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 위엔 피아니스트 손열음(25)이 있었다. 결선 진출자 5명 중 한 명이었다. 청중은 실수로 박수를 친 게 아니었다. 손열음의 1악장이 환호를 이끌어낼 만큼 명연주였기 때문이다. 집중력에 파워가 더해진 타건의 폭발력이 눈부셨다. 밀고 당기다가, 쥐었다 펴는 탄력을 가진 연주였다. 살벌한 경쟁의 현장이었지만 청중은 자연스럽게 찬사를 보냈다.
3악장까지 연주가 끝나자 한 관객이 피아노 앞까지 걸어나왔다. 손열음에게 사인을 받기 위해서였다. 얼음장 같은 팽팽한 긴장감의 콩쿠르 현장에선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잠시 당황했던 손열음은 이내 사인을 해주며 이 뜨거운 관심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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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에게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꿈의 대회다. 밴 클라이번,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미하일 플레트네프 등 명망 있는 피아니스트가 이 대회 우승자 출신이다. 이번엔 200여 명의 피아니스트가 연주 동영상을 보내 예선에 참가했다. 그중 모스크바에 올 수 있었던 사람은 29명. 첫 라운드는 ‘생존자’를 12명으로 추려냈다. 숫자는 8명, 5명으로 줄어들었다. 인터넷으로 볼 수 있었던 손열음의 연주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어떤 기분으로 연주했나요.
“2년 전 미국에서 밴 클라이번 콩쿠르 할 때는 솔직히 사활을 걸고 했는데 이번엔 참 희한하게 재미있었어요.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도 ‘아, 연주 얼른 하고 싶다, 하고 싶다’ 이랬다니까요.”
-밴 클라이번 콩쿠르는 입상자에게 연주 기회를 많이 주기로 유명하죠. 2009년 2위를 하고 부상으로 받은 무대가 아직도 많죠.
“그래서 2년 동안 연주를 정말 많이 했거든요. 이번 콩쿠르 직전에도 미국에서 연주를 하고 왔어요. 그러면서 순수한 연주자로만 사는 게 정말 재미있는 일이란 걸 알았어요. 그러면서 ‘진짜 큰 무대에 서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요. 그런데 이번 무대가 ‘큰 무대’잖아요. 콩쿠르 역사도 그렇지만 올해 특히 심사위원도 화려했고, 라이브로 전 세계에 생중계도 했고요.”
-인터넷으로 보니 전혀 긴장하지 않던데요.
“이렇게 얘기하면 좀 이상할 텐데, 나중엔 무대가 집같이 느껴져 떠나고 싶지 않더라고요. 특히 세미 파이널에서 모차르트 협주곡을 쳤는데 연주 자체를 이렇게 즐겨도 되나 싶었어요. 음악을 공부하는 게 재미있다는 사실을 오랜만에 다시 깨달아서, 콩쿠르 스트레스도 없었던 것 같아요.”
손열음은 강원도 원주여중 출신이다. 중학교 졸업 뒤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영재 입학했다. 부모는 학교 선생님이다. 극성 뒷바라지 같은 건 없었다. 2002년 이탈리아 비오티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면
서 처음 이름을 알릴 땐 해외 유학 경험도 없었다.
평범하게 자랐다. 하지만 비범하다. 우선 취미는 역사책 읽기다. 어릴 땐 책을 너무 많이 읽어 두꺼운 안경을 끼게 됐을 정도다. 두 살에 피아노를 시작했는데 “처음 피아노를 봤던 장면이 아직도 기억 난다”고 한다. 만 네 살에 한글을 읽게 된 것도 평범하진 않다. 가장 독특한 것은 음악을 음(音)에 집착해 해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래된 문헌, 다른 장르의 사람들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가장 좋아하는 악기는 피아노가 아니라 바이올린”이라 할 정도다.
그를 어린 시절부터 봐온 스승 김대진은 “같은 곡을 똑같이 두 번 치는 걸 못 봤다”고 한다. “굉장히 독특하고 개성이 뚜렷하다. 본능적 표현을 하는 피아니스트다. 다른 사람은 절대 모방할 수가 없다. 좋은 음악가는 절대 만들어지지 않고, 선천적인 것이 후천적 요인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신념을 요즘 들어 굳히게 됐다. 손열음은 이 생각을 만들어준 가장 중요한 피아니스트다.”
지난해 10월 손열음은 중앙SUNDAY에 콩쿠르에 대한 칼럼을 써보냈다. “음악을 두고 경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진대 그 과정 자체도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으니 음악을 한다는 게 쉽지 않은 것만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다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경쟁은 경쟁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순간에도 경쟁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 경쟁을 평가하고 있는 사람, 경쟁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 모두와 나누고 싶은 진실입니다.”
매달 연재하는 중앙SUNDAY 칼럼에 ‘경쟁에 대한 철학’을 쓴 후 그는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참가했다. 많은 사람이 우려했다. 음악의 ‘현장’인 무대에서 이미 충분히 인정받았는데 굳이 ‘대학입시’와 같은 콩쿠르로 돌아갈 필요가 있느냐는 우려였다.
손열음은 참가를 강행했다. 지난달 18일 첫 라운드, 21일 두 번째 라운드를 거치면서 연주는 점점 좋아졌다. 짧은 시간 중에도 발전하는 그의 무대는 차이콥스키 콩쿠르 홈페이지(tchaikovsky-competition.com)의 웹캐스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콩쿠르에서도 앙코르를 하게 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30일에 마지막으로 차이콥스키 협주곡을 연주했는데 아쉬운 기분이 드는 거예요. 관객이 사인 받으러 나온 것, 1악장 끝나고 박수 나온 것도 은근히 기분이 좋고요. 정말 너무 치고 싶었어요, 앙코르를요. 콩쿠르만 아니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고요.”
누가 경쟁 무대를 두려워했는가. 손열음은 과정을 만끽하고 있었다. “1등 하면 물론 더 좋았겠죠. 지난번 밴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2등 했으니 이번엔 꼭 1등 하고 싶기도 했어요. 특히 러시아 피아니스트에게 1등이 돌아간 게 순간적으로 분하더라고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참 잘한 것 같아요. 콩쿠르에 나온 것도 좋은 선택인 것 같고요. 이렇게 무대를 즐긴 건 오랜만이었거든요.”
청중이 ‘좋은 피아니스트’라 인정할 때 손열음은 ‘최고의 음악가’를 꿈꾸며 변화했다. 어려운 도전을 결심해 잘해냈고, 성장했다. 자신도 생각지 못한 발전과 도약을 이뤄냈다. 이번 콩쿠르 연주를 지켜본 스승 김대진은 “열음이는 피아니스트를 넘어 아티스트가 됐다”고 했다. 손열음은 어쩌면 그 이상의 세계를 꿈꿀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