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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4월
1일
또 4월이다.
잔인하다는 것은 영국의 시인 엘리어트가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구절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자살률이 가장 높은 계절로 이어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나도 바로 생각나는 것이 6년 전 4월에 생을 마감한 큰형이고 현재는 사랑하는 어머니와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 시간이다. 7시30분 식사를 마치고 상심에 잠겨 있는 중에 학교에 가는 아들과 영어를 배우러 동사무소에 오르는 아내가 동시에 나간다. 현재의 내 심정을 하소연 할 길이 없고 또한 혼자라는 생각을 떨치기 위해 체육관으로 달려 나갔다.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점심을 한 후에는 요양원에 가서 어머니와 노래를 부르며 시간을 보냈다. 아직은 나를 알아보시어 서로 간 행복의 시간으로 이어갔지만 이별의 시간이 오고 있음은 분명해 보였다. 저녁에 학원에서 수업을 하고 10시에 평소처럼 들어온 무난한 4월의 첫 날이었지만 내일도 긍정의 마음으로 새로운 아침을 맞이할 것이다.
2일 지난달에는 목요일만 되면 비가 오더니 오늘은 화창한 날씨다. 아침식사를 하고 엊그제 사 온 고슴도치의 꿈이란 책을 읽었더니 사선을 넘나드는 엄청난 절망과 고통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는 주인공의 삶이 감동적이었다. 보통의 삶보다는 고통에 맞서서 좌절하지 않고 이겨내는 과정에서 누구나 인생의 깊이와 의미를 더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0시경 광화문 한글회관에 아내를 내려주고 체육관으로 이동하여 운동을 마친 후에 다시 광화문에서 수업 마친 아내와 대우회관에서 삼선자장과 잡채밥을 사 먹었다. 논술 수업이 오후 늦게 있다기에 아내를 태우고 함께 요양원에 도착하여 어머니 모시고 1시간을 보낸 후에 내부순환도로를 거쳐 집에 돌아왔다. 집에 차를 두고 등산화와 등산복을 사려고 지하철로 오랜만에 종로 5가에 갔더니 그 동안 물가가 많이 올라 등산품의 가격이 만만치가 않았다. 찬바람만 매섭게 부는 등산점 골목을 뒤로 하고 신설동에 가서 따뜻한 칼국수를 먹고 집에 오니 아침 한글회관 수업부터 저녁 논술강의까지 피곤한 모습으로 아내가 앉아 있고 12시에 학원에서 아들이 돌아왔다.
3일 아침 7시30분까지 깊은 잠을 자고 일어났다. 어제 저녁에 풀이 죽은 아내를 생각하니 수업도 그렇지만 평소에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나 때문에 그런가 싶어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아침식사를 하고 11시가 되어 아내와 안산에 올랐더니 구청에서 새로운 생태공원을 중턱에 만들어 놓았다. 정상으로 가는 길에는 개나리가 활짝 피었고 매화와 진달래 산수유와 백목련까지 작은 무릉도원이 만들어져 있다. 가까이서 본 매화는 그 색깔이 아름답고 향기 또한 근심을 잊기에 충분하여 사군자의 필두로 꼽히는 이유를 알만도 했다. 정상을 거쳐 내려오면서 점심을 사 먹었는데 값싼 보리 원가에 비하여 양푼보리밥은 기본 2인분 1만2천원으로 비싼 가격이다. 오늘 은행에서 대출금 3천만 원이 입금되어 형에게 투자금 전체를 미리 송금하고 오후에는 세일기간이라서 신세계 백화점으로 카메라도 고치고 등산화도 사러 아내와 나갔다가 결국 아무 것도 못하고 아들과 딸에게 줄 빵만 사 가지고 돌아온 저녁이다.
4일 토요일이기는 하지만 아들은 학교에 가고 딸은 친구들 하고 잠실 롯데월드에 간다고 준비를 한다. 딸이 벌써 자라서 지하철로 외출을 하다니 물가에 내 놓는 심정이었지만 조심히 다니고 집에 일찍 들어오라고 일렀다. 오전에 아내와 안산을 올랐다가 2시간 후에 내려와 점심을 하고 특례입학 수업을 정리하다 보니 까다로운 문제가 나왔고 더구나 해답지도 없어 시간을 많이 소비했다. 오후에 차를 몰고 어머니한테 갔더니 오늘도 장루의 캡이 빠져 간병인들이 고생을 하고 있고 아들인 나는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저녁식사 드시는 것을 보고 수업을 하러 이동하면서 근처에 있는 sLs학원에서 손원장을 만났더니 중등부 수강생이 약 30여명 되는데 2천만 원에 매입하라는 의견을 제시한다. 양심껏 이야기를 하여 고마웠지만 금전적인 부분도 어렵고 어머니의 상태까지 현재가 불안정하여 다음으로 미루었다. 친구 동선이 전화가 와서 생태탕에 저녁을 먹었고 이른 나이에 퇴직을 하여 걱정을 많이 하는 터라서 힘을 내라고 위로를 했다. 부산에서 사업을 하는 영식이한테 배 사업은 잘 되어 간다는 전화가 왔고 친구와는 광화문에서 헤어져 집으로 들어왔다
5일 일요일 아침 봄의 기운이 거실과 안방에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눈을 떠 창문을 열고 안산을 바라보니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개나리와 그 사이로 우뚝 솟은 큰 나뭇가지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일요일이라 여행 겸 산에 가려고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섰더니 차가운 공기에 비해서는 햇살이 따뜻하다. 영식이는 도봉산에 간다고 하고 나는 회기역에서 중앙선을 타고 가까운 팔당역에 내려 680미터 예봉산에 올랐다. 높이가 북한산 대남문 정도 되지만 처음부터 경사가 심하여 힘들었고 90분 이상을 걸어서 정상에는 12시 30분에 도착했다. 발 아래로 팔당댐과 한강 상류가 손에 잡힐 듯한 거리에 있어도 물안개가 자욱하여 물줄기가 흐리게 보일 뿐이었다. 태극기가 있는 정상은 사람들이 많아 발 디딜 틈이 없고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여 율리봉에서 컵라면과 누룽지탕으로 점심을 먹었다. 율리봉 아래는 다른 산에서는 볼 수 없는 친근한 경관이 많아 언제라도 다시 와 보리라 생각하며 팔당역 근처로 하산을 했다. 지하철을 버리고 167번 시내버스에 올라 청량리까지 이동했지만 시간이 늦어 요양원은 못 가고 핸드폰 A/S만 받고 집에 돌아왔다. 아내는 오후 1시부터 밤 9시까지 긴 시간 수업을 한다기에 나는 저녁식사로 꽁치찌개를 성의껏 준비하였다.
