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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자대전 제154권 / 신도비명(神道碑銘)
휴암(休菴) 백공(白公) 신도비명 병서(幷序)
정암 조 선생이 성현의 학(學)으로 치택(致澤 요순(堯舜)의 군민(君民)으로 만드는 것)의 치도(治道)를 시도하다가 바로 뜻밖의 화를 당하고 말았으니, 세상의 법칙이 될 만한 그 언행을 온 세상이 쉬쉬하여, 그 도가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
만약 그 지결(旨訣)을 직접 전수받아 독실히 믿고 죽기로 고수하는 한편, 군소(群小)가 지껄이는 가운데서 이를 공송(公誦)하여 다시 세상에 밝혀 놓은 이가 없었다면, 사도(斯道)가 어찌 오늘이 있었겠는가. 휴암(休菴) 충숙(忠肅) 백공(白公) 휘 인걸(仁傑), 자 사위(士偉)가 바로 그분이다.
대저 우리 중종 성세에 여러 현인(賢人)이 배출되여, 김공 식(金公湜)은 높은 재주와 깊은 학문으로 대사성(大司成)이 되었고, 공은 개연히 구도(求道)에 마음을 두어, 매번 제생들이 규례에 따라 강학(講學)한 이외에도 홀로 책을 들고 문의하여 바른 의리를 터득한 뒤에야 그만두곤 하였으며, 더욱 조 선생(趙先生)을 존신하여 몸을 맡겨 사사(師事), 그 집 옆에 집을 짓고 거처하였다.
이윽고 기묘사화가 일어나 사우(師友)가 섬멸되자, 공이 너무 비통한 나머지 바로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가 있다가 오랜 뒤에 돌아와서 가끔 태학(太學)에 나가 교유했고, 그 언행(言行)에 있어 사문(師門)의 옛 법을 고치지 않았는데, 그때 여러 사람들이 모두, 문망(文網 사화(士禍))이 장차 공에게 가해질 것이라고 지적하므로 규각(圭角 말과 행동이 모난 것)을 약간 삼갔다.
이어 연로한 모부인을 위하여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시배(時輩)들이 조 선생의 일당으로 배격하여 성균관에 예속되었다가 오랜 뒤에야 예문관 검열에 제수되었다. 고사에, 이조나 병조의 전관(銓官)이 정청(政廳)을 열면, 예문관의 한 직원이 정청에 나아가 그 득실을 기록하도록 되어 있는데, 공이 묘연한 신진으로서 이미 폐지된 제도를 부활시켜 붓을 들고 신중히 기록하므로, 전관들이 매우 꺼렸다.
예조 좌랑(禮曹佐郞)으로 승진되었다가 모부인 봉양을 위하여 남평 현감(南平縣監)으로 나아가서는 학교를 세우고 스승을 가려 사람들을 가르치고 또 직접 나가서 구두(句讀)를 시정해 주기를 마치 정명도(程明道)가 진성(晉城)에서와 같이 하였고, 균등한 부역과 적은 수렴(收斂)으로 백성의 생활을 넉넉하게 하고 퇴락된 창고와 관사를 모두 수축하였으며, 뇌물을 쓰거나 법을 교란시키는 자는 일체 배격하였다.
일등 치적으로 특별히 품계를 올리고 헌납(獻納)으로 불렀는데, 공을 꺼리어 참소하는 자가 있어 이전 직책에 그대로 있다가 마침내 지평(持平)에 제수되었고 다시 호조 정랑(戶曹正郞)에 전임되어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하였다.
을사년(1545)에 인종이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문정대비(文定大妃)가 윤원형(尹元衡)에게 밀지(密旨)를 내려, 인종의 외숙 윤임(尹任)과 대신 유관(柳灌)ㆍ유인숙(柳仁淑) 등을 빨리 제거하게 하였다. 그때 공이 다시 헌납으로 있었는데, 주모자가 공을 꺼린 나머지 허자(許磁)를 시켜 공을 설득하게 하였으니, 이는 허자를 공의 구의(舊誼)로 지적한 때문이다.
이에 허자가 공을 갖가지로 달래었으나 공이 거절하고는 듣지 않으므로 허자가 노하여 말하기를,
“이처럼 사전에 타협하는 것은 그대에게 노모가 있기 때문이요, 사소한 사정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어떤 이가, 신병을 들어 사양하면 모면할 수 있지 않느냐고 하자 공이 말하기를,
“나는 일에 임하여 어려움을 회피하는 행위는 하지 않겠다.”
하였다.
그 이튿날 대간(臺諫)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중의(衆議)가 거의 공에게 추종하여 일이 거론되지 못하므로, 정순붕(鄭順朋)ㆍ이기(李芑)ㆍ임백령(林百齡)ㆍ허자가 지레 입궐하여 윤임 등 세 사람에게 죄주기를 청하였다.
그때 회재 이언적이 원상(院相)으로 있었으나 감히 구제하지 못하므로 공이 장차 동료와 함께 논쟁하려 하였는데, 동료가 고개를 숙이고 감히 나서는 자가 없으므로 공이 홀로 아뢰기를, “국가의 일은 마땅히 광명정대한 데서 나와야 하는데, 지금 세 사람을 죄주는 데 있어 정의(廷議)도 거치지 않고 죄명을 열거하지도 않은 채 후제(后弟 문성왕후의 친정 동생인 윤원형을 이름)가 밀지를 받들어 행사하니, 어떻게 후세에 보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간인(奸人)을 시켜 남몰래 선동하여 미워하는 사람을 모함하게 하니, 그 말류(末流)의 해독을 어찌 다 말하겠습니까. 원형(元衡)은 내지(內旨)를 받들어 그 악성을 마구 부리고 대사헌(大司憲) 민제인(閔齊仁)은 내지가 내렸음을 듣고는 모든 재상가(宰相家)에 사후(伺候)하기를 마치 전령(傳令)하는 군졸과 같이 하니, 모두 죄주기를 바랍니다.”하고, 또 양사(兩司)의 언책(言責)을 수행하지 못한 것을 논박하자, 문정대비가 크게 노하여 공을 형리(刑吏)에게 내리며 말하기를, “윤임 등이 종묘사직을 모위(謀危)하였는데, 이 사람이 공정을 가탁하여 역적을 두둔하니, 일이 장차 불측한 데 이르게 되었다.” 하였다.
