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M의 목표 주가는 0달러다.”
도이체방크는 11월 10일 GM에 사실상 사망선고를 내렸다. 이 은행 로드 루슈 애널리스트는 목표주가 0달러에 매도의견을 내며 “GM은 정부 지원이 없으면 파산이 불가피하고 생존해도 기존 주식의 가치가 전혀 없다”고 밝혔다. GM 주가는 11월 11일 66년 만에 최저치인 2달러 75센트까지 추락했다.
1942년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의 주가보다 낮았다. 2000년 4월 28일 주당 93달러 63센트까지 올라갔던 GM 주가는 1908년 이 회사가 처음 문을 열었을 당시 직원들의 평균 일당인 2달러 50센트보다 불과 쿼터(25센트 주화) 한 개가 많은 수준으로 전락했다. 마크 라느브 GM 미 영업부문 사장이 12일(현지시간) 딜러(한국의 대리점 개념이지만 각 딜러들은 독립사업자다)들과 직원들에게 전체 e-메일을 보내 거주지의 상·하원 의원들에게 구제금융 로비를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로이터가 보도했다.
e-메일의 내용은 “상·하원 의원들과 접촉해 250억 달러의 구제금융안을 조속히 처리할 것과 또 다른 250억 달러의 지원을 허용해 달라고 요구하라”는 것이었다. 이외에도 GM이 독일 정부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는 사실이 독일 언론을 통해 뒤늦게 알려지기도 했다. 전 직원을 로비스트로 만들 만큼 GM의 처지는 지금 참담하다.
GM·포드·크라이슬러 빅3가 몰락하고 있는 직접적인 이유는 극심한 판매부진이다. 전략 문제는 그다음 일이다. GM의 대표 상품은 단연 캐딜락. 효자 품목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픽업트럭과 미국인들이 ‘셰비’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대형차 위주의 브랜드인 ‘시보레’다. 이 차들의 공통점은 연비가 안 좋은 고출력 차종이라는 점.
GM은 연비보다는 ‘힘(출력)’을, 친환경이나 소형화보다는 금융 자회사를 키우는 데 주력했다. 하지만 올 들어 미국의 휘발유 값이 갤런당 1달러대 중반에서 한때 4달러까지 치솟자 미국 소비자들도 ‘연비’를 신경 쓰기 시작했다. 이때 도요타는 업계 최고의 전기배터리 기술을 바탕으로 하이브리드 차량인 프리우스를 양산해 미국 시장 점유율을 높여 나갔다. 뉴욕 등 대도시에서는 프리우스 택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하지만 GM의 하이브리드 모델인 ‘볼트’는 일러야 2010년에나 나온다.
할부 금융자회사의 ‘팽창경영’도 원인
이처럼 GM의 문제는 시장의 ‘패러다임 이동’을 읽지 못한 점에 있다. 업계 관계자는 “GM은 사실상 내수기업이나 다름없었다”며 “GM을 글로벌 자동차 메이커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고 말했다. 또 “한국에서 GM 차가 많이 팔리지 않은 것도 GM이 미국인이 좋아할 차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GM은 1981년과 1991년 두 차례의 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금융위기로 인한 실물경제의 위축이라는 외부 변수만 다를 뿐 당시와 똑같은 이유로 몰락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가 1997년 2월 발표한 ‘미국 자동차 빅3의 위기극복 사례’ 보고서는 GM 등 빅3가 ▶두 차례 석유파동으로 소비자들이 소형차를 선호했지만 이에 대처하지 못했고 ▶노사 문제와 비효율적 제품 개발로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도요타의 미국시장 공습을 막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11년이 지난 지금, GM이 몰락하고 있는 이유도 이와 다름없다. 조직 비대화로 관료주의가 팽배했지만 노조와의 고용계약 합의와 경영의지의 문제로 시장의 빠른 변화에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는 점도 과거의 오류를 되풀이한 것. 다만 GM 몰락의 또 다른 이유를 제공한 할부금융 자회사인 GMAC의 팽창경영이 다를 뿐이다.
GMAC는 원래 목적인 자동차 대출뿐 아니라 월가의 은행들이 다루는 주택대출(모기지)까지 취급하며 덩치를 키웠다. 결국 2006년 GM은 비대해진 GMAC를 크라이슬러의 모회사인 사모펀드 서버러스에 매각하지만 실기했다는 것이 업계의 설명이다. 결국 GM이 1980년대 들어 미 경제의 화두인 금융 등 서비스와 IT산업에 한눈을 팔면서 제조업체 본연의 모습이 상당 부분 변질돼 몰락 위기를 맞게 됐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반면 2007년 세계 1위로 발돋움했던 도요타는 제조업 본연의 자세를 지켰다. 미 자동차 빅3의 2차 위기였던 1990년대 초반, 도요타가 선전할 수 있었던 데는 부품 공급체제를 개선하고 불량률을 크게 줄이는 품질 최우선 경영전략이 큰 힘을 발휘했다. 류기천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 선임 연구위원은 “GM이 고연비 차량 등 신성장엔진을 만들어내지 못해 도태된 것은 기술집적 산업인 자동차 산업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말했다.
