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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북도 병마절도사 홍화보 묘갈명(咸鏡北道兵馬節度使洪和輔墓碣銘)
공(公)의 휘(諱)는 화보(和輔)요, 자(字)는 경협(景協)이요, 풍산 홍씨(豐山洪氏)이다. 대사헌(大司憲) 휘(諱) 이상(履祥)에 이르러 크게 드러났는데 공은 그분의 5세손이다. 아버지는 휘가 중후(重厚)로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요, 할아버지는 휘가 만기(萬紀)로 좌부승지(左副承旨)인데, 이는 아들이 높은 벼슬을 하여 모두 높은 위계에 증직(贈職)된 것이다. 어머니 성씨(成氏)는 사서(司書) 휘 준(儁)의 따님이다.
공은 기골이 가냘파서 마치 부인(婦人)과 같았으나, 용맹은 남보다 뛰어났으며, 타고난 성품이 호탕하여 권략(權略)과 웅담(雄談)을 좋아하였다. 공의 아내 최 부인(崔夫人)은 고(故) 서평군 요(西平君撓)의 질녀(姪女)이다. 공이 신혼(新婚) 때 서평군의 말을 타고 성밖으로 나가 노닌 적이 있었다.
그때 어떤 집을 지나려니 울음소리가 매우 슬프게 들려오므로 그 까닭을 물으니, 집안 사람 모두가 염병에 걸려 죽고 딸 하나만이 살아 남았으므로, 너무 슬픈 나머지 염습(殮襲)도 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공은 곧 말을 저당 잡혀서 엽전 1백 냥(兩)을 마련하여 주고는 돌아와 서평군에게 그 일을 알렸다.
이미 장성하여서는 문사(文史)를 공부하여 시를 잘 지었으며 변려문(騈儷文)에는 더욱 익숙했으나, 과거에 여러 번 실패하여 이름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사람의 운명을 잘 보는 자에게 가서 점을 치니, 그 점쟁이가 산대를 벌여놓고 한참 있다가 혀를 차며 혼잣말로, “아깝구나, 그 길로 들어 선 것이!”하였다.
공이 묻기를, “그 길이라는 것이 무엇이오?”하니, 점쟁이가 대답하기를, “일찌감치 무(武)의 길로 갔더라면, 당연히 대장(大將)은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조금 늦었지만, 아직 해볼 만합니다.”하자, 공이 말하였다. “나는 무인이 될 수 없소.” 얼마 지나서 말을 타고 교외(郊外)에 나갔다가 말이 뛰는 바람에 공의 왼쪽 다리가 등자에 끼었다.
공이 왼손으로는 안장의 꼭대기를 안고, 오른손만으로 말을 달렸다. 도성(都城) 안으로 돌아오다가 길옆에 말뚝이 하나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잡고 온 힘을 쏟으니, 안장이 찢어지면서 말은 달아나고 공은 몸을 뺄 수 있었다. 사람들이 늘어서서 이를 보았는데 장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공은 평소에 병법(兵法)을 좋아하여 온갖 진법(陣法)을 익혔으며, 또 스스로 오공진(蜈蚣陣)과 칠성진(七星陣) 등을 만들었는데, 친구들 중 알아주는 이가 자못 있었다. 영조『英祖, 신사년(1761, 영조 37)』에 장상(將相)과 대신(大臣) 들에게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장수가 될 만한 자를 천거하도록 하였더니 모두들 공을 추천하였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김공 성응(金公聖應)이 힘써 주장하여 마침내 공을 훈련원 초관(訓鍊院哨官)에 임명하였다.
며칠 뒤 국자시(國子試)가 있었는데, 공이 남몰래 시장(試場)에 들어가 시권(試券)을 바쳤더니, 1등에 뽑혀 붉은 비점(批點)이 찬란하였다. 상이 이르기를,“군율(軍律)에 어긋나는 짓을 했으니, 대장군(大將軍)에게 죄주게 하라.”하니, 선전관(宣傳官)으로 전보(轉補)되었다.
