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과 비평>, 2011. 1. 2.
오래된 정원에서 열리는 축제
―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을 중심으로
맹문재
1. 오래된 정원의 향수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에 등장하는 정원은 하나의 소우주이다. 나무들과 꽃들 사이로 햇살이 퍼져 내리고, 새들과 나비들과 벌들이 날아들고, 하루 종일 개미들이 바쁘고, 징검돌 아래에 지렁이들이 살고, 쥐며느리들이 와글대고……. 정원은 우주적 질서가 지켜지는 곳, 생명체들이 우주의 흐름에 거스르지 않게 탄생하고 자라고 소멸해 가는 곳이다. 그 속에서도 치열한 생존경쟁이 있을 터이지만, 직공이 날실과 씨실을 교차시키며 천을 짜나가는 것과 같이 생태계의 질서가 지켜지는 것이다. 황석영은 그 정원의 모습을 “전처럼 감정을 아낀 문장을 갈고 다듬기보다는 그냥 수수하게 마음을 열”고 그렸다. 객지나 무기의 그늘에서 보인 남성적이고 투박한 문체가 아니라 서정적인 문체로 그린 것이다. 서정적인 문체가 장편소설의 서사를 이끌어 가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가 “모래처럼 허물어”진 시대에, “시대나 역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 물결 속에 휩쓸리며 헤엄쳐가던 하찮고 가냘픈 개인의 나날을 통해서 보아야” 하는 시대에, 1980년대적 서사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라진 그 시대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데는 서정적인 문체가 효과적일 수 있는 것이다.
황석영은 그 정원을 “갈뫼”라고 이름 짓고 주인물(主人物)인 “오현우”와 “한윤희”의 보금자리로 만들었다. 오현우가 광주항쟁에 관련되어 은거생황에 들어간 도피처로, 사랑하는 사람과 보금자리를 꾸민 터전으로, 무기수로 장장 18년이나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늘 가슴에 품고 있던 고향으로, 출옥 후 새로운 삶을 시작한 출발지로 삼은 것이다. 그러므로 갈뫼는 오현우의 오래된 고향이자 영원한 고향이다.
또한 갈뫼는 한윤희의 보금자리이고 고향이기도 하다. 여고 미술교사이던 그녀는 선배로부터 부탁 받고 오현우를 숨겨주었다가 그를 인간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녀는 운동권이 아니었지만 광주항쟁의 참극을 비디오를 통해 보고는 오현우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었고, 나아가 빨치산이던 아버지의 젊은 날까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오현우가 감옥에 가 있는 동안 그곳에서 아기를 낳았고, 그의 출소를 보지 못하고 자궁경부암으로 세상을 뜨면서도 “나는 갈뫼로 간다. 나중에 오선생님 만나면 꼭 오시라고 전해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렇듯 오현우와 한윤희에게 있어서 갈뫼는 이념들을 용해시켜 지양(止揚)을 이루는 곳이다.
오현우가 출옥 후 받은 가장 큰 충격은 한윤희가 죽었다는 사실이었다. 오현우는 갈뫼를 찾아가 사랑하는 사람이 사라진 빈방에서 갖가지 생각에 잠기다가 문득 선반 위에 놓인 보따리 하나를 발견해 풀어본다. 스무 권쯤의 노트가 나왔는데, 그가 검거된 이후 18년 동안 한윤희가 쓴 일기장과 편지들이었다. 오현우는 그것들을 읽으면서 그가 경험하지 못했던 한윤희의 시간들을 알게 된다. 그가 검거된 후 도피처를 마련해주었다는 사실이 알려져 학교와 교육청과 당국으로부터 조사를 받고, 그 후 학교 사직과 대학원 진학, 대학원에서 가장 친하게 지낸 학생운동가 송영태, 독일 유학, 그곳에서 만난 환경공학자 이희수와의 사랑과 교통사고로 인한 그의 죽음, 동서독 통일, 모스크바 여행과 송영태의 북한행, 귀국 후 지방대학 교수 생활, 자궁경부암 선고 등의 시간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감옥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모든 가치가 뒤범벅이 되고 먼저 가졌던 자들의 힘은 여전히 막강”한 현실 또한 알 수 있었다.
