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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4. 7. 2. 19:57
■ 보재 이상설선생(溥齋李相卨先生)
(1870. 12. 7~1917. 3. 2)
김도형(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1. 학문과 관인생활
이상설 선생은 1870년 음력 12월 7일 충청북도 진천군(鎭川郡) 덕산면(德山面) 산척리(山尺里) 산직마을에서 이행우(李行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고, 아명은 복남(福男, 相男),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라고 하였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재동(才童)-신동(神童)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총명한 아이였기 때문에 그가 7세 때인 1876년 참의를 역임한 동부승지 이용우(李龍雨)에게 출계하여 그의 양자가 되어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서울에서 이제촌(李濟村)이라는 스승으로부터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16세 무렵에는 박의암(朴毅菴)이라는 한학자로부터 본격적으로 한학을 수학하게 되었다.
선생은 총명한 두뇌와 탁월한 이해력으로 주위를 놀라게 하였으며, 한학뿐만 아니라 근대적 학문도 거의 독학으로 도달한 비범한 인물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부단한 학구열로 17세 때는 건강을 해쳐 부득이 학업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탐구열도 대단한 인물이었다.
타고난 총명함과 학문에 대한 열의로 선생은 20살이 넘으면서 이미 율곡 이이를 조술(祖述)할만한 큰 학자로 칭송되었다. 따라서 1894년(고종 31년) 25세 때 조선조의 마지막 과거(갑오문과)에 급제하기에 이르렀다. 관계에 진출한 선생은 화직(華職)이라 할 수 있는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제수되었고, 이어 세자시독관(世子侍讀官)과 비서원랑(秘書院郞)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고 일제에 의해 갑오개혁이 실시되면서 선생의 관직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그 후 1896년 1월에는 27세의 나이로 성균관 교수 겸 관장이 되었다가 한성사범학교 교관으로 전임되었고, 6월에는 탁지부 재무관에 임명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다시 관직을 사임하였다.
이처럼 선생의 관직생활은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여유가 있는 시간에는 늘 학문을 닦는데 전념할 수 있었다. 전통 학문인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유학은 물론, 정치-법률-경제-사회-수학-과학-철학-종교 등 모든 신학문 분야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선생은 이 시기에 미국인 선교사로 육영공원 교사로 초빙된 헐버트(H. B. Hulbert)와 교분을 갖게 되었다. 헐버트는 그 후 선생과 헤이그 사행을 같이 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선생은 전통 유학으로 학문을 시작하였지만, 시대적 변화에 따라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독학으로 근대적 학문을 연마하였다.
선생이 신학문을 수학하기 시작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근대적 학문을 본격적으로 익힌 시기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열기가 고조되고 민권사상이 널리 보급되던 무렵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1898년 가을에는 이회영(李會榮)-여준(呂準)-이강연(李康演) 등 당시의 친우들과 회동하여 시국을 광구(匡救)하고자 자신의 서재를 연구실 겸 회의장으로 정하고 매일 회합하였다.
선생은 신학문을 각 분야에 걸쳐 광범위하게 공부하였지만, 특히 개화와 국권수호를 위한 국제정치와 법률의 대가로 지칭되었다. 따라서 '대한매일신보'(광무 9년 11월 24일자)에도 “씨(이상설)는 원래 대한 학문학의 제일류(第一流)니 재성(才性)이 절륜(絶倫)하고 조예(造詣)가 심독(深篤)하여 동서학문(東西學問)을 실개통효(悉皆通曉) 연정(硏精)”
하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때문에 선생이 애독하던 서적만도 수천 권에 달하여, 이 장서는 해방 후에 당시 부통령이었던 이시영(李時榮) 선생이 회수하여 국회도서관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2. 국권회복운동의 전개
선생은 1896년 탁지부 재무관을 그만둔 후 1904년 1월 종2품의 궁내부(宮內府) 특진관(特進官)에서 해임된 기록이 보인다. 아마도 그 동안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실직에 나가지는 않았던 것 같다. 실직에는 취임하지 않았지만 광무황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런 바탕 하에서 후일 그가 헤이그사행에 수석으로 파견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무렵 일제는 한국을 ‘보호국’으로 예속시키고 경제적으로 이권 확대를 목적으로 1904년 5월 '대한방침(對韓方針)'과 '대한시설강령(對韓施設綱領)'을 결정하였다. 그 가운데 '대한시설강령'은 한국의 농업과 ‘황무지 개간권’의 장악을 명시하고 있었다.
