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께서 무인의 길을 걷게 된
배경]
충무공께서 살던 시대는 당파싸움이 한창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나라를 위해 일해야 할 인물들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거나.. 조정에서 쫓겨 나는 일이 계속되었는데, 그것을 일컬어 사화라고 합니다. 기묘년에 일어난 기묘사화는 권세를 잡으려는
사람들이 조광조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에게 역적모의를 했다고 죄를 뒤집어 씌운 사건입니다. 충무공의 할아버지인 이백록도 이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누명을 쓰고.. 벼슬을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혹독한 고초를 당하다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나라가 어지럽고
집안까지도 당파싸움으로 피해를 입자..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책만 읽고 벼술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순신이
태어날 무렵, 공의 집안은 아주 가난하였고.. 어머지 변씨 부인은 삯바느질 같은 것을 부지런히 하여 어려운 살림을 꾸려나갔다고
합니다. 이처럼 가난한 살림을 서울에서 더 이상 꾸려나가기가 힘에 겨워지자.. 이순신 가족은 어머니 변씨의 친정집이 있는 지금의
충청남도 아산으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기운 가세를 일으키기 위해서라도 충무공의 벼슬은
필연적이었습니다.
충무공이 나이 스무살이 될 즈음, 북쪽
변경에는 오랑케들이 넘나들며 우리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남쪽바닷가 마을에는 왜구의 노략질이 심하였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충무공은 겨레의 방패가 되어 나라를 구하리라 결심하게 되었고.. 당시 무인의 길이 비록 문인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고
있었지만.. 그것이 나라에 충성하는 길이라 여기게 됩니다. 또한, 당쟁에 희생되신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당쟁에 휘말릴 소지가
있는 문인의 길을 포기하고.. 무인의 길을 걷게 된 동기부여가 됬을 겁니다.
충무공께서는 무인의 용력과 문인의 재지를 겸비하여 문학을 공부하다가.. 뜻한 바 있어
무인의 길을 걷게 된 것이며.. 충무공은 말과 행동이 엄격하고 지혜와 용맹이 특출하여.. 다른 무사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학문과 서예에까지도 실력을 겸비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순신이 무인으로 출세하자.. 이후, 덕수
이씨는 55명의 무신이 나올 만큼의 '훈무세가'가 됩니다.
충무공께서 가문을 생각함과 동시에 그의 청렴함을 보여주는 예가
있습니다. 알려진대로 여해 이순신과 서애 유성룡은 어릴적부터 친구입니다. 또한, 덕수이씨를 대표하는 인물중에서 문관은 율곡 이이요,
무관은 여해 이순신입니다. 당시 유성룡은 충무공께 이이를 만나 볼 것을 제안합니다. 그러나, 충무공은 거절합니다.
이유는.. "우리는 종친이라 당연히 만나야 하지만 전랑으로 있을 때만은 만날 수 없다"고 합니다. 당시 이이는 조정인사권을 가지고
있던 직책에 있었는데.. 남들의 눈에는 그것이 친척간의 만남이 아닌, 벼슬청탁으로 보여질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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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의
죽음에 대한 논란]
조카 이분이 쓴 충무공 행장(죽은 이의 일생을 기록한 글)은 그 순간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1598년 음력 11월) 19일 새벽. 이순신이 한창 독전하다가 문득 지나가는 탄환에 맞았다.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단 말을 하지 말라." 이순신은 말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이때 맏아들 회와 조카 완이 활을 쥐고 곁에 섰다가 울음을
참고 서로 하는 말이.. "이렇게 되다니! 기가 막히는구나..그렇지만 지금 만일 곡소리를 냈다가는 온 군중이 놀라고.. 적들이 또
기세를 얻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다. 게다가 시신을 보전해 돌아갈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렇습니다. 전투가 끝나기까지 참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는 시신을 안고 방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이순신을 모시고 있던.. 종 김이와 희와 완, 세 사람만이 알았을뿐 친히
믿던 부하 송희립 등도 알지 못했다.
이 대목은 후일 각종 전기에서 약간씩의 포장을 더하면서 그의 죽음을 신화화하는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의 시발점이 되기도 합니다. 예기치 못한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는 순국론에서부터
전사를 스스로 택했다는 자살론과.. 당시 노량해전에서 죽지 않고 숨어서 일흔까지 살았다는 은둔설까지….
거북선 연구의 권위자인
남천우 박사(66·전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는.. '유물의 재발견(학고재 발행, 97년)'에서.. "이 대목은 이순신이 전사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결정적인 증거"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행장의 저자는 전사 현장에 있었다는 완의 친형으로 당시 상황을 잘 모르고 쓴 글이
아니다. 그런데도 내용은 연극의 대사라면 모르거니와 실전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허위의 내용들이다. 총에 맞고 나서 처음에는 필요한
말을 제대로 하였으나 곧바로 죽었다는 대목도 이상하지만.. 전투가 한창일때 총사령관 주위에 군인들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다시 전사 순간으로 돌아가보면..