오현우가 자신의 딸이 있다는 사실을 일기장을 통해 알았을 때 받은 놀라움 또한 엄청난 것이었다. 딸에 대한 미안함이나 두려움도 컸다. 그렇지만 소중함과 뿌듯함으로 바뀌었는데, 그만큼 그에게 딸 “은결이”는 용기와 희망의 존재였다. 살아남은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해주는 거울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현우는 갈뫼에서 자신의 뿌리를 튼튼하게 내린다. 지렁이와 쥐며느리와 이끼와 제비꽃 등이 우주의 질서를 따라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인간다운 길을 걷기로 결정한 것이다.
2. 행형(行刑)과 일상(日常)으로부터의 탈출
황석영이 오래된 정원에서 부단하게 추구하는 것은 우선 행형 기관으로부터의 탈출이다. 행형 기관 즉 감옥은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모두 속박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그곳에 불합리하게 갇혀 있을 때 “미칠 지경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곳에는 인간다운 조건이 주어지지 않고 마치 잡아당기면 닫히고 밀면 열리는 방문과 같이 명령과 복종만이 통용된다. 때로는 무너져 가는 자신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단식을 하고 문을 차고 식기로 철창을 두드리고 욕설을 하고 투쟁가를 부르고 그리고 합법적으로 건의를 해보지만, 그것이 얼마나 미약한 것인가를 자기 연민을 느끼며 깨닫는다. 그곳은 개인을 너무나 잘 다룬다. “일제 때부터 해왔던 행형술은 그동안 전쟁과 정권교체와 세월의 변화를 통해서 수많은 경험을 쌓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언제나 새로운 카드가 있”는 것이었다.
황석영이 행형 기관으로부터의 탈출을 추구하는 것은 그의 작품의 등장인물이 노동자나 군인들이 대부분인 것과 마찬가지로 일관된 특성이다. 6․25전쟁 때 월남하여 올곧게 살아가던 “한영덕”이 주위의 시기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숱한 고문과 옥살이 당하는 「한씨연대기」나, “정씨”가 감옥에서 목공과 용접을 배웠지만 사회생활에 제대로 적응할 수 없어 고향으로 떠나는 「삼포 가는 길」, 국회의원 답사만 끝나면 파업의 주동자로 몰려 경찰에 연행될 것을 잘 알고 있는 “이동혁”이 끝까지 파업의 진을 풀지 않고 있는 「객지」, 아홉 번이나 갖가지 일로 감옥을 드나들었지만 끝내 철거민과 은성학원 출신의 아이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우는 어둠의 자식들 등이 그러한 것이다.
그러면 행형 기관으로부터 탈출하여 지향하고자 하는 곳은 어디인가? 그곳은 다름 아닌 고향, 즉 인간다운 삶이 영위되는 세계이다. 단순히 한 인간의 출생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비옥한 땅은 남아 돌아가구, 고기도 얼마든지 잡을 수 있”(「삼포 가는 길」)는 곳으로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평화롭고 궁핍하지 않고 자유가 보장되는 세상인 것이다. 오래된 정원에서의 그곳은 당연히 갈뫼이다.
