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1,000년 … 400년, ‘고려다완’ 그 뿌리를 캐다 “일본 국보급 ‘고려다완’의 역사는 1,000년 전 사천 구룡 가마에서 시작됐다”
▷ 기획연재를 시작하며
‘뿌리없는 열매는 없다’ … 일본 국보급 ‘고려다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10여년 동안 ‘고려다완’의 뿌리찾기에 매달려 과학적 실험연구와 체험적 실체 확인 등을 해온 도예가 토승 김남진씨의 일본 국보급 ‘고려다완 이야기’를 취재, 기획연재하면서 그가 밝혀나갈 기획연재에 많은 전문가들과 사기장들을 비롯한 모든 시민들의 관심이 모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앞서 본지에서 밝힌 과학적인 증거자료 뿐만 아니라 다양한 각도에서 ‘고려다완’에 접근해 나가는 ‘사천 가야비파 구룡요 토승 김남진의 고려다완 이야기’는 고정화되고 편견된 입장에서 벗어나 모든 이들이 가슴을 열고 우리 스스로 옛 모습을, 우리 민족만이 가진 독특한 문화의 아름다움을 되돌아 보는 소중한 계기가 될 것이다.
‘고려다완 이야기’는 앞으로 20여회에 걸쳐 계속될 김남진씨의 기획으로 이와 관련해 매주 1회씩 더 많은 연구와 탐사가 이뤄지길 바란다.
또한 이번 기획으로 도예 문명국이었던 우리민족의 자존심을 되찾고 정신적 상실감으로 이어졌던 치욕의 일제 강점기를 극복, 21세기에 걸맞는 새로운 도자기 문화를 재창출 할 것으로 확신한다.
가야비파 구룡요 토승 김남진의 ‘고려다완’ 이야기 ①
“‘고려다완’의 연구 과정을 공개함에 앞서 이 지역에서 오래전부터 살면서 이곳 역사를 연구하며 느낀 열정을 그대로 알려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한 옛 도자기 역사를 연구한 발자취란 것을 밝혀둔다”
다른 지방에서도 많은 전문가들이나 사기장, 연구가 등의 고려다완(일명 이도다완) 등에 관한 체계적이고 정확한 가마터 흔적의 발견과 그곳의 태토 등으로 연구결과를 발표하고 알리는 노력들이 있다는 것은 우리역사의 우수함을 세상에 알리는 아름다운 일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 전국에서 그 지방 고유의 역사와 함께 공유해야할 우리 모두의 문화적 가치이기 때문.
이에 필자가 주장하는 ‘고려다완’의 역사에 대한 연구결과는 다른 지역의 이도다완에 관한 연구결과를 부정하는 것은 절대 아니며 필자는 지금까지 사천시 사남면 구룡요의 태토와 사천의 역사를 가지고 연구, 그 특이한 역사 때문에 이곳에서 생산되었던 사발들이 고려 찻사발의 한 원류의 문화를 가졌을 것이라는 확신인 것이다.
일본에 빼앗겨 그 고향마저도 올바르게 알려주지 못한 ‘고려다완’이라 말하는 옛사발들의 뿌리를 찾고 우리가 지닌 역사와 문화를 정확히 인식시키며 아울러 잃어버린 우리 사발의 원뿌리를 그대로 밝혀 그동안 잘못 인식돼온 우리조상들이 남긴 훌륭한 도예 문화 및 역사를 바로 자리매김하자는 데 기획연재의 참뜻이 있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 고려 8대왕 현종의 역사와 삼밭골 옛 가마터 누가 뭐래도 일본에서 국보가 된 ‘이도다완(井戶茶碗)’의 뿌리는 일본이 아닌 우리나라이며 그 찻잔을 태동시킨 것은 1,000년 전 ‘고려다완’의 기나긴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가 운명적으로 만난 옛 가마터의 흔적이 1,000년 전 고려 8대 임금 현종과 그 아버지 왕욱의 전설 같은 이야기와 맥을 같이할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어린 시절 내가 배운 우리나라 역사교과서나 야사나 전설 같은 데서도 별로 들어보지 못한 사연들이였다.
그러나 구 사천군지나 정동면지 등에는 1,000여년 전 고려 8대왕 현종과 그 아버지 왕욱에 얽힌 이야기가 자세히 기록돼 있으며 특히 정사인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에 정확히 기록되어진 사실적 역사로 기록돼 있다.
고려왕조를 세운 왕건의 여덟 번째 왕자 왕욱이 자기 조카였던 경종의 비(헌정왕후)와 사통해 고려사에서는 전무후무한 사건인 ‘난륜의 죄’를 범해 당시 이름 없는 벽촌에 불과했던 이곳(당시 강주. 지금의 진주) 사수현에 귀양(성종 임진11년)오면서 이곳은 아주 특이한 역사를 태동하게 된다.
왕욱의 아들 순(고려 현종)은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고 숱한 견제를 당하며 어린 나이에 이 곳, 지금의 사천시 전동면 배방사로 보내져 살다 이곳저곳에서 힘든 나날을 보내던 중 강조의 난으로 왕으로 등극하면서 험난했던 잠룡시절을 떨쳐내고 인생의 반전을 맞이한다.
현종이 배방사에서 지내던 잠룡시절 때 아버지 왕욱은 아들 순을 만나기 위해 귀양지인 삼밭골 가마터 부근에서 이구산을 넘어 정동 배양사지로 한나절 거리를 넘나들던 산자락을 고자봉이라 부르며, 아들이 있는 배방사를 항시 산마루에서 돌아봤다는 사실이 지금의 정동면과 사남면 능화봉의 주봉인 이구산 산자락에 옛 흔적을 간직한 채 그 기막힌 사연을 말해주고 있다.
현종이 어린 시절을 배방사에서 보낸 슬픈 사연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 여러 향지 배방 사조를 보면 이와 관련된 고사가 어김없이 실려 있다.
그리고 현종이 머문 배방사지 옛터에서 이곳 사천 구룡 가마터에서 구운 1,000여년 전의 녹유항아리가 발견됐다는 것.
지난 1996년 8월 발견, 세상에 알려진 이 항아리들이 곡물 저장용으로 사용된 실체를 접하면서 배방사와 왕욱, 그리고 삼밭골 가마터, 능화봉을 잇는 전설같은 이야기들이 재탄생 될 수 있었다.
1,000여년 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민요가마터의 실체는 바로 고려 현종의 역사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역사는 항시 파편을 남기고 그 흔적 속에 오늘이 있는 것.
결국 고려 8대왕이 된 현종은 이곳 사천지역을 풍패의 고향이라고 해 최대의 특혜를 내린다.
현종은 어린 시절 사천 땅의 곡식을 먹고 자란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해 이 지역 농민들을 위해 관장으로 되었던 토지를 주었다.
승지에 칙령으로 “사주는 왕이 일어난 땅인데 궁장용으로 일부를 몰수해도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은 벙어리 냉가슴 앓듯이 더듬거리고 말 한마디 하지 못했는데 지금부터 관전(公田)으로 되었던 많은 땅을 농민에 다 돌려주어라(泗州是豊시之地煎此抽減田屬之宮庄 民不堪征稅吃語境內 審量公田如數償地從之)”라고 했다.
그 특혜 속에 ‘관요’ 중심으로만 운영되어온 도자기 문화는 이곳 사천 땅에서만 독창적이며 탁월한 기법의 도자기가 탄생되어 진다.
녹유로 된 사발이, 그것도 현재 일본이 국보로 모시고 있는 이도다완과 형태나 모양이 똑같은 사발이 1,000여년 전부터 이곳 삼밭골 가마터에서 구워진 것이다.
비취색 고려청자가 아직 탄생되지 않았던 990년대의 사천 땅은 배방사에 기거한 현종의 인연으로 그곳에서 사용된 모든 그릇들이 삼밭골 가마터에서 생산되어진 관계로, 그리고 현종의 아버지 왕욱의 귀양장소가 가마터 주위였고 그의 무덤 또한 인근(능화봉)에 있는 연유로 고려 왕실은 이곳 가마터만은 독창적인 민요 가마터로 인정했다.
이때부터 삼밭골 가마터를 중심으로 수준 높은 민요 도예의 역사가 시작되게 된다.
그 역사의 이어짐이 고려다완이라 말하며, 일본말로 ‘이도다완’이라고 하는 특이한 도자기가 탄생되는 문화의 뿌리를 갖게 된다.
토승 김남진(金南珍)씨는 1960년 사천군 사남면에서 출생해 학창시절 4-H운동, 20대에 향토사 연구를 하면서 고향에서 농민운동에 앞장서 왔다. 지역 신문사를 하며 사천 구룡 일대에서 발견된 옛 가마터를 발견하면서 본격적인 고려다완 실체 연구 및 관련 역사 규명을 시작했다.
이후 일본을 오가며 고려다완의 실체 연구와 함께 가야비파구룡요를 개요해 현재 전통 방식으로 실험과 연구를 하면서 직접 도자기를 만들어 굽고 있다.
▶ 관련 경력사항 △1996. 사천지역 역사 탐방서 옛 가마터 발견 △2000. 아가노야끼 개요한 존계선생 관련 기록 발견, 존계 후손 방문 △2001. 구룡도요지 도지정기념물 제233호 지정받음 (’97년부터 3차례 조사) △2002. 日 후쿠오카현 다가와군 아카이케쵸 만남의 관장에 ‘한일 영원한 우호의 비’ 건립 (일본서 감사장 받음) △2003. 경남문화재연구원 구룡요 시굴결과 고급 도기가마터로 판명, 日 전 수상 호소카와 초청 日 교토 방문 △2003 ~ 2006. 서울 코엑스 국제 차문화대전 4년 연속 참가 △2005. 구룡요 태토 이도다완과 같다는 과학적 분석(日 후쿠오카현 공업기술 연구소) △2006. 고려다완 연구에 대한 결과 발표.
일본과 ‘고려다완’, 그리고 도자기 전쟁 ‘도자기전쟁’참회딛고 발굴된 1,000년의 흔적들
경남문화재연구원이 지난해 3월 사천시 사천읍 선진 매향비 주변에서 발굴한 왜성의 성문터(너비 150㎝ 길이 250㎝ 규모). 국내에서 왜성 발굴사례가 많지 않아 발굴조사에서는 여태껏 성문터가 확인되지 않았다. 이는 1597년(선조 30년)에 왜군이 퇴군의 거점으로 급히 축조했던 것을 그 이듬해 다시 쌓았다는 기록과 부합하는 발굴자료도 확인돼 사천 선진성이 임란 당시 일본군의 거점이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고려 8대왕 현종으로부터 독창적인 민요 가마터로 인정받은 사천 삼밭골 가마터를 중심으로 수준 높은 민요 도예의 역사가 시작됐다.
그러나 그런 연유로 인해 이곳은 400여년 전 임진왜란 당시 가장 참혹한 상처를 입은 피해지가 됐다. 그리고 역사의 뒤안길에서 잊혀져 왔으며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그 같은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천년전의 이곳에서 일어났던 고려 현종의 이야기와 함께 민족의 최대 수난사중 하나였던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에 끌려간 수많은 사기장들이 오늘의 일본이 근대국으로 성장한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점에서 더욱 이곳의 역사를 올바르게 알려야 하겠다는 의무감을 느낀다.
이곳의 역사가 흔적도 없이 매장된 것은 임진왜란 7년 전쟁 중 마지막 2년인 정유재란, 일명 도자기 전쟁의 참화 때문.
일본은 정유재란때 조선의 사천 땅을 최대 약탈지로 지목, 사천 선진성에 본진을 두고 이 일대 도공, 양민, 문화재를 싹쓸이 해갔으며 화려한 불교문화를 꽃피게 했던 사찰을 모조리 불태워 버리고 도공들의 집단 마을이었던 삼밭골 도요지 모두를 흔적 조차 찾아보기 어렵게 파괴해 버렸다.
“사천, 고성, 곤양, 순천 등지에는 인가가 전혀없고 그 전면에 당포, 사량 사이까지 형편없이 비워져 있어 매우 염려됩니다. 그 곳에 사는 백성들을 5~6년 세를 면제해주며 관에서 모든 것을 일체 관여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체찰사 이덕형과 부사 한중겸이 선조와의 문답에서 영곂3?연해지방의 상황을 요약한 이와 같은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천 일대 피해의 심각성은 처참함 그 자체였다.
그 후 일제강점시대때 일본은 이 같은 만행을 위장하기 위해 고려 현종이 잠룡시절 기거했던 정동 배방사를 저절로 망한 사찰로 기록했다.
필자는 배방사의 역사와 사지를 집중탐사를 시작해 잿더미로 변한 탄화미와 조등 등 관련 유물을 접하면서 정유재란때 방화에 의해 소실된 증거를 찾았다.
특히 이 과정에서 그렇게 찾고자 했던 삼밭골 가마터에서 생산된 녹유를 비롯 흑유, 회유의 항아리들의 흔적들을 찾을 수 있었다.
이곳 산자락 아래 현종의 아버지 왕욱의 귀양지에서 일본의 국보가 된 ‘고려다완’의 가마터가 1,000여 년간의 숱한 일화를 간직하고 정유재란 이후 400여 년간 잊혀진 채 매장돼 있다가 지난 1996년 8월에 발굴, 세상에 알려지면서 배방사의 역사와 함께 고려다완의 역사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일본은 지금 이곳을 중심으로 우리나라에서 약탈해간 사발들을 ‘고려다완’이라고 이름 지어 부른다. 1598년 조선중기 정유재란때 약탈해간 이 사발을 일본인들이 ‘고려다완’이라 부르는 이유는 이 사발의 실체가 분명 고려시대 찻잔으로 사용되었기 때문.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는 각 사찰마다 다도문화가 발달했다. 전국 관요에서는 고급스런 청자찻잔이 만들어져 소중히 사용됐으나 일본인들은 감히 욕심도 내지 못했고 일본으로 수출도 하지 않았던 것.
