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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제자번호 47-68) : 남해군 설천면 덕신초등 6-2 |
1972(제자번호 47-68) : 남해군 설천면 덕신초등 6-2 학교 학반 : 남해군 설천면 덕신초등학교 6학년 2반(혼성반) 담임 기간 : 1972.3.1 - 1973.2.28 제자번호 및 이름
※교직 첫해 담임한 1∼5번, 27∼45번 여학생 24명과 혼성반 편성으로 새로 맡게 된 남학생 22명이 교직 2년째의 담임 아동들로 총 46명을 담임하였다. 연 2년간 담임을 맡은 여학생을 제외하고 매긴 제자번호를 따라 기록된 명단은 아래와 같다.
47.정성준 48.김왕수 49.정갑덕 50.정봉규 51.김석규 52.염복일 53.서대진 54.지희동 55.서재홍 56.한만효 57.강대근 58.지상득 59.이희식 60.정윤안 61.정끝준 62.김점세 63.강동원 64.김대동 65.이영남 66.서영수 67.이숙순 68.서상식
(덧말) : 초임지에서 맞이한 교직 2년차에는 6학년을 담임하였다. 새로 부임하신 학교장의 방침에 따라 전년도의 남녀 분리반이 혼성반으로 편성되었고 따라서 남자 22명만 새로 맡아서 제자번호는 총 68번까지만 나갈 수 있게 되었다. 특기할 사항은 반 편성에 앞서 아동들의 희망사항을 조사하여 그 희망사항을 최대한 수용하는 식으로 학급을 편성했기 때문에 연임하게 된 여학생들은 계속 담임을 맡아주길 희망한 학생들이었다.(재적의 70% 정도가 연임을 희망했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으니 일부는 헤어지게 되었지만....) 30여년이 지난 지금의 교육현실에 비추어 말하면 수요자 중심 학급조직이라 할 수 있을까? 아마도 동학년을 맡게 된 선배 선생님의 제안을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였으리라. 아니면 철모르던 내가 그러자고 제안을 했었는지...... 어째서 그렇게 했는지는 솔직히 지금 명확하게 생각나지 않는다.
초등학교(당시엔 물론 국민학교)의 선생님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이는 1학년과 6학년 때 담임이라는 일반적인 이야기가 확실히 맞는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런 사회적 통념을 따라 말하려고 하지 않으려 해도 내게 가장 기억에 남는 스승은 초등학교 시절의 경우엔 6학년 담임이셨던 분이라는 것이다. 물론 오래 전 고인이 되셨고 그 階下를 떠난 뒤 제대로 한번이나마 찾아뵙지 못한 분, 그래서 그 분의 존함을 거명함이 삼가 무례함을 무릅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먼저 고백해야 한다. 그 분, 강문주 선생님!
강문주 선생님은 나의 초등학교 6학년 시절의 스승이셨다. 초.중.고.대학을 거치면서 참으로 무수히 많은 선생님을 만나지만 그 중에 '스승'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게 되는 좋은 선생님은 누구에게나 그리 흔하지는 않으리라. 어쩌면 단 한 사람의 '스승'도 마음 속에 간직하지 못하고 학교라면 고개부터 돌려버리게 되는 이도 만나기 어렵지 않은 세상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래도 몇 분의 좋은 스승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살았다는 것이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그것이 내 마음 속에만 간직되어서 밖으로 그분들에게 내 감사의 정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여 큰 보답을 전해드리지는 못했을망정......
