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원사 광제승통 총서 묘지명 (洪圓寺 廣濟僧統 聰諝 墓誌銘) | 불교관련자료(2) 낙민|조회 2|추천 0|2016.03.03. 21:57 (승) 박총서(朴聰諝) 묘지명 (평산박씨7대조님)
고려국 홍원사의 제7대 주지인
광제승통의 이름은 총서이고,
자는 범진이며,
속성은 박씨로,
문열공 박인량의 둘째 아들이다.
향년 86세,
승랍 75세로 하원 갑자년으로부터 56년째 되는
기미년 여름 5월 경진월 17일 병신일에
흥왕사 감덕원에서 우협으로 누워 입적하였다.
23일 임인일에 홍원사 남쪽에 있는 도공난야의
남쪽 언덕에서 화장[다비]하고,
유골을 거두어 7월 기묘월 19일 정유일에
영수산 홍호사의 서쪽 산에 안장하였다.
[상세내용]
미상∼1139년(인종 17). 고려 중기 승려. 자는 범진(梵眞)이고,
법명은 광제(廣濟)이다. 본관 평산(平山)이다.
부친 문열공(文烈公) 박인량(朴寅亮)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승과(僧科)에 급제한 후 승통(僧統)에 까지 올랐으며,
홍원사(洪圓寺) 제7대 주지를 지냈다.
흥왕서(興王寺) 감덕원(感德院)에서 머리는 북쪽을 향하고
오른쪽 허리를 방바닥에 댄 채 모로 누워 입적하였다.
입적할 때 속세 나이는 86세였고, 승랍은 75세로,
홍원사 남쪽에 있는 절 도공난야(道空蘭若) 언덕에서 다비식(茶毗式)을 거행하였다.
묘는 영수산(靈秀山) 홍호사(弘護寺) 서쪽 산에 있다.
『고려사』가 외면한 인물들의 묘지명
묘지명에서 11세기의 명신 문열공文烈公 박인량 朴寅亮(?∼1096)의 아들로 기록된
광제승통廣濟僧統 총서聰(1054~1139)는
『고려사』 박인량 전傳에서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존재 자체가 기록되지 않았다.
반면 묘지명에서는 박인량의 둘째 아들로 자字가 범진梵眞이며
홍원사의 7대 주지를 지내며 승통에 올랐다가
승랍 75세로 1139년(인종 17) 5월 17일에
흥왕사 감덕원感德院에서 오른쪽으로 돌아누운 채 입적하였다는 것과,
입적 6일 후에 홍원사 남쪽의 언덕에서 화장되고
26일 후에 영수산靈秀山 홍호사 서쪽 산에 안장되었음을
아름다운 문양을 곁들인 오각형의 돌에다 유려한 서체로 아로새기고 있는 것이다.
홍원사광제승통총서묘지명(洪圓寺廣濟僧統聰諝墓誌銘) 박총서(朴聰諝: 1054~1139)의 자는 범진(梵眞)으로 문열공 박인량(文烈公 朴寅亮)의 둘째 아들이다. 출가하여 중이 되어 홍원사(洪圓寺)의 제7대 주지를 역임하고, 승통(僧統)의 지위에 올랐으며, 법호는 광제(廣濟)이다. 1139년(인종 17) 5월 17일에 향년 86세, 승납 75세로 흥왕사(興王寺) 감덕원(感德院)에서 입적하였다. 같은 달 23일에 홍원사(洪圓寺) 남쪽에서 다비(茶毗)하고, 7월 19일에 영수산(靈秀山) 홍호사(弘護寺)의 서쪽 산에 장례지냈다. 고려국(高麗國) 홍원사(洪圓寺)의 제7대 주지인 광제승통(廣濟僧統) 이름은 총서(聰諝)이고, 자는 범진(梵眞)이며, 속성(俗姓)은 박씨(朴氏)로, 문열공 박인량(文烈公 朴寅亮)의 둘째 아들이다. 