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 8. 22 - 23(1박 2일) 새벽부터 빗방울이 차 앞 유리창에 흘러내렸다. 은경언니집 앞마당에 새벽 6시 30분 집결, 장비 정검을 마치고, 회원들 중 가장 가는(?)과 가장 짧은(?)회원 둘이서 운전대를 잡아 가장 굵은과 무거운 회원들을 싣고 먼길을 떠났다. 송구스럽게시리 ...... !
베스트드라이버답게 쌩쌩, 그렇지만 아주 모범적으로 우리 모두는 순식간에 옥산 휴게소에 내려져 김치전골과 순두부찌개에 싸온 아침밥을 펼쳐놓고 식사도 하고 따끈한 자판기 커피를 목으로 넘기며 지리산 산행 계획을 확인했다.
비가 많이 오지 않는다면 오늘은 장터목산장까지만 가고, 내일 천왕봉을 거쳐 내려오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비오는 날씨라서 천왕봉의 일출을 보기 어려울 것이고, 출발 시각도 늦어졌고(숙희씨 전철 시간이 안 맞아 좀 늦게 도착-고생이 많았음), 무엇보다도 여유롭게 산행을 하기 위해서였다.
경부고속도로 비룡에서 대전 통영간 고속도로 접어들어 산청을 지나 단성으로 빠져나와 지리산 중산리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지붕이 튼실했던 주차장 아래에서 배낭의 만만치 않은 무게에 놀라 이것 저것 빼보고, 산에서만 꼭 필요한 최소한 것들만 배낭에 챙기고, 무릎보호대도 하고 1인용매트를 배낭에 매달고 판초를 꺼내 입었다.
이슬비 뿌리는 하늘을 원망스럽게, 아니 입산통제나 내리지 않을까 걱정하며 매표소로 향했다. 다행히 통제는 하지 않았지만 내리는 비가 한참 오래 전 설악산 대청봉 등반의 악몽을 생각나게도 했다. 이번 철저준비의 여왕님 은경언니 챙겨 주신 봉지(무주표미숫가루, 왕초코렡, 꼬부랑 글씨쓰여진 처음 먹어본 영양식과자, 맥심온커피믹스, 냉커피믹스 등)1봉지씩도 배낭에 넣었다.
은경언니 왈 ‘내가 가는 곳은 비가 쏟아지다가도 그쳐준다’는 말을 믿고 아니 그 기’를 믿으며 산행을 시작했다. 장터목 5.4km 이정표를 읽으며, 큰비는 아니어서 계곡쪽 코스로 향했다. 둘둘 말아 배낭 뒤에 매단 매트 위에 판초를 걸치니 잘 고정 안 되어 움직이는 통에 세워지기도 옆으로 쓰러지기도 해서 그 모습이 아이 업은 엄마들이었다. 얼마를 지나니 입었던 판초 덕에 후끈후끈 덥고 답답하고 판초 속으로 흐르는 땀을 주체하기 어려워 차라리 비를 맞으며 가는 것이 옷이 덜 젖겠다는 생각을 했다. 땀순이 원(은경) 땀순이 투(명숙)은 우비도 벗어버리고 씩씩하게 비 맞으며, 올라갔다.
천왕봉 가장 단거리답게 급경사로 이루어진 길의 연속이다. 등산스틱에 몸을 의지하고 뚱뚱 배낭이 어깨를 짓누르는 아픔을 느끼며... 하지만 우리들 배낭 두 배의 크기에 김치랑 고기랑 코펠, 버너까지 넣은 홍대장 앞에서 우리 모두들은 인내력을 기르고 있었다. 비 온 후에도 계곡의 물들은 신기하리라 만큼 맑고 투명했다.
깊은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산을 울리고 나무들을 흔든다. ‘2005지리산결사대’답게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수리산에서 우천시 산행 훈련을 해서인지 질퍽거리는 길도, 미끄러운 바윗돌 길도 씩씩하게 잘 들 걸었다. 유일하게 지리산을 함께 하지 못한 경복씨를 가장 많이 생각하며, 아니 아쉬워하면서 우린 가쁜 숨을 고르고, 웅장한 지리산의 모습에 감탄의 환성을 지르며, 셔터도 열심히 누르면서 지리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는 젊은 커플, 어린 학생들, 중풍으로 몸이 불편해 보이는 할아버지까지 지나치면서 모두가 아름답다는 생각과, 멋지다는 생각과, 부럽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턱까지 차 오르는 숨가쁨 속에서 칼바위도 보고 법천폭포 유암폭포의 멋짐 앞에서 감탄사를 연발하며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향했다.
