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포에 다녀왔다.
언제라도 꼭 한번은 가고 싶던 곳, 구룡포!
구룡포 호미곶 등대는 자주고름 저고리를 입은 언니가 동무와 어깨동무 하고 찍은 사진 하나로 오랫동안 나에게 각인 되어 왔다. 그러나 막상 구룡포를 찾은 것은 반세기가 지난 후, 그 언니가 이미 이 세상을 떠난 후였다.
몇 번 경주에 가서 감포 대왕암에 들릴 때면 구룡포 몇 키로 라고 쓴 표지판을 보고는 거기서 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특별히 가야하는 관광지가 아니고 또 일행들이 있어서 가지 못하고 돌아 오곤 하였으나 이번 가을 세미나에는 같이 가는 동료들에게 ‘구룡포가 내 고향이니 이번엔 꼭 가보자“ 사정을 하고는 길을 떠났다. 마지막 날 아침, 세미나 일정을 서둘러 끝낸 우리는 도중에 기림사, 감은사지를 둘러보고 감포 대왕암에 도착했다.
대왕암 바위엔 무수히 많은 하얀 갈매기 떼가 앉고 서고 은빛 바다위를 미끄러지듯 날고 있었다. 대왕암엔 특히 갈매기가 많다고 하던가? 칠십년대 어느 때 고등학생시절 갑자기 대왕암을 발견하였다고 신문이나 방송에 대서특필 했던 때가 있었다. 국사 선생님이 당신이 배웠던 어떤 사학자가 감은사와 연결하여 어디엔가 문무대왕의 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여 항상 감은사지를 걸으며 문무대왕의 묘를 찾으려 했는데 ‘바로 거기였다’고 흥분해서 말씀하셨었다. 그러나 얼마 후에는 지역 주민들에겐 오래전부터 그 바위가 대왕암이라고 불려 왔었다고 하며, 일종의 언론 플레이라고 비판한 일이 있었다. 아마 그 후부터 삼국유사나 구전되어 오는 얘기들을 단순히 설화로 보지 않고 역사로 보는 시각이 생기지 않았나 싶다.
대왕암을 바라볼 수 있는 해변의 횟집에서 매실주 한잔씩 하며 기분 좋게 취한 우리는 새로 산 산타페를 운전하는 동료에게 구룡포에서 깨워 달라고 하며 늦은 점심후의 나른한 포만감을 즐기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갔을까?
‘내리십시오, 구룡포에 도착했습니다“ 하는 운전하는 동료의 고함에 놀라 깨어보니 옆자리의 동료는 제법 코까지 드르렁 드르렁 골며 자고 있었다.
그렇게 구룡포에 도착하였다. 그리워한지 반세기만에......
한국전쟁이 끝난 후 부모님은 피난지인 포항에서 그냥 눌러 앉게 되셨다. 원래 아버지의 고향이 이북이기 때문에 어디나 타향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때 예닐곱살인 큰언니는 구룡포 바닷가에서 가장 이쁘고 깜찍한 계집애였다고 한다.
"그때는 아이들이 소꿉장난 하며 노는 것도 보따리 보따리 싸서 이고 들고, 등에는 베개 하나씩 업고 피난간다고 주욱 바닷가를 가곤 했단다. 어느 때는 피난 간다고 마침 바닷가에 매어 놓았던 배에 올라 탔는데, 그 배가 파도를 따라 매어진 끈만큼 바다로 나가자 아이들이 배 떠나간다고 울고 불고 하다가 해변에 닿자 얼른 내리곤 다시는 배에 타지 않았다, 전쟁후라 아이들이 노는 것도 다 피난가는 놀이였나보다“ 고 언니가 말하곤 했다.
언니는 항상 구룡포를 그리워했다. 아침이면 바닷가에 나가서 파도에 떠 밀려온 미역, 펄펄 뛰는 물고기를 주워서 집에가면 엄마가 끓여주셨고, 낮에는 동네 언니들을 따라 바다속에 들어가 미역을 따곤했다고 한다. 집에 와서는 어린애가 겁도 없이 바다에 들어 갔다고 엄마에게 혼나곤 했지만 그때가 가장 즐겁고 아름다웠던 때라고 하곤 했다.
