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풀꽃들은 때가 되면 어김없이 꽃을 피웁니다. 유월도 중순에 접어드니 여름 꽃들이 피기 시작합니다. 저는 그 해에 처음 만나는 꽃이 참 좋습니다. 무리로 어우러져서 피어 있는 것들도 물론 좋아요. 하지만 이쯤이면 꽃을 피워도 될까 알아보러 나온 염탐꾼처럼 숨어 핀 꽃을 발견하는 기쁨 아세요. 이른 계절 앞에 있는 한 송이 꽃이 실바람에 흔들리는 양을 보세요. 제일 먼저 나와 인사하는 품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
풀섶에 피어 있던 달개비 한 송이를 만났어요. 하얀 색도 있고 연한 하늘 빛깔도 있어요. 그리고 깊은 바닷물을 생각나게 하는 진한 청남 빛 달개비도 있지요. 그중 청남 빛 꽃은 빛깔에서 제 가슴을 압도해 버립니다. 사실 풀섶에서 발견한 게 올해 처음 만난 달개비는 아니에요. 우리 집 쑥부쟁이 화분에 돋아난 한 포기 달개비를 뽑아내지 않았답니다. 아침이면 해맑게 인사 건네는 달개비꽃이 보고 싶어서요. 베란다가 바깥보다 기온이 높다보니 며칠 전 부터 한 송이씩 피었다 지곤 했어요. 우리집 달개비는 심장 모양의 포에 잔털이 있는 애기닭의장풀이랍니다. 꽃 빛은 그리 진하지 않고요.
제 유별난 달개비 사랑 이야기 좀 들어보실래요? 몇 년 전 산길에서 달개비 한 마디를 뜯어왔어요. 우리 집에서 제일 큰 화분이 작은 대추나무가 살고 있던 것이었답니다. 따로 심을 곳은 마땅찮고 그냥 그 화분에 꽂아두었겠지요. 그 한 마디가 얼마 후 번져서는 화분을 에워싸게 되었어요. 달개비 화분인지 대추나무 화분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였지요. 달개비가 그냥 소복히 자라서 꽃만 피우면 그런대로 봐 줄만 하겠지만 몇 년 동안 거름 한 번 주지 않은 그 흙에서 어쩜 그리 기름지게 자라던지요. 키도 쑥쑥 클 뿐아니라 화분을 기어선 뿌리를 내리고 아주 빡빡하게 자손을 퍼트리며 기고 만장하게 살아가고 있었답니다. 물론 화분 주인은 아침마다 청남빛 나비가 날아와 앉은 듯한 달개비꽃과 만나는 기쁨에 대추나무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친절한 이웃은 그러지 않았답니다. 주인은 있으되 가꾸지 않는 화분 속 대추나무가 안쓰러웠겠지요. 어느 날 달개비를 사랑하는 대추나무 주인은 그 아침이 무척 허허로웠답니다. 밤새 누군가 그 많던 달개비를 다 뽑아서 흔적도 없이 치워버렸기 때문이지요. 그렇다고 그 달개비 쉽게 물러나진 않았어요. 여린 풀꽃이라고 깔 봐선 안 되지요. 흙에 떨어졌던 풀씨는 싹을 틔우고 어딘가 남아있던 뿌리는 다시 줄기를 뻗고 빠른 속도로 자라서 꽃을 피웠어요. 달개비는 온 몸에 물기를 머금어서 그런지 다른 식물들보다 더 여려 보이잖아요. 하지만 몸에 물기를 많이 간직했기 때문에 달개비는 갈증을 빨리 내지 않는답니다. 혹시 대추나무 주인이 게을러져서 얼마간 물 주는 걸 걸러도 달개비는 시들지 않았어요. 대추나무 주인은 진한 청남빛 달개비를 제일 좋아하지만 그건 산길에서 만나는 달개비들 이야기고요. 대추나무 아래 맑은 웃음 지으며 피는 연푸른 좀달개비를 많이 사랑했답니다.
그렇다고 맛난 비료를 주지도 않았지만 주인의 사랑 덕분인지 이듬해에도 뾰족한 싹들이 나고 유월이면 꽃을 피웠어요. 그런데 해마다 꽃이 보기 좋게 필 즈음이면 어김없이 달개비가 사라지는 겁니다. 그 속상한 마음 털어놓으니 듣고 있던 분이 그러시데요. "들꽃아, 넌 아무리 예뻐도 풀 밭에서 자라는 채소는 그게 잡초가 되고 채소 밭에서 자라는 풀은 풀이 잡초가 된다는 걸 모르냐. 그렇게 여려서 세상을 어떻게 살아왔니." 라고요. 그 간단한 진리를 체득하지 못 한 대추나무 주인은 대추나무가 병들어 가는 것은 어쩌지 못 하고 달개비에 집착을 했답니다.