6일 숨가쁘게 초순을 지나는 월요일, 밤새 잠이 오지 않아서 새벽에 TV만 보다가 아침을 맞이했다. 마음을 잡고 4월을 살어름 건너 듯 살아가야 할텐데 불안하고 막막한 기분이 날마다 밀려온다.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 앉아 있으니 밥도 먹지 않은 아들이 오늘도 인사는 고사하고 고개도 돌리지 않고 학교에 간다. 어느 순간 아들에게 불편하고 원망의 대상이 되어버린 나는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는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정이었다. 이발을 하러 밖으로 나왔더니 기온이 15도를 넘어 봄 날씨로 변해 있고 아파트 화단에 화사하게 핀 하얀 목련이 소외된 나를 편안한 마음으로 만들어 놓았다. 머리 손질을 하고 체육관으로 가서 어제 산행을 한 이유로 오늘은 기구운동만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영어를 배우는 동료들과 안산에서 내려온 아내는 약속이 있다고 외출을 하여 혼자 라면으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 요양원에 갔더니 어머니의 장루가 자주 빠져 간병인들이 어제 밤에도 3번씩 케이스를 바꾸었다며 오늘도 고충을 토로한다.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대처할 어떤 방법도 없어 미안함으로 쩔쩔매다가 6시에 요양원을 나와 학원에 가서 수업을 하고 저녁에는 멸치젓갈을 반찬으로 식사를 했다.
7일 어제 저녁에 식사를 잘 했는데 새벽에 두 번씩이나 화장실에 갔다. 곰삭은 젓갈이 소화를 잘 시킨 것인지 아니면 식중독성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토막잠을 자고 일어나 아침을 맞으니 당연 정신이 멍하고 식사를 하는 중에는 어제와 다르지 않게 아들이 학교에 등교한다. 아침마다 반목과 분노가 심하니 이제는 내가 이 집에 없는 편이 아들을 위해서도 좋고 나를 위해서도 차라리 좋을 것 같았다. 아내는 오늘 동료들과 북한산에 간다고 나가고 나는 수업을 준비하여 오전에 논술교실에 올라가 특례학생 1시까지 수업을 하고 내려왔다. 경기학원에 함께 다녔던 영어선생이 내일까지만 강의를 한다기에 일품향 중국집에 가서 점심을 함께 먹었는데 친하게 지낸 사이라 아쉬움도 있지만 요즘 학원의 분위기가 좋지 않아 뭐라고 말할 수도 없다. 3시가 되어 북한산 사모바위까지 다녀왔다는 아내가 와서 기분이 좋은지 횡설수설하여 나는 반대로 조용하게 안산을 올랐다. 봄기운을 맞으며 산을 돌고 영식이와 약속으로 5시에 내려와 남영동에 나가서 살아있는 쭈꾸미와 술을 마시며 배 사업을 이야기 했고 2차로 미성회관 2층으로 가서 팔보채 중국음식도 먹었다.
8일 술을 많이 마셔 아침에 일어나기도 힘들다. 어제 음식을 늦게까지 많이 먹었는데도 습관이 되어 그런지 아침에 배가 고프고 콩나물국을 끓인 아내는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온 나를 바라만 보아 미안함이 많았다. 나도 더 잘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데 까칠한 내가 언제나 정신이 돌아올지 많은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식사 후에 아내는 동사무소 영어교육으로 나가고 나는 습관처럼 안산에 11시에 올라갔더니 하루가 다르게 꽃이 만발하여 어제보다 더 아름답고 장관이다. 술이 깨지 않아 걷기도 힘든 나는 오늘의 자연과 확연히 구별되는 때가 찌든 속세인이다. 1시경 집에 들어오니 학교에 간 딸이 철쭉이 꽃인지 나무인지 전화를 하여 묻기에 꽃이라고 알려 주었다. 점심을 먹고 논술교실에 올라가 집에 두고 간 핸드폰을 아내에게 전달하고 요양원으로 가는 중에 중랑교 코너에서 안전띠 미착용으로 과태료 용지를 받았다. 숨어서 불시에 단속하여 꼼짝없이 걸려들었는데 어제 술값에 이어 오늘 과태료 3만원까지 기분도 좋지 않지만 지출도 많다. 요양원에 도착하니 벚꽃이 하늘을 가릴 만큼 피었고 젊은 간호사는 휠체어에 어머니를 모시고 밖으로 나왔다. 아름다운 꽃구경을 시킨다는데 고마웠지만 어쩌면 이승에서 마지막 어머니의 외출이 될 것 같아서 나와 함께 여러 장면의 사진을 찍어 두었다. 휠체어에 앉아 30여분을 계시는데 몸을 가누지 못해 시종일관 목을 받치며 이동을 하였고 빨리 들어가 눕고만 싶다는 어머니를 가까스로 병실에 모셔드리고 학원에 가서 수업을 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 들어왔다.
9일 잠을 잘 못 잤는지 목이 뻐근하다. 오늘은 낮 기온이 서울 23도까지 오른다니 4월 초순으로는 고온현상이고 바로 여름이 오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침에 식사도 거르고 빤히 쳐다만 보면서 학교에 가는 아들과 그런 아들에 대응도 못하는 못난 부모, 이 가족은 분명히 미래가 없는 불투명한 사람들이다. 식사 후에 아내를 한글회관에 내려주고 체육관에 왔다가 운동을 마치고 다시 나가서 홍제동 백가네 식당으로 태우고 돌아와 갈비탕과 냉면을 사 먹었다. 땀까지 흘리며 점심을 맛있게 먹고 스위스 그랜드호텔 입구에서 열리는 땡처리 세일시장에 들어가 나의 양복 등산복 등산화 그리고 아내의 등산복과 바지 등을 구입했다. 50만원 정도의 비용을 카드로 지불하니 모자와 장갑을 덤으로 주었고 아내는 흡족한지 싱글벙글 좋아한다. 오늘은 외식도 하고 옷도 사며 동행을 했는데 이렇게 긴 시간 함께 걸어다니며 시간을 보낸 것이 살면서 흔하지는 않았다. 옷 수선을 맡기고 세피아 브레이크를 교환하고 나왔는데 어머니의 체온이 38도를 넘었다고 다급하게 여동생 전화가 와서 초조하게 기다리며 저녁을 보냈다.
10일 어제 어머니 체온이 높아 긴장하고 낮에 많이 걸어다녀서 피곤했는지 초저녁에 잠이 들었다가 12시가 지나 아들이 안방 화장실을 이용하는 바람에 잠을 깼다. 새벽에 목이 따가워 다시 눈을 떴고 소금물로 목을 행구고 아침을 기다리니 이미 감기가 접근하여 몸이 무거운 상태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수업이 늦게 있다는 아내를 태우고 요양원에 갔더니 앙상하게 뼈만 남은 어머니의 모습으로 처참함이 말할 수 없었다. 휠체어에 모시고 복도를 다니면서 이야기를 하고 노래도 불러 드렸는데 이제는 아무런 반응이 없으시다. 아내의 수업으로 집으로 왔다가 곧장 체육관으로 가서 운동을 하고 오후에 학원으로 나가 장원장과 미팅을 하며 고등부 수강료에 대하여 언급을 했더니 다음 주로 미룬다기에 교무실 선생들한테 미안함이 생겼다. 학원의 현실을 모르는 선생들은 자신의 입장만 생각하다 보니 당연 불만이 있을 수 있는 것이고 앞으로는 개별적으로 장원장과 만나서 각자의 강사료를 지급받기로 했다. 밤 10시에 나이가 많은 수학과 최선생이 나에게 칵테일을 사 주어 고맙게 잘 마시고 돌아왔다.