[선조실록] 31년 11월 무신일조 기록은 그 순간을 전혀 다르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관이 말하기를… 순신이 스스로 왜놈들을 쏘다가 적탄에 가슴을 맞아 배 위에 쓰러지자.. 그 아들이 곡하려 하므로 군심이
어지러워지려 하였다. 곁에 있던 이문욱이 울음을 저지시키고.. 옷으로 공의 시신을 가린 뒤 그대로 북을 울리며 나가 싸우매…
사람들이 모두 죽은 순신이 산 왜군을 무찔렀다고 하였다." 이문욱은 당시 일본어 역관으로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는 순간 임기응변을
발휘해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특히 선조실록 31년 12월 25일자는.. 이문욱만이 시신을 가린 것이 아니라고 반박하며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노량해전의 전공은 모두 이순신이 힘써 이룬 것으로 불행히 탄환을 맞자.. 군관 송희립 등 30여명이 상인(아들과
조카)의 입을 막아 곡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고.. 군사를 재촉하여 생시나 다름없이… 모든 배가 주장의 죽음을 알지 못하게 함으로써
승세를 이루었습니다."
당시 도원수(조선군 총사령관)였던 권율 장군도 이순신의 죽음에 관한 조사보고서에서.. "이순신이 죽은
뒤에 다행히 손문욱(이문욱) 등이 마침 지혜있게 일을 처리하여.. (우리 군사들이) 죽을 각오로 싸웠사옵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실록의 두 기록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학근 해군사관학교 교수(한국사)는.. 이분의 행장과 이에 근거한
후세의 기록은.. "후세인들이 이순신의 애국충정을 강조하기 위한 미화의 흔적"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한편 자살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당시의 정황과 몇가지 사료를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데.. 우선 수도까지 버리고 명나라로 도망가려 했던 무능한 국왕 선조가 취약한
정치적 입지때문에.. 백성의 추앙을 받는 이순신을 극도로 미워했고.. 조정 여론도 이순신에게 불리한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는 정황이
자살설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전쟁이 끝나면 자신이 정치적 희생양이 될 것으로 판단해 전사를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이순신 자살론을 제기할 수 있는 가장 신빙성 있는 사료는.. 이순신과 연합함대를 구성해 노량해전을 치른 명나라 해군
제독 진린의 제문입니다.
"평시에 (이순신이) 사람들을 대할 때 말하기를.. '나라를 욕되게 한 사람이라 오직 한 번 죽는
것만 남았노라'하시더니.. 이제 나라를 이미 찾았고 큰 원수마저 갚았거늘.. 무엇 때문에 오히려 평소의 맹세를 실천해야
하셨던고?"라고 썼습니다.
특히 이순신 장군이 아끼던 부하인 유형은 행장에서.. "평소에 속마음을 토로하며
말하기를.. '예로부터 대장이 전공을 인정받으려는 생각을 조금이라도 갖는다면.. 대개는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운 법이다. 그러므로 나는
적이 물러나는 그날 죽음으로써.. 유감될 수 있는 일을 없애도록 하겠다"고 했는데 … 물고 뜯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순신 자살론을 본격 제기한 것은 숙종때 사람 이민서가 쓴 '김덕령 장군 전기'입니다. 이 글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김덕령 장군이.. 반역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사형당한 이야기를 전하는 가운데.. 이순신의 죽음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김덕령)장군이 죽고부터.. 여러 장수들이 모두 저마다 스스로 제 몸을 보전하지 못할까 걱정했던 것이니.. 저
(의병장) 곽재우는 마침내 군사를 해산하고 산 속에 숨어 화를 면했고.. 이순신도 바야흐로 전쟁중에 갑옷을 벗고 앞장서 나섬으로써 스스로
탄환을 맞아 죽었으며…."
그러나 진린의 제문은 글의 성격상.. 이순신 장군의 애국정신과 용맹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볼
때.. "오직 한 번 죽는 것만 남았노라"라는 구절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봐야한다는 반론이 만만치
않습니다. 이민서의 글도 이순신이 과연 당시 갑옷을 입지 않았는지.. 조선 해군 장수가 전투시 갑옷을 입는 것이
관행이었는지에.. 대한 근거가 없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반론이 많습니다.
장 교수는.. "사약을 받아도 궁궐쪽을
향해 배례를 한 후 죽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던 시대에.. 후원자인 유성룡의 파면과 고문받아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자살을 택한다는
것은.. 유교적 세계관에서 용납될 수 없는 것"이라며 "순국임에 틀림없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한편 남 박사는 자살론과 달리
은둔설을 주장합니다. "이분의 행장에 따르면 이순신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 바다에서 죽었고.. 고향인 충남 아산으로 옮겨져
다음해 2월 11일 죽은지 80일만에 장례를 치른다. 그후 15년이 지난 1614년에 600㎙ 떨어진 곳에 이장한다. 이순신이
죽었다는 소식은 나흘후인 11월 23일 선조에게 보고되는데.. 이 때는 전쟁이 끝난 후이며 장례비도 국가에서 대주었으므로 장례를 늦출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80일이나 지나 치른 것도 이상하고 15년 후에 이장한 것은 더더욱 이상하다. 이때 비로소 이순신이 죽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장례를 다시 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분은 어쩌면 자신의 기록을 통해.. 이순신이 실제로는 일흔살까지 살았음이
밝혀지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아직까지는 순국설이 정설이지만.. 국가전란속에서도 그치지 않았던 당쟁속에서의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이런저런 의문은 쉽게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