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 The New York Times 미국시간 2012-10-14 아시아시간 2012-10-15 (번역) 크메르의 세계
[심층] 사망한 노로돔 시하누크 전 캄보디아 국왕의 생애
Norodom Sihanouk,
Cambodian Leader Through Shifting Allegiances, Dies at 89
(사진: Stephen Shaver / AFP) 89세의 나이로 중국 베이징에서 사망한 노로돔 시하누크 캄보디아 상왕.
기고 : 엘리자벳 벡커(Elizabeth Becker) 및 셋 미단스(Seth Mydans)
캄보디아의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인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공이 월요일(10.15) 아침 베이징에서 향년 89세로 사망했다. 그는 뛰어난 정치적 수용력으로 전세계에 그 이미지를 형상화시켰고, 작지만 다사다난한 국가인 캄보디아에서 지난 60년간 그 정점에 서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각종 보도들에 따르면, 넥 분처이(Nhiek Bunchhay) 부총리가 시하누크 상왕의 사망 사실을 발표했다. 전임 국왕인 시하누크 공은 지난 수년간 각종 질병으로 고생해왔고, 정기적으로 중국을 방문해 치료를 하기도 했다.
그가 캄보디아 국왕에 즉위한 것은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이 재임 중이던 1941년이었다. 그후 60년 이상 그는 어떤 방식으로든 캄보디아 권력의 일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는 국왕, 총리, 캄보디아 공산주의 혁명의 주요 인물, 망명한 정치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줬고, 1993년 새롭게 국왕에 올랐다가 2004년에 양위를 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왕위를 아들인 노로돔 시하모니(Norodom Sihamoni) 국왕에게 물려줬고, 그후 그는 '전임 국왕'(retired king)이나 '상왕'(king-father)이란 칭호로 불렸다.
시하누크 공은 냉정기를 살았고, 크메르루즈(Khmer Rouge) 정권기와 냉전의 음모들에서도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의 생애 마지막 수년 간은 울적한 표현들로 점철됐다. 그는 자신이 "가난한 내 나라"라 부르는 국가의 가난과 인권유린에 대해 종종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는 매력과 무자비함을 번갈아 보여주는 가운데,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을 자신이 지닌 정치적 위트를 통해 감탄시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동남아시아의 조그마한 나라인 캄보디아의 위상을 제고시키기도 했다.
그는 1953년 프랑스 식민당국으로부터 외교적 수단을 사용하여 캄보디아의 독립을 쟁취시켰다. 그리고 자신의 국내 정적들을 책략을 사용해 탄압했지만, 이웃 국가였던 베트남과는 달리 독립과정에서 전쟁을 겪지 않게도 만들었다. 그는 1960년대에 캄보디아를 현대적인 국가로 만들어나갔고, 특히 교육제도를 강화시켰다. 하지만 시하누크가 견지했던 불교 사회주의적 의제들은 진전되지 못했고, 결국 경제적 정체를 가져왔다.
베트남 전쟁이 역내에 골을 만들 위험이 발생하면서, 그는 캄보디아의 중립적 역할을 시도했다. 중립적 입장은 [냉전시대의 양대 진영인] 공산권과 미국 사이에서 그 어느쪽에도 합류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이 시하눅빌(Preah Sihanouk, 쁘레아 시하누)의 항구 및 캄보디아 북동부 국경지역을 일명 '호치민 루트'(Ho Chi Minh Trail)라 불린 군사물자 보급로의 일부로 활용하자, 그는 미국과의 관계를 개선했다. 이에 따라 시하누크는 미국의 닉슨(Nixon) 행정부가 1969년부터 캄보디아 국경지역에 대한 비밀공습(=마누 작전)을 감행하는 일도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이러한 일은 캄보디아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결국 1970년에 쿠테타가 발생하면서 그는 실각했다. 시하누크는 당시 쿠테타의 배후에 미국이 있음을 확신하면서, 중국의 후원을 촉구하면서 스스로 크메르루즈(Khmer Rouge) 반군과 동맹을 맺었다. 그의 참여로 인해 캄보디아 공산주의자들은 명분과 대중적 인기를 획득했다.