향년 86세, 승랍 75세로 하원 갑자년(下元 甲子)으로부터 56년째 되는 기미년(인종 17, 1139) 여름 5월 경진월 17일 병신일에 흥왕사(興王寺) 감덕원(感德院)에서 우협(右脇)으로 누워 입적하였다. 23일 임인일에 홍원사 남쪽에 있는 도공난야(道空蘭若)의 남쪽 언덕에서 화장[茶毗]하고, 유골을 거두어 7월 기묘월 19일 정유일에 영수산(靈秀山) 홍호사(弘護寺)의 서쪽 산에 안장하였다. [출전 :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2001)] 高麗國洪圓寺第七」 代住持廣濟僧統諱」 聦諝字梵眞俗姓朴」 氏文烈公朴寅亮第」 二子也享年八十六」 僧臘七十五下元甲」 子五十六年己未夏」 五月庚辰十七日丙」 申在興王寺感德院」 右脇而化二十三日」 壬寅洪圓寺南道空」 蘭若南崗茶毗収遺」 骨七月己卯十九日」 丁酉安措於靈秀山」 弘護寺之西山」 [출전 : 『韓國金石全文』中世上篇 (1984)] |
朴寅亮字代天竹州人或云平州人也文宗朝登第遼嘗過鴨綠江爲界設船橋越東岸置保州城顯宗以來累請罷不廳二十九年[1075년]遣使請之寅亮修陳情表曰普天之下旣莫非王土臣尺地之餘何必曰我彊[疆]我理又曰歸汶陽之舊田撫綬弊邑回長沙之拙袖抃舞昌辰遼主覽之寢其事累遷至禮部侍郞三十四年[1080년]與柳洪[?- 1091년]如宋[3월에 갔다가 7월에 돌아옴]至浙江遇颶(?)風幾覆舟及至宋計所貢方物失亡殆半帝勑王勿問王乃釋洪等金覲亦在其行宋人見寅亮及覲所著尺牘表狀題咏稱歎不己至刊二人詩文號小華集肅宗元年[1096년]以右僕射參知政事卒[1096.9.1卒]諡文烈寅亮文詞雅麗南北朝告奏表狀皆出其手嘗撰古今錄十卷藏秘府
※ 이 기사는 고려사 열전을 거의 그대로 전재한 것이다.
洪圓寺廣濟僧統聰諝墓誌銘(1139년)에 보면,
박총서(朴聰諝: 1054~1139.5.17)는 박인량의 둘째 아들이고,
박인량의 다른 아들인 朴景仁墓誌銘(박경인 = 1057-1121.6.29)에 의하면
박인량은 아들 8명을 두었다.
이 묘지명에 의하면 박경인의 조상은 죽주에 살다가 평주로 옮겨가 살며
궁예에게 귀부한 것으로 나온다.
또 다른 아들인 朴景山墓誌銘(박경산 = 1081-1158.2.18)에 의하면
신라왕족의 후예로 관향은 平州이다.
이로써 보면, 박인량의 관향으로 竹州人或云平州人也는 둘다 맞으며
박인량은 1030년을 전후하여 출생한 듯하다.
열전에 전하는 아들 3명의 이름은
박경인(朴景仁)·박경백(朴景伯)·박경산(朴景山)이다(이 이름은 나이순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기 죽산현篇 참조).
고려사열전에 박경인기록이 있는 데 여기에는 卒年六十七로 나오나,
박경인 묘지명에 의하면 이는 65세의 誤記다.
고려사 명종 13년(1183) 계묘년
• 13년 봄 정월
경진일. 연등회 참석차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갔다.
계미일. 금나라에서 대부감(大府監) 복산연(僕散衍)을 보내 왕의 생일을 축하했다. 이부낭중(吏部郞中) 문장위(文章偉)를 금나라에 보내어 특산물을 바치게 하고, 낭장(郞將) 노효돈(盧孝敦)은 만춘절(萬春節)을 축하하게 했다.
병술일. 왕이 거처를 수창궁(壽昌宮)으로 옮겼다.
• 2월
무술일. 왕이 왕륜사(王輪寺)에 행차했다.
기미일. 명인전(明仁殿)에서 장경도량(藏經道場)1)을 열고 왕이 분향한 후, 절구(絶句) 한 수를 지어 문극겸(文克謙)에게 내려주고 화답시를 지어 바치도록 했다.
