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복대>는 전형적인 억새밭 가을 산행 코스
만목대> 들머리 정령치는 기원 전 도성 유적지.
정령치는 마한의 효왕이 정(鄭)장군을 파견한 곳.
노고단 입구의 성삼재(姓三峙)
바래봉 남쪽의 팔랑재(八郞峙)
각각 3명 장군과 8명의 병사들
달궁을 지키는 성터였다고 전해온다.
달궁은 왕조가 뿌리 내리기 힘든 환경.
1600년 경 안동 권씨가 임진왜란 때해 달궁으로 피난.
1730년 영조 때 달궁에서 100m 떨어진 궁터에 10 여호.
영조 7년 1731년 신해년 대홍수 산사태로 마을이 매몰.
그당시 산사태에서 생존자는 단 한 명,
임금이 직접 쓴 제문으로 원혼을 달랬다.
1940년 115 세대 마을은 1951년 빨치산 토벌작전으로 폐쇄.
1954년 주민이 다시 입주하기 전까지 이 일대는 빨치산 무대.
1936년 마을 산림도로는, 빨치산 토벌 이후 1970년 군사도로.
1970년 군내 버스가 운행되기 이전까지는
주민들은 재넘어 구례 산동시장을 다녔다.
반야봉, 노고단, 만복대, 고리봉, 덕두봉에 싸인 달궁.
두 갈래 산 능선이 V 자로 벌어진 사이 깊숙한 은신처.
현재, 달궁은 잡초더미에 묻힌 돌더미와 주춧돌 잔해 뿐
'월궁(月宮) 지명도 잊혀져가듯 지금은.. 達宮.'
마한.
'마한 왕조는 어떻게 형성된 고대 국가일까?'
<마한 왕조>는 BC 1세기∼AD 3세기경 한강(漢江)유역으로부터
삼한시대에 충청 전라 지역을 다스린 여러 정치집단의 통칭이다.
변한은 가락국 김수로왕에게 합병되고 진한은 신라에게 점령당한다.
마한은 <삼국지><동이전>역사 기록에 의하면 55개 소국의 연합국이다.
큰 것은 1만여 가(家), 작은 것은 수천, 규모가 큰 곳의 지배자는 신지(臣智)
작은 곳은 읍차(邑借), 마한 왕조의 형성 시기는 알려진 역사적 기록이 없다.
마한지역에서 출토된 청동기유물은 경상도에 비해 풍부하다.
그 유물을 보면, 청동기시대부터 선진 문명 정치집단의 존재.
금강 유역 고고학적 자료를 보면, 대부분 마한지역 소국이다.
BC 3∼BC 2세기 세형 동검 문화를 토대로 발전한 정치집단.
마한왕조는 영토 전역을 다스린 국가 형태는 미치지 못한 듯.
다만, 충남 일정범위 내의 정치집단이 뭉쳐 마한 소국연맹체.
고양·용인·부여·영암에서 발굴된 청동기 거푸집은 마한의 유물.
마한의 존속시기는 기원 전 300년부터 기원 후 300년까지 약 600 년
기원 전부터 300년간 청동기문화, 기원 후 300년까지 철기문화 배경.
위만에 의해 망한 고조선 남하 세력과 기존의 토착세력이 결합한 집단
철기문화에 기반을 둔 새 정치세력을 형성하여 익산에 도읍을 정한다.
위씨조선 유민들의 한반도 한수 이남으로 남하
한군현(漢郡縣) 설치로 철기문화가 도입되면서
삼한시대 마한 중심의 문화 체제가 붕괴되었다.
그리고, 경상도 지역이 새로운 교역 중심이 되자
삼한의 주도국이었던 마한의 영향력이 위축되었고,
2 세기 이후 마한은 영역 다툼 끝에 백제에게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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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 잔여 세력은 어디로 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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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은 삼국사기 멸망기록과 달리, 한반도 주변에서 존속한 듯.
마한은 경기, 충청, 전라도에 걸쳐 五十國을 지배했던 연맹 국가.
마한의 장수 '주근'은 백제 온조왕(16년)에게 우곡성을 점령당한다.
'마한의 장수 '맹소는 신라 탈해왕(61년)에게 복암성에서 항복.'
마한의 일부 세력은 3세기 후반에 중국과 교류한 내용 등등(삼국사기)
마한의 일부세력이 4세기에 전라도 해안에 진출했다는 기록 ('일본서기')
역사학자 김경렬씨는 달궁(마한 동성)이 백제 정복과 무관한 것으로 본다.