1975년 크메르루주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무자비한 폴 포트(Pol Pot)가 정권을 잡았다. 시하누크는 최초 1년간 명목상 국가수반을 하다가 왕궁 내에 가택연금을 당했고, 깊은 시름 속으로 바져들어갔다. 크메르루주는 4년 정도의 집권기간 동안 약 170만명 정도의 사람들이 사망하게 만들었고, 캄보디아를 거의 완전하게 파괴시켰다.
크메르루주와의 동맹에 대해, 시하누크의 일생 내내 비판이 따라다녔다. 이에 대해 시하누크는 자신의 정치적 삶에서 단 한가지 과정만을 추구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캄보디아] 독립과 영토 통합성, 국가 및 내 국민들의 존엄성을 수호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는 강대국들을 매우 솜씨좋게 다루곤 했다. 주로 중국의 후원을 받긴 했지만, 그는 자신의 정치적 운명 및 국가의 독립을 보장했다.
시하누크는 어떤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가장 최악의 악몽이 캄보디아 정계에서 소리없이 은퇴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1997년 프랑스 파리에서 모호하게 사망한 베트남의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Bao Dai)의 사례를 들었다. 시하누크는 1993년에 입헌 군주이자 국가수반으로 복귀했다. 그것은 유엔(UN)이 <1991년 파리평화협정> 체결을 후원하여 14년 동안의 내전을 종식하면서의 일이다.
시하누크 국왕은 심지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어두웠던 시절에도 화려함에 대한 멋부리기나 명품에 대한 취향을 바꾸지 않았다. 젊은 통치자이자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왕가의 후예답게, 시하누크는 플레이보이로서의 명성을 얻었고, 미식가이자 영화제작자로서도 명성을 었었다.
자신의 부인 노로돔 모니니엇(Norodom Monineath) 왕비와 함께 망명생황을 하는 동안, 그는 외국의 외교관들이나 관리들에게 샴페인을 곁들인 조찬이나 성대한 프랑스 요리를 화려하게 제공하면서, 자신이 이끄는 캄보디아 내 정치적 운동을 생동감있게 유지했다.
그는 정부 내의 요직들을 맡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를 국왕이라는 의례적 지위에 만족했지만, 여전히 많은 농민들에게서 숭앙을 받았다.
1993년 이후에도 그는 때때로 정치에 개입했다. 1993년 치뤄진 최초의 민주주의 총선에서 '푼신펙당'(Funcinpec)이 제1당이 되긴했지만, 시하누크는 자신의 장남인 푼신펙당 총재 노로돔 라나릿(Norodom Ranariddh) 왕자를 설득하여 훈센(Hun Sen)과 공동 총리를 맡도록 하기도 했다. 하지만 제2총리였던 훈센은 '1997년의 유혈 쿠테타'를 통해 제1총리였던 라나릿 왕자를 축출했고, 시하누크의 말년 수년 간에 걸쳐 캄보디아의 가장 지배적인 권력자가 되었다.
노로돔 시하누크는 1922년 10월 31일 프놈펜에서 태어났다. 캄보디아 왕실의 노로돔(Norodom) 분파 출신의 왕자로서, 그가 왕위를 물려받게 될 것이란 예상은 거의 없는 상태였다. 대신 그는 고독하거나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으로만 보였고, 최초에는 음악에 관한 진지한 재능을 보였고, 그리고 나중에는 영화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었다.
그는 프놈펜에서 프랑스식 초등교육을 받았고, 이후 사이공(Saigon: 현재의 호치민시)으로 가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지역 최대 명문학교였던 '리셰 샤슬루-로바'(Lycee Chasseloup-Laubat)에서 공부했다. 1941년 모니웡(Monivong) 국왕이 사망하자, 프랑스 식민당국은 예상을 뒤엎고 당시 18세였던 시하누크를 왕위에 앉혔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가 나치 독일에 항복하고 프랑스 본토에서 친-나치 성향의 비시(Vichy) 정권이 들어서자,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식민지를 일본에 빼앗길 것이란 우려가 증폭됐다. 그랬기에 프랑스 식민지 관료들은 시하누크가 자신들이 가장 다루기 쉬운 인물일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시하누크 국왕은 즉위 후 3년 정도는 참다운 친불파(Francophile)로서, 프랑스 관리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여파가 아시아에 깊은 영향을 미칭 무렵, 그는 프랑스 신민당국의 왕당파 파트너이기도 했지만, 일본과 공조하면서 유아기 상태에 있던 캄보디아 독립운동의 태동을 막아보려고 했다. 시하누크 국왕은 초년기에 행정부 일에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여성들을 편력했고, 선조들의 전통에 따라 여러 첩실들을 두면서 최소 13명 이상의 자녀를 두었다.
