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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선생님 운남성 차밭 답사 여행기 살짝 보기1 (페북에서)
11. 2011.11.25
"즐겁게 함께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읽히는 라히纳西 족의 상형문자입니다. 차를 마시는 까닭을 이것만큼 잘 드러내기도 쉽지 않을 듯합니다. 함께하려면 먼저 즐거운 마음을 앞세워야 할 듯합니다. 그래도 함께하려면 나름의 공통 잣대 정도는 뚜렷해야겠죠? 통치자의 시대도 아니고 지도자의 시대도 아니고 지휘자의 시대로 접어든 우리들 세월에서, 지휘자의 시대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즐겁게 함께하려는 마음과 그리고 '악보'가 아닐까 해요. 악보를 보고 싶습니다.
그림은 GU청담점의 현판이랍니다.
이거 제가 몇 년 전에 직접 썼다고 자랑하는 중입니다(^.^)
그 몇 년 전에 쓰신 것 중 하나가 분당 서현에도 있다고 자랑하고 싶어 안달이 났습니다~~^0^ 사진은 못 올리고 대신 뜻만 소개하자면
'대지는 아름답고 사람은 귀하다' --랍니다. (댓글)
12. 2011.11.27
윈난云南의 웨이산巍山 고성, 이 고성을 떠올리면 저는 늘 몇 가지를 생각합니다. 첫째로 전진교全真教 용문파龙门派로 상징되는 중국14대 도교명산지의 하나, 둘째로 남조南诏 옛 나라의 발상지, 셋째로 700만 이족彝族의 성지, 넷째로 제갈량이 맹획을 칠종칠금 했던 곳, 다섯째로 만리를 달리는 통가红河의 발원지, 여섯째로 다양한 민족이 다양한 언어를 쓰면서도 평화롭게 어울려 사는 민족과 언어의 전시장, 일곱째로 천년고악인 남조봉성악南诏奉圣乐과 남조고악회의 근거지, 여덟째로 차마고도의 중요한 길목 등..그 가운데 다른 하나는 쌀국수의 원조인 얼쓰饵丝를 '가장'(얼마나 맛있으면 이런 불공평한 표현을 쓸까요) 맛있게 하는 식당입니다(백 번의 소문이 한번 맛보는 것만 못하다는데, 정말 벗님들과 한 그릇 나누고 싶군요).
더하여 이 식당의 쌀국수가 저에게 유별나게 맛있는 까닭도 몇 가지입니다. 첫째로 정말 맛있습니다. 군말이 불필요합니다. 둘째로 먹고 나면 속이 든든한 실속 있는 음식입니다. 셋째로 값이 싸서(제일 비싼 게 한 그릇에 한국 돈 1800원이고 싼 것은 360원 정도) 누구나 큰 어려움 없이 먹을 수 있는 무난식无难食입니다. 넷째로 주인의 인심이 후덕해서 그 덕을 느낄 수 있으니 후덕식厚德食입니다. 다섯째로 맛있다고 욕심 내어 두 그릇을 먹으면 안 되는 음식입니다. 한 그릇을 먹으면 속이 편하지만 두 그릇을 먹으면 대부분 설사를 할 가능성이 큽니다. 즉 가득 차기를 경계하는 계영식戒盈食이라는 것입니다. 여섯째로 부자와 빈자, 지도자와 서민, 현지인과 외지인이 구분 없이 앉아서 먹는 평등식平等食입니다. 일곱째로 기본 음식을 내오면 제 입맛에 맞춰 어느 정도는 맛과 간을 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여덟째로 한 번 먹고 나면 꼭 부모님이나 형제나 벗을 모셔가서 같이 먹고 싶어지는 음식입니다. 아홉째로 한번 먹고 나면 오랫동안 잊어버릴 수 없는 고향 같은 음식입니다. 허나 저에게 이 음식은 인류 최초로 천 년도 더 이전에 제국이나 왕국이 아닌 민국民国이라는 나라를 세운 남조 태봉太封 민국에서 만민이 함께 잔치를 열 때 함께 먹기 시작한 데서 발원한 만인태평식万人太平食이 곧 이 쌀국수였다는 것으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이 쌀국수는 약간 성식圣食의 느낌마저 있습니다.
아무튼 언제 다시 이 고성에 가서 이 쌀국수를 먹고 싶습니다. 사진이 없어서 그다지 침은 안 돌 거라 믿습니다. 오히려 아름다우신 제 벗님들께선 마음만 아리시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13. 2011.11.29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89세의 아이니족爱呢族 할머니께서 과도기형 교목차나무에서 올해의 마지막 찻잎을 얻고 계십니다. 이 할머니에게 차나무는 대체 무엇이었고, 또 무엇일까요? 당신을 자연의 한 부분으로 돌리는 것, 평생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대준 것, 아들딸과 손주손자를 키워준 것, 삶의 기쁨을 준 것, 아마 이보다 복잡하지는 않았을 듯 합니다. 더하여 나이가 더 드시면서 그것은 그녀의 책이고 스승이고, 아들과 딸이고, 더 없는 친구일 것입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참 좋습니다. 하나에서 겨우 몇을 보다가 이처럼 하나에서 너무나 많은 여러 가지를 볼 수 있으니 말입니다. 저는 아직 꽤 젊지만 한 사람을 보면 그 뒤에서 이미 적지 않은 사람이 보이고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무엇이든 쉽게 얘기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아침에 마시는 차 한 잔에서도 너무나도 많은 사람과 바람과 구름과 물과 산과 바위와 돌과 흙과 불이 느껴집니다. 한 잔이 마치 한 세상인 듯합니다. 이른 아침 이 한 잔을 벗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甲은 A하고 B하고 C해서 좋다가, 또 乙은 D하고 E해서 덜 좋다가, 나이 좀 드니 甲은 甲이어서 좋고, 乙은 乙이어서 그냥 좋아지니, 나이 드는 거 참 좋은 일입니다. 미워도 미워하지 않고 좋아도 좋아하지 않으니, 얼마나 좋아요?
