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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모시와 마우라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체포되었습니다.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남편 티모시는 총독 아리아누스의 명령대로 목에 무거운 추를 달고 거꾸로 매달려 있었습니다. 로마 병사들은 그의 뜻을 꺾기 위해 뻘겋게 달궈진 쇠꼬챙이로 눈을 지졌습니다. 부인 미우라는 공포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이 끔찍한 장면을 똑똑히 지켜봐야했습니다. 남편에게 더 이상 고통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 없다고, 제발 부탁이니까 성경 있는 장소를 가르쳐주고 자유를 얻자고 간청했습니다. 절규였습니다. 티모시 역시 처음 체포되었을 때는 두려움에 완전히 압도되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평화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더 고요했습니다. 입의 재갈이 풀리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재갈이 풀리자 아내를 꾸짖었습니다. 자신을 향한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보다 앞에 놓지 말라고 외쳤습니다. 자신은 유일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기꺼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거듭 다짐했습니다. 반드시 용기를 내야 한다고 아내를 격려했습니다. 마우라도 결심을 굳혔습니다. 총독은 격노했습니다. 그녀의 용기를 꺾어버리기로 작정했습니다. 로마에서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고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녀 역시 남편을 따라 결코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에게는 잔혹한 고문이 이어졌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나란히 달린 처참한 모습으로 순교했습니다. 아프간에서는 외국인 납치, 불특정 다수를 겨냥한 자살 폭탄, 주요 정부 관계자 피살 등 테러가 일상처럼 일어납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오십 세를 넘긴 자매는 그곳에서 늘 자기보다 아이들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편하고 좋다는 것을 다 마다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아이들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이른 새벽부터 저녁에 침상에 들기까지 거의 쉬지 않았습니다.
힘에 지나도록 최선을 다해 수고했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료들에게 인사 한 마디 남기지 못한 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평소 소원대로 하나님께서 있으라고 명령하신 바로 그 땅에 뼈를 묻었습니다. 남긴 것이라곤 허름한 가방 하나와 누구도 입지 않을 것 같은 옷가지 몇 벌이 전부였습니다. 지금 그곳에는 사랑하던 동료들을 먼저 보내고 언제 끝나게 될지 모를, 얼마나 더 오랫동안 지속될지 모를,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게 될지 모를 보이지 않는 전쟁을 위해서 남겨진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군사들은 하나둘씩 떠나가고 적의 숫자는 점점 더 많아지는 외롭고 힘겨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주어진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남겨져 있습니다. 그들은 그 전쟁에 발을 드려놓기로 결정한 순간, 이미 목숨을 하나님 앞에 내 놓았습니다. 어떻게 죽을지 방법도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예수께서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다시 오실 그날까지, 누군가는 계속해야 할 전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오순절이 되자, 주님의 약속대로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거리로 뛰쳐나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께서 활동하실 때에도 볼 수 없었던 엄청난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한꺼번에 삼천 명, 오천 명이 회개했습니다. 그야말로 엄청난 부흥이었습니다. 동시에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핍박이 임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했습니다. 야고보도 순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을 피해 주변의 여러 도시들로 흩어졌습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가는 곳마다 놀라운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핍박과 함께 순교도 따랐습니다. 어떤 이들은 조롱을 받으며 매를 맞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묶인 채로 감옥에 끌려갔습니다. 어떤 이들은 돌에 맞아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몸이 반으로 잘려 죽기도 했습니다. 칼에 찔려 죽기도 했습니다. 양과 염소 가죽을 두르고 가난과 고난과 학대를 견뎌야 했습니다.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에서 살았습니다. 역시 동일한 고난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사도는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기 때문이다.”(히11:40a)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더 좋은 것”은 완전한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무장해야할 영원한 소망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 때문에 어떤 처지에 내몰리든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기뻐했습니다.