북창(北窓) 정공 염(鄭公𥖝)은 순붕(順朋)의 아들인데 순붕의 옷자락을 붙들고 간(諫)하기를, “백공(白公)은 충직(忠直)한 사람입니다. 이번에 만약 그가 죽음을 당한다면, 아버님은 장차 만세(萬世)에 죄를 얻게 될 것입니다.”하자, 순붕이 이에 소(疏)를 올려, “백모(白某)가 국가의 중대사를 알지 못하고, 한갓 밀지가 잘못이라는 것을 말하였으니, 우망(愚妄)한 발언을 깊이 죄줄 것까지는 없습니다.”하므로, 문정대비(文定大妃)가 노여움을 거두고 체직만 시켜 파주(坡州)로 보냈으며, 유관(柳灌) 등 세 사람은 다 역률(逆律)로 사형이 논단되었다.
그 뒤 3년째 되는 정미년(1547, 명종 2)에 정언각(鄭彦慤)이 고변(告變)한 양재역(良才驛) 벽서(壁書) 사건으로 을사사화에 관련된 사람들에게 죄가 추가되어 혹은 죽음을, 혹은 유배(流配)를 당하였고 공도 안변(安邊)으로 유배된 지 얼마 안 되어 모부인이 별세하자, 마음대로 분상(奔喪)할 수 없어 가슴을 치며 통곡하기를 갑절 더하였고, 5년째 되는 해에 비로소 대사령(大赦令)이 내려 향리로 돌아왔다.
공은 본시 빈한한 데다가 이에 이르러 생계가 더욱 쓸쓸해졌으나 그저 태연하였다. 이보다 먼저 기유년(1549, 명종4)에 간인(奸人)이 또 고변(告變)하여, 을사사화 때 벗어난 사람들이 거의 다 걸려들었으나 공은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손[客]이 찾아오면 술잔을 나누고 노래를 부르며 담론이 자약할 뿐, 걱정하거나 두려워하는 표정을 엿볼 수 없었으며, 매일 밤에는 으레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외었고 정자ㆍ주자의 글이 언제나 좌우에 놓여 있었다.
이렇게 20여 년이 지나 윤원형이 패하여 죽고 공의(公議)가 점차 확장되자, 공이 다시 기용되어 네 관직을 역임하고 양주 목사(楊州牧使)로 나가서 백성을 위하여 복리(福利)를 일으키고 폐단을 제거하여 미세한 정사까지 빠뜨림이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비석을 세워 송덕(頌德)하였다.
선조(宣祖)가 즉위하여 현준(賢俊)을 구하는 데 힘쓰자, 공이 조야의 무거운 명망으로 두어 달 사이에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에서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승지(承旨)로 승진되었다가 이조 참의(吏曹參議)ㆍ대사간(大司諫)에 전임되었다.
그때 인순대비(仁順大妃)가 수렴청정에 임하자 공이 진언하기를,
“사군(嗣君)의 춘추가 어리지 않으시니, 여주(女主)께서 오래도록 국정에 임하실 수 없습니다.”
하므로, 인순대비가 언짢아하였으나 얼마 안 되어 수렴을 철수하였다.
공이 상을 위하여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옛날 성왕(聖王)은 그 마음부터 먼저 바르게 하여 그 근본을 세웠으니, 요순(堯舜)의 ‘정일(精一 마음이 자세하고 한결같은 것)로써 그 중도(中道)를 잡는다.’는 말이 바로 그 일입니다. 전하께서도 이를 체득하여 그 극(極 인륜(人倫)의 모범과 표준)을 세우시면, 군하(群下)가 모두 정백(精白)한 마음으로 크게 호응하여, 전하의 뜻을 미리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전하께서 여염(閭閻)에서 생장하시었으니, 이는 상왕(商王 은 고종(殷高宗))이 즉위하기 전에 외지에서 수고하여 민생(民生)의 어려움을 알았던 예와 같습니다. 진정 능히 학문에 시종 종사하여 뜻을 겸손히 하고 때없이 힘쓰시면, 마음과 도리가 하나로 되어 정사와 학문이 서로 이루어질 것입니다.”하였고, 또,
“이른바 경(敬)이란, 학문의 시(始)를 이루고 종(終)을 이루는 것이니, 전하의 생각이 늘 여기에 있어 동정(動靜)하는 사이에 상실하지 않으시면 이른바 ‘사람이 없는 곳에서도 경(敬)을 독실히 함으로써 천하가 평치(平治)된다.’는 성과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고, 또,
“우리 동방의 도학은 정몽주(鄭夢周)ㆍ김굉필(金宏弼)로부터 연원(淵源)이 시작되었고, 조광조(趙光祖)는 걸출한 재주로 정자(程子)ㆍ주자(朱子)의 학을 천명(闡明), 규구(規矩)를 준수하여 예(禮)가 아닌 데 움직이지 않고 명절(名節)을 크게 격려하여 사도(斯道)를 일으켰으니, 이제(二帝 요(堯)ㆍ순(舜)ㆍ삼왕(三王 우(禹)ㆍ탕(湯)ㆍ문무(文武)의 성세를 거의 다시 보게 되었는데, 남곤ㆍ심정의 무리가 귀역(鬼蜮)과 같이 음해를 자행하여 끝내 억울하게 죽고 말았으므로 조야의 원통해하는 마음이 오랠수록 더욱 깊어져 ‘마땅히 진유(眞儒 조광조)를 표창하여 높은 관작을 추증하고 아름다운 시호를 내리는 한편, 문묘에 배향시킨다면 천리가 밝게 되고 인심이 시정되고 도덕이 일치되어 풍속이 순박해질 것이다.’고 합니다.”하였다.