더하여 힘이 조금씩 줄어드는 건......그것도 괜찮네요. 조심이 늘고 좋아요.
웬만하면 빨리들 늙으셔요! (^∇^)
14. 2011.11.30
정우남 동지의 프로필 사진을 보다가......'쇳바리'라는 이름의 그 사진에 담긴 뜻이 소중해서......'쇳바리'(崇般图), '신을 향해 가는 길'(近神之路)이라는 뜻의 나시언어인데......거기에는 그들의 역사와 약속이 담겨 있죠......
역사라 하면, 나시족의 흑백대전을 전후한 역사인데. 나시족엔 처음 두 개의 큰 계열이 있었다 합니다. 바로 백白나시와 흑黑나시였습니다. 그들 사이에 먼 어느날 전쟁이 일어났고, 혈족간의 그 전쟁은 '사솨찌' 즉 피의 강이 흐르는 큰 전쟁이 되고 말았습니다. 종족의 대부분이 멸족을 당할 정도로 전쟁은 파국을 향해 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백나시의 지도자에게 시집갔던 흑나시 지도자의 딸이 그 전쟁터 한 가운데서 목을 놓아 울며, 부질없는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호소합니다. '무미우' 즉 하늘의 딸이 목놓아 운다는 나시족 최고의 서사시의 상황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받아들여 피붙이 사이의 전쟁을 끝내고 화해를 주선하는 나시족의 진정한 첫 지도자가 나타납니다. 그는 가장 먼저 '아리리찌베르'라는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행사를 합니다. 아울러 산자들의 반성과 맹세를 받아냅니다.
"우리는 영원히 전쟁을 하지 않는다"
이 약속을 하는 자리에서 첫 지도자인 돳바(땅의 아부지)가 그려낸 그림이 바로 '쇳바리'였습니다. 그리고 3천년이 흐른 지금까지 그들은 평화와 공존의 약속을 지켜왔습니다. 상대적 승자로 볼 수 있는 오늘의 나시족, 마사족, 마리마사족은 말할 것 없고, '싸움에 져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이름으로 불리는 리쑤족도 함께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정우남 동지는 아마도 그 생각을 간절하게 하나 봅니다. 우리들의 이 사회, 이 시대에서......
기회가 있으시면, 이 그림이 나오게 된 역사를 담은 나시(라히)족의 서사음악 '부시솨리'를 들어보시면 어떠실는지...... ①'두' -땅을 위한 진혼곡-피리독주-역사를 이야기하는 노인의 독백, ②'한 통의 편지'-전쟁이 발발하는 상황을 다루는 기악합주곡, ③'쯔추아'-활의 춤이라는 뜻으로 전쟁이 터져 화살이 나르는 상황을 노래하는 무곡, ④'톼추아'-다리의 춤이라는 뜻으로 전쟁이 육박전으로 이어지는 살상전으로들어갔음을 알리는 상황을 표현하는 무곡, ⑤'사솨찌'-피가 흘러 강을 이룬다는 뜻으로 전쟁의 참혹함을 표현하는 성악합주곡, ⑥'무미우'-하늘의 딸 목놓아 울다 라는 뜻을 담은 후회와 반성을 요구하는 내용의 성악곡, ⑦'아리리찌베르'-아리신의 이름으로 영혼을 떠나 보내는 송혼곡이자 새로운 출발을 약속하는 희망의 노래로서 합창합주곡....제게 음악 CD는 있는데 염치없는 말씀을 드리자면 저는 그걸 이런데 올릴 줄 몰라요. 이 위대한 서사악극을 보여드리고 들려드리지 못해 부끄럽습니다.