너른 들판에는 보리가 자라나 바람에 물결치듯 출렁이고 있다. 들판 맞은편 언덕 위에는 소나무들이 구부정하게 서 있는 작은 솔밭 언덕이 보이고 내가 걸어가고 있는 이 길은 휘어져돌아 언덕 옆으로 해서 멀리 보이는 개천의 다리를 건너 산 뒤편에 구부러져 있다. 길 양편에 드높은 버드나무들이 줄지어 섰는데 가지가 출렁거리고 나뭇잎들이 바람에 나부껴 반짝이는 배를 드러낼 때마다 나무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너른 들판”과 “나무들의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갈뫼. 그곳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작품의 분위기와 인물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주는 배경으로 작가의 이상향이 담겨 있다. 따라서 갈뫼의 긍정은 인물 행동의 긍정이고 작품 주제의 전망이 밝은 것이다. 오현우가 18년 동안 감옥에서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지켜낼 수 있었던 것도, 한윤희가 혼자 아이를 낳고 운동권을 돕고 사회주의의 변화를 목격하고 그리고 세상을 뜨기까지 사랑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도, 그 갈뫼를 가슴에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갈뫼를 긍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을 긍정할 수 있었고, 행형 기관으로부터의 탈출에 대한 전망도 밝게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황석영이 그리고 있는 갈뫼는 ‘있는’ 현실을 재현한 것이라기보다 이상향으로 삼고 있는 ‘있어야 하는’ 세계이다. 그러므로 갈뫼는 추억의 대상이거나 현재적 장소라기보다는 미래의 공간이라는 상징성을 갖는다. 상식적 진실이 아니라 당위적 진실이 구현되는 곳, 시대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책임감을 갖고 설정한 곳이다. 따라서 갈뫼는 작가가 소유하고자 하는 장소이면서 이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소유할 수 있기를 작가가 기대하는 장소이다. 정의의 인격이 억압당하고 유린당하는 감옥으로부터 탈출해 이르고자 하는 유토피아인 것이다. 그 의지는 일상으로부터의 탈출로까지 확장된다.
황석영이 오랜된 정원에서 추구하고 있는 또 다른 지향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다. 그것은 “내가 할 일이 아직도 남아 있을까. 아마도 일이 남아 있다면 그건 바로 일상과의 씨름이다.”라는 오현우의 태도에서 여실히 확인된다.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은 감옥으로부터의 탈출과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다.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일상은 또 다른 감옥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물신의 세계가 지배할 테지. 시장은 모든 지구 사람들에게 동일한 생산양식을 강요하고 망하지 않으려면 이게 문명이니까 받아들이라고 들이댈 거야. 누구나 번들거리는 크리스털 눈알이 되어 아무런 상상력도 없이 돈에 반응하는 상품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지두 몰라.
현대인의 일상은 자본주의가 정해 놓은 규준에 의해 짜인다. 자본주의가 효과성 차원에서 중요하게 설정해 놓은 가치 기준에 적응하면서 살아가느라 바쁘고 피로하고 불안하다. 매일 반복되는 출근, 육체적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업무, 계약관계로 만나는 사람들……. 그 생활에서 시간의 절약은 곧 돈의 절약을 의미하고, 시간의 계획은 높은 생산성과 이윤 추구에 있어서 필수 요건이고, 생산에 기여하지 못하거나 소비된 시간은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긴다. 현대인은 이 시간을 잃지 않기 위해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애를 쓰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일상으로부터 밀려난다는 것은 실직이나 퇴직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단순히 돈을 벌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를 상실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일상을 아주 지겨워하면서도 그것으로부터 밀려날까봐 전전긍긍하는 것이다. 때로는 프로야구 경기를 구경 가고, 고스톱을 치고, 주말여행을 떠나지만 여전히 일상이 꼬박꼬박 고지(告知)하는 지시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임을 현대인들은 잘 안다. 결국 대량생산으로, 바겐세일로, 신형 모델로, 색상으로, 광고로 끊임없이 소비자를 유혹하고 자극하는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에 주체적으로 대항하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대인은 어느덧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감옥을 스스로 견고하게 지키는 상황에 처한다. 마르크스(K. Marx)가 진단했듯이 생산물과 생산과정으로부터 소외당하고 그것을 넘어 유적(類的) 존재로부터 그리고 인간으로부터도 소외당하는 것이다.
황석영은 이러한 일상의 감옥에 갇혀 있는 현대인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오래된 정원에서 갈뫼를 내세우고 있다. 일상은 고도로 발달한 산업사회의 특성이다. 아침에 일어나 밭에 나가 일을 하고 저녁이면 돌아오고, 또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이 되면 추수를 하는 일이 해마다 계속되는 시대의 사람들은 현대인들처럼 지루하거나 불안하지 않았다. 갈뫼라는 곳은 자본주의 논리가 통용되지 않고 지극히 평온하고 따스하고 풍요롭고 그리고 인간과 인간의 정이 오고가는 곳이다.