즉 한국을 일본의 식량과 원료의 공급지로 개편하고 한국에 일본인의 이민을 대대적으로 실시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일제는 한국정부에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였는데, 그 소식이 알려지자 유생들과 전직관료들의 반대 상소가 빗발쳤다. 선생도 그해 6월 22일 박승봉(朴承鳳)과 연명으로 황무지 개척권 요구를 반대하는 하는 상소를 올리고, 이어 그 반대운동을 일으켰다.
선생이 올린 상소의 요지는 일본의 요구를 물리치지 않으면 국권을 지킬 수 없으며 황무지의 개척을 자국민이 하지 않으면 국가재정이 파탄될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일본의 요구를 물리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생의 상소가 있은 이후 일제의 황무지 점탈을 저지하기 위한 단체로 보안회(輔安會, 保安會)가 조직되어 활동하였으며, '대한매일신보'나 '황성신문' 등의 언론에서도 일본의 불법행위를 규탄하게 되자, 일제도 황무지 개척권 요구를 철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선생은 황무지 개척권 반대운동에 참여하는 등 당시 일제에 의한 이권 침탈에 반대하여 분연히 떨치고 일어났다. 이처럼 국권이 상실되어 가는 상황에서 선생은 1905년 11월 의정부 참찬에 발탁되었다. 일제는 러일전쟁이 자국에 유리하게 전개되어 가자 이 틈을 이용하여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한 음모를 진행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한국 병탄의 기본정책을 확정해 놓고 외교활동을 통해 열강들에게 한국침략을 승인 또는 묵인하도록 조처한 후, 마침내 1905년 11월 17일 광무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하여 이른바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게 하였다.
일제에 의해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 조약을 무효화하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여러 가지 조약 반대운동이 거족적으로 일어났다. 조약 체결 당시 대신회의 실무를 총괄하는 의정부 참찬의 지위에 있던 선생은 일차적으로 조약 체결 저지에 온 힘을 쏟았다. 하지만 일본군이 가로막아 이 회의에는 참석조차 할 수 없었다. 회의가 끝나자 한규설 참정대신과 손을 맞잡고 목놓아 울면서 국망을 슬퍼하였다.
하지만 선생은 결코 슬픔에만 잠겨 있지 않았다. 광무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조약 파기를 위한 최후의 시도를 꾀하였다. 조약은 5적만이 찬성하였을 뿐 황제의 인준 절차를 끝내지 않고 있었다. 이에 선생은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대저 그 약관이란 인준해도 나라는 망하고 인준을 아니 해도 나라는 또한 망합니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바에야 차라리 순사(殉社)의 뜻을 결정하여 단연코 거부하여 열조열종(列祖列宗)의 폐하께 부비(付卑)하신 중임(重任)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즉 황제가 사직(社稷)을 위해 몸을 바칠 각오로 조약에 반대할 것을 촉구하였던 것이다.
선생은 ‘을사조약’ 강제 체결 이후 이와 같은 상소를 다섯 차례에 걸쳐 올렸으며 관직을 버리는 한편, 조약 파기를 위한 거국항쟁을 추진하였다. 선생은 각 대신을 찾아다니면서 조약 체결이 곧 ‘국망’이고 민족이 ‘왜적의 노예’가 된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또한 선생은 그해 11월 30일 민영환(閔泳煥)의 순절 소식을 듣고 종로 거리에 나가 운집한 시민에게 울면서 국권회복운동에 궐기할 것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다음 땅에 뒹굴면서 머리를 부딪쳐 자결을 시도했으나 시민들에게 구원되었다.
