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이레- 또 다른 만남, 16.3.27
길병원에서 수술은 마치고 재활을 위해 개인 병원으로 전원하려고 알아보니 길병원협력 병원인 ‘연세정형외과 ’(원장 최명무) (인천 송도역 맞은 편)를 소개 받았다. 알고 보니 고영철회장님 지인의 병원이었다. ‘세상 좁구나~’
최병무원장님 (연세정형외과) 진찰을 받았는데 동네 맘씨 좋은 형같은 인상이셨고 이모저모 잘 물어보시고 배려해 주셨다. 나는 중3 이던 1979년부터 전과 11범 김덕팔이라는분의 간증을 듣고 회개하고 숭의감리교회 중등부부터 청년부 회장까지 활동하다가 농아인교회로 옮겼었는다. 그런데 최병무원장님도 유치원부터 숭의감리교회를 다니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야 세상 좁구나~
그리고 병실에 들어서니 교통사고를 당하셔서 먼저 입원하신 분이 계셨다. 그 분과 통성명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또 깜짝 놀랐다. 내가 출석하는 주안농아인교회 옆에 위치한 주안감리교회 정태웅장로님이셨다.
따지면 같은 교인이다. 왜냐하면 주안감리교회는 10여년 전 주안농아인교회가 분교하면서 예배처가 없을 때 주안감리교회 교육관의 한 사무실을 몇 년 간 무상으로 사용하게 하셨고 자립해서 나갈 때 까지 도움을 주신 모(母)교회 같은 곳이었다.
지금도 주안농아인교회 출석 농아인 성도들 자녀 약 20여명이 주안감리교회 주일학교에 다니면서 신앙교육을 받고 있다.
잠시 후 장로님의 둘째 며느님이 병원에 왔는데 얘길 하다 보니 이학녀 황재구집사님의 아이들을 가르쳤던 분으로 ‘황기성, 횡인성’ 이름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최근 사진을 보여주니 많이 컸다면서 참 바른 아이들이라고 하셨다.
****** 정태웅장로님과의 대화를 정리한 간증 *******
전혀 모르는 곳에서 만난 주안감리교회 정태웅장로님의 간증은 특별하지는 않지만 평범한 삶에서 니오는 살아있는 간증이었다. 5대째 이어온 기독교 집안으로 장로님의 외할머니의 한 분의 신앙이 지금은 700여명의 신앙의 대가족이 되었다.
4인 병실에 단 둘이 앉아서 장로님의 일생을 간증으로 들으면서 정말 은혜로왔고 마음이 풍족해짐을 느꼈고 글로 옮기기 시작했다.
1. 정장로님의 외할머니께서는 주안감리교회 초기 신자였으며 물심양면 교회를 위해 헌신하셨다. 정장로님의 어머님 소천때는 교회에서 교회장으로 엄숙히 치러주셨고 종친회 선산에 묻히실 때는 비둘기 품에 안기듯이 편안하게 모셨다.
2. 장로님 어머님은 오자다리로 태어나셨지만 호랑이띠에 성격도 좋으셔서 믿음 안에서 생활력도 강하셨다. 교회를 다니실 때는 산 넘어 밭 도랑을 건너 30분 이상을 절룩거리시면서 걸어 다니셨다.
당시는 씨족사회라서 주일에 교회를 가면 마을 사람들이 밭 일을 하다가도 주일날 교회 간다고 손가락질하던 시대였다. 하지만 어머니의 신앙이 나를 있게 하였다.
3. 정장로님의 어머니가 병에 걸리자 아내이신 박옥자권사님이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셨고 모든 수발을 다 챙기셨다.
나중에는 형제가 서로 어머니를 모시려 했고 결국 형님이 어머니를 모셔서 형님댁에서 소천하셨다. - 광양 강아지 5마리 , 대변 사건
4. 장로님이 어려서 동네에 돌림병이 돌았는데 옆 집 친구는 기와집에 부자여서 의사가 왕진도 오고 무당이 굿도 했지만 결국 죽었다.