도시에서 놀러온 사람들은 산촌의 정적과 언제나 변하지 않는 풍경에 며칠 못 가서 진절머리를 내고 제풀에 지쳐 달아나 버려요. 하지만 눈을 뜨고 자세히 둘러보면 자연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살아서 움직이는 중이어요. 풀과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데, 가는 바람에는 포르르, 잔바람에는 살랑살랑, 거센 바람에는 휘청휘청 눕거나 펄럭이거나 몸부림을 치지요.
“끊임없이 변화하고 살아서 움직이는” 갈뫼. “포르르”, “살랑살랑”, “휘청휘청”, “펄럭” 등의 의성어나 의태어에서 볼 수 있듯이 그곳의 생물체는 환경에 제 나름대로 적응하고 있다. 르네 듀보(Rene′Dubos)가 분류한 적극적 적응의 모습인 것이다. 적극적 적응은 주어진 환경에 수동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적응할 만한 가치가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환경에 지배당하는 순응이 아니라 타락한 환경을 개선하고 극복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풀과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 자체를 적극적 적응이라고는 볼 수는 없지만, 풀이나 나뭇잎이 인간처럼 스스로 행동할 수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포르르” “살랑살랑” “휘청휘청” “펄럭” 등의 살아 있는 모습은 환경에 최대한 적응하는 행동으로 볼 수 있다. 황석영은 이 적극적인 모습을 통해 “변하지 않는 풍경에 며칠 못 가서 진절머리를 내고 제풀에 지쳐 달아나”는 도시인들을 반성시키고 있다. 자본주의의 지시를 받아온 도시인들은 스스로 움직이기보다 움직이도록 조종당해왔기 때문에 “산촌의 정적”에서 변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또 변화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고 “달아나 버”린다. 황석영은 그것을 주체적으로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갈뫼는 자본주의의 타성에 젖어 있는 일상인들을 일깨우는 곳, 자기 감옥으로부터 탈출해야 한다는 당위적 진실이 깔려 있는 곳이다. 이 점에서 오래된 정원은 지난 시대 민중의 아픔을 외치던 작가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맹위 앞에서 보인 소극적인 자세와 다르고, 장자(莊子) 등을 찾는 정신주의나 인터넷 시대의 도래로 등장한 사이버문학과도 다르다. 앙리 르페브르(Henri Lefebvre)가 분류한 강제된 시간으로부터, 즉 일상으로부터 현대인을 탈출시켜 축제를 지향하는 것이다.
3. 축제의 지향
현대사회는 일상의 가치들이 지배하는 바람에 축제가 사라졌다. 현대사회에서 벌이는 축제는 농경사회에서 벌이는 것과 거리가 멀다. 농경사회에서의 축제는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이야기꾼의 존재에서 말했듯이 자신의 고향에 눌러앉아 정직하게 생업을 꾸려가는 사람들이 자기 마을의 전설과 조상을 자랑스레 이야기하고 술을 마시고 춤추고 노래 부르는 공동체의 장(場)이었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축제는 행정부의 지도와 형식, 이벤트 업체의 돈 냄새가 풍기는 행사에 불과한 것이다.
축제는 일상의 가치들과 단절될 때 이루어진다. 규범과 제도에 의해 유형화되고 경제성 원칙에 따라 평가되고 조종당하는 일상으로부터 벗어난 자연적인 것이어야 한다. 자본의 가치가 요구하는 이해관계에 따라 경쟁하고 그 결과 자기로부터 소외당하는 일상으로부터 벗어날 때, “이 도시가 모두 소모시킨” 개인의 자유가 회복될 때, 축제는 성황을 이루는 것이다.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은 그 축제의 양식이다. “민주노조 건설하여 노동해방 쟁취하자!/천만 노동자의 단결투쟁 승리 만세!”