분에 넘치는 글과 말씀을 프로필 사진에 붙여 주시고...... 영광 또 영광일 뿐입니다...... 약간 찔리는 부분은, '그 생각을 간절하게......'라고 하신 부분인데요...... 그리 간절한 것은 아니어서리...... 애애...... 죄송 죄송(정우남 선생 댓글)
제가 정우남 선생을 정동지라 부를 때 동지는 同志가 아닙니다. 저는 그런 표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정동지의 동지는 同知입니다. 이때 '알 知'자는 '맡다"의 뜻이어서 同知는 같이 일을 맡는다는 뜻이고, 구체적으로는 제가 할 일을 맡아 해주시는 데 대한 저의 절대적 신뢰와 존경에 대한 표현일 뿐입니다. 어......그런데 고려시대 벼슬이름에도 이런 용어가 있었는데......우리 정동지한테 벼슬 팔자가 있나......(박현 선생)
아......^^ 동지가 그런 거군요...... 부족한데 맡겨주시니...... 나날이 부담이...... 으으...... 으으...... 부담부담^^(정우남 선생 댓글)
15. 2011.12.01
아직 음식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음식을 하는 집이니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음식은 나올 것입니다. 더하여 우리가 원해서 주문한 음식이 나올 것입니다. 맛과 향이야 우리가 기대한 것과 조금 다를지도 모르긴 합니다.
더구나 우리는 틀림없이 음식값을 낼 것입니다. 음식점 운영자도 그걸 믿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음식이 나오지 않았는데도 늙은 곰은 벌써 젓가락을 만지고 있고, 몇몇은 아무런 의심 없이 즐겁게 놀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것이 초보적인 신뢰라고 생각합니다. 음식값 미리 받고 음식은 잘 안 내오는 식당의 경영자는 매우 드물 것입니다. 우리의 사회에서는 이런 정도의 신뢰조차 사라지고 있는 듯합니다. 곧 진수성찬을 내오겠다고 해도 잘 믿지 못하고, 알맞게만 내오겠다고 해도 잘 믿지 않으며, 밥 먹은 다음에 값을 제대로 치를지에 대해서도 잘 믿지 않습니다. 지금 이런 신뢰는 누구에게 위탁되어 있을까요? 두 갑자 전에는 녹두장군에게 이런 신뢰를 위탁한 적이 있습니다. 녹두장군의 실력과 실상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몰라도 그에게 신뢰를 맡긴 이상 녹두 꽃이 떨어질까 두려워했습니다. 지금은 어떤 분이 청포장수가 된 듯합니다. 그게 시대의 대세인 듯싶습니다. 이번에 오는 청포장수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런 신뢰를 받았다면 그에게도 선택의 여지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개인의 삶과 관련하여 갈등을 한다면 그에게 맡긴 신뢰는 이미 떨어진 녹두 꽃이 될 것입니다. 그는 청포장수가 될 자격조차 없는 소인배가 되고 맙니다. 오늘 그가 많은 이들과 만난다 하는 이야기를 듣고 문득 생각나서 길게 올려 봅니다. 부디 신뢰가 맡겨진 거인에서 신뢰를 맡을만한 대인의 모습으로 이 달을 열어주길 바라며, 출장 준비하는 잠깐의 짬을 내어 신발 신기 전에 '게시'를 누릅니다.
길이 지루해서 웃으시라고......밥 기다리는 네 미녀는 각각 중국의 4대 미녀인 서시 초선 (왕)소군 (양)귀비에 대응하여 '사시 초산 소금 기미'가 되겠습니다. 남자 가운데 바른손편의 백족 아제는 빼고 좀 젊은 아제는 창업전의 KFC할배, 가운데는 머리 빠진 늙은 곰입니다. 쓰고 나니 자폭이 좀 심하긴 한데......제 벗님들이 웃으실 수만 있다면 이 정도야......(¬_¬)
거인과 대인을 구분해 해주신 말씀...... '이미 떨어진 녹두 꽃......' 부분은 두고두고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 항상 감사드릴뿐입니다...... 꾸벅(댓글1)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청포장수가 누구인지는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습니다만^^; 선생님의 바램과도 같이 그 누군가가 대인이기를, 대인의 길을 걸어가기를 저도 바래어봅니다~~(댓글2)
16. 2011.12.02
바닷가에 붙은 창으로 물이 흘러 마치 비가 오는 듯합니다. 오늘 요트란 걸 탔네요. 내일 뵙기로 한 연세 높으신 벗과 함께 먼저 탔는데, 파도가 심하게 일어 작은 요트를 삼킬 듯하니, 그 물이 마치 빗물인 양 창을 타고 흐르면서, 먼산과 바닷물의 풍광을 뒤흔들어 정체를 짐작하기 힘들게 합니다. 그림도 몽환적이지만, 삶도 몽환 속일까 하여 돌아와 숨 좀 고르고, 가만히 멀리 그 바다 쪽을 바라보는데......이제는 한밤이라 아예 어둠이 눈을 막고 있습니다. 아니 그 어둠을 이 눈이 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몽환이 아니라 '모글리'는 아닐까 생각 들기도 합니다. 늑대로 살다 인간생활을 만나지만 일곱 해나 걸려서 겨우 서서 걸을 수 있었고, 서서 걸은 다음해에 결국 세상을 떠난 소녀 이름이 아마 모글리일 겁니다. 어쩌면 갇혔다 하는 사이에 하늘의 씨, 사람(쇠랑-인격화된 밝은 태양)은 인격이란 틀에 들어가 스스로 또 다른 동물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나의 모글리......나의 하늘씨......