마한 왕조는 달궁을 마지막으로 묻혀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반도 고대국가 중에서 중요한 획을 이루었던 마한 왕조의 역사.
이대로 그 역사가 묻혀지고 버려지기가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하여, 뿔뿔이 흩어진 마한 역사를 추적해보고 싶다.
지리산 인간 개산역사 속에 그 해답이 있을 듯 하다.
달궁 이외에 마한의 또 다른 별궁터 흔적을 찾아보자.
..................마한의 별궁터 흔적들...............................
마한은 달궁 말고도 여원치(해발450m) 계곡에 별궁이 있었다는 설.
그 별궁 터 계곡엔 마애여래불에 얽힌 여인의 정절에 대한 이야기
호국혼 전설을 간직한 99 구비 고개가 있는 정상의 주지봉 산신단.
그곳에서 소원을 빌면, 한가지는 꼭 이루어진다는.. 신단.
남원 8경 섬진강 상류의 여원치는 남원이 내려다보이는 곳.
서동의 출생에서 사랑을 그린 ‘서동열전’ 공연
‘사랑, 사랑, 내사랑아!’에서는 다양한 주인공들.
서동과 선화, 로미오와 줄리엣, 향단과 방자, 장녹수 등
사랑의 주인공들이 등장해 색다른 재미를 선사.
사랑 영화들이 ‘가을밤 러브시네마’를 통해 방영
체험마을에서 백제생활 체험, 태학사 체험, 서동요 체험
삼한시대.
변한은 B.C 194년 기자조선 유민이 경상도에 세운 나라.
정미 원년 번조선왕은 백성들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었다.
청동기 시대에는 진한과 변한 구분 요소가 보이지 않는다.
진한과 변한은 성장 과정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분리.
...................진한..........................
진한은 기원전부터 4세기까지 낙동강 동쪽
경상도지역 여러 정치집단을 통괄하는 명칭.
〈삼국지〉에서는 진한을 진국(辰國)의 후신이라고 기재
〈후한서〉에서는 진국이 삼한 전체의 전신이라고 기록
진국과 진한의 관계를 놓고 학계에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삼국지〉 진한조에 의하면 진한의 노인들이 말하기를
자신들은 진(秦)나라 고역을 피해 한(韓)으로 온 망명인
마한(馬韓)이 그들의 동쪽 땅을 진한에게 주었다고 한다.
대체로 마한에 비해 열세였던 것으로 보이며,
3세기 후반부터 4세기 중반에 사로국에 의해 통합
훗날 삼국의 하나인 신라로 발전했다고 전해온다.
진한은 철을 마한 낙랑군 대방군 동예 왜에 수출했다.
철광석을 철정 형태로 만들어 물자교역 수단으로 삼았다.
진한은 눈수, 송화강 유역 등 만주 중부에서
수렵과 농업에 종사하다가 이주한 민족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진한인(辰韓人)은 공격적이고,
전쟁할 때엔 먼 곳까지도 이동하는 기마전술이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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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한.............................
변한[弁韓]은 경상도 지역에 진한에 속하지 않은 세력들
변진으로도 표기되며, 이들 중 대부분은 가야연맹체를 구성
진한과의 구분 방법은 낙동강 동쪽과 서쪽이라는 지역적 차이
결국 진한과 변한은 같은 문화기반을 가진 정치집단들
중국 군현과의 교역과정에서 교역 루트의 차이로 구별
김해지방의 구야국(狗邪國), 함안지방의 안야국(安邪國),
고령의 미오야마국(彌烏邪馬國), 동래의 독로국(瀆盧國) 등
중국 군현과 왜에 철을 수출한 철산지로 유명하며,
왜와 인접한 일부 지역에서는 문신 풍습이 있었다
변한 민족은 만주 남부지방에서 농.어업에 종사
역사의 어느 한 시점에 한반도로 이주한 민족.
변한인(弁韓人)은 수군전술(水軍戰術) 또는
보병전술(步兵戰術)을 주로 사용했다고 한다,
전쟁할 때 공격적이라기보다는 방어적이었고,
육상운송보다는 해상운송을 주로 사용하였다.
변한인은 몸은 컸고, 의복은 청결하고,
장발이었으며 법풍속이 특히 엄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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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안야국(安邪國)...................
