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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현대사 기행] 러시모어 & 크레이지 호스
자존과 치부의 共存… 미국 역사의 두 얼굴
▶ 미국의 민주주의와 이상을 상징하는 미운트 러시모어. 미국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인 워싱턴·제퍼슨·시어도어 루즈밸트·링컨(왼쪽부터)이 조각돼 있다. 각각의 얼굴 크기 18m, 코길이 6m다.(위사진)./인디언 영웅 크레이지 호스의 석고 모델(실제 크기의 34분의 1)과 1.6km뒤의 실제 바위 얼굴.(아래사진)
러시모어 바위산의 대통령 얼굴은 미국 역사의 자부심이다. 인디언 戰士 크레이지 호스의 바위 얼굴은 백인의 야만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다. 한 곳에 있는 두 영웅은 극단적으로 대비되지만 공존한다. 러시모어가 자유와 애국의 열정을 불어넣고, 크레이지 호스는 역사의 오만과 치부를 정화한다.
산 꼭대기의 암벽을 깼다. 부수고 다듬었다. 다이너마이트 폭발에서 망치질까지 혼신의 정성을 기울였다. 조각가는 인생을 걸었다. 역사의 감수성과 신념으로 자연의 거친 장벽에 도전했다.
세월은 기약없었다. 수십 년이 걸린 대역사(大役事)였다. 산 모습이 바뀌었다. 산 봉우리가 사람의 얼굴로 변했다. 도봉산의 인수봉 같은 곳에 새겨진 초상화. 거대한 암각(岩刻) 인물상은 이집트의 스핑크스나 피라미드와 비교된다. 인간과 역사가 이뤄낸 장엄한 다큐멘터리다.
미국 중서부에 있는 사우스 다코타(South Dakota) 주의 블랙 힐스(Black Hills, 검은 언덕). 그 곳의 산 봉우리에는 두 개의 암벽 인물상이 있다.
하나는 러시모어 산(Mount Rushmore)의 대통령 얼굴, 다른 하나는 인디언 전사(戰士)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성난 말)의 얼굴이다.
마운트 러시모어에 새겨진 대통령 얼굴은 조지 워싱턴(초대)·토머스 제퍼슨(3대)·에이브러햄 링컨(16?·시어도어 루스벨트(26대) 등 4명이다. 미국이라는 나라를 만들고 융성시킨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1927년에 시작해 완공(1941년)까지 17년이 걸렸다. 미국인들은 이곳을 ‘민주주의 전당’으로 부른다. 미국 역사의 자부심, 미국의 긍지가 넘쳐난다.
크레이지 호스는 그 곳에서 27km 떨어져 있다. 같은 블랙 힐스 산자락이다. 작품 일부인 산 정상의 암벽에 얼굴을 새기는 데만 50년이 걸렸다. ‘성난 말’은 19세기 후반 백인과의 전쟁 속에 나오는 인디언 영웅이다. 아메리카가 본래 우리 땅이라는 원주민의 자존심, 백인에 대한 처절한 저항 정신이 담겨 있다. 인디언의 잃어버린 역사를 극적으로 재생시켜 주는 곳이다.
두 현장은 대비된다. 미국 역사의 다양성과 복잡성이 미묘하게 얽혀 있다. 성취와 좌절, 문명과 야만, 갈채와 경멸, 환희와 증오, 빛과 그림자의 극과 극이 혼재하는 미국 역사의 단면을 되돌아보게 한다.
지난 10월 중순 그 곳을 찾았다. 워싱턴 DC의 덜래스 국제공항에서 새벽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사우스 다코타까지 직항 노선은 없다. 3시간30분쯤 비행 뒤 중부 지역인 콜로라도 주의 덴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사우스 아메리카 항공의 비행기로 갈아탔다. 60명 정도가 타는 작은 비행기다. 사우스 다코타 주의 면적은 19만9,700㎢(한반도 전체는 22만9,700㎢). 인구가 77만여 명이다. 목적지인 주의 남서부쪽 래피드 시티(Rapid City). 거기까지 1시간20분 걸렸다.