을축일. 왕이 영통사(靈通寺)에 갔다.
• 여름 4월
임인일. 홍원사(洪圓寺)2)에서 화엄법회(華嚴法會)를 성대히 열고, 경인년과 계사년의 병란3) 이래 사망한 이들을 위해 천도재를 지냈다.
정사일. 금나라에서 내원성(來遠城)4)을 내원군(來遠軍)으로 고친다고 통보해 왔다.
무오일. 크기가 은행알 만한 큰 우박이 쏟아졌다.
• 5월
계미일. 왕이 외제석원(外帝釋院)에 행차했다.
병술일. 중방(重房)에서 무반의 관직을 줄일 것을 건의했다.
• 6월
○ 금나라에서 대리경(大理卿) 흘석렬(訖石烈)편에 양(羊)을 선물로 보냈다.
갑인일. 대관전(大觀殿)에서 금나라 사신을 위해 잔치를 열었다.
• 가을 7월
정축일. 장군 경대승(慶大升)이 죽었다.
• 8월
초하루 계사일. 한밤중에 도성 안에서 크게 놀라 고함지르는 소리가 온 장안을 진동했다.
무신일. 경대승의 도방(都房)5)에 소속된 사병(私兵)들을 체포해 모두 먼 섬으로 유배보냈다.
○ 이 달에 양부(兩府)의 재추들이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매 해 금나라에 사신가는 관리들이 사적인 교역으로[懋遷6)] 이익을 보려고 토산물을 많이 지참해 가는 바람에 역리(驛吏)들이 그 짐을 운반하느라 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앞으로 사적으로 휴대하는 물품에는 반드시 수량을 정해주어 규정을 위반하는 자는 관직을 박탈해야 합니다.”
왕이 그대로 하라고 지시했다. 얼마 후 장군 이문중(李文中)과 한정수(韓正修) 등이 금나라에 사신가면서 그 많은 이익을 놓칠까 우려해 예전의 관례대로 해달라고 건의하자 왕은 기왕의 지시를 번복했다. 왕은 우유부단하고 결단력이 없는 까닭에 명령에 일관성을 잃고 조령모개(朝令暮改)하는 사례가 이처럼 많았다.
• 겨울 10월
병진일. 왕이 묘통사(妙通寺)에 행차했다.
• 11월
초하루 임술일. 일식(日食)이 있었다.
을해일. 팔관회(八關會)를 열고 왕이 법왕사(法王寺)에 행차했다.
계미일. 왕태후(王太后) 임씨(任氏)7)가 죽었다. 태후가 병들자 왕이 친히 약을 조제했으며 밤에도 옷을 입은 채 여러 날 간병했으며, 병이 위독해지자 울어서 눈이 온통 부어올랐다. 왕태후가 죽자 의창궁(義昌宮) 곁의 사제(私第)에 빈소를 마련했다. 왕이 밤낮으로 곡을 하며 너무 애통해하기에 재상들이 슬픔을 참고 몸을 돌보라고 간청했으나 듣지 않았다.
• 윤11월
을미일.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최효저(崔孝著)를 금나라에 보내 부음을 전하게 했다. 그 외 장군 이문중(李文中)은 왕의 생일을 축하해 준 데 대해 사의를 표하게 하고, 낭장(郞將) 최문청(崔文淸)은 신년을 하례하게 했으며, 원외랑(員外郞) 정윤당(鄭允當)은 양(羊)을 선물로 보내준 데 대해 사의를 표하게 했다. 그러나 금나라에서는 우리나라에 상사가 났음을 고려해 사신의 파견을 사양했으므로 이들은 모두 의주(義州 : 지금의 평안북도 의주군)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다.
정미일. 평장사(平章事)로 은퇴한 이공승(李公升)이 죽었다.
