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세 자매>
1. 가족을 다룬 영화, 특히 가족의 폭력을 소재로 한 영화는 결코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없다. ‘가족’은 세상으로 던져질 때부터 벗어날 수 없는 보호의 세계이자, 억압의 영역이다.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 자유로울 수 없는 관계의 지속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가족’은 수많은 단절과 오해, 서로에 대한 증오에도 불구하고 회복되어야 할 대상이며 신뢰의 대상으로 결론지어진다. 영화 <세 자매> 또한 그러하다.
2. 영화 <세 자매>는 2/3 지점까지 각기 개성적인 세 자매의 일상과 서로에 대한 관계를 묘사한다. 톨스토이의 <안나 까레이나>의 “행복한 가정은 살아가는 모습이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다른 이유로 괴로워하는 법이다.”는 말처럼, 세 자매는 각자 다른 고민과 고통에 직면하고 있다. 가난하고 소심한 첫째는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남편과 제멋대로인 딸 사이에서 제대로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고 암으로 죽어가고 있다. 둘째는 남들이 보기에 화려하고 자신감 넘치는 여성이다. 하지만 그녀 또한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되자 내면에서부터 무너져 내린다. 하지만 그녀의 자존심은 그러한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으며 곯아져가고 있는 것이다. 희곡을 쓰는 셋째 또한 이혼한 나이 많은 남자와 결혼하여 정상적인 가정 생활을 유지하지 못한 채 술과 허무에 빠져있다. 영화는 그들의 생활 속에 의문의 에피소드를 끼워 넣으며 그들 사이에 숨겨져 있는 비밀을 암시한다.
3. 가족 들 사이를 흐르고 있던 미묘한 불안의 정체는 아버지의 생일날 모임에서 터져버린다.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집안에서만 칩거하고 살아가는 남동생이 가족들에 대한 감사 기도를 하고 있는 아버지에 대하여 갑작스럽게 ‘방뇨’한 것이다. 그것은 어릴 적부터 쌓여온 분노의 표출이었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가족들에 대한 폭군이었다. 우리 시대의 많은 아버지들처럼, 그도 술만 마시면 가족들에 대한 폭력을 꺼림낌 없이 자행하던 절대적인 지배자였다. 그 속에서 아이들은 공포에 휩쌓였고 때로는 내복차림으로 밖으로 도망쳐야만 했다. 하지만 그 시대 아버지의 폭력은 인정되었다. 신고해달라는 아이들의 부탁에 마을 사람들은 아버지를 범죄자로 만들작정이냐고 오히려 아이들을 꾸짖었다. 가족 내의 폭력의 심각성은 서로의 묵인 아래 치명적인 상처로 누적되었다. 아직도 그러한 상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막내가 치유되지 못한 상처의 생채기를 드러낸 것이다.
4. 영화는 한바탕의 소란 후 곧바로 치유의 장면을 제시한다. 첫째 딸의 아이가 어머니의 암투병을 알리고 가족들은 곧바로 자신의 이기심을 반성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머리를 벽에 찧으면서 통곡하고, 어머니와 자매들도 자신들의 무심함을 사과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급속도로 긍정적인 분위기로 전환된다. 남동생은 병원에 입원하고 밝은 얼굴로 누이들을 배웅한다. 세 자매들도 바닷가로 여행을 온다. 세 자매는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세 자매가 찍었던 과거의 유일한 바다사진은 아버지의 강요로 노래를 불렀던 장면이었다. 이제 그들은 밝은 얼굴로 자신들의 의도를 담아 사진을 찍는다. 그것은 새로운 희망의 상징이다.
5. 고통의 폭발과 치유의 장면이 너무도 빠르게 진행된다. 몇 십 년 동안 그들을 지배했을 고통의 무게가 이렇게 단기간에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은 사실 적다. 고통은 무의식 속에 겹겹이 쌓여있는 트라우마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희망적인 메시지로 영화를 마무리한 것은 ‘가족’이라는 특별한 관계 때문 아니었을까? 미워하고 증오하더라도 결코 헤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상처의 무게보다는 미래의 희망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너무도 안이한 화해라고 말하고 싶지만 바꿀 수 없는 과거에 집착하기 보다는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격려한다는 점에서 상투적인 결론이지만 영화의 메시지를 긍정하고 싶다.
6. 영화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소재는 ‘교회’이다. 영화의 중심인물인 둘째는 교회의 집사이자 철저하게 기독교적 사고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언니에게 선교하고 교회의 목사는 누구보다도 중요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딸에게 식사기도를 강요하는 폭력성을 보이며 남편은 같은 교회의 젊은 합창단원과 외도에 빠진다. 아버지 생일 날 장로인 아버지도 가족을 위해 기도한다. 이렇듯 교회와 기독교는 가족의 상처를 감추고 은폐하며 거짓된 형태로 안정을 유지시키는 도구로 등장한다. 종교적 위선을 비난하려는 순간 선뜩 토해내기는 어렵다. 비록 위선적인 모습이나 형태이언정 교회는 그들의 삶을 형식적으로나마 지탱시켜 주었다. 아버지의 개선된 모습도 어찌보면 교회에 다닌 후의 결과라는 사실을 추측하게 해준다. 어찌보면 교회는 가족의 또 다른 상징일지도 모른다. 종교에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교회의 해악은 결코 작을 수 없다. 그럼에도 신앙의 중요함을 확신하는 사람들에게 종교는 가족만큼이나 거부할 수 없는 존재이다. 가족이 고통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전달해주는 것처럼 그들에게 교회는 여전히 불안하지만 ‘희망’을 제공하는 장소로 부정하기는 어렵다.
첫댓글 가족이라는 굴레!
따뜻한 보금자리라는 허상 뒤에 숨은 지긋지긋한 현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관계의 위상 변화.
삶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