참고로 여기는 이제 열두 시입니다. 서울에 있다면 열심히 글 쓰기 시작하고 있을 겁니다. 요즘 평균 네 시간은 모자라는 이야기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 시 반쯤에 수면......일곱 시쯤 일어나 이리저리 꿈적거리다 나오는 게 오전 일과의 주요 부분이 되었네요......
모글리는 원래 소년인데 페북에서 오타가 나니 성별이 바뀌고 마네요. 아이구 페북 무서워!
어제 모글리 얘기를 해놓고 나니, 하다가 만 것 같아서 두어 시간 일찍 일 끝나고 돌아온 짬을 내서 좀 더 얘기를 하렵니다. 늑대소년으로 통칭되는 모글리, 늑대와는 달리 털도 없는데다 사람처럼 서서 걷지도 못하고 개구리마냥 뛴다고 해서 '털 없는 개구리'란 뜻의 '모글리'를 이름으로 받게 된 소년은 왜 그 모습에 갇히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생존의 본능과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어떤 분께서 농반 진반으로 말씀하시길, 사람세상이 평화로울려면 자기만 남고 나머지 사람이 다 사라지면 된다고 하셨다는데, 그러면 이미 사람세상이 아닌지라 제 생각에는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다고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간단합니다. 먹지 않고 살 수만 있다면 세상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께서는 또 말씀하셨습니다. 먹지 않고 살더라도 서열이나 이성과 종족간 문제 등으로 다툼은 있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저는 이야기했습니다. 그런 것도 조금만 더 생각하시면 먹고 사는 것과 절대적으로 연결된 문제가 아니겠냐고 말입니다.
그런 모습과 동작으로 먹고 사는 문제의 답을 배워온 모글리로서는 굳이 사람처럼 걸어야 하는 까닭을 납득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즉 걸어야 하는 동기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죠. 사람처럼 말하고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하는 문제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인간이 수렵과 채집 생활에서 농경과 교역생활로 넘어오는 데 수천 년이 걸린 걸 생각하면, 늑대적 생존과 인간적 생존 사이의 방법차이라는 측면에서 비록 인간적 유전요소가 아주 강하게 있었다 할지라도 모글리에게 7년은 그 차이를 넘어 새로운 생존의 틀을 익히기에 어림없는 짧은 날들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나름의 모글리를 벗어나기 위해서도 험하고도 거대한 강이 있다고 생각해 봅니다. 먹지 않고 사는 방법 말고도 사실 방법은 있다 생각했는데, 아무리 험하고 커도 저는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미친 것이겠죠? 그래도 꺾이지 않고 해보다가 죽을 겁니다. 운남 루춘绿春의 높은 산 하늘 길에서 지나온 길을 돌아볼 때면 그런 생각이 가슴 미어지게 올라온답니다.
좋아요 다섯 개만 주시면 모글리 3탄 올려볼 생각입니다.(-.-;)y-~~~
모글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를 보는 데서도 중요한 우화가 되는데, 이 얘기를 3탄으로 해 볼까 해요. 비록 모자라는 사람의 모자라는 생각이긴 하지만......
미리 말씀 못 드렸는데, 좋아요 가 여섯 개 넘으면 5탄까지 갑니다. ....(^_^)
17. 2011.12.03
일반적으로 말하길, 국민일인당 평균소득이 1만달러보다 작으면 사람들은 대개 먹고 사는 데만 몰두한다고 합니다. 먹고 산다는 말뜻이야 다양하지만, 여기서 먹고 산다는 것은 말 그대로 먹는 것을 해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1만불 이르면 먹고 사는 문제에 덧붙여 합리적 가치를 생각하고 그것을 삶의 잣대이자 생존적 절대 강령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그 이전에는 먹고 살 방법만 좀 보장되면 독재라도 좋고 비합리라도 눈감아주며 가치라는 것은 배불러터지는 소리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게 그 단계의 모글리인 것이죠. 이런 시대에 주로 활동하셨던 분들은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도 이 모글리 증상을 벗어나기 어렵답니다. 벗들께서도 현실을 돌이켜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아직까지 이런 분들은 합리의 영역에선 문제가 많은 '통치자'도 훌륭했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하게 됩니다. 일종의 시대적 삶이 가두어놓은 모글리 현상인 셈입니다. 저는 이것을 '배의 모글리'라 불러봅니다. 정치적으론 대개 통치자의 시대인 셈이죠. 이 시대는 상당히 길어서 이 증상의 단단함은 생각보다 강합니다.
합리와 효율을 잣대로 삼아 삶을 영위하려는 시대에서는 통치자가 구시대의 유물이 됩니다. 합리적 가치를 실현하는 민주적 지도자가 부각됩니다. 좀 모자란 구석이 있어도 이전의 모글리 증상을 벗어난 새로운 모글리의 시대이기 때문이겠죠. 잘 맞춰진 거대이론이 환영 받고 통치자가 아닌 '지도자'가 이 시대의 상징이 되며, 리더쉽이란 관점에서 사회를 보게 됩니다. 합리와 효율을 추구하는 방식들이 앞 시대의 생존방식을 이겨내거나 도태시켜버립니다. 저는 이것을 '머리의 모글리'라 불러봅니다. 머리의 모글리는 지도자가 아닌 통치자를 혐오합니다.