일반 주택에서 공동 주택으로 이사를 하면서 대추나무 화분은 따라오지 못 했어요. 이제 좀달개비의 연푸른 꽃을 못 보겠구나 했는데 쑥부쟁이 화분에 풀씨 하나 묻혀 있었던 겁니다.
달개비꽃을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요. 어제 다녀가신 엄마는 쑥부쟁이 화분에 훌쩍 키 큰 한 포기 달개비 뽑아 내지 않고 뭐 하냐셨어요. 꽃이 참말 예뻐서 그런다고 아침마다 저 얼굴 보면 파란 들판에 앉은 느낌이 든다고 했더니 사실 엄마도 달개비를 좋아하신다데요. 젊은 시절 밭고랑 매다가 달개비 만나면 선뜻 뽑지 못 하고 한참을 들여다 보곤 하셨대요. 얼핏 봐서 좀 지저분한 쑥부쟁이 화분이지만 그 안에서 보석처럼 해맑은 가슴 열어주는 달개비꽃 한 송이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
저는 달개비꽃을 보면 어릴 때 신었던 흰고무신 생각이 납니다. 흰고무신엔 늘 나비가 앉아 있었어요.나비 모양 장식품. 장식품이라야 같은 흰 고무를 신발 바깥쪽에 볼품없는 나비 모양으로 붙여 놓은 거였어요. 운동화 한 번 신어보지 못했던 가난한 어린 시절에도 달개비는 피었지요. 여린 풀꽃 들여다 보고 신발 보며 비슷하단 생각을 했던지 여직 달개비를 보면 그 하얀고무신이 생각이 나고 그것 신고 뛰어놀던 어린 날의 들판이 환하게 펼쳐집니다.
달개비는 욕심쟁이예요. 달개비 한 마디면 한 해에 그 근처 땅을 기며 자라서 달개비로 점령하다시피 할 정도로 번식력이 좋은데도 수정을 해서 정식으로 씨앗을 떨어뜨리고 싶어하지요. 달개비 고 작은 꽃을 가만히 들여다 본 적 있나요. 파란 꽃잎 두 장 아래 노란 꽃술이 세 개 그리고 긴 자루가 튀어나온 꽃술이 세 개예요. 그 밑으로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하얀 색 창 모양의 꽃잎이 한 장 더 있고요. 꽃 술 여섯 개는 모두 수술인데 노란 수술은 그냥 색깔만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있는 헛수술이랍니다. 나머지 세 개 중 두 개는 작게 꽃밥이 뭉쳐있지만 가장 길쭉한 것은 노란 꽃술처럼 리본 모양으로 치장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암술은 하나 있어요. 곤충들을 불러모으기 위해 온갖 교태를 부리고 있는 셈이지요. 샛파란 색과 샛노란 색이 아름답게 조화된 덕에 한나절만 피고 지는 달개비 꽃 진 자리는 통통한 씨앗이 영글고 있어요.
달개비는 어린 잎을 먹기도 하고 약으로도 쓰지요. 열을 잘 내리고 이뇨 작용도 하고 당뇨병에도 쓴다네요. 생 잎의 즙은 종기와 화상에 좋은 치료제라고 하니 한 포기 달개비가 품은 뜻이 참 많기도 하네요. 제 생각엔 이런 저런 효능 다 좋지만 가슴에 시심의 푸른 물을 고이게 해서 마른 가슴을 치료하는 달개비의 역할이 가장 훌륭한 것 같아요.
달개비의 본명은 닭의장풀꽃이에요. 속명은 닭개비, 닭의밑씻개 그리고 닭의발씻개나 닭의꼬꼬 등 여러 이름이 있지만 어릴 적부터 불러 온 달개비라는 이름이 제일 좋아요. 이제 꽃잎 열기 시작했으니 찬 바람이 날 때까지 피고지는 푸르디 푸른 꽃 바라보며 눈에도 가슴에도 온통 새파란 꽃빛에 젖을 수 있겠네요. 상상만으로도 고 작은 것에 눈이 부십니다.


첫댓글 달개비가 피기 시작합니다. 꽃빛에 절로 가슴이 젖습니다. 긴 글이라 망설이다 옮겼습니다.
자신의 모습을 살짝 공개했네요. 예전 어느 식물모임 진행을 6년여년간 맡았을 때에 만났으리라 생각했는데, 사진을 보니 기억이 없는 듯 합니다. 아무튼 시간을 소비하면서 많은 자료를 올려주시는데 대해 고마움의 인사를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제 고향(성주) 근처에 사신다기에 왠지 좀 더 친근한 느낌이 들던 숲속들꽃님... 이렇게 뵙네요.^^* 다음부터는 '파랑색'이라 부르지 말고 '달개비꽃색' 이렇게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옷 색깔이 꽃색과 정말 똑같아요.^^
이뿐맘 느껴 집니다. 화사한 미소속에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