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10월 5일 오전에 어머니의 몸과 탯줄을 연결하고 큰 소리를 내면서 이 세상의 빛을 보면서 태어난 곳이 나의 영원한 안식처인 일정리 모가리꼴의 한 초가집이었습니다.
4남 1녀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는데 그 동네가 일정리라는 동네인줄도 모르고 태어났는데 탯줄도 여기에 뭍혀 있습니다. 지금 50여년을 지내면서 보니 역시 내가 태어난 곳은 동네가 크고 마을 인심이 좋은 곳에서 태어났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1975년 중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내가 제일 사랑하는 어머님(1974년 12월 25일(음) 돌아가심)의 손을 놓고 서울로 모든 운명을 짊어 지고 떠나왔습니다. 수많은 직장생활을 하다가 숙자 조카덕에 인쇄소를 취직하여 한자(한자 2급)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인쇄소를 다니면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하기위해 검정고시학원도 다녔으나 직장생활을 하면서 독학을 한다는게 여간 힘이 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서울고등학교부설방송통신고등학교를 입학하여 3년개근을 하면서 졸업(1980년)을 하고, 인천대학교 법학과를 1년을 다녔는데 돈이 없어서 자퇴를 하여 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로 2년 편입을 하여 8년만에 법학사로 졸업을 하였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금영문화사라는 인쇄소에서 노조위원장을 지냈으며, 신학대학과 신학연구원을 졸업할려고 할때에 신학석사 논문을 쓸 때는 이게 공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후 한국세무협회(세경사)라는 출판사에서 법전을 5년간 편집을 하였고, 저의 나이 30세에 조은기획이라는 회사를 차렸고 그 이후에 도서출판 조은을 설립하여 40여종의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최고로 힘이 든 사업이 인쇄사업인데 그런대로 유지해왔으며, 현재 여직원 3명과 일을 하고 있으며 또한 필리핀 한의사가 되기 위하여 침공부를 하게 될 때는 더욱 신기함을 보았습니다. 필리핀 한의사가 되고 보니 더욱 욕심이 생겨 지금 세계사이버대학교에서 복지사 자격을 받기 위하여 올해 1학년으로 공부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정식 신학석사가 되기위하여 석사공부를 하고 있으며, 목회공부와 문학공부를 눈만 뜨면 책과 같이 삽니다.
1998년 10월에 한국청년회의소 서울수색청년회의소(JC) 회장에 당선(금산에서 처음)되었고, 1999년 2월에는 목사 안수식을 하여 현재 행정목사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우리 교단(예장총회)의 총무와 사단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연합회(130여 총회) 사무차장을 맡고 있습니다.
저에게 처음으로 박사의 칭호를 주는 2006년 9월 9일에 세계시인대회(WAAC)를 몽고의 수도 울란바트라에서 개최하였는데 한국 사람으로써 제가 명예문학박사를 받았습니다. 올해는 10월에 인도에서 개최됩니다.
제가 저의 이력서를 알리려고 하는데 목적이 있는게 아니라 제가 많은 활동을 하고 있으며서 우리 동네 총무를 맡으면서 느끼고 있는 것을 쓰고 싶어서 입니다. 조금이라도 오해가 있다면 양해를 바랍니다.
(이 앞전에 이런 글을 올렸다고 흉을 보는 분이 있어서 모든 글을 내린 적이 있거든요)
10여년전 재경 금산중학교 총동문회 임원(홍보부장)으로 활동을 하다가 재경고흥군 청년회 회원으로 봉사를 4년을 하였고 만 40이 되어 전역을 하고 금산면 임원으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금산면 향우회에서 여러 임원을 지냈으며 현재(2007년) 감사직을 맡고 있고, 재경금산중학교 총동문회 사무국장을 4년을 지내고 역시 감사로 있으며, 다음 차기에는 부회장으로 내정(비밀)된 상태입니다.
금산면향우회 임원으로 있으면서 우리 동네 향우회가 침체되어 있는 것을 보고 항상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고 있는데 그때 당시 회장을 맡고 있는 서종순(2반) 형이 5년간 회장을 맡고 있었으나 유명무실 할 정도 였었는데, 그때당시 제가 새벽에 중국어를 배우러 종로2가 중국어 학원을 다니는데 종순형이 아침 일찍(6시경) 전화가 왔었습니다. 동생 한번 만나세...... 그래서 만나 공엽섭(3반)형이 3대 회장을 맡게 된 것입니다.
그 당시 제가 총무를 맡았서 일을 할 수가 없는 사항은 선후님들이 더욱 잘 알고 있는 사항이었습니다. 그때 재경금산중학교총동문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사항이고 일정리 총무를 맡는게 어려운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삼춘조카 사이인 공주열(3반) 후배를 내정하였는데 침체는 계속되었고 향우회가 바로 활설화 되기란 어려운 사항이었습니다.