11일 맑은 날씨의 주말 아들과 따ᅟᅥᆯ이 늦게까지 잠을 자고 있다. 딸은 감기에 걸려 밤새 기침을 하고 나 역시 좋지 않은 컨디션이다. 아들은 도서관에 간다고 일찍 나가는 데 아내는 집에 잇으나 도서관에 가나 마찬가지라고 말하는데 공부를 안 한다는 것인지 있으나마나한 존재라는 것인지 의미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중3 정도면 집에서 관리나 규제가 더 필요한 시간으로 나도 중3 때 도서관을 다녔지만 관리 감독이 없어 공부한 것보다 허비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선생님이나 부모의 면전에서도 공부하는 것을 꺼리는데 혼자 둔다고 자율적으로 스스로를 통제하면서 공부한다는 것은 중학생으로서는 아직은 힘든 일이다. 오늘 친구 동선이와 관악산에서 보기로 하여 출발했는데 관악산은 처음으로 가 보는 곳이다. 인터넷을 검색하여 사당역으로 방향을 잡아 지하철로 이동하니 날이 좋아서 산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친구가 안양에 살기에 정상에서 만나기로 하고 산을 오르는데 40분을 가니 땀이 흐른다. 얼마 후 삼막사 근처 국기봉에서 보자는 친구의 문자가 왔는데 정상을 지나 4시간을 걸어야 한다는 것으로 오후 2시에나 도착할 것같다. 너무 힘들어 친구를 포기하고 12시30분 정상 연주대에 올라 가져간 점심을 먹었다. 연주대는 명칭그대로 주군을 그리워하는 고려 충신의 설화가 남아 있다. 오후 4시에 다시 사당역으로 내려 왔는데 힘들고 지루한 시간이었다. 지하철로 경기학원에 갔다가 어제 두고 간 차를 몰고 요양원에 가서 어머니 뵙고 집에 돌아오니 몸이 뻐근하다.
12일 어제 관악산 등반을 무리하게 했더니 팔과 다리가 모두 아파 오늘은 하루 종일 집에서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고 오후에 안산이나 산책하듯이 다녀왔으면 좋겠다. 하지만 김선생과 선약을 하여 오늘도 등산복을 입고 9시30분에 집을 나서는데 몸이 무겁고 눈꺼풀이 내려 앉는다. 회기역에 10시에 도착하여 중앙선을 타고 팔당역에서 내렸다. 지난주에 예봉산에 왔었는데 너무 가팔라 이번에는 반대쪽 예빈산에 올랐는데 여기도 경사가 급해 능선을 몇 번 넘어야 하는 산이다. 11시경 입구에서 출발해ㅛ는데 12시30분이 되어 정상 아래에 도착햇고 집터같은 네모난 공터에 앉아 점심을 먹었다. 예빈산은 귀빈을 예우한다는 뜻인데 진달래가 활짝 피어 있고 머리 위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한 폭의 그림 같다. 고개를 들어 멀리 필당댐 근처를 바라보니 한강 상류의 물줄기가 에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예봉산 방향 율리고개 쪽으로 내려와 팔당역 근처에 으르니 5시가 되었다. 이 곳 팔당역은 예전에 강의를 하면서 여러 번 온 곳인데 지금은 고가도로가 생겨 번화했던 음식거리가 먼지만 가득하여 명성을 잃었다. 시내버스를 타고 제기동까지 왔다가 집에 바로 들어왔고 수업을 마친 아내는 10시가 지나서 왔는데 나만 돌아다녀서 미안한 마음도 생겼다.
13일 월요일 아침 남쪽에는 비가 온다는데 여기 서울은 우중충한 날씨다. 어제부터 어머니께서는 식사를 안 하시고 장루로 나와야 할 대변이 다시 항문 쪽으로 나온다니 덜컥 걱정이다. 봄꼿이 만발한 아름다운 봄 경치와는 대조적으로 하루가 긴장 속으로 가고 있고 어제와 그제 연 이틀 산에 다녔더니 몸에 감각이 없을 정도로 힘들다 아침 식사를 하는 중에 아들이 설악산 2박3일 수학여행을 간다고 학교 가는 것처럼 인사도 없이 그냥 나간다.
기대가 사라지니 관심에서 멀어지고 그러다 보니 희망이 없는 날이 되어 살아가는 의미도 없고 기쁨도 없어 답답한 일상으로 전락된 내 인생이다. 식사 후 안방으로 들어가 1시간 더 자고 서류 정리하다가 11시에 체육관으로 가서 운동을 열심히 했다. 건강하고 편안 사람보다 불편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운동을 더 열심히 하는 것은 현제의 어려운 현재를 탈피하기 위한 몸부림일 것이다. 형수한테서 연락이 와서 오늘 어머니 삼육의료원 외과과장 미팅이 내이로 연기 되었다기에 일단 집으로 와서 아들이 아침에 가져가고 남은 김밥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오후 3시에 요양원에 갔더니 젊은 여자 간병인이 임종 준비가 필요하다고 하여 마음이 철렁했다. 휠체어에 어머니를 모시다가 아침과 점심을 거르셨다기에 토마토 주스와 요구트트를 드리니 모두 잡수신다. 열은 없는데 목소리는 엊그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힘이 떨어져 있다. 학원에 6시에 도착하여 수업을 하고 집에 오는 길에 영식이 전화가 와서 무교동에서 해장국으로 식사를 하고 돌아왔다.