그러나 ‘문화특구’로서 고려왕실의 극대한 대우 속에 독창적으로 번성한, 자유분방하면서도 개성이 살아있는 많은 찻사발을 생산한 이곳 사천구룡 가마터 및 그 주위 도요지에서 만큼은 일본과의 왕래가 있었다는 점이 이곳에서 일본인들이 말하는 ‘고려다완’의 역사가 시작됐음을 알 수 있다.
일본이 자랑하는 ‘이도다완’의 완벽한 작품성도 바로 이 가마터의 독창적인 민요 운영의 자율성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고 이곳에서만 나는 특이한 태토와 유약성분 등으로 더더욱 그 사발을 신비의 사발로 만든 것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옛 가마터의 흔적 속에서 이곳 사천 땅에서 일어났던 1,000여년 전의 역사와 고려왕실 문화가 탄생시킨 고려 현종의 풍패의 고향에서 일어난 불교문화와 특이한 민요 가마터 탄생 이야기, 400여년 전의 임진왜란.
그리고 이곳에서 자손대대로 그릇을 빚다 임진왜란(1592년10월) 당시 일본의 왜장 모리길성(4군대장)에게 피납되어져 400여년간 그 족보를 규명하지 못하고 살아온 옛 도공들.
필자가 옛 가마터 발견과 함께 찾은 존계선생의 원 고향이 이곳 사천이며 그 자손들이 일본에서 아직까지 도자기를 하면서 가업을 계승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일본에 잡혀간 도공들 중 ‘존계선생’의 그 기구한 운명과 그의 뿌리 찾기와 일본의 존계선생 후손과 아가노야끼 400년제 실행위원들이 정확하게 그 가마터를 확인하고 공식적으로 인정한 그 뿌리에서 찾아낸 ‘이도다완’의 비밀….
또한 ‘이도다완’을 빚었기 때문에 납치해 갔다는 모리길성 17대 후손 모리 야스가나씨의 413년만의 증언도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특히 하기야끼를 개요한 이작광, 이정의 고향이 존계선생과 같다는 일본작가의 글(와따나베 시게인의 ‘이작광, 이정의 고향풍경’), 이곳 흙에서만 나타나는 ‘이도다완’의 유전자의 실체들….
이 모든 것을 세상에 알리면서 필자는 10년 전 처음 옛 가마터를 발견하면서 시작된 ‘고려다완’ 뿌리 찾기를 통해 400여 년 동안 일본에 끌려가 한으로 살아온 이 땅의 도예공의 후손들에게 다완의 실체와 임진왜란 당시 피랍된 도공의 뿌리 찾기의 과정을 하나하나 정밀하게 분석해 그동안 연구한 모든 과정을 세상에 그대로 공개하는 것이다.
뿌리를 찾지 못하면 영원히 우리 것이 아닌채 일본 것이 되어버릴 ‘고려다완’의 실체. 이젠 우리가 그것을 규명해내고 찾아야 할 때이다.
토승 김남진의 ‘고려다완’ 이야기 ③
조선 도공 예술혼 짓밟힌 고난과 질곡의 세월 시작 日 7대요 ‘아가노 야끼’ 개요 도공 존계
지난 2000년 7월 구마모도에 있는 존계 묘지 참배 모습. (사진 중앙은 존계 장남의 13대손 아가노 히로유키)
임진왜란중 7년간 일본은 조선인 10여만 명을 자기 땅으로 끌고 가 유럽의 노예 시장 등에 팔았으며 이 기간에 도공들도 1,000여명 정도 강제로 붙잡아 갔다.
이때부터 조선 도공들의 고난과 질곡의 세월이 시작되는 것이다.
일본으로 끌려간 도공 가운데 유일하게 기록을 남긴 존계. 일본 7대요의 하나인 아가노 야끼를 개요한 도공 존계에 대해 먼저 알아본다.
도공 존계에 대해 아가노가의 선조부 등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일본의 명왕신종 무렵 조선 부산에서 성주를 존익, 그 아들을 존계라 말하고 있다.
신종 만력42년 가덕 주계 두청조선에서 개선 때 일본으로 이주해 번성하기 전의 나라 당진(카라쯔)에 잠시 머문다.
그 후 존계는 조선으로 다시 건너가 고려도법(고려다완)을 전수, 다시 귀국한 후 경장7년 호소카와 풍전국에 입성한다.
아가노에서 도기를 제작하며 항명을 가명으로 바꿔 면직시켜 존계를 상야희장이라고 칭한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그리고 또 다른 기록에는 ‘존계는 사천현 십시향 출신…풍전소창의 성주 모리일기 수승신을 따라 귀화’라고 전혀 다르게 적혀있다.
이에 필자가 옛 가마터 발굴과 함께 존계선생 후손을 찾아갔을 때(2000년7월) 동행했던 정동주 선생(‘조선막사발1,000년의 비밀’저자)이 앞서 기술한 부산 성주 아들 존계란 기록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아가노야끼 400년제 실행위원회와 존계 후손이 구룡요 답사 및 2년간의 검증 끝에 사천 구룡지역 가마터가 아가노를 개요한 존계 선생의 가마터가 맞다며 공식 인정했다.
이어 이를 기념하는 ‘한일 영원한 우호의 비’를 ‘아가노야끼 400년제’행사 때 사천시 사남면 화전마을과 일본의 아카이케쵸 만남의 광장 2곳에 세우게 된다.
필자가 꾸준한 연구와 검증으로 다시 밝힌 존계 선생의 내력은 이러하다.
존계는 400여 년 전 사천현 십시향에서 도기를 굽다가 임진왜란 당시 모리요시나리에게 피랍돼(1592년10월) 일본 당진(가라쯔)에서 체류하다가 정유재란(1597년)때 모리요시나리, 모리데루모토, 시마츠 등과 함께 사천 선진성으로 다시 찾아온다.
이때 훗날 하기야끼를 개요(1604년)하게 되는 모리데루모토는 조선도공 이작광과 같이 오며 동생 이경을 데려가게 된다.
존계는 이때 이도다완을 빚었던 옛 사천 구룡가마터에서 사용한 흙을 가져갔다.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 후 그의 아들 히데요리의 지지자 미쓰나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정면충돌(세키가하라 전투.1600년)로 치닫게 되며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승리로 일본 천하의 패권은 도쿠가와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이후 오사카 여름 전투를 마지막으로 일본은 도쿠가와 시대를 열며, 1602년 모리길성을 대신해서 풍전국 소창번주로 입성하는 호소카와 다다오끼의 명을 받들어 아가노야끼를 개요하게 된다.
그리고 존계는 30년 뒤인 1632년 구마모도로 영지를 옮기는 호소카와를 따라가면서 아가노에는 막내아들(도도끼)과 딸(와따리), 사위를 남겨놓고 장남(아가노)을 데려가서 팔대요(하찌다이)를 개요한다.
그 자손들이 일본 최초로 상감기법을 개발해 일천황가의 인정을 받으며 일본에서 유명한 발자취를 남기게 된다.
존계는 승응 3년 89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게되고, 그의 무덤은 구마모도에 있다.
존계는 세상을 떠났지만 자기가 자랐던 조선의 고향 이름 도동을 ‘도도끼’란 성씨로 남겼고 바다를 건너온 흔적을 ‘와따리’란 성으로 딸에게 남겼으며 구마모도로 데려간 장남에게는 일본에서 최초로 개요한 땅 이름 ‘아가노’란 성씨를 남겼다.
그가 세상을 떠난 100년 뒤 후손들은 가계족보를 기록하면서 존계가 남긴 성씨를 바탕으로 고향을 ‘사천현 십시향’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일본이 기록하지 않은 것을 존계는 후손들에게 3가지 성씨로서 자기의 흔적과 고향이름을 남겼고 400여년 만에 필자가 발견한 가마터와 아가노야끼에서 나온 그릇파편과 똑같은 것을 확인하게되고 기적이 400년만에 그 뿌리를 찾게 된 것이다.
지금 우리들은 이 십시향을 일본한자(十時)로 기록해 놓은 것을 찾으려고 하면 찾을 수 없으나 존계가 남긴 우리나라 이름으로 찾으면(도동→도도끼→十時) 그것이 바로 현재 사천시 사남면 화전리 구룡도요지 일원이다.
그리고 조선에서 피랍된 1,000여명의 조선 도공들은 큐슈일대 각 번주들이 7대요를 개요하도록 하면서 본격적인 자기생산을 하게 되는데 이를 기반으로 일본은 세계화에 눈을 뜨며 유럽시장을 석권, 차근차근 근대화에 성공하게 된다.
우리가 지금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간 조선 도공들의 역사와 뿌리를 분명하게 밝혀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일본이 오래전부터 400년 전의 도공 피랍의 역사는 인정하면서도 그 밖의 사실들은 대부분 일본 논리로만 기록해놓고 있기 때문.
그 대표적 예가 앞에서 밝힌 존계선생에 대한 2가지 기록이다.
필자와 정동주 선생이 바로잡지 못했다면 영원히 존계선생은 ‘부산성주의 아들 존계’로 기록돼 있을 것이며 이도다완의 실체 또한 그 기록 속에 묻혀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뿌리인 고려다완의 역사 조차 영원히 규명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와 그 배경들을 일본의 역사를 통해 고찰해 보면서 필자가 밝혀나가는 고려다완 이야기속의 너무 많은 안타까운 진실들이 왜 400년 동안 묻혀 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인지 그 연유들을 살펴나가는 것이다.
토승 김남진의 ‘고려다완’ 이야기 ④
입력시간 : 2006. 12.17. 23:30
400년만의 귀향
2000년 11월 400년만에 사천시를 찾아온 ‘존계의 후손’ 도도끼 카이지(左)씨와 와따리 큐베씨가 공항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토승 김남진의 ‘고려다완’ 이야기 ④
‘고려다완’ 역사 함께 400년 만의 귀향길 日 역사속에 묻혔던 ‘존계’의 행적
일본으로 피랍된 뒤 아가노야끼를 개요하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조선도공 존계의 행적을 통해 그당시 일본의 내부 사정과 역사도 해부해 본다.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일본 천하의 패권을 쥐게된다.
이 과정에서 논공행상과 더불어 도요토미 가에 있던 사람들을 모조리 제거한다.
이에따라 존계선생의 운명도 바뀐다.
피랍 풍전국 소창 번주(아가노)였던 모리요시나리(모리길성)가문이 도요토미 가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도쿠가와 가의 호소카와 다다오키에게 멸문의 화를 당하면서(모리요시나리 대신 풍전국 소창 번주로 입성) 존계는 호소카와 다다오키가 차지하게 된다.
정유재란 당시 선진성에 들어와서 가져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구룡요 태토(이도다완 흙)는 같이 간 이작광, 이경에게 넘어간다.
존계는 1602년 오소카와 번주 밑에서 녹봉을 받으며 아가노야끼를 개요하며, 모리데루모토는 야마구치로 쫓겨나면서 이작광, 이경을 데리고 가서 하기야끼(1604년)를 개요하게 되는 것이다.
‘이도다완의 뿌리’ 고려다완의 역사는 이러한 일본 내부의 정치적 맥락 속에서 호소카와와 모리길성 두 가문의 원한관계, 도요토미 가와 도쿠가와 가문간의 필연적이며 운명적인 정치적 요소들 때문에 일본 내에서도 잊혀지게 된다.
그것은 임진왜란을 일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과 몰락 그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천하재패 과정에서 도요토미의 가장 큰 충복이며 탁월한 지략을 갖춘 모리 요시나리에 대한 철저한 복수 때문이다.
앞서 밝힌대로 존계선생을 피납했던 모리 요시나리 집안은 도요토미가 일본 천하를 통일하기전의 오다노부나가의 자결로 유명한 ‘혼사노의 변’때 주군의 뒤를 이어 장렬한 죽음을 맞이한다.
일본에서 충절의 집안인 모리가문이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호소카와 다다오키의 승리군에 멸족을 당한다. 이때 존계도 빼앗기게 되며 이로인해 고려다완 역사를 기록한 가계의 문서가 대부분 불타게 된다.
겨우 화를 면한 모리 요시나리 후손은 일본 고지현에 숨어 살다가 지난 2004년 9월 5일 400여년만에 필자의 구룡요를 방문해 선진성을 찾아가 자기 조상의 침략 행위를 사죄했다.
이때 그는 이도다완이 왜 일본역사에서 잊혀졌는지에 대해(모리요시나리 17대손 모리 야스가나씨) 공개 증언을 하게 된다.(당시 KBS, 오마이뉴스 보도)
이에 앞서 지난 2000년 11월, 존계의 후손인 와따리 큐베씨와 도도끼 카이지씨가 400년만에 사천 땅을 다시 밟았다.
이후 도도끼 카이지씨는 2001년 8월 아카이케쵸 행정지를 통해 아래와 같이 그때의 감동을 전했다.
“사천 화전리를 방문했을 때 선조의 고향이 거의 확인돼 감동으로 가슴이 벅차 올랐다. 가마터는 400년전으로 이동시켜 도자기 파편을 통해 당시의 생활상을 말해 주었다. ‘이곳이 아가노야끼의 원점이고 기원이다. 그래서 이 장소가 있고 존계가 있기에 아가노야끼가 있다’는 생각에 선인들의 자취가 밴 것들을 소중히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새삼 들었다. 우리들은 400년의 역사와 함께 성실하게 후세에 계승, 500~600년 후에도 이 전통이 이어져 나가길 바란다. 이번 사천측의 정보에 의해 아가노야끼 400년제를 눈앞에 둔 지금 아가노야끼의 기원이 거의 밝혀진 것에 대해 정말 기쁘게 생각한다…”
잊혀졌던 400여년간 조선도공 존계와 고려다완에 대한 역사가 다시 눈을 뜨고 있다.
