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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남님의 글로 고산증세가 어떠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글이라 퍼 왔습니다.
한 삼 년 전쯤 이었을까. 나는 안나푸르나와 에베레스트 칼라파트라를 다녀온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누구보다도 고산에 대한 어려움과 고생의 크기 만큼 희열감도 높다는 것을 잘 안다. 이것이 나를 다시 아프리카 킬로만자로로 향하게 한 힘이다. 이번에는 막역한 형 아우 사이인 한국열관리시공협회 김병규 회장도 동행한다. 우연히 저녁식사 자리에서 아프리카 킬로만자로 등산 얘기를 했더니, 같이 가겠다며 나선다.
날짜를 잡으니 이래저래 시간이 잘 간다. 3년 전 체력은 어느새 동이 났는지 예전 같지 않다. 체력을 키우는 데 전력투구 해도 모자라는 시간이지만, 주위 상황은 이런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술 마시는 행사는 줄을 섰고, 결국 출국 전날까지 ‘만땅’으로 취했던 것 같다.
드디어 출국 당일인 7월 12일. 저녁 8시까지 인천공항 집결장소로 나가니, 먼저 와 기다리던 김 회장이 반긴다. 일행과 대충 눈인사를 나누고 박대훈 대장의 설명을 들었다.
이번 등반은 모두 17명이다. 안나푸르나 때는 세 명으로 단촐했는데, 그보다 인원이 많아 걱정스러움도 밀려온다. 부부 동반은 물론 아들과 함께 가는 엄마, 혼자 오는 중년…. 정말 그 모양새를 보면 그냥 중국 황산 정도 가면 딱 좋을 것 같다. 옆에 있던 김 회장도 투덜거린다. 물이 안 좋다며.
비행기가 이륙한다. 다행히 대한항공 직항으로 운행된 지 한 달밖에 안되서인지 여행객이 적다. 13시간 동안 어떻게 날라갈까 걱정이었는데, 자리 걱정은 없다. 기내식을 먹으니 와인을 준다. ‘곱배기’로 달라고 하니 승무원이 웃는다. 연거푸 세 잔을 마시니 조금은 알딸딸해진다. 그래도 성이 안차 인천공항에서 산 소곡주(40도 짜리)를 꺼내 마시고서야 잠이 든다. 눈을 뜨니 세 시간 후며 케냐 나이로비 공항에 도착이란다. 대략 7시간을 잔 것 같다. 한국과 케냐와는 6시간 시차다.
도착해 입국 심사장으로 간다. 공항 통로가 온통 얼룩말 사진으로 도배돼 있는 것을 보고 아프리카에 와 있음을 실감한다. 비자비로 50달러를 달란다. 심사를 마치고 세관검색대를 통과하려고 하니 뚱뚱한 세관 아줌마가 가져온 가방과 함께 카고백 전부를 열어보란다. 옆 통로는 그냥 통과하는데…. ‘어디 가나 줄을 잘서는 것이 세상사 이치인가 보다’라고 생각할 때 박 대장이 나타난다. 단체로 먹을 식량박스도 열어보란다. 난감하다.
그 다음날인 13일 아침 7시쯤 공항 밖에 나오니 봉고보다 좀 큰 버스가 서 있다. 주차가 몹시 무질서하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박 대장이 서로 자기소개를 하잔다. 얼마 전 배링해협을 횡단한 윤 대장도 등반객으로 혼자 왔다. 인천공항에서 본 모습과 달리 역시 관록들이 대단하다. 난 앞자리에 탔는데 뒤쪽 부부가 떠들썩하다. 육두 문자는 기본이고 부부 간 밤에만 할 소리도 거침없이 해댄다. 참 호탕하고 재미있다. 나중에 문제를 일으키긴 했지만.
오늘은 탄자니아로 가기 위해 나망가라는 국경으로 이동해야 한다. 얼마쯤 왔을까. 15년 전쯤 중국에 갔을 때의 어수선함이랄까. 우리네 70년 초의 촌락마을의 장터 같은 아프리카의 정취를 느낀다. 휴게소다. 잠시 쉬었다 가잔다. 뒷마당에 가보니 숯이 한 포대 있다. 나중에 알았지만, 케냐는 대부분 숯으로 취사를 한다. 황폐한 우리나라 60년대 산림녹화가 생각난다. 특이한 건 숯뿐만이 아니다. 여인들 엉덩이가 미(美)의 기준이란다. 엉덩이가 큰 ‘빅마마’가 단연 일등 미인. 영화에서 보았던 덩치 큰 아줌마가 마당에 서 있다. 일행 모두의 시선은 ‘와’ 하고 그 아줌마에게 꽂혔다.