14일 새벽 1시에 자고 3시경 눈을 떴는데 도무지 잠이 오질 않는다. 어제 늦게 먹은 청진옥 해장국이 먹을 때부터 꺼림직 하더니 문제가 있었는지 속이 좋지가 않다. 아침 식사 조금 하고 안방에서 누워 있는데 아내는 민정이 엄마를 만나 불광동에서 영화보고 쇼핑한다고 스카프를 하며 나름대로 멋을 부린다. 나는 나대로 혼자 궁싯거리다가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하고 특례학생 수업으로 서두르는데 오늘은 개인일정으로 참석이 어렵다는 학생의 전화를 받았다. 여유 있게 집으로 와서 점심을 먹고 오늘도 어머니가 계시는 요양원에 가기 위해 지하철 회기역에서 내려 걸어서 들어갔다. 오늘 아침과 점심은 그런대로 잘 드셨다고 하여 위생병원 장루 검사 하러 휠체어에 모시고 유자원을 나서는 중에 형수님이 오셨고 함께 병원 외과에 가서 과장을 만났다. 나중에 여동생도 긴장의 표정으로 합류하여 결과를 들었고 특별한 문제가 없다고 하여 안도를 했는데 그것이 오히려 이해가 안 된다. 거동도 못하고 임종을 준비하라고 하는 간호사와 아무 문제가 없다는 외과 과장 도대체 무엇이 진실인지 알 길이 없다. 4시에 유자원으로 돌아와 5시 저녁식사 시간에 운전을 하는 형과 조카 현주도 들어왔다. 어머니께서 식사를 하시는 동안 자리에 있는 가족들은 곁에서 기도하듯 서 있고 어머니께서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이나 하셨을까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뜨려 우리는 어쩔 줄을 몰랐다. 집으로 와서도 어머니에 대한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맥주 1병을 혼자 마셨다
15일 수요일 아침 비가 내린다. 모처럼 내리는 비일지라도 머릿 속은 복잡하고 우울하기만 하다. 6년 전 4월 15일 갑자기 아들과 딸을 잘 부탁한다는 큰형의 당부가 있어 놀라서 도곡동 사무실로 달려 간 일이 있다. 사업이 어려워 금전적인 도움을 이야기 한 줄 알았는데 형은 세상을 떠났고 결국 유언으로 남아 있다. 오전에 주변인들과 전화를 했는데 이래저래 스트레스만 쌓여 체육관에 가려고 나서니 영어를 배우고 산으로 간 아내는 비가 거세기 전에 다행히 산에서 내려왔다. 운동을 하는 중에도 식사를 못 하시는 어머니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고 내일이라도 돌아가실 것 같은 마음에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운동을 하고 집에 돌아오니 딸이 학교에서 왔고 설악산에 간 아들은 아직 소식이 없다. 요양원에 4시에 도착하니 아침은 잘 했고 점심도 조금 했다고 간병인이 말을 하는데 믿기지 않았고 역시 저녁에 미음만 4~5 숟가락 드시는 정도다. 그것도 억지로 입에 넣어 드렸는데 삼킬 힘이 없어 힘겨운 순간이었다. 당황스런 마음으로 학원까지 이동했고 수업을 10시에 마치고 집에 들어오니 미국 시카코에 산다는 중학교 친구 영복이가 전화가 와서 10년 전에 한국을 떠나 현재는 선교사가 되어 만족하고 살고 있다는 내 삶과 반대되는 이야기를 한다.
16일 새벽 4시에 깨어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아 아침까지 그대로 시간을 이었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조만간 생길지 모르는 어머니의 운명, 생생하게 기억되는 떠나간 형과의 약속 등으로 머리가 무거웠고 아침식사 시간에도 김치조차 맛이 없어 고역스러운 하루의 시작이다. 방으로 들어가 잠깐 잠이 든 사이에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어머님이 여동생과 우리 집에 오시어 고통을 하소연 하신다. 어쩔 줄 모르다가 꿈을 깼는데 불길함을 메울 수가 없다. 그저께 연기한 개인 수업을 논술교실에 올라가 오늘 하고 12시 30분에 내려오니 컴퓨터를 하던 아들은 어쩔 줄을 모르다가 테이블 밑으로 들어가 청소하는 시늉을 한다. 라면으로 점심을 먹고 체육관에 가려다가 시간이 어중간하여 아파트 옆에 위치한 연세의원에 들어가 혈액 검사를 했다. 평소에 병원 가기를 두려워한 나인데 이제 나이도 50대이고 2년 넘게 꾸준하게 산을 다니고 운동을 하여 자신감이 생겨 심장박동까지 체크했다. 결과는 내일 나온다데 은근히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학원에 가서 수업을 하고 여동생이 어머니에게 전화를 전달하여 간신히 통화를 했는데 희미한 목소리로 대답만 할 뿐이다. 학원을 나서 노량진 한샘학원 문준 부원장 부친상이라 흑석동 중앙대 병원에 가서 조문하고 용산으로 나와 영식이와 속초회집에서 술을 마셨다.
17일 어제 밤에 12시 지나서 들어와 거실에 있는 컴퓨터를 옮겼더니 아침에 보니 그 자리가 엉망이다. 날마다 컴퓨터에 매달려 있는 아들에 대한 미움 때문인데 오늘은 아침식사도 안하고 방에만 누워 있었다. 아내는 산에 간다고 나가는데 나와 아들로 인하여 요즘은 사는 것 같지도 않을 것이다. 10시경 방에서 나와 식사를 혼자 하고 11시에 체육관으로 가서 운동을 하고 집에 오니 산에서 내려온 아내는 벌써 외출하고 없다. 집안도 내마음도 어수선하여 라면으로 점심을 대충 먹고 오후에 어제 피 검사 결과를 보러 병원으로 갔다. 운동을 꾸준히 하기는 해도 술을 자주 마셔 걱정이 되었는데 검사 결과는 모두 정상이라고 나왔다. 간 심장 전립선도 문제 없고 호트몬이나 콜레스트롤 함유량도 정상이라고 한다. 생각보다 좋아서 오히려 믿기지 않을 정도였고 아무튼 나와 동갑인 의사가 반가워 보인 것은 사실이다. 걸어서 체육관에 갔다가 홍제역에서 지하철로 어머니를 뵈러 가니 오후 4시가 되었다. 가까이서 본 어머님 생과 사의 갈림길에 온 듯하고 아마 4월을 넘기기는 힘들 것 같았다. 3월부터 고향에서는 초등학교 동창들이 20여명 모임을 하자고 전화가 와서 어머니 때문에 어렵다며 완곡하게 거절을 했는데 연락이 여러 사람으로부터 다시 와서 결장을 한 터이다. 내일은 갔다가 모레 돌아오는 일정이라 오늘 요양원을 나가면 3일 후에나 어머니를 뵙게 된다. 청량리 백화점에 티셔츠를 구입하러 갔다가 그냥 나와서 학원에 들어가 강의를 마쳤다.