미국의 이상 상징하는 4명의 대통령 얼굴
조그만 공항은 한가했다. 여름철 관광 시즌이 끝난 때문이었다. 관광 데스크에서 상세한 지도를 얻었다. 중년의 여성 관광 안내원이 10여 종의 팸플릿을 주면서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한국 관광객한테 마운트 러시모어, 크레이지 호스는 낯설지 않을까. 캐빈 코스트너가 감독·주연한 영화 ‘늑대와 춤을’(Dances with Wolves)을 생각하면 가까워지지 않을까. 이 곳 대평원이 그 영화의 배경이고 촬영지다. 영화 속의 인디언 부족인 수우(Sioux)족의 터전이 블랙 힐스다. 다코타는 수우족의 말이며 ‘친구’나 ‘동지’라는 뜻이다.”
공항에서 차를 빌려 먼저 러시모어로 달렸다. 가을 공기는 쌀쌀했다. 겨울이 일찍 찾아오는 곳이다. 인구 6만명의 조그만 도시를 빠져나오자 대평원의 황량함이 다가온다. 러시모어는 블랙 힐스 산맥의 한 봉우리다. 블랙 힐스는 이름 그대로 옅은 검은 산이다. 금강산의 산세와 비슷했다. 성당의 뽀족한 탑 같은 봉우리들이 무수히 펼쳐진다.
그 정상까지는 해발 1,717m다. 중턱쯤의 굽은 길을 도는 순간 사람의 얼굴이 산에 걸려 있었다. 산 정상에 새겨진 엄청난 얼굴이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발에 힘이 들어갔다.
마운트 러시모어 기념관은 산 정상 가까이에 있었다. 입구에서 전망대까지 가는 돌길에는 미국 전체 50개주의 깃발이 걸려 있다. 애국심, 경건함, 순례의 분위기를 우러나게 한다.
전망대로 갔다. 직각으로 산까지 거리는 150m다. 4개의 얼굴상은 똑같이 얼굴 크기 18m, 코 크기가 6m, 눈은 3m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콧수염은 6m다. 엄청나다. 그런데도 사진과 그림에서 본 대통령들의 모습과 닮았다. 사실 묘사가 뛰어나다. 그 규모와 정교함에 압도당한다.
왼쪽부터 워싱턴·제퍼슨·시어도어 루스벨트·링컨 대통령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입을 다물었다. 근엄한 듯하지만 딱딱하지 않다. 특정 인물을 숭배하는 성전(聖殿)의 분위기와는 다르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워싱턴의 표정은 엄숙함 속에 포근함이 드러난다. 제퍼슨은 차분한 학자적 분위기가 풍겼다. 링컨은 고뇌를 담고 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모습은 진지하다.
다시 찬찬히 뜯어보았다. 푸른 가을 하늘 속에서 세수한 듯 깔끔한 모습이다. 손을 뻗쳐 보면 멀지만 큰소리로 떠들면 들릴 듯 가깝다. 당장 입을 열고 무슨 말을 할 것 같다. 그런 느낌은 기자만이 아니었다. 덴버에서 같은 비행기를 타고온 그레그 깁슨 부부. 노스 캐롤라이나에 사는 50대 중반인 그들도 처음 이곳에 왔다고 한다.
전직 초등학교 선생이었던 부인이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무슨 얘기를 해 주려는 것 같다. 이라크 종전 처리가 미숙해 답답해하는 것 같다. 신념과 비전으로 갈라진 국론을 모으라는 주문을 하는 듯하다”고 말했다.
전망대 아래 박물관이 있다. 러시모어 암벽 인물상의 탄생 과정과 의미를 담고 있다. ‘실현 불가능한 꿈의 결실’이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바위 얼굴을 조각한 거츤 보글럼(Gutzon Borglum)에 대한 설명문이었다. 러시모어는 보글럼(1867∼1941)의 삶 자체였다.
러시모어 인물상은 향토사학자(도네 로빈슨)의 아이디어였다. 그 사학자의 구상 인물은 서부 개척사의 주인공이었다. 주 당국은 관광 명물을 생각했다. 당대 최고의 조각가인 보글럼을 초청했다.
보글럼은 아이다호 주에서 덴마크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0대 때부터 성공에 대한 야심이 남달랐다. 그는 캘리포니아에서 그림을 배운다. 유명한 여류화가의 제자였다. 22세 때 18세 연상인 그 화가와 결혼한다. 그 결혼은 상류사회 진출의 발판이기도 했다. 그는 프랑스로 건너가 로댕 밑에서 조각을 공부한다. 첫 부인과 이혼하고 유럽에서 귀국하는 여객선에서 만난 여인과 재혼한다.