아무튼 내 마음 속의 스승 강문주 선생님! 그 분은 중학교 입시가 시퍼렇던 시절, 입시공부에 찌든 제자들을 위해 나름의 교육철학을 그대로 베풀어주신 분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그 당시(1961년)엔 어린이가 읽을 책이 정말 귀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에 논바닥에 쟁기질을 하면 하얗게 널려있던 밤톨만한 어떤 식물의 뿌리(그걸 '비단뿌리'라는 말로 기억하지만 학명이나 실제 쓰임이 무엇인지를 아직 모르고 있다. 아니 나는 그걸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더 이상 알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말린 것 한 되는 우리가 읽은 동화책 2권값 정도로 팔린 약재였다는 것밖엔......)를 주우려 점심시간과 방과후 시간에 모심기를 위해 막 쟁기질을 하여 뒤집어논 학교 주변의 논바닥을 우리와 함께 뒤지고 다니셨던 모습이 아른일 뿐이다. 그걸 모으게 하고 교실바닥에 널어 말리고 인근 도시인 진주에 가지고 나가셔서(나는 산청군 시천면 소재 덕산초등학교를 다녔다.) 한약방에 파신 뒤 우리가 읽을 책으로 바꾸어 소위 학급문고를 마련해 주신 분이었다. 당시 선생님의 연세가 이미 40대쯤으로 생각되고 그 후 언젠가 바람결에 타계의 소식을 들은 듯하지만 그 연대도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렇게 선생님의 땀과 교육관에 의해 마련되었던 학급문고 백 여권, 감히 말하면 그 책의 모든 것은 우리들의 영혼에 단비가 되었다. 부모님들이 아무리 중학교 입시를 앞둔 6학년으로서 공부에만 전념하길 소원하셨을지라도 선생님의 확고한 교육관 앞에서는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했던 것 같다. 우리는 쉬는 시간 틈틈이 그렇게 마련된 동화책과 위인전을 읽었고 입시공부가 지겨운 순간 순간을 책 속에 빠질 수 있었다. 더욱이 나는 도서부장으로서 그 학급문고를 관리하는 책임과 함께 다른 친구들보다는 훨씬 맘대로 그 책들을 읽는 특권(집으로 책을 가져가서 읽을 수 있는....)을 누렸다. 그래서 어떤 책은 몇 번이고 거듭 읽는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런 독서가 그 후의 나를 만들고 마침내 지금의 나를 형성시켜준 바탕이 된 것이 아닌지...... 그런 의미에서 그때 선생님이 만들어주신 학급문고는 내게 있어 영혼의 맑은 피가 되어 내 인생의 길을 밝혀준 것인지도 모른다.
내 초등학교 6학년 시절의 스승이신 강문주 선생님! 그분은 내게 그냥 이미지로, 실루엣으로 남으셨을 뿐이다. 내가 돌이켜보아 깊고 아득한 그리움으로, 그 그리움의 더 깊고 더 아득한 존경과 경외심으로 부르는 스승의 이름이 오로지 아른아른 기억의 저 모롱이를 굽이굽이 돌아가야 한다는 것은 내겐 슬픔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어쩌면 다행이고 순리인지도 모른다. 슬픔의 이유는 말하지 말자. 다행이라는 것도 그 이유를 밝힐 계제가 아니다. 다만 순리란 세월의 흐름이 그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하고 망각하게 하리라는 뜻에서 그러하다.
나는 이제 그때 나를 가르치신 스승보다 더 나이 많은 교사가 되어 이 땅의 교단에 서있다. 문득 내가 다시 불러보는 내 옛제자들의 이름 앞에서 생각하는 것은 그 나의 스승처럼 나도 누군가의 마음 속에서 '이미지'로나 남을 수 있었을까 하는 스스로에 대한 회한과 반성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 자리에서 누구라고 특별히 그 이름을 두 번 호명하지는 않으리라. 내 교실에는 언제나 똑같은 어린이가 있었고 나는 그 어린이들과 더불어 살아온 무명의 교사일 뿐이니까. 나는 그들을 똑같은 마음으로 부르고 대하려 노력해 왔다는 자부심은 잃지 않고 살고 있으니까. 그 능력의 차이 때문에 꾸중도 하고 칭찬도 했지만 그 밖의 어떤 이유로도 나는 그들에 대한 관심을 달리 표현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상기할 뿐이다. 다만, 몇 년 후 이 홈페이지 사이트를 닫는 날은 내가 평생 지켜온 교단을 떠나는 날이 되겠지만 그날까지 이어질 현실 속 교단의 자리를 이제까지보다는 조금이라도 정결한 자리로 닦아보고 싶을 뿐이다.
졸업을 앞두고 진학하면 학비면제를 받을 수 있는 장학생이 되어야 한다고 보충지도를 요망한 학생들에겐 겨울방학을 반납하고 특별지도를 감행한 일도 엊그제일 같고 그 결과 당시 설천중학교 입시에서 소위 수석입학을 비롯해 몇 명의 장학생을 탄생시켰던 일은 잊혀지지 않는 나만의 좋은 기억으로 간직되어 있다는 것을 내 초임지에서의 감회로 되새기게 된다. 그들이 누구였는지 그 이름들 또한 굳이 밝혀두지 않으리라.
초임지에서 교직 2년차에 6학년을 담임했던 일을 생각해볼 자리에서 나는 엉뚱하게 내 초등학교 6학년 시절의 은사님을 생각하였다. 그분은 내게 '이미지'로 남으셨지만 나는 내 제자들에게 무엇으로나 남을 것인가를 스스로 자문해보는 시간이 되었다고나 할까..........
2년, 그 2년을 연임한 제자는 24명이었다. 그렇게 나의 초임 시절은 68명의 제자들과 함께 끝나고 다음은 두 번째 부임지에서 새로운 아이들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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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 1260, 2002/03/24 Sun 08:04:09 → 2002/03/24 Sun 08:11: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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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이 생각날듯 말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