즐거워했습니다. 자신이 고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완전한 구원, 하나님의 영광, 영원한 소망으로 무장하셨습니까? 사도는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엡2:12),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4:13)라고 지적했습니다. 원래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알지 못했습니다. “저희는 이스라엘 사람이라 저희에게는 양자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저희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저희에게서 나셨으니”(롬9:4-5a)라는 말씀에 따르면, 육신적으로도 예수 그리스도밖에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지옥의 땔감 정도로 여기며 비웃고 조롱하던,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던 이방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당연하게 누리던 하나님의 성민이라는 특권도 갖지 못했었습니다. 아브라함, 야곱, 이스라엘, 다윗으로 전승된 하나님의 언약과도 상관없었습니다.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이스라엘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님도 없었습니다. 참 하나님도 알지 못했었습니다. 무엇보다 참된 소망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소망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악인은 죽을 때에 그 소망이 끊어지나니 불의의 소망이 없어지느니라.”(잠11:7),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행16:19a)라는 말씀에 따르면, 자신을 미혹하고 기만하는 헛된 소망에 집착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세상 그 무엇으로 취소할 수 없는, 영원히 변함없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항구적인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풍성하고, 기름지고, 윤택하고, 부족함이 전혀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리는 은혜 “안”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처럼 영화롭게 변화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이 기대와 소망 때문에 환호성을 지를 수 있습니다. 기뻐할 수 있습니다.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자랑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환난이라 할지라도 결코 소망을 흔들어 놓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환난은 인내를 낳습니다. 인내는 연단을 낳습니다. 연단은 소망을 낳습니다. 한편, 사도는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4b)라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이루는κατεργάξεται”은 “완전히 일하다, 완수하다, 수행하다, 성취하다, 달성하다.” 등의 뜻입니다. 본 절에서는 어떤 사건으로부터 어떤 결과를 산출해 낸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불같은 시험 같은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또 “앎이 로다εἰδότες”는 “알다, 깨닫다, 지식을 갖다, 확신하다, 이해하다” 등의 뜻입니다. 영적 체험을 통해서 얻어지게 되는 지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항상 과거 시제로만 사용됩니다. 분사형태입니다. 환난이 소망을 요동케 하기는커녕 더욱 확신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지난 시간이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실제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환난이 주어지게 된다 할지라도,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인내할 수 있습니다. 연단을 달게 받을 수 있습니다. 소망을 더욱더 구체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바로 그 소망 하나만 붙잡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롬5:5a)이라고 시작됩니다. 여기서 “부끄럽게κατισχύνει”는 “수치를 당하다, 얼굴을 붉히게 하다, 명예를 잃다, 모욕하다” 등의 뜻입니다. 시제는 현재입니다. 부끄럽지 않는 상태가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 그대로 적용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 가운데 일부는 다른 주장을 펼치기도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소망을 품은 믿음의 사람들은 대 심판 날에 절망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모든 인류가 반드시 직면할 수밖에 없는 최종적인 심판대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미래의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옳습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반만 맞습니다. 오늘 곧 현재도 포함됩니다. 오늘 현재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도 최후 심판 날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도무지 견디기 힘든 환난과 시험들이 주어진다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소망을 가지고 있으면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아니 “부끄러움을 느끼지도 않는다, 부끄러움을 느낄 하등의 이유가 없다.”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끝없이 떨어지는 절망의 심연으로 떨어졌다고 느끼지도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셨던 고난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악으로 환난과 시험 때문에 죽게 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영적 아들처럼 사랑했던 디모데는 달랐습니다. 각종 희한한 능력을 보이며 복음을 전하던 바울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전혀 몰랐습니다. 상당히 당황했습니다.
“우리는 그가 외쳤던 확신이 넘치던 설교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죄인의 몸으로 옥게 갇혀 있습니다.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그에게 이런 일을 허락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왜 당신 한 분만을 위해서 충성하던 종으로 하여금 혹독한 고난을 당하게 하셨습니까? 당신이 전하는 복음이 참이라고 한다면 설명 한 번 해 보십시오.”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어떤 대답도 해 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에 대해서 전혀 깨닫지 못했던 그는 부끄러움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바울은 그에게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딤후1:8a)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 주를 증언함”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입니다. 곧 복음입니다. “주를 위하여 갇힌 자τὸν δέσμιον αὐτοῡ”의 문자적인 의미는 “그(예수 그리스도)의 갇힌 자”입니다. 예수께서 당신의 어떤 특별한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 바울을 죄수로 만드셨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떤 경우에도 목적이 없는 고난을 당하지 않는다는 의미 또한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히 소유격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의미입니다. 마땅히 주인이신 예수께서 책임지셔야합니다. 바울은 이미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롬1:16a)라고 고백했었습니다. 디모데도 복음에 대하여 부끄러워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복음과 관련해서 아무리 혹독한 환난과 시험과 고난을 당하게 된다 할지라도 결코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습니다. 혹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데에는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반드시 책임져 주셔야 할, 지켜 주셔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또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현재의 나를 지켜 주실 것을 확신하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미래)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딤후1:12)라고 고백했습니다. 그가 옥에 갇힌 이유는 복음을 전한 결과였습니다. 선한 일을 행한 결과였습니다. 사명에 순종한 결과였습니다. 얼마든지 사기가 꺾일 수도 있고, 절망할 수도 있고, 의기소침하게 된다 할지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과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기가 꺾이지 않았습니다. 절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의기소침해 하지도 않았습니다. 당당하게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 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디모데 네가 알고 있는 것처럼 나는 견디기 힘든 환난과 시험 가운데 있다. 늙은 몸은 추위를 견딜 수 있을 만큼 건강하지도 않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전혀 부끄럽지 않다. 실망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나를 맡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도 능히 나를 지켜주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환난과 시험은 현재의 나에게 있어서 가장 이상적인 환경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또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딤후1:15a-16b)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다른 것도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옥에 갇혔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바울의 고난을 이해했습니다. 결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에는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뒤돌아서지도 않았습니다.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랑하듯 당당했습니다. 갇힌 바울을 자주 찾아갔습니다.