공조 참의로 체직되었다가 바로 전직(前職)으로 환원되었다. 상이 사친(私親)에게 치제(致祭)하기를 의논하므로 공이 아뢰기를,
“국통(國統)을 계승하는 의리가 아무리 엄중하나 사친의 은혜를 아주 단절할 수 없으니, 제관(祭官)을 보내어 지극한 정리를 펴시는 것은 불가하지 않습니다.”하자, 말하는 이들이 이를 그르다 하여 공의 체직을 논박하므로, 공이 다시 공조 참의가 되었다가 대사성(大司成)으로 전임되었는데, 드디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상이 공의 풍절(風節)을 생각하여 누차 병조 참지(兵曹參知)와 대사간으로 불렀으나 모두 굳이 사양하였고, 이윽고 가선(嘉善) 품계에 특진시켜 대사헌(大司憲)을 제수하였으나 세 차례나 사양하자, 상이 수찰(手札)을 내려 이르기를, “군자란, 세상에 나서 임금을 요순으로 만들고 이름을 역사에 남기는 것이 옳다. 경(卿)은 충성이 일월을 관통하고 절의가 빙상(氷霜)을 능가하니, 마땅히 속히 부름에 응해 달라.”하였다.
이에 공이 입조한 지 얼마 안 가서 체직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와 병조ㆍ공조의 참판(參判)에 누차 제수되어 경연관(經筵官)ㆍ의금부사(義禁府事)를 겸임하였으며, 다시 두 번씩이나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일찍이 가뭄으로 인하여 소(疏)를 올리기를, “옛날 한(漢) 나라 신하가 ‘천재(天災)는 피부(皮膚)에 통증(痛症)이 없고 진식(震食 지진(地震)과 일월식(日月蝕)은 성체(聖體)에 손상이 없으므로, 으레 삼광(三光 일(日)ㆍ월(月)ㆍ성신(星辰))의 착오를 무시하고 하늘의 노여움을 가벼이 여기게 됩니다.’ 하였으니, 이 말은 참으로 오늘의 약석(藥石)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척연(惕然)히 스스로 반성하고 폐습을 통쾌히 씻어, 진상하는 공물(貢物)에는 적절히 참작하여 절감해 주고 모든 부서의 하례(下隷)들에게는 고통스럽고 편함을 평등하게 해 주며, 족징(族徵)하는 침해를 없애고 이름 없는 세(稅)를 금지하여, 나라를 이롭게 하고 백성을 편리하게 할 수 있는 일은 반드시 시행되기를 기하시면, 아직도 천재(天災)를 만회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억울한 죽음들이 이미 신설(伸雪)되었지만, 사실 을사년 기유년 사건보다 더 억울한 사정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진심으로 바라건대, 환연히 뇌우(雷雨)를 내리어, 당시에 피죄(被罪)한 이들에게 모두 관작을 복구해 주고 적몰된 가산(家産)을 속히 되돌려 주소서. 그럼 충혼(忠魂)이 감읍(感泣)하고 사림이 진작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황(李滉)은 학문을 몹시 좋아하고 성리(性理)를 강명(講明)하였으니, 만약 치도(治道)를 도모하려 한다면 이 사람을 위임하지 않고는 안 될 것입니다.”하였고, 또 정암을 문묘(文廟)에 배향시킬 것을 주청하자, 상이 많이 채택하였다.
또 정의(廷義)에서, 을사사화에서 받은 위훈(僞勳)들을 삭제하려 하자, 한 권신(權臣)이 달갑게 여기지 않으므로 공이 면책(面責)하기를,
“이 정의가 시행되지 않으면, 공의 죄는 장차 회피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하였다.
다시 병조에서 형조를 거쳐 대사헌에 전임되었을 때 공이 장차 조정의 권귀(權貴) 약간 명을 논핵(論劾)하리라는 유언비어가 나돌아, 도하(都下)가 온통 떠들썩하자 공이 말하기를, “나의 심사는 저 청천백일과도 같다. 다만 일찍 물러나지 못한 것이 유감일 뿐이다.” 하고는, 즉시 사직하고 돌아왔는데, 그 뒤에 한 사람이 글을 올려 아뢰기를, “백모(白某)는 사림을 모해하려다가 마음대로 되지 않자, 그만 물러났습니다.”
하므로 상이 노하여,
“백모의 정충(精忠)은 해[日]를 관통할 수 있다.”
하고는, 그 사람을 구치(究治)하려고까지 하였다.
공은 관직에 있을 때 추치(騶直)를 받지 않았고, 소득(所得)이 있으면 대뜸 모든 친족에게 나눠 주었고,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아침저녁 끓일 것조차 없었다. 본도(本道)의 감사(監司) 윤공 근수(尹公根壽)가 사실을 들어 아뢰자, 상이 다시 미두(米豆)를 주도록 명하므로 글을 올려 사은(謝恩)하고, 이어 조광조를 문묘(文廟)에 배향하기를 다시 주청하였다.
이보다 먼저 공이 조 선생의 묘액(廟額)을 청하기 위하여 병(病)을 참고 상경하였다가 원생(院生)이 이미 주청하였으므로 그만두고 즉시 하향하였는데, 상이 특지(特旨)를 내려 참찬(參贊)으로 승진 제수하고 교서(敎書)를 내려 부르므로 두 차례나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에 입조(入朝)하여 탄식하기를, “나는 이미 늙었다. 천안(天顔)을 다시 뵙고 싶다.”하고 어전에 입시하자, 상이 간곡히 위로하였다.