그때 마침 내원(內苑)에서 활쏘기 시험이 있었다. 이때 공이 맞추지 못했는데도 상께서는 북 치는 사람을 죄주었다. 그리하여 북소리가 울리니, 마침내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입신(立身)하여 임금을 섬김에는 문(文)과 무(武)의 구별이 없으니, 그대는 마음을 편히 지니라.”하였다.
공이로부터 다시는 감히 말을 하지 못하였다. 임오년(1762, 영조 38) 여름에 동궁(東宮)이 편치 않을 때 태의(太醫)인 방태여(方泰輿)란 자가 사사로이 청심환(淸心丸)을 지어 올리니, 상이 공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빨리 방태여의 머리를 베어 오라.”하였다.
공이 칼을 뽑아들고 뛰어가서 그의 상투를 잘라다가 바치니, 상께서 매우 기특하게 여기시어 더욱 총애하였다. 사복내승(司僕內乘).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 훈련원정(訓鍊院正). 내금위장(內禁衛將)과 같은 직임은 대개 차례를 뛰어 넘어 제수된 것이며, 장연(長淵). 죽산(竹山)의 부사(府事)와 벽동군수(碧潼郡守), 영종(泳宗). 파주(坡州)의 방어사(防禦使) 등은 외임(外任)이었다.
을미년(1775, 영조 51)에 특별히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되었고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겸하였으니, 문직(文職)이다. 나아가서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가 되었다. 병신년(1776, 영조 52)에 영조가 승하하였는데, 이때 홍국영(洪國榮)이 권력을 쥐고 안팎으로 휘둘렀다.
그러나 공은 평소에 그 사람을 가볍게 보고 전후로 외군(外郡)을 역임하면서도 뇌물을 바친 적이 없었다. 홍국영이 마음속에 품고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남몰래 관찰사(觀察使) 이보행(李普行)을 시켜 공을 모함하여, 욕심이 많고 방종하여 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아뢰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마침내 운산(雲山)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막 귀양길을 떠나려 할 적에 공을 위해 꾀를 내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그대가 비록 떠나가더라도 편지와 뇌물을 마련하여 덕로(德老)에게 사례하면, 덕로의 마음을 바꿀 수 있을 것이오.”하였다. 공이 그를 비웃으며, “자네는 덕로를 태산(泰山)처럼 보는가 본데, 그는 빙산(氷山 권력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 라는 의미)에 지나지 않네.”하였다.
그때 귀양길을 떠나는 공을 위로하기 위해 자리에 모여든 손님들이 10여 명쯤 되었는데, 혀를 내두르면서 크게 놀라 공을 위태롭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덕로는 홍 국영의 자(字)이다. 그 뒤 몇 년이 지나 사면되어 돌아와 다시 승지(承旨)에 제수되었는데, 늘 관찰사로 나가는 신하가 있을 때면 상께서 특별히 공에게 명하여 교서(敎書)를 짓도록 하였으니, 이것은 학사(學士)의 직책이다.
자주 사대(賜對)하여 병법을 논하기도 하고 혹은 운(韻)을 불러 시를 짓게도 하였는데, 모두 상의 뜻에 맞아 여러 번 포장을 받았다.
그래서 크게 들어 쓰려고 하였는데 홍국영이 매우 꺼렸다. 하루는 상께서 공에게 전(殿)의 계단을 뛰어오르라고 하였다.
공은 나이가 이미 50여 세가 되어 재력(材力)이 쇠모하여 못하겠다고 사양하다가 강권한 뒤에 뛰었으나, 그 반도 미치지 못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속이는 것이다.”하고는, 장신(將臣)을 시켜 합문(閤門) 밖에서 공에게 곤장을 치게 하여 거의 죽게 된 뒤에 그만두었다.
홍국영이 패한 뒤에 상께서 공을 기억하여 다시금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 제수하였는데, 또 어사에게 모함당해 숙천(肅川)으로 귀양갔다. 조금 있다가 사면되어 돌아왔고 다시 승지에 배수(拜授)되었다. 을사년(1785, 정조 9) 겨울에는 강계부사(江界府使)에 제수되었는데, 그때 온 세상이 채공(蔡公)을 공격하여 친지(親知) 가운데에도 그를 배반하는 자가 많았다.