삼한시대에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에 있었던 소국.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변진 안야국(弁辰安邪國)
'안야·아라·아시량' 같은 음으로 함안의 아라가야
신라 법흥왕 때 군사력으로 병합하여 군(郡)을 설치
말이산 고분군, 아라가야 왕궁지 성산산성 등의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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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유적[城山遺蹟]........................
경남 창원시 외동 성산마을 조개더미 유적과 산성유적.
남천을 낀 충적평야 지대에 솟은 구릉 정상에 산성 터
구릉 조개더미 유적에는 홈도끼·갈돌·화살촉·돌도끼 등
석기와 질그릇이 층위에 따라 다르게 나오고
각종 뼈연모들과 함께 청동기 조각도 나왔다.
특히, 바닥층에서는 쇠부리터로 보이는 유구
오주전(五珠錢) 출토로 유적 연대는 BC 1세기
쇠부리터는 고성·동래·양산 유적보다 큰 규모
성터는 구릉 정상부 총길이 423m에 달하는 자연돌 산성
너비 7m, 남아 있는 높이 1.5m이며 삼국시대 전기에 축성.
BC 1세기~ AD 3세기 철기시대에서 삼국시대 전기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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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창원)..........................
강원도 남서부에 있는 철원군[鐵原郡] 별호가 창원.
현재 철원군은 남한과 북한으로 나누어진 '철의 산지.'
고구려(또는 백제) 때는 철원군·모을동비(毛乙冬非)
신라 때는 철성군. 후고구려 때는 태봉의 왕도였으며,
고려의 왕건이 이곳에서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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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무리는 상장군 탁을 받들어 모두 산넘어 월지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탁은 중마한을 창건후 고향인 월지에 도읍을 정했고, 변.진도 수도를 정한다.
3한은 마한의 다스림을 따랐고 서로 도왔고, 변한은 진한과 언어 풍습이 유사.
-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한 기록 -
변한은 B.C 39년에 박혁거세(朴赫居世)에게 항복
변한의 항복으로 와해된 변한 연맹체는 신라에 합병,
나머지 변한 세력 대부분은 김수로왕에게 정복당했다.
김수로왕은 그곳에 6 나라의 소국을 세우고 가락국 창건.
특히 최무선은 화통 화포로 진포싸움과 남해대첩에서 대승
그러나, 고려는 원(元)나라의 2차에 걸친 일본 원정의 기지
과중한 부담을 치뤄 경제적 파탄에 이르러 멸망의 직접 원인
왜구의 침입은 이조시대에 들어와서도 그치지 않았다.
1396년(태조 5) 김사형(金士衡)이 대마도 송도를 정벌
강경책과 귀화의 기회를 주는 회유책을 병행했으나 실패.
1419년(세종 1) 이종무 등이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 정벌.
이조는 상왜(商倭)를 비롯한 왜인들의 왕래를 제한적 허용.
삼포(三浦)를 개항하여 국제무역을 하게 하면서 회유하였다.
그 뒤 삼포왜란·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달량왜변(達梁倭變)
이조 정권의 왜구 회유정책은 임진왜란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왜구가 노린 것은 부녀자보다 젊고 힘센 장정들.
고려사에 의하면 왜구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 수가 3 만.
왜구의 근거지로 지목되는 대마도에 모셔진 고려의 불상.
고려불화는 전 세계 100 점 중 90 점이 현재 일본에 있다.
일본 최대의 혼란기 남북조 혈투에서 패한 후쿠오카 통치자
쇼니는 큐슈에서 세력을 잃고 대마도와 고려에서 재기할 꿈.
이성계는 그 왜구를 몰아내어 최영과 함께 국민적 영웅이 된다.
또한 이조 건국의 결정적 계기였던 위화도 회군의 명분도 왜구.
그리하여, 이성계는 왜구토벌 과정에서 민심과 권력을 거머쥔다.
16세기 왜구의 구성원 대부분은 중국인이란 일본 학자 주장.
왜구는 중국 한반도 일본 동남아를 오가는 무역상인들 집단.
당 멸망후 명나라 해안봉쇄령으로 상권을 잃은 중국 무역상들.
왜구가 되어 대마도에 근거지를 둔 해적이 되었다고도 전해온다.
대마도는 거제도에서 40 km이고, 일본 본토에서는 80km 거리.
해류의 방향은 북한에서 부산과 거제를 거쳐 대마도로 흐른다.
제주도에서 부표를 띄워놓으면 대마도 나가사끼에서 발견된다.
따라서, 대마도는 한반도와 실거리보다 훨씬 가깝다.