공이 수만 언(數萬言)을 진대(進對)한 바, 모두 치도의 요점들이었다. 그러나 정신이 노혼(老昏)하여 십분의 하나도 다하지 못한 것을 깊이 개탄하고는, 다시 실봉(實封 봉하여 올리는 소장)을 올리려 하여 깊은 사색에 잠긴 지 여러 달만에 소를 올렸는데, 그 줄거리는, 전후 재변이 일어나게 된 까닭과 상심(上心) 병통의 근원을 다루었고, 또 동서(東西) 분당(分黨)의 폐단과 우계(牛溪)ㆍ율곡(栗谷) 양현의 도덕과 정암(靜菴)의 아름다운 도덕ㆍ학문ㆍ공로로도 묘액의 인가가 인색하다는 것을 극론하였으며, 맨 끝에는 남북 만이(蠻夷)의 사세로 보아 군정(軍政) 닦기를 바란다고 진언하였으므로 상이 융숭한 비답을 내리고 이어 소를 선사(繕寫)해서 들이도록 하였다.
그런데 시배(時輩)가, 공의 소에서 논한 붕당이란 어휘가 자기네들에게 불리하다 하여 양사(兩司)에서 합동으로 글을 올려 논핵하였고, 또 공의 소본(疏本)이 율곡 이 선생에 의해 수정되었다 하여 말하는 자들이, “이이(李珥)가 스스로 소를 초(草)해 놓고는, 백모(白某)를 달래어 올리게 하여 장차 문자(文字)로써 사람을 모함하려 한다.”하므로, 공이 소를 올리기를, “신은 본시 문장이 부족하여 이이에게 수정을 부탁한 것입니다. 옛날에 정자(程子)도 여공저(呂公著)를 대신하여 응조봉사(應詔封事)를 짓고 부필(富弼)을 위하여 산릉소(山陵疏)를 초(草)해 주었는데, 신도 평소 남에게 자신의 부족함을 숨긴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하므로, 상이 사실을 알고 위로해 주었다.
이로부터 공은 시배와 더욱 서로 어그러지게 되었다. 일찍이 수레를 타고 정암의 서원에 가서 지난 자취를 위아래로 살펴보며 차마 떠나오지 못하다가 그 녹봉을 몽땅 서원 창고에 귀속시켰다. 기묘년(1579, 선조 12) 9월 29일에 83세를 일기로 경제(京第)에서 별세하였다. 병이 나서 장사 지낼 때까지 상이 어의(御醫)를 보내어 진료하고 관원을 보내 문병하고 부의(賻儀)를 내리고 치제(致祭)를 명하며, 은상(恩賞)을 더하고 하교하기를, “현재(賢宰)가 가 버리니, 마음이 몹시 아프다.”하였다.
그해 겨울에 양주(楊州) 적석리(積石里)에 안장되었다. 공은 천품이 고매 활달하고 강개한 기절이 있었으며, 젊어서부터 도(道)에 뜻을 두고 현인이 되기를 희망하여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는 것을 구하지 않았으며, 조정에 나아간 뒤에도 더욱 스스로 정진하여 아무리 폐척(廢斥)을 당하여도 좌절하지 않았고, 을사사화 때에는 죽음을 무릅쓰고 항언(抗言)하여 곧장 한 손으로 세도를 붙잡고 인기(人紀: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를 확립시켰으니, 그 고충(孤忠)과 정기(正氣)가 산악을 뒤흔들고 성두(星斗)를 어루만질 만하므로, 명성이 일세에 충만하고 사론이 하나로 돌아왔으며, 계사(啓事)를 초할 적에는 유공 희춘(柳公希春)이 보고 혀를 내두르면서 장(壯)하다 하였고, 공을 미워하는 소인(小人)들도 탄복, 또는 부끄러워하였으니, 아, 이 어찌 세리(勢利)로써 유혹하고 위무(威武)로써 굴복시킬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은 조금의 풍상(風霜)만 겪어도 모두 꺾이게 마련인데, 공은 험난한 고비가 많을수록 분발하는 의지가 더욱 강하였으며,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에 헌신하는 마음이 연로(年老)해서도 변하지 아니하여, 일이 있어 진언할 때 반드시 그 소신을 다하고야 말았다.
말년에 소를 올릴 적에는 몸에 이미 병이 있었으나 사색에 열중하여 조금도 쉬지 않으므로, 자질(子姪)들이 나서서 간하였으나 일체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그 마음이 마치 온갖 물이 필경 동해(東海)로 흘러들어가는 것과 같아서 도저히 저지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대저 듣건대, 정암도 조정에 있을 때 의를 다하고 충을 기원하는 정성이 이와 같았다고 한다.
공은 아버지를 일찍 여읜 뒤에 모부인을 섬기는 데 반드시 그 뜻을 받들었고 형을 엄부(嚴父) 섬기듯 하였으며, 연산주가 혼학(昏虐)하여 민가(民家)를 철수하고 놀이터를 만들려 할 적에는 겨우 8세의 나이로 중사(中使)를 직접 만나서 주선과 응대를 잘하므로, 중사가 기이하게 여기어 그 집이 헐리지 않게 되었으며, 가세가 몹시 빈한하여 모부인이 밤새도록 길쌈할 적에는 공이 밤새도록 시좌(侍坐)하였다가 모부인이 취침한 뒤에야 잠자리에 들므로, 모부인이 안타깝게 여기어 매번 등불을 감춰 놓고 거짓 자는 체하다가 공이 잠든 뒤에야 다시 일어나곤 하였다.
하루는 ‘구용 구사(九容九思)’를 좌우에 써 붙인 다음,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앉은 지 3개월 만에 동배(同輩)들이 보고는 말하기를,
“그대의 용모와 사기(辭氣)가 이전과는 크게 달라졌다.”하였다.
진유(眞儒 조광조)를 사사(師事)하여 대도(大道)의 요체를 체득하여서는 소견이 더욱 높아지고 소양이 더욱 정대하여, 이해ㆍ우락 따위가 일절 그 마음에 집착됨이 없었으며, 만년에 덕기(德器)가 완성되어서는 너그럽고 평탄하고 간격을 두지 아니하여 남과 접촉할 적에는 폐부가 환히 보였고 남의 선(善)을 들을 적에는 지성으로 칭모(稱慕)하였으며, 남이 횡역(橫逆 횡포하여 상리(常理)에 어긋난 행위)으로 대해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지지 않았으며, 아무리 비소(卑少)한 이라도 자신의 허물을 말하면 반드시 기뻐하면서 바로 고쳤다.