18일 오늘은 초등학교 동창 모임이다. 37년 만에 만나는 친구들이라 기대감과 설렘이 있긴 하지만 한편 어머니 때문에 걱정도 없지가 않다. 꼭 오늘이나 내일 운명하실 것 같은데 친구들과 선약을 해 두어 일단 요양원에 가서 뵙고 내려 가는 것으로 결정을 하였다. 아침 식사 후에 체육관으로 나가 운동을 하고 12시에 어머니를 뵈었더니 역시 식사는 전혀 못 하시고 의식도 없는 상태로 주무시듯 계신다. 마침 들어온 형한테 고향에 갔다가 내일 오겠으니 더 위독하시면 바로 올라올테니 연락하라고 여러 번 당부를 하고 직접 운전하여 안양으로 가서 영복이와 동선이 태우고 서해안 고속도로를 달려 부안 격포 모임 장소에 들어섰다. 얼굴이 가물가물 하고 서울에서 온 나를 맨발로 달려 나와 반기는 친구들 20명이 기다리고 있고 고향 집에서 김치와 쌀 여러 부식을 가지고 와서 진수성찬 음식을 준비해 두었다. 마치 가족들이 모이는 기분이었고 다른 점은 이름을 잊어 개별 이름표를 달아 구별을 하였다. 간장게장과 갑오징어 복분자 술과 잡곡밥 모두 고향에서 직접 농사 지고 만든 것이라 맛있게 먹었다. 저녁에는 노래도 부르고 영수의 준비가 감사했는데 석기는 술이 취해 목소리를 높여 좋은 분위기가 엉망이 되어 버렸다. 늦게까지 시간을 보내고 자리에 누웠는데 격포항의 파도소리는 어제부터 오늘까지 그치지 않고 나는 끝내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19일 뜬 채로 날을 새고 새벽에 바닷가로 나와 걷다가 날이 밝아와 다시 들어가니 일정이 바쁜 친구들 4명은 먼저 가고 남은 친구들끼리 아침 식사를 마쳤다. 오전에 모두 바닷가로 나왔는데 동창모임이 나를 시인으로 만들기에 충분한 분위기였다. 오전 11시 부안을 떠나오면서 읍내 가까운 곳에서 바지락칼국수로 점심을 먹고 친구들과 헤어졋다. 차를 몰고 동선이 영복이와 함께 고향 근처로 왔다가 산소에 들렀는데 아마 일주일 안으로 이제는 어머니의 관을 들고 다시 와야 할 곳이 아닌가 생각이 되었다. 제월리 집에 들어가니 쓸쓸하고 휑하여 마음 둘 곳이 없어 대문 앞을 나서니 이웃집 용완이 형이 나와서 모든 것이 순리라며 힘을 내라고 위로하고 어깨를 두드려 준다. 서울로 오는 길에 청주에 들어가 장인어른과 장모님 뵙고 중부고속도로에 들어서니 오늘이 일요일인지라 차량 정체가 극심하다. 이천을 지날쯤 어머니 위독이라는 형의 전화가 왔는데 움직이지 않는 차 속에서 속만 태우고 보냈다. 저녁 7시가 되어 요양원에 도착하여 어머니에게 달려 들어가니 그대로 숨만 쉬고 계시고 체온과 맥박은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20일 어제 덥더니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고향 친구들을 만나러 전라도 부안 격포까지 먼 여행을 했지만 촌각을 다투는 어머니 때문에 잠을 못 자고 오히려 몸과 마음만 지쳐 있다. 어머니의 생명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행여나 오늘이 장례일이 되는 것은 아닌가 심난한 마음으로 오전에 아내와 요양원에 도착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식사는 물론 물도 못 드시고 의식이 없이 누워 계시어 보는 것조차 처량하기만 했다. 얼굴을 맞대고 어머니를 여러 번 불렀더니 고개를 끄덕이고 '종곤이'라고 불러 이것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목소리인가 싶었다. 음료수 한 스푼을 간신히 입에 넣어 드렸더니 그대로 밖으로 흘려 보내 아들의 마음을 비통하게 만들었다. 여동생은 영양제나 수액을 놓아 기력 회복을 돕자고 이야기 하지만 잠시 연명에 불과한 미봉책에 불과할 것으로 아무튼 오후에 가족이 모여 결정하기로 하고 집에 돌아오니 12시가 되었다. 점심을 조금 먹고 체력과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하여 체육관으로 가서 운동을 하고 마지막일지 모른다며 할머니 보겠다고 학교에서 조퇴까지 하고 온 딸을 태우고 다시 요양원으로 향했다. 2시30분에 가족이 합의하여 수액과 영양제를 사다가 요양원 간호팀장의 도움으로 처방을 하는데 초반에 혈관을 찾지 못해 어려움이 많았고 여기저기 주사바늘 자국으로 어머니는 마지막까지 고통스러워 하신다. 5시에 그나마 영양제라고 하니 어머니께서 오늘은 편안하게 주무실 것 같아 마음을 놓고 요양원을 나왔다. 안국역에 딸을 내려주고 학원으로 돌아가 강의를 마친 늦은 밤에 밖에 나오니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다. 혼란한 상태로 집에 도착하니 같은 아파트에 사는 예고 1학년 학생의 시험대비 정리를 아내가 부탁하여 새벽 1시까지 수업을 하였다.
21일 불안감으로 요양원에 아내를 일찍 보내고 방에 누워서 시간을 보내다가 거실에 나와 창문을 열어보니 안산의 꽃들이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허망했다. 동창모임 그리고 어머니의 위중함으로 며칠을 정신없이 보냈더니 그 사이에 화려함이 사라져 버린 우리의 인생사와 다르지 않은 자연의 이치이다.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하고 점심을 먹은 후에 논술교실에 올라가 과외수업을 하고 서둘러 요양원에 갔더니 아내와 여동생 그리고 형수까지 마지막 인사라도 드리는 양 어머니 주변에 모여 있다. 앙상한 모습으로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5일째 식음을 전폐한 어머님과 거의 마지막으로 가는 수액과 영양제를 보고 있노라니 슬픔이 체념으로 변하여 간다. 10여분이 지나자 반포에 사는 조카 윤희가 불쑥 요양원에 들어와 반가움이 많았지만 임종을 앞두고 의식도 없는 할머니를 뵈러 6년 만에 올 수 밖에 없었는지 원망이 교차되기도 했다. 조카의 손을 잡고 할머니의 상태를 설명하고 잘 지내서 고맙다는 이야기와 다른 가족의 안부를 물었다. 지난 날 큰형이 세상을 떠나면서 신내동과 반포의 금전적인 감정으로 옆에 있던 형수는 윤희를 외면하고 밖으로 나갔지만 양쪽을 바라보는 나의 괴로움과 당혹감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돌아가시기 직전의 어머니 그리고 계속되는 가족 간의 갈등 이러한 현실을 꿈에도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앞으로 어찌해야 좋을지 막막하기만 하다. 조카와 함께 나와서 할머니 돌아가시면 연락하겠다는 이야기를 하고 지하철 동대문 근처에 내려주었다. 집에 돌아와 여동생한테 전화를 하여 신내동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고 가족의 우애와 화합을 위해 현명하게 중재해 달라고 부탁했다.
