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한풀이하려고 참가한 공연이었습니다............
에구
억울해랑...........소리를 입에 달고 다녔는데........
-쉬는 날 없지요(국경일, 일요일, 주 5일제 토요일 다 연습합니다.)
-추석 날 하루 쉬게 해 주시더군요.............
-연극이 보는 것은 쉬워도 하는 것은 엄청 스트레스랍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서 무대에 서 있어야 하니까요.
아무튼 일단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굳닥터 공연이 무슨 의미였는 지 이야기 하지요
92년 대학 무대에 [수업료를 돌려 주세요]로 처음 선 이래
다행이도 군에서 까지 인연이 되어서 무대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천으로 와서 2000년 당시 용마초등학교 임 육선생님을 통해
교사 극회를 소개 받고 들어 가서
아동극[동네북] 연출하고
그해 가을에 수봉산 문화회관에서[마이컬의 소세계]를 공연했지요...........
그 다음해 아동극 [보물 자전거] 를 연출하고
[가시고기]를 관교동 문예회관과 서구 문화회관에서 두 차례 공연하고
그 다음해 아동극 [울 줄 모르는 고양이] 연출하고
1학기에 [굳닥터]를 수봉 문화회관에서 공연하고
2학기에 해와달과 별이라는 작품을 수봉 문화회관에서 1번, 관교동 문예회관에서 한번
그렇게 2회 공연을 했습니다.
그 해가 바로 2002년 월드컵이 열리던 해였습니다............
아내는 한번의 유산을 하고 다시 지금의 정민이를 임신하고 있었고
남편은 1년 내내 아동극에 연극에 미쳐 있었구요............
-막판에는 학교에서 서구 문화 회관을 빌려 학예회를 크게 하는 바람에
[울 줄 모르는 고양이] 공연을 다시 준비해야 했자요
2002년 아동극 공연 2번에 성인극 공연 3번 .......................
게다가 굳닥터 공연하던 6월에는 모든 국민의 관심이 월드컵에 가 있어서
관객 오기가 쉽지 않았죠............
정말 고생만 엄청 하고 실패한 공연이 굳닥터입니다.................
특히 연습 장소가 없어서동구 송림동 이흥우 치과 지하 창고에서 연습을 하는데
비만 오면 습기차고 곰팡이 생겨서
배우들이 목에 염증 하나씩 달고 연습하던 시절이었습니다.
5년 만에 다시 공연하는데..........
그 때 재치기에 나오던 대머리 장관님은 연출을 하시고
작가를 하시던 임 육 선생님은 심곡으로 가셔서 남편으로 나오고
남편을 하던 이중구는 다시 용마로 와서 작가로 나왔지요
-기분 묘하더군요................
나머지 배우는 모두 신인이었답니다.
단, 재치기에서 장관을 하셨던 김민환 선배님은
93년인가 에 [팽]이라는 작품을 하신 적이 있지만
그래도 연극이라는 것이 10여년을 쉬면 감각이 많이 없지요
-아무튼 신인들이 모여서 만든 무대치고는 나름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께서 매우 열정적인 무대를 보셨다면
신인들이 많아서 정말 의욕이 넘쳐서 그런 것이고
좀 아쉬우셨다면 경험 많은 노련한 배우가 적어서 생긴 일이겠거니 하시면 됩니다.
여기서 잠깐 교사극회의 강점
-배우들이 다 교사이다.............
-입장료 안받고도 월급 모아서 공연이 가능하다
교사극회의 약점
-배우들이 다 교사이다.............
-학교에서 이번에 학교 평가에 학예회에 무슨 보고회에 난리도 아니게 바빴다.
아무튼 첫번째 굳닥터는 제가 교사극회 들어와서 3번째 공연했던 작품이고
-농담처럼 선배가 너 연극 한 두번 해 보냐 ? 하시면
-이번이 3번짼데요? 하고 대꾸 하다가 맞았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는 작품이고
-연습장이 없어서 배우들 목이 다 나가던 상황에
-아동극 하랴/ 굳닥터 하랴 정신없이 했는데
-월드컵 열풍에 날려서 썰렁해진 무대를 뒤로하고 내려 와야 했던.............
아무튼 그렇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아내에게 제일 미안한 순간이었지요................
그리고 5년 뒤 용마 초등학교로 왔습니다..............
용마 초등학교를 떠나기 전에 했던 굳 닥터를 이번에는 돌아온 데뷔작으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