그러다가 좀 지나면 이 시대의 사람들조차 모글리로 만들어버리는 또 다른 모글리가 등장합니다. 더 배가 부른 시대라면 그렇게도 말할 수 있겠죠. 합리와 효율을 비웃으며 정서적 가치와 자아의 행복 및 감정적 안정과 신선한 문화적 충격과 참여를 잣대로 삼는 모글리가 무대의 주인공이 됩니다. 이 시대에는 거대하게 짜인 합리가 우스개거리처럼 되기도 합니다. 그걸로는 욕망이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도자의 시대도 가고 '지휘자의 시대'를 요구합니다. 이들을 이해할 수 없는 머리의 모글리는 비웃음 받으면서 억울해하고 '가슴의 모글리'가 시대를 풍미합니다. 바로 우리의 오늘날이죠.
정치에서도 세 모글리는 충돌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쉽게 이해를 못합니다. 물론 그게 모글리 증상의 특징이긴 합니다만, 재미나게도 세 모글리는 묘하게 편을 짜기도 합니다. 아무튼 정글북에서도 모글리는 결국 늑대무리로 돌아갑니다만, 거기서는 화해가 이루어지는데, 현실에선 참 어려운 듯 합니다. 이 모글리 어찌하나요? 얘기를 마저 해야 할지 말지......
상업적 모임은 늘 세 모글리들의 만남 터입니다. 이싱 일을 하면서 자주 느꼈는데, 그때마다 웃음을 참느라 늘 근엄한 척 했더랍니다....(^_^)
근엄함이 웃음을 참으시느라 그려 셨다니...... 근엄하실 땐 속으로 웃고 계시다고 생각해야 하나요? ^^(댓글)
웃고 있거나 쑥스럽거나 할 때 잘 그럽니다. 화가 날 땐 잘 웃죠. 이거 밝히면 안 되는데...(박현 선생)
윈난성 리쟝에는 담장이 없는 열린 고성이 있습니다. 뒷날 명나라 사람들은 이 고성에 담이 없는 까닭이 이 지역 토사(土司,군왕과 마찬가지인 토착 통치자)의 성씨가 나무를 뜻하는 木이어서 성에 담장을 두르면 곤(困))자가 되어 피곤하다는 뜻이 되니 성벽을 치지 않았다고 해석을 했고, 저도 한때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또 이 고성이 마치 큰 벼루를 닮았다고 해서 大研(대연)고성이라 했다는데, 저도 그렇게 믿은 적이 있었습니다. 지세를 보면 그렇게 볼 만했습니다.
그것은 본래의 뜻과 '서로 사맞지'(^ ^) 않았습니다. 뼈가 다르고 피가 다른 해석이었습니다. 이곳에 사는 나시(라히-태양의 무리라는 뜻이며, 흑나시를 가리킴)족들은 그 이름을 '이구퉈' '바구퉈' '이구찌' 등으로 불렀는데, 그 뜻은 '신이 사람에게 주신 터', '밝고 밝은 신들의 터전', '길로 이어진 신의 터전'입니다. 아무튼 이 성은 열림과 이어짐과 배움의 땅이었습니다.
지난날 다른 문화를 누리다 온 이들은 이 성에 사는 남자들이 몹시 부럽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했을 겁니다. 남자라는 동물이 먹고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빈들빈들하는 것으로 보였을 테니까요. 인류학에선 최근에야 인정되는 모계모권사회였으니, 남자들은 의무도 없고 권리도 없었던 것이죠(이 뒤에 가려진 슬퍼서 눈물 나고 감동되어 눈물 나는 고사가 많지요). 다만 그들은 자신의 문화에 맞게 노래를 배우고 그림을 익히고 역사와 천문 등의 학문과 의학과 약학 등등을 배우면서 열림과 이어짐의 길을 이어갔습니다.
그 가운데 누구나 익히는 공통과목이 시와 음악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중국의 만델라' '음악의 귀재'라 불리는 쉬안커宣科 선생이 이끄는 고악회가 이 고성 안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쉬안 선생이 좀 바뀌었다 하고 말하는 내용도 좀 달라지긴 했는데, 예전에 그는 이 음악에 대해 쉬안커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귀로 듣지 마세요. 머리로 듣지도 마세요. 가슴으로도 듣지 마세요. 저희들의 음악은 그냥 들으세요!"
물론 이 말은 쉬안 선생의 말이 아니고 예부터 내려온 이 음악의 최고 전제입니다. 이 음악의 유래 등에 대해서는 나중에 벗들과 애기 나눌 기회가 있으리라 믿고요, 오늘은 이 얘기가 모글리를 벗어나는 과제를 말하고 있다고 정리해봅니다.
당년 92세의 허웨이챵 할배께서 그런 마음가짐으로 그리 해보려고 하면서 또 연주를 하십니다. 참고로 사진은 몇 해전의 모습입니다. -이 얘기는 저녁 얘기의 앞 부분입니다. o (^_^) o
그들의 고악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귀로 들어 편안한 것을 찾는 것도 모글리다. 머리로 들어 납득이 되고 동감이 가는 것도 모글리다. 가슴을 미게 하여 감정을 움직이는 것도 모글리다. 우리 음악은 그런 모글리의 것으로 듣지 말라. 모든 것을 내려놓고 들으라."