공이 분개하여 시를 지어서 비유하였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어느 뉘 양 임하를 저버리지 아니했나 / 何人不負楊臨賀
그런 뒤에야 대장부라 할 수 있으리 / 然後方稱大丈夫
정미년(1787, 정조 11)에는 회령 부사(會寧府事)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품계가 가선(嘉善)에 올라 부총관(副摠管)과 여러 영(營)의 아장(亞將)을 지냈다. 얼마 안 있어 함경북도 병마절도사(咸境北道兵馬節度使)가 되었다가 돌아와서 다시 아장이 되었다.
신해년(1791, 정조 15)에는 황해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가 4월 29일 황주(黃州)에서 졸(卒)하였으니,나이 66세였다. 공은 몸이 약하여 옷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았고 활쏘기에서도 나뭇조각 하나도 꿰뚫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나 병법에는 밝아 재략(才略)이 많았는데 나라가 평온하고 사방에 일이 없었으므로 공명(功名)을 드러낼 수가 없었다.
최씨부인(崔氏夫人)에게서 딸 하나를 두었는데,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인 최양우(崔陽羽)에게 시집갔다. 후부인 이씨(李氏)에게서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원호(元浩)와 윤한(允漢)이며, 딸은 나의 아내가 되었다. 서자녀(庶子女)는 모두 어리다.
나는 일찍부터 공의 지우(知遇)를 받아 나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다. 이제 공은 갔으니 무엇으로 보답하랴. 고양(高陽)의 대장리(大莊里) …… 원문1자 빠짐 …… 벌은 곧 공의 무덤이다. 지금 돌을 세워 표(表)하려고 하는데, 내가 어찌 명(銘)을 짓지 않으리오.
명은 다음과 같다.
날쌔고 날쌘 호신(虎臣)이 / 矯矯虎臣
일찍이 봉액(逢掖)에 숨었었네 / 蚤隱逢掖
뛰어난 지략은 드러나지 못했지만 / 龍韜其鬱
시책(蓍策)에 나타났네 / 見乎蓍策
왕께서, 너는 오너라 / 王曰汝來
나는 너를 놓지 않으리라 / 予不汝釋
너의 붓 버리고서 / 舍汝手錐
이 쇠 갑옷을 입어라 / 衽玆金革
교에 보루를 쌓지 않으니 / 郊不築壘
너는 장차 무엇을 하려느냐 / 汝將安役
저 금화당(金華堂)에 올라가서 / 躋彼金華
너의 축적을 쏟아라 하였네 / 瀉汝蓄積
왕의 말씀 윤을 내어 / 潤色王言
보불(黼黻)이 빛났어라 / 黼黻其赫
공을 무인(武人)이라 하나 / 謂公其武
이 비석을 보라 / 視此貞石
<끝>
[주해]
[주01] 봉액(逢掖) : 봉액은 “봉액지의(逢掖之衣)”라는 말로 소매가 큰 옷을 말하는데, 유자(儒者)의 옷을 가리킨다.《禮記 儒行》
[주02] 보불(黼黻) : 고대 예복(禮服)에 놓은 수(繡)로 보(黼)는 손잡이가 없는 도기(陶器) 모양이고, 불(黻)은 ‘己’ 자 두 개를 서로 반대
로 한 것임. 여기에서는 높은 벼슬에 오름을 뜻한다.