이러한 투쟁의 외침을 축제의 모습으로 볼 수 있을까? 당연하다. 모든 투쟁과 혁명은 축제의 성격을 띤다.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경제적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진정한 휴머니즘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폭력적이건 비폭력적이건 그 실천행동이 필요하므로 축제성을 띠는 것이다. 노동자들과 대학생들이 화염병을 던지며 구호를 외치는 행동이 축제 자체를 위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을 구속하는 이념과 제도에 대항하는 것이므로 축제성이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민주노조 건설하여 노동해방 쟁취하자!”와 같은 구호는 축제의 노래로 볼 수 있다. 빨치산이었던 한윤희의 아버지가 마지막 눈을 감으면서 “우리는 누리에 붙는 불이요 철쇄를 마스는 망치다 희망의 푯대는 붉은 기요 외치는 구호는 투쟁뿐”이라고 노래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단식을 통고하고 준비된 성명서를 읽고 밖으로 향한 화장실 창살에 매달려서 표어처럼 단어마디가 딱딱 끝나는 문장으로 샤우팅을 하고 투쟁가를 부르고, 목이 가라앉고 침이 마르면 식기를 가져다 창틀에 요란하게 부딪치면서 이쪽이 비상사태임을 전 사동에 알리고 마지막으로 감방의 철문을 차기 시작한다.
와 같은 행동도 축제적이다. 진정 “혁명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환멸에 치를 떨게 된다 할지라도 피부를 찌르는 듯한 전율로 나는 살아 있다고 중얼거리게 하는 사업.”인 것이다.
축제는 개인적이라기보다 연대적이다. 사람과 사람이 또 사람과 자연이 어울리지 않는다면 축제는 성립될 수 없다. 그리하여 축제는 일시적이면서도 지속되고 비조직적이면서도 조직적이 되고 우연적이면서도 자기화된다. 감정적이고 비조직적이고 불안정하지만 제도적으로 확립된 것 이상으로 사람과 사람 간에, 사람과 자연 간에 상호작용이 나타난다. 축제에서는 일상에서 매겨진 지능과 사회적 위치와 직업이 문제되지 않는다. 타인에 의해 평가받지 않고 스스로 타인에게 감염되고 동화된다. 자신의 신분증을 자발적으로 버리고 타인과 함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축제에 가담한 사람들은 집합적인 행동을 보인다. 자신의 이익을 고집하지 않고 전체의 가치를 기꺼이 수용하는 것이다. 그 수용 정도는 일상생활을 벗어나려고 할수록 달리 말해서 부당하고 모순된 사회 상황을 인식하고 극복하려고 할수록 큰 것이다.
오래된 정원에서 보이는 노동자계급의 투쟁과 학생 운동 그리고 광주민주화 항쟁의 열렬한 외침은 진정 축제의 모습이다. 오현우가 실행한 단식과 저항의 행동 또한 그러하다.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으로 “국가 권력에 대하여 변화와 개혁을 들이대고 이름 없는 사람들의 집단이 서로 연대하며, 아이들의 땅뺏기놀이처럼 그침 없이 한 뼘 두 뼘 자본이 남겨먹은 것들을 되찾아 실질적인 평등의 단계로 영역을 넓혀나가”려는 것이다.
오래된 정원에서 축제를 벌인 이유는 인간다운 삶을 억압하는 행형의 감옥으로부터 그리고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일상의 감옥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것이다. 그 해방구의 상징이 갈뫼이다. 인간과 인간이 그리고 인간과 자연이 함께하는 곳으로 과거가 포용되고 현재의 토대가 마련되고 미래의 희망이 놓여 있는 곳이다. 따라서 갈뫼는 작가가 선정한 주소지에 그치지 않고 축제에 참가한 사람 누구나 함께 소유하는 곳이다. 누구나 들어갈 수 없는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아니라 누구나 개척할 수 있는 지상의 땅이다. “자신의 힘에 관한 지식을 획득해서 이들 힘을 사회적 힘으로 조직하고, 그러한 사회적 힘을 더 이상 정치적 힘의 형태로 자신과 분리시키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해방을 실현시킬 수 있”는 곳이다.