한 세 시간쯤 왔을까. 케냐와 탄자니아 국경검문소인 나망가다. 마사이족 할머니들이 조각, 목걸이를 가져와서 사달라며 끈질기게 들이민다. 우리 일행은 들은 척도 않는다. 초입에서 물건 사서 가져갈 수도 없지만 마음에 여유도 없다. 일행 중 한 명이 검문소 주변을 사진 찍은 것 같다. 총 든 순찰병이 와서는 카메라를 보면서 삭제하라고 윽박 지른다. 얼른 삭제하니 병사가 다시 확인한다.
전자로 지문날인도 한다. 여권에 출국도장을 ‘꽝’ 찍어준다. 세 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했는데, 바로 출국이라니…. 문 열고 한 20미터나 왔을까. 이번에는 탄자니아국경이란다. 여기서도 50달러 내니 입국비자를 준다. 그런데, 정작 국경을 통과할 때는 아무도 인원수와 여권을 확인하는 사람이 없다. 좀 허망하다.
탄자니아의 끝없이 황폐한 벌판길을 한없이 간다. 차장 밖은 이미 경작 후 말라 죽은 옥수수 밭이 어린 마사이족이 몰고 가는 마른 양떼와 겹쳐 몹시 불쌍하고 측은하다. 작년에 MBC에서 방영한 환경다큐 ‘아프리카의 눈물’이 생각난다. 우리의 몰상식한 자원낭비가 지구의 온난화를 일으킨다는데, 고통받는 원주민이 그 이유를 알면 분개할 것 같다.
아루샤라는 도시가 가까워지는 가보다. 주요소, 상점, 특히 노천 병맥주집이 즐비하게 거리에 줄을 잇는다. 숙소인 인펠라호텔에 도착하니 제법 손색없는 호텔이다. 작지만 수영장과 뷔페 식당도 있고 방도 기대 이상이다.
시원한 맥주 한 잔이 생각나는 차에 막내인 태훈이가 맥주를 마시겠단다. 한 잔 사겠다며 일어서는데, 봉고 버스에서 본 육두 부부 중 남편이 맥주 20병을 쏘겠단다. 이런 감사할 수가…. 여기도 맥주값은 병당 삼천 원. 쏘는 이유는 오늘 결혼했단다. 부인도 혼자 왔는데 자기도 혼자와 공항에서 만나 부부하기로 했다나 뭐라나…. 아무튼 좀 혼란스럽지만, 맥주 맛은 기가 막힌다. 칼칼하던 목구멍을 시원하게 적셔준다. 상표도 킬로만자로 비어다.
점심을 먹는다. 아프리카에서 처음 먹는 밥이다. 근데 제법 맛이 좋다. 집밥이나 다름없다. 식사 후 어수선한 시내를 한 바퀴 도보로 투어하기로 하고 호텔을 나서니 정신이 없다. 차량도 많고 먼지도 많고. 그 중 제일 많은 것은 코카콜라 광고 간판. 한 10m에 하나씩 아프리카 전체에 도배한 것 같다. 공정무역이니 하지만 이미 자본침략 광경을 보니 전쟁터와 같다.
길거리에는 많은 작은 나무가 비닐 봉지에 담겨져 키워지고 있다. 비닐을 보니 상당히 오래 방치된 것 같다. 나중에 보니까 다 주인이 있는 묘목 상가다. 누가 사가는 흔적이 없는데…. 주유소 휘발유값이 경유값과 차이도 없으면서 대략 1,600원 정도하는 것 같다. 상당히 비싸다. 가로등에 낼모레 나이트클럽에서 댄스퀸 선발한다며 광고지도 붙어 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똑같은 것 같다.
저녁 먹고 지루할 즈음 로비에 나가보니 한국 사람들로 시끌벅적하다. 다른 여행사에서 온 팀인데, 나이로비 직항 대신 환승하는 좀 싼 항공으로 왔단다. 이번 경비는 우리보다 오십만 원 정도 싸단다. 이번 일정 중 최고인 암보셀리 국립공원사파리에 있는 롯지에서도 못 잔다니 후회가 클 것이다. 가짜 결혼한 그 육두 부부의 웃음소리에 밤은 깊어진다. 서울을 출발해 첫 밤이다. 하루에 3개국을 거쳐 온 굵고 긴 여정이다. 내일부터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된다.