평소 생활에 기호(嗜好)하는 바가 없어 의복ㆍ음식이 변변치 않았으며, 먼지가 방 안에 가득하였어도 소제하지 않고 늙도록 오직 성리학(性理學)만을 즐거워하여 낮에는 외고 밤에는 사색하다가 터득한 바가 있으면 바로 기록해 두었으며, 동지들이 찾아오면 흔연히 함께 강론하여 밤낮없이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참으로 학문에만 근면하여 나이가 늙어가는 줄도 몰랐다.
대저 공은 정암 선생에게 지성으로 신복하고 마음으로 도취하여 종신토록 경앙하였는데, 정암의 전체는 다 체득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정암과 비슷한 것으로써 스스로 일가를 이루어 모든 행사에 드러났고 또 이를 후학에게 알렸으니, 그 공로가 진정 적지 않다.
만약 하늘이 사도(斯道)를 도와서 사화가 일어나지 않고 공이 그 재주를 사문(師門)에 다하게 되었다면 그 성취가 어찌 여기에만 그쳤겠으며, 장년(壯年)에 실의(失意)에 빠지지 않고 그 포부를 펴게 되었다면 그 사업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아, 안타까운 일이다.
선조(宣祖)가 일찍이 염근(廉謹)으로 표창하였고 인조(仁祖) 때에 역명(易名 시호(諡號)를 받는 것)의 특전이 추서되었다. 우계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휴암은 이 다음에 마땅히 ‘근학 호문(勤學好問 학문에 근면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에 해당하는 문(文)자 시호를 받게 될 것이다.”하였는데, 세상에 공의가 없어 그 말대로 실현되지 아니하여, 아는 이들이 유감스럽게 여긴다. 남평(南平) 사민(士民)들이 사우(祠宇)를 세워 봉산(逢山)으로 사액(賜額)하였고 파산(坡山) 사람들도 율곡의 사우 옆에 제사를 드린다.
공은 본관(本貫)이 수원(水原)이다. 상조(上祖) 경신(景臣)은 고려 때 시중(侍中)이고, 증조 효참(效參)은 지평(持平), 조부 사수(思粹)는 참교(參校), 아버지 익견(益堅)은 왕자 사부(王子師傅)인데, 공의 영귀(榮貴)에 의해 다 관작이 추증되고, 어머니는 단양 우씨(丹陽禹氏)로 사직(司直) 종은(從殷)의 딸이다.
공의 초취(初娶)는 평택 임씨(平澤林氏)로 아들 유공(惟恭)을 두었으나 일찍 죽었고, 후취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만호(萬戶) 찬(璨)의 딸이요 문성공(文成公) 유(裕)의 후예로 부덕(婦德)이 매우 높았고 모든 아들에게 늘 급류용퇴(急流勇退 벼슬길에서 기회를 보아 용기 있게 물러나는 것)를 가르쳤으며, 두 아들 중에 유항(惟恒)은 현령(縣令), 유함(惟咸)은 승지(承旨)이고, 주부(注簿) 조감(趙堪)ㆍ안수기(安守基)ㆍ진사(進士) 신세영(辛世英)ㆍ의령 현감(宜寧縣監) 이윤조(李胤祖)ㆍ현감(縣監) 임색(任穡)은 다섯 여서(女婿)이다.
유항은 2남 5녀로 아들 효민(孝民)은 현감, 제민(悌民)은 생원(生員)이고, 여서는 첨정(僉正) 김기원(金期遠)ㆍ이상(李詳)ㆍ최흥운(崔興蕓)ㆍ유신붕(柳信朋)ㆍ이극(李𧩦)이다. 유함은 5남 1녀로 아들은 해민(海民)ㆍ현감 선민(善民)ㆍ도사(都事) 신민(信民)ㆍ첨지(僉知) 현민(賢民)ㆍ헌민(憲民)이고, 여서는 김흥록(金興祿)이다.
조감은 1남 1녀로 아들 의도(毅道)는 첨정(僉正), 여서 성문준(成文濬)은 현감이다. 안수기는 1남 1녀로 아들은 건(鍵), 여서는 이경진(李景震)이다. 신세영은 후사(後嗣)가 없고, 의령 현감은 1남 1녀로 아들은 첨정(僉正) 춘영(春英), 여서는 조대굉(趙大宏)이다. 임색은 1녀를 두어 현령 이중기(李重基)에게 출가시켰다.
효민의 아들은 봉사(奉事) 홍명(弘命)ㆍ첨지(僉知) 홍성(弘性)ㆍ홍중(弘中)ㆍ군수(郡守) 홍일(弘一)이고, 제민의 아들은 좌랑(佐郞) 홍우(弘祐)ㆍ참봉(參奉) 홍적(弘績)이고, 선민의 아들은 홍망(弘望)ㆍ홍기(弘基)ㆍ홍유(弘猷)이고, 신민의 아들은 홍규(弘規)ㆍ홍겸(弘兼)이고, 현민의 아들은 홍제(弘濟)ㆍ홍윤(弘胤)ㆍ홍원(弘源)이다. 지금까지 4, 5세(世)가 내려오는 동안에 내외 자손이 매우 많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는데, 그 외손으로 가장 드러난 이로는, 영(令) 조일(趙鎰), 좌랑(佐郞) 조익(趙釴), 첨정(僉正) 성역(成櫟), 첨지(僉知) 성직(成㮨)과 이시재(李時材), 동지(同知), 이행건(李行健), 우의정(右議政) 이행원(李行遠), 참판(參判) 이시해(李時楷)와 이시매(李時楳), 통정(通政) 신상(申恦), 감사(監司) 이만웅(李萬雄), 장령(掌令) 정시성(鄭始成), 군수 정시대(鄭始大), 현령(縣令) 조봉원(趙逢源), 정언(正言) 최상익(崔商翼) 등이다.