참외도 깎아 입에 넣고 사과 오이로 마른 목을 축이면서. 참! 사과 한 개는 지리산 계곡에 적선도 했었지! 보일 듯 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하늘이 그리워 질 때 홍대장은 걸음을 재촉했다. 장터목에 빨리 올라 짐 내려놓고 다시 내려와 배낭을 메어주겠다고.... 지쳐있는 우리를 위해 바람처럼 사라졌다. 5년 전 벽소령산장 잠자리 확보를 한다며 땅거미 지던 산길을 먼저 달려갔던 때처럼...... 대단한 홍대장! 이어 경희, 숙희도 저녁밥을 빨리 짓기 위해(? !) 발걸음을 빨리했다.
밥 맛있게 지어 놓으라는 소리를 뒤로하고 앞서가는 모습을 여유롭게 올려다보며, 은경 운하 명숙은 천천히 우아하고 충분하게 지리산에 심취하고 있었다. 대단한 은경 언니를 칭찬하고 격려하는 운하!(꼭, 딸에게 하는 양!) 턱까지의 숨가쁨을 달래며, 터질 듯한 심장의 고동을 느끼며, 한 발 한 발 돌 경사길을 오르고 있을 때 초록 빛 나무 사이로 홍대장이 올려다 보였다. 날렵히 뛰어 내려와 은경 언니의 배낭을 짊어졌다. 길 잃어버렸을 때 엄마 찾은 아이 마냥 은경 언니는 너무 반가와 했다.
역시 우리의 믿음직스런 홍대장! 잠시 후 드디어 장터목의 발전기 소리가 먼저 우릴 맞는다 낯익은 갈색의 지붕도 보이고 지친 몸을 반겨 주는 포근함이 우릴 행복하게 했다. 산장 아래의 샘물에서 화끈대는 얼굴도 식히고 부은 손도 씻고 얼음같이 찬, 물 적신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땅거미 지는 산장에 올랐다. 체력의 한계에까지 도달했던 은경 언니는 3통이나 되는 무거운 물을 떠 들고 올라갔다.
왜? 맛있는 저녁밥도 짓고 우리 모두에게 커피물도 제공해야하니까. 대단한 은경 언니! (은경 언니가 떠온 3병이 아닌 3통의 물을 강조해야 해! 왜? 숨 한번 제대로 쉬기 힘들도록 지친 상황의 은경 언니 저력을 보여줬고, 언니가 꼭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으니까. ㅎㅎ) 예약은 하지 않았지만 고마운 비(땀을 덜 흘릴 수는 있었지)온 날씨 덕분에 산장 여분의 자리는 있었다.
경로 규칙에 따라 배정되었는데 우린 은경 언니 덕에 영순위였다. 하긴 40대도 우리뿐이었지만... 여자 방 2층에 매트를 깔아 놓고 젖은 옷 때문에 한기까지 느껴져 냄새 향기로운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 취사장으로 향했다.(예전과 다르게 화장실이 숙소에 연결되어 있었다. 5년 전 멀리 떨어져 있던 불편했던 화장실 생각도 하고) 질퍽이며 계속되는 비 때문에 밖에서 취사를 할 수 없어 안은 매우 복잡했다.
맛있는 삽겹살도 노릇노릇 굽고 맛깔스런 김치와 깻잎, 매실, 마늘, 오이 장아치들, 멸치볶음, 구운김, 회장님 하사품 김장아치까지 푸짐히 또 정신없이 따끈한 밥과 포식을 했다. 취사장 안에 풍기는 화려한 냄새들, 연기들... 뒷팀의 참치라면잡탕밥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카레냄새와 이런저런 화려한 냄새들이 가득했다.
앞쪽에 있는 젊은이들에게 구워 놓은 삼겹살도 권했었지만 회장님 없는 우리는 우리끼리 조용히 밥만 먹은 것 같다. 한잔의 반주(?)도 빠지고... 회장님 있었으면 이 곳 다 평정하며 밥 짓는 것 도와주고 주먹밥도 만들어 주고, 이 모두를 관장했을터인데..... 동구 유럽에서 재미없어 할(우리들 생각으론) 회장님 생각도 하고 ... 또 인숙 언니 없는 밥상은 된장찌개가 없더라구요! 코펠에 끓인 커피믹스, 밥 사발에 나눠 마시고 화장지로 설거지를 끝냈다. 옆 팀은 비닐 팩 씌운 그릇에 밥을 먹으며 설거지를 마친다. 새로운 아이디어라 생각했다.