모글리가 늑대소리를 좋아하고 사람이 글 가르치는 소리에는 진절머리를 치는 것도 하나의 갇힘이었습니다. 교향악에 젖으면 요란한 징 소리와 꽹과리 소리가 귀에 거슬립니다. 걸쭉한 소리를 좋아하다 보면 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다 교육이나 훈련 및 생활습관 등으로부터 오는 자신의 과거가 자신을 가두는 것이겠죠.
배부른 사람에게는 배고파 흐느끼는 소리가 거북할 것이며, 사회주의 혁명가는 종교적 색채의 음악을 불편해 여길 것이고, 목사에겐 라마음악이 생각에 거슬릴 것입니다. 양악을 즐기다 보면 중국 소수민족의 음악이나 몽고의 음악은 인식적 깊이에서 차이가 지는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겠죠. 그러다가 인식이 바뀌면 갑작스레 좋아하기도 하겠죠. 아무튼 이처럼 이미 과거로부터 형성된 인식의 체계도 자신을 가두는 모글리의 울타리가 되겠죠.
빠른 박자에 취하면 늦은 박자에 가슴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고, 느린 박자에 취하면 빠른 박자가 소음으로만 들려 오히려 가슴이 먹먹해질 겁니다. 감정이라는 것도 늘 모글리의 호수일 테죠.
나무와 돌이 듣듯이, 이를테면 여여자연하게 들어보자는 것이 나시 고악의 종지입니다. 나시 음악의 뿌리 가운데 하나가 도교에서 출발했으니 하고 여겨도 어쩔 수는 없겠습니다만, 그들은 흑백대전 이후로 한번도 다른 종교를 배타한 적이 없습니다. 다른 이의 지혜를 선눈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음악을 들고 35만 기마대병을 가로막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생각을 내려놓고 마음을 쉬게 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의 시를 부끄러워하고 다른 이의 시를 고귀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이 죽는 날까지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모글리는 물건과 조건과 관념에 빙의된 존재입니다. 모글리는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라고 확신하겠지만, 주인이 따로 있는 존재입니다. 그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꺼내버릴 수 있는 것들인데, 그는 그게 원래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아무튼 나는 이런 사람이야 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빙의된 모글리요 라고 하는 샘이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바람이 거친 대숲에 불어오면 대나무는 소리를 내지만 바람이 지나고 나면 그 소리도 머물지 않는다고 한 채근담 등에 빠져도 모글리입니다. 채근담은 왜 머물러 있는지요? 공수래공수거라는데 빈손인들 원래 가져온 것인지요? 모글리가 아닌 사람되는 일이야 제가 어찌 말하겠습니까만, 차는 한 잔 권해 올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묻습니다.
"저 물소 안에는 대체 무엇이 있을까?"
"그게 물소가 다일까?"
"정말 그게 다일까?"
-저 눈치 잘 봅니다. 한 눈 합니다. 벗들이 주시는 눈치에 감응씩이나 하여 모글리 시리즈 일단 그만......
페이스북 프로그램이 부족한 부분을 자꾸 드러내는군요. 본문이 잘리고......엉뚱한 사진으로 연결되고......올린 것 고치지 못하고......앞에 올린 사진과 담벼락이 느닷없이 사라지고......저만 그런가요?
사진의 물소는 1996년 홍콩의 작가가 그린 건데, 예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밖에도 이 그림이 확대되어 전시되어 있는지라 부분만 찍어서 올려본 겁니다.
고맙긴 한데, 상당히 귀찮을 듯......강아지한테도 오토바이 가르치셔야지....?
18. 2011.12.04
자사차 호의 세계화와 1997년 홍콩의 중국회귀는 큰 연관이 있습니다. 동양의 유대인이라 불리는 객가인客家人을 중심으로 세계적 특수성을 가진 자사호를 세계화하려는 움직임은 1992년 무렵 상당히 구체화되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 들어 왔습니다. 그 무렵 홍콩의 중국회귀가 확정되었고, 중국회귀 이후 공산당의 홍콩통제를 두려워한 객가인 부자들이 모든 새로운 시도를 접거나 그 가운데 일부는 재산을 처분해서 다른 나라로 옮겨가기 시작했답니다. 특히 천하를 집으로 여기며 삶의 근거지를 옮기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삼묘三苗(그들은 비록 한족으로 분류되지만 스스로는 우리와 혈통적으로 통한다고 강하게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의 후예를 자처하는 그들은 매우 기민하게 근거지를 옮겨갑니다. 싱가포르와 캐나다 및 미국을 비롯하여 세계 각지로 연고에 따라 옮겨갔는데,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오늘날 말레이시아의 부흥의 한 면에는 분명 그들의 기반이 작용하고 있다 하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자사호의 세계화 시도도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 세계적 특수 도자기이며 전세계인의 사랑을 받을 가능성이 매우 큰 자사호의 세계화가 크게 좌절되었고, 그 이후 이런 시도는 몇 가지 까닭으로 본격적으로 시도되지 못했습니다. 먼저 객가 인들처럼 차문화와 도자문화를 제대로 알면서 그것을 국제무대에 등장시킬 다른 대안 주체가 마땅치 못했습니다. 실제로 대륙 인들은 전자는 세계에 내놓을 수 있어도 아직 자신의 문화를 세계화시킬 능력과 안목은 부족한 게 사실입니다. 다음으로 대륙의 자사호 시장이 너무 크고 빨리 성장해서 세계화에 대한 강력한 욕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자사호의 세계화라는 엄청난 잠재시장은 거의 공백상태에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홍콩이 반환되자 중국 공산당정부는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홍콩을 특별지구로 지정 강력한 중국화를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곳을 대륙 개발을 위한 도구로 활용했으며, 세계적으로 중국의 포용력 있는 정책을 보여주는 도구로 활용했습니다.
