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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시 42:1-5)
할렐루야! 이 시간 하나님께 예배드리고자,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주의 전에 나온 여러분 모두를 주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축복합니다.
남은 생애,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감으로, 좋은 일들만을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지난 주일에는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오늘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고린도전서 13:12-13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아멘.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게 본다”
우리의 앞날을 모두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어떻게 될지를 알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자녀들 ,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게 될 지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지금은 힘들고 어렵더라도 조금만 더 가면, 조금만 더 참으면, 밝은 내일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는 내일을 모릅니다. 내일만 모릅니까? 당장 5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조차도 모릅니다. 한 마디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달려가지만, 불확실한 내일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돌아오는 27일 토요일부터 9월 4일까지, 대구에서 제13회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열립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 자메이카의 ‘우사인 볼트’도 이미 입국했습니다. 우사인 볼트의 별명은 ‘라이트닝 볼트’입니다. 한 마디로 번개처럼 빠르다는 것입니다. 100m를 9초 58에 달립니다. 우사인 볼트와 우리가 나란히 서서, 달리기를 하면, 볼트가 100m 결승선을 통과할 때, 우리는 50m 정도 겨우 달리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빠르다 할지라도, 지그재그로 달리면, 정확한 목표점이 없으면, 헛수고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13-14절에서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말했습니다.
불확실한 세상입니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세상입니다. 내 맘대로 되지 않는 세상입니다. 아무리 계획을 잘 세운다 할지라도, 그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세상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재미있는 세상인줄도 모릅니다. 모든 것이 계획한 대로, 이루어진다면, 가만히 앉아서, 계획하기만 되면 되기 때문에, 재미가 없습니다.
여러분! 축구 좋아하십니까? 제가 아는 어느 권사님은 스포츠를 너무 좋아하십니다. 주일낮에는 그런 경우가 없지만, 수요일이나, 금요일에는 스포츠가 열리면 그것을 보려고, 아예 교회를 나오지를 않습니다.
스포츠 가운데 축구 경기를 볼 때, 어떤 재미로 보십니까? 축구를 비롯하여, 어떤 스포츠든 간에 공은 대부분 둥글렀습니다. 왜 그렇까요? 어디로 굴러갈지 모릅니다. 그래서 재미있습니다.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선수가, 똑같은 공을 차면, 똑같은 곳으로 흘러가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를 않습니다. 전혀 엉뚱한 곳으로 흘러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재미있습니다. 공이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에 재미 있는 것입니다. 흥미가 있고 볼만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우리의 마음먹은 대로 돌아간다면, 무슨 재미로 살겠습니까?
사는 것이 우리의 뜻대로 돌아간다면 세상은 엉망진창일 것입니다. 내 뜻만 있습니까? 나의 뜻이 있고, 너의 뜻이 있습니다. 이 둘의 뜻이 똑같습니까? 다 틀립니다. 그래서 결론은 엉망진창인 세상이 되고 말 것입니다.
사는 것이 지겹습니까? 사는 것이 지겹다면, 지겨운 것이 사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비슷비슷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서 빨리 하늘나라 가고 싶습니까?
요즘 새벽기도회 시간에 빌립보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빌립보서 1:23-24절을 보면,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차라리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나라에 가서, 하루 빨리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지만, 또 그렇게 하고 싶지만,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기 때문에, 이 땅에 계속 머물러 있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종종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 한 몸 빨리 죽으면 좋지. 그러나 내가 죽으면, 너 어떻게 살래. 내가 너 때문에 못 죽는다. 빨리 죽고 싶어도 너 때문에 못 죽는다.”
어차피 살아야 할 세상이라면, 재미 있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항상 기뻐하라”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39:7절을 보면,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고 시편 기자는 고백했습니다.
세상에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권력 모든 것을 누려본 다윗의 고백입니다.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기보다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질에 소망을 두고, 목매여 살아가기보다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재미있게, 기쁘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세상에 푹 빠져서 살아가서는 안되겠지요. 물질에 빠지고, 게임에 빠지고, 정욕에 빠지고, 탐욕에 빠져서 살면 안됩니다. 세상 재미에 너무 깊숙이 빠져 있으면 안됩니다. 세상 재미가 아니라 어디에 빠져야 겠습니까? 하나님께 빠져야 합니다. 교회 다니는 재미에 빠져야 합니다. 스포츠에 빠져서, 스포츠 보느라, 교회에 안 나오면 안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풍족한 것보다는 조금 부족한 것이 때로는 필요합니다. 어려운 문제도 가끔 발생하고, 아픈 데도 가끔 생기고, 기도할 거리도 가끔 생기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께 소망을 둘 수가 있습니다.