위로하고 격려하고 돌봐주었습니다. 그는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참된 특징과 관련해서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3:20a)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가 비록 이 세상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고 있지만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보통 시민권이 아닙니다. 이 시민권은 땅의 상황이나 조건이 어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라는 고백대로, 결코 낭패를 당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환난과 시험이 떼거지로 밀려올지라도 넉넉히 참아낼 수 있습니다.
통과할 수 있습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가장 위대하고, 가장 탁월하고, 가장 안전하고, 영원하기까지 합니다. 결코 부끄럽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든지 대놓고 자랑할 수 있습니다. 또 성경은 “우리가 이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 가셨느니라.”(히6:19-20)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은혜의 보좌에 단단히 매여 있습니다. 예수께서 앉아계신 하나님의 보좌 우편 곧 휘장 안에 단단히 매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히7:25)라는 말씀대로, 살아 계신 예수께서는 당신을 힘입어 아버지 하나님 앞에 설 소망을 가진 우리들을 위하여 친히 간구하고 계십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단단히 닺을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 부끄럽지 않은 궁극적 근거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5:5b)라고 이어집니다.
여기서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사랑은 조금씩 배급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차고, 넘치도록 흘러나옵니다. 값없이, 풍부하게, 부요할 수밖에 없도록, 넘칠 수밖에 없도록 아낌없이 쏟아 부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주시고, 주시고, 또 주십니다. 용솟음칠 수밖에 없도록 퍼부어주십니다. 억수같이 쏟아 부어주십니다. 물을 잔뜩 머금은 스펀지를 살짝 누르기만 해도 물이 흘러나오듯, 우리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수밖에 없도록 쏟아 부어주십니다.
은혜위에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거기다 하나님의 각종 은사를 분배하시는 성령 자신도 교회인 우리에게 쏟아 부어진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성령 충만은 하나님께서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하신다는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넘치도록) 부어 주셨느니라.”(행2:33)라는 베드로의 선포가 그 증거입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마음에 부어졌습니다. 됨됨이, 성품, 정서, 감수성, 이해력, 이지理智 곧 이성과 지혜에 부어졌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διὰ πνεύματος”라는 표현을 간과하지 말아야합니다. 성령께서 원인과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수단 또는 방법이 되셨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당신 안에 충만한 사랑을 성령을 통해서 부어주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게 하시는 분은 어디까지나 성령이십니다. 성경이 “우리는 그 성령에 힘입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명해 주십니다. 또 우리의 마음속에도 그러한 확신이 있습니다.”(롬8:15b-16)라고 말씀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성령 안에서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알고 믿을 수”(요일4:16a)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믿음과 확신은 결코 편협하고 왜곡된 우리의 논리의 결과가 아닙니다. 비상한 유추의 결과도 아닙니다. 아무리 많이 배워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어버린, 신앙을 긍정의 힘 정도로 전락시켜 버린, 20C의 가장 잘못된 가르침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소위 “믿음으로 취하라.”라고 한다고 가져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성령께서 주실 때만 비로소 즉시 가질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 일은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께 사랑을 고백합니다. 지금 이 순간, 그분의 모습을 보지 못하면서도 그분을 믿고 있고 여러분의 마음은 설명할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벧전1:8), “성령께서는 친히 우리의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증언합니다.”(롬8:16)라고 외칠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도는 “헤아릴 수 없는(지식에 넘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폭과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아 알(게 될 수 있도록)”(엡3:18b-19)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고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야말로 광대합니다. 측량할 수 없습니다. 무한합니다. 가늠할 수 없습니다. 풍요라는 말로도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제아무리 몸부림친다 할지라도 깨달아 알 수 없습니다. 인격과 지식을 총동원한다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로 거듭난 우리에게는 이미 충만하게 부어졌습니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충만하게 채워져 가야합니다. 이미already 주어졌지만, 아직not yet 완성되지는 않은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같은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누구나 성령을 통해서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고 고달픈 환난을 만난다 할지라도 환호성을 지를 수 있습니다. 기뻐할 수 있습니다.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자랑할 수 있습니다.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도, 결코 부끄러워하지도 않습니다. 비록 완성 된 것은 아니지만 지금 누리고 있고 곧 다가오게 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수 없다면, 환난 가운데서도 즐거워할 수 없다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은 결코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폭과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속에 넘치도록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우리를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망을 부끄럽게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소망으로 무장한 참된 믿음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환호성을 지를 수밖에 없습니다.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