1924년 보글럼은 블랙 힐스로 왔다. 57세 때였다. 그는 인물상을 만들려면 미국인 전체가 공유할 수 있는 ‘국가적 상징인물, 역사의 영웅’이 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보글럼의 구상은 받아들여졌다. 그는 여러 산봉우리 중 러시모어를 찍었다. 남동쪽을 바라보고 있어 하루 중 햇볕을 가장 많이 받을 수 있었다. 암벽의 석질도 단단했다. 그는 자신의 꿈을 새기기로 결심했다. 예술가의 감수성과 상상력에 불을 지폈다.
러시모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썰렁한 코미디다. 1885년 뉴욕 출신 변호사 찰스 러시모어가 토지 송사 문제로 이 곳에 왔다. 그 산에 관심을 표시했다. 광산업자가 퉁명스럽게 “이름은 없지만 지금부터 ‘제기랄(Damn it) 러시모어’라고 부르겠다”고 말했다. 그 얘기가 퍼져 러시모어로 부른다고 한다.
박물관의 전시물 중에는 ‘러시모어의 의미’에 대한 설명문이 있다. ‘미국의 건국(founding), 성장(growth), 보존(preservation), 발전(develpoment)을 상징하는 곳이다.’
4명의 대통령은 그 네 가지 개념에 맞는 인물로 선정됐다. 워싱턴은 독립전쟁으로 미국을 건국했고, 제퍼슨은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루이지애나로 불리던 미시시피 강 서쪽의 광대한 영토를 프랑스로부터 사들였다. 대륙국가로의 성장이다. 링컨은 내전인 남북전쟁의 승리로 연방을 보존했다. 노예해방으로 인권의 메시지를 전 세계에 보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20세기 세계의 중심 무대로 미국을 끌어올렸다.
처음에는 워싱턴·링컨·제퍼슨 세 명만 새기려고 했다. 공간이 하나 남아 있었다. 네번째 인물 선택은 논란이 많았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재임 1900∼1907)는 그 시점에서 역사적 평가가 끝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파나마 운하 건설, 혁신 시대를 이끌면서 노동자의 권익을 향상시켰다는 점이 최종 선정 배경이었다.
1927년 8월 착공식이 있었다. 보글럼은 이렇게 자신의 야망을 표시했다. “미국의 역사가 끝없는 능선을 따라 영구히 펼쳐질 곳이다. 위대한 지도자들의 말과 얼굴을 이 곳의 하늘 가까이 높이 새기자. 그 기록은 바람과 비만이 닳게 할 뿐 영원할 것이다.”
완공된 지 무려 50년 만에 공식 제막식
당시 쿨리지 대통령도 참석해 이 곳을 역사적인 기념 지역으로 선포했다. 작업은 고달펐다. 가파른 바위, 곡예 같은 작업, 열악한 도구, 강풍, 긴 겨울, 폭설이 장애물로 등장했다. 다이너마이트를 어떻게 다룰 것이냐가 첫 숙제였다. 폭파 지점, 돌의 강도를 정확히 따져야 했다. 폭약이 너무 많거나 적으면 엉뚱한 돌이 떨어져 나간다. 암반의 균열 현상으로 일부 설계를 변경했다.
떼어낸 암석의 양은 50만t에 이르렀다. 그런 다음 눈·코·입 부분은 소형 착암기·끌·망치를 댔다. 리프트를 만들어 거기에 매달려 작업했다. 기본 개념은 광산의 채석 작업이었다. 보글럼은 광부들을 조각가로 훈련시키면서 가파른 산을 누볐다.
기념관의 최고참 안내원 재리 잿슨은 관광객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작업 착수 때 보글럼은 60세였다. 작업의 마무리를 믿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자금 조달은 힘들었다. 그의 장인(匠人)정신을 가로막았다. 경제공황으로 여러 번 중단되었다. 민주주의 유산을 남기겠다는 열정으로 어려움을 이겨냈다.”
보글럼은 1941년 3월 숨졌다. 최종 완성을 하지 못했다. 아들 링컨 보글럼이 그 작업을 계승했다. 그는 12세 때 아버지를 따라 러시모어에 온 이래 충실한 조수였다. 1941년 10월 아들은 산에서 내려왔다. 완공된 것이었다. 2차대전의 소용돌이는 대역사의 마무리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공식 제막식은 50년 뒤에 열렸다. 1991년 6월 조지 부시 대통령(현 부시 대통령의 아버지)이 주재했다. 아들(1986년 숨짐)도 제막식을 보지 못했다.
