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씨조선 이성계와 닮은 꼴
명의 개국군주 주원장은(1328~1398)안휘성 빈농자식으로 태어나 17세에 황각寺에 들어가 탁발승한 기록이 있는데. 조실부모하여 절에서 노역하며 살던 시절에 홍건적에 가담한다. 8형제 막내로 워낙 총명해 원나라 쇠망을 깨달고 25세 홍건적두령 곽 사흥 밑에 들어갔다. 인재를 알아보는 눈을 갖은 곽 사흥은 즉시 그를 수하에 거둬 관군과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자 양녀 마씨와 맺어줬다. 그가 죽자 그 무리의 두령이 됐다.
홍군에 가담한지 27세에 10만 원군을 처 물리치다.
주원장은 모순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그가 남경에 입성하면서 공포한 격문은 유교적인 이념에 바탕을 두어 기존의 사회 체제를 견고하게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며 이른바 백련교의 개벽론이라든지 새로운 세상과 같은 개념은 전적으로 배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소명왕 한림아의 장수로 남아 있었으며 1362년에는 소명왕에 의해서 오왕(吳王)에 봉해졌다.
이 시대 최대의 명승부 중 하나인 파양호(鄱陽湖) 전투에서. 1363년 주원장과 진우량은 사흘 밤낮 동안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양측에서 엄청난 전사자들이 속출하는 가운데 주원장 자신이 자칫하면 사로잡힐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행운은 주원장의 편이었다. 마지막 날 진우량이 화살에 맞아 전사함으로써 주원장은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었다.
같은 시기에 패권을 다투던 장사성이 자살하면서 남쪽을 모두 장악한 주원장은 북경을 향해 대망의 북진을 시작했다. 그는 바로 다음 해인 1368년 1월 4일 산동성을 평정한 후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국호는 명(明), 수도는 응천부인 남경, 연호는 홍무(洪武)였다. 이때 주원장의 나이는 마흔이었다.
남경을 도읍지로 정한 주원장은 명나라를 유방의 한漢나라 정통성을 잇는 국가라 선언하고 백성들을 이민족과 구분지어 ‘한족 漢族’이라 부르며 유학을 숭상했다. 그리고 그는 성군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지독하게 가난하고 미천한 신분에서 황제가 된 주원장은 본능적으로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혐오했다. 관리들의 횡포로 인해 백성들이 얼마나 모진 고초를 겪는지 몸소 체험했기에 주원장은 관리에게 엄격한 도덕성을 요구했다. 그래서 그는 당시에 성행하던 백련교(불교의 만민평등 사상에다 신비주의를 뒤섞은 서민들의 종교)를 타파하고 반면 원래부터 통치자들의 논리였던 유교를 중심 종교로 삼는다.
원나라의 수도이자 당시에는 대도(大都)라고 불리던 북경은 바로 그해에 함락되었다. 원의 순제는 수도를 북방의 상도(上都)로 옮기고 계속 명나라와 대립했다.
명나라가 북원까지 제압하고 완전히 천하를 평정하는 데는 한족(漢族)의 왕조가 한 세기 만에 부활된 것이다.
주원장은 중국 역사상 기층민 출신으로 천하의 대권을 잡은 유일한 인물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민중의 영웅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민중의 바람을 철저하게 외면했다. 그는 성공과 함께 민중을 배신하고 포악한 권력자의 길을 선택했다. 그의 잔인함은 중국 역사에서도 최상위에 꼽힐 정도이며 명 왕조 전체를 가혹한 폭정이 지배하게 되는 단서를 제공했다. 지난날 살아온 그의 과거인 콤플렉스가 부른 참극 이다
주원장이 세상을 떴을 때 그의 아들은 모두 장례에 참석하지 못했다. “다들 임지에 그대로 머물고 수도로 오지 말라”는 주원장의 뜻이었다. 일찍이 주원장은 명나라를 세운 뒤 자신의 여러 아들을 번왕(藩王)에 봉하여 각지를 지키도록 했다. 주원장은 생전에 26명의 아들을 두었다. 주원장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은 첫째·둘째·셋째를 포함해 모두 7명, 그가 사망할 당시 19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모두 장례에 참석하지 못했다. ‘효’를 그토록 중시했던 주원장이 이런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건 자신의 아들들이 제위에 오를 손자 주윤문에게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해서였다. 1402년, 주원장의 넷째아들 주체가 결국 난징을 함락하고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다.
이와 같이 주원장과 이성계는 각각 자식들의 난 때문에 고초를 당하는 모습이 너무나 같아보인다. 종교면에서도 말년에 그렇게도 중시하던 유교의 효도 망가지는 처리로 전락한다.
주원장 주변에 몰려든 유학자들은 대부분 현실정치에는 참여한 적이 없고 재야에서 글을 쓰거나 학생들을 가르치던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현실적인 정치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이상과 원칙에 충실한 성향을 보이게 마련이다. 결국 주원장의 새로운 참모들과 홍건적이 사상적 기반으로 하는 백련교의 교리와는 타협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
명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보수적이고 폐쇄적이며 권위주의적인 정권을 만들어 냈다. 고위 관료들도 황제 앞에서는 노예나 죄인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 머리를 들지 않아야 했다. 이런 것들이 바로 열등감에 가득 찼던 조울증 환자 주원장이 처음 고안한 예법이며, 그대로 중국의 권위주의적인 전통으로 굳어졌다.