22일“ 이제 떠나시는 어머님 앞에 저의 심정은 비통함으로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임종 그 시간까지 최선을 다하여 모실 것이고 살아가는 내내 어머니의 모습과 사랑을 간직하겠습니다“
어제 조카 윤희가 병실에 들어서는 순간 마치 먼저 떠난 큰형이 마지막 어머니 가시는 길을 인도하러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신내동 형은 과거의 감정으로 윤희를 외면했는데 어른의 감정을 조카에게까지 전가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또한 운명하시는 어머니 앞에서까지 반목의 행동을 보인 것은 불행한 가족의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과거에 큰 형의 죽음으로 회사에서 나온 위로금 2억 원을 두고 남편의 죽음으로 자신의 몫이라는 반포 형수의 입장과 일부는 유족인 어머니 몫이라는 신내동 형과의 대립이 있었다. 당시에 어린 조카 4명을 두고 남편을 잃은 형수를 먼저 생각하자는 나의 강력한 주장으로 결국 전액이 반포 형수한테로 가게 되었다. 이 일로 혈육을 나눈 형과의 사이가 소원해졌지만 어느 판단이 현명했는지는 세월이 흐르면 주변인 누구나 알아 갈 수 있을 것이다. 엊그제 20도에 비하면 10도까지 오른다는 오늘은 차가운 날씨지만 어머니의 생명을 가름할 4월이 나에게 또 잔인한 달이 될 것인가 형이 떠난 4월 28일을 목전에 두고 운명은 겹쳐서 오는 것인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아침이다. 안산을 바라보니 진록색의 푸름이 평소와 다르게 걱정스럽고 을씨년스럽게 다가오는 것은 위축되는 현재의 내 심정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까. 할머니 때문에 엊그제부터 참가 여부를 고심했던 딸이 오늘 경주로 수련회를 떠난다고 일찍 일어나 부지런히 움직인다. 이틀 전에는 딸의 생일이었지만 그것도 모르고 선물은커녕 어머니 병환으로 축하 노래도 부르지 못하였다. 학교에 가는 아들에게 수련회 가는 딸이 3일간 자신을 볼 수 없을 거라고 애교 있는 엄포를 놓자 동생의 머리를 어루만지고 학교에 간다. 조용한 시간이 흐르고 수련회 떠나는 딸을 엘리베이터 앞에서 배웅했더니 할머니한테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하라고 당부를 하며 내려갔다. 오전에 영식이가 요양원에 온다기에 아내와 함께 도착을 하니 먼저 와 있고 의식이 없는 어머니에게 마지막으로 인사하는 친구, 2007년 9월 입원할 때부터 매월 거르지 않고 왔던 사람이다. 의식이 없는 어머니의 손을 만지며 안타까움을 표시하더니 새벽에 일어나 여러 생각을 했다면서 어머니 작고 후 준비상황을 자신의 일처럼 설명을 한다. 2시간이나 이야기를 하고 나니 그나마 마음이 진정되었고 아내의 수업으로 집에 태우고 왔다가 점심을 하고 오후에 다시 어머니한테 갔더니 이제는 의식도 완전히 없는 상태가 되었다. 바쁘게 오가는 간병인들의 정성에 고맙다는 인사를 여러 번 했지만 이제 길지 않을 어머니에 대한 우리의 사랑도 그들은 기억할 것이다. 꺼져가는 어머니를 붙들고 나와 여동생은 필사적으로 입에 물을 적시지만 돌아오는 소리는 더 이상 없고 재채기나 기침소리만도 반가울 따름이었다. 오후 4시에 작은 형수가 와서 변함없이 어머니에게 헌신을 하여 감사함이 많았지만 가족을 향한 양보와 배려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윤희를 외면한 어제의 아쉬움이 남았다. 6시경 학원으로 들어가 현재 어머니의 상황을 교무실에서 이야기를 하니 모두가 걱정을 하고 장원장은 엉뚱하게 세금을 미납하여 세무서에서 통장을 압류했다고 허탈하게 서 있다. 9시에 학원을 나서 집에 10시에 들어와 식사를 했고 경주에 간 딸이 염려되어 연락을 하니 늦은 시간인가 통화가 되지 않았다.
23일 새벽에 눈을 떠 전화를 보니 어제 늦은 시간에 걱정이 되었던지 영식이 전화가 와 있고 아침에 식사를 하면서는 집도 그렇고 마음도 그렇고 모든 것이 휑하다. 오늘이나 내일이 어머니에게 고비가 될 것 같은데 오전에 집에 있어도 마음이 편하지 않아 요양원에 아내를 일찍 보내고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하고 컴퓨터를 수리하여 집으로 왔다. 점심을 먹고 아내에게 전화를 하니 어머님께서 일반병실에서 임종실로 내려오셨다고 하여 마음이 무너졌고 장례식을 준비한다고 운동화 추리링 속옷 등을 배낭에 준비하면서는 더 잘하지 못한 죄송함으로 눈물이 앞을 가렸다. 요양원에 가면서 점심도 먹지 못한 아내를 주려고 우유와 영양갱을 사 가지고 임종실에 들어서니 어머니 옆에서 아내는 성경찬송가를 들고 있다. 오후 4시가 되어 당황하고 놀란 표정으로 들어온 여동생도 황망하게 어머니만 바라보더니 말라가는 입술을 축이며 마지막 이별을 준비한다. 오늘 밤을 어머니와 지내려고 6시경 병원 앞에서 저녁을 먹고 들어가니 엊그제 윤희에 이어 큰 조카 효정이가 와 있다. 그 동안 무관심했던 작은 아버지로서 미안함이 많아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형은 오늘도 말 한마디 없이 밖으로 나가 버렸다. 울고 있는 효정이를 달래어 할머니를 잊지 말고 오래 기억하라 당부하며 보냈고 밤 10시에는 마지막으로 매제가 와서 인생의 인연을 마무리하고 떠났다. 텅빈 그리고 적막한 임종실, 초등학교 1학년 나를 업고 학교에 가시던 기억과 도시 중학교로 보내며 코스모스와 함께 눈물을 흘리시던 모습까지 지난 날을 그리다 보니 시간은 0시를 지난다.