3. 국외 망명과 헤이그 사행(使行)
일제에 의해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이후 일제와의 직접 항전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려는 의병전쟁도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선생은 조약 파기운동 후 자택에 은거하며 거의 표면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으나, 국내에서의 국권회복운동보다는 국외로 망명하여 구국운동을 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이회영(李會榮). 이동녕(李東寧) 등과 의논하여 1906년 4월 국외망명을 결정하였다. 이동녕과 같이 상해를 거쳐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그리고 다시 황달영(黃達永). 정순만(鄭淳萬). 김우용(金禹鏞). 홍창섭(洪昌燮) 등과 함께 북간도 중에서 한인들이 많이 이주하여 사는 연길현(延吉縣) 용정촌(龍井村)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선생은 용정촌에서 건물을 매입하고 1906년 8월 항일 근대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하였다. 서전서숙 창립 후의 숙장은 자신이 맡았으며 직접 산술을 가르쳤다. 당시 교원으로는 여조현(한문-정치학-헌법-국제공법), 김우용(산술), 황달영(역사-지리) 등이 있었으며, 정순만과 이동녕이 서숙의 운영을 맡았다.
서숙에는 각지에서 온 학생 22명을 받아들여 중학과 소학 과목을 망라한 신학문을 교육하면서, 학생들에게 반일의식과 민족독립사상을 주입하였다. 그리하여 서전서숙은 연변에 이주한 한인들이 전통적으로 실시하던 재래적인 구식 교육으로부터 신식 학교교육으로 전환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서전서숙의 숙장이던 선생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수석 특사로 참가하라는 광무황제의 명을 받고 용정을 떠나 연해주로 가게 되었다. 이에 그의 뒤를 이어 숙장이 된 여조현이 김우용-황달영 등과 함께 힘을 합쳐 계속 서숙을 꾸려 나갔으나, 일제의 감시와 민족교육운동에 대한 압박으로 1907년 9월경 문을 닫았다.
서전서숙은 1년여 정도의 짧은 기간 존속하였지만, 그곳에서 배출된 인사들은 각지에서 민족교육과 항일독립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907년 6월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었다. 제2회 만국평화회의는 제정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발의하여 각국에 초청장을 보냄으로써 이루어졌다.
러시아 황제는 1906년 4월에 파나마 등 남미의 몇몇 나라와 함께 대한제국 황제에게도 비밀리에 초청장을 보내왔다.
광무황제는 이 초청장을 받고 구미 열강의 도움으로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라 여겨 선생을 비롯하여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 등 세 사람을 비밀리에 특사로 임명하였다. 이상설이 정사(正使)였고 전 평리원검사 이준, 전 러시아주재공사 이범진(李範晋)의 둘째 아들인 이위종이 부사(副使)였다.
이밖에 헐버트는 따로 광무황제의 친서를 휴대하고 헤이그 현지에서 함께 활동하였다.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상설과 이준은 1907년 4월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합류하였다. 이에 두 사람은 그해 5월 21일에 러시아 귀화 2세인 차(車)니콜라이의 안내를 받아 시베리아철도 편으로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스부르크로 향하였다.
6월 중순 그곳에 도착한 그들은 전 러시아주재공사 이범진과 그의 아들 이위종을 만나 사행의 진용을 갖추었다.
세 특사가 품고 간 황제의 신임장과 각국 황제 및 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황제의 친서는 경운궁(慶運宮)에서 광무(光武) 11년 4월 20일자로 국새(國璽)와 황제의 수결(手決)을 찍은 백지 위임장이었다.