저녁 8시 30분이 넘어 정리가 끝났는데 9시에 산장 소등이란다. 오늘만은 새나라의 어린이가 되어보기 위해 열심히 업고 온 매트를 깔고 대여한 담요를 덮었다. 올라오느랴 힘들었다며 아픈 다리를 앞에 내미는 숙희와 명숙의 무릎에 운하는 매직테이프도 붙여주고, 올라올 때 쐐기에 쏘인 운하는 은경언니 이상한 약도 바르고, 우리 모두는 오늘 산행의 마무리를 위해 키위도 깎아먹고 아로나민골드도 한알씩 삼켰다. 오늘의 피곤이 싹 풀려라 주문을 외우면서 또, 내일의 천왕봉을 기대하면서.
9시에 누웠지만 뒤척이기만 하고 10시가 넘어도 잠이 오지 않는다. 피곤함 때문인지, 저녁 늦게 마신 커피 덕인지, 후끈대는 2층 방 공기 때문인지, 일찍 자는 것이 습관이 안되어서인지 잠이 안 온다. 깜깜한 건너편 랜턴 아래 앉아 옹기종기 젊은이들 대 여섯이 계속 소근대는 소리 귀에 거슬려 한참 참다 훈계(?)도 했다. 말이 훈계지 혼날까 두려워 나도 소근소근, 초등1학년 아이 다루 듯 “이 곳은 여러 사람이 함께 자는 곳, 여기서는 잠 잘 때 함께 자는 거랍니다. 그래야 내일 멋진 산행을 하죠! 새벽 일출 봐야죠?” 듣고도 계속 속닥속닥이다.
할 수 없이 또 벌떡 일어났다. 혼자 밖으로 나갔다. 상쾌한 밤바람이 좋았다. 아직도 비는 주룩거리고, 밖의 취사장 앞엔 몇 팀의 젊은이들이 둥글게 앉아 고기 구워 놓고 이야기가 만발했다. 젊음이 부럽다. 그리고 멋졌다. 찬 바람이 몸을 엄습해 다시 들어와 매트에 누웠다. 모두가 뒤척뒤척이다. 내일을 위해 잠을 자야하는데..
자다 깨다 반복하며 새벽 4시경 일출팀들의 움직임에 일어났다. 다행히 비는 개었지만 흐린 날씨에 천왕봉 일출은 계획대로 생략했다. 화장실을 다녀오다 아직 어두운 백무동쪽의 운해에 함성을 질렀다. 바로 이거야! 커다란 빙벽 같기도 하고, 어둠 속에서도 눈부시도록 흰색의 솜이불이 발 아래에 끝없이 펼쳐진다.
붉은 햇살이 퍼지며 멀리 보이는 능선과 골짜기들과 어우러져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형상을 이룬다. 새벽에 겨우 잠든 경희씨까지 어느 새 지리산의 운해에 취해 있었다. 씻은 쌀을 버너에 올리고, 밥 뜸 드는 동안 우린 열심히 장터목 주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하염없이 바라보던 서쪽 하늘이 점점 붉게 물들을 때 정상에 올랐던 사람들이 내려오고, 세석 산장에서 새벽 출발한 사람들까지 모여 장터목이 북적거렸다.
컵 라면 2개에 김치 넣고 풋고추 북북 찢어 넣어 끓인 따뜻하고 얼큰한 국물에 밥 말아 장조림과 콩자반를 올려 아침을 했다. 초이스가 아닌 맥심 커피도 한잔하고 참외로 디져트까지... 훌륭한 아침을 마치고 천왕봉으로 향했다.
5년 전 랜턴 불빛에 의지해 일출을 만나기 위해 숨가쁘게 올랐던 그 길을 아침 햇살 받으며 여유롭게 오르니 그 멋이 또 색다르다. 은경 언니의 기를 받아서인지 날씨는 어느 새 쾌청하게 맑아 하늘은 가을의 빛을 발한다.
장터목과 천왕봉 사이의 제석봉의 여름은 푸르름이 가득했고 가는 길이, 소담한 시골집 정원 마냥 아늑함이 가득하다. 활짝 핀 구절초 사이로 고개를 떨군 연보랏빛 야생화 모습이 우리들의 눈길을 잡고, 까마득히 내려다보이는 중산리의 모습도, 봉우리 사이의 바윗돌 사이로 떠다니는 구름과 산 안개들도 우리 모두를 흥분 속에 몰아 넣고. 순간순간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모습의 연속이었다.