서치라이트가 켜진다. 캄캄한 밤 속의 두꺼운 어둠을 뚫고 산 정상에 대통령의 얼굴이 떠오른다. 장엄하다. 관광객들이 일어선다. 미국 국가를 부른다. 환호와 박수에서는 애국심이 넘쳐난다. 여름 관광 시즌 때의 행사다. 가을 시즌에는 녹화한 그 장면을 보여준다.
그것은 시위였다. 미국은 다른 어떤 나라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역사와 영웅을 갖고 있다는 자부심의 과시였다. 깁슨은 가슴벅찬듯 “마운트 러시모어는 미국의 이상과 가치에 대한 자부심과 애국심을 키우는 곳”이라고 강조했다.
답답해졌다. 왜 우리에게는 이런 기념상이 없나?조그만 동상조차 한국에는 드물다. 서울의 친구에게 이런 이메일을 보냈다.
‘미국은 의도적으로 영웅을 만든다. 초제국주의, 오만의 나라 이전에 그들은 영웅을 통해 나라의 힘을 키우고 문명을 전파한다. 영웅의 약점은 버리고 장점을 취해 역사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는다. 링컨은 남북전쟁 때 잔인한 초토화 공격 때문에 아직도 남부에서는 인기가 없다. 그러나 그의 국민 대통합 정신은 역사의 리더십으로 꼽힌다. 한국은 어떤가. 우리는 위대한 인물들을 사정없이 망가뜨려 왔다. 약점 캐는 데만 익숙했다. 현대사에서 우리의 대통령들은 상처투성이다. 2차대전 이후 수많은 신생 독립국 중 한국은 거의 유일하게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뤄냈다. 그런 자랑스러운 성취에도 우리는 과거를 부정하고 상처를 낸다.’
러시모어를 벗어났다. 다음 목표는 크레이지 호스, 즉 ‘성난 말’이었다. 러시모어와 크레이지에 담긴 의미와 역사는 대조적이기 때문에 머릿속을 백지로 만들 시간이 필요했다.
이 곳은 미국 서부 개척사에서 가장 늦게 개발됐다. 대평원의 험악한 자연환경, 교통 사정 때문이었다. 백인 탐험가들은 지평선이 있는 이 곳을 미국의 대사막이라고 불렀다. 캘리포니아 서부 해안가가 개발된 뒤 중서부에 본격 정착하기 시작했다. 남북전쟁(1861∼1865년)이 끝난 후다.
조각가의 영혼 속에 인디언의 역사 재생
블랙 힐스로 가는 길에 펼쳐진 광활한 들판. 아무리 달려도 끝이 없다. 옅은 검은색 산봉우리가 보였다. 신기루 같기도 했다. 가을의 누런 대지 속에 우뚝 솟은 검은 산들. 대평원에 지친 인디언 수우족에게는 그것은 안식처였다. 그 곳에 물이 흐르고 나무가 있고 버팔로(들소)가 있었다. 인디언들은 그 곳을 신성한 곳으로 여겼다. 정신적 고향이자 성지(聖地)였다.
유혈 갈등을 재촉한 것은 금이었다. 1874년 미 육군은 조지 커스터(George Custer)가 이끄는 탐험대를 이곳으로 보냈다. 탐험대는 “블랙 힐스의 풀뿌리에도 금이 묻어 있다”고 보고했다. 백인들에게는 복음이었다. 그러나 인디언들에게는 터전을 빼앗기는 절망의 소리였다. ‘골드 러시’가 시작됐다. 1849년 캘리포니아에서 시작한 서부 골드 러시의 마지막을 이곳에서 장식했다. 미국 관리들은 블랙 힐스의 땅을 강제로 사려고 나섰다. 인디언은 저항했다.
‘사람은 땅의 일부다.’
자연 친화 사상을 가진 인디언으로서는 그 성지를 버릴수 없었다. 그 저항의 한복판에 수우족의 전사이며 추장인 크레이지 호스가 있다. 저항의 삶은 1876년 리틀 빅혼(Little Big Horn) 전투에서 절정에 이른다. 전투의 상대자는 남북전쟁 때 불패의 신화를 갖고 있던 북군의 젊은 영웅 커스터 중령이었다. 커스터와 그의 제7기병대는 이 전투에서 전멸했다.
