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
다산초당茶山艸堂,백련사白蓮寺 차향
-다산유물전시관,다산오솔길
1)다산유물전시관
정다산유적丁茶山遺蹟은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에 있다. 조선시대의 실학자 정약용이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던 곳이다. 정약용은 이곳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다른 한편으로는 『목민심서』『흠흠신서』『경세유표』 등 5백여 권에 이르는 책을 저술하였다.다산정약용茶山丁若鏞은 1762년 경기 광주~ 1836년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다.
다산유물전시관 전경
다산초당茶山艸堂은 다산 정약용 선생이 1년의 강진 유배생활 중 10년간의 안식처가 되었고『목민심서』등 여러 저서를 집필했던 곳이다.다산초당을 방문하면 대부분 어라? 초당이 기와집? 하고 어아해 한다.1957년강진다산유적보존회에서 허물어진 초가를 대신 정면 3칸,측면 1칸의 기와집으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데,다시 초가로 복원할 수 없을까?
다산 정약용 선생상과 다산의 집필실
다산의 저서는 『목민심서』『경세유포』『흠흠신서』『기증도설』『화성성역의궤』가 있는데,위의 그림은 수원성(화성)준공 후 정조대왕의 공사보고서 지시에 따라 5년후 다산에 의해,유려한 활자,상세한 그림자료,수준 높은 인쇄술로『화성성역의궤』가 발간된다.
다산의 육필 자료들
翩翩飛鳥 息我庭梅(편편비조 식아정매) /有烈其芳 惠然其來(유열기방 혜연기래) 爰止爰棲 樂爾家室(원지원서 낙이가실) /華之其榮 有蕡其實(화지기영 유분기실) 펄펄 나는 저 새 우리 집 매화가지에 쉬는구나./꽃다운 그 향기 짙기도 하여 즐거이 놀려고 찾아왔도다. /이렇게 이르러 둥지를 틀고 네 집을 즐겁게 하라./꽃이 벌서 다 피었으니 열매도 많이 열리리로다.
余謫居康津之越數年 /洪夫人寄敞裙六幅 /歲久紅 剪之爲四帖 /以遺二子 用其餘 爲小障 以遺女兒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 한지 여러 해가 지났을 때 /부인 홍씨가 헌 치마 여섯 폭을 보내왔다./세월이 오래되어 붉은 빛이 바랬기에 잘라 네 첩을 만들어/두 아들에게 주고 그 나머지로 족자를 만들어 딸에게 남긴다.
가경 18년 계유년(1813년) 7월 14일 열수洌水 늙은이 다산의 동암에서 쓴다.
2)다산초당茶山艸堂
조선시대의 실학자이자 정치가였던 다산 정약용丁若鏞 선생이 강진 유배생활 중 ‘목민심서’ 등 불후의 명저를 저술한 다산초당.다산 정약용 선생이 위대한 까닭은 가난한 백성을 사랑하고 민생을 먼저 보살폈다는 데에 있고, 위정자로서의 본질을 잃지 않는 삶의 자세를 보여준 데에 있다.
다산유물전시관에서 다산초당 가는 길의 두충나무숲길
노린재나무는 꽃을 피우고
다산초당 가는 길의 뿌리의 길
다산초당茶山艸堂의 구성 1)서암 2)다산초당 3)동암 4)천일각 /다산초당에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손길이 그대로 느켜지는 다산사경이 있다.①'정석丁石'바위는초당서편 뒷쪽에 해배解配를 앞두고 발자취를 남기려 직접 글씨를 새긴 정석丁石바위이다.②다조茶曹는 마당앞에 있는데,'차를 끓이는 부뚜막'이란 뜻이다.③약천藥泉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초당 뒷편에 있는 샘인데 선생께서 직접 수맥을 잡아 만들었다.④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은 초당 옆에 있는 작은 연못이다.1808년 봄,다산 선생게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바닷가의 돌을 가져다가 만들었는데, 백련을 심고 잉어를 길렷다.
[다산초당茶山艸堂] 다산 정약용 선생이『목민심서』등 600여권의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곳이다.초당 좌우에는 동암과 서암이 있다.다산은 유배중 1808년 봄부터 유배가 끝난 1818년까지 10년간 초당에 물렀다.
초당 왼편 처마밑에는 약천藥泉이라고 하는 샘이 있다.다산선생이 직접파서 만든샘으로 초당마당의 평평한 돌 '다조'에서,청동화로에 약천물을 붓고 솔방울로 불을 지펴 차를 끓여 마시던 샘이라는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다산초당에서 조관선 소설가,심동석 시인,강복순 여사,정금자 여사,김일두 시인,김진광 시인.다산초당 현판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친필을 집자해서 모각한 작품이다.
동암에서 조금 올라가면 천일각天一閣 있는데,흑산도로 유배간 둘째 형 정약전을 그리며 스산한
심회를 달래던 곳의 정자이다.날씨가 좋으면 강진만 너머 완도쪽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3)백련사 가는 통로 800m 다산오솔길
동암에서 천일각에 이르기전 왼편으로 나 있는 길은 백련사 가는 다산오솔길이다.유배생활 동안 벗이자 스승이요 제자였던 혜장선사와 다산을 이어주는 통로였다. 이 길 800m는 야생차군락과 동백숲을 만날수 있는 백련사와 정약용이 기거했던 다산초당을 잇는 詩가 떠오르는 조붓한 오솔길이다. 다산과 혜장의 이야기를 모른 채, 백련사로 가는 오솔길을 걸으면 그 길은 그저 호젓한 산길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길은 조선 최고의 선비 다산과 당대의 학승 혜장이 교유하던 유·불의 경계를 뛰어넘는 길이자 다산의 여러 사상이 완성된 다산철학의 길이다. 다산과 혜장스님이 함께 이 길을 걸으며 시류를 얘기하고 학문을 논하며 우정을 나누던 길이었다. 다산이 유배지에 있을 때 혜장선사는 술병으로 세상을 하직한다.
4)백련사白蓮寺 차향
백련사의 원래 이름은 만덕사이다. 1211년에 원묘국사 요세스님이 옛터에 중칭하고 백련결사로 크게 이름을 날려 백련사로 불리우게 되었다. 고려 후기 정치와 종교가 제 기능을 상실한 채 몽고와 왜군의 침략으로 살육과 눈물로 점철된 고난의 시대에 요세스님은 어둠의 한 가운데서 온 몸으로 희망을 말하고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여주는 결사운동을 벌인다. 이렇게 태동된 백련결사는 삶속에서 만중들과 함께 참회와 염불수행을 통해 현세를 정토로 만들자는 최초의 민간 결사 운동이였다.
백련사 옆 다산초당에 적거했던 다산 정약용 선생은 백련사에 자주 들러 아암 혜장 선사와 교류 차를 마시며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한다.
백련사의 압권은 만경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강진만 앞 바다의 전경이다. 800m 다산오솔길을 걸어 왔는데,'백련다원'은 우리가 늦게와 문은 잠겼다.200여년전 다산 선생과 헤장 선사의 시류담과 철학과 차향을 음미하려 했는데, 백련사와 강진만의 풍경 안에서 세상의 무상속 깨닮음을 읽고 있는 정연휘 시인,심동석 시인,강복순 여사,김진광 시인, 정금자 여사이다.
백련사의 연등
백련사 경내를 산책하는 조관선 소설가와 여행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