14일 아침이다. 서둘러 호텔을 출발한다. 산행의 시작인 마랑구게이트까지 가는 중간에 화장실도 갈겸 휴게소에 들린다. 길 옆에서 양고기 통다리를 불에 굽고 있어 침이 ‘꿀꺽’ 할 때 전통복장을 한 동네 할머니가 보인다. 74세란다. 가져간 폴로라이드 카메라로 찍어주겠다고 하니 아주 좋단다. 찍고 마를 동안 필자와 디카로 한 번 찍자고 하니 고개를 돌리고는 웃지도 않는다. 나중에 보니까 초상권 1달러를 못받아 화났다고. 중간에 루루라는 현지 가이드가 옆에 동승한다. 잘생긴 데다 능글맞다. 김병규 회장이 비타민을 주길래 ‘비아그라’라고 하니까 아주 감격한다. 모레 밤에 꼭 쓰겠다며 능청을 떤다.
모시라는 도시 재래시장에 잠깐 들른다. 동내 아줌마 몇이 과일을 팔길래 디카를 들이대니 버럭 소리를 지른다. 초상권이 무조건 1달러란다. 오는 내내 적용되니 꼭 참고해야 봉변을 당하지 않는다.
동네 어귀가 소란스럽다. 악대 나팔과 의사의 흰 가운을 입은 백여 명이 노래 부르고 박수치며 야단이다. 대체 이 행렬은 무엇일까. 가이드가 기독교 부흥회란다. 드디어 오르막이다. 산으로 가는가 보다. 바오바브나무가 보인다. 무지하게 크다. 오백 년 되었다는데 사람이 개미만 하다.
해발 1,970m 마랑구 게이트가 보인다. 입산 수속하고 점심은 지붕만 있는 노천에서 요상한 도시락으로 때운다. 현지인들이 자꾸 모자 같은 것 사란다. 아무도 사지 않아 미안한 마음으로 삶은 계란을 주니 고맙단다.
이제 출발이다. 입구에서 등정을 기원하는 파이팅을 하고 올라간다. 숙소인 만다라산장까지는 한 세 시간 걸린다고 이정표에 써 있다. 열대림 속으로 들어간다. 우리네 까마귀 같은 새가 겁도 없이 다가온다. 몽구스도 있다. 내가 아프리카이 와 있는 실감이 조금 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가는데 일행 중 ‘엄마야~’ 하고 소리를 지른다. 어디서 개미를 만났는지 몸 속에 여러 마리가 요동친다. 발밑을 보니 길바닥에 아주 작은 개미가 무지하게 많다. 혹, 전쟁개미가 아닐런지.
오후 네 시쯤 2,720m 만다라산장은 안개 속에서 웃고 있다. 우린 한 쪽 켠 산장 한 채를 사용한다. 인종 전시장 같다. 흑백에 노랑과 동서양이 다 모여 있다. 그 가짜 부부의 부인은 유창한 일본어로 일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눈다. 넉살도 좋다. 잠시도 못 있는다. 또 이번에는 독일 사람과 대화 중이다. 넘 오지랖이 넓다. 저러면 지칠 텐데 좀 걱정스럽다. 이와 등급이 비슷한 아줌마도 좌충우돌이다. 눈에 거슬린다. 암튼 국내나 히말리아에서는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어수선함이 곳곳에 있다. 한 팀에 사람이 넘 많아서인가.
저녁 전에 누가 오징어 무침을 꺼내 놓는다. 서울서 가져 온 소주 한 병과 맥주를 말아 소맥을 돌리니 그런대로 재미가 있다. 저녁으로 나온 옥수수 죽이 제법 맛있다. 17명과 이번 등산 가이드, 쿡까지 43명이 동원되었단다. 이 산에서 정식으로 활동하는 인원이 한 오백 명 정도 된다니 등산이 일자리 창출에 크게 기여하는 것 같다.