1945년 3월 전쟁에 패해가던 일본은 캄보디아에서 프랑스 세력을 축출하려고 했다. 시하누크 국왕은 일본 편에 붙어, 캄푸치아(Kampuchea)라는 새로운 국가의 독립을 선포했다. 하지만 일본이 패망하자, 시하누크는 독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많은 캄보디아인들의 의견을 묵살하면서, 프랑스의 복귀를 환영했다. 시하누크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1951년까지는 독립의 기치를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독립의 기치를 들게 된 것은 프랑스 식민주의 종식을 요구하는 민주주의자 및 공산주의자들의 도전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웃국가인 베트남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승리하고 프랑스 세력이 약화되는 기회의 이점을 활용하여, 시하누크는 <1954년의 제네바협정>을 앞둔 프랑스에게 캄보디아를 독립시켜줄 것을 설득했다. 당시의 제네바 협정은 베트남의 남북 분단을 가져왔었다.
이후 시하누크는 자신의 조국에서 최초의 독립성을 지닌 총선이 실시되자, 왕위를 포기하는 책략적 움직임을 보였다. 시하누크는 탄압과 계략, 그리고 자신을 아직도 '신왕'(god-king, 神王)이라 여기는 농민들의 표에 의지하여, 자신의 후견세력 정당인 성꿈 리어스 니욤(Sangkum Reastr Niyum: 대중 사회주의 공동체)의 압승을 이끌어냈다. 그는 캄보디아라는 국가의 개조에 착수했다.
그가 행한 정치는 기본적으로 일당 독재 체제였고, 일부 비판자들과 친여 야당들도 '성꿈 리어스 니욤'에 합류시키는 방식이었다. 새로운 '캄보디아 국기'에는 앙코르와트(Angkor Wat)의 탑신이 들어갔다. 시하누크는 앙코르 사원군을 캄보디아가 한때 역내의 강대국이자 문화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형상화시켜 보여주는 수단으로 사용했다.
시하누크는 프랑스와의 강력한 유대관계를 유지하면서, 프랑스 전문가들이 자신의 정부에서 일하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했고, 프랑스인 교사들은 학교에서 가르치도록 했다. 그는 프놈펜에 지식인들을 위한 교류의 장을 만들어 육성했지만, 농촌과 시골 지역은 그 자신의 생각에 따라 다소간 목가적인 상태로 남겨두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고통스런 가난이 존재하는 퇴보된 지역이었다.
전쟁 중이었던 동쪽의 이웃국가 베트남이나 현대적인 개발이 더디고 군사주의적 모습을 보이던 서쪽의 이웃국가 태국과 비교하여, 캄보디아는 1960년대에 각광받는 오아시스처럼 보였다. 시하누크 왕자(=공: 당시의 공식직함)은 매력적이고 자비심 많은 군주처럼 캄보디아를 통치했고, 자신의 백성들을 효성스런 자녀들처럼 취급했다.
하지만 이 기간 중에도, 그는 반대자들을 투옥시키고 때로는 처형하기도 했다. 또한 훗날 폴 포트가 되는 살롯 사(Solath Sar) 같은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포함한 여타 사람들은 도피나 망명을 하게 만들었고, 정치적 야당들의 성장 동력을 만들게 될 불만족을 양산하다, 결국은 무장 반군들까지 출현시켰다.
시하누크 국왕의 사치스러움에 관한 일화들은 외교가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특히 그가 자신이 최초로 사랑에 빠졌던 음악과 영화에 관해서는 더욱 더 그러했다. 그는 대규모 파티가 열어 손님들에게 직접 색소폰 연주를 들려주기도 했고, 자신이 직접 대본을 쓰고 감독하면서, 영화음악까지 작곡해 만든 영화를 19편이나 제작하기도 했다.