1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아멘.
교회 들어오면서, 토끼를 보셨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사슴이 등장하니까, 사슴을 보여줘야 하는데, 사슴이 없어, 토끼를 보여주게 되었습니다.
저는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집에서 직접 토끼를 길러봤습니다. 몇 십마리를 키워 보았고, 새끼를 낳는 것도 보았고, 직접 들에 나가, 풀을 베어 토끼에게 주는 것이, 학교 갔다와서 하는 일이었습니다. 애완용이 아니라, 식용 토끼를 길러 보았습니다. 그때에는 토끼에게 물을 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토끼에게 물을 주면, 죽는다고 알고 있었기에 물을 준 적이 없습니다. 물을 주지 않아도, 토기는 죽지 않고, 잘 컸습니다.
그런데 애완용 토끼가 갑자기 교회에 오게 되었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발생했습니다. 토끼가 오기 전에는 담요에 싸인 고양이 새끼 한 마리가 교회 문 앞에 놓여 있었습니다. 저는 고양이를 무척 싫어합니다. 그래서 다른 대문 앞에 갖다 놓고 왔습니다. 그런데 토끼가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토끼도 물을 먹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토끼가 물을 먹으면, 죽기 때문에, 아들에게 토끼에게 물을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들 녀석은 토끼가 물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토끼에게 물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속으로는 물 먹으면 죽을텐데 하면서, 아들 녀석이 물을 주는 것을 내버려두었습니다.
토끼가 물 먹고 죽어도 나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뜻으로, 가만히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런데 물을 먹은 토끼가 안 죽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토끼가 물을 얼마나 잘 먹는지 모릅니다. 물 먹고 죽어야 하는데, 지금까지도 물 먹고 잘 살고 있습니다.
물을 넣어 주면, 얼마나 잘 먹는지,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한없이 쳐다볼 때도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토끼 집을 직접 만들어 주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박스에 넣어가지고 키울 수가 없을 것 같아, 운동도 할 수 있고, 훤하게 볼 수도 있는 집이 필요할 것 같아, 생각하다가, 철망을 사다, 토끼집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들어오시면서, 토끼집을 잘 보셨습니까? 토끼집 보면서 무슨 생각 하셨습니까?
토끼를 잘 키웠다가, 그대로 그 집 밑에 번개탄을 피워놓고, 통구이해서 먹으려고,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여러분! 사슴이 왜 물을 찾겠습니까? 물을 마셔야 살기 때문에, 물을 찾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을 안 마셔도 죽지 않는다 하면, 물을 마실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제가 키웠던 토끼는 왜 물을 마시지 않았을까요? 제가 물을 안 주었기 때문에 못 마셨겠지요. 일반 풀을 먹는 경우에는 풀 속에 물 성분이 들어있는데, 그 정도 수분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별도로 물을 먹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애완용 토끼는 마른 풀에 마른 먹이를 주로 먹기 때문에, 물을 공급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을 공급해 주지 않으면, 목 말라 죽게 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우리의 영혼도 주를 찾기에 갈급해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면, 살고,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죽는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영혼이 주를 찾기에 얼마나 갈급하겠습니까?
주를 만나도 살고, 주를 안 만나도 살고, 이런 마음이 있다면, 굳이 주를 찾을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주를 만나야 살고, 주를 만나지 못하면 죽는다 생각하면, 주를 안 찾겠습니까? 주를 안 만나도 살 수 있다고 생가해 주를 찾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12절을 보면,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했고, 요한복음 10:10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직접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55-57절을 보면,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만나야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야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시편 42편은 누가 썼을까요? 성경에 따라 다르지만, 글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42편 위에 가로 안에 있는 설명을 보면, “고라 자손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라 자손의 마스길”이란 고라 자손이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교훈의 시라는 것입니다. ‘마스길’은 ‘교훈’이라는 뜻입니다.
시편 42편은 고라 자손이 다른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기록한 것입니다.
고라 자손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고라는 어떤 사람입니까? 고라는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다가, 지진으로 죽임을 당한 사람입니다. 고라는 모세와 아론처럼 레위 지파입니다. 같은 레위 지파이지만 모세는 지도자가 되고, 아론은 그의 아들들과 더불어,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같은 레위 지파인데, 고라 자기 자신은 별 볼일 없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결코 이럴 수는 없다. 내가 누군데. 나도 레위 자손인데, 나는 왜 쓰임받지 못하는 거야. 왜 한 자리 안 주는 거야.”