지리산 산장과는 구조가 다르다. 나무로 된 좁은 개별 침대다. 산장 구조가 다 그렇다. 난 아래층에 김병규 회장은 이층에 자리를 잡았다. 그래도 여기는 남녀 칸이 나눠져 있지만 다른 산장들은 구분할 수도 없다. 방귀도 뀌고 이도 갈고 코도 골고, 자존심은 이제 필요없다. 침낭 깔고 자다 소변이 마려워 새벽에 조용히 밖으로 나온다. 하늘을 올려다 본 순간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진다. 그야말로 별천지다. 수많은 별들이 내 머리 위로 우수수 떨어진다. 정말 은하수도 있다. 이런 풍경이 정말 얼마만인가. 오줌 누는 것도 잊어버린 채 멍하니 하늘만 쳐다본다.
15일이다. 안나푸르나에서 배운 대로 ‘678’이다. 6시 기상, 7시 식사, 8시 출발. 오늘은 종일 걸어 3,720m 호롬보산장까지 가야 한다. 만다라산장에 있는 이정표가 11.7km라고 가르쳐 준다.
선두가 너무 천천히 간다. 고산 증세 적응 훈련이란다. 가는 길 풍광이 점차 바뀐다. 열대우림에서 관목지대로 바뀌더니 본격적으로 먼지 길이 펼쳐진다. 멀리 킬로만자로 정상이 보인다. 주변이 참 편안하다. 고산의 고원지대에서 바라보니 참 황홀하다. 너무 천천히 가니 지루하기도 하지만 지친다. 벌써 출발한 지가 7시간을 훌쩍 넘긴다.
일행 중 또 개미가 문다고 야단이다. 일회용 부부의 육담이 질펀하고 재미있을 쯤, 다른 여자도 이에 질세라 입담을 늘어놓는다. 아, 이게 고산 등반인지 관악산 등반이지 도통 분간이 안 간다. 일부 일행은 시끄럽다며 후미에 쳐저 온다. 그래도 시끄럽다.
관목지대의 아름다움은 눈을 편하게 해준다. 고사리도 지천에 늘려 있고 이름 모를 야생화와 작은 도마뱀도 많다. 자세히 보니, 죽은 나무가 많다. 밑둥을 보니 제법 큰 나무들인데 오래 전에 산불이 이 산을 덮친 것 같다. 관목 숲을 지나니 큰 키에 치마를 두른 듯한 멋진 나무 군락 위로 호롬보산장이 보인다.
만다라산장이 캠핑장 같은 분위가라면, 여기는 전쟁터의 야전지원캠프 같다. 올라갈 팀과 정상에 다녀온 팀이 합류하는 중간 지점이라 온갖 사람들로 북적인다. 3,700m쯤 되니 고산 증세인지 머리가 좀 띵하다. 황무지 지대를 통과하느라 온 몸은 먼지투성이다. 나무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가 침낭을 펴고 짐을 정리하니 몸이 천근만근이다. 일행 중 절반은 벌써 누워 있지만, 먼지부터 털어야 무엇을 해도 할 것 같다. 목욕하고 머리 좀 감았으면 하는 마음이 굴뚝 같지만 그럴 곳도 없다. 화장실에 가서 홀랑 벗고 수건에 물을 묻혀 닦아내니 살 것 같다. 독일 남자가 나의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라더니 잘한다며 엄지를 세운다.
저녁을 먹으니 바로 어두워진다. 금방이라도 별들이 ‘우수수’ 쏟아질 것 같다. 올라올 때 들린 산 아래 도시인 모시의 불빛이 정말 아름답다. 큰 도시인 것 같다. 오리털 파카를 입고 고산용 침낭에 들어가 있으니 으슬으슬콧물이 흐른다. 아까 냉수로 씻은 것이 원인이다. 아스피린 두 알을 먹고 잠을 청한다. 밤새 소변을 보기 위해 7번이나 들락날락 거린다. 고산 증세다. 잠을 잔 건지 만 건지….
16일이다. 아침에 일어나니 대부분 얼굴들이 부어 있고 푸석푸석하다. 말 많던 여자들의 말수가 급격히 줄었다. 고소 적응 훈련으로 4,200m에 있는 마엔지봉 갈림길까지 오전에 다녀올 계획이다. 마엔지봉 쪽에서 바라보는 킬로만자로 정상 허리에 구름과 함께 눈이 쌓여 있다. 사막지대 건너 멀리 키보산장이 산 중턱에 보인다. 오늘 갈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중 이야기지만, 이건 죽음의 시작을 알리는 환상이다. 힘이 들어서일까, 누가 내려오면서 기원했을까, 돌탑들이 여러 개 가지런히 쌓여 있다. 그 위에 집에 있는 가족의 건강을 바라며 돌탑 하나를 얹는다.