‘사천현 십시향’은 ‘사천시 사남면 화전리’ 존계의 고향 사천현 십시향은 존계 후손 방문시 정동주씨가 화전마을에 있는 보짓골이 한자로는 십치(十峙), 일본에서 십시(十時)로 변화한 것이라 주장하면서 십시가 십치로 잘못 알려졌다.
또한 존계선생이 김존계로 알려진 것도 이곳에 김씨성이 많으니 김존계로 불러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부터다.
지난 1980년대 존계선생의 후손들이 경남도(당시 도지사 이규효)에게 자기 뿌리를 찾기 위한 자료를 요청했으며, 당시 역사학회 회원이었던 김상조씨가 ‘김존계와 존계, 십시향’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에는 존계선생의 고향 십시향은 일본한자음훈과 비슷한 십수교가 축동면에 있고 우리말로는 도동(道洞), 조동(措洞) 등이 있다고 했는데, 이는 일본인들이 성씨를 붙일 때 태어난 지명대로 하며 일본말로 도도끼는 순우리말로 도동이 된다는 것이다.
일본말로 도도끼가 일본 한자어로는 ‘십시’(十時)가 되는 것이며, 십시는 일본어로된 한자 표기일 뿐임으로 도동 발음이 존계의 고향이 된다는 입증 자료가 된다.(도동→도도끼→十時)
이는 존계가 일본에서 최초로 개요한 곳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땅 이름을 성씨로 남긴 것과 그 뜻을 같이 한다.
존계 후손의 성씨는 조선의 원 고향인 도동(도도끼), 와따리, 아가노 등 세 가지 성씨며 존계의 뿌리와 연결된 성씨이다.
도동은 임진왜란때 조명 연합군의 병사 주둔 기지였던 병둔 마을이며, 선진성에 본진을 두고 약탈해간 일본군 침략로로 이용된 사천 구룡요 인근, 화전마을과 이웃해 있는 곳이다.
십치(十時)인 보짓골도 그곳에 있다.
또한 조동도 구룡요 인근에 있는 지명이다.
십시향은 일본식 한문 표기일 뿐으로 이에 진정한 우리나라 음훈으로 지은 존계선생 고향은 사천시 사남면 화전리가 맞는 것이다.(화전리에는 화전, 도동, 병둔, 예의, 구룡 마을이 있다)
■ 존계의 일대기 △ 1593년10월 피랍(당시 26세) → 당진(가라쯔 일시 정착) → 1597년 사천 선진성에 다시 오게 됨(30세) → 1602년 아가노야끼 개요(35세) → 1632년 구마모도에서 팔대(하찌다이)야끼 개요(65세) → 1645년 호소카와 죽음 → 1654년 존계 죽음(당시87세) 존계는 일본 말로 아가노 희장고국 (上野喜藏高國)이라 칭했다.
존계는 호소카와로부터 녹미(무사들에게 월급으로 주던 쌀), 황사자(생산을 돕는 사람) 6인을 하사 받았으며 도자기는 가격을 정해 상납하고 대가는 쌀로 받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때때로 소창(小倉)으로 불려나가 어전(御前)에서 도자기를 제작해 주면서 점차 번성해 제자가 100여명에 이르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찌다이에서도 똑같은 대접을 받았다고 전해지며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정보 2년(1645년)에 호소카와가 세상을 떠나자 존계는 그날로 산속 집을 나와 녹미 등을 반환하고 종청이라 칭하며 승응 3년(1654년) 8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태어나고 자란 사천에서의 도공생활과 임진왜란, 피랍, 당진에서의 체류, 호소카와와의 만남, 아가노야끼 개요 등 일본내 격동의 시대를 배경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조선 도공이다.
400년만의 귀향
2000년 11월 400년만에 사천시를 찾아온 ‘존계의 후손’ 도도끼 카이지(左)씨와 와따리 큐베씨가 공항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토승 김남진의 ‘고려다완’ 이야기⑤
일본 이도다완(고려다완) 제일 생산지 하기야끼 역사 “일본의 ‘하기야끼’ 역사는 사천 우천리 옛 도요지서 시작” 하기야끼 도조 이작광·이경은 존계와 인근지역서 같은 기술로 교류
오늘날 일본은 이도다완(고려다완) 제일 생산지로 하기야끼(萩燒)를 꼽고 있다.
그들은 임진왜란당시 붙잡아간 조선의 도공들을 7명의 번주 밑에 두고 제 각각 도자기를 빚게 했는데 그것이 일본 천하의 7대요이다.
그 7대요가 큐슈일대를 중심으로 형성돼 있었다.
그중 하기야끼는 조선에서 생산되어졌던 이도다완을 생산했었고 그 전통은 지금도 이어져 오고 있다.
그래서 하기야끼가 일본에서는 이도다완을 만드는 고장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이도다완 연구가들 중에는 하기야끼에서 이도다완을 찾기 위해 그 역사에 주목 해 왔고 특히 하기야끼를 개요 할 때의 ‘고 하기야끼’ 가마군에서 나오는 그릇파편 및 온전한 사발의 모습에서 하기야끼가 조선에서 빚은 이도다완의 맥을 이어 받아왔다고 대부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기야끼의 개요 역사에 관해 깊이 있게 연구를 해 볼 필요가 있다.
하기야끼는 1604년 모리 데루모토가 큐슈일대의 대 영주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35만석의 영주로 야마구치에 입성할 때 도공 이작광, 이경 형제를 데리고 들어와서 도자기를 굽게 되면서 시작된다.
규슈 일대 대 영주로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4명의 중신 중 하나인 모리 데루모토는 임진왜란 당시에는 7군 선봉장으로, 정유재란 당시는 사천 선진리성에 들어온 주력군의 선봉장으로 조선과는 깊은 인연을 맺은 인물이다.
사천 출신 도공 존계를 납치했던 모리길성(모리요시나리)과 같은 성을 쓰면서 정유재란 당시에는 선진리성에 진주하면서 모리요시나리와 동행으로 같이 활동하게 된다.
이들 둘은 모두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주군으로 모시고 시마츠 요시히로 등과 주둔하면서 수많은 조선도공들을 붙잡아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선진리성에서 철수한 이후 1600년 그 유명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들은 모두다 도요토미가의 서군편이었다.
그러나 막상 전투가 진행되자 서군이었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외키사카 야스히루를 비롯한 몇몇 다이묘들이 배반해 도리어 서군을 공격했으며 또한 서군의 모리 데루모토군을 지휘하던 요시카와 히로티티가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조소가베 모토치카군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압승으로 세키가하라 전투는 끝났다. 이때부터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를 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오사카성에서 결국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1615년 여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일방적 승리로서 일본천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가 열렸다.
이 일로 인해 모리 요시나리는 멸문의 화를 당한다. 모리 데루모토는 150만석을 받던 히로시마일대 영주를 박탈당하고 야마구치 지방으로 35만석으로 감해 쫓겨 가게 되는데 이때 사천 선진리성에서 출병해 피랍되어온 이작광, 이경 형제를 데리고 하기야끼를 1604년에 개요하게 되는 것이다.
하기야끼를 개요한 이작광, 이경의 고향이 진주부 근처라는데는 일본이나 이경 후손들도 다 같이 인정하는데 정확한 고향 기록을 밝힌 기록은 없었다.
그러나 일본인 와타나베 시게이씨가 저술한 ‘하기야끼의 이작광 이경의 고향풍경’이란 책자에 보면 (한·일 유네스코 답사기에 적은 책) 하기야끼를 개요한 이작광은 아가노야끼를 개요한 존계선생과 조선에서 같은 고향 출신일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 같은 이유는 대략 이렇다.
존계 선생과 이작광은 1592년 임진왜란 초에 일본으로 잡혀간뒤 다시 조선으로 건너가 흙을 가지고 다시 돌아 왔다는 것이며 정유재란이후에 가마를 연 규슈일대의 고 가마에서 나오는 파편 및 그릇의 형태에서 가장 비슷한 것이 아가노야끼와 하기야끼이며, 두 곳에서는 기술이 모두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기록과 행적을 보더라도 아가노야끼를 개요한 존계선생이 조선에서 온 도공 중 가장 기예가 뛰어난 우두머리이며 이작광은 정치적 전투 집단의 선도자역할을 했으며 도예기술을 가진 도공으로서의 행적 보다는 요의 책임을 맡은 대장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말인가?
사천에서 온 존계선생과 이작광, 이경은 같은 고향 출신이며 일본으로 피랍된 조선 도공중 가장 우두머리의 기예 있는 사기장이 존계이고 하기야끼의 기술은 존계의 기술과 같다는 말이 된다.
여기서 일본이 자랑하는 하기야끼가 왜 중요한가를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일본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조선의 도공장들을 피랍해 갔다고 앞에서 언급했다.
이들 납치해간 조선 도공 들은 7명의 번주들이 소유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를 소개해야 될 것 같다.
그 중 하기야끼가 일본에서는 유일하게 이도다완을 만든다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 기술과 흙이 바로 존계선생의 고향인 사천에 그 원 뿌리가 있다는 것이 되며 이도다완을 빚은 도공은 존계선생으로 볼 수 있으며 그 고향인 사천 우천리 도요지(현재의 구룡지역 일대)에 있는 흙이 바로 이도다완의 흙이라고 생각되어지는 것이다.
그 증거로 하기야끼에서 만든 400여 년 전의 그릇들의 성분이 이곳 우천리 도요지 일대에서 발굴된 흙과 성분이 같은 것이다. 그리고 앞서 기술했듯이 존계와 이작광, 이경의 고향이 같거나 인근 지역에 살면서 같은 기술을 가지고 교류 했다고 추정 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존계선생을 납치해갔던 모리길성의 17대손(모리야스가와)이 직접 사천 구룡요에 와서 자기조상이 400여 년 전 사천 도공 존계선생을 납치 이유는 ‘이도다완’을 빚었기 때문이라는 공개 증언을 하게 되는 것이다.
토승김남진의 고려다완 이야기 ⑥
흙에서 찾은 고려다완의 비밀 “흙의 고유 특성 파악, 흙의 느낌 그대로 성형해야” 이도다완(고려다완)의 특유한 흙 유전자(DNA) 확인
하늘이 곧 땅이요, 땅이 즉 흙이며 이 흙(土)이 곧 하늘(天)이다.
흙은 지구가 생겨나게 된 근원적 비밀을 다 알고 있다는 것.
그 흙을 가지고 성형해 그릇을 빚어 태양계로부터 떨어져 나올 당시의 하늘세계의 빛(불)으로 되돌려 놓으면 우리는 그것이 그냥 그릇이 아닌 우주의 정기를 가진 것으로 이해하는 증표가 된다.
이것이 바로 일반적으로 말하는 살아 숨쉬는 ‘도자기’이다.
빛의 색깔로 변하는 과정에서 그 흙은 다양한 색채의 질감을 만드는 데 아무리 좋고 맑은 불을 가지고 정성을 기울여도 태토인 흙이 좋지 않으면 좋은 질감과 우주의 정기를 담은 그릇은 태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옛날이나 지금에도 도자기의 생명은 흙에 있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도자기 국보로까지 지정해 놓고 존경하고 있는 이도다완(고려다완)의 완벽한 뿌리 찾기 또한 먼저 다완을 빚었던 태토, 그 원래의 흙에서 찾아야 한다.
과거 일본인들이 ‘이도다완’의 옛 가마터를 찾기 위한 몸부림도 결국은 흙을 찾기 위한 것이였다.
‘이도다완’을 구웠을 옛 가마터를 찾고자 했던 것은 그 가마터의 중요성보다도 바로 그 옆에 ‘이도다완’을 만들게 한 흙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
필자는 사천 우천리 도요지의 구룡요 가마터를 발견하면서 그곳 인근에서 옛 사발만을 구웠던 옛 가마터 흔적도 몇 개 찾았다.(능화, 사촌, 소곡요지 등)
그러나 공개를 미루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이 옛 가마들이 있게 했던 뿌리가 바로 우천리 도요지였기 때문이며 실제 지표조사에서도 ‘이도다완’이라고 추정되는 많은 파편들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가마가 있었다면 그 가마터만의 고유한 역사가 있을 것이다.
구룡요 근처에서만 나는 단일 태토를 발견해 그 흙만으로 숱한 실험과 노력을 기울인 끝에 그렇게 베일에 싸여 있었던 ‘이도다완’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었다.
또한 그 옛날 이곳에서 생산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도다완에 대해 자신있게 주장 할 수 있게 됐다.
그렇다면 ‘이도다완’을 만들었던 흙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존재해 있으며 일반 도자기(백자, 청자 등)를 빚는 흙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또 특이한 점은 어떤 것이며 그 실체는 증명이 가능할까?
필자는 이 물음에 명확한 해답을 얻기 위해 오로지 이곳에서만 나는 흙만으로 내화벽돌이나 가공된 재료가 아닌 순수 황토 벽돌을 만들어 가마를 짓고 필자 스스로 흙 채취에서부터 가공, 유약 만들기, 성형, 불때기 등으로 이어지는 도자기 생산 작업을 직접하게 됐다.
이 길만이 명확한 증거와 해답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깊은 산골에서 태고적부터 신비한 하늘의 기와 땅의 정을 받아 그 정기가 묻힌 곳에서 특이한 광채가 나는 흙이 그것도 한곳에서 무지갯빛이 나는 색채를 머금은 원토인 단미 태토를 정성스럽게 채취해 성형을 할 수 있게 잘 가공해야 한다.