그리하여 세 특사는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고 1907년 6월 24, 25일경 네덜란드 헤이그에 도착하는데 성공하였다. 6월 15일에 회의가 개최되었으므로 그 며칠 뒤의 일이었다. 헐버트는 이들과 동행하지 않았으나, 시베리아철도 편으로 프랑스의 파리를 거쳐 비슷한 날짜를 전후하여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세 특사는 헤이그 시내 바겐슈트라트(Wagenstraat) 124번지에 있는 ‘레용’이라는 사람이 경영하던 융호텔(Hotel De Jong)에 숙소를 정하였다. 이들은 호텔에 당당히 태극기를 내걸고 곧 활동을 시작하였다. 여기서부터 특사들은 한국의 사절로서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활동하였다.
한편 일본대표들은 한국 사절이 나타난 것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을 비롯한 세 특사의 사명은 ‘을사조약’의 무효 파기와 일제의 침략상을 낱낱이 드러내어 열강의 후원을 얻는 데 있었다. 우선 그들은 만국평화회의에 한국 대표로서 공식으로 참석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세 특사는 6월 29일 만국평화회의의 의장인 넬리도프(Nelidof) 백작에게 한국이 초청받지 못한 것을 항의하였으며, 일제의 한국주권 침해를 설명하며 의장 직권으로 회의 참석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밖에도 특사들은 미국 대표를 비롯하여 프랑스?중국?독일 등 각국 위원에게도 회의 참석을 요구하는 협조를 구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특사들은 결국 회의에 공식적으로 참석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비공식 경로를 통해 일제의 침략과 한국의 요구를 정확히 각국 대표에게 알림으로써 한국문제를 국제정치 문제로 제기시키려는 활동을 폈다.
특사들이 비록 일제의 방해와 열국의 외교적 외면으로 회의 참석은 거부되었으나, 구미 언론에서 한국문제를 정당하게 다루게 한 것은 매우 주목되는 일이었다. 특사들의 이와 같은 활동은 7월 9일에 열린 각국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에서 돋보였다. 선생은 이 모임에 이위종과 함께 귀빈으로 초청되었다.
이 회합은 만국평화회의의 공식 석상에는 없는 각국 외교문제까지 취급했기 때문에 평화회의의 각국 대표는 물론 이름난 언론인과 각국 수행원 및 기자들까지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위종은 프랑스어로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였는데, 모든 참석자들로 하여금 감명과 찬사를 금치 못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활약하던 중 7월 14일 특사 가운데 한 사람인 이준이 순국하였다. 선생은 그를 헤이그의 ‘뉴 아이큰다우(Nieuw Eykenduynen)’ 공동묘지에 우선 가매장하고, 구미열강을 차례로 순방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헤이그 특사는 실질적인 소득을 거두지 못한 채 오히려 일제의 한국침략을 촉진시키는 구실을 주고 말았다. 헤이그사행의 활동 소식이 전해지자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1907년 7월 18일 외무대신 하야시(林董)를 서울로 불러들여 광무황제에게 헤이그 밀사의 책임을 추궁하며 강제로 퇴위시켰다.
선생은 구미 각국 순방외교를 마친 이후 1908년 2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선생은 그곳에서 그 다음해 4월까지 1년 남짓 머물러 있었다. 선생은 미주 각 지역의 한인 대표들이 모인 가운데 1908년 7월 11일부터 15일까지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회(愛國同志代表會)에 참석하였다.
이 대회는 한국의 독립을 옹호하기 위해 해외 각지의 한인단체들을 규합하여 일치된 행동을 꾀하는 데 있었다. 대회의 중심인물은 임시의장 박용만(朴容萬)이었다. 5일 동안 8차에 걸쳐 회의가 진행되었으며, 대회에 참석한 인원은 36명이었다.