역사적으로도 한반도와 일본을 연결하는 중개 무역항.
중국과 한반도와 일본의 무역항로를 잇는 중요한 거점.
'삼별초의 난'은 고려 원종 때 일어난 항몽투쟁.
삼별초는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을 총칭한 것으로,
최씨 정권의 사병적인 성격이 짙은 군사 집단이다.
1232년(고종19) 몽골 침락을 피해 최씨정권이 강화도로 천도
삼별초는 강도(江都;강화도)를 수비하는 책임을 맡게 되었고
섬 밖으로 나와 전국 각지에서 몽골군과 대전해 상당한 전과
1258년 최씨정권이 무너지고 이듬해, 고려 태자가 몽골에 입조
몽골과 30년간 계속된 전쟁이 종식되고 왕정이 복구된 듯한 형세.
그러나 실권은 여전히 무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강화도 고려조정에서는 개경환도에 관해 의견대립
원종을 중심으로 한 문신들은 대개 개경환도를 희망
삼별초의 무신들은 몽골에 대한 굴복이라고 하여 반대
1270년(원종 11) 마침내 출륙환도(出陸還都)가 단행되고,
환도에 불응한 삼별초를 해체명령 후 그들의 명부도 압수.
이에 삼별초군은 그해 6월 반란을 일으켰는데,
반란 주동자 배중손은 승화후 온을 왕으로 추대
관부(官府)를 설치하고 연안의 경비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도내 인심이 흉흉하고 호응자가 적었다.
하여 3일 뒤 진도로 남하하여 그곳에서 대몽항쟁.
진도로 이동한 삼별초는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고
11월에 탐라까지 세력을 뻗쳐 남방의 제해권 장악
1271년 5월 고려·몽골 연합군의 공격으로 세력이 꺾이고
본거지를 탐라로 옮겨 항전을 계속하다가 1273년 2월 평정.
삼별초의 항쟁은 고려를 예속화하려던 몽골에 대한 항전
자신들 특권적 지위를 보호하려던 국왕 및 그 일파에 반발,
항거한 병사들과 민중들의 동조와 지지를 얻었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연합군과 3년간 저항했다는 점에 역사적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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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난' 잔여세력은 어디로 간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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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는 고려시대부터 이조시대까지 왜구의 본거지.
임진왜란 후 일본화 되었지만 그 전까지 독립 자치령.
동아시아 해상무역권 향방이 대마도 정치노선을 좌우.
임진왜란 이후부터 동아시아 해상무역권 주역은 일본.
장보고가 동아시아 해상무역권을 장악했을 때엔 한반도.
그 이후부터는 중국(당나라 명나라 원나라)이 주역인 듯.
왜구는 해상무역 및 상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무장집단.
왜구는 한반도 항로는 물론 내륙의 지리까지 꿰뚫고 있다.
왜구는 첨단무기로 무장한 거상들의 무장군사들로 추정된다.
왜구는 한반도 백성들을 납치해 온갖 만행을 저질러왔다.
당나라 노예의 상당수는 해적들에게 붙잡혀왔던 신라인들.
힘센 남자 신라인들은 해적의 무장 병력으로도 충당되었다.
일본과 한반도 중국을 잇는 항로에 떠있는 크고 작은 섬들.
그 섬주민에게는 국법보다 해적의 만행이 훨씬 무서웠을 듯.
한반도에서는 남해와 제주도 일대 다도해가 해적들의 본거지.
이조시대에 삼포를 개항, 왜구들을 귀화시키거나 달래기도 했다.
이조에 귀화한 만여명 왜인들은 임진왜란 때 혁혁한 공을 세웠다.
조총의 유효사거리 및 왜군의 취약점을 한반도 의병들에게 알렸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필승.' - 손자병법.
우리나라는 아직도 일본역사나 왜구의 실체에 대해 어둡다.
일본을 이기려면 항일 감정보다 일본을 아는 것이 우선일 듯.
이조가 왜구를 배타해 대마도를 상실한 역사는 정말 뼈아프다.
왜구가 자주 출현했던 우리나라의 도서 지방
신안군 도서. 강화도, 진도, 거제도, 제주도.
마한의 패망세력이 정착한 곳으로도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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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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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가면 자살바위로 유명한 태종대가 있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 무열왕이 활을 쏘던 곳.
그 활시위가 바다를 향했을까? 절벽을 향했을까?
................무열왕 김춘추..............
신라 제29대 왕으로서 성은 김, 이름은 춘추이다.