모세와 아론이 고라 자기 자신을 배제하고, 권력을 독식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세와 아론, 형과 동생, 한 사람은 정치적인 지도자, 한 사람은 종교적인 지도자가 되어, 큰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린다 생각하니, 화가 났습니다. 들고 일어났습니다. 반역을 도모했습니다.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동조 세력을 규합했습니다.
민수기 16:1-3절을 보면,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에서 이름 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르니라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고 모세와 아론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왜 스스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느냐, 우리는 너희들보다 못하느냐, 너희들만 하나님을 믿느냐?”
고라와 그를 따랐던 250명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31-33절을 보면, “그들이 섰던 땅바닥이 갈라지니라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들의 집과 고라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재물을 삼키매 그들과 그의 모든 재물이 산 채로 스올에 빠지며 땅이 그 위에 덮이니 그들이 회중 가운데서 망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50명도 여호와의 불에 살라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도 보면, 반역을 하다 들키면 어떻게 했습니까? 삼족을 멸하고, 멸문지화를 당하게 됩니다. 그 집안의 자손의 씨를 다 없애 버리는 것입니다.
이번 교회학교 연합수련회 중에, 강원도 영월에 있는 “김삿갓 박물관”을 방문했습니다. 김삿갓의 모든 것을 잘 전시해 놓은 곳이었습니다. 왜 김삿갓인 줄 아십니까? 삿갓을 쓰고 다닌다 해서 김삿갓입니다. 왜 삿갓을 쓰고 방랑하며 세월을 보냈을까요? 김삿갓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왜 본명 대신 김삿갓으로만 기억하고 있을까요?
그는 고향에서 치르는 과거에 합격한 이후에 방랑길에 올랐습니다. 과거에 합격했으면, 당당히 관리가 되어, 출세의 길에 들어서야 하는데, 과거에 합격한 후에, 모든 것을 버리고, 방랑길에 올랐습니다.
그가 합격한 과거시험의 문제는 “홍경래의 난 때, 반란군에 저항하다가 죽은 ‘정가산’과 항복한 ‘김익순’의 행동에 대해서 쓰는 것”이었습니다. 김삿갓은 ‘정가산’의 충절을 높이 평가하는 반면, ‘김익순’의 비굴한 처사를 질타하는 글을 써서 당당히 장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시험이 끝나고 나서, 알게 된 사실은 ‘김익순’은 다름 아닌 김삿갓의 친할아버지였다라는 사실입니다. 할아버지가 관리로서 반란군을 진압해야 하는데, 반란군에 항복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반란군이 진압된 뒤에 할아버지는 죽게 되고, 그의 가족들은 살기 위하여, 강원도 영월까지 흘러들어온 것입니다.
과거에 비록 합격했다 할지라도, 그의 할아버지가 반란군에 항복하여, 반란군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기에, 관직에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손자가 아무 것도 모르고, 자기 할아버지를 신랄하게 비판했으니, 자손으로서 조상 얼굴에 먹칠을 했으니, 얼굴도 못 들고 다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삿갓 쓰고 방랑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고라 자손들은 어떻습니까? 자기의 조상이 모세와 아론에 반기를 들었다가 땅이 갈라짐으로, 죽었습니다. 그의 후손들이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있겠습니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을 도와 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을 바라보아도, 도움을 요청하여도,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바라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고라 자손들은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붙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매어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아가는 인생이 고라 자손들의 삶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삶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는 것, 바로 그것이 은혜요, 축복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2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오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아멘.
시편 62:5절 말씀입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아멘.
하나님만 잠잠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소망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생명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안되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내 스스로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데, 하나님이 계시면, 조금 더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라면, 안됩니다.
내 스스로 절대적으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이 내 곁에 계셔야 합니다.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이러한 마음이 여러분 마음 속에 있습니까? 하나님을 뵙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까? 그런 간절함이 있습니까?
이번 추석은 아주 빨리 우리 곁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9월 둘째 주가 추석입니다. 20여일 남아 있을 뿐입니다.
지금은 별로 그런 기분을 느끼지 못하지만, 예전에는 명절이 오면, 기차 표 예매부터 해야 했습니다. 올해에도 벌써 추석 기차표 예매는 끝났습니다. 인터넷으로 예매를 했는데, 금방 끝나버렸다고 합니다. 그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고향에 가도 좋고, 안 가도 좋다는 마음을 가지고 기차표를 예매했을까요? 어떻게든 고향에 가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고향에 가서 부모님 얼굴 보고 싶은 마음으로, 형제들 얼굴 보고 싶은 마음으로, 오랜만에 동네 친구들 얼굴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으로 예매를 했을 것입니다.