호젓한 6차선의 16번 지방도로에 크레이지 호스 기념관 안내판이 나왔다. 기념관 입구부터 러시모어와 다른 분위기다. 얼굴만 완공한 상태다. 아직도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다이너마이트 터지는 연기가 보였다. 구내버스를 타고 얼굴상 200m 아래 작업도로까지 갔다.
웅장했다. 9층 높이(27m)의 얼굴, 광대뼈가 있는 몽골리안의 얼굴이다. 이글거리는 눈동자, 꽉 다문 입술…. 흑인 저항 운동가 말콤 X처럼 분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결의가 넘친다. 거대한 형상 앞에 서 있을 때의 중압감이 외경(畏敬)의 느낌으로 바뀌고 있었다.
기념관에는 수우족 후손인 피터 무어가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관광객들에게 크레이지 호스에 대해 간략히 늘어놓았다. 마음을 파고드는 대목이 있었다.
“크레이지 호스는 한 조각가에 의해 부활했다. 조각가의 영혼 속에 인디언의 역사가 재생됐다. 크레이지 호스를 만나려면 먼저 조각가에게 다가가라.”
조각가 코자크 지올코브스키(Korczak Ziolkowski·1908∼82)는 폴란드계로, 보스턴에서 태어났다. 일찍 고아가 된 그는 혼자 조각을 공부했지만 재능을 보였다. 그의 작품은 뉴욕에서 열린 세계조각전시회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그는 러시모어에서 보글럼의 조수로 잠시 일했다.
인디언의 명예와 자부심에 충실했던 삶을 형상화
1939년 그는 수우족의 추장 헨리 스탠딩 베어(standing bear, 서 있는 곰)에게 편지를 받는다.
“우리 추장들은 백인에 대한 소망이 있다. 우리 홍인(紅人, red man)도 백인처럼 위대한 영웅을 갖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았으면 한다.”
위대한 영웅은 크레이지 호스다. 추장은 코자크의 경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생일과 크레이지 호스의 죽은 날짜가 같은 것을 계시와 같은 인연으로 여겼다.
2차대전이 시작할 무렵이었다. 코자크는 답변을 미뤘다. 지원병으로 참전했다. 제대 후 그는 크레이지 호스의 삶을 연구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크레이지 호스의 서사시 같은 삶을 재현하는 데 남은 인생을 걸기로 했다. 편지를 받은 지 8년 만이었다.
1947년 5월 그는 블랙 힐스에 왔다. 그의 조각 구상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러시모어 바위얼굴의 차원을 뛰어넘었다. 꼭대기 암벽에서 아래까지 산 전체를 깨고 깎는 것이었다. 높이 169m, 길이 201m 규모다. 그러나 가진 돈은 고작 174달러였다. 첫번째 부인은 그에게서 떠났다.
34분의 1 크기의 석고 모델이 기념관내 인디언 박물관에 있었다. 새의 깃털을 꽂은 뒷머리, 다부진 상체, 백마를 타고 달리면서 왼팔을 쭉 뻗은 모습이다.
크레이지 호스에 관한 전설의 한 부분을 형상화했다. 리틀 빅혼 승리 직후 그의 부족은 미군의 집요한 추적과 복수를 당했다. 백인이 그에게 비아냥 섞어 물었다.
“네가 살 땅이 어디에 있을까.”
그는 왼팔을 뻗어 지평선을 가리키면서 대답했다.
“나의 땅은 내가 죽어 묻힌 곳이다.”(My lands are where my dead lie buried) 굴종적 타협을 거부하고 인디언의 명예와 자부심에 충실했던 삶을 개념으로 삼았다.
1948년 6월3일 첫번째 발파를 했다. 리틀 빅혼에 참전했던 노령의 수우족 전사 5명도 축하객으로 참석했다. 작업 초기 그 곳에는 전기·물·도로도 없었다. 무모한 도전처럼 여겨졌다. 그는 휴대용 착암기로 혼자 작업했다. 산 꼭대기까지 741개의 통나무 계단을 만들었다. 하루에 9번 이상 계단을 오르내린 적도 있었다. 그가 등에 메고 옮긴 재목만 29t에 이른다.
1949년 산의 채굴권을 얻었다. 자원봉사자였던 루스 로스(Ruth Ross)가 그를 도왔다. 코자크는 그보다 18세 어린 루스와 다음해 결혼했다.