별과 은하수가 너무 황홀하다. 언제 또 올까하는 마음으로 자다말고 나와 밤하늘을 올라다 본다. 바람이 차갑고 거세다. 걱정이다. 내일은 정상공격 산장인 키보산장까지 가야 한다. 어제보다 소변 보는 횟수가 점점 늘어난다. 고산 증세로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모두가 들락날락 거린다.
17일이다. 아침이 되니 날씨가 멀쩡하다. 박 대장이 우리 일행은 너무 잘 먹어서 거뜬히 오르겠단다. 보통 정상 등정률이 70% 정도인데 우린 100% 오르겠다며 양 어깨에 자신감을 불어 넣어준다. 도시락을 하나씩 받고는 키보산장으로 향한다. 워낙 산이 크고 높다 보니 열대우림에서 출발해 관목지대를 거쳐 이제 고산에 있는 평평한 사막지대를 10km 정도 걷는다.
눈 앞에 키보산장이 보인다. 하지만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다. 한 8시간 걸린 것 같다. 아프리카라고 덥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햇살은 아주 강한데 날씨는 서늘하다. 고어텍스 겉옷을 걸치니 그나마 보온이 된다.
황량한 사막 중간에 작은 바위가 보인다. 바람이 많이 분다. 사막 한가운데라 여기밖에 먹을 때가 없다. 도시락을 꺼내니 닭다리가 하나 있다. 배고프니 무지 맛있다. 까마귀인지 독수리인지 중간쯤 되는 놈이 발밑까지 와서 같이 먹잔다. 살 없는 다리뼈를 주니 별 반응이 없다가 살점을 주니 허겁지겁 달려든다. 이 놈도 여기 터줏대감인지라 눈치가 비상하다.
사막지대를 가는 내내 오른쪽에는 암반으로만 이뤄진 산이 함께한다. 족히 5,000m는 넘어 보인다. 전설의 고향에서나 나올 만큼 을씬년스럽고 웅장하다. 오후 4시쯤 키보산장에 도착하니 몸이 축 쳐진다. 산장 시설이 더욱 열악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몸이 말을 아니 듣는 탓일 게다.
간단히 저녁을 먹은 뒤 밤 11시에 정상 정복에 나선단다. 저녁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비몽사몽이다. 박 대장이 하산하면 도시락 준비를 해놓을 테니 잘 찾아 먹으라는데 그 말이 귀에 잘 안 들어온다. 큰일이다. 정상도 안 올라 갔는데 배속이 울렁거린다. 고산 증세가 올 수 있으니 잠은 자지 말란다. 그래도 졸린다. 그 와중에도 병규하고 태훈이 엄마는 셀파에게 얻어온 접시에 다짐의 글을 쓰는지 부스럭거린다.
어수선하다. 박 대장이 사람들 손가락 10개를 침으로 따준다. 검푸른 피가 솟는다. 나도 땄다. 기분상 그런지 좀 개운한 것 같다. 졸려서 침낭에 들어간다. 좀 쉬는가 했더니 잠시 후 출발하잔다. 해드랜턴 배터리를 교체하려고 뚜껑을 열었는데 부러지면서 아예 작동이 안 된다. 지리산이나 설악산 무박 산행할 때도 야간산행은 3시간 정도에 불과한데 여기서는 7시간 이상이다. 죽기야 할까. 사람들 틈에 끼어가지 뭐 대책없는 오기가 발동한다.
17일 밤 11시 우리팀 17명과 셀파 사오명이 앞서 걷는다. 화산지대의 가파른 길은 화산재와 작은 자갈길로 되어 있어 미끄러지길 반복한다. 랜턴도 없어 죽을 힘을 다해 따라간다. 얼마를 갔을까. 산소 부족으로 기억상태가 망가진다.
오르기 전 별로 먹은 것이 없어서인지 이 와중에도 배는 고프다. 가져간 보온병에서 물 한 잔을 마시며 어렴풋이 보니 김병규 아우, 다른 일행, 나 하고 세 명이 낙오인지 선두인지 칠흙 같은 어둠의 비탈에서 ‘헉헉’ 거리며 서 있다. 비몽 간에 아래 쪽을 보니 랜턴 불빛이 쭉 이어져 올라오고 있다. 아마 다른 나라팀 같다. 참고로 배가 뒤틀리고 고산 복통이 심해도 찬물은 절대 먹지 말란다.