갑인일. 태후(太后)를 순릉(純陵)에 장사지낸 후, 왕이 의창궁(義昌宮)으로부터 미륵사(彌勒寺)8)까지 걸어가서 상복을 벗고, 제상궁(堤上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무오일. 양부(兩府)의 재추(宰樞)들과 대성(臺省)에서 표문을 올려 반찬 가짓수를 평상시대로 할 것을 간청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 12월
경인일. 이광정(李光挺)을 수태보(守太保)·판이부사(判吏部事)로, 한문준(韓文俊)을 판병부사(判兵部事)로, 문극겸(文克謙)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판호부사(判戶部事)로, 문장필(文章弼)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어사대부(御史大夫)로, 두경승(杜景升)·염신약(廉信若)·조원정(曹元正)을 모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로, 이의민(李義旼)을 공부상서(工部尙書)로 각각 임명했다.
十三年 春正月 庚辰 燃燈, 王如奉恩寺. 癸未 金遣大府監僕散衍來, 賀生辰. 遣吏部郞中文章偉如金, 進方物, 郞將盧孝敦賀萬春節. 丙戌 移御壽昌宮.
二月 戊戌 幸王輪寺. 己未 設藏經道場于明仁殿, 王行香, 製絶句一首, 賜文克謙和進. 乙丑 王如靈通寺.
夏四月 壬寅 大設華嚴法會于洪圓寺, 薦庚癸以來死亡者. 丁巳 金國報改來遠城, 爲來遠軍. 戊午 大雨雹如杏子.
五月 癸未 幸外帝釋院. 丙戌 重房奏, 省東班官職.
六月 金遣大理卿訖石烈來, 賜羊. 甲寅 宴金使于大觀殿.
秋七月 丁丑 將軍慶大升卒.
八月 癸巳朔 夜, 城中大驚譟, 聲震都下. 戊申 捕慶大升都房, 並流遠島. 是月, 兩府宰樞奏, “每歲, 奉使如金者, 利於懋遷, 多齎土物, 轉輸之弊, 驛吏苦之. 夾帶私樻, 宜有定額, 違者奪職.” 詔可. 居無何, 將軍李文中·韓正修等使金, 恐失厚利, 請復舊例, 王又許之. 王柔而寡斷, 政令無常, 朝出暮改, 類多如此.
冬十月 丙辰 幸妙通寺.
十一月 壬戌朔 日食. 乙亥 設八關會, 幸法王寺. 癸未 王太后任氏薨, 太后之病也, 王親自調藥, 夜不解衣者累日, 病革, 王泣目盡瘇. 及薨, 殯于義昌宮旁私第. 王朝夕哭臨哀甚, 宰相請抑哀, 不聽.
閏月 乙未 遣戶部員外郞崔孝著如金告哀, 將軍李文中, 謝賀生辰, 郞將崔文淸賀正, 員外郞鄭允當謝賜羊, 金恤我有喪, 辭遣, 故皆至義州而還. 丁未 平章事致仕李公升卒. 甲寅 葬太后于純陵, 王自義昌宮步至彌勒寺, 釋服, 移御堤上宮. 戊午 兩府宰樞·臺省, 表請復常膳, 不允.
十二月 庚寅 以李光挺守太保判吏部事, 韓文俊判兵部事, 文克謙爲中書侍郞平章事判戶部事, 文章弼同知樞密院事御史大夫, 杜景升·廉信若·曹元正並爲樞密院副使, 李義旼爲工部尙書.
각주
1 장경도량 : 봄과 가을에 열리는 정기 불교 의례의 하나이다. 봄의 3월 또는 4월과 가을의 9월 또는 10월에 매년 두 차례 열렸다. 현종대부터 열린 사실이 있으나 정종 7년(1041)에 봄, 가을 두 계절에 열되 봄에는 6일간 가을에는 7일간 여는 것을 예로 삼는다고 하였다. 이후 충선왕 3년(1311)에 행사 일수를 봄, 가을 모두 10일씩으로 고쳤다. 경행(經行)이 반야경에 대한 의례인데 비해 대장경 전체에 대한 공경과 공덕을 강조한 의식이며 이를 통한 불교 기반의 확산과 국왕권 강화의 성격이 있다고 추측된다. 봄과 가을에 궁중의 회경전(會慶殿)에서 각기 많게는 10일간 의식을 한 것은 그러한 성격을 보여 준다.