장로님은 13살 정도에 일주일을 먹지 못하고 사경을 헤매는데 김동형전도사님이 (1957-1967 7대 주안감리교회 담임목사) 오셔서 기도해 주셨는데 장로님이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데도 “또 와서 기도해 주세요” 라고 말을 했고 드디어 병이 나았다.
5. 돌림병이 나아서 감사하는 마음에 교회에서 새벽종을 치기로 했고 그 어린 나이에 교회에서 자면서 오랫동안 종을 쳤다. 밤에 추우니까 나무로 만든 박스에 10와트짜리 전구를 넣으면 발이따뜻해서 잠을 자기도 했다.
어느 날은 시간을 모르고 쳤는데 새벽 2시였다. 나중에 길 건너 주안장로교회목사님과 주안감리교회 목사님이 그 일로 이야기를 하셨는데 지금도 그 대화 내용이 기억에 생생하다. 종을 칠 때는 타이밍을 맞춰서 잘 쳐야지 땡~ 땡그랑~ 땡~ 땡그랑~ 소리가 나지 잘못 치면 땍~땍~ 소리가 안난다. 나는 종치는 신앙이 평생을 지켜주신 것 같다.
6. 김동형전도사님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한전에 다니면서 교회를 섬기며 설교를 하시다가 8대 주안감리교회 담임목사님으로 취임하셨다.
하루는 어머니께서 장로님에게 닭이 방금 낳은 따끈따끈한 달걀을 2개 쥐어 주시면서 “논뚝길 삼거리에 기다리다가 전도사님 드려라” 해서 드린 기억이 있었다. 여기서 주의 종을 섬기며 순종하는 삶을 배운 것이다. 김동형목사님은 1967년에 부광교회 가셨다가 미국에 가서 목회를 하셨고 지금은 은퇴하셨는데 올해 91살이시고 생존해 계신다.
7. 1989년도에는 집수리를 위해 한얼산 기도원에 가서 기도를 드렸는데 예레미야 33장 2-3절(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의 말씀으로 응답해 주셨다.
당시 한얼산기도원은 이천석목사님 (상이군인 출신 목사님)이 집회를 인도하셨는데 오는 분들마다 은혜를 받았다. 하루는 이천석목사님이 의족을 빼는 걸 봤는데 다리에 피가 묻어있었지만 영혼 구원을 위해 자신의 몸도 아끼지 않으셨던 것이다. 원래는 이천석목사님은 상이군인으로 한강에서 집회가 열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방해하러 갔다가 회개하고 목사가 되신 분이다.
8. 1989년 당시 시멘트파동이 있었지만 그날 그날 준비를 해서 5가구 3층으로 지었다. 1,2층은 세를 주고 3층은 장로님이 사셨다.
최근 남구청에서 학교를 짓는다고 보상을 해주었는데 몇배의 보상비를 받았다. 평생을 욕심 없이 꾸준히 살아온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9. 중부연회하기수련회 초청목사님이 신자 50명만 되면 선교헌금 하라는 설교의 말씀이 강단에서 불같이 내려와서 깨닫고 해외선교, 기념교회 지원을 위해 기도했다.
당시 남선교회 연간 예산이 95만원 이었었는데 기념교회를 위해 10만원씩 28명 회원이 마음을 모았다. 그 후 남선교회 예산도 300~350만원이 되었고 2004년 10,259불 (1,200만원)을 교회에 선교헌금을 위해 드렸었다. 선교는 작은교회라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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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제 찾아와주신 박정자샘과의 수화율동 시간은 새로움을 준 기쁨의 시간어었다. 인천사관학교 강사이신 박정자 샘은 아주 다방면에 뛰어난 재능으로 봉사를 즐겨하신다. 수화는 물론 그야말로 만능 엔터테이너이시다.
이번 입원과 수술 기간은 안식년 같은 느낌이다 더 건강관리를 해서 강건한 체력으로 남은 기간 봉사를 열심히 하기로 기도하며 마음먹었다
https://youtu.be/pUmdWF7jc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