흙의 굵은 입자가 모여 된 것이기에 가공을 하는 과정에서 그릇의 투박성과 정밀성이 분명하게 구분되어 결정된다.
굵게 부수면 그릇은 아주 거칠게 되고 조금 가늘게 부수면 부드러운 그릇이 된다.
태토를 가공하기에 따라 완전히 다른 입자를 가진 그릇으로 성형되고 또 유약 종류에 따라 불 온도의 조절, 날씨의 영향에 따라 천차만별의 다양한 그릇이 탄생되어 진다. 그 탄생되는 과정에서 흙을 직접 만져보고 채취해 성형하고 굽지 않으면 알수 없는 신비함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필자가 말하는 ‘이도다완’ 흙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무엇을 두고 이야기 하는가?
그 첫 번째로 ‘이도다완’에는 그 특유한 유전자(DNA)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고유한 유전자 및 줄기세포가 있다.
‘이도다완’이라 불리고 있는 신비한 그릇의 실체도 그 그릇에서만 나타나는 고유 유전자가 있다.
그것을 필자는 ‘이도다완’의 거칠음, 자연스러움, 물이 스며드는 것 등의 모습이 이 흙에서만 나타나는 고유 유전자(DNA)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그 유전자(DNA)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우리가 빵을 만들 때 ‘소다’라는 성분의 약품을 넣으면 밀가루가 익으면서 빵이 부풀어 오른다. 즉 ‘이도다완’의 흙에서는 그런 요소의 특이한 성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필자가 경험한 이 흙의 성분은 지상에서 약 5m 정도 깊이에 있는 광맥을 이룬 일종의 암석 계통인데 백자를 만드는 백토나 핑크카올린 종류하고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렇게 단단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일반 흙처럼 부드러운 것도 아닌 풍화암 비슷한 리핑암 정도의 강도를 지닌 것으로, 다른 암석, 흙과는 명확히 구분되는 것은 아주 고감도의 선홍색 빛을 띤 황토색에 파묻혀 있다.
더더욱 신비한 것은 1차로 황토층을 걷어내면 흙속에 다양한 자연적 색상인 빨,주,노,초,파,남,보의 무지개색 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황토 흙속에 보배처럼 숨겨져 있는 이 부분을 그대로 가져와 1차로 가공을 한다.
가공의 정밀도에 따라 물로 반죽해 성형하기 위한 형태의 흙으로 만들고(옛날에는 꼬막밀기의 손작업으로, 현재는 토련기라는 기계로 함) 상당한 시일동안 자체적인 점질력 확보를 위한 발효(흙을 삭힘)를 시키는 작업을 한다.
이때는 얇은 비닐로 일일이 흙덩이 하나하나를 잘 싸서 그늘진 곳에 상당한 시일동안(약 3~6개월) 보관해 둔다.
그리고 또다시 2,3차 토련기에서 작업해 공기를 완전히 제거한 상태의 흙으로 물레 위에서 성형한다.
‘이도다완’의 흙은 완전 단일태토이며 다른 곳에서 가져온 점질토는 전혀 섞지 않아야 제대로 된 색체와 물을 흡수하는 기능 등 이도다완 고유의 특성이 살아 나온다. 이는 특이한 흙의 고유한 성질 때문에 성형하기가 아주 힘들다.
성형하기 곤란하다는 것은 이 흙이 주는 고유한 질감 및 감촉이 그릇을 빚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참으로 설명하기 곤란한 부분. 필자가 겪은 이 흙의 성형방법은 그 어떤 기교나 재주만을 믿고 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다.
이는 그 흙만이 가진 거친 입자와 점질력이 많지 않은 단일 태토이다 보니 손재주만 믿고 기교로서 흙을 다루면 계속 찢어져 버린다. 그 흙만이 주는 고유 감성과 질감과 정기를 마음으로 느끼면서 그 흙에 순응하는 마음 즉, 흙의 고유한 특성을 모두 파악해 흙의 느낌 그대로 물레위의 손은 따라만 가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도자기를 빚던 많은 이들이 이 흙을 대하면 참으로 난감해 하는 것이다.
뚜렷한 예로 400여년전 임진왜란 때 일본에 피랍된 존계의 14대손 와따리 큐베에씨는 400년 가계를 그대로 이어왔으며 일본에서는 잘 알려진 유명한 사기장이지만 이곳의 흙으로 구룡요에서 직접 ‘이도다완’을 성형해봤지만 성형시키지 못했다.
또 존계의 영주였던 호소카와 가문의 직계 후손인 일본 전 수상 호소카와씨도 이 흙으로 성형을 해보고는 이도다완 흙은 분명히 맞는데 성형하기가 곤란하다며 그 방법을 알려 달라고 한 사실이 있었다.
흙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을 알지 못하고 기교로서 흙을 다루면 ‘이도다완’만의 신비로움에 접근하기 어려운 것이다.
대마도 이도(16세기 조선에서 만든 고려다완)와 다케다 이도 (16세기 조선에서 만든 고려다완)(사진 위), 사천 구룡요 인근 흙으로 만든 그릇과 이 그릇에서 나타난 융기 현상(사진 아래).
고려다완(이도다완)의 유전자, 즉 DNA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 흙을 성형할 때는 이 유전자의 성분은 눈으로 본다거나 손으로 만질 수는 없다. 그것은 가마에서 불을 땔 때 어느 특정 온도에 도달해야만 나타난다.
필자가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이 유전자의 실체는 ‘이도’의 흙에 다양한 색상 분초가 있는데 이 색상 분포에 미세한 색상 인자로 존재하고 있다가 가공 성형 등을 거치면서 자연적으로 그릇 속에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불을 땔 때 1,260℃선의 고온에서 서서히 부풀어 오르면서 제 고유한 모습을 드러내는 돌출적 융기 즉 그릇 속에서 튀어나오는 작은 융기(일본말로 ‘이시하제’라 함)가 되는데, 1,270℃에서 1,280℃ 사이의 온도에서 이 융기점들은 가장 아름다운 형태로 튀어나오며 ‘이도’ 특유의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다시 설명하자면 이도다완의 절대적 조건이라 말하는 ‘차물이 스며드는 형태의 조건’은 이 흙만이 가진 ‘융기적’ 성분이 1,260~1,280℃의 자기질 고온으로 구울 때만 생성되는 특이함이 있다는 것이다.
이 흙의 인자에 대해 전문가들은 처음부터 거친 사토 속에 있었던 것으로 인식했다.
그릇을 이루고 있는 근본 태토의 몸체에서만 이 같은 작용을 하다 보니 일반 도자기와는 전혀 다른 도자기 자체가 갈라지는 느낌을 준다. 즉 고화도의 자기질에서도 살아서 숨을 쉬는 그릇이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 흙으로 구운 도자기는 처음 가마에서 꺼냈을 때 것과 사용하는 사람의 정성에 따라 몰라보게 변하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필자가 이도다완의 근원적 DNA라 주장하는 이 같은 흙의 성분은 현재까지 특이할 정도로 구룡요 인근에서만 발견됐다.
이 유전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자면 가마의 불 때기에서 유전자의 발현정도가 달라지는데 장작 가마의 불 때기는 참으로 어려운 것이라고 하면 어려운 것인데 그 원리를 깨닫고 나면 그다지 어려운 것은 아니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필자는 10여년전 우연히 발견한 옛 가마터 흔적과 그곳에서 생산되어졌던 수많은 도자기 파편을 보고 이제는 그곳에서만 나는 흙과 유약을 찾아낸 것이다.
오로지 잃어버렸던 옛 조상들의 도예문화와 일본에 전해진 신비의 고려다완인 이도다완에 대해 연구하면서 존계의 행적, 400여년전 일본의 역사, 1000여년전 고려 8대왕 현종과의 관계 등을 알게 됐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고려다완(이도다완) 흙만이 가진 그 유전자(DNA)가 어떤 불에서 생성되는지 먼저 설명하고자 한다.
이 불의 설명 과정에서는 고온에서 발색되는 고려다완(이도다완)만의 비파색 색채의 비밀도 밝혀 나갈 것이다.
전통 장작 가마의 원리부터 설명해보자.
일단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전기를 예로 들면 직류와 교류가 있다.
직류는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것이며 교류는 2가지 형태로 교차하면서 흐르는 것인데 전통 장작 가마의 원리는 호흡을 하면서 온도를 올린다는 것이다.
전기로 예를 들면 교류쪽인데 사람도 숨을 쉬면서 들숨, 날숨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숨을 쉬는 교류원리이다.
우리 정통 장작 가마는 철저하게 자연과 호흡하면서 불 때기를 해야 한다. 불은 과학적인 잣대로 보면 환원불, 중성불, 산화불이 있는데 여기에서 환원불은 장작을 많이 넣어 가마안 산소가 부족하게 만드는 방법인데 옛 가마에서는 주로 이 환원불로 그릇을 구운 것이다.
먼저 봉통불이 가장 기초적인 불이며 이 봉통불은 가마를 익히기 위한 예비 단계로 이 불은 아주 천천히 온도가 상승하도록 해야 한다.
급하게 온도를 올리면 가마안 기물이 금이 가거나 깨어져 버리기 때문에 봉통 불에서 충분히 가마를 달구면 유약이 녹기 직전까지 온도가 올라가게 된다.
이때 칸불로 접어드는데, 이때의 불 때기에 따라 도자기의 색깔이 좌우된다. 과학적인 용어를 사용하자면 환원, 중성, 산화인데 흔히들 전통 가마를 하는 이들이 ‘요변’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옛날에는 환원불 위주로 그릇을 구웠다.(백자, 청자, 분청, 진사)
고온에서 산소가 부족하니까 태토와 유약 속에 있던 산소가 급하게 빠져나오면서 그 속에 있던 광물질(주로 철 성분)이 색채로 변해 생기는 색깔이 바로 푸른 계통이 형성되는 것으로, 청자가 바로 환원불로 소성된 결정체이다.
산화불은 그 반대의 원리. 천천히 불 때기를 하면서 충분한 산소를 공급하며 온도를 올리기 때문에 그릇은 푸른색이 아닌 노란색으로 나타난다. 철의 원래색은 회청색이며 산화되면 붉은색으로 변하는 원리, 즉 F1→F2→F3으로 변하는 것이다.
전통 장작 가마 불은 그 불의 빛깔만 봐도 온도를 가늠할 수 있다. 온도가 낮은 것(500~800℃)은 빨간색이며 노란색(1,000℃), 푸른색(1,200℃), 흰색(1,250℃) 그리고 투명한 빛(1,300℃)으로 온도를 대략 알 수 있다.
좋은 그릇은 온도가 빛으로 변하는 선까지 불 때기를 해야 나온다. 그러나 이런 온도를 산화불로서 천천히 올린다는 것은 엄청난 기술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것은 가마안의 온도가 계속 올라갈 수 있게 장작을 빨리 투입하면 환원불로 가기 때문에 산화불 고유의 색상을 내는 고온(1,300℃)에서의 발색은 과학적인 분석에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도예계의 일치된 의견.
그러나 필자가 주장하는 고려다완(이도다완)은 분명히 1,280~1,300℃에서 발색되는 비파색 산화불에서 태어난 그릇이라는 것이다.
현재의 과학적 분석에서 기적에 가까운 그릇인 고려다완(이도다완)의 그 비밀스런 특성을 푸는 유일한 길은 ‘흙’이고 ‘불’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태토 속에 잠재돼 있던 고유한 유전자(DNA)는 이 산화불에서만 그 특이한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고온에서 발색되는 비파색에 대한 과학적 검증(일본 후쿠오카 현 기술연구소)을 통해 그 비밀을 풀었다고 본다.
토승 김남진의 고려다완 이야기⑧
‘흙·불때기·유약’ 삼위일체 때 ‘고려다완’ 완성 1,300℃서 강렬한 빛을 내는 불에 견디는 흙이라야
월간 ‘차의 세계’ 2007년 1월호에 소개된 토승 김남진의 찻사발들. 이 책은 고려다완 연구가 유태재씨가 고려다완과 김남진씨에 대해 쓴 ‘천년의 혼을 일깨운 찻그릇’이라는 제목의 글을 실었다.
필자가 주장하는 고려다완(이도다완)은 분명히 1,280~1,300℃에서 발색되는 비파색 산화불로 태어난 가마속 그릇, 이 그릇의 태토 속에 잠재돼 있던 고유한 유전자(DNA)는 이 산화 불에서만 그 특이한 기능을 발휘한다.
1,300℃에 이르는 산화불부터 이야기 해보자.
천천히 아주 천천히 호흡을 조절해 가면서 가마 안에 있는 공기와 투입된 나무가 하나하나 재가 되어 사그라지기 시작한다.
화목을 던지고 또 던져 가며 아주 중요한 불과의 승부는 가마 안에 들어있는 그릇과 숨을 쉬듯 같이 호흡하면서 그 불을 이끌고 가야한다.
너무 성급하게 화목을 던져넣으면 흙속에 존재하는 유전자는 제 기능을 발휘 못하고 그냥 태토 속에 남게 되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고려다완(이도다완)을 완성 시키려면 꼭 산화불로서 승부해야 한다.
이 불의 온도가 1,280℃ 이상 필요하며 이온도까지 올라가야만 고려다완 고유의 색깔이 나온다.
그 고유한 유전자가 제 기능을 발휘하며 태토 속에서 아름다운 노란 비파색이 나온다는 말이다.
인간, 흙, 불, 공기가 일체가 되어 생명 있는 그릇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가마에서 온도가 1,200℃ 이상 올라가게해 1,280~1,300℃까지 끌어올린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그래서 옛날 도자기의 기술은 중국과 우리나라, 베트남 일부지역만이 그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로써는 초 하이테크 기술이었던 것이다.