당나라와 일본과의 외교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654년 진덕 여왕이 대를 이을 자식이 없이 죽자
여러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던 김춘추.
법률, 관료 제도를 정비, 군사조직 강화, 국가체제 확립.
660년 당나라와 연합해 삼국 통일 기반을 마련.
백제 점령 이듬해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했으나
삼국통일 위업을 이루지 못하고 운명한 김춘추.
어려서부터 용모가 범상치 않았고 영특했다.
당나라 태종도 그를 보자마자 이렇게 감탄.
" 호오, 성인의 기개가 서려 있구나 ! "
어려서부터 세상을 바로잡을 원대한 뜻
당나라의 선진문물을 일찌기 받아들였다.
대륙의 문화를 받아들여 신라를 발전시킨 왕.
무열왕릉은 선도산 아래의 송림속에 자리잡고 있다.
무열왕릉 남쪽에는 무열왕의 비석인 돌거북과 이수
조각이 무척 씩씩하고 아름다워 우리나라 최고의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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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대 절벽 너머 바다를 향해 서 있는 망부석.
바다로 떠난 님 기다리다 세월에 굳어진 망부석
다시 돌아오지 않을 님 향한 천년의 기다림인 듯.
태종대에서 나오는 길에 해양대학교 선착장의 목선.
돛을 내린 범선 뱃머리에 씌여있는 ‘700년 전의 약속’
'어떤 약속인지 자못 궁금해지는 그 사연.'
고려 충숙왕때, 양자강 하구 경원(영파)항을 떠난 중국상선
폭풍을 피하다가 임자도 앞바다에서 조난을 당하고 말았었다.
세찬 바람에 밀린 배는 파도를 피해 전남 서해안의 다도해 속
그러나, 임자도 4km 남겨두고 안타깝게 바다 속에 침몰했다.
겨우 섬에 상륙한 몇 명의 선원들 마저 임자도에서 죽어갔다.
삼별초군을 제압하기 위한 공도령으로 임자도는 무인도였던 탓.
그당시 추토사 김방경은 70년 전에 주변 섬들에 공도령을 발령
그후, 1270년 영광군으로 천읍한 후 154년 간 임자도는 무인도.
중국 경원(영파)항은 700년 전, 원나라 말 신안 유물선 출항지.
경원 항은 남방의 광주, 천주, 복주 등과 함께 세계적인 무역항
모두 고려와 왜를 연결하는 남방 항로의 기점이었던 항구들이다.
경원항과 신안은 왜를 연결하는 옛날부터 위험한 뱃길이다.
죽음을 각오한 항로이라 항해 성공확률이 반반인 무역 항로,
항해에 성공하면 교역이윤은 최고 원가의 200 배 실패하면 죽음.
그런 배가 풍랑을 만나 다도해에 가라앉은지 어연 650년.
1975년 5월, 임자도 앞바다에서 보물선의 실체를 드러냈다.
고기잡이 어부들이 청자수병, 백자대발, 백자접시 보물 발견
1996년 6월, 한 방송국에서 방송용으로 중국에서 복원
'700년 전의 약속 호’로 명명되어 19일간의 뱃길 탐사
옛 고대 항로를 복원하는 3000km 대장정을 마쳤던 것이다.
복원된 배는 총길이 31m, 몸체높이 2.6m로 중국 대형 상선.
700년 전, 꿈을 이루지 못하고 좌초했던 중국의 보물선.
중국 영파에서 출항, 목포,·후쿠오카를 거쳐 오사카까지
19일간의 항해를 무사히 마치고 700년 전의 약속을 이룬 것.
'7백년 전의 약속 호’목포국립해양유물전시관’에 전시된 후
다시 부산 한국 해양대학교에 기증되어 그곳 선착장에 보관 중.
패망 마한 세력이 안주할 만한 곳은 제주도.
마한세력이 재기의 터전을 삼을 곳도 제주도.
삼한시대로 세월을 거슬러 탐라국으로 가 보자.
탐라국.
제주도의 옛 나라 이름. 주호(州胡)·탐모라국.
섭라(涉羅) 담라(담羅)·탁라(탁羅)라로도 표기.
삼국시대 이전부터 고려 및 이조 초기까지 칭호.
탐라국은 고을나(高乙那)·양을나(良乙那)·부을나(夫乙那)
3신인(三神人)이 모흥혈에서 용출해 나라를 세우고 살았다.
