으로 자유민주의와 독제공산주의 대립이 분단 반세기 만에 옵서버 국가의 설음에서 벗어나게 됐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본격적인 유엔회원국의 지위를 확보하고 유엔의 외교무대를 통한 당당한 목소리를 내면서 선조들이 이루지 못한 통한을 달래는 축제의 한마당 판을 이룩해 낸 기쁨의 날로 기억하게 됐다
1991년 9월18일 노태우 대통령의 임기가 닥아오면서 노태우 대통령은 집권당 대통령의 당적포기와 특정정당이나 정파를 떠나서 중립적 내각으로 닥아오는 선거관리를 하겠다며 중립내각 구성을 발표하고 공명선거를 다짐하는 선언을했다.
헌법에 따른 권력행사 정치형태를 비판 받아온 관권 선거시비를 끝내고 선거문화에 혁명을 일으켜 정부수립후의 임기말 첫 무소속 대통령임을 선언한 것은 제2 이동통신 문제로 발생한 대통령과 민정당 총재 와의 충돌로 인한 앙금이 가시지 않은 시점에서 나온 노심에 따른 추측성 억측만 난무하게 만들었다.
정치란 무엇인가?
작금의 정치는 기본적으로 생각과 의견이 서로 맞지 않아 어긋나면서 생기는 불협화음과 관련이 있고
사람들을 좀더 편하고 안락하게 보살피고 국가안위와 제한적인 권위행사에 따른 자원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동.서양에서 오래전에 정치에 대한 시각차이가 존재했고 오늘날 정치에 대한 시각은 통치자,정치가가 사회구성원들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거나 통제하고 국가의 정책과 목적을 실현하는 일, 또는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을 사회적으로 교섭하고 정략적 목적인 당의 이익을 위한 정치상의 방향을 가르키는 의미를 내포한 것이라고 배우고 익혀 왔지만 정치가들의 이익에 몰두한 모습에 환멸을 느꼈다.
1991년 12월13일 작년에 불발되었던 남북고위급 제5차 회의가 서울에서 열려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채택되기 까지 오랜세월 밀고 당기기를 계속한 끝에 결실을 맺은 관련 부속합의서 내용을 옮겨 기록으로 남겨야 하겠다.
이 합의서는 분단 46년 만에 남북당국자 간의 공식문서로 합의한 평화체제에 남북이 서명약속하기로 약속하고 1992년 9월17일에 남북대표가 서명교환 하기로 합의한 내용을 발표하고 북한대표들이 돌아갔다
합의문이 발표되자 우리국민들은 평화에 대한 기대로 뜰떠 있었으며 전쟁공포심도 잊고 활기가 넘첬다.
이에 제동을 건 일부 언론사는 믿을 수없다는 지금까지 북한의 제멋대로의 행태를 지적하기도 하기도 했지만 흥분한 국민들의 귀에는 마의(신라의 마지막 태자는 나라가 망하자 삼배로 지은 옷을 입고 금강산에서 여생을 보냈다는 삼배 옷)북풍을 의식하지 못하고 철석같이 믿는 시대의 흐름상으로 받아들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노태우 대동령이 이끌었던 제6공화국의 공과사를 구별하지 않는 참새들의 입방아는 물태우라는 닉네임을 붙이며 악을 쓰고 헐뜻기에 매달렸고 다음 대권주자에게 유리한 보탬을 주면서 이익을 챙기려는 철새정치인들의 세몰이를 보여 주면서 제6공화국의 파란만장한 정치사도 막을 내렸다.
다음편은 1992년으로 이어지면서 제7공화국이 둔갑해 문민정부라는 간판을 달은 과정과 1992년 9월17일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에 남북 대표단이 서명한 합의서 전문을 기록해 놓아 많은 젊은 층과 청소년들이 읽고 댓글을 달아 지적하는 지도편달을 바라면서 계속할 것입니다.
세상에 알려진 진실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며 앞으로도 진실만을 쓰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