그럼 다시 불 때기에 대해 설명해보자.
우리나라는 밥을 지을 때 뜸들이기를 한다. 필자가 말하는 태토 속과 유약을 도자기의 완벽한 색체인 즉 마음과 몸이 같은 도자기를 만들려면 먼저 유약이 녹고 기물을 지탱해주는 태토가 익으면 일단 도자기로서 기능을 가진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앞서 설명한대로 1,300℃ 정도의 고온으로 올리면서 그 도자기의 고유 색깔이 결정되는 불 때기를 자기만이 아는 기법으로 하는데 이때부터가 문제다.
밥을 지을 때 뜸들이기 하는 방법으로 일단 그대로의 온도를 유지하면서 최대한 빨리, 완벽하게 불이 빛으로 변한 그때를(가마 안이 하얀 빛으로 될 때) 놓치지 말고 그 빛을 한 바퀴 돌려줘야 한다.
이때 불을 가장 강하게 받는 아래부분은 비취색과 옥색 계통이 많이 나오며(사진참조) 나머지는 대부분 비파색이 나온다.
그것은 아주 고도의 기술이며 여기에서 성공과 실패가 갈라진다.
아주 맑은 빛으로 변한 하얀 불, 그것도 1,300℃ 의 고온으로 최고조에 달했을 때에만 발생하는 하얀 빛으로 어떻게 기물을 침투시키느냐에 따라서 ‘비취청자’와 ‘비파색 이도다완’이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자기화가 되는가의 관건인 것이다.
그냥 기물과 유약이 일체가 되고 그것이 우주의 기운과 만나고 자연의 일부분이 되는 그런 혼이 있고 정기가 살아 있는 그릇은 이런 어려운 과정을 성공해야 나오는 것이다.
이 과정이 왜 어려운 것일까?
먼저 그 강렬한 빛으로 된 불을 견뎌낼 흙이 귀하다는 것이다.
1,300℃를 전후한 불의 빛을 견디는 흙은 카올린(고령토) 계통의 백자 태토 외에는 구하기 힘들다. 백자의 흰색으로 된 도자기 외에는 완벽한 자화 속에 본색이 드러나는 흙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색체를 내는 Fe의 용융점과 증발되는 온도가 1,220℃에서 이뤄지기 때문.
그리고 그 강렬한 온도와 빛을 받으면 흙 자체의 이반 운동이 일어나 기물 중간 중간에 혹처럼 부풀어 올라 터져 주저앉게 된다.
밑바닥 또한 갈라지게 되며 결국 기물을 못 쓰게 되는 흙도 있다. 그래서 흙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앞서 설명한 모든 조건을 다 갖춘 흙만이 그 고유한 도자기를 탄생시킬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조건을 갖춘 흙만 있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그 흙의 고유한 특성을 알고 유약과 불 때기의 모든 조화를 이뤄 삼위일체가 되어야 진정한 비취 청자나 비파색 고려다완 같은 명품들이 나오는 것이다. 명품의 가치를 지닌 도자기 중 차생활에 사용됐던 고려다완류는 이런 흙을, 즉 태토를 구해야만 하는 것이 필수적인 과제였다.
그렇다면 흙은 왜 그렇게 중요한가?
먼 옛날 선사시대에는 오로지 생존을 위해 그릇을 빚었고 그때 사용했던 토기류는 700~800℃의 저화도에서 구웠다.
그것이 좀 더 발전해서 유럽은 유리 그릇을, 동양은 도자기로 개발이 됐다.
우리 선조들은 흙을 사용해 유리질을 표면에 입혀서 ‘흙+유리’를 일체감 있게 제작한 자기질 그릇을 만든 민족이었다.
서양인들은 유리를 만들었지만 도자기와 유리는 온도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다. 철을 녹이는 기술과 불을 다루는 기술을 가진 우리 민족은 흙을 이용한 당시 최첨단 하이테크 기술을 보유한 민족이었던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또한 가마 이다.(옛 가마에 대한 내용은 다음에 자세히 언급)
우리 인간의 본바탕이 마음이라면 도자기의 본바탕은 흙이다.
인간이 마음이 옳지 못하면 아무리 지식을 쌓아도 그 공부가 올바르게 되지 않듯이 도자기의 바탕인 흙이 좋지 못하면 아무리 숙련된 기술과 좋은 불로 도자기를 구워도 생명이 있는 그릇의 탄생은 기대할 수 없다.
원토의 자연적인 색상의 다양함이 불 때는 사람의 공기와 불의 조절에 따라 다양한 색상을 내며 그것은 1,280℃ 이상의 산화불로서 유약이 아닌 태토 속에서 발생되는 자연적 비파색을 내게 해야 한다.
숨 쉬는 도자기의 탄생 비밀은 흙에 있음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그 만큼 이 흙이 특이하다는 것이며 그렇게 한만큼 어려운 불의 기술, 과학적으로도 신기에 가까운 비밀과 특이한 역사(임진왜란, 도공의 피랍, 일본의 정치적 상황)때문에 400여 년간 그 어떤 누구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우천리 가마터에서 나온 가마벽체의 모습. 벽체에 재가 붙어 유약질이 되는 과정이 드러났다.
녹유가마터는 도기단계의 1,200℃ 전후의 유약 질이 처음 익혀지는 도자기의 시초 가마터를 말한다.
또한 이 가마터는 전남 무안 도기가마터 일대에서 이미 발굴돼 이곳이 우리나라 최초의 도기질 가마터로 인정됐다.
그렇다면 자기질 녹유 가마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 자기질은 1,200℃를 훨씬 넘는 1,250℃ 이상의 고온에서만 자연 광물질 도석에 용융재인 재, 석회석, 조개 껍질을 넣어 유리화 시켜 단단하게 자화시킨 도자기 종류인 병, 항아리, 사발 등을 말한다.
이런 가마터가 최초의 녹유 가마터라 말할 수 있고, 이 녹유는 우리나라 도자기중 자기질 도자기의 뿌리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우리나라 도자기의 자기화는 고려 초기인 9세기 전후에 이뤄졌다고 보고 있는데, 그 뚜렷한 예는 고려청자 기술의 전래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신라 말 장보고의 청해진에서 청자 굽는 중국 기술자들을 유입시켜 그릇을 굽게 했다.
당시 청자의 가장 초기 단계의 회유, 녹유 및 녹유계통의 도자기를 주로 생산한 것이 자기질 가마의 시초로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이 학설은 그 원조를 중국에 두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도자기 생산의 역사는 중국의 기술이 뿌리라는 전제 아래 연구해 독창적인 도자기 원조문화를 연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금껏 연구해온 관요 중심의 도자기 가마터 대신 순수 민간요에서 1,000여 년 전인 9세기를 전후해 10세기의 자기질 도자기의 완성을 이뤘고 또한 그 기술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져온 가마터가 있다면 우리나라에서도 독창적인 기술로 자기질 도자기를 생산했다는 가능성 또한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가마터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아 우리나라가 원조 도자기 생산국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면 그 가마터를 반드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 가마터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요가마로서 실생활에 쓰였던 다양한 옹기, 녹유, 막백자 등의 그릇을 구웠을 것이다.
필자는 여러개의 가마군을 형성해 집단화되어 있었던 곳이 바로 우천리 가마터라고 보고 있다.
그 가마터가 발견되고 이땅의 도자기 생산이 자체 힘으로 성립했다는 증거가 제시된 것이라도 가마터 흔적만 가지고는 다분히 그 역사를 증명하기는 곤란할 것이다.
그 역사를 규명해내기 위해서는 그 가마터 주위에서만 나오는 고화도 질의 태토가 있어야 하는 것이며 또한 태토뿐만 아니라 자기질 도자기를 만드는데 꼭 필요한 자연채취 광물질인 유약 성분인 도석질이 존재해야 한다.
자연 채취 광물질인 유약이라 말하는 도석질은 무엇인가?
도자기가 유리와 다른 점은 흙과 유약의 합성품이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유리를, 동양에서는 도자기를 생산했다.
유리를 만드는 재질은 네이드론과 실라카 성분이 많은 모래가 모닥불에 녹아 용융상태가 되었던 것으로, 저화도로 1,100℃ 이내에서 쉽게 녹는 것이다.
도자기의 자기화 온도는 무조건 1,250℃ 이상의 고온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흙을 익히고 불을 때는 과정에서 기물 바깥에 입힌 유약이 바로 1,250℃를 넘는 자연 광물질인 장석이나 도석으로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순수 광물질로 구성된 광맥은 장석, 도석 등의 이름으로 지구상에 존재한다.
이 광물질 혼자서는 1,300℃ 가까이 온도를 올려도 유리화가 되기 힘들다.
그래서 이 광물질에 매용제란 것을 일부분 배합해 아주 가는 체로 걸러 불순물을 최대한 걸러내고 재, 석회석, 조개 껍질 등을 어느 정도 혼합해 사용하는데, 이는 좀 더 낮은 온도에서 녹이기 위한 방편인 것이다.
유약이란 도자기 표면에 바르는 또 다른 광물질을 이야기하는 것. 그 광물질이 바로 어느 정도의 온도에 도달하면 기물과 함께 익어 유리질화 되는데 불의 영향에 따라 도자기의 기본 색깔 및 단단함 등이 결정된다.
옛날 선인들은 이 유약의 발견은 도기 계통으로 굽다가 재가 그릇 표면이나 가마 벽에 붙어 저절로 유리질이 되는 것을 보고 유약을 개발해 낸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유약을 잿물이라고도 표현한다.
그러나 이 자연광석(장석, 도석)에 매용제인 재, 석회석, 조개 껍질 등을 섞어 구으면 자기질 온도인 1,250℃ 이상 올라야 녹기 때문에 이 온도까지 빨리 올리는 것이 가장 어려운 기술이였다. 이는 옛날 방식의 도자기 제조 기술의 가장 기본적인 핵심이기도 하다.
지금은 각종 안료가 개발돼 저화도 유약으로 자기 취향에 맞는 흙과 유약으로 소성온도를 낮게 하면서 각종 기물을 생산하고 있다.
그 옛날 우리 선인들이 사용한 자연 유약에는 이처럼 특정적인 온도에 도달하지 못하면 절대로 기물을 녹일 수 없기 때문에 자기질 기술은 오로지 가마안의 소성온도를 확보하는 것이다.
유약이 되기 위한 조건 중 일단 도자기 표면에 유리질이 되어야 하는데 될 수 있으면 원하는 색깔이 나와야 한다.
흙과 불이 만나고 유약 또한 같은 이치로 삼위일체가 되었을 때 제 색깔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질의 가장 초기단계는 그 가마주위에서 직접 그런 기능을 가진 흙과 유약 질이 있는 것을 찾아 구웠던 것이다.
그것이 적절한 실험과 반복된 검증 끝에 결국 그 지역 고유한 도자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개념으로 연구, 분석한다면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져온 민요 가마터의 역사는 고유한 특성을 말하고 있다.
그 고유한 특성을 파악하지 않고 현대방식으로 옹기, 도기, 자기 등으로 분류해 특정적인 가마터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전통 도자기 생산 방법을 잘 모르고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오래된 옛 민요 가마터에서 구운 그릇은 옹기, 생활자기 모두가 고화도에서만 용융되는 순수 광물질로서 유약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토승 김남진의 고려다완 이야기 ⑩
우천리 가마터는 가야시대 토기가마 시초 “가야시대부터 1,200℃ 넘는 고화도의 도자기 생산 기술 있었다”
사천지역의 도자기 유적지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사천 늑도 유적에 대해 알아보자.
지난 1997년 남일본 신문사 가주토모 후지다 문화부 기자의 우천리 가마터에서 나온 무문토기류 파편 취재 모습.
이 늑도 지역에 대해 동아대 발굴단이 지난 1998년 5월부터 2001년 12월까지 3차에 걸쳐 조사한 결과를 보면 남부지방에서 처음 발견된 타날문기법(옹기)을 가진 회백색 연질 토기가마터로 보이는 소토유구를 확인했다.
발굴단은 보고서에서 “가야토기의 원류를 규명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했다”고 밝히고 있다.
즉 후기 청동기시대부터 초기 철기시대 및 삼한시대로 이어지는 단계의 덧띠토기를 특징으로 하는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유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KBS ‘역사스페셜’(91회)을 통해 늑도는 2,000여년전 고대 동아시아인들의 국제 무역항이었다는 내용으로 방영된 바 있다.
2,000여년전의 토기가마터가 발견된 사천 지역은 그것을 뿌리로 자기질 도자기를 자체기술로 만들었다는 증거 제시가 우천리 가마터를 발견하면서 주시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우리나라 도자기 역사를 기록해 놓은 세종실록지리지를 바탕으로 우천리 가마터를 조명해보자.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초계군과 진주목의 유등곡과 반룡진에서 황옹을 구웠다는 기록이 있다. 곤남군(세종19년 이후 곤양군. 이하 곤양군) 포곡리와 노동에 자기소가 있다고 기록되어져 있다.
곤양군 자기소에서 나온 자기조각에는 곤, 남, 장, 즉 곤남군과 장흥고를 뜻하는 명문이 발견돼 학계에서는 이를 관요로 기록하고 있다.
필자가 밝혀나가는 우천리 가마터 역사는 관요가 아닌 민요의 역사를 규명하는 작업이므로 일단 곤양군의 자기소 이야기는 제외한다.