어느 해 명절에 엄마는 자주색 비단을 구해서 언니 저고리에 비단 옷 고름을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그 옷을 다 만들때까지 방을 들어 왔다 나갔다 하며 “ 엄마 , 다 됐어?, 얼마나 더 해야돼?를 수십번도 더하고 마침내 옷이 완성되자 입고선 앉았다 일어났다하며 자주색 옷 고름이 쫘악 펴지는 것을 보며 얼마나 좋아 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 때 마침 마을에 들른 사진사가 있어서 구룡포 등대 앞에서 친구와 둘이 어깨동무하고 사진을 찍어 주었단다. 가장 이쁜 옷인 자주색 옷 고름의 치마 저고리를 입고선 좋아라 카메라 앞에 서있는 아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웃음을 짓고 있다.
얼떨결에 동료의 고함소리에 잠이 깬 나는 한참은 현실과 과거 사이를 오락가락해야 했다. 그 가난한 어촌은 어디인가?. 그때 세상에서 가장 높았던 등대는 어디 있는지? 몇 년전에 구룡포 호미곶 등대가 등대 박물관이 되었다는 것을 신문을 보고 알고는 있었다. 또 2000년 새해 아침, 새 천년이 시작되는 호미곶 등대에 기념 조형물을 세우고 새천년이 시작되는 날, 이곳 영일만 구룡포에서 새 해를 맞았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내가 생각했던 가난한 어촌은 어디가고 커다란 기념관이 서 있고 해를 맞이하는 커다란 손모양의 조형물이 있는 호미곶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우리는 등대 박물관 안으로 들어 갔다.
우리나라에 가장 먼저 생긴 등대는 1903년 인천 팔미도에 생긴 등대이고 이 호미곶 등대는 1908년에 세웠다고 한다. 입구에 그 동안의 변천사 사진이 있었다. 그러나 사진은 1958년 사진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바닷가, 바위만 몇 개 있는 옆에 우뚝 솟은 등대, 그렇다, 바로 언니의 사진에 나온 그 등대, 그 바닷가였다.
감회가 새로워진 나는 문 앞에 앉아 있는 젊은 안내원에게 다가갔다.
“ 1908년에 세운 처음의 그 등대가 지금도 있나요?”
“예, 바로 저 아래에 있는 등대가 그 등대입니다. 빛을 밝히는 방식만 달라졌을 뿐이지 지금도 그 당시의 등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몇 년전만 해도 관광객이 안의 층계를 통해서 올라 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일반인은 들어 갈 수 없습니다”
“ 지금 전시되어 있는 사진은 58년도의 사진이네요? 저한테 53년도의 등대 사진이 있는데 필요하시면 드릴 수 있습니다. 저희가 여기서 53년도 쯤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 예, 감사합니다만 그러나 더 전의 사진도 있을 것입니다”
젊은 직원은 별 이상한 사람도 다 본다는 듯이 쳐다본다.
“저는 등대가 첨성대 같이 둥그스럼하게 생겼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 보니 길쭉한 나팔모양이네요? 아주 높지도 않고.........”
그러나 당시 게딱지만한 초가집에서 사는 어린 계집아이에겐 저 등대는 세상에서 가장 큰 건물이었을 것이다. 밖으로 나와 등대를 한참 쳐다 보았다. 커다란 박물관 옆, 멋진 건물들 사이의 등대는 그 황량한 바닷가의 우뚝 속은 등대를 연상하기에 너무 어려웠다.