한기문, 「고려시기 정기 불교 의례의 성립과 성격」 『민족문화논총』 27, 2003.
2 홍원사 : 홍원사(弘圓寺)라고도 하며, 개경의 성 밖 동남쪽에 있는 흥왕사(興王寺)의 서쪽에 있었다.
순종이 창건하다가 마치지 못하고 죽으면서 대각국사 의천에게 부탁하여 완성했는데,
선종 7년(1090)경에 창건된 화엄종(華嚴宗) 내지 유가종(瑜伽宗) 계통의 진전(眞殿)사원이다.
선종 11년(1094) 2월 의천이 초대 주지로 임명되었다.
숙종 6년(1101) 2월에는 대장당(大藏堂)·구조당(九祖堂)이 완성되자 국왕이 낙성식에 참여하였으며,
예종·인종·의종·명종도 이곳에 행차하였다.
특히 인종 6년(1128) 3월에는 국왕이 이곳에서 승려들에게 공양을 하였고,
명종 13년(1183) 4월에는 화엄법회(華嚴法會)를 크게 열어 정중부(鄭仲夫)의 무신정변과
김보당(金甫當)의 변란 때 죽은 영혼을 천도하기도 하였다.
인종 때에는 평산 박씨(平山朴氏) 집안 출신인 문열공(文烈公) 박인량(朴寅亮)의 둘째 아들
광제승통(廣濟僧統) 총서(聰諝)가 이 사원의 7대 주지를 역임하였으며,
의종 때에는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를 역임한 강릉 김씨(江陵金氏) 집안 출신의
김상기(金上琦)의 손자인 유가업(瑜伽業)의 통소정각수좌(通炤正覺首座) 의광(義光)도
숭교사(崇敎寺)와 함께 이 사원의 주지를 역임하였다.
한편 이 사원에는 위숙군(圍宿軍)으로 산직장상(散職將相) 두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고려사』 권83, 병지, 위숙군(圍宿軍).
『고려도경』 권17, 사우(祠宇) 왕성내외제사(王城內外諸寺).
이지관 역주, 「영통사대각국사(靈通寺大覺國師) 비명」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3, 가산불교 문화연구원, 1996.
김용선, 「박총서(朴聰諝) 묘지명」·「김의광(金義光) 묘지명」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출판부, 2001.
허흥식,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1986.
민현구, 「월남사지 진각국사의 음기에 대한 일고찰」 『진단학보』 36, 1973, 30쪽.
3 병란 : 경(庚)은 의종(毅宗) 24년 경인(庚寅 : 정중부 난)을 말한 것이며, 계(癸)는 명종(明宗) 3년 계사(癸巳 : 김보당의 난)를 가리킨 것으로 이를 경계(庚癸)의 난(亂)이라고도 한다.
4 내원성 : 압록강의 검동도(黔同島)에 설치되었던 성으로, 고려·거란·금 사이에서 교통·국방상의 중요한 요충지였다. 991년 무렵 거란이 이곳에 성을 쌓았고, 예종 12년(1117)에 요나라 자사(刺史) 상효손(常孝孫)이 도통(都統) 야위영 등과 더불어 금나라 군사를 피하여 바다로 도망가면서 우리나라 영덕성(寧德城)에 공문을 보내어 내원성(來遠城)과 포주(抱州)를 돌려주었다. 이에 군사가 그 성에 들어가 병장기와 전곡(錢穀)을 거두어 들였다. 왕이 기뻐하여 의주방어사로 삼고 남쪽의 사람들을 이주시켰다. 내원성은 정주(靜州)에 있는데 바로 물 가운데의 땅이다. 이민족이 귀순해 오면 이곳에 살게 하여 성의 이름을 내원(來遠)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뒤에 금나라가 점유하여 1183년 내원군(來遠軍)으로 고쳤음을 고려에 통보해왔다.
『고려사』 권71, 악지2, 삼국 속악, 고구려 내원성(來遠城).