(동영상) 노로돔 시하누크 상왕의 노래하는 모습. <굿바이, 캄보디아>
캄보디아의 국가수반으로 재임하는 동안, 그는 베트남 전쟁 때문에 골치를 앓았다. 그는 인도나 이집트 같이 새롭게 독립을 쟁취한 국가들이 주도한 비동맹 운동의 지도자 중 한명이 되었다. 그것은 냉전의 세계질서 속에서 어느 한편에 가담하지 않고 빈곤으로부터 탈출하려는 바램에서 나온 노력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편으로 중국(=당시는 중공)이 내민 손을 받아들였다. 당시 중국은 미국이 자국 국경에 군사적 위협이 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복잡한 상황을 피하고자 하는 캄보디아의 바램이 확실하게 드러난 것은 1966년 프랑스의 샤를르 드골(Charles de Gaulle) 대통령이 프놈펜에서 행한 연설이었다. 드골은 베트남 전쟁의 종식과 인도차이나 지역의 중립을 촉구했다. 드골은 캄보디아와 프랑스가 동일하게 "영광과 슬픔의 역사적 짐을 지었고, 문화와 예술의 모범사례이며, 외침이 쉬운 국경선을 지닌 비옥한 땅"이라면서, 시하누크 국왕에게 궁극적인 찬사를 바쳤다. 하지만 캄보디아의 국경지대에는 곧 전쟁의 불길이 옮겨붙기 시작했다.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은 시하누크의 묵인 아래 캄보디아를 병참기지로 활용했다. 그러나 베트남의 군사활동 지역이 확장되자, 시하누크는 미국의 비밀폭격을 온건하게 반대하는 입장 정도만 견지했다. 미군의 캄보디아 영토에 대한 비밀공습 내용은 훗날 탄핵용 문서에는 적시됐지만, 리차드 닉슨(Richard M. Nixon) 대통령을 공격할 때는 사용되지 않았다.
(사진: AP) 노로돔 시하누크 국왕이 1968년 11월 9일 캄보디아의 독립 제15주년 기념행사에서 외빈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캄보디아의 불안정이 증가했지만, 시하누크는 1970년의 쿠테타에 대해 대처하지는 않았다. 1970년의 무혈 쿠테타는 시하누크의 사촌이었던 시소왓 시릭 마딱(Sisowath Sirik Matak: 1914~1975) 왕자와 론 놀(Lon Nol) 장군이 주도한 것으로서, 미국 정부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쿠테타 이후 들어선 새로운 정권은 베트남에 있던 미군이 캄보디아를 침공하는 일을 즉시로 허용했다. 미군의 캄보디아 침공은 전세계적인 항의시위를 촉발시켰다. 오하이오 주의 '켄트 주립대학'(Kent State University)에서도 시위가 발생했는데, 이곳에서 방위군 병력이 대학생 4명을 살해하기도 했다.
외유 중 실각당한 시하누크는 중국의 베이징으로 향했다. 중국의 지도부는 시하누크를 설득하여 폴 포트가 이끄는 크메르루주 공산 반군들과 동맹을 맺도록 설득했다. 크메르루주는 1960년대부터 시하누크 정권의 전복을 기도하는 세력이었다. 시하누크는 재임 시절 크메르루주들을 공세적으로 추격했고, 때로는 그들을 고문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시하누크는 쿠테타 세력의 배신에 깊은 상처를 받은 나머지, 결국은 크메르루주를 중심으로 하는 반군 세력의 수반 자리를 맡기로 허락했다.
이제 공산 반군들이 농민들을 모병하는 홍보영화와 팜플렛에 시하누크의 이름과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외교가에서도 이들 반군은 존중받을만한 명분을 획득했다. 시하누크 국왕은 마침내 폴 포트가 권력을 잡는 데 도움을 주게 되었다.
1975년 4월 정권을 잡은 크메르루주는 곧 테러 통치를 시작했다. 도시에 거주하던 모든 캄보디아인들은 소개령을 받았고, 시골지역의 가혹한 강제노동 수용소나 집단농장으로 보내졌다. 캄보디아는 세계의 모든 다른 지역들로부터 차단됐다. 사회는 파괴되었고, 모든 종교와 전문가들이 불법으로 치부됐다. 지식인과 승려들, 그리고 '반동'(정치적 적)으로 규정된 모든 이들이 살해됐다. 수많은 사람들이 간단히 치료받을 수 있는 질병들로도 사망했고, 과로와 굶주림 때문에도 사망했다.
