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수많은 군중 속에서 스스로 고독을 느낄 적이 있다. 군중 속의 고독이라니 가당치 않은 이야기라 말 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만 않은 것이 현대인들이다. 인간성 보다는 물질이 우선시 되는 현실 안에서 때때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심각한 고민에 빠질 적이 있다. 고민을 해결하기 위하여 한참 생각하며 자신과 자신 주변에 널려 있는 여러가지 일들을 꺼내 놓고 정리해 보지만 쉽게 실마리는 찾아지지 않고 오히려 혼란만 가중되는 경우가 많다. 원래 나의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나 이외의 환경 영향으로 어쩔 수 없이 대세라는 세력의 등살에 내 몰리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되면 자존감에 장애가 생겨 고독한 현실을 극복해야 하는 절박함이 따르게 되어 시간이 갈수록 나의 정체성은 위태로워 진다. 이럴때 할 수 있는 일은 잠시 현실을 벗어나는 일이다. 고단한 마음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하여는 여러가지 방법을 모색될 수 있지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피정이다.
피정(避靜, recollectio)은 신앙인들이 일상을 피해 일정 기간 동안 조용히 자신을 살피며 수련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성 생활에 필요한 결정이나 새로운 쇄신을 위해 일정 기간 동안 묵상과 성찰의 기도 등과 같은 종교적 수련을 행하는 과정을 말하기도 한다. 피정은 피속추정(避俗追靜)의 준말이라는 설과 피세정염(避世靜念)의 준말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피속추정은 '세속을 피해 고요함'을 따른다는 뜻이고 피세정염은 '세상을 피해 고요한 마음을 지닌다'는 뜻이다. 피정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며 기도했던 일을 그의 제자들이 본받아 수행하게 되면서부터 그리스도교 안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피정이 세상에 알려 지기 시작한 것은 성 이냐시오 로욜라가 그의 책 영신수련Exercitia Spiritualia에서 피정의 구체적 수련 방법을 발전시키면서부터다. 이후 많은 성인聖人들을 통해 피정은 더욱 확산되었으며, 17세기에 들어서자 피정의 집이라는 특정한 기도의 장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현행 교회법 규정에 의하면 신학생은 매년 피정을 해야 하고(교회법 246조 5항), 수도자 역시 연례 피정을 성실히 해야 하고, 재속회원도 연례 피정기간을 준수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반면 성직자는 개별법의 규정에 따라 영성피정을 하도록 하고 있다. 이것은 종교적 의미의 피정인 반면 개인적으로 일상에서 일탈을 꾸미기도 한다. 잠시 벗어나 자유롭고 쉽은 것이다.
내가 속한 사회나 공동체 규범 또는 표준에서 벗어난 행위로서의 일탈이 아니라 씨줄과 날줄처럼 촘촘하게 짜인 일상의 고단한 삶 안에서의 피로도가 쌓여있을 때 훌쩍 여행이란 이름 빌려 떠나고 싶을 적이 있다. 그렇다고 특별하게 계획하고 준비할 필요는 전혀 없다. 꽃이 피고 지고 바람이 불고 물 흐르고 구름에 달가듯 그렇게 그렇게 유유자적하며 산과 바다를 휘~ 익, 돌다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면 되는 것이다.
군축령 아래 마을 언저리에서 더 깊이 들어가면 걷기 좋은 숲길이 있다. 아름다운 계곡을 지나 접근할 수 있는 곳이고 숲의 밀도 또한 좋은 곳이다. 극상림까지 아니더라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수종도 다양하게 서로 엉켜 있는 곳이다. 고단함과 모든 시름의 다틈까지 전부 내려 놓고 나를 홀가분하게 건사해 가며 걷기에 딱 좋은 곳이다. 마침 동행하여도 좋은 도반이 있어 출발하였다. 생각보다 더 좋은 숲의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전국적으로 내린 비의 영향으로 걸을적마다 피톤치드가 혼탁한 마음과 정신을 씼겨 주었다. 길섶에 핀 야생화 빛도 예사롭지 않았다. 맑은 꽃향이 느껴지는 야생화는 야생이란 본연의 모습을 하고 야생의 의미를 일깨워 주었다.
자연 그대로 나서 자연 그대로 자라는 꽃을 야생화라 하는데,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야생화는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스치는 바람과 계곡 따라 흐르는 물소리, 초목을 포함한 숲 안에 가득한 사물의 집합체인 풍경도 위안이었다. 그렇게 편안한 걸음을 걷다. 숲을 나와 옛적부터 이 부근을 찾을 적마다 마셨던 약수를 찾았다. 많이 변해 있었다. 오솔길 같았던 길이 대로로 바뀌면서 원시 형태의 남전 숲을 황량한 화전처럼 바꿔 놓았다. 아무리 좋은 원시 환경 숲도 문명과 인간의 욕심이 간섭하기 시작하면 이렇게 흉하게 변하기 마련이다. 마음에 상처가 컸다. 상심이 산맥을 넘게 하였다. 연속해 이어지는 아름다운 산맥의 령으로 오르는 숲길, 고도를 더 할수록 더욱더 세련되어 갔다. 그 모습은 바위와 어울리면서 칠 형제바위 부근에서 극점을 찍었다.그리고 도착한 해안선 옛 향수를 불러올 조건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만큼 변해 있었다.
