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은 상하이에서 서병호의 부인인 큰 고모 김구례(金求禮)와 셋째 고모인 김순애의 도움으로 고문 후유증을 치료하면서 건강 회복에 주력하였다. 그리고 건강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남경대학에 입학하여 일본에서 못 다한 공부를 계속하는 한편, 상하이의 대한애국부인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황해도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임시정부는 1921년 1월 26일 국무총리 이동휘의 사임, 이어 5월 12일 노동국 총판 안창호 등 주요 국무위원의 사퇴, 그리고 정부 조직 후 처음으로 상하이에 도착하여 정무에 임했던 임시대통령 이승만이 같은 해 5월 하와이로 돌아감에 따라 그 기능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때문에 임시정부를 명실상부한 국민의 대표기관이자 독립운동의 최고 통솔기관으로 개편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 소집 문제가 독립운동계의 초미의 관심거리로 등장하였다. 안창호는 노동국 총판을 사퇴한 날인 1921년 5월 12일 상하이 3·1당에서 열린 유호(留滬, 상하이)동포연설회에서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을 공식적으로 제기하고, 그 촉성기관으로 국민대표회기성회를 발기하였다. 나아가 그 해 6월 6일 정식으로 국민대표회기성회를 출범시켜 본격적으로 국민대표회의 소집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이 때 태평양회의 개최 소식이 알려짐에 따라 상하이는 물론 만주·노령·미주 등의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은 여기에 참여하였고, 또 이에 대항하여 모스크바에서 1922년 1월부터 극동 피압박 민족대회(극동 인민 대표회의)가 개최됨에 따라 사회주의 계열의 인사들은 여기에 대거 참여하여 국민대표회의 소집 문제는 지연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 독립 문제에 대한 가시적 성과도 없이 1922년 2월 초 두 회의가 끝나자 국민대표회의의 개최 준비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독립운동계의 초미의 관심 속에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리게 되자 선생은 대한애국부인회 대표로 참가하였다. 선생은 3월 8일 회의에서 임시정부 법통성의 고수와 유지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각원 개선 등 개조 방안을 제시하였다.
“국내의 일반 인민은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설립되었다는 말을 듣고 소수인의 조직이거나 인물의 좋고 나쁨을 불문하고 다 기뻐하여 금전도 아끼지 않고 적(敵)의 악형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설혹 외지에서 임시정부를 반대하던 자라도 국내에 들어와서 금전을 모집할 때에는 다 임시정부의 이름을 파는 것을 보아도 국내 동포가 임시정부를 믿는 증거이다. 임시정부를 안 팔면 밥도 못 얻어 먹는다. 적은 가끔 임시정부의 몰락을 선전하여도 인민은 안 믿는다. 소수로 됨은 혁명 시에 피할 수 없는 일이요 인물은 변경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수만의 유혈로 성립되어 다수 인민이 복종하고 5년의 역사를 가진 정부를 만일 말살하면 소수는 만족할 지 모르나 대다수는 슬퍼하고 외인(外人)은 의혹한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개조하자.”
하지만 이 같은 선생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민대표회의는 기존의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독립운동의 최고 영도기관을 재창출하자는 창조파(創造派)와 현재의 임시정부를 확대 개편하자는 개조파(改造派)로 나뉘어 논쟁을 거듭하였다. 그러더니 결국 국민대표회의는 독립운동 제(諸) 세력의 화합과 통합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서로 상처만 남긴 채 끝나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