예전에는 인터넷이 아니라, 운동장 같은 곳에서 표를 예매했습니다. 언젠가 한번은 일찍 가서, 하루 종일 줄을 서서, 기다렸는데, 막상 표를 살려고 하니, 원하는 날짜에 표가 이미 다 팔린 것입니다. 얼마나 허탄하고 맥이 빠졌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교회에 올 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오십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교회를 아버지의 집이라 말합니다. 아버지를 보러 오는 마음, 아버지 집에 오는 마음을 가지고, 그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교회에 나오십니까?
주일날이 아닐지라도, “교회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를 뵙고 싶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싶다.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까?
3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아멘.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여러분! 여러분의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안계십니까?
힘들고 어렵습니까? 힘들고 어려우면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입니까?
염려와 걱정거리가 있습니까? 마음의 상처가 있습니까?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입니까? 내 환경에 따라서, 내 형편에 따라서, 내 기분에 따라서, 하나님이 계시기도 하고, 안 계시기도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 만약 육신의 부모가 잘 해주면, 내 부모이지만, 잘 안 해주면, 내 부모가 아닙니까?
만약 내 육신의 자녀가 내게 잘 해 주면, 내 자녀이지만, 잘 안 해주면, 내 자녀가 아닙니까?
여러분의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멀리 가 버리셨습니까? 아니면, 주무시고 계십니까? 낮잠 자고 계십니까?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오른쪽에서 우리의 그늘이 되어 주십니다. 버팀목이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우리 영혼을 지켜 주십니다. 우리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켜 주십니다.
그렇다고, 환난을 당하게 되면, 하나님이 멀리 가 계셔서, 우리를 지키지 못한 것입니까? 주무시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도와주지 못한 것입니까?
시편 23:4절을 보면,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다닐지라도, 절망의 골짜기, 죽음의 골짜기, 질병의 골짜기에 있다 할지라도, 주님은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울어 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해 본 적이 있습니까?
열왕기하 20:5절 말씀을 보면, 죽을 병에 걸린 히스기야 왕이 낯을 벽으로 향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라 자손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의 조상 고라는 모세와 아론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고라의 자손들은 반역자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살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만이 그들을 살릴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하나님, 도와 주세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이 와서 말합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나님이 계신다면, 너는 왜 그렇게 살아가느냐.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모든 것을 다 이루어준다고 하는데, 너 왜 그런 모양으로 살아가니. 하나님이 계신다면, 잘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니니. 남들보다 더 떵떵거리며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니니. 네가 섬기는 하나님은 어디 계시니.”
하나님 때문에 눈물 흘러 본 적이 없습니까?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생각하면서 눈물 흘러 본 적이 없습니까?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하면서, 수일 동안 슬퍼하며 울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눈물도 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죽어가는 심령들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4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아멘.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내가 전에...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예전에 그들에게 “교회 가자”라고 해서, 교회에 데리고 왔던 사람, 교회생활을 해 본 사람이, 신앙생활을 했던 사람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가족 가운데 그런 사람은 없습니까? “하나님이 어디 계셔요.”
그들을 생각하면서, 주야로 눈물 흘려 보셨습니까?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그들을 생각하면서, 주야로 눈물 흘리며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 낙심되십니까? “하나님이 정말 안 계시는가?”라고 의심이 되십니까?
5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아멘.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을 도와 주십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십니다. 한순간에 끝나는 단거리 경주가 아닙니다. 출발 총소리가 들렸는데, 눈 한번 감고 떴더니, 이미 끝난 버린 100m 경주가 아닙니다. 보다가, 채널 돌리고 다른 것을 한참 보다가, 다시 돌려봤더니, 아직도 달리고 있습니다. 인생은 마라톤 경기입니다.
지금 어디까지 달려 왔습니까? 여러분 모두, 지금껏 달려온 것보다 더 많이, 더 멀리 달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낙심하지 마십시오. 아직 끝이 아닙니다. 아직 한참을 더 달려야 합니다. 달리고 달려도 끝나지 않는 장거리입니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끝까지 달려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오.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도, 달려야 합니다. 포기하고 싶어도 계속 달려야 합니다. 주님이 함께 달려주십니다. 주님이 나타나 도와주십니다.
지난 금요일 저녁에 시편 126편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은혜가 되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1-6) 아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습니다. 여러분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습니다. 큰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 은혜를 감사하면서 들에 나가 씨를 뿌릴 때,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하루하루의 삶이 기쁨입니다.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여러분!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기도와 눈물을 보시고, 여러분의 가정에,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큰 일을 행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역사가 여러분의 삶 가운데에서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능력의 손으로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