그렇다면 민요 가마터에 대해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진주목과 반룡진에 있었다는 황옹가마터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천리 도요지가 녹유 및 황색계통의 파편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마 최초로 구웠을 당시에는 그 시대에 전통적 기법으로 소성시킨 환원소성으로 그릇을 구웠으며, 이후 그 어떤 독특한 기술로 산화소성만을 주로 하면서 황색계통의 도자기를 구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필자가 추적해 나가는 이 우천리 가마터의 실제 역사는 언제부터인가?
이 가마터 주변에는 선사시대에 사용한 토기인 무문토기도 많이 나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무문토기의 가마 형태는 아예 없는 것이다. 선사시대인 청동기 시절부터 한 곳에 정착하면서 농경생활을 했다면 일단 모닥불 같은 것에 700~800℃의 연질수준의 토기를 생산했는데 그때는 가마란 특수기능을 가진 구조물이 필요치 않았다.
가마의 구조는 환원번조가 가능한 시기부터 시작되는데 우리나라는 대략 가야의 토기가마를 시초로 볼 수 있다고 여겨진다.
엄밀히 말하면 가야시대 토기류는 유약만 바르지 않았지 그 소성 온도는 자기질에 가까운 1,200℃ 이상이 대부분이었다.
두드리면 쇳소리가 나는데 이것은 그만큼 흙이 익었고 고온으로 소성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곳 남쪽지방은 가야의 세력권으로 가야시대부터 벌써 1,200℃가 넘는 고화도의 온도를 올릴 수 있는 기술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수수께끼는 가야가 고구려의 북방계보다 철을 일찍 생산했다는 것이다.
철기문화는 곧 불을 다스리는 고온을 가진 문화를 뜻한다.
광석에서 1,200℃ 정도의 고온을 가하면 철은 동소변태와 자기변태를 거쳐 고유한 순철이 녹아 나오기 시작한다.
이 철광석을 제련하는 가마가 곧 도자기 가마의 이행으로 보아도 결코 무리한 설명은 아닐 것이다.
철을 녹일 줄 아는 기술을 가진 가야인 들은 그 철을 제련하는 불의 기술로 자기질에 가까운 가야토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남방불교의 전래설인 허황후와 보옥조사의 이야기, 그리고 이곳에 남방불교를 따라 들어온 가야 황차가 자생하는 등 이곳 사천은 특이할 정도로 가야의 신비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가마터의 흔적에서 결국 우리나라 스스로가 가야시절 철을 녹이는 기술로 한층 고화도의 도자기 생산기술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함께 들어온 남방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불교문화의 전파에 의한 새로운 사상적 변화, 문화적 발전과 함께 현재의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고도의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결국 도자기는 우리나라 가야의 토기가 그 뿌리이며 그 가야 문화권에 속한 이곳의 자기질 녹유 및 황옹의 가마터가 중국의 영향 없이 독창적인 기법으로 발전해 온 자기질 도자기의 원조라고 여겨진다.
그것은 이곳에서 나는 흙과 유약으로 이 땅의 도자기 대부분을 생산할 수 있는 증거가 될 것이다.
이곳에서 나는 흙만으로도 청자, 분청, 백자, 고려다완(이도다완) 등 특히 순수 비취청자도 고려다완(이도다완)을 만든 단일 태토로 완벽하게 재현해낸 것이다.
앞서 밝힌 것처럼 고려다완(이도다완)은 고유한 흙의 질감 그대로 드러낼 수 있게 철저하게 산화불로 그릇을 굽는다.
그래서 필자는 고려다완의 흙은 절대로 수비(흙을 가는 체로 거르는데 주로 물을 이용하는 것)하지 않고 원토 그대로를 잘게 부셔 다른 흙은 전혀 첨가하지 않고 오로지 단토 맥만을 채취해 사용한다.
그러나 비취청자를 재현하고자 할 때 필자는 조상들이 했던 것처럼 철저한 수비를 통해 정제를 한 후 완벽한 환원 소성으로 그릇을 구워 보았다.
이때 온도는 1,300℃ 정도의 높은 고온인데, 이불은 그냥 환원불이 아니다.
1,300℃ 고온으로 소성시키는 과정에서 전통 가마의 불 때기를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쉽겠지만 무작정 온도 개념만의 불이 아니라는 말이다.
2006년 3월 5일 구룡요를 찾은 일본 후쿠오카 현의 한국스터디 인권투어단이 구룡저수지에서 김남진으로 부터 우천리 도요지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자연의 일부로 ‘호흡의 원칙’이 존재하는 불 때기에 흡입되는 공기량과 날씨, 불의 세기 등을 면밀히 조절하면서 기물을 익히고 유약을 녹인다.
그 다음 완벽한 자화를 거치는 과정을 밟는다.
이 자화시키는 방법에서 청자의 신비한 비취색인 몸과 마음이 같은 색깔. 즉 바깥 유약 질과 속에 있는 태토의 고유 색깔이 똑 같은 신비한 비취색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이때쯤 가마안의 도자기는 벌써 온도 개념을 초월한 신비한 마력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불이 빛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최고조에 달한 상태의 불은 무색투명한 하얀 빛을 내며 가마의 전체를 한 빛, 즉 똑 같은 일체감을 만들어낸다.
그 불이 바로 영혼의 불이며, 태양계에서 지구가 빛으로 떨어져 나올 때 최초의 온도이며 색깔인 것이다.
이 땅에 살았던 우리 조상들은 놀라운 능력으로 불의 오묘한 섭리와 일치하는 비취색 청자와 함께 ‘고려다완’이라는 최고의 예술품을 탄생시켰다.
토승 김남진의 고려다완 이야기 ⑪
‘황옹’ 구운 유등곡 가마터는 사천 우천리 가마터 추정 “우천리 가마터는 우리 도자사에서 할아버지 의미” 경남문화재연구원 시굴 조사 최종 결과보고서(약식)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오는 ‘황옹가마터’ 가능성 언급
400여년간의 역사를 잊은 듯 사철 내내 푸르름을 유지해온 사천 선진리성 인근 왕버드나무.
앞에서 소개된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진주목에 황옹을 굽는 도기소가 둘 있으니 하나는 동쪽 유등곡이고 또 하나는 남쪽 반롱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럼 진주목의 동쪽에 있는 유등곡은 어디를 말하는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유등곡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는 이를 정밀하게 추적하여 밝혀낸 사실을 공개한다.
버들 유(柳), 무리 등(等), 계곡 곡(谷)인 유등곡을 한자로 풀이하면 버드나무가 무리지어있는 계곡이며 위치는 진주의 동쪽에 있다는 것으로 풀이 된다.
진주에서 동쪽이라 함은 현재 사천시 정동면을 말하는 것이며 정동면은 조선시대에 진주목 사천현 동면(東面)으로 불리다가 일본제국강점시대에 정동면(正東)으로 불리게 된다.(1931)
정동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이 사남면과 정동면에 있는 이구산으로 아랫부분의 바닷가 근처에 유천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이 유천이 바로 버드나무 유자가 있는 유일한 곳으로 세종실록지에 나오는 유등곡의 첫머리 글자와 일치한다.
이 버드나무는 현재의 양버들 계통이 아닌 물가에서만 자생하는 토종 왕버드나무다.
그것도 수백 년간 고목으로 자생하는 군락지가 있으니 유천에서 죽천강가 기슭과 이구산에 이르는 곳이다.
이 주위에는 옛날부터 내를 이룬 샘이 있고 하천이 흐르고 있었어 필자가 발견한 우천리 가마터와 연결돼 있다.
이곳에서 솟아올라 들판을 기름지게 했던 샘은 왜 이 지역에서만 특이한 것일까?
구룡저수지 발원이 되는 가천마을의 용소에서 연천, 능화마을을 거처 구룡저수지로 이어지고 죽천 강을 통해 사천만 바닷가로 흐른다.
정유재란 때 지상최후의 전투였던 1598년 10월1일 사천 선진성 전투에서 선진성을 탈환하려고 애썼으나 왜군에 패한 조명연합군이 야밤에 빠져죽었다는 당병소도 이곳 죽천강에 있다.
선진리성 부근에는 이런 샘이 많다고 해서 (참새미, 드레새미, 새새미, 원새미 등) 일본에서는 이 지역을 이도라는 이름으로 기록한것이 있으며 (선진리성 전투에 참전한 일본장수의 기록집) 이를 ‘조선막사발 천년의 비밀’의 저자인 정동주 씨도 소개한 바 있다.
이 주위에서는 군락을 이룬 집단 가마터도 발견된다.
우천리 가마터를 시굴 조사한 경남문화재 연구원의 우천리 가마터 시굴조사는 최종 결과보고서(약식)에서도 저수지 수면아래 백자 가마터의 존재를 인정한 바 있다.(2003년2월)
1996년 이 가마터를 최초로 발견해서 도 지정 기념물로 (제233호) 지정될 때까지 경남도 문화재 전문위원들(박동백, 심봉섭, 안춘배 등)의 3차에 걸친 지표조사에서도 녹유, 흑유, 막백자(고려다완류의 사발파편)등의 다양한 생활자기가 발견됐다.
이 가마터가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중요 민요가마터로서의 가능성과 고려다완(이도다완) 의 생산지로서의 가능성 때문에 이곳이 경남도문화재로서 지정고시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이 가마터를 중심으로 사발만 구운 대산, 사촌마을 등에도 (경남도지정문화재 제234호) 수많은 옛 가마터가 존재하고 있다.
특히 이 가마터 산등성이를 마주한 정동면에 있는 소곡가마터는 관요로서 이름이 높았고 이곳은 철을 생산하는 기지였으며 이 때문에 인근 고을 이름도 많은 사람이 머물러 가는 곳으로 객방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 많은 가마터 흔적 하나하나가 우천리 가마터에서 발견된 녹유 및 황옹계통(타렴기법의 전통옹기제작방법으로 제작한 항아리 등을 말함)의 가마터를 그 뿌리로 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필자는 우천리 가마터의 존재가치를 그 어떤 가마터의 흔적보다도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 지역 시굴조사 현장 확인 당시 이곳의 중요성을 인정한 전 이화여대 박물관 나선화 학예실장은 감동에 겨운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바로 이 가마터다. 우리가 그렇게 찾고자 했던 가마터가 이제 발견됐다. 일본에서는 16세기 후반부터 이 가마터가 나온다. 그것은 임진왜란 때 끌려간 도공의 손에 의한 것. 왜 이 가마터가 중요한가는 바로 우리 도자사에 할아버지 의미를 가진 가마터이기 때문이다.
자기로 이행되는 고화도의 자기질도자기의 가장 뿌리가 되는 것이 녹유가마터인데 우리나라에서 여태껏 무덤의 부장품등에만 발견 됐을 뿐 가마터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일본이나 다른 나라에서는 우리를 보고 자기질로 분류되는 고화도의 고급도자기술의 원천적인 ‘뿌리’에 대해 인정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찾고자 했던 녹유가마터가 이제 나타난 것이다. 남해안 일대 어디엔가 있을 것이란 신념을 갖고 있었는데 이 가마터를 보니 정말로 반갑기 그지없다. 이 가마터 흔적은 우리나라에서는 국가적으로 보호해야 할 아주 소중한 유적지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 말하는 황옹가마터의 기록은 이곳 우천리 가마터를 말하는 것이라고 정확하게는 아무도 말 할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황옹가마터의 의미 또한 아직까지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필자가 밝혀 나가는 고려다완 이야기는 우리 도자사의 뿌리를 밝히는 작업이므로 황옹가마터의 기록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특별하게 산화소성으로 노란색을 내는 불의 기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특히 우천리 가마터를 시굴 조사한 경남문화재연구원의 시굴 조사 최종 결과보고서(약식)에서도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오는 황옹가마터의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토승 김남진의 고려다완 이야기⑫
입력시간 : 2007. 02.12. 06:00
토승 김남진의 고려다완 이야기⑫
사천만의 해운통로가 유등곡과 반룡 나루터 연결 축동면 반룡 나루터서 황옹가마터 흔적 발견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나 있는 유등곡에 이어 또 다른 황옹의 생산지 반룡진은 어디인가 살펴보자.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도기소가 2개이나 하나는 포곡리에 있고 하나는 노동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동국여지승람’에는 노동의 소가 없어지고 반면에 반룡소가 나타난다.
세종실록지리지 진주목조에 의하면 자기소가 셋인데 그 중 하나는 주의 남쪽 반룡진(盤龍津)에 있고 누른 옹기만을 구었는데 품질이 낮은 하품으로 기록돼 있다.
이 반룡진은 반룡 나루터를 뜻하는데 강가 주위 아니면 바닷가 포구를 말한다.
반룡진이 세종실록지리지 이후 성종조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보면 반룡소로 나타난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 말한 반룡진과 동국여지승람이 말하는 반룡소가 같은 맥락인지는 좀더 연구가 필요하다.
옛 고적으로 변한 향, 소, 부곡, 허, 장 등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며 지방 행정상 어떤 위치인가를 신증 동국여지승람에 있는 글을 토대로 살펴보자.
신라에는 주군을 건치할 때 그 전정(田丁) 호구(戶口)가 현이 될 수 없는 것은 혹 부곡을 두어 그것이 소재하는 읍에 속하게 했다.
고려 때는 ‘소’라는 것이 있었는데 금소, 은소, 동소, 철소, 사소, 주소, 지소, 와소, 탄소, 여소, 목소, 곽소, 옹기소, 어염소, 강소의 구별이 있어 각각 그 곳에서 생산한 물건을 공급했다.
또 ‘처’와 ‘장’이라고 하는 것이 있어 각 궁정, 사원 및 내장 댁에 분속되어 그 세(세금)를 바쳤다.
향, 소, 부곡 등은 그 기원이 삼국시대까지 올라가며 주현과 같은 정상적인 지방 행정력을 구성할 수 없는 작은 규모의 고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특히 소는 광업 및 수공업 종사자들이 집단 거주지였고 처, 장 또한 왕실, 사원 등 귀족들에게 예속되어진 하층신분의 집단 거주지였다.