신당서에 의하면 키가 작고, 개나 돼지 가죽으로 만든 의복.
소와 돼지를 잘 기르며, 노루와 사슴이 많으며,
풍속은 질박하고 비루하며, 여름에 초옥에 살고
겨울에는 굴속에 살며 배를 타고 한(韓)과 교역.
1928년 제주시에서 오수전(五銖錢)과 화천(貨泉)·
동경 등 중국 신나라 화폐와 거울이 발굴되었다.
<고려사> 지리지 기록에 의하면,
고을나 15대손 3형제가 배를 타고 바다 건너와 신라에 조공.
신라왕은 이를 가상히 여겨 '성주, 왕자 도내' 작호를 하사.
국호를 탐라라고 하였다고 한다. 탐라는 '섬나라' 라는 의미.
탐라국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문무왕 무렵.
그 이전까지는 3성 씨족의 공동연맹체제인 듯.
신라가 삼국통일을 했을 무렵 고씨(高氏)가 왕.
476년 탐라국은 백제 문주왕 2년 4월에 조공을 받쳤다.
백제왕은 탐라국 사신에게 좌평(佐平) 관등을 수여했다.
498년(동성왕 20) 8월에는 탐라가 조공을 받치지 않아
동성왕이 탐라 정벌에 나서자 사신을 파견하여 사죄했다.
고구려와 국교는 없었고 백제에 복속될 때까지 교역 성행.
한편 신라 662년(문무왕 2) 2월에 탐라국주 좌평이 항복.
이때부터 신라 속국이 되었고 탐라는 일본과 가깝게 교류.
678년에 신라로부터 경고를 받고나서는 신라 일변도 국교.
한편 신라 3국통일후 661년 탐라왕은 당나라에 사신 파견.
661년 당에서 일본으로 귀국하던 일본사신이 탄 배가 풍랑
탐라국에 대피하자 탐라 왕자 등 9명이 이들을 따라 일본행.
그후 일본과 매우 교섭이 활발했다.
탐라 왕자가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
680년과 686년 일본사신이 탐라 방문.
신라 말 점차 복속관계에서 벗어나 고려와 우호관계
925년(태조 8) 11월 사신을 파견하여 방물을 바치고,
938년 고려 후삼국 통일후 고려에 탐라국 태자를 파견.
고려는 신라의 예를 따라 성주 왕자의 작위를 수여.
이때부터 탐라는 고려 번국(蕃國)으로 독립적인 체제
1105년(숙종 10) 고려의 지방행정구획 1개 군으로 개편
1153년(의종 7) 탐라군은 다시 격하되어 탐라현으로 된 뒤
고려조정으로부터 파견된 현령에 의하여 행정 업무를 관장
탐라국 성주와 왕자는 관직만 남아 상징적인 존재로서 유지
이조 건국 후 1404년(태종 4) 성주는 좌도지관.
왕자는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개칭되어 존속,
1445년(세종 27) 이것마저 폐지되어 완전 평민화.
.....................제주도 역사의 기원.........................
아득한 옛날, 한라산 북녘 삼성혈에서 솟은 3 신인.
첫째는 고을나, 둘째는 양을나, 셋째를 부을나, 3인.
세 사람은 비범한 생김새에 가죽옷을 입고 육식 위주
사냥을 일삼아 가정을 이루지 못했던 어느 날.
한라산에서 동해를 바라보니, 해변에 자줏빛 나무상자.
3 신인이 산에서 내려와 안개에 싸인 상자를 열어보니,
그 안에 푸른 옷을 곱게 차려입은 선녀같은 처녀가 셋.
나이는 십오륙 세쯤 되고 얼굴과 태도가 범속하지 않았다.
기품은 그윽하였고 얌전하게 앉아 각자 화장하고 있었는데
그 상자 안에는 송아지, 망아지, 오곡의 종자 등등이 있었다.
"세 공주는 하늘이 우리에게 내려 주신 것이다."
3 신인이 반기자 옥함 속 사자가 3신인에게 말하기를,
"저는 동해 벽랑국에서 온 사자입니다.
우리 임금님께오서는 세 딸을 두셨는데
배필을 구하지 못하여 여러 해를 보내던 중에
임금님께서 자소각에 올라 서쪽 바다를 바라보니,
보랏빛 기운이 하늘로 이어지고 찬란한 서광이 한라산
높은 봉우리에 서려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삼신인이 솟아나
나라를 세우려 하지만, 배필이 없어 저에게 세 공주를 모시고 가라.