원래 이곳은 영일만으로서 삼국유사에 보면 제8대 아달라왕이 즉위한지 4년 정유년(157)에 동해가에 연오랑과 세오녀가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위가 두 사람을 일본으로 태우고 가서 자기들의 왕으로 받들자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왕이 사신을 보내 두 사람이 오기를 청하자 이미 왕이된 연오랑은 귀비인 세오녀가 짜 놓은 비단을 보내어 하늘에 제사지내도록 했고 그 말대로 제사지냈더니 해와 달이 예전처럼 빛을 되찾았으므로 그 비단을 임금의 곳간에 간직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 )라하고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 연오랑과 세오녀는 신라에서 해를 향하여 제사 지낼때 쓰는 비단을 짜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을 거라는 학자의 얘기를 본 적이 있다.
“ 여기 구룡포 호미곶 등대 앞이야, 귀남이네가 여기서 머니?”
핸펀을 받은 동생은 어떻게그 먼데까지 갔느냐고 깜작 놀라면서 귀남이네는 아주 바닷가가 아니고 좀 떨어진 언덕을 지난 마을이라고 한다. 바닷가의 상가는 근래에 관광객을 위해 조성되어진 마을인가보다. 몇 년 전 언니가 돌아 가신 후
‘나 죽기전에 꼭 한번 구룡포에 가고 싶다“ 고 원하시던 엄마를 동생이 모시고 간 적이 있었다. 50년도 전의 일이니 노인이 찾을 수 있을까 싶었으나 막상 구룡포 바닷가에 도착해서는 그 마을을 신들린 듯이 찾아 가시고 희미하게나마 옛날 길이 남아 있는듯 앞서서 막 가시더니 어느 집 앞에서 ” 귀남이 엄마“를 부르시더란다.
깜깜한 밤중에 밖에서 찾는 소리에 문을 벌컥 열고 나오신 할머니에게
“내가 정희 엄마여!” 하시니 지금은 할머니가 된 귀남이 엄마는
“ 정희 엄마를 생전에 만나다니 이게 꿈이여, 생시여!” 하며 말을 못 이으시더란다.
옆에서 보고 있던 동생도 “정말 꿈을 꾸는 것 같더라”고 말했다.
구룡포 바닷가에서 가장 이쁘고 깜찍한 어린 계집애였던 언니는 오천으로 이사하고 시름시름 앓고 난후 더 이상은 이쁜 계집애가 아닌 괴상한 몰골의 어디를 가도 아이들이 흉보고 따라 다니는 꼽추가 되었다. 그래서 가엾은 언니는 항상 구룡포를 그리워 하고 , 등대 앞의 그 사진을 보면서 ‘그때로 다시 돌아 갈 수 있다면........’하고 아쉬워 했다.
“ 눈발도 날리니 빨리 와, 조심하고,,,, 귀남이네는 다음에 나랑 같이 가”
이제 하나뿐인 남은 동기간인 동생이 걱정스러워서 전화한다.
언니가 그렇게 그리워 하던 구룡포 바닷가에 왔건만 어디에도 언니의 자취는 없었다. 그러나 바닷가 어디에선가 이쁘고 깜찍한 작은 계집애로 다시 돌아 간 언니가 팔짝팔짝 뛰어 노닐며 나를 향하여 손을 흔들며
" 얘야, 내 자취를 찾아 주어서 정말 고맙다" 하는 것 같았다.
구룡포 호미곶 등대앞에서 마침 동네에 온 사진사 아저씨의 카메라 앞에서 동무와 어깨동무를 한 자주빛 고름의 치마저고리를 입은 작은 계집애가 환히 웃고 있다.
사진사 아저씨의 '웃어!'하는 소리에 맞춰........
첫댓글 님에 글을 읽노라면 그리움이랄지...따뜻함이랄지..암튼 기분이 좋아져요..즐감하고 갑니다.
언니에 대한 사랑이 너무 크시네요.자매간의 끈끈한 정이 묻어 나는 글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예산문학에 실린'내 곁에 왔던 부처'를 생각하며 눈물겨웠습니다. 추운 겨울날 저도 호미곶 바닷가에서 커다란 손 조각을 보았던 수년 전의 일이 기억나네요. 구룡포에 과메기 먹으러 가고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