24일-26일 어머니 별세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30분마다 혈압과 맥박 체온을 체크해 보니 혈압 50/40 맥박70 그리고 체온은 36.5도 정상이다. 입에 물을 적시기를 반복하며 새벽이 올 때까지 보냈고 어머니께서는 하루 일을 마치고 고단한 상태로 깊은 잠을 주무시는 모습이다. 수십 명의 요양원 환자들이 잠자는 유자원 벽시계의 초침소리가 정적을 가르는 사이로 밤새 야간운전을 마친 형이 맥빠진 유령처럼 들어선다. 과거에 어머니와 농사를 지으며 동고동락을 많이 한 형이기에 특별히 슬픔과 회한이 많을 것인데 소파에 누워서 어머니를 바라보는 형의 시선이 애처롭다. 어제부터 새벽까지 어머니의 숨소리에 변화가 없고 형이 옆에 있어 출근시간 전에 빨리 집에 다녀올 생각으로 임종실을 나섰다. 나오면서 뒤를 돌아 잠깐 다녀오겠으니 더 주무시고 계시라고 마음으로 인사를 올리고 차를 몰아 집에 도착했고 서둘러 아내를 먼저 병원으로 보냈다. 혼자 남아 장례준비를 점검하고 식사를 하는데 새벽에 도착했다는 여동생한테 어머니 상태가 이상해졌다고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한다. 평소 겁이 많은 동생이고 밤을 새우며 1시간 전까지 나와 함께 계셨는데 설마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을까 가볍게 무시하고 식탁을 일어서려는데 임종실에 도착했다는 아내가 어머니의 운명 소식을 알린다. 냉정하신 어머니께서 마지막에도 이렇게 자식인 나를 버리나 싶어서 서운함과 아쉬움이 있었지만 담담하게 마음을 잡았다. 금요일 아침 내부순환도로를 질주하듯 달렸고 이 잔인한 4월을 나는 기어이 벗어나지 못함을 탄식하며 위생병원 정문을 통과했는데 만면에 웃음을 띠고 인사하는 정문의 직원이 오히려 상식이 없는 사람으로 보였다. 차를 팽개치듯 버리고 달려간 정적이 감도는 임종실 앞에는 영안실로 모셔갈 병원 구급차가 서 있고 문을 열고 들어서니 새벽에 본 그대로 눈을 반쯤 뜨고 나를 기다리고 계신다. 어머니를 부르고 눈을 감겨 드리며 얼굴을 쓰다듬었더니 아직도 새벽의 체온이 그대로 전해왔다. 77년 인생의 종착점, 일본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시절 해방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와 6.25참전 용사 아버지를 만나 3남 1녀를 두셨다. 보잘 것 없는 농사일에 온갖 고생을 하셨고 마흔 두 살 젊은 시절에 남편을 여의고 우리를 위하여 꼿꼿한 자세로 삶을 사셨다. 35년 전 12월 마지막 날 어머니와 따사한 겨울 햇볕을 쬐며 마루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중 마을 이장의 방송으로 황급히 읍네 병원으로 나가셨다. 놀라서 떨며 서 있는 나를 별일 아닐 것이라고 안심을 시켰던 어머니께서 초저녁이 되어 아버지의 시신과 함께 집에 와서 중학생 나를 붙들고 통곡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30여 년이 흘러 아무런 걱정이 없다시던 인생의 후반에 어머니의 장남(큰형)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가슴을 자르는 아픔과 고통은 어머니의 삶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쳤고 극명하게 수명을 단축시켜 오늘의 이별을 만들어 놓았다. 흰 천에 쌓인 어머니를 근처에 있는 삼육의료원 응급실로 이동하여 최종사망을 확인받고 장례식장 추모관에 안치를 하였다. 살아가면서 아버지, 할머니, 큰형과 어머니까지 가족과의 이별로 눈물을 많이 흘렸는데 오늘도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눈물처럼 내린다. 미리 준비한 지인들에게 문자로 부고를 알리자 가까이 사는 형의 주변 사람들이 먼저 조문을 왔고 오후에 대일원우회 고목회 경자회 등 나의 친구들과 여동생과 매제의 주변인들도 많이 왔다. 특히 어머니 입원부터 매달 빼놓지 않고 병문안을 왔던 영식이는 밤늦게까지 손님 접대와 영안실 분위기에 내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25일 장례식장 이틀 째, 9시에 아침식사를 하고 10시에 입관식을 했다. 어머니 얼굴을 감싸기 전 창 너머로 바라보는 우리에게 생전 마지막 모습이라며 모두 들어와 인사를 하라고 관계자가 유리문을 열어준다. 어제와는 다르게 마르고 굳어버린 어머니의 얼굴에 손을 얹으니 체온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싸늘하고 차가운 화석으로 변하여 있다. 50대 초반의 장례사는 땀을 흘리며 순서대로 염습의 의식을 진행하고 1시간이 지난 11시에 관을 닫는 입관식을 슬픔 속에 마쳤다. 어제에 이어 토요일 오늘도 하루 종일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점심 이후에 또다시 조문객들이 찾아왔는데 오후 3시에 초등학교 친구들과 어제 밤을 샌 영식이와 형준이가 다시 왔다. 살아계실 때 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 흥겨운 잔치를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반가운 사람들을 가장 슬픈 시간에 만나다 보니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늦은 밤까지 조문객은 이어졌고 여러 사람들이 날을 새며 어머니의 밤을 지켰는데 특히 매제의 지인들이 많아 아침까지 쓸쓸하지 않았다.
26일 고향의 산소까지 4시간은 가야 해서 새벽 5시30분 발인식을 거행하고 어머니의 관을 싣고 약 10개월 머물렀던 유자원과 추모관을 떠났다. 거의 날마다 찾아와 어머니를 뵈었고 어머니의 복막염 수술까지 희비가 엇갈린 이 곳을 나도 어머니도 이제는 다시 올 수가 없다. 친지들과 친구들 약 30여명을 태운 영구차는 의료원 정문을 빠져 나왔고 이틀이나 내린 봄비로 청명한 아침의 하늘이다. 영구차는 강변도로를 거쳐 경부고속도로에 빠르게 들어섰고 이 상황이 꿈인지 생시인지 몇 번을 확인하다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뜨니 차는 어느 새 천안 논산 구간을 지나 호남선 구간을 달리고 있고 멀리 눈이 시리게 푸르른 보리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서울에서부터 3시간을 넘게 달려 김제 톨게이트를 지났고 정든 고향 마을에는 10시에 도착하여 산으로 가기 전 마을 어귀에서 노제를 지낸다.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누구나 가는 길을 어머님이 가시는 것이라 나를 위로하며 끝없이 펼쳐진 들판으로 시선을 돌렸고 어머니와 직접 농사를 함께 했던 형은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눈물을 흘린다. 바쁜 와중에도 함께 살았던 주민들이 나왔고 어제 서울에 온 청주 큰 처남 내외도 멀리까지 발걸음을 했다. 선산에 10시30분 도착하니 일찍 나온 동네 주민 10여명은 하관 준비에 여념이 없고 고향에 올 때마다 어머니와 이 곳에 함께 왔었는데 오늘은 바로 당신께서 마지막으로 가신다. 11시 하관에 이어 헌토를 하고 나머지 복잡한 장례절차는 이웃에서 친하게 지낸 성무 아저씨가 간소하게 마친다. 깨끗한 수의와 석관으로 단장한 어머님은 이제 영면에 들어가셨고 고통이 없는 또 다른 안식처로 이동하여 계신다. 12시 지나 아버님 묘 옆에 또 하나의 봉분이 생겼는데 결국 이승과 저승은 어제와 오늘의 차이일 뿐이다. 12시30분 고향 집으로 돌아와 마당부터 안방까지 어머니의 발길과 숨결이 남아 있는 곳곳을 돌고 안방을 나올 때는 금방이라도 나를 부르실 것만 같았다. 어머니의 유품을 바라볼 때마다 지난날의 사랑에 목이 메어 왔고 고향에 왔다가 돌아갈 때 대문에 기대어 손을 흔들던 어머니의 모습도 지울 수가 없었다. 마을회관에서 주민들의 애도 속에 점심을 마치고 따뜻한 위로와 격려까지 받으며 영구차는 왔던 길 서울로 출발했다. 1시간30분을 달려 도달한 천안 휴게소에는 나들이객들로 붐비고 상주 완장을 두른 나에게 친구 정식이는 이제는 달아 볼 수 없는 완장과 리본이라며 위로를 한다. 서울에 접근하면서 차량 정체가 심하여 일부를 양재동 인터체인지에 내려주고 곧장 처음 출발한 삼육의료원에 도착했다. 효정이와 윤희를 먼저 보내고 가족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병원을 나와 신내동 아파트 근처 식당에서 서로를 위로하며 저녁을 먹었다. 형은 이제부터 마음을 비우고 동생들을 같은 동급으로 이해하고 살아가겠노라고 말하고 나 또한 모두 고생 많았고 우리 가족이 잘 살아 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진심을 전했다. 특별히 매제한테는 평소 인간관계가 대단하여 외롭고 초라하지 않은 장례식이었다고 거듭 고마움을 표했다.