즐거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예롭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극히 유한한 이 땅의 환경과 상황과 조건과 상관없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억지로 그렇게 해야 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강제로 그렇게 하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이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반드시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올라올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십니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도무지 거부할 수 없습니까? 무엇보다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할 수 있겠습니까? 즐거워할 수 있겠습니까?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때로, 하나님의 사랑은 법정 행위와 비교됩니다. 세상 법정은 피고의 혐의에 대해서 무죄 판결을 내리거나 형을 선고합니다. 하나님 역시 피고인 우리의 죄를 구체적으로 확인하십니다. 그러나 형을 내리지 않습니다.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근거로 깨끗하게 도말해 주십니다. 용서해 주십니다. 또 세상 법정은 혐의가 확인된 피고에게 마땅한 형을 선포한 다음, 다시는 상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형이 확정된 피고에게 당신의 성령을 충만하게 부어주십니다. 당신의 사랑을 부어주십니다. 양자 삼아주십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8:15)라는 사도의 지적대로, 창세 때 부어주셨던 당신의 모양과 형상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당신 앞에 설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더욱 더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감히 넘볼 수 없는, 죽은 사람처럼 엎드릴 수밖에 없는, 극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떨 수밖에 없는 절대 주권과 권위와 영광으로 무장하신 당신을 서슴없이 아빠라고 부를 수 있도록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당신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녀는 루마니아 공산당의 극한 핍박 속에서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습니다. 보살펴 주며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었습니다. 그러다 체포되었습니다. 심문을 맡은 경찰은 같은 말을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 질 때까지, 마침내 쇠약해 질 때까지 반복했습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을 얻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상황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으려고 몸부림쳤습니다. 끝까지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경찰은 그녀가 흔들리지 않자 이번에는 회유책을 썼습니다.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우리 현실적으로 대화합시다. 사람은 누구나 나름의 값을 가지고 있어요. 자, 아줌마의 값을 스스로 매겨 봐요. 원하는 걸 말해보라고요. 당신과 남편의 자유를 원하나요? 좋은 집과 교회를 원하나요? 다 들어줄테니 안심하고 말해 봐요!”라고 회유했습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그녀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호의는 고맙습니다만, 저는 벌써 제 자신을 팔았는데요!”라고 대답했습니다. 확신에 찬 대답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당황한 경찰이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습니다. “팔았다고요? 도대체 누구한테 얼마에 팔았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를 사기 위해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고 목숨까지 내놓으셨어요. 그래서 저는 그분을 통해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어요. 그분보다 더 비싼 값을 쳐주실 수 있나요?”라고 반문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미 궁극적인 대가를 모두 지불하셨습니다. 우리의 값을 단번에 책정하셨습니다. 우리를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귀한 존재로 여기셨습니다. 당신 자신을 내놓으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당신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높고, 길고, 넓은지 똑똑히 보여주셨습니다.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그 사랑이 우리가 가진 소망의 유일한 근거입니다. 우리의 소망이 부끄럽지 않은 유일한 이유입니다. 날마다 성령 안에 거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달아 알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시오. 그것을 통해서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 소망 아니 결코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소망으로 무장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바로 그 소망 때문에 극한 환난 중에도 환호성을 지를 수 있는 삶, 기뻐할 수 있는 삶, 즐거워할 수 있는 삶, 자랑할 수 있는 삶, 영예로 여길 수 있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