혹시 몰라 가져온 영양갱 4개를 나누어 주며 혹 먹을 걸 가져왔냐고 물어보니 아무 정신이 없어서 그냥 왔단다. 화가 난다. 야 병규야, 이 고산에서 죽을려고 맨몸으로 왔니? 병규는 건낸 영양갱 반절도 미슥거려 못 먹겠다며 셀파에게 건낸다.
또 올라간다. 하늘 저 끝에 붉은 구름띠가 걸려 있다. 여명이다. 순간 울컥한다. 주변에 누가 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환상을 보나 멍하니 쳐다본다. 지금 추측해 보면 아마 가파른 화산지대를 거의 올라간 능선 끝일 것이다. 18일 오전 6시 35분 킬리만자로의 일출이 표범의 기상처럼 솟구쳐 올라온다. 어지럼 속에서도 카메라를 연신 눌러댄다. 날이 추운지 더운지도 구분이 가지 않는다.
어느 순간 눈 앞에 날이 밝아져 있다. 5,685m 길만스포인트에 내가 서있는 것이 신기하다. 언제 왔을까.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태훈이와 그 엄마가 서서 무어라 중얼중얼 거린다. 나를 보더니 반짝 화색이다. 태훈이가 어지럼증으로 고통을 무지하게 호소한다. 더 가면 죽을 수도 있단다. 여기까지만 오면 등정을 인정해 준다고 했다며 자기 아들을 데리고 나보고 하산하란다. 200m만 더 가면 정상인데 나보고 내려가라니 산소 결핍으로 취한 상태에서도 황당하고 어이없다. 나도 정상을 가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왔는데…. 언제 나타났는지 셀파가 보인다. 손짓 발짓으로 태훈이를 데리고 하산할 것을 부탁한다.
어지럽고 도무지 몸이 통제가 안 된다. 아마 만취한 상태가 이런 것일까. 뇌 속의 세포가 수없이 죽은 것 같다. 갑자기 병규가 보이지 않는다. 어디 갔지. 다시 보니 아무도 없다. 이정표도 없다. 무조건 높은 곳을 찾아 올라간다.
비틀비틀 한 시간쯤 가다보니 하얀 구름이 정상 아래 이불 같이 깔려있다. 그 위에 우뚝 서 있는 빙하지대가 보인다. 정신 차리고 보니 정상 쪽은 머리털 빠진 까마귀잔등 같이 바위 속살이 검게 드러나 있다. 정상은 다 녹고 한참 떨어진 곳에만 빙벽이 장승들처럼 서 있다. 이 많은 시간의 덩어리가 다 사라지다니 지구의 온난화를 다시 한 번 실감한다.
가다보니 정상으로 가는 길 쪽에 몇 명이 띄엄띄엄 한 사람씩 서있다. 다들 정신이 없다. 한 20분 갔을까 드디어 정상이다. 5,895m 우후루피크에 왔다. 언제 왔을까. 태훈이 엄마가 길에 서있다. 얼굴과 입술이 청색증으로 시퍼렇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달란다. 강한 햇빛에 영상이 보이지 않는다. 다리가 자꾸 후들거려 중심잡기도 어렵다. 사진 찍기를 반복하다 실패하니 꼭 찍어야 한다며 훌쩍거린다. 산악동우회에 보낼 욕심이다. 자꾸 사람들이 있다 없다한다. 술 먹고 필름 끊기면 이럴까.
하산 후 디카 사진 속 기록을 보니 오전 9시 23분에 정상에 올랐다. 키보산장에서 전날밤 11시에 출발했으니 10시간이 넘는다. 근데 기억나는 것은 10분도 안되는 필름 몇 컷에 불과하다. 여길 어떻게 올라 왔을까.
정상을 조금 지나니 병규가 나타난다. 입술이 아주 파랗다. 대표적 고산증이다. 나를 알아보는지 못 알아보는지 정신이 몽롱한 상태다. 병규는 배낭을 셀파에게 주었다는며 카메라도 그 속에 있어 정상등반 기록사진을 못 찍었다며 발을 동동 구른다.