27일 어머님이 세상에 안 계시는 허전한 아침을 맞이했다. 안산의 푸름이 진녹색으로 변하여 베란다 문을 열고 큰 심호흡을 했다. 오전에 부조금 정리도 할 겸 신내동 집에서 모인다고 여동생 전화가 와서 시간을 맞추어 갔더니 조의금 총액은 4,400만 원이고 그 중에서 매제의 몫은 2700만원 형과 나는 각각 850만 원 정도다. 약속대로 장례비용부터 내일 삼우제까지 전체비용 1500만원을 매제가 700만원 형과 내가 각 400만원씩 지출하여 무리 없이 마무리를 하였다. 장례 후에는 가족 간의 갈등이 자주 발생하는 법인데 우리는 일처리를 잘하여 모두에게 감사했고 이제 남은 가족들끼리 우애 있는 삶을 살아가는 일만 남아 있다. 금전 처리를 마무리 한 뒤에 형이 순대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여 마음도 슬프고 내일은 삼우제로 고향에도 가야 해서 고사했지만 거듭 되는 요청으로 동행을 하게 되었다. 식사 마지막 무렵 형이 말하기를 어머니께서 살아계실 때 공증한 고향 논 2400평(2필지)을 이미 팔았다고 하여 무슨 소리인지 내 귀를 의심했다. 어머니 돌아가시면 가져가는 것으로 공증을 해 준 것이니 살아계시는 동안은 모든 가족의 몫이고 만약 금전이 필요하여 매매를 하려 했다면 사전에 상의를 했어야 한다. 말 한마디 없이 의식도 없는 어머니의 도장을 이용하여 처리하고 장례식까지 마치고 통보를 하다니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과거에 금전적인 문제로 반포 큰형수와 갈등을 일으켜 가족이 분열되고 그로 인하여 나와 여동생은 고통 속에서 긴 시간을 보냈다. 또한 상가를 버리는 어려움 속에서도 형과의 약속을 지키며 금전적인 도움을 주었는데 결국 욕심으로 인하여 아름다운 마무리가 최악의 상황으로 바뀌어 버렸다. 집 근처로 와서 영식이를 만나 밤새 푸념을 하는 중에 형과 형수의 미안하다는 사과의 문자가 왔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내일 삼우제 가는 일정도 포기하였다.
28일 어머니 삼우제와 큰형의 6주기 기일이 겹쳐 있다. 6년 전에는 큰형으로 인하여 고통이었고 오늘은 작은 형으로 인하여 어려운 하루가 시작되는 날인데 아내도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방에만 누워 있다. 어린 시절에 한 이불을 덮고 가깝게 지내온 형제가 오늘은 각각 길을 가고 있으니 알 수 없는 인생이다. 현재 내 나이가 50살이니 오늘부터는 큰형이나 아버지께서도 가지 못한 인생을 내가 살아가게 된다. 지나고 보니 순간이고 살아있는 오늘이 행복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으니 시련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초연하게 살아갈 것이다.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하고 학원으로 이동하여 단골로 가는 해장국집에서 식사를 했다. 오늘부터는 당장 요양원에 갈 일이 없으니 가던 길을 멈춘 것처럼 허전하고 한가롭다. 신설동에 갔다가 종로를 거쳐 집으로 오는 중에는 엊그제 어머니 장례식에 참석한 친구가 부친상을 당했다고 문자가 와서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변하여 갔다.
29일 식사를 마치고 오전에 어머니 장례식에 온 고마운 사람들한테 감사하다는 문자를 보냈다. 어제 삼우제를 못 갔으니 어머니한테 다녀오려고 집을 나서 강남역 근처에서 점심을 산다는 영식이를 만나러 갔더니 우리나라 해산물이 온통 모여 있는 해물 뷔페집이다. 음식이 깨끗하고 다양하여 맛있게 먹고 용산역으로 이동하여 기차로 김제역까지 갔다가 택시를 타고 선산에 도착했더니 엊그제 유자원의 어머니께서 붉은 황토 아래로 장소를 옮기어 계신다. 어디선가 나를 부르는 것같아 어머니를 여러 번 불렀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고 사방을 둘러보면 텅 빈 하늘만 눈에 들어온다. 어머님은 이 자리에서 세월의 흐름과 함께 할 것인데 누구나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안색을 살피고 대화를 자주 하는 것이 효도의 시작일 수 있다. 인생의 허망함을 뒤로하고 산소를 나와 친구 상가에 들렀다가 늦은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집에는 새벽이 되어서 들어왔는데 슬픔 속에서 허우적댄 일주일의 시간 때문에 바로 정신을 잃고 잠이 들었다.
30일 아침에 일어나 식사하고 다시 12시까지 쉬면서 보내다가 체육관으로 가면서 백가냉면에 들어가 갈비탕을 먹었다. 운동을 하고 신설동에 가서 2층 세입자를 만났더니 장사도 못하는데 월세만 나간다고 억울해 하더니 계약기간을 오늘로 종료하고 대신에 세입자를 구하여 나보고 시설비든 권리금이든 받아서 가지라는 결정을 내린다. 오후에 나를 사랑한다며 힘내고 슬픔을 이기라는 매제의 격려의 전화가 왔고 형제는 손과 발이라며 형을 이해하고 가족이 긴장하고 힘들어하니 모두를 위해 용서하라는 영식이의 문자가 왔다. 그러면서 사람은 누구나 아집과 편견에 쌓여 있어 그 속에서 몸부림치고 괴로워하는 것이니 자기반성과 함께 어머님이 편하게 가실 수 있도록 집안의 어두음이 걷히길 기원한다는 내용까지다.
눈물을 많이 흘린 오늘 4월이 가고 붉은 장미가 자리를 차지하는 5월 내일은 나를 새로움으로 맞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