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치규(宋穉圭) 찬(撰)
[생졸년] 1759(영조 35)~1838(헌종 4) 수(壽) 79세
높은 수레에 앉아 네 마리의 말을 몰고 가며 한번 부르면 호응하는 사람이 백 명이나 되는 것은 한때 저잣거리 아이들이 부러워할 수 있으나, 조금 있다가 연기처럼 사라지고 안개처럼 흩어져 마치 봄밤에 꿈을 꾼 듯이 이미 지나가 없어진다. 그런데 저 사람의 시운(時運)이 불행해지면 엎어지고 자빠져 곤경에 처하거나 또 불행하게는 자신이 죽거나 일족이 몰살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시간이 오랠수록 그 향기가 더욱 드러나고, 받은 화(禍)가 치열할수록 사람들의 경모(景慕)가 더욱 간절하다면, 이 어떤 연유로 그러는 것인가? 그것은 간직한 것이 인의(仁義)이고, 심은 것이 명절(名節)이어서 그러니, 이는 하늘이 귀하게 여기는 것과 사람이 귀하게 여기는 것의 경중(輕重)이 진정 같지 않기 때문이다.
아, 《노릉지(魯陵誌)》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니, 이는 충신(忠臣)ㆍ의사(義士)의 시운이 크게 불행해서이다. 이때에 옛 영화를 누렸던 사람으로서 새로운 총애와 봉록을 받은 사람이 연달아 나왔다.
그러나 봉여해(奉汝諧)는 작은 한 산반(散班)의 입장에서 성박[成朴=성삼문(成三問)과 박팽년(朴彭年)] 제공들과 함께 같은 날 죽었으니, 대체로 그 마음은 성박의 마음이었지만 처지는 성박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난다. 근세 숭상하여 논하는 사람들은 간혹 성박보다 어려웠다고 하니, 어찌 지나친 찬미이겠는가.
위에서 이른바 “받은 화가 치열할수록 경모함이 간절하다.”라는 것이 여기에 있도다. 공에게는 또한 족숙 유(紐)와 족질 석주(石柱)가 있었는데, 지킨 본성이 공과 같아서 앞뒤로 죽으니, 당일 봉씨는 온 집안이 인을 이루었다 할만하다. 그러니 오늘 봉씨의 보첩(譜牒)은 동방의 충의 열전(忠義列傳)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성대하도다.
공의 자손은 남쪽에 유락(流落)했는데, 영락하여 떨쳐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 족보는 유감이 될 듯하다. 가만히 헤아려보면, 자손이 보존한 것은 반드시 공이 애당초 생각한 것이 미친 것은 아니리라. 이제 공에게 후손들이 그 수가 백 명인 것도 많다 할 만하니, 다른 좋은 일이 뭐가 있겠는가.
봉씨는 고려조 중엽에 현저하여 대대로 높은 벼슬에 올랐다. 우리 조정에 들어와서는 휘 유례(由禮)ㆍ휘 즙(楫)이 모두 판서를 지낸 적이 있으니, 이분들이 공에게는 조부와 부친이 된다. 백부 려(礪)도 판서를 역임했는데, 그의 딸은 문종(文宗)의 순빈(純嬪)이 되었으니, 공의 부인(夫人)은 박충정(朴忠正)의 누이이다. 이는 공이 절의를 지킨 처음과 끝에 참조가 될 만하기에 쓰지만 그 외 나머지는 다 싣지 못한다.
와서 글을 요청한 사람은 공의 후손 인귀(仁龜)이다. 나는 수보(修譜)하는 사람을 볼 때면 늘 근족(近族)끼리 족보 만드는 것을 잘한다라고 생각했는데, 인귀가 족보를 만드는 일을 나는 잘한다고 하는 바이다. 또한 봉씨 절의의 가성(家聲)에 감동하여 이렇게 쓴다.
ⓒ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ㆍ조선대학교 고전연구원 | 박명희 김석태 안동교 (공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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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河陰奉氏族譜序
高車駟馬。一呼而應者百人。一時市童之憐有矣。少間煙消霧散。若春夢之旣過而無有。彼時命不幸。顚沛困厄。又不幸而至於殺身湛族者。愈久而芬馥愈彰。受禍愈烈而人景慕之愈切。是曷故而然哉。彼其所存者仁義。所植者名節。此天之所貴與人之所貴。
輕重固不侔矣。嗚呼。讀魯陵誌不涕非人。此忠臣義士時命之一大不幸也。于斯時也。以舊榮遇荷新寵祿者。踵相接也。有奉公汝諧以眇然一散班。與成朴諸公同日死。蓋其心卽成朴之心。而處地比成朴有間矣。近世尙論者。或以爲難於成朴。豈溢美哉。向所謂受禍烈而景慕切者。其在斯歟。公又有族叔紐。族姪石柱。秉執與公同。後先以死。當日奉氏可謂闔門成仁。今日奉氏之譜牒。雖謂東方忠義列傳。亦可也。盛矣哉。公之子孫。流落南土。瑣尾不振。雖若可爲是譜憾。竊計子孫保之。必非公初料所及。今雲仍於公者。有百其數。亦云豐矣。他何足云。奉氏顯於麗朝中葉。奕世崇班。入我朝。有諱由禮,諱楫皆判書。是爲公祖及禰。伯父礪亦判書。其女爲文宗純嬪。公之夫人。朴忠正妹也。此於公之立慬首末。有可傍照者故及之。餘不能盡載。來謁文者。公之裔孫仁龜。吾見修譜者。每以譜其近者爲善。仁龜之譜。吾所善也。又感奉氏節義之家聲。於是乎書。<끝>
노사집 제18권 / 서(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