다산시문집 제17권 / 묘갈명(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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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咸鏡北道兵馬節度使洪公墓竭銘
公諱 和輔 字景協。豐山之洪。至大司憲諱 履祥 而大顯。公其五世孫也。父諱 重厚 同知敦寧府事。祖父諱 萬紀 左副承旨。以子貴皆贈峻秩。母成氏司書諱 儁 女。公肌骨纖束若婦人。而驍勇過人。性跅弛好權略雄談。公妻崔夫人。故西平君撓姪也。方公新婚時。騎西平君之馬。出遊城外。過一家有哭聲甚哀。問之全家死於瘟。唯一女獨存。哀不能殮也。公卽典馬取百緡錢以予之。還報西平。旣長績文史善爲詩。尤工駢儷。然屢屈科擧。無所成名。乃就善籌命者卜之。布筴有頃。咄咄然自語之曰惜乎。由厥路。公曰厥路爲何。曰早從武路。當至大將。今差晚。猶可及圖。公曰吾不能爲武人矣。旣而騎馬出郊。馬橫而公之左脚絓於鐙。公以左手抱鞍峯。獨以右手與馬齊動。還至都中。於路傍遇一椓。遂據而奮其力。鞍裂馬奔而公得脫。觀者如堵。莫不壯之。而公素好兵法。習諸陣圖。又自制蜈蚣陣七星陣。親故頗有知者。英宗辛巳。令將相大臣薦文武兼備可爲將帥者。僉以公薦。而金公 聖應 力主之。遂以公隷訓鍊哨官。後數日値國子試。公潛入場納卷。中一等。硃批燦然。上曰軍律不宜然。令大將軍罪之。轉補宣傳官。方內苑試射。公實不中。而上罪鼓人。於是鼓聲至。遂登武科。上曰立身事君。文武無別。爾其安之。公自是不敢復言。壬午夏。東宮不豫。有太醫方泰輿者。私進淸心丸。上顧公曰亟斬泰輿頭來。公拔劍趨而往。斷其髻而獻之。上大奇之。愈益寵。若司僕內乘,都摠府都事,訓鍊院正,內禁衛將。皆不次除授。若長淵,竹山府使,碧潼郡守,永宗,坡州防禦使。其外任也。乙未特除同副承旨兼經筵參贊官。文職也。出爲全羅左道水軍節度使。丙申英宗登遐。時洪國榮權傾內外。而公素輕其人。前後居外郡。未嘗餽遺。國榮心銜之。至是陰令觀察使李普行誣奏公貪縱不法。遂謫雲山。方行有爲之謀者曰子雖去。留書與賄。謝德老。其意可轉也。公哂之曰公視德老爲太山乎。是亦氷山耳。時座客以慰餞至者十數人。莫不大驚吐舌。爲公危之者。德老國榮字也。後數年赦還。復除承旨。每有藩臣出。上特命公撰敎書。此學士職也。數賜對論兵。或命韻賦詩。咸稱上旨。累加褒獎。方將大用。國榮深忌之。一日上令公超上殿陛。公年已五十餘。材力衰鈍。辭不能。強而後作。未至其半。上曰詐也。令將臣杖公於閤門之外。殊而止。國榮之敗。上追念公。復除公慶尙右道兵馬節度使。又爲御史所陷謫肅川。尋赦還。復拜承旨。乙巳冬。除江界府使。時擧世攻蔡公。親知多畔之者。公慨然賦詩自況。有曰何人不負楊臨賀。然後方稱大丈夫。丁未除會寧府使不赴。陞嘉善爲副摠管諸營亞將。尋出爲咸鏡北道兵馬節度使。旣還復爲亞將。辛亥爲黃海道兵馬節度使。四月二十九日。卒于黃州。壽六十六。公身若不勝衣。射不能穿札。然曉兵法多才略。値國家承平。四郊無警。故功名無所著。崔夫人有一女。適崔陽羽司憲府監察。後夫人李氏擧二男一女。男元浩允漢。女爲鏞妻。庶子女竝幼。鏞早受公知。期許甚大。今公逝矣。何以報焉。高陽大莊里負 缺 之原。卽公衣履之藏。今將立石以表之。鏞安得不銘。銘曰
矯矯虎臣。蚤隱逢掖。龍韜其鬱。見乎蓍策。王曰汝來。予不汝釋。舍汝毛錐。衽玆金革。郊不築壘。汝將安役。躋彼金華。瀉汝蓄積。潤色王言。黼黻其赫。謂公其武。視此貞石。<끝>
第一集詩文集第十七卷○文集 / 墓竭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