그러기를 15년 가까이 했고 효과를 충분히 누렸던 중국정부는 이제 홍콩의 중국화를 암암리에 진행하고 있습니다. 금융방면에서부터 통제력을 강화하고 있으며 다른 영역에서도 그런 조짐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객가인들의 예측이 늦게나마 옳았던 것이죠. 실제로 홍콩에서는 이제 옛 서구적 홍콩의 모습이 조금씩 지워져 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많은 서양인들이 홍콩을 활보하고 있지만, 주된 흐름은 왠지 광저우나 상하이와 닮아가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분위기 자체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홍콩을 자주 출입하는 분들은 쉽게 느낄 정도입니다.
아무튼 이 과정에서 놓여버린 자사호의 세계화, 우리도 기여할 바가 있을까 여겼는데, 이번 출장으로 재미난 일이 진행될지도 모르겠습니다....사진은 그냥 홍콩의 한 모퉁이, 예술관 뒤편이고요. 마지막 약속 잘 매듭짓고 돌아오는 길에 배가 불편해 잠시 서있다가 찍은 것입니다. 사진은 딱 그것 한 장뿐이네요....
선생님.. 객가인이란 말은 종종 들어왔지만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합니다. 검색을 해봐도 제대로 나와있지는 않고요.. ^^; 그들과 관련해서 말씀을 들을 수 있을까요..? 그들의 혈통이든지 역사 등도 궁금하구요.. 보이차와 자사호와 관련해서도 그들이 차지하는 비중.. 지위랄까요.. 뭐 이런 간단한~~^^것들을요..(정승국 선생)
객가인에 대해서는 따로 얘기할 기회가 있을 듯합니다. 간단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싱가포르의 리콴유李光耀도 객가인의 한 사람인데, 그가 한국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진 것도 그런 점과 무관하지는 않다고 합니다. 그의 국부펀드가 한국에 상당한 투자를 진행하는 이면에 이런 점도 작용하고 있다고 말하는 그의 측근도 있답니다. 말레이시아에는 주석공예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셀랑고르라는 회사가 있는데, 원래 푸젠성 산토우山头에서 온 정郑씨 성을 가진 객가인들이 세우고 아직까지 운영하고 있지요. 뿐만 아니라 세계적 부호인 리카이싱李嘉诚도 객가인이죠. 뿐만 아니라 타이완과 홍콩 등에서 차산업을 주도한 중요인물들도 대부분 객가인들 이랍니다. 그들의 비중은 동양의 베니스상인에 비해 남음이 있고, 그 가운데 일부는 로스차일드를 생각나게 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배경에는 객가인 특유의 문화가 있다는 것도 우선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들의 유래나 연원에 대해서는 좀 복잡한 이야기 있어서 공항에 대기하면서 쓰기는 좀 그렇습니다......(박현 선생)
홍콩에서는 저도 객가인 대접받고 있답니다. (박현 선생)
19. 2011.12.05
이번에는 안 사라질지 궁금해 하면서 같은 걸 또 올려 봅니다.
浪淘沙-李煜
창밖엔 비가 주룩주룩 봄날은 가는구나
능라이불로도 오경의 추위를 감당키는 어려운데
꿈속에선 이 몸뚱이 客인 줄도 모르고 그 한 순간엔 환락을 탐하는구나
혼자서 난간에 기대어 기다리지 말라
끝없는 산과 물 헤어짐은 쉽고 보기는 어렵네
흐르는 물에 꽃이 떨어지니 봄은 갔구나
아 天上人间!