어둑해지는 등대를 찾았다. 바다의 수면은 고요했다. 이런 모습은 난생처음이다. 海印을 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불가에서 전하는 해인이란 단어가 있다. 그 단어를 따서 지은 절, 海印寺도 가야산 아래에 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법어를 확철하게 이 세상에 던진 성철 스님이 머무셨던 곳, 팔만대장경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바다에 도장을 새긴다는 뜻이 바로 해인이다. 한 시도 조용할 날이 없는 바다 표면인데 그곳에 어떻게 각인한단 말인가! 그것처럼 인간의 마음도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다. 마음은 생물이라 보고 듣고, 느끼는 감정 여하에 따라 분주하게 살아 움직이는 마음, 마음을 잡는 공부가 바로 수련이다. 그 수련에 꼭 필요한 것이 복음이고 경전이다. 기도와 회개로서 복음적 삶을 실천하고, 경전 통해 깨달음과 자비심을 쌓아 성불로 나가야 한다. 고요한 바다 수면을 통해 海印의 근본을 깨닫게 되었다. 거친 풍랑 속에서도 마음이 평온하면 얼마든지 수면 위에 진리의 각자를 새길 수 있는 것이다.
등대를 만나로 가는 길, 사람들 몇 되지 않았다. 한적함이 그리웠는데 제대로 그 그리움을 해소하고 있는 중이었다. 파도와 해일 등등 바다의 무서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설치해 놓은 시멘트 불가사리에도 오후 노을 빛이 스며들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 등대 너머로 달이 떴다. 밤을 준비하는 모습은 참 아름답다. 조금씩 물들어 가는 노을 빛에 담긴 달, 구름, 붉은 등대의 정경들이, 나그네에게 삶의 여정에 혼재되어 있는 것 중에 하나인 번뇌와 분노의 감정속에서 벗어나 평화의 선함으로 침잠시켜 주었다. 듣고 보는 것이 좋으면 평화와 선이 가득하기 마련이다. 평화란 수많은 방해를 선으로 이길 수 있어야 평화가 나와 너와 우리들 것이 되는 것이다.
초 불은 자신을 태워 어두움을 밝힌다. 등대 또한 빛을 밝혀 바닷길 안내 역할을 한다. 그런 희생과 봉사가 좋아 우린 스스럼없이 발 길을 등대에게 옮기는 것 같다. 건너에도 흰빛 등대가 서 있다. 붉은 빛과 흰 빛이 서 있는 포구 정경은 어느때 보더라도 안정적인 아름다움을 연출 한다.
역광에 걸린 사물들은 점점 검은색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정적이 길어지면 곧 고요가 몰려올 것이다. 고요 후에는 깊은 정적이 감싸는 깊은 수면 속으로 깊게 아주 깊게 빠지게 된다. 하루 종일 분주했던 항만의 모습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남은 일은 내일로 미루고 쉴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다시 이곳을 떠나 도시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등을 돌려 오던 길을 다시 밟으며 걷기 시작하였다. 해안선 너머로 육중한 검은 맥(脈)이 다가왔다.
해안선 너머로 보이는 육중한 산맥은 백두대간이다. 내가 보고 있는 산맥, 좌측에서 우측으로 짚어 거슬러 오르면서 살펴보며 령(嶺)을 세기 시작하였다. 구룡령, 북암령, 조침령, 단목령, 한계령, 마등령, 저항령, 미시령, 진부령이 마음에 잡힌다. 다 한번 또는 여러 번을 발품 팔아 넘었던 재다. 나는 넘을 적 마다 깊은 사유속을 유영하곤 했었다. 이곳에서 저 곳으로 가려면 령을 넘어야 하는 것처럼 마음의 철학이 윤택해 지려면 수많은 분노의 고뇌를 넘어야 한다고 믿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역광에 걸린 어두움 속에서 등대가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번쩍 그리고 빙글 돌다 다시 번쩍, 등대가 반복적인 회전을 하는 이유는 등대를 만나기 위하여 걸어왔던 길을 다시 돌아서서 걸었다. 이젠 떠나야 할 시간이다. 길이 좋아 옛날처럼 많은 시간은 걸리지 않는다. 중간에 잠시 휴게소에 쉬면서 커피로 여독을 풀었다. 도시로 접근할수록 문명과 이기와 사람 마음이 사람을 분망하게 만든다. 사람이 간직하고 있는 마음 밭에 항상 어진 마음이 심어져야 그 속이 편하다. 그러나 아무리 어진 마음을 달고 산다하여도 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다중의 인격을 상대해야 한다. 즉 생명의 빛이 여러 가지다 보니 늘 어진 마음을 표현하며 살기 쉬운 일이 아니다. 궁색한 말이지만 가끔 모든 것이 성가신 사람을 만나 상처만을 받게 될 때 대면하지 않고 피해 버리는 것도 삶의 방편일 것이다. 아니 상책일 것이다. 종교란 시비를 걸거나 싸움이 전제된 사상이나 이념이 아니다. 적어도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은 자연의 그릇을 닮고 있어야 한다. 스스로 이뤄 나가는 것을 자연(自然)이라 부른다. 내가 자연처럼 되려면 스스로 모든 것을 자정(自淨) 할 수 있는 어진 마음이 가득 깃들어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