처음에 공이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 성공(成公)과 동문우(同門友)이므로 우계 선생이 공을 매우 공경스럽게 섬겼고, 또 일찍이 공의 시종을 기록하여 행장을 만들었는데, 이번에 홍일(弘一)ㆍ홍우(弘祐)가 장차 묘도(墓道)의 비를 세우기 위하여 나에게 글을 청하였다.
그러나 내가 생각건대, 공의 성덕 대업을 나 같은 후생 말학이 감히 표현할 바 아니므로 삼가 우계가 찬(撰)한 장절록(狀節錄)에 의거하여 대충 서술하고 다음과 같이 명한다.
기자의 교화 멀어져 / 箕條邈焉
문도 쇠하고 지언이 없어졌다가 / 文弊言堙
정암이 갑자기 나서 / 眞儒勃興
도가 넓어지고 학이 순수해졌는데 / 道宏學醇
누가 그 업적이었던가 / 孰承其緖
위대한 휴암이 / 偉哉休菴
마치 정자 문하의 / 如在程門
남쪽의 양씨와도 같았네 / 楊氏于南
기린이 노교에서 죽고 / 麟死魯郊
통곡 소리 강당에 가득하니 / 慟纏鱣堂
저 으슥한 빈 골짜기에 / 閟彼空谷
나의 패물 깨끗하네 / 我佩潔芳
천리(天理)에 순환(循環) 있어 / 理有伸屈
묘당(廟堂)에 진출된 바 / 乃進王庭
원우 시대의 남은 자취로 / 元祐餘蹤
외로이 떠돌기도 하였지만 / 羈旅孤惸
중류가 한 데 휩쓸린 가운데 / 衆流靡靡
지주(砥柱)처럼 우뚝 서 있었네 / 一柱亭亭
갑진 을사 두 해 사이에 / 時當辰巳
중종 인종 이어 승하하니 / 二聖繼陟
소인의 그지없는 흉계로 / 小人究凶
많은 군자 어육(魚肉)되어 / 君子爲肉
명신(名臣) 구신(舊臣)이 / 厖臣舊弼
입 봉하고 손 움츠릴 제 / 口緘手縮
공이 그 충의 뽐내어 / 公奮其忠
맹분(孟賁) 하육(夏育)도 꺾을 수 없었고 / 賁育莫奪
방랑하고 곤궁한 중에서도 / 流離困㞃
그 마음 더욱 결백하였네 / 我心彌白
선조가 즉위 초에 / 宣廟之初
영재(英才)를 그리다가 / 寤寐豪英
단호히 공을 기용하여 / 起公于廢
그 대우 날로 더하였네 / 日加恩榮
연로할수록 장한 마음 / 暮年壯心
돌이 아니거니 뉘라서 굴릴쏜가 / 匪石誰轉
그러나 일에는 뒤틀림이 많아 / 事喜乖張
끝내 그 포부 펴지 못하였네 / 卒莫我展
다만 사문을 숭앙(崇仰)하는 마음 / 惟有師門
아홉 번 죽은들 어이 잊으랴 / 九死可忘
마치 높은 산 큰길과 / 高山景行
맑은 물 가을 햇볕에 비하였네 / 江漢秋陽
끼친 향기 찾아내고 / 尋其賸馥
남은 광채 발양하여 / 發其餘光
사문을 이었으니 / 斯文不絶
이게 누구의 공로인가 / 繄誰之功
참다운 근원 소통되어 / 眞源旣導
온 냇물이 동해(東海)로 흐르듯 하니 / 百川其東
이를 무엇으로 신빙할까 / 曷徵其信
우계(牛溪)의 정확한 글 있네 / 有覺坡翁
지금 이 명 지어 / 我作銘辭
먼 후세에 알리는 바 / 以告無窮
어이 감히 지었다 하겠는가 / 豈敢作之
우계의 말 따랐을 뿐일세 / 坡翁是宗
ⓒ한국고전번역원 | 이재수 (역) |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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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休菴白公神道碑銘 幷序
靜菴趙先生以聖賢之學。興致澤之治。旋遭奇禍。其言行之可爲世法者。乃爲世所諱。其道幾乎熄矣。不有親承旨訣。篤信守死 。公誦於衆咻之中。使其復明於世者。斯文安得有今日乎。則休菴忠肅白公諱仁傑。字士偉。其人也。蓋當我中廟盛際。群賢蔚起。金公湜以高才邃學。長成均。公慨然有求道之心。每諸生隨例講學之外。公獨執經難疑。必得其義理之正然後乃已。尤尊信趙先生。委己而師事之。就其宅傍。構室以居焉。旣而北門禍作。師友盡殲。公慟念悲傷。卽入金剛山。久然後反。間游大學。出言制行。不改師門舊法。衆皆指目。文網將加。公故稍去崖角。又爲大夫人年高。遂取司馬及第。時輩斥以趙先生徒。擯隷成均館。久後始授藝文館檢閱。故事政曹開政。則藝文館一員詣政廳。書其得失。公以眇然新進。能復其廢。執筆往惟謹。政曹甚憚之。陞爲禮曹佐郞。爲養爲南平縣監。