얼굴 윤곽을 만드는 데만 5년이 걸렸다. 여러 차례 부상도 당했다. 그는 74세에 죽기(1982년10월)까지 35년간 740만t의 돌을 깼다. 돈이 모자랐지만 그는 연방정부 차원의 재정적 지원을 거절했다. 그는 서민의 입장료 지원으로 작업해 나갔다.
인종적 편견은 그를 더욱 괴롭혔다. 인디언의 신화에 빠져든 백인에 대한 멸시였다. 그럴 때 그는 이렇게 다짐했다.
‘모든 사람은 그들만의 산이 있다. 나는 내 산을 조각하고 있다.’
그가 죽은 뒤 부인과 10명의 자녀들이 작업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16년 뒤인 1998년 6월 얼굴상이 완공됐다. 50년 만이었다. 감동적인 제막식이었다. 그때 부인 루스는 “오랜 세월이었다. ‘서서히 하라. 그러나 끊임없이 하라’는 신념으로 이뤄냈다”고 회고했다. 소박한 소회는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지금은 크레이지 호스의 왼팔과 타고 있는 말의 머리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주변에 대학·병원·박물관을 만들 청사진을 갖고 있다. 언제 완성될 것인가. “누구도 모른다. 아마 100년 이상 걸릴 것”이라는 것이 기념관 안내원들의 공통된 답변이다.
머릿속에 중국의 고사 ‘우공이산’(愚公移山)이 떠올랐다. 그 고사의 축소판이 이곳에서 실현됐다. 우공이라는 노인이 집 앞의 높은 산을 깎아 없애려고 했다. 흙을 파 먼 바다에 갖다 버렸다. 주변에서는 노인의 꿈을 비웃었다. 그러자 노인은 “내가 죽으면 아들·손자가 하고, 후손들이 하면 언젠가는 산이 평평해질 것”이라고 했다. 집념과 노력을 통해 불가능한 일을 이룰 수 있다는 교훈적 비유다. 러시모어 대통령 바위얼굴는 보글럼이 죽은 뒤 아들이 완성했다. 크레이지 호스는 부인과 자녀, 지금은 손자들이 코자크의 거대한 꿈을 계승하고 있다.
얼굴상 제막으로 이 곳은 관광 명소가 됐다. 아메리카 원주민(인디언)에 대한 시각도 바뀌고 있다. 1996년 6월 당시 클린턴 대통령이 찾아와 코자크의 비전과 열정을 회고했다. 피터 무어는 “과거 백인들에게 비친 인디언은 기괴한 소리를 내면서 기병대를 향해 돌진하는 야만의 모습이었다. 백인은 정의의 사도였다. 크레이지 호스 인물상 제막은 그런 편견을 덜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인디언을 따뜻하게 묘사했던 영화 ‘늑대와 춤을’도 코자크의 삶에 영향받았다”고 말했다.
기념관 안에는 크레이지 호스의 나무 흉상이 있다. 그는 사진을 찍지 않았다고 한다. 사진기를 백인의 주술로 의심했다. “나의 그림자를 감옥에 넣어 두려고 하는가”며 거부했다. 코자크는 늙은 인디언들이 꺼낸 기억의 편린에 맞춰 스케치했다.
크레이지 호스는 1842년 블랙 힐스에서 60km 떨어진 래피드 강에서 태어났다. 그는 라코타 수우족으로, 그 일파인 테톤 오글라라(Oglala)족을 이끌었다. 그리고 1877년 숨졌다. 그가 전사로 활약하던시절 미국과 인디언의 전쟁은 더욱 험악했다. 미국 당국은 인디언과 경계 조약을 계속 맺었지만 제대로 지킨 것은 거의 없었다. 필요한 땅이 생기면 회유와 협박으로 그 땅을 점유했다. 인디언들은 보호지역으로 몰렸지만 그 곳은 살기에 너무 열악했다. 허약한 단결력은 인디언의 약점이었다.
“인디언의 비참한 역사, 미국의 영광 속에 숨어 있어”
백인들의 마구잡이 버팔로(들소) 사냥은 인디언의 생활 기반을 무너뜨렸다. 버팔로는 인디언들의 경제적 토대였다. 그 가죽으로 옷·담요·티피(tepee)텐트를 만들었고 고기는 음식이었다. 인디언은 대항했다. 백인들의 보복이 이어졌다.