5 도방 : 경대승에 의해 처음 설치된 숙위기구로 무인집권자들의 사병집단이다. 경대승은 정중부 일파를 숙청한 후 일부 무신들의 반발에 위협을 느껴 스스로를 보호할 목적으로 100여 명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하고 그 이름을 도방이라 하였다. 경대승정권의 도방에는 정중부를 제거할 때 참여한 무사들과 사사(死士)라 불린 무사집단, 당시 사회적 일탈행위를 일삼던 도적(盜賊), 그리고 금군(禁軍)이던 견룡(牽龍)이 일부 소속되어 있었다. 도방은 경대승의 사망으로 폐지되었다가 최충헌집권기인 신종 3년(1200) 이후에 다시 설치되어 확대·재편되었다. 최충헌은 불의의 변고에 대비하여 문무관·한량·군졸을 막론하고 힘이 센 자가 있으면 이를 불러들여 6번(番)으로 나누어 숙직하게 하였는데, 그가 출입할 때는 6번이 모두 함께 호위하게 하여 그 위세가 마치 전쟁에 나가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최이 때에 가서는 임무가 사적인 것 외에 외적의 방어, 토목공사, 비상시의 경비 등 공적 임무를 수행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삼별초가 만들어지자 사적 임무만 맡게 되다가 무신정권의 종말과 함께 도방도 폐지되었다.
정두희, 「고려무신집권기의 무사집단」 『한국학보』 8, 1977, 87쪽.
유창규, 「사병의 형성과 도방」 『한국사 18—고려 무신정권—』, 국사편찬위원회, 1993.
김당택, 『고려의 무인정권』, 국학자료원, 1999, 86~88쪽.
전경숙, 「고려 최씨집권기의 도방」 『한국학연구』 7, 1997.
김대중, 「최충헌정권의 군사적 기반—경군, 도방, 별초군을 중심으로—」 『군사』 47, 2002.
6 무천 : 무(懋)는 힘쓰다 또는 교환의 뜻이고, 천(遷)은 교역의 뜻으로 교역에 힘씀, 또는 교역한다는 말이다. 『서경(書經)』 익직편(益稷篇) “축적된 화물을 있고 없는 곳으로 옮기다(懋遷有無化居).”의 채전(蔡傳)에 “무는 힘쓰는 것이다. 그 백성에게 힘써 있는 것을 없는 곳으로 옮겨 그들이 사는 곳에 축적되어 있는 재화를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이다(懋勉也. 懋勉其民, 徙有於無, 交易變化其所居積之貨也).”라 하였고 『설문통훈정성(說文通訓定聲)』에 “무는 일부를 빌어 무로 한다(懋段借爲貿).”이라 보인다.
7 임씨 : 임원후(任元厚)의 장녀로 인종의 비(妃)가 된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任氏)를 말한다. 공예 태후에 대해서는 『고려사』 권88, 후비, 인종, 공예 태후 임씨 참조.
8 미륵사 : 태조 19년(936) 광흥사(廣興寺)·현성사(現聖寺)·내천왕사(內天王寺) 등과 함께 태조의 명으로 개경에 창건되었다. 창건 후 공신원당(功臣願堂)으로 사용되었다. 예종 4년(1109) 4월 예종이 재(齋)를 열어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였고, 원종 4년(1262) 10월 몽고의 전란으로 불타버렸던 이 절과 공신당(功臣堂)을 중창하였다. 원래 공신당은 태조 이래의 공신 모두를 원형의 벽에다 그려놓고 매년 10월 불사(佛事)를 베풀어 그들의 명복을 기려왔던 곳이다. 공신당을 중창할 때 몽고 침입 때 공이 컸던 최이(崔怡)·김인준(金仁俊)·유경(柳璥)·김홍취(金洪就) 등 8명의 영정을 더 추가하였다. 한편 미륵사에서는 승과 시험이 치러지기도 하였다.
『고려사』 권64, 지18, 예, 흉례 국휼, 명종(明宗).
허흥식,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1997, 85·94·309·372쪽
국립중앙 박물관
기획특별전5
(7월 11일~8월 27일)
다시 보는 역사 편지, 고려 묘지명
국립중앙박물관은 올해 다섯 번째 기획특별전으로 ‘다시 보는 역사 편지, 고려 묘지명’을 개최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그 동안 단편적으로만 공개되던 고려시대 묘지명(墓誌銘)의 실물들을 내용별로 분류, 전시함으로써
민족사의 고대와 근세를 잇는 고려의 문화와 역사 및 동시대인의 삶과 꿈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마련되었다.