建學擇師。以敎其人。又親至爲正句讀。如明道晉城之爲。均賦薄斂。以厚民生。倉厫廨舍。廢無不修。有以關節撓法者。公一斥之。以治行第一。特陞其資。以獻納召。有忌而譖之者。還仍舊任。竟拜持平。轉戶曹正郞兼春秋館記注官。乙巳。仁廟昇遐。明廟卽位。文定大妃下密旨于尹元衡。使亟除 仁廟舅尹任及大臣柳灌,柳仁淑等。公時復爲獻納。主謀者難公。使許磁諭公。指磁舊要也。磁要說百端。公拒不聽。磁怒曰。所以先事委曲者。知有老親也。非細故也。或曰。辭疾可免乎。公曰。臨事辭難。吾不爲也。翌日。臺諫齊會。議多從公。事不得發。於是鄭順朋,李芑,林百齡,許磁。徑詣闕請罪三人。時李晦齋彥迪爲院相。亦不敢救公。將與同列爭之。同列縮頸無敢應者。公乃獨啓曰。國家事當出於光明正大。今罪此三人而不廷議。不列罪名。后弟奉密旨行事。何以示後世。且使奸人暗地構煽。以陷所惡。其流之害。何可勝言。元衡承內旨。以肆其惡。大司憲閔齊仁聞有內旨。伺候諸宰家。有同傳令軍卒。請皆抵罪。又駁兩司失其言責。文定大怒。下公于吏曰。任等謀危宗社。此人託公護賊。事將叵測。時北窓鄭公𥖝。順朋子也。牽裾以諫曰。白公忠直。今若見殺。父將得罪萬世。順朋乃疏曰。白某不知國家重事。徒言密旨之非。愚妄之發。不必深罪。文定由是怒霽。只遞官歸坡州。於是柳,尹三人。皆以逆論死。越三年丁未。鄭彥愨以良才壁書告變。因加罪乙巳人。或死或流。公遂配安邊。未幾大夫人歿。公以不得奔喪。號擗倍常。越五年有大赦。放還田里。公素貧。至是生理益蕭然。固晏如也。先是己酉。有奸人又上變。乙巳餘人。鮮有免者。公亦不以爲意。客至。觴酒歌呼。談論自若。人不見其愁居懾處之容也。每夜必誦太極圖說。程朱諸書。未嘗不在左右。居廿餘年。元衡敗死。公議稍張。公敍復歷四官。爲楊州牧使。爲民興利去弊。纖悉無遺。民立石頌之。宣廟卽位。務求賢俊。公甚負朝野之望。數月之間。自弘文校理。歷直提學陞承旨。移吏曹參議,大司諫。時仁順王后垂簾。公進曰。嗣君不至幼沖。女主不可以久聽國政。仁順不悅。然亦未幾撤簾。公爲上進箚言。古昔聖王。先正厥心。以立其本。堯舜所謂精一執中。卽其事也。殿下體此而能建其極。則群下莫不精白一心。丕應徯志矣。殿下生長閭閻。此商王舊勞於外。知小人之依者。誠能終始典學。遜志時敏。則心與理一。政學相成矣。又曰。所謂敬者。所以成始成終者也。殿下念茲在茲。動靜勿失。則所謂篤恭而天下平者。可馴致也。又曰。吾東方道學。自鄭夢周,金宏弼。始有淵源。趙光祖以傑出之才。闡程朱之學。循蹈規矩。非禮不動。大礪名節。興起斯文。二帝三王之盛。庶幾復見。而衮,貞肆其鬼蜮。竟致冤死。朝野之痛。久而彌深。謂宜推奬眞儒。贈以高官美諡。從祀文廟。則天理可明。人心可正。道德可一。而風俗可淳矣。遞授工曹參議。旋復前職。上議祭私親。公以爲繼統之義雖嚴。而私恩不可盡絶。今遣祭官。以伸至情。無不可者。言者以爲非是駁遞。公復爲工曹參議。轉大司成。公因遂退歸。上思公風節。屢以兵曹參知,大司諫召。皆固辭。俄特陞嘉善。拜大司憲。公三辭。下手札曰。君子生世。致君堯舜。垂名竹帛可也。卿忠誠貫日月。節義凌氷霜。宜速赴召。公遂趨朝。未幾遞。屢拜同樞,兵工曹參判。兼經筵義禁府事。復長憲府者再。嘗以天旱上疏曰。昔漢臣有言。天災不痛於肌膚。震食不損於聖體。故蔑三光之謬。輕上天之怒。此言眞今日藥石也。願殿下惕然自省 。痛洗弊習。進上貢物。量宜減損。諸色卒隷。均其苦歇。除一族之侵。禁無名之稅。可以利國便民者。期於必行。則及今猶可爲也。今旣疏釋幽枉。然孰有加於乙巳己酉之冤乎。誠願渙發雷雨。其時被罪者。悉復其官。籍沒之物。亟令還給。則忠魂感泣。士林興起矣。且李滉酷好學問。講明性理。如欲圖治。非委任斯人則不可。又申靜庵從祀之請。上多採用焉。廷議又欲削乙巳僞勳。柄臣有不欲者。公面責之曰。此議不行。則公罪不可辭。又自兵曹。歷刑曹移大憲。忽有飛語公將論朝貴若干。都下喧騰。公曰。我心事如靑天白日。恨不早退。卽謝歸。後人有上書言。白某謀害士林。不售而退。上怒曰。白某精忠貫日。至欲究治其人。公居官不受騶直。有所得。輒以頒諸親族。旣退。無朝夕之資。監司尹公根壽以狀聞。再命賜以米豆。上章謝。仍復請以趙光祖從祀文廟。先是公欲請趙先生廟額。力疾入京。則院生已陳乞而未獲。卽還歸。特旨陞授參贊。下書徵。再辭不許。遂還朝。始至歎曰。吾已耄矣。思欲復覩天顏。乃入侍。上勞問甚至。公進對數萬言。皆治道之要。然耄聵不能十一。深自慨歎。復欲實封以進。覃思苦索。累月乃上。大槩前後致災之由及上心受病之根。又極論東西分黨之弊。又言牛溪,栗谷兩賢道德。又極陳靜庵道德學問事功之懿。而惜院額之靳。末言南北戎蠻形勢。