산만 멋진 것이 아니었는지 재잘거리며 올라오는 우리를 앞에서 바라보던 사진 작가인 듯한 중후한 남자와 젊은이들이 우릴 잡았다. 1m 간격으로 자연스럽게 걸어달라나?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열심히 우리들의 움직임을 담아 졸지에 우리 모두는 산행모델이 되었다. 다른 팀들과 달리 화사한 옷차림과 활기찬 표정과 움직임, 무엇보다 히말리아도 오를 장비가 매달려 있는 배낭이 제석봉의 산길과 어울려져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홍대장의 메일주소를 남겨 사진 날려달라 부탁하고 떠나는데 돌아보니 뒷모습까지 계속 찍고 있었다.
세찬 바람을 헤치고 우린 고대하던 천왕봉을 만났다. 천왕봉 1915에서 사진도 찍고, 옆 중봉과 멀리 보일 벽소령, 세석, 반야봉 노고단을 그려보며 우리모두 가슴 뿌듯해했다. “감동으로 눈물까지 날려고 해!” 누구는 그런 말도 남겼다. 내려와 양갱, 초코렛을 녹여 먹으며 하산 길로 접어들었다.
법계사 쪽의 길은 더욱 가파로왔고 돌계단과 철계단이 가끔 이어지는 험한 길이었다. 하산 길을 이쪽으로 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조심조심 내려셨다. 로타리 대피소의 샘물 부은 패트병에 미숫가루 젓가락으로 쑤셔 넣고 커피 한봉지 넣어 흔들어 허기를 달래며(은경언니 준비해준 비상식을 운하, 정남, 숙희는 차에 두고 왔다나! ㅉㅉ)여유롭게 하산했다.
몇 년 후의 언니들의 회갑은 세석산장에서 해야한다는 계획을, 또 세 닭들의 환갑은 또 다른 산장에서, 막내들의 환갑은 비행기를 타고 가서(언니들이 너무 힘이 없어져 높은 산은 어려울까봐)땅 위에서 해야 한다는 원대한 계획도 세웠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우린 건강해야 한다고 합창도 하고. 아침 장터목을 출발하여 호락호락하지 않은 산길을 우린 무사히 내려와 중산리 입구의 식당에 자리했다. 다른 사람들은 3-4시간이면 충분하다는 이 길을 우린 거의 두 배의 시간을 투자했다. 멋진 곳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사진을 찍고, 보고 싶은 곳은 내려가서라도 보고 충분히 느끼면서 한 산행이었기 때문이었다. 잊혀질까 아쉬운, 내려오기 아까운 풍광들을 가슴에 깊이 간직해, 두고두고 음미하기 위해서!
무사산행을 자축하며, 천왕봉 정복 기념 도토리무침과 막걸리, 산채비빔밥을 은경 언니가 사셨다. 우리 모두 축하의 함성과 훗날의 멋진 계획을 기대하면서 막걸리잔을 부딪히기도......
끈적거리는 머리와 몸을 산청의 작고 소박한 시골 목욕탕에 담그고 근육을 푼 후 귀가 길을 서둘렀다. 한가했던 고속도로를 달려 인삼랜드 휴게소에서 인삼차도 마시고 인삼호도과자도 사고, 은경언니네집 주차장에 10시 넘어 도착했다.
장터목을 둘러 싼 운해가 붉음으로 물들어 가던 모습과. 멀리 보이던 능선들이 끝 닿는 곳에 떠 돌던 구름들, 어둠 속에 아련하던 산장불빛, 이번의 지리산은 비온 후의 아침 청명함과 아울러 멀리 보이는 시야까지 선사했었다. 아득히 내려다 보이던 섬진강 줄기와 이름 모를 봉우리들과 계곡들, 졸졸거리기도, 우렁차게 쏟아지기도 하던 물줄기, 끝닿음이 없을 것 같은 산줄기. 제석봉의 이름 모를 야생화가 피어 있는 예쁜 길들과 고사목 즐비한 산등성이, 그런 지리산 속에서 걷는 것만으로도 한없이 행복했었다.
내 튼튼한 두 다리가 있는 한 지리산을 또 걷고 싶다. 모두가 그럴 것이다. 이제 또 다시 새로운 날들의 시작이다. 또 다른 추억을 기다립니다. 모든 회원님들 건강합시다. 축제의 세석산장을 기대하면서...... 은경언니의 초대장은 벌써 받았지요? 가슴 저린 아침입니다. 명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