아마도 가장 오랫동안 유행했던 유행가 가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당나라때부터 마오쩌뚱때까지...제목이 참 옮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몸은 이미 포로로 잡혀 유폐된 당나라 후주後主 리위, 부질없는 욕망과 꿈은 아직도 그의 삶의 언저리를 떠돌지만, 돌이켜 생각하니 이미 모든 것은 지나간 일임을 깨달았을테죠. 모든 것을 접어도 삶은 아직 봄이 지나간 것일 뿐, 선택은 두 가지였을 듯합니다. 완전한 좌절과 새로운 희망, 사실 그런 비슷한 상황이라면 이 두 가지는 늘 복잡하게 공존하겠지만, 그 가운데 살아 있는 이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희망일 것입니다. 천년 동안 이 노래가 유행했고, 만리장정 말기까지 마오쩌뚱도 그랬던 모양입니다. 어디 우리라고 크게 다른 게 있겠습니까? '천상인간', 하늘에나 있을 사람, 임의대로 확장하자면 하늘 닮은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왜 어려울까요? 봄이 가는날 다 포기한 탓이겠죠. 왜 그리 일찍 접었을까요? 꿈이 욕망만큼 익지 않았던 탓이겠죠. 힘든 고통과 좌절의 상황에서 그 짝은 늘 새로운 희망이지만, 그 짝은 잘 크지 못하는 듯합니다. 여름날 지나서 그 꿈을 꾸는 이들과 벗하고 싶을 따름이니, 욕망을 꿈꾸며 난간에 서진 않겠지만, 오늘 홀로라도 꿈이익어 나를 찾아오는지 꿈을 보러 난간에 서보려 합니다....
가까이 계시면 상대방을 고통스럽게 만들 목소리와 정신을 산란하게 만들 음정 및 박자로 이 유행가를 불러드릴텐데요...
.(-.-;)y-~~~
그것도 2절까지....!
제 노래를 들으면 몸이 마른 분은 밥맛이 뚝 떨어져서 삼일동안 밥맛을 잊어버린답니다. 몸이 여유가 있는 분은 스트레스를 못 이겨 식사량이 세배로 늘어나버린답니다. 그래도요...? 노래대신 가사를 올립니다.
帘外雨潺潺, 春意阑珊。
罗衾不耐五更寒。
梦里不知身是客, 一晌贪欢。
独自莫凭栏!
无限江山, 别时容易见时难。
流水落花春去也, 天上人间
강병태 님의 "들어보고 싶은데요^^"의 댓글에 Hyun Park 님이 페북에는 없는 "몹시 안 좋아요"를 남겼습니다!
20. 2011.12.06
"이건 오빠가 즐겨 부르던 가락이 아닌가
근심이 생길 때마다 근심을 흩어버렸던 오빠의 노래.
내 근심이 문지방에 걸려 있어
집 나가면 즐겁고 들어오면 괴로워
우는 얼굴 웃는 얼굴이 뒤죽박죽
눈물은 웃음지을 때도 남아 있구나."
윈난을 대표하는 관악기의 연주자 자오리떠赵立德선생이 가끔 자기도 몰래 흥얼거린다는 옛 노래, 대체 내게는 무엇이 즐거운 일이고, 무엇이 괴로운 일일까? 내 근심은 어디에 걸려 있을까? 내게는 어떤 오빠가 있었을까? (아! 제게는 오빠가 있을 수 없었군요(^^))
누군가(?) 말하길, 다섯 가지만 들어보면, 자신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는 것과 독립적으로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고 하던데, 글쎄 어떨지요?
①당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는?
②당신에게 가장 회한이 되는 일은?
③당신에게 가장 위안이 되는 일은?
④지금 당신의 가장 큰 바램은?
⑤남들이 당신에게 가장 크게 평가하는 점은?
답이 그때그때 달라지면 어쩌지요? 답이 잘 안 떠오르면 어쩌지요? 정체불명, 뒤죽박죽! 나도 잘 모르는 내 인생! 디렉토리 정리하면 이뻐진다는데(대체 누가 그런 소리를 했을까?), 늦게라도 잘 생겼단 소리 좀 들어야겠습니다.
리쟝의 동파만신원에 세워진 신상이 원래 360여기라고 하는데, 그 모습과 확인되는 이름들의 뜻을 보면 신이라는 명목으로 삶의 디렉토리를 잘 정리해놨구나 싶습니다. 아마 우리 건국신화에 나오는 인간사 360여 가지도 그런 디렉토리일 것이라 생각해봅니다. 벗님들 가운데 이만큼 정리해놓으신 분 있으시리라 믿긴 하지만......제가 그 만신원에 갈 때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누군가의 소리, "내 디렉토리 봤으면 니 디렉토리 좀 보자, 니 디렉토리!"
강원장님께서 그런 겸양의 말씀을 하시다뇨? 강원장님 같은 분이 벗이어서 저는 정말 행복합니다.
한선생님, 종로점 6층에 멀지 않아 아름다운 사진들을 잔뜩 걸어둘 테니, 그때 꼭 봐주실 것을 미리 부탁 드립니다.
정선생님,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감사 올립니다.
2회분은 여기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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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여기에 쓰인 한 선생님은 제가 아닙니다. 어쩌다가 댓글 쓴 분의 존함까지 따라왔네요~
지금 싱가포르는 우기(11월~1월)에 접어들었고 지긋지굿했던 Haze도 이젠 막을 내렸다는(실젠 지난 10월 말부터 Haze 수치가 많이 낮아졌음) 신문보도가 오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집 창가(Condo 13층)엔 비가 계속 내리고 있습니다. 보이차 머그잔 2잔을 천천히 마시면서 어제 밤 늦게 올렸던 이 글을 다시 음미하는 동안 내내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아침에 손녀 등교 길엔 낙엽도 많이 딩굴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우리나라 가을을 방불?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