사진을 찍은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이 잘나지 않는다. 나중에 보니 나도 알지 못하는 셀파하고 빙하지대와 최고 정상에서 사진만 잘 찍어져 있다. 언제 찍었는지 깜짝 놀랐다. 디카 속에는 병규가 정상에서 접시를 들고 찍혀있다. 전날 밤 자기 회원들께 전하는 메세지를 매직으로 접시에 써 논 것이다. 잘 찍었다. 내가 찍은 것인데 찍어준 기억이 지금도 전혀 나지 않는다. 5컷 찍는데 30분이나 걸렸다. 무얼했는지 이해가 안 되지만 설명할 사람이 없다. 나중 하산해서도 병규는 사진 안찍었다고 우긴다. 사진보고 놀란다.
배도 고프고 어지럽고 토하고 싶다. 술 취한 사람마냥 횡설수설 혼자 욕도 했단다. 나중에 사진 속 시간을 보니 우후루피크 정상에서 1시간 30분이나 있었다. 대체 무엇을 했을까. 맞다 정상 기념으로 먹을려고 가져온 복숭아통조림이 생각났다. 병규가 또 없다. 깡통을 따서 복숭아조각 한 개는 내가 먹고, 한 개는 옆에 모르는 일행을, 나머지 한 개는 지나가는 셀파를 주니 아주 좋단다.
태훈이 엄마가 눈에 띈다. 남은 통조림을 주니 감지덕지 한다. 막 먹을려는데 다른 셀파가 물끄러미 쳐다본다. 내가 태훈이 엄마에게 다시 달라고 해서 그 셀파에게 주었다. 막 목구멍 넘길 찰라에 도로 뺏어 주었단다. 한국 올 때까지 복숭아 타령이다. 그 맛은 정말 환상이었다
이제 내려가야 할 시간인데 전혀 모르겠다. 얼마 갔을까 얼핏 보니 바위틈에 병규가 자고 있다. 막 흔들었지만 반응이 없다. 거칠게 소리치며 흔들어 깨우니 조금만 자겠다며 반항한다. 길 가던 셀파가 영어로 막 소리친다. 자면 뇌가 망가져 큰일 난단다. 위태롭게 비틀비틀 걸어간다. 걷다보니 병규가 또 졸고 있다. 누군가 함께 또 흔들어 깨운다. 주변에 아무도 없다. 분명 다른 일행과 함께 있었는데 큰일이다. 어디로 가야할지…. 혼미한 정신 때문인지 하산길을 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스텔라포인트가 보인다. 모르면 왔던 길로 가야지. 이미 시간 개념도 없고 다리만 움직인다. 어렴픗 좌측을 보니 가파른 낭떠리지 길이다. 조심해야 하는 본능이 움직인다. 얼마를 갔을까 두려움이 온다. 아마 고도로 200m정도 하산했나보다. 정신이 조금 든다. 산모퉁이에서 소변보고 서있으니 셀파 한 명이 혼자 지나간다. 이 길이 맞는지 영어로 물어 봐야 하는데 혀가 돌아가지 않는다. 모르겠다 “go home” 하니 “ok!" 한다.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다시 정신을 차려본다. 올라왔던 화산지대의 가파른 길목에 서있다. 발이 쑥쑥 빠진다. 뒤에 보니 원주에서 산악회 운영하는 부부가 있다. 반가워도 표현할 수가 없다. 일초라도 빨리 하산할 욕심뿐이다. 병규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어디 있는지 알 수도 없다. 중국 옥룡설산 하산길도 이와 유사하던데 거기서는 정신은 멀쩡해 옷 버릴까봐 걱정했는데 여기는 아직도 환각상태에 있다. 꼭 생시에 한 번 와 본길 같기도 하고 꿈인 것 같기도 하고 아직도 고산증에 시달리고 있다. 나도 모르게 풀썩 주저 앉는다. 자칫 길이 가팔라 구를 수도 있지만 자갈 먼지 틈에 그대로 존다. 눈을 뜨니 그 부부는 저 아래 산으로 가고 있다. 키보산장 같은 것이 보이는데 아무리 내려가도 그 자리다.
저 멀리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키보산장인가 보다. 막판 힘을 내본다. 어찌어찌 내려왔나 드디어 왔구나 성공이다. 식사 담당 요리사인 임마뉴엘이 웃으며 미지근한 환타 한 잔을 준다. 한잔 더 마시니 그제서야 살 것 같다. 아직도 비틀거린다. 주변을 보니 몇몇이 눈에 띤다. 시간을 보니 오후 1시 반. 전날 밤 11시에 출발했으니 13시간 반 만에 돌아 왔다. 병규가 보인다.