이러한 집단의 소는 집단으로 모여 살면서 농사를 짓거나 소금을 굽거나 금, 은, 동 철 등의 광석을 채취해 가공하거나 기타 생활용품을 생산했다.
그러나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이와 같은 제도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향, 소, 부곡, 처, 장으로 표시되는 명칭마저 사라지게 된다.
이미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와 있는 자기소가 둘이니 군남쪽 포곡리에 있고 하나는 군 동쪽 노동에 있는데 모두 중품이라 했다.
간행시기가 위 지리지보다 32년가량 뒤지는 동국여지승람 고적조에 의하면 각 군현에는 향, 소, 부곡, 처 등이 표기됐다.
사천현에는 관해곡소, 곤양군조에는 금양부곡, 포곡소, 반룡소, 다음향 등 향1, 부곡2, 소2개소를 기록해 놓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오는 자기소 둘 중 하나인 군 동쪽 노동이 반룡진이라 생각되어지며 후에 편찬되어진 동국여지승람에는 노동이 없어지고 반룡소가 나타나는데 이 반룡소가 반룡진이요, 노동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누런 황옹을 구웠다는 그 반룡진은 어디일까?
무엇을 생산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일단은 도자기를 생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 반룡소가 있는 곳은 현재 사천시 축동면 반룡리 일대이며 반룡진의 반룡 나루터는 가화강 어귀인 사천만 상류쪽, 즉 내륙 깊숙이 들어간 진주까지의 가화강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녹유(황옹)계통의 파편과 가마터 흔적을 발견했다.
그리고 또 한 곳에 반룡이라는 지명이 나오는 데 이곳의 위치는 아주 재미있는 곳에 있다.
이는 사천읍과 정동면, 사남면의 경계 부근에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바닷가 인근에 있는 정동면 반룡마을이며, 유천마을 위에 있는데 바닷가 주위에 있는 방지마을(옛 선창포)은 늑도섬의 유적지에서 나온 것과 같은 시기의 패총이 발굴됐다.
또 사천만의 상류지점으로서 가화강, 사천강, 죽천강 등 사천을 대표하는 강변의 중앙에 있으며 그 옛날에는 선진리성이 있던 선진보다 더 많은 물자 보급을 한 해운선이 진을 친 곳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거주했던 곳이다.
조창기지였던 통양창과 가산창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이곳은 진사 공단 조성시 발견된 유천리 기와 가마터가 말해 주듯 이곳의 조창기지 및 생활에 필요한 기와 등을 구웠다.
이곳 역시 조선 초기의 제작연대를 가진 가마터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된 지역이다. (유천, 초전 가마터. 옛 사천군지에 기록)
특히 이 반룡마을은 ‘굼실’, ‘앳골’로도 불리는데 이 같은 이름은 기와 및 도자기를 구운 마을이란 뜻이다.
이 반룡마을 위에는 성황당 산성이 있고 그 산맥이 이구산으로 뻗어 우천리 도요지까지 연결되어 능화마을을 거쳐 사촌리 도요지가 집중 분포하는 사촌, 대산 마을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산맥을 경계로 하는 사남면과 정동면 사이에 있는 계곡마다 마을마다 샘과 가마터가 있었다.
한편 사천 지역의 행정구역 변천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재 곤양 포곡사와 축동면 반룡리 일원은 옛 시절부터(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진주에 속해 있었거나 곤양군에 속한 지역이어서 임진왜란 당시인 16세기 전후의 시기에는 사천현의 지역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천만의 역할이 내륙 깊숙이까지 리아스식 바닷길로 이어진 관계로 도자기 기술의 문화교류가 그 해운통로로 같이 이어져 있었다고 본다.
1914년 일제 강점기 때 부령 제111호의 행정구역 개편 때 오늘날과 같은 사천군이 탄생된다.
곤양군과 옛 진주였던 축동면을 사천군에 편입시키면서 지금의 사천지역의 행정구역이 된다.
여하튼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오는 황옹을 생산한 곳은 현재 사천지역이 분명하다.
또한 이 황옹이 과거 고려다완 가마터의 흔적이라는 기록은 없으나 고려다완의 색체가 노란 비파색이어서 황옹이라는 도기소에 그 흔적이 있을 것임을 우리는 충분히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지역에서 발견된 황옹가마터와 그 주위에서 군락을 이루며 번성했던 옛 민요 가마터의 실체들, 우리의 옛 역사를 기록 속에만 남겨 놓고 있는 것들….
이 모든 것을 실체적 해부방법으로 밝혀 나가는 이 ‘고려다완’이야기는 이제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된 전국 도·자기소 300여 곳에 대한 정밀분석, 정확한 증거자료를 바탕으로 일본에 빼앗긴 뒤 그 역사적 실체마저 파악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는 고려다완의 뿌리를 밝혀 나갈 것이다.
황옹가마터는 앞회(⑪, ⑫)에 소개한 진주목의 2군데 외에 경상도 초계군에도 황옹만 굽는 가마가 있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경국대전의 공전 (1425~1465) 외공장조에도 충청도 임주에 황옹장 한명이 있으며 본조, 봉상시 등 14개 기관에 옹장이 104명이라고 기록돼 있다.
그렇다면 세종실록지리지(1454)와 경국대전의 공전, 본조, 봉상시 등의 기록에 나와 있는 황옹장1명과 옹장 104명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우리는 이 실록에 기록된 황옹의 의미를 자세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
먼저 우리나라의 도자기 변천사를 알아보자.
선사시대 무문토기를 거쳐 가마에서 번조한 치밀질 토기, 석기, 도기 등이 생산된다.
이 기술은 이미 말했듯이 철의 생산지로 연결되는 가마 구조가 도자기 가마의 이행으로 본 필자의 주장이며, 그 같은 기술의 발전은 삼국시대를 거쳐 통일신라까지 이어진다.
신라 말 장보고의 청해진이 설치 됨에 따라 한반도는 중국기술자의 유입으로 자기를 생산하는 국가로 된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그러나 중국의 자기기술과는 별개로 이 땅의 독창적인 자기질 유약을 녹이는 불을 가진 민족(가야)임을 간과한 것도 사실이다.
학계의 일각에서는 한반도 고유의 청자 굽는 기술을 가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는 전남 동구림리 토기가마터를 그 예로 제시할 수 있는데 이는 통일신라시대인 8~9세기경의 경질, 연질 두 계통의 그릇 파편인데 회유 유약의 자연유가 시유된 것이 발견됐다.
이 유약의 시유가 우리나라 청자의 자연발생이 확실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나라 청자의 자연적 발생의 기원은 무엇을 두고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앞회에 기술한 바와 같이 토기나 석기단계를 지나 가장 기본적으로 그릇표면에 시유되는 장석과 광물질에 식물성재 및 석회석(조개껍질)을 매용제로 해서 만든 유약을 말함인데 이 유약을 시유한 초기단계의 그릇을 회유도기에서 녹유, 즉 녹청자를 생산하게 되는 것이다.
이 녹청자(일명 녹유, 황옹)의 제작 기술은 바로 1,250℃ 이상의 고화도의 불의 기술을 의미하며 유약이 그 온도까지 가야만 녹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자기질 도자기의 원천기술로 보는 것이다.
전남 동구림리 토기 가마터에서 이 녹청자 자기그릇의 이행으로 되는 원천적 기술인 회유가 시유된 것으로 본다면 이제 우리나라 녹청자 가마터를 찾으면 확실히 증거를 제시하게 될 것이다. 9세기 후반에서 10세기 초반 경으로 보이는 인천 경서동과 해남 진산리에 녹청자 가마터가 있다.
그러나 이 가마터는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 독창적 기술로서 자기로 이행되는 녹청자(녹유, 황옹) 가마터를 찾아야 한반도문화의 독창성과 우리민족의 창조정신을 올바르게 계승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위치로 봐서 그 독창성을 가진 곳이 옛 가야 권에 속한 경남지역이다. 가야토기는 이미 자기질을 만드는데 필요한 불의 온도를 보유했으며 이 기술을 바탕으로 경질 도기, 석기, 자기를 생산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나라 도자기 변천사에 가장 중요한 획을 긋는 자기로의 이행과정을 한번 살펴보자.
이 시기는 신라 말부터인데 바로 회유도기 탄생이 그 분기점이 된다. 유약이 최초로 입혀지는 회유도기는 경질, 연질로 나눠지며 경질 도기 쪽은 치밀 질의 태토에 시유한 자연 유를 발생시키기 위한 고온이 요구됨으로서 이 계통이 바로 녹청자(녹유, 황옹)가 되며 청자, 분청, 백자 자기 가마로 이행된다.
연질계통은 치밀 질이 아닌 태도(불심에 약한 흙)를 사용하면서 번조시켰기 때문에 이 계통은 질그릇, 오지그릇, 옹기로 분류된다.
우리나라 도자기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가 바로 이 회유도기에서 녹청자가 생산되는 시기인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 기록하고 있는 황옹가마터는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전국 도자기 324개소에 있는 가마 중에서도 경남지역에 유일하게 황옹 가마 3군데를 기록해 놓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황옹가마터가 있었다는 사천의 유등곡과 반룡진외의 초계군은 어디인가?
이곳은 지금의 합천군으로, 이곳에는 야로면이 있다.
이 야로라는 지명은 우리말로 화로라는 음훈이다. 즉 쇠를 달구는 제철소가 있었다는 말이다. 이곳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으며 가야토기를 생산한 것으로 보이는 가마터도 목격된다는 이 지역 주민들의 증언도 있다.
왜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전국의 도자기 324군데 중에서 유독 사천지역과 합천지역의 가마터를 황옹으로 기록해 놓았을까?
이 가마터에는 어김없이 다양한 그릇파편들(회유, 녹유, 막백자, 고려다완)이 나오고 있으며 그리고 철을 제련한 곳이 있다.
우리는 아직 그 의미를 자세히 모르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 가마터의 중요성은 우리나라 도자기가 고유의 전통기법으로 발전돼 온 ‘민간요’이며 우리나라 도자기의 뿌리가 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당시 기록된 324개의 전국의 가마가 생긴 것은 대부분 고려 말부터 인데 왜구의 빈번한 남부해안 침입과 함께 국가의 지배력이 약화돼 철저한 관요체제로 운영돼 온 청자 가마가 해안가에서 전국 내륙으로 흩어지면서 전국각지에서 수많은 도자기 가마가 양산되게 된 것이다.
조선 27대왕중 유일하게 실록에다 지리지를 부록으로 발간한 세종. 그 기록에 의해 그 실체가 밝혀지는 우리나라 고유의 황옹가마터….
사천지역에서 발견된 그 가마터는 분명 이 땅의 자기도자기의 뿌리이며 고려다완의 역사적 자리매김에 있어 꼭 필요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적이다.
토승 김남진의 고려다완 이야기⑭
가야시대~조선조 제철생산지 사천의 철 제련기술과 전통도자기 가마 구룡사와 옛 배방사 사지서 우천리가마의 황옹 파편 발견
입력시간 : 2007. 02.26. 06:00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가장 민족적이며 창의적인 문화를 꽃피우게 했던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한 뒤 시가인 용비어천가를 만든다.
배방사에있는 차밭 전경 (인도 야샘종으로 가락 국기에 나오는 허황후가 김수로왕에게 시집올때 가져왔다고 전해지는 차나무가 있음)
‘뿌리 깊은 나무는 쉬 흔들리지 않으며 샘이 깊은 물은 잘 마르지 않는다’라는 글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이란 새 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의 조선건국 당위성을 합리화시키고 아울러 나라의 통치기강을 확립하기위한 것이다.
이는 세종의 6대조 할아버지까지 왕으로 추존시키기 위한 것으로서 그 조상의 공덕을 찬양하는 것이다.
이후 조선왕조는 400여년 이상을 지켰다.
고려 말 한미한 무인의 집안이었던 이성계는 조선의 건국이후에 세종이라는 걸출한 왕을 배출함으로써 비로소 그 정통성이 확고해진 것이다.
조선왕조를 보나 우리의 역사를 보나 세종이란 큰 이물의 배출은 그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과거 일제 침략시대때도 우리나라 전국 도요지를 조사할 때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있는 전국 도자기 가마터 324군데를 근거로 조사했다.
일본은 임진왜란 때 붙잡아간 조선 사기장들의 손을 통해 비로소 자기를 굽는 기술을 갖게 된다.
배방사 옛절터에서 발견된 그릇 파편들 (우천리가마터 에서 나온것과 동일함)
우리 선조들이 자기 굽는 기술을 가졌던 9세기보다 무려 8세기나 뒤진 17세기에 고화도의 자기 굽는 나라가 된 일본, 그 일본도 최초로 시도한 자기는 녹유계통의 그릇이었다. 그것은 앞서 설명했듯이 자기의 원천적인 뿌리가 바로 녹유(황옹)였기 때문.
일본이 조선도공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그릇을 구운 옛 가마터를 조사하면 어김없이 우천리가마터나 반룡진 가마터에서 구운 녹유(황옹)계통의 그릇 파편과 일반 막백자가 함께 섞여 나온다.
이것은 400년 전 일본에 자기기술이 전래될 때 그 뿌리를 가진 곳(민간요)에서 전래된 기술로 도자기 산업이 발전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지역의 도자기 가마터에 대한 뿌리를 좀 더 밝혀보자.
경남 사천에는 어느 시대인지는 정확하게 고증되지 않은 제철지가 있다. 일명 ‘쇠실’인 소곡마을이다. 현재 정확한 주소는 사천시 정동면 소곡리 산 105-1번지.