임금님께오서 말씀 하셨으니 혼례를 치르시고 부디 대업을 이루소서."
'그 사자가 승천하며 남긴 백마 발자국이 온평리.. <황루알>'
삼신인은 제물을 바쳐 하늘에 제사 지내고,
온평리에 있는 연못에서 목욕재계 후 혼례
물맑고 비옥한 곳으로 활을 쏘아 영역 결정.
이들이 활을 쏘았던 곳이 '활쏜디왓'
제주시 화북동 지방기념물인 <삼사석>.
활을 쏘아 고을나가 정한 주거지는 <일도>.
양을나 주거지 <이도>., 부을나 주거지 <삼도>.
그후 오곡을 심고 우마를 길러 탐라국을 이루었다.
석기시대 유물 타제석기 골각기 등이 출토된 동굴.
인간이 제일 먼저 만들었을 원시적인 도구로 보아 구석기시대.
시베리아 연해주 만주 일본 한반도 등등 동북아시아 공통적 유물.
특히 우리나라 신석기시대를 밝히는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고산리 선사유적(사적 제 412 호)를 비롯하여
탐라국 형성기 대단위 집자리 236기 (원형 173기)
당시 석축담장, 쓰레기장, 마을 도랑 유구가 출토된 곳
주거지에서 토기(구멍띠토기, 점토대토기, 적갈색항아리)
석기(돌도끼, 대패, 갈돌, 숯돌) 와 철기 (철제도끼, 손칼),
청동기(동검, 검파두식 등), 곡식(콩,보리 등) 다양한 유물들.
청동기, 초기 철기시대, 송국리 유형의 문화말기
그 과정과 단계를 보여주는 국내 최대규모 유적지
동시에 탐라국 형성기의 제주 주민문화를 알리는
국내 유일의 마을 흔적이기도 한 중요 유적지이다.
기원전 1세기 무렵 동북아시아 마을 유적의 흐름
그 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유적.
제주 삼양동 선사유적 (사적 제 416호)를 살펴보면
제주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 수 도 있을 듯 보인다.
현재, 제주대학교 박물관과 제주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유물
제주 전역에 분포된 청동기, 철기유물, 고인돌, 마제석기, 토기,
옹관묘(甕棺墓)의 귀중한 자료들은 제주의 역사를 알게 해준다.
제주도 옛 이름은 도이(島夷), 동영주(東瀛洲),
섭라(涉羅), 탐모라(耽牟羅), 탁라(羅) 등등이다.
옛 이름 중에서 '동영주'만 제외하고는 모두
<섬나라>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지명이다.
제주도 개벽신화 = <삼성혈과 고을라, 양을라, 부을라>
여기에 관해서는 또 다른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져온다.
삼성혈에서는 매년 4월 10일에 춘제, 10월 10일에 추제를 지낸다.
삼성(三姓)인 고을나 양을나 부을나 라는 삼신인(三神人)이 있다.
모흥혈(현재 삼성혈)에서 나와 가죽 옷을 입고 사냥하며 살았단다.
이들 삼신인들은 벽랑국(碧浪國)에서 온 삼 공주와 혼례를 올렸다.
삼공주는 오곡씨앗, 송아지, 망아지 등등을 갖고 목함을 타고 왔다.
삼공주가 제주도 동쪽 해상에서 들어올 당시에 갖고 왔던 오곡 씨앗.
그것으로 농사짓고 소와 말을 기르며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삼신인의 주거지를 정하려 쏜 화살이 꽂혔다는 삼사석
현재 제주도 문화재로 남아있는 삼사석은 두 전설의 공통점.
그후 고을나 15대 후손 3형제 (후, 청, 계)가
신라(B.C57 ∼ A.D935)에 입조하여 '탐라국'
탐라국은 삼국시대에 예속되어 있으면서
외교관계를 맺어왔다고 역사기록에 있다.
1105년 고려에 예속되어 탐라군이 되었으나,
왕통은 그대로 존속하여 통치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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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연혁........................
상고시대∼삼국시대......탐라 (탁라)국
938년 (고려태조 21년)..탐라국 태자 고말로, 고려입조
1105년 (고려숙종10년)..탐라국호 폐지, 탐라군 설치
고려 고종(1192∼1259)..탐라군을 제주로 개편
1275년 (충열왕 원년).....탐라국으로 회복,총관부 설치
1294년 (충열왕 20년).....고려로 환속, 제주로 복호
조선조 초기 (태조년대)..제주목에 군안무사 겸 목사를 둠
1416년 (태종 16년)........제주목에 정의·대정현 설치
1864년 (고종 1년).........정의, 대정 양현을 군으로 승격, 전라도 관찰사 관할에 둠.
