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죽가에서 실의로 죽으려 한 적이 있었다. 아들만 6형제를 둔 단란한 가정이었지만 총명하고 학식이 풍부한 아버지는 국회의원에 입후보로 출마하여 낙선의 고배로 가산을 거의 탕진한 상태였다. 그러던 다음날 뜻하지 않던 6.25 남침으로 인민군은 38선을 넘어 파죽지세로 밀려 내려와 문산, 의정부, 서울이 차례로 순식간에 공산당 치하에 함락되고, 불과 2달여 만에 전주도 공산군이 점령하였다. 산 너머 고갯마루에 있던 병원 모퉁이에는 빨간 깃발과 함께 인민정치보위부가 설치되었다. 그날 아버지는 총을 멘 대원에 끌려간 후로 취조와 고문으로 반죽음상태가 되었다. 그 후 6형제를 남겨두고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편모의 재봉틀 바느질로 우리 6형제는 끼니만을 이어가야 했다. 그때 나는 사춘기였나 보다. 모든 것이 터질 것만 같은 억압감과 억울한 감정을 가눌 길이 없어 차라리 이 한 목숨 던지고 싶은 자살충동에 집을 무작정 나간 것이었다.
빨강색 노을이 지는 5월의 조용한 오후의 안산재(산) 아래 방죽을 찾아갔다. 풀을 배부르게 먹인 송아지를 몰고 돌아가는 아이들의 조잘대는 소리가 행복하게만 들려온다. 온누리가 적막하리 만치 조용한 호수 위는 명경알처럼 맑은 물이 가득히 넘실거린다. 아무렇게나 방죽가에 주저앉아 나는 물 위에 비치는 내 자화상을 훔쳐보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정 형편에 6형제의 학비며 당장에 끼니 걱정하는 어머니의 파리한 얼굴만 떠올랐다.
맘속으로 50번을 센 후 물속으로 뛰어 들리라 마음먹고 뛰어들려는 찰나였다. 만사가 다 해결될 것만 같은 후련함과 주마등처럼 동생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이윽고 하나 둘 셋... 서른 하나 서른 둘... 그런데 이것은 무슨 일이었을까. 조용하던 방죽의 수면을 박차고 텀벙! 하는 큰 소리와 함께 맑은 호수 물위로 솟아오르는 물고기가 있었다. 그리고는 날렵한 몸매를 공중으로 치솟았다가 다시 물속으로 사라진다. 조금 있으니 이번에는 저쪽에서 다시 솟구쳐 올랐다가 사라지는 명경지수의 대반란이 일어났다.
나는 커다란 발견이라도 한 것 같았다. 어떤 물고기는 죽은 듯이 조용한데 어느 놈은 저렇게 비상을 하는 것이 아닌다. 몸부림을 치는 저들의 용기는 무엇일까. 그렇다.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탈출하는 그 용기. 한동안 물속으로 뛰어들어 자살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으로 생각하였던 그 바보스러움이 부끄러웠다. 뛰어라. 다른 세상으로 나가보자. 나도 할 수 있을 거야 하는 막연한 충동이 가슴을 쳤다. 새 정신으로 용기가 생겼다. 나는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집을 향해 뛰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물고기의 비상을 흉내내어 전주를 떠났다. 그 후 어언 50여 년을 고향 밖에서 노스탤지어로 살아왔다.
지금 그 맑은 호수와 정자나무는 다 배어 없어지고 그 자리에 고층 아파트 건설의 망치소리만 요란하다. 호암리는 나의 탯줄을 묻은 자리이며 언젠가 내가 돌아와 묻힐 자리이다. 아름다운 안산재와 명경지수 같던 방죽의 그물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물은 만물의 어머니다. 그 물이 병들어 고갈되어 가고 있으니 어떻게 보전할 것인가. '그 호수 물고기의 반란'은 나를 오늘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이다. '꿈은 진정 이루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이뤄진다.'는 어느 장애자의 말처럼. 그런데 요즈음 자살이 너무 흔하게 유행(?)하는 듯하다. 유명 탤런트 홍** 자살에 이어 인기 여우 최진실의 자살 등등. 잠깐 깊이 생각해보라고. 당신에게 죽을 용기가 있다면 왜 살아보려는 용기는 없는가?
- 부산문학 제46집 2008
첫댓글 물고기의 반란과 용기, 힘과 감동이 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