이 산은 흥무산의 줄기이며, 사남면 사촌리 도요지와 이웃해 있다.
이곳에서는 금, 은, 동도 같이 채굴했는데 어느 시대부터 쇠를 했는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구전에 따르거나 폐광된 채굴방벽을 보면 아주 원시적인 채굴을 한 흔적이 있는데 이것으로 추정해서 5~6세기경 가야시대부터 채광을 했다고 본다.
그러나 이것을 인정할 만한 문헌이 없다. 우리의 안타까운 옛 역사중 특히 가야의 역사가 종적을 감춘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세종실록 세종21년(1439) 9월 초 경상도 관찰사의 보고서를 보면 ‘사천, 청하, 경주에서는 연철이 생산되고 창원, 의성, 청송에서 산출되는 것은 동철’이라는 기록이 있다.
경상도 속찬지리지(1469)를 보면 사천의 세공 정철은 360근이고 곤양군은 407근으로 되어 있고, 단종실록(1453)에 보면 사천의 본 현과 고성, 곤양, 거제 등 옛 고을의 군기를 만드는 도회소를 사천에 두고 감련관(군수물자를 만드는 일을 감독하는 관원)으로 하여금 감독케 하였다라고 돼있다.
그렇다면 이 도회소가 어디인지 알아보자.
사천읍지에는 관해곡소가 있다. 이곳에서 쇠를 생산해 무기를 만든 증거가 될 수 있는 것들이 나왔다. 1986년 4월경 하동군 고전면 고하리의 밭에서 청동제 사전총통과 팔전총통 등 총 107정의 무기가 쏟아져 나왔다.
이들 무기에서 명문이 발견되었는데, 내용은 ‘무진3월 석씨 성을 가진 장인바치가 사천서 만들었다’라하고 감련관 양 국화의 감주라 되어있다.
구룡사에있는 부도 (부도에서 발견된 문서에서 남방불교의 흔적이 있다 )
이는 세종 30년 초 무진해에 조정에서 총통등록을 만들어 각도에 철통을 만들게 했다는 기록과 일치한다.
가야부터 조선조까지의 제철생산지였던 사천,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나 이 제철지인 소곡마을(쇠실이라 불림)과 인근 산등성이를 마주한 사남면 계곡은 오래전부터 각종 생활용기를 굽던 가마터가 무수히 있었다.
소곡제철지 바로 옆에 있는 가마터의 존재는 철의 제련기술이 전통도자기 가마의 기술로 이행되었다는 필자의 주장에 대한 물증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제철지와 함께 존재했던 옛 도자기가마터는 그 용도가 있을 것이다.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우리나라 도자기 역사는 철저한 관요체제였다.
일시적인 중앙집권의 약화와 왜구의 침입 등에 의해 내륙으로 분산된 시기였던 고려 말과 조선 초를 제외하면(약60년간) 관요위주로 그릇을 구운 우리의 도자사에서 이곳 사천의 특이한 역사는 우리나라에서는 찾기 힘든 ‘민요’가마터의 역사를 탄생시킨다.
그것이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고려8대왕 현종의 이야기요, 풍패의 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런 역사가 바탕이 된 사천지역은 고려의 국교인 불교가 이 사천 땅에서 불국정토를 이루며 융성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가락국기나 조선사찰자료에 기록된 귀룡사(현 구룡사)의 사적에 보면 우리나라의 북방불교 이전에 서기 48년을 전후한 시기에 인도에서 온 허 황후와 보옥조사의 칠불사 이야기는 우리나라가 가야시대에 이미 인도로부터 남방불교가 전파되었음이 확인된다.
구룡사부도에서 최근 발견된 기록에서 가야불교의 전례가 있음을 강하게 뒷받침해주고 있다.
가야시대부터 철을 생산한 제철지가 있었고 그 인근에 존재했던 가마터, 그리고 고려현종의 특이한 이 지역과의 인연, 사찰의 번성(와룡산에는 백여 개가 넘는 사찰이 있었다고함) 등이 바로 이곳에서 오랜 세월동안 독특한 ‘민간요’가 있게 한 원인이 됐다고 본다.
구룡사에서 발견된 그릇 파편 (우천리 가마터에서 나온것과 동일함)
그리고 특이할 만한 것은 사천의 지형이된 리아스식 해안을 낀 사천만의 수운해로와 선진성, 고려 때부터의 조창지등의 역할이 이미 사천지역은 모든 문물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한 것이다.
이제와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과거의 역사 앞에 이 지역 특이한 가마터의 흔적들이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한 ‘황옹’가마터의 실체를 증명함으로서 이 황옹가마터가 뿌리가 되어 가마터에서 생산된 그릇과 생활 자기들은 그 공급원이 주로 와룡산 주위에 밀집해 있었던 100여 개가 넘은 사찰에 공급된 것이었다.
남방불교의 뿌리가 있는 이곳 사천은, 이런 역사적인 인연으로 사찰에서 사용된 각종 생활자기가 독창적인 모습으로 생산되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고려다완의 생산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사찰 중에서 우천리가마터와 연결된 구룡사와 현종이 기거했던 옛 배방사의 사지에서도 우천리가마터(유등곡)에서 잠룡시절 구운 황옹 파편을 발견하면서, 필자는 이 같은 사실들을 계속 증명해 나가는 것이다.
토승김남진의 고려다완 이야기⑮
일본 개요 아가노 가마는 사천지역 민요가 뿌리 日 존계후손들 우천리 가마 녹유 파편 보고 고향 인정 김남진씨, 지난달 25일부터 5일간 일본 현지 답사 … 존계 후손 방문
도도끼 카이지씨가 김남진씨에게 녹유파편과 백자 파편은 같은 가마에서 생산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앞에 소개한 바와 같이 일본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끌고 간 조선사기장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자기를 굽는 기술을 갖게 된다.
필자는 자기 굽는 기술의 뿌리가 녹유(황옹)를 생산하는 것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녹유(황옹)가마터의 흔적이 중요하다고 했다.
임진왜란 때 피랍된 조선 사기장들이 큐슈일대에서 일본 7대요를 개요한 고가마군에서 발견된 그릇파편에서 나온 녹유가 그 증거가 된다.
필자는 이와 같은 주장을 고려다완 이야기를 통해 이미 밝혔지만 지난 달 25일부터 5일간 일본 현지를 직접 답사해 확인한 실증자료를 바탕으로 이를 다시 알린다.
이번 일본 현지 답사를 통해 사천 우천가마터가 자기 선조의 고향이라고 공식 인정한 존계의 후손인 도도키 카이지씨와 와타리 큐베씨의 집에서 대대로 보관해온 400여년전 개요한 옛 존계선생의 가마터에서 나온 파편을 직접 현장 확인하고 왔다.
도도끼씨에게 우천리 가마터를 방문했던 당시 소감과 함께 녹유 가마터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 이곳에 보관하고 있는 그릇파편은 무엇인가?
400여년전 존계 할아버지의 가마에서 나온 그릇파편이다.
△ 사천시 사남면 우천리 가마터가 왜 존계선생의 고향이라고 인정했는가?
<그림2왼쪽>여기에 있는 도자기파편을 보면 녹유(황옹)파편이 많이 있는데, 이 녹유의 형태, 질감이 쌍둥이처럼 꼭 같았다. 400여년전의 한 뿌리임을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완벽한 증거를 찾았기 때문이다.
△ 옛 기록도 중요한데 사천현 십시향에 대한 조상의 고향도 우천리가마터와 일치한다고 보는가?
그 문제는 2002년 이곳에 있는 아가노야끼 400년 실행위원회와 후손들인 우리들이 공식검증을 거쳐 확고한 증거자료를 토대로 인정한 것이다.
그래서 아가노야끼 400년을 기념하여 한국 사천시 화전리와 일본 아가노야끼에 ‘한일 영원한 우호의 비’를 건립한 것이다.
조상의 고향을 찾아서 정말 기쁘게 생각하면서 우리 모두가 감격해 했다. 조상의 고향을 찾게 해준 김남진선생과 사천시에 깊이 감사를 드린다.
△ 우천리 가마터에서 발견되는 녹유(황옹)를 한국의 일각에서는 옹기라고 평가절하 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 옛 가마에서는 녹유파편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 부분을 설명해 달라.
처음 우리가 김남진씨와 정동주씨의 방문을 받고(2000년 7월) 사천에 있는 가마터를 현장 확인(2000년 11월)하면서 그곳에서 나오는 녹유 때문에 존계할아버지의 가마터임을 알았다.
일본 아가노에서 그릇을 구운 존계 할아버지는 이 녹유부터 구웠고, 이 녹유 굽는 기술을 접목하여 각종 도자기(백자, 분청 등)를 굽게 된 것이다.
한국 사천시에 있는 이 녹유가마터는 일반 생활자기를 같이 구울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자기 가마터라는 것아다.
아가노를 개요한 옛 가마터에서는 이 녹유그릇과 백자그릇이 같이 혼재돼 나오고 있고, 우리가 보관하고 있는 그릇파편도 같은 가마에서 구운 그릇들이다.
△ 그렇다면 이곳(일본 아가노)에서 생산한 그릇은 녹유와 백자와 모두 한 가마에서 구운 그릇이란 말인가?<그림3중앙>
그렇다. 한 가마에서 다양한 그릇을 생산했다.
이에 대한 의견과 답변은 존계선생 딸의 후손인 와타리 큐베씨와도 꼭 같았다. (사진 참조)
우리는 녹유가마터를 옹기가마터니 도기가마터니 하면서 예사롭지 않게 여기는 측면도 있지만, 일본은 조선 사기장들의 손에 의해 자기 굽는 기술을 가지게 되는 것이 녹유를 생산하면서 가능해 졌으며 이는 17세기부터 였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9세기 때 이미 녹유 굽는 기술을 보유했으며 이를 뿌리로 삼아 다양한 그릇을 생산하게 되는데, 녹유는 자기 질로 청자, 분청 백자의 기술로 발전되며 그 속에 일본이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는 고려다완이 생산됐다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에서 ‘민간요’나, ‘녹유’ 가마터를 제대로 평가한 사실이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고 반성해야 할 것으로 본다.
국제적으로는 일본이 본격적으로 자기국가가 되는 17세기 초 조선 사기장들의 기술전래 속에 녹유가마터가 그 뿌리가 되었다는 것은 당시 조선에서 먼 옛날부터 독창적이며 창의적인 ‘민요’ 가마터의 생성과 발전이 그 밑뿌리가 되었다는 것이 사실로서 증명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의 도자역사는 모두가 ‘관요’중심 돼왔고 자기질 도자기하면 고급스런 귀족이나 왕실중심의 ‘관요’에서 생산된 역사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일본이 자랑스러워하는 고려다완의 생산지를 사발만을 전문으로 구운 가마터에 고정시킨 시각을 갖고 찾고자 하는 편견된 모습을 보여 온 게 우리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옛 ‘민요’가마터는 다양한 생활자기를 종류에 구애됨이 없이 구웠으며, 관요처럼 그 어떤 형태나 특정적인 그릇이 아닌, 지역특성에 맞는 흙과 유약성분에 따라, 불을 조절하면서 그 지방에서만 생산될 수밖에 없는 독특한 도자기의 전형적 모습이 바로 ‘고려다완’의 탄생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일본은 고려다완의 가마터는 ‘민요’가마터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민요’가마터의 실체에 대해 우리 스스로가 너무 모르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이는 옛 기록자체가 관요중심으로 기록해 놓았으며, ‘민요’라는 용어조차도 인정하지 않았던 역사 때문이리라.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세종실록지리지에서 기록해 놓은 전국 324군데의 도자기 가마터를 접하면서 비록 ‘민요’의 기록은 없지만 당시 관요체제로 운영된 도자기 가마터는 명문으로 된 기록을 도자기 파편에 남겼다.
또한 일반 생활자기 가마터중 그 명문이 보이지 않는 곳을 정밀 추적해 그 시대의 역사를 연구하면 반드시 고려다완의 생산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렇다면 일본 아가노야끼의 뿌리가 된 사천에 있는 우천리 도요지의 모습부터 살펴보자.
경남 문화재연구원에서 시굴 조사한 보고서를 토대로 보면 연소실을 포함한 단칸 가마로 길이 약 6m, 폭2m 20㎝이며, 녹유계통을 구운 고급도기 가마터이다.
출토 유물은 녹유(황옹) 흑갈유의 항아리, 병, 주구호, 편구발이 주류를 이루며 교란되지 않은 지하땅속에서 백자계통의 완벽한 사발(완)이 발견됐다.
현재까지 이와 유사한 유적을 조사한 예가 많지 않아 동일한 특징을 보이는 자료가 매우 적다. 고급품으로써 확인된 요지를 중심으로 정밀 발굴조사가 필요하다고 본다.<그림4오른쪽>
이와 함께 탄소연대 측정 및 발열 형광 측정 등 과학적인 연대측정을 시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으며, 저수지 수면 아래에는 백자 가마터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며 상당수 백자파편도 수습됐다고 했다.
그리고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오는 황옹가마터의 가능성도 지적했다.
그러나 이 보고서에서 밝히지 못한 것은 바로 필자가 주장하는 민간요의 실체 부분이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만든 민간요의 실체를 밝히고 규명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 도자기의 뿌리를 밝히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동시에 일본에 빼앗긴 옛 조선 사기장의 역사를 밝히는 역사적인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사천시 사남면 우천리 가마터에서 드러난 ‘황옹’ 가마터의 실체가 우리의 옛 뿌리였던 ‘민요’가마터의 흔적이기 때문에 그나마 고려다완의 실체적 연구가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첫댓글 좋은 글입니다. 민요는 문경도 유서깊은데요~ 그리고 문경의 천한봉선생도 고려다완 재현하시는 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