묘지명은 무덤의 주인이 누구이고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무덤 안에 넣은 기록물이다.
이처럼 묘지명은 개인적인 동기로 제작된 것이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는 매우 소중한 역사 자료로 다가온다.
묘지명 중에서도 특히 고려의 묘지명은 그 가치가 매우 크다.
고려시대와 관련한 문자 기록물 자체가 많지 않은데다,
고려 묘지명은 다른 자료에 비해 동시대인의 삶과 꿈을 보다 생생하게 전해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려 묘지명 30건 72점과 관련 유물 15건 16점 등
총 88점의 유물이 출품된 이번 전시는 묘지명의 내용을 중심으로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해동천자의 나라는 공주를 ‘천자(天子)의 따님’이라고 기록한 복녕궁주 묘지명을 비롯하여
독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황제국(皇帝國)을 자처한 고려 왕조의 정치적 특성을 보여주는 유물들을 전시하였다.
또 2부 가족과 여성은 염경애와 이승장의 묘지명을 중심으로
당시의 혼인과 거주의 실상, 재혼과 상속을 통해 본 고려 여인의 권리,
부부 간의 생활과 사랑 등 가족 공동체와 여성의 삶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어 3부 정신세계에서는 관리로서 부처를 독실히 믿으며 노자(老子)를 사숙하였던 윤언민의 묘지명을 비롯하여
불교와 유교, 도교, 풍수지리, 민간 신앙 등 다양한 사상과 신앙이 공존하며 서로 열려 있던 문화 풍토를 이해하고,
지배층의 멋과 풍류, 내세에 대한 관념도 함께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밖에도 주제별 전시와는 별도로 단아하고 아름다운 묘지명, 받침대가 있는 묘지명,
석관에 새긴 묘지명 등 다양한 묘지명들과 전시 준비 과정에서 새로 발굴한 정언심 묘지명을 따로 모아 전시하였다.
이번 전시에서는 소주제와 직결된 묘지명의 내용을 삽화로 그려 배치함으로써
텍스트 일변도의 메시지 전달이 갖는 한계를 보완하는 한편 도자기, 금속공예품, 회화, 문서 등 묘지명의 주제와 관련된
유물들도 함께 전시하였다.
그 중에 특히 혼인한 여성의 재산권을 보여주는 신씨자매노비분집문기(보물 1005호. 장덕필),
지방 향리의 직제 및 향리의 문화적 위상을 나타내는 청자‘신축(辛丑)’명 벼루(보물 1382호. 삼성미술관 리움),
산신(山神)에게 제사올리고 왜구를 물리친 정지 장군의 갑옷(보물 336호. 하동정씨 문중. 광주광역시립민속박물관 기탁),
거란군을 격퇴한 장군 강민첨의 초상화(보물 588호. 강영선·강우식. 국립중앙박물관 기탁) 등
4점의 보물이 포함되어 있어 그 자체로 귀한 관람의 기회를 제공한다.
한편 전시 기간 중에는 관련 학계 전문가를 초빙, 돌에 새겨진 삶과 사회(김용선 한림대 교수),
고려 왕조의 문화적 특질(박종기 국민대 교수) 등을 주제로 특별 초청 강연회를 열어
일반인의 이해를 돕기도 하였다(7월 26일).
이번 전시는 고려 묘지명 최다 소장처인 국립중앙박물관이 묘지명 실물들을 처음으로 한데 모아 공개함으로써
관련 학계에 이바지하는 한편, 삼국이나 조선에 비해 대중의 관심이 적었던 고려의 문화와 삶에 대해
일반의 관심을 높이고 이해를 돕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 믿는다.
서성호(국립중앙박물관 전시팀)
필자 : 서성호
첫댓글 화엄종 고서에 총서선조에 대해 언급이 있었는데~~
홍원사는 개성에 있던 사찰인데 현존하지 않고 터만 ~ 안타깝네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