주원장이 국가 시책으로 삼은 당시의 유교는
공자가 창시하여 맹자·순자로 계승되어온 유교는 한 무제와 동중서에 의해 국가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기 시작하여 BC 136년 국교로 선포되었다. 남북조시대에 신도교가 융성하고 불교가 전파되면서 유교는 크게 쇠퇴했다. 그러나 이것이 유교전통의 소멸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유교는 당의 한유에 의해 부흥되기 시작하여, 송대에 이르러 호원·범중엄·왕안석·구양수·사마광 등의 사대부에 의해 본격적으로 부활되었다. 원대에는 쿠빌라이 칸이 등용한 허형이 국가제도를 세우는 데 유교를 바탕으로 했다.중국에서 유교는 명대의 유학자 주희·왕양명을 거쳐 청대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19세기 이후 서양사상이 유입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유교는 쇠퇴해갔지만, 유교의 전통은 중국인의 생활 속에 아직도 자리 잡고 있다.
한국의 고대 정신과 중국의 유교사상은 모두 인간을 본으로 하고 현세를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교는 상고 은대와 주대의 신비적 종교문화에 들어 있는 천명사상을 잠재적으로 계승하지만, 근본에서는 인문주의적 예제문화(禮制文化)와 합리적 정신을 중요시하였다.
송대에 성리학이 성립되면서 유교가 획기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성리학은 남송의 주자(朱子, 1130~1200)가 북송시대 유학자들의 학설을 종합하여 유교를 새롭게 재구성한 것이다. 주자는 윤리적 성격이 강한 유교에 철학적 근거를 부여하여 불교와 도가철학을 비판하였다. 성리학은 우주의 궁극적 존재인 ‘태극’에 대한 논의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본성과 사회제도의 문제까지 망라되어 있다.
중국에서는 주자 이후 성리학은 이론적으로 크게 발전하지 못하였으나. 반면에 한국에서는 고려 말 부터 본격적으로 성리학이 수용되어 조선시대에 획기적인 이론체계가 구축되고 창출되었다.
이러한 당시(고려말과 이조초기 혁명시기)에 있던 사상계는 ‘문벌귀족사회’에서 ‘사대부사회’로, ‘중세사회’에서 ‘근세사회’로 발전한 것이다. 조선 건국의 주체는 사대부들인데, 이들은 주로 공민왕대에 급성장하여 중앙정계에 진출한 관료 겸 학자이다. 이들은 조선이 건국된 이후 정치 행정은 물론 학술과 문화 등 전 영역을 장악하여 유교적 사회를 창출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성리학에는 본래 유교 이외의 사상을 이단으로 배척하는[闢異端] 비판의식이 매우 강하게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사대부 사회인 조선에서 불교와 도교는 변방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고려 말 공민왕으로부터 이씨조선으로 전개된 과정을 보면 어찌나 ,주원장이 명을 창건한 모습과 거의 흡사하여 다시금 우리를 깨우치게 한다.
주원장과 이성계는 각각 원나라와 고려 조정의 무사안일과 무한 반복되는 판단 착오를 보면서 역동적인 모델을 구상한다.
중국 대륙에서는 주원장이 유교의 통치 이념을 내세우며 반원의 기치를 들고 거세게 일어났고, 삼별초항쟁 이후 원나라의 부마국이 된 고려에서는 신흥 세력 이성계가 전면 개혁을 내세우며 권문세족과 부딪치고 있었다.
본래 고려의 이성계나 원나라의 주원장은 당시 사회의 체제 속에서 주도적 위치에 오르기 어려운 신분이었다. 이성계는 고려 변방 함경도 영흥의 일개 무장 출신이고 주원장은 건달로 지내다가 생계를 위해 홍건적에 들어갔다.
백전백승하던 1367년 어느 날 33세의 이성계는 주원장의 명성을 듣는다. 주원장이 원 세력을 몰아내며 중원을 경략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유독 명나라에서 채택된 유교가 당시 조선의 이성계에게 근본 정치이념을 받아들여 거의 5백년간의 긴 세월을 조선에서 이어지면서, 오늘날 한국에도 특별히 종교적인 한 단면을 이루고 있는 실정이다.
정도전이 만든 제도 때문에 15세기 조선의 도덕성과 책임감이 뚜렸했으며. 백성의 삶이 나아지며 이밥(이성계가 내린 쌀밥)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로 호항을 누렸으나
세월이 말하듯 역시 너무 구습에 사로잡여 적응 못하는 정치를 하는 것도 다 인습에 억매인 결과로 보여 진다. 그래서 사람이 하는 정치는 노자가 한말. 상선약수(上善若水)란 말과 같이 최선의 일은 흐르는 물과 같아야 한다는 교훈을 만들게 하는 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