시하누크 국왕은 크메르루주 정권의 최초 1년간 명목상의 국가원수였다. 그 자신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1년 후에 사임한 후 자신의 처인 모니크(Monique: 모니니엇 왕후의 본명)와 함께 왕궁 내에 가택연금됐다고 한다. 그는 당시 라디오를 통해 국제 뉴스들을 접했고, 때로는 자살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고 한다.
시하누크가 구출된 것은 1978년 12월, '베트남 군대가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1979년 1월에 크메르루주 정권을 붕괴시킨 때였다. 하지만 그는 폴 포트에 대해 공격하기보다는, 유엔으로 건너가 자신을 변론하면서, 캄보디아의 적은 베트남이라고 말했다.
시하누크는 이후 12년간 존경받는 인물로서 크메르루주의 치부를 가려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크메르루주는 반공 성향의 여타 반군들과 함께 '캄푸치아 민족통일 왕국정부'(GRUNK)라는 깃발 아래, 캄보디아에서 베트남 군대를 축출하는 싸움을 전개했다. 미국, 중국, 아세안(ASEAN: 동남아시아 국가연합, 당시는 5개국)은 시하누크 국왕을 지지했고, 시하누크 자신도 최종적인 협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반면, 시하누크의 연합세력에 대항하는 이들은 베트남의 점령 하에 수립된 훈센(Hun Sen) 등이 주도한 정권이었고, 이들을 지원한 것은 베트남과 구-소련(=러시아)이었다.
냉전체제가 붕괴하자, 캄보디아는 더 이상 강대국 정치의 볼모로 사로잡혀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유엔은 협상을 중재하여 1991년에 캄보디아 내전은 종식됐다. 그리고 2년 후인 1993년에 최초의 총선이 실시됐다. 시하누크 국왕도 프놈펜에 귀국하여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고, 그러한 환영은 그 자신으로 하여금 자신이 다시 한번 강력한 국가수반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심지어는 시하누크의 자녀들까지 포함한 여타 정치인들은 다시금 시하누크의 통치가 복원되길 바라지 않았다.
최초의 총선에서는 그의 장남 노로돔 라나릿 왕자가 이끈 '푼신펙당'이 제1당을 차지했다. 반면 훈센의 '캄보디아 인민당'(CPP)은 제2당이 되었으며, 크메르루주는 총선을 거부하고 불참했다. 훈센은 선거 패배에 화가 났고, 훈센과 그 대리인들은 다시금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며 위협했다. 그러자 시하누크 국왕이 나서서 유엔으로 하여금 훈센을 위한 공동총리직을 만들자고 설득했고, 이러한 일은 결국 그의 아들인 라나릿 왕자의 선거 승리를 효과적으로 무효화시키는 셈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시하누크는 다시금 왕위에 복위했고, 자신의 여생을 '상왕'으로서 보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언쟁을 초월했다고 주장하면서, 이웃인 태국의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국왕을 본따 국가통합자로서의 역할을 시도했다. 하지만 시하누크는 대부분의 경우 그의 정치적 아들이라고도 할 수 있는 훈센의 편에 섰다.
시하누크 국왕은 말년에 이르자, 떠들석한 방문 계획들도 줄였고, 아시아 바깥으로 나가는 경우도 거의 드물었다. 중국 정부가 그를 위해 베이징에 마련해준 저택에 머무는 것이 그의 가장 큰 일정이었다.
'런던 정경대학'(London School of Economics) 소속 동남아시아 전문가로서 지난 2001년에 사망한 마이클 레이퍼(Michael Leifer) 교수는 시하누크를 "국가단결의 원천"이라고 여러 번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시하누크의 강력한 신화는 캄보디아 국민들과 국제사회에 이바지했다. 하지만 이 남성에 관한 기록은통치(ruling)보다는 군림(reigning)에 더 많은 내용을 시사할 것이다. 그는 정부의 바람직한 실천보다는 정부의 외관과 환경에 대해 더 많은 근거를 두었다."
첫댓글 정리하자면..
예술적 재능을 지닌 무자비한 마초 독재자 출신으로 젊은 시절을 보낸
인자한 할아버지께서 사망...
정도 될려나요..
하여간 인생을 이해하려면
좌우당간 오래 살고 볼 일인 것 같습니다..
짧게 살면 정체성이 너무 단순하게 끝나는 거 아닌가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