GM은 1970년대까지 미 자동차산업을 이끌었다. 미 제조업의 상징이었다. 메릴린치의 첫 번째 흑인 CEO로 이름을 남긴 스탠리 오닐 전 회장은 GM의 생산라인에서 일하던 근로자 출신으로 사내 대학을 마치고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에 갈 수 있었다.‘강한 GM’을 상징하며 2008년 모델까지 나온 픽업트럭은 대표적인 저기술력 제품이다.
이 차는 단순한 프레임과 차체에 오래된 대형 엔진이 전부다. 기름은 많이 먹어도 힘이 셌고 덩치도 컸다. 구닥다리 아이디어로 포장하고 브랜드 마케팅으로 치장한 제품이 벌어다 주는 자금은 그런대로 달콤했지만 치명적이었다. 사업구조 재편의 기회를 놓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GM은 포드를 처음으로 뛰어넘었던 1931년 당시 경쟁사의 실수를 그대로 답습했다. 포드는 T형 포드로 성공했지만 시장의 요구와 상관없이 한 가지 모델만을 고집하면서 GM에 따라잡혔다. 그리고 지금 GM은 ‘힘센 미국, 힘센 GM’을 고집하면서 도요타에 따라잡혔다. 이제는 생존을 걱정하는 처지가 됐다.
도요타는 ‘문제 없는 곳에서 문제점을 찾아낸다’는 장인정신으로 재고 절감과 공정 최소화로 기술력을 키웠다. 도요타는 자사에 납품하는 업체에도 이 같은 공정개선을 그대로 적용했다. 컨설팅업체 베인&컴퍼니는 “도요타는 연구개발 등 전 분야에 구축된 글로벌 네트워크를 활용해 2008년형 캠리를 이른 시간 내에 만들 수 있었다”며 “자동차 산업은 시장의 트렌드를 빨리 읽고 실행해야 성공할 수 있는 산업”이라고 설명했다.
전통적으로 강성인 노조도 GM의 세계화에 발목을 잡았다. 일본의 도요타·닛산·혼다에 이어 현대차와 기아차도 미 빅3 공장이 밀집해 있는 북부 디트로이트시 대신 남부 조지아주·앨라배마주 등에 공장을 세웠다. 무노조 경영이 가능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BMW와 메르세데스 벤츠도 남부인 앨라배마주와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현지 공장을 두고 있다.
GM은 1990년대 초반 미국자동차노동조합(UAW)과 30만 명 고용보장을 약속해 당시 구조조정 기회를 잃고 말았다. 노조는 올해 일부 공장에서 파업을 강행, 전·현직 근로자의 의료보험을 회사가 펀드 형태로 지원하는 합의를 이끌어냈지만 회사 금고는 텅 빈 상태다.
살아난다 해도 경쟁력 회복 미지수
미 자동차연구센터(CAR)는 최근 자동차산업 종사자가 빅3에만 23만9000여 명, 연관기업 포함 73만2000여 명이라고 발표했다. 자동차와 연계된 서비스업 종사자 등 폭을 좀 더 넓히면 미 국민 중 300만 명이 자동차를 통해 생활하고 있다. 이들을 위해 오바마 대통령 당선인이 미 자동차 업계에 공적자금을 투입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업계의 전망이다.
GM을 포함한 미 빅3 자동차 회사가 눈앞의 유동성 위기를 나랏돈으로 극복한다 해도 연구개발과 양산에 이르는 길고 긴 과정을 자력으로 딛고 일어나야 한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언제 미 자동차산업이 회복될지, 과연 회복 가능성은 있는지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다. GM의 자산은 9월 현재 160억 달러로 석 달 만에 60억 달러가 줄었다.
GM이 매달 필요한 운영자금은 약 110억 달러. 이 때문에 그나마 남은 자산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파산보호 신청을 하고 구조조정에 주력하라는 주장도 많다. 뉴욕타임스는 11월 13일 다트머스대 교수 등의 말을 인용해 “구제금융보다는 파산보호 신청이 좀 더 빠를 수 있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전했다. GM이라는 굵직한 기업이 만들어지는 데는 100년이 걸렸지만 몰락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장의 요구에 등을 돌리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기업이 과연 있을까.
영광과 좌절의 100년
세계 1위 자리 76년 지킨 수퍼 파워
2008년 9월 16일. GM 창사 100주년 기념행사에는 2010년 출시 예정인 하이브리드 차량 시보레 ‘볼트’와 소형 컨셉트 차량들이 대거 등장했다. 지금까지 GM의 문제점으로 지적돼온 첨단, 소형 차량을 드디어 들고 나온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