1880년 (고종 17년)....... 다시 현으로 환원
1895년 (고종 32년)........제주목을 부로 개편, 관찰사를 둠
1906년 (광무 10년)........목사를 폐지, 군수를 둠
1910년 (융희 4년).........정의·대정군 제주군에 합군
1915년 5월 (일제시대)..군제 폐지, 도제(島制)로 개편
1946년 8월 1일.............도제 실시 (2군·1읍·12면)
1955년 9월 1일.............제주읍이 제주시로 승격 (1시·2군)
1981년 7월 1일.............서귀읍·중문면 통합, 서귀포시 승격
1997년 (현재)...............2시·2군·7읍·5면·31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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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유래 및 전설...................
남한에서는 제일 높은 한라산(해발 1950m)
'은하수 (漢)'를 손에 '잡을(拏)' 듯 높은 산(山)'.
태평양 바다 기압골이 봉우리에 걸려 운무에 쌓인 백록담(白鹿潭)
능선 둘레 약 1.7㎞이며 화구호 깊이는 110여m 이고 넓이 약 6만평.
백록담은 '흰 사슴이 살았다는 호수'라는 전설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옛날에 사냥꾼이 흰 사슴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는데
빗나간 화살이 자기 궁둥이에 맞자 화가 났던 옥항상제.
한라산 봉우리를 뽑아 사냥꾼에게 던졌는데 그것도 빗나가
바닷가로 날아가 산방 산이 되었고 봉우리 뽑힌 자리는 백록담.
산방 산은 75만년 전., 백록담은 2만 5천년 전., 바다에서 솟았다.
지질학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백록담의 생성역사는 의외로 짧다.
즉, 제주도 일대는 서해 저지대의 일부분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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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는 구석기시대의 유물이 출토되는 지역이다.
지리상으로 구석기시대 남해 저지대에서의 중심지.
제주도는 제 4 빙하기 이후 대홍수 당시의 피난처.
..................백록담의 유래 및 전설..........................
옥황상제 신임이 가장 두터웠던 산지기 산신령이 관리.
그곳 정상 호수는 선녀들이 목욕하는 동안은 금남의 성역.
어느 날 선녀들 목욕 끝날 시간에 맞춰 그곳에 갔던 산신령.
그곳에 혼자 남아 목욕하는 선녀 미모에 넋 잃고 사랑에 빠짐.
그후부터 그 선녀가 목욕할 때면 훔쳐보며 홀로 애태운 산신령.
옥황상제 노여움을 산 산신령은 그 벌을 받아 흰 사슴이 되었다.
흰 사슴이 된 산신령은 그후에도 늘 그 호수 가를 맴돌며
오지 않는 선녀를 기다리다가 사냥꾼 화살에 맞아 숨졌다.
흰사슴이 죽어가며 흘린 피자국마다 분화구 진달래 꽃 되어
그 혼이 해마다 그리움 호소하듯 5월이면 피어난다고 하는데
그 흰 사슴이 살았던 곳이라 하여 백록담이라 부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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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록담 유래 및 전설을 보면 남방 불교의 배경무대.
목욕하는 선녀들과 옥황상제 전설은 남방불교의 특징
제주도는 중국 산동반도와 일본을 오가는 중간 기착지.
제주도에 불교를 처음 전파한 세력은 무역상인들.
마한의 잔여세력은 무장 무역상인들의 집단 중 하나
마한의 큰 세력은 제주도에 정착했을 가능성이 높다.
목선을 타고 제주도 동쪽 해상으로 들어갔던 벽랑국.
'역사 기록은 없지만 마한 패망세력이 아닐까?'
제주도 고을나 15대 후손 3형제 (후, 청, 계)
탐라국이 신라(B.C57 ∼ A.D935)에 입조한 기록.
백제에게 패망한 마한이 의지할 나라는 신라 뿐.
첫댓글 일요일 오후 그져주신 감사한글 읽는재미가 쏠쏠하였슴니다
지금으로부터 533년 전까지 세월을 넘나 드는 옛 성현들의 지리산행기./ 머리 기르고 잘 생긴 사명대사./이조 말에는 스님이 가마꾼...기생까지 대동한 70 여명이 사찰에서 먹고 자며 유두류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