5년 전의 일이었는데 안양 어느 예식장에서 동춘의(김미자) 조카님의 딸 결혼식이 있어서 사촌 조카의 딸 결혼이라 참석하게 되었고, 사촌누님들과 작별인사를 하느라 30여분 정도 남보다 늦게 예식장을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을 선배 30여분이 길가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게 아닙니까 그래서 모두 다른 꽃게집 식당으로 가서 일정리 향우회를 위하여 대책회의를 하게되었고, 제가 회의를 진행하였고 2시간여의 긴 회의를 한 후에 회장은 공연섭 형이 그대로 하고 모든 임원을 새로 선임하고 총무를 제가 수락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재경금산중학교 총동문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었고, 여러 모임에 사무국장 역(사무국장, 사무총장, 총무, 사무차장 등등)을 13개(세계기네스북 감)나 맡고 있었으며, 현재도 9개(중구의정회 사무국장, 중앙대JAMP 4기 사무총장, 필콜의과대학 총동문회 사무총장, 한국요가협회 사무총장, 세계평화아카데미 사무총장,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총무, 사단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연합회 사무차장, 한국가곡작사가협회 사무국장, 일정리향우회 총무) 정도 맡고 있습니다.
제가 총무를 맡고 그해 5월에 향우회 체육대회를 오랜만에 양화대교밑 고수부지에서 체육대회를 하였는데 KBS 생로병사 팀이 우리 향우회를 취재하여 우리 향우님의 운동하는 장면이 TV에 나오기도 했으며, 그때 일정리에서 3분이 올라 왔으며 향우회에서 김경보(5반) 이장님에게 사물놀이 용품(100만원 상당)을 기증하였습니다.
그 날 4대 회장으로 서광식(2반) 형이 맡게되어 1년간 회장직을 하였고, 다음 5대 회장으로 현 김기수(5반) 선배가 회장을 맡게 되어 현재까지 진행되어 온 것입니다.
매년 봄에는 체육대회 가을에는 실내행사를 개최하여왔는데 작년(2006년)에는 이번 마을위한 잔치를 위하여 행사를 취소하였습니다. 다음 5월말이나 6월초에 제6대 회장을 선출하는 정기총회를 갖게됩니다.
그 전에도 계속 거론되어 온사항이었는데 이번 김기수 5대회장님이 취임하면서 이제는 우리 향우회도 일정리 동네 어르신을 모시고 경로위안잔치를 한번 추진해 보는게 어떻게느냐 하는 모든 향우님들의 숙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일을 추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처음에는 행사가 진행될까 걱정을 많이 하였는데 향우님과 고향에 게시는 모든 분들의 호응도가 이렇게 높을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두 번의 임원회의를 하였는데 선후배가 똘똘 뭉쳐서 우리 멋지게 행사를 해 보자는게 모든 임원의 뜻이었고 서로서로 앞다투어 돈을 내겠다는데 향우님들이 여기저기에서 전화들이 오고 격려의 전화빗발칩니다. 향우회 총무를 맡으면서 이렇게 신이 나니 너무 좋고 행사를 잘 치루겠습니다.
5년여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향우회 총무를 맡고 있는게 여간 힘이 들었습니다. 체육대회를 할 때마다 비가와서 여간고생을 많이 하였는데 이번같이 선후배님들이 뚤뚤 뭉쳐서 도와주니 내가 태어난 일정리 동네가 너무 좋습니다. 저는 글을 쓰는 사람(시인)으로써 우리 동네를 위하여 많은 글을 쓸 것이고 이번 행사를 위하여 많은 기도(목사)를 하겠습니다. 우리 일정리에서 태어난 모든 분 너무 감사하고 오늘 저녁에 버스 2대가 만원이 되겠끔 마지막 힘을 실어 주시고, 내가 태어나 놀던 고향을 방문한다는게 얼마나 좋은지 춤을 추고 싶은 심정입니다.
오늘 밤 11시에 사당동 1번 출구에서 버스 2대로 출발하여 내일 아침 녹동에서 목욕을 하고 배로 건너가서 아침식사는 우리 동네 부녀회에서 준비한 아침밥을 먹게 되는데 오늘 하루 굼고 내일 동네에서 만들어 준 꿀같은 아침을 3배나 먹어야지 하는 생각만 해도 너무 좋습니다.
어제 저녁에 인백(3반 김희연:김창선 동생)이 친구가 전화가 왔는데 어머니가 이번 행사에 꼭 참석하고 싶어서 같이 가기로 하였다고 하면서 50만원을 보낸다고 합니다. 역시 나에게 천안에서도 좋은 친구가 함께하니 너무 좋습니다..
내고향 일정리가 있어서 좋을시구! 내고향 사람들이 있으니 좋을시구! 일정리가 너무너무 좋구나
(2007년 3월 16일 새벽에 일정리 총무 김화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