講修軍政。上優答。更命繕寫以入。時輩以所論朋黨者。爲不利於己。兩司交章劾之。又嘗以疏本託栗谷李先生修潤。言者謂李珥自草疏。誘白某以進。將文致之。公疏言臣文墨不足。使珥修潤。昔程子代呂公著。作應詔封事。爲富弼草山陵疏。臣亦未嘗向人隱其實矣。上釋然慰諭之。自是益與時輩相戾。嘗命駕往靜菴書院。俛仰舊跡。徘徊不忍去。悉以其俸賜歸之院庫。己卯九月廿九日。卒于京第。年八十三。自病及葬。醫問賻祭。恩數有加。下敎曰。賢宰逝矣。予極驚痛。其冬。葬于楊州積石里。公高邁疏曠。慷慨有氣節。自少志道希賢。不求溫飽。立朝以後。益自淬礪。雖遭廢斥。不沮不挫。至於乙巳之禍。冒死抗言。直欲以隻手扶持世道。表正人紀。其孤忠正氣。可以撼山岳而摩星斗。是以聲名洋溢乎一世。士論翕然歸之。其草啓時。柳公希春爲之吐舌曰。壯哉。小人之異己者。亦歎服羞愧。嗚呼。此豈勢利之所能移。威武之所能屈哉。餘人少經風霜。無不摧折。公履險愈多。厲志彌苦。其忠君許國之心。白首不渝。因事獻言。必極其意而後已。末年上章。身已屬疾。而思慮積苦。不得少休。子姪交諫。皆斥退之。其心如水必東。不可止遏。蓋聞靜菴當朝。其畢義願忠之誠如此云。公早孤。事母夫人。必順其意。事兄如嚴父。燕山昏虐。毀撤民家。公八歲。出見中使。周旋應對。中使異之。其家得不毀。母夫人貧甚。達夜執女紅。公侍坐終夜。必待母夫人就枕然後乃寢。母夫人憐之。每韜燈假寐。公旣睡乃起。一日書九容九思於座右。潛心靜坐。居三月。同輩見之曰。君容貌辭氣。大異於前。及事眞儒而得聞大道之要。則所見益高。所養益正。利害欣戚。一無所入於其心。晩而德器成就。則寬和坦夷。不設畛域。人與之處。洞見肺腑。聞人之善。至誠稱慕。橫逆之來。受而不較。雖卑少者。苟言其過。則必喜聞而亟改之。平居無所嗜好。服食麤疏。凝塵滿室而亦不掃也。唯性理之學。旣老猶耽。晝誦夜思。有得則輒識之。同志來見。則欣然講討。窮晝夜不倦。眞所謂勉焉孶孶。不知年數之不足者歟。蓋公於靜菴先生。誠服而心醉。沒身景仰。雖未知盡得其全體。然以其相近者。自成一家。見諸行事而以詔後生。則其功眞不少矣。若使天相斯文。士禍不作。使公得竭其才於師門。則其所成就。豈止於此。而強盛之年。不使坎壈羈窮。以展其蘊。則其事業又豈可量也。嗚呼惜哉。宣廟嘗褒公以廉謹。仁祖朝追賜易名之典。牛溪先生嘗曰。休庵他日當得勤學好問之文。世無公議。其言不行。識者恨之。南平士民爲立祠宇。賜額曰蓬山。坡山人亦俎豆于栗谷院廟之傍。公水原人。上祖景臣。爲高麗侍中。曾祖效參。持平。祖思粹。參校。考益堅。王子師傅。以公貴皆有追爵。妣丹陽禹氏。司直從殷女。公初娶平澤林氏。生一男曰惟恭。早夭。繼媲順興安氏。萬戶璨女。文成公裕後也。婦德甚修。敎諸子。常以急流勇退爲戒。生二男。惟恒縣令。惟咸承旨。主簿趙堪,安守基,進士辛世英,義寧監胤祖,縣監任穡。其五女壻也。惟恒二男五女。男曰孝民縣監。悌民生員。壻曰僉正金期遠,李詳,崔興雲,柳信朋,李𧩦。惟咸五男一女。男曰海民,善民,縣監信民,都事賢民,僉知憲民。壻金興祿。趙堪一男一女。男毅道僉正。壻成文濬縣監。安守基一男一女。男鍵。壻李景震。辛世英無後。義寧監一男一女。男李春英僉正。壻趙大宏。任穡一女壻李重基縣令。孝民男奉事弘命,僉知弘性,弘中,郡守弘一。悌民男佐郞弘祐,參奉弘績。善民男弘望,弘基,弘猷。信民男弘規,弘兼。賢民男弘濟,弘胤,弘源。至今四五世內外子孫。多不能盡錄。而其外裔之顯者。令趙鎰,佐郞釴,僉正成櫟,僉知㮨,李時材,同知李行健,右議政行遠,參判李時楷,時楳,通政申恦,監司李萬雄,掌令鄭始成,郡守 始大,縣令趙逢源,正言崔商翼。始公與聽松成公爲同門友。牛溪先生事公甚謹。嘗記公始末以爲狀。今弘一,弘祐將樹墓隧之碑。要余書其事。余惟公盛德大業。非後生末學所可形容。謹將牛溪之狀。節錄如右。而又係之銘。銘曰。
箕條邈焉。文弊言堙。眞儒勃興。道宏學醇。孰承其緖。偉哉休菴。如在程門。楊氏于南。麟死魯郊。慟纏鱣堂。閟彼空谷。
我佩潔芳。理有伸屈。乃進王庭。元祐餘蹤。羈旅孤惸。衆流靡靡。一柱亭亭。時當辰巳。二聖繼陟。小人究凶。君子爲肉。
厖臣舊弼。口緘手縮。公奮其忠。賁育莫奪。流離困㞃。我心彌白。宣廟之初。寤寐豪英。起公于廢。日加恩榮。暮年壯心。
匪石誰轉。事喜乖張。卒莫我展。惟有師門。九死可忘。高山景行。江漢秋陽。尋其賸馥。發其餘光。斯文不絶。繄誰之功。
眞源旣導。百川其東。曷徵其信。有覺坡翁。我作銘辭。以告無窮。豈敢作之。坡翁是宗。<끝>
宋子大全卷一百五十四 / 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