크레이지 호스는 전사치고는 크지 않았다. 군살 없는 매끈한 몸매였다. 인디언 전사는 절제와 금욕으로 신체를 단련한다. 공포와 절망을 뚫는 용기와 침묵을 키운다. 그는 인디언의 기준에 맞는 추장이 되었다. 총·대포 등 화력에서 엄청난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유인술도 구사했다.
블랙 힐스에서의 금광 발견으로 미국 정부는 개발 정책을 강화한다. 라코타 인디언의 요구는 “우리 땅에서 우리끼리 살아가게 놔 두라”는 것이었지만 수용될 수 없었다. 미 육군은 크레이지 호스를 적대적 인디언으로 규정하고 공격 명령을 내린다. 공격의 기수는 커스터 중령. 웨스트포인트 재학 시절 그의 성적은 꼴찌였지만 전쟁터에서는 탁월했다. 그 공로로 25세에 임시 장군으로 진급했다. 전쟁 후 그는 정상 계급인 대위로 돌아갔지만 평생 ‘커스터 장군’으로 불렸다.
남북전쟁으로 군인은 달라졌다. 남북전쟁의 전사자는 모두 62만명이었다. 1, 2차대전, 한국전, 월남전에서의 미군 전사자를 합한 숫자보다 많다. 명예롭게 죽겠다는 문명의 대의(大義)는 허망했다. 한나절 전투에서 수천 명씩 죽은 전투가 10여 차례였다. 군대는 그런 살상의 모습에 단련되어 있었다. 인디언과의 전쟁이 더욱 거칠 것임을 예고했다.
몬태나 주의 리틀 빅혼. 래피드 시티에서 90번 고속도로를 타고 와이오밍 주를 거쳐 9시간 정도 달리면 나온다. 인디언전쟁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현장이다. 수우족은 이 곳에 집결해 훈련하고 있었다. 커스터의 제7기병대는 강행군했다. 불패의 신화로 자신만만했다. 1876년 6월25일 커스터는 리틀 빅혼 계곡에 도착했다. 샤이엔(Cheyenne)족과 수우족의 연합부대 3,000여 명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신적 지도자는 대추장 시팅 불(Sitting Bull, 앉은 황소)이었고 크레이지 호스는 현장의 지휘자였다.
커스터는 자신의 연대(600명) 병력을 3개로 나눠 공격했다. 그러나 2개의 부대가 후퇴한 사이 커스터의 본대가 포위됐다. 10분의 1의 열세였다. 그와 그의 부대원 264명은 전멸했다. 다음달 사령부 본대가 이 곳에 도착했을 때는 보기 흉한 시체들이 널려 있었다. 커스터의 죽음은 백인들에게는 장렬한 최후로 묘사되어 왔다. 이제까지 40여 편의 영화, TV드라마가 제작되었다. 크레이지 호스 기념관 아래 마을 이름이 커스터다.
승리했지만 환희의 시간은 짧았다. 미군의 끈질긴 추적으로 인디언은 흩어졌다. 1877년 5월 크레이지 호스는 배고픔에 허덕이는 1,000명의 부족을 이끌고 인디언 거주지역으로 들어간다. 그는 네브래스카 주의 로빈슨 요새에 수용됐다. 그리고 9월 배신한 인디언 전사가 그를 붙잡은 사이 미군 병사가 찌른 총검에 숨졌다. 35년의 치열한 삶이 끝났다. 그의 부모는 그를 사우스 다코타의 운디드니(Wounded Knee, 상처난 무릎)쪽에 묻었다.
운디드니는 참혹한 비극이 있었던 곳이다. 크레이지 호스 기념관에서 남동쪽으로 1시간 30분 거리다. 파인 리지 인디언 보호구역 안에 있다.
인디언은 절망 상태에 빠졌다. 지도자는 없어지고 버팔로는 사라졌다. 워보카(Wovoka)라는 예언자가 나타났다. 그는 백인들이 인디언 땅에서 물러나고 버팔로 떼가 되살아온다고 말했다.
유령의 춤이라는 종교의식은 예언의 신비감을 더했다. 수우족은 예언 아래 모였다. 백인들은 유령의 춤을 적대적 행동으로 판단하고 추방하려고 했다.