도시락으로 준 점심은 도저히 넘어가질 않는다. 짐 정리하고 3시쯤 다시 하산한다. 호롬보산장까지 가야 하는데 여기서 10km 정도니 만만치 않다. 병규와 단 둘이 내려오는데 별로 말이 없다. 빨리 가서 쉬고 눕고 싶다. 올라 갈 때는 거의 8시간 온 것 같은데 3시간만인 오후 6시에 산장에 도착한다. 아직도 어지러움이 있지만 찬물로 머리감고 몸을 물수건으로 대충 닦아내니 정말 살 것 같다. 히말리아 갔을 땐 등정 후 서로 무용담 같은 고생한 자랑도 늘어놓던데 여기서는 저녁 먹을 때도 말들이 없다. 하긴 기억이 중간중간 사라졌으니 퍼즐을 조합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거다.
그 좋던 별자리도 관심이 없다. 일곱 번 가던 화장실도 가지 않고 아침까지 잤다. 고산증세가 말끔히 사라졌다. 아침에야 어제 등정에 대한 기억들을 말한다. 다시는 킬리만자로 근처에 얼씬도 안 한다고. 천만에 이틀 후 이야기지만 추억이 그립단다. 그리고 자랑스럽다. 보통 등정 완주가 70% 정도란다. 우리 팀은 17명 전원이 등정에 성공한 것이다.
19일이다. 아침에 출발해 마랑구 게이트에 내려오니 오후 2시 정도 되었다. 박대장이 사전에 부탁한 상점에 가니 시원한 맥주 한 병을 준다, 아 정말 시원한 그 맛은 잊을 수가 없다. 게이트 주차장에는 셀파, 가이드, 쿡등 43명이 우리를 환송하기 위해 와 있다. 몇몇 셀파에게는 개인적 고마움으로 팁도 건낸다. 셀파들이 환송 노래도 한다. 헤어짐은 또 다른 만남일 거다. 힘들었는데 다시 올 거란다.
얼마를 달리니 저녁 무렵 모시에 왔다. 시장 장터가 시끌벅적한다. 흙먼지 도로 옆 스프링호텔에 들어서니 여긴 또 다른 낙원이다. 짐 풀고 제일 먼저 한 것은 샤워다. 간단한 전기보일러와 현대식 세면대를 설치했으나 설비가 엉망이다. 한기가 들어 방에 있는 히터를 켜니 고장나 있어 교환을 부탁했더니 다른 걸 가져왔다. 바람이 차다. 어이없다. 에어컨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히터는 없단다. 식사는 아주 맛있다. 특히 돼지고기가 맛있다. 아프리카에 그냥 살아야 할 정도다.
20일 아침부터 서둘러 보너스 일정으로 탄자니아 국경을 건너 케냐 암보셀리국립공원에 왔다. 동물의 왕국에 자주 나오는 세렝케티를 연상한다. 공원 내 숙소인 롯지에서 샤워 후 창을 여니 얼룩말과 코끼리 때가 코앞에 있다. 새벽녘 사자와 하이에나가 사냥감을 잡지 못해 처량하게 걷고 있다. 힘이 있다고 모든 세상을 지배할 수 없다는 진리를 보는 것 같다. 여기서의 하루 숙박은 아프리카의 모든 것을 대변한다. 다음 여행에 별도로 오고 싶다. 이번 등산으로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를 반문한다. 희말리아에서는 살아있는 모든 것의 겸손함을 보았다면 여기 아프리카는 인간의 순수함을 보았을까. 검다고 무섭고 어두운 것이 아니라 그들의 밝고 흰 눈을 보면 아프리카의 미래가 보인다. 아프리카는 정말 순순하고 멋있다. 살아있는 땅이다. 다만 아프리카의 눈물과 같이 기후변화에 따른 유목민의 황폐함과 마사이족의 관광자원화에서는 또 다른 공정무역의 중요성을 느낀다.
이번 여정은 나에게는 무척 중요하다. 12월이면 30년 다닌 직장에서 정년을 한다.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돌아볼 수 있는 열정과 추억도 필요한 것 같다. 동안 네팔 안나푸르나와 에베레스트 쪽으로 두 번, 코타키나발루, 백두산 두 번, 스위스 융프라우 두 번 다녀왔다. 직장 선후배의 배려로, 또 집에서의 협조로 쉽지 않은 좋은 추억을 간직했다. 내년에는 록키산맥과 러시아 빙산 엘브르즈를 꿈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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