갈뫼는 일상의 가치를 극복한다는 점에서 창조적인 장소이다. 수치로 말할 수 없는 희망과 두려움, 사랑과 증오, 호평과 악평이 생생하게 널린 공간이다. 밀폐되고 고립된 곳이 아니라 모든 이들이 서로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마을이다. 따라서 갈뫼를 그린 양식 또한 서술하거나 묘사하는 데 치우치지 않고 주제와 문체가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통일성을 ‘여러 사건의 부분은 그 중 하나를 전치시키거나 제거하면 전체가 지리멸렬이 되게끔 구성하는 것’으로 보았는데, 오래된 정원의 등장인물들은 시대성과 개인의 내면적 갈등이 겉돌지 않고 서로 밀도 있게 형상화되어 있다. 결국 갈뫼에서 벌인 축제의 양식은 자본주의를 반성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갈뫼를 그리는 양식은 차갑기도 하고 따스하기도 하고 명령을 가진 시니피앙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센티멘털하게 호소하기도 한다. 열정적인 물로 나타나기도 하고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인자하게 앉아 있는 산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면서 인간다운 삶을 꿈꾸는 전망은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갈뫼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궁핍하지 않고 자유가 보장되는 유토피아(Utopia)이다. 유토피아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지만, 작가는 그 희망을 결코 포기할 수 없음을 축제의 열정으로 보여주고 있다.
황석영의 유토피아를 향한 희망은 욕심이 아니라 욕망이다. 라캉(J. Lacan)이나 노자(老子)가 얘기했듯이 욕망은 본질적으로 결핍에 의해 생긴다. 욕심처럼 소유하지 않고 타자와의 차이 속에서 자신을 접목시킨다. 차이의 대립이 아니라 연기(緣起)의 관계를 맺고 늘 결핍의 존재로 타자성을 향하고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그 욕망은 채워질 수 없는 것으로 기표(은유)로 나타나는데 오래된 정원에서의 갈뫼가 그것이다. 부재가 현전으로, 시간이 공간으로, 재귀가 출발로 변모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리하여 자본주의가 지시하는 일상으로부터 자신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해 되돌아보고 있다. 지난 시대의 운동권에 대한 그리움과 동정을 근거로 일상생활에 찌들어 있는 자신을 경계하고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도가 있기 때문에 18년간의 형기(刑期)를 마치고 출옥한 오현우의 연대기보다 일상생활을 영위한 한윤희의 삶이 작품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시대와 사회의 변화를 운동권 출신인 오현우의 시선에서가 아니라 비운동권인 한윤희의 시선에 의해서 포착되고 있어 운동권의 후일담이 아니라 그 진정성이 결코 폄훼될 수 없음을 객관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버티어왔던 가치들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아직도 속세의 먼지 가운데서 빛나고 있”는 것을 내보이고 있는데,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한국의 민중운동이 침체하여 그 전망은 어둡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일상의 감옥에 갇혀 있던 한윤희가 오현우를 거울로 삼고 자각하면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 지향을 위해 오현우는 자문한다. “당신은 그곳을 찾았나요?” 그리고 대답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오.” 오현우가 출옥 후 갈뫼를 찾아 엿새를 묵고 떠나는데, 그 떠남을 오히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는 사실은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 따라서 오현우의 길 떠남은 새로운 인간세계에서의 축제를 지향하는 것이다. 이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체제를 넘어 제3의 길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고집이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생산성의 신화에 사로잡힌 채로 시작한 건 마찬가지요. 풍족한 사회, 풍족함이 순간적인 일에 낭비되는 사회는 세계 전체의 모델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생산성의 원리에 휘둘리지 않는 그곳 갈뫼가 바로 오래된 정원이다. 그 오래된 정원에서 행해질 축제를 위해 “지상에서 비롯된 새벽의 삶을 회복하기 위해서 지상에서 세워진 한낮의 모든 허섭스레기 같은 제도를 부숴버리는 일”을 오현우는 하고 있는 것이다.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 고찰」이란 제목으로 2005년 안양대 인문과학연구소에서 간행한 『인문과학연구』에 발표한 글임)
맹문재
시론집으로 『한국 민중시 문학사』『패스카드 시대의 휴머니즘 시』『지식인 시의 대상애』『현대시의 성숙과 지향』『시학의 변주』『한국 현대시문학사』(공저)『한국 현대시사』(공저) 『현대시론』(공저) 『시론』(공저), 편저로 『박인환 전집』『김명순 전집』 등이 있다. 현재 안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