1890년 12월. 수우족 일족 400여 고명은 운디드니로 향했다. 그들은 커스터의 옛부대인 제7기병대에 의해 마을 근처에 수용되었다. 다음날인 28일 아침 인디언의 무장해제 과정에서 총기 사고가 있었다. 그것이 빌미가 되어 기병대의 호치키스 자동화기가 불을 뿜었다. 군인들은 “리틀 빅혼을 기억하자”고 소리쳤다. 추운 겨울 속에 야만의 복수극이었다. 인디언 350명 중 300명이 숨졌다. 광기의 대학살이었다. 그 중에는 200여 명의 여자와 어린이도 포함돼 있었다. 미군은 25명이 죽었다.
운디드니 공동묘지는 참극의 현장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있다. 입구 양쪽에 3.5m 높이의 시멘트 벽돌 기둥만 있고 문은 없었다. 기둥 사이의 위쪽을 철골 아치로 장식했다. 초라했다. 비석들이 황량한 언덕 위에 볼품 없이 널려져 있었다. 3m 높이의 오벨리스크 양식 비석에 숨진 인디언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파인 리지에서 인디언 추장의 간판을 단 가게로 들어갔다. 벽 위에 걸린 조그만 액자가 눈에 들어온다. 인디언의 구전 기도문 중 두 대목이 적혀 있었다.
‘바람 속에 위대한 당신의 목소리가 들리고 당신의 숨결은 온 세상 만물에 생명을 줍니다/ 나는 작고 힘이 없습니다/ 내게 당신의 힘과 지혜를 주소서/ 나로 하여금 아름다움 안에서 걷게 하시고/ 나의 눈이 영원히 붉은 노을을 바라볼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이 만든 물건들을 내 손이 존중토록 하시고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내 귀를 예민하게 하소서….’
(O‘ Great Spirit Whose voice I hear in the winds, And Whose breath gives life to all the world, hear me, I am small and weak, I need your strength and wisdom./ Let me walk in beauty, and make my eyes ever behold the red purple sunset. Make my hands respect the things you have made and my ears sharp to hear your voice….)
가슴이 저려온다. 그들의 겸허한 마음씨, 자연에 대한 외경, 그런 마음을 가진 종족의 절망….
다음날 아침 러시모어 마운틴과 크레이지 호스를 다시 찾아갔다. 양쪽의 조각상에 담긴 사연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그런데 어떻게 비슷한 장소에 공존할 수 있는가. 영광과 비극의 역사가 어떻게 얼굴을 맞댈 수 있나?
크레이지 호스 기념관 회원인 조지프 커리는 이렇게 말했다. “인디언의 비참한 역사는 미국의 영광 속에 숨어 있었다. 서부 개척 시대의 정의에는 위선의 그림자가 넘실댔다. 코자크는 그런 뒤틀린 이면사를 크레이지 호스를 통해 미국인 전체에게 고발한 것이다. 그리고 왜곡된 역사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숙제를 던졌다.”
코자크의 발언록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인디언 후원자가 아니다. 단지 진실을 전하는 돌 속의 이야기꾼일 뿐이다. 미래를 위해 오늘을 살려면 과거의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20여 명의 관광객을 이끌고 러시모어에 온 크리스 보쉬(53). 콜로라도 주에서 발행하는 지방 학술 잡지(프론티어 히스토리)의 정기 기고자다. 그의 시각은 이랬다.
“러시모어의 영웅과 크레이지 호스의 영웅은 극단적으로 다르다. 이질적이다. 그러나 공존한다. 이 곳의 1년 관광객은 300만명 이상이다. 관광객들은 양쪽 모두를 다녀온다. 대부분 크레이지 호스 인물상의 가치를 인정한다. 미국인들의 역사에 대한 시각은 이미 성숙했다. 러시모어에서 자유와 애국의 열정을 키우고, 크레이지 호스에서 역사의 오만과 치부를 정화한다. 미국 민주주의 다양성과 포용성이 여기에 있다.”
박보균 중앙일보 논설위원·미국 조지타운대 객원교수 (bgpark@joongang.co.krr) . 내용출처 : http://news.joins.com/et/200312/13/200312131804130702a000a010a011.html |
첫댓글 우리와 동족인 크레이지 호스가 저항한 미제국주의와 쌍벽을 이룰 대조각상이 완성된다 하니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늑대와 춤을 등의 배경이 된 곳이며, 버팔로를 생업의 기반으로 하였던 미대륙의 몽골리안들이 의미하는 우리 민족..들의 전세계에 뻗친 강력한 에너지를 생생히 느낄 수 있는 아주 조은 글이라 펌해 두었습니다. 끝까지 읽어볼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