선생은 노령 시베리아 위임대표로 참석하였다. 대회를 통해 당시 미주의 대동보국회와 공립협회의 통합과,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와의 통합까지 확대시켜 당시 최대의 민족운동 단체인 국민회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4. 13도의군과 성명회 활동
이상설 선생은 1906년 망명 이후 일관되게 국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헤이그사행 이후 미주를 순방한 후 1909년 4월 정재관(鄭在寬)과 함께 다시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 선생이 이곳에 돌아온 이유는 연해주를 해외 독립운동기지의 최적지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후 선생은 한민회 회장 김학만(金學萬)과 해조신문 주간 정순만, 그밖에 윤일병(尹日炳) 등의 한인 지도자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였으며, 그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원동임야주식회사(遠東林野株式會社)라는 공동출자 회사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기지의 적지로 중?러 접경지대에 있는 항카호(興凱湖) 주변의 중국쪽 밀산부(密山府) 봉밀산(蜂蜜山)으로 정하였다.
선생은 이 지역을 사들이고 개척하기 위해 영남 출신의 저명한 학자인 이승희(李承熙)와 함께 사업을 추진하였다. 한편 1909년을 전후해서 연해주의병의 지도자들은 그 동안 각기 독자적인 의병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전력의 분산을 가져와 효과적인 항전을 벌일 수 없었다.
따라서 연해주와 북간도 일대의 의병을 단일 군단으로 통합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1910년 6월 21일 편성된 것이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이다. 선생은 십삼도의군에서 외교통신원(外交通信員)의 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이 직책은 유인석(柳麟錫)과 이범윤(李範允) 사이를 중재하면서 전체 사무와 조직을 관리하는 실질적 책임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당시 연해주 한인사회에서 이상설과 같이 두터운 신망을 받고 있던 인물만이 이와 같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적임자였다. 그러나 십삼도의군의 활동기간은 매우 짧았다. 1910년 6월에 편성된 뒤 8월에 나라가 망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군 편성의 동기가 대규모 무장 항일전에 있었기 때문에 의군은 편성과 동시에 이를 결행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이를 위해 1910년 7월 선생은 의군의 핵심인물인 유인석과 함께 연명으로 퇴위한 광무황제에게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에서 선생은 첫째 내탕금으로 군자금을 지원해 줄 것, 둘째 광무황제가 직접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영도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십삼도의군의 이러한 계획은 국내외의 정세로 보아 처음부터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것이었다.
선생을 비롯하여 십삼도의군의 중심 인물들인 유인석-이범윤 등은 1910년 8월 초 외신과 국내소식을 통해 일제의 조국 병탄이 임박해졌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병탄이 현실화되자 이 비보를 접한 한인들은 즉시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 모여 ‘망국’이라는 비극적 상황에 대처할 방안을 논의하였다.
군중들이 흐느끼는 등 비통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회의에서 병탄조약 무효를 선언할 항일단체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회의 이름은 “적의 죄상을 성토하고 우리의 억울함을 밝힌다”(聲彼之罪 明我之寃)는 데서 취하였으며, 그 목적은 “대한의 국민된 사람은 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세하고 성취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결성된 성명회는 독립의 비장한 결의를 담은 '성명회 취지문'을 발표하였다. 아울러 일본 정부에는 국제공약의 배신을 맹렬히 규탄하는 성토문을 보내고, 각국 정부에는 ‘합병무효’를 선언하는 전문과 '성명회 선언서'를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특히 이 선언서에는 블라디보스토크를 비롯한 연해주 각지로 망명한 이상설-유인석-이범윤-정재관-이남기 등 현지 한인사회의 지도자가 총 망라된 8,624명에 달하는 엄청난 서명록을 첨부함으로써 한민족의 한결같은 염원인 독립의지를 집약적으로 천명하였다.
또한 성명회에서는 취지서와 각종 격문을 중국-러시아에 산재한 한인들에게 반포함으로써 그 활동을 확대하였다. 성명회가 이와 같이 활발한 활동을 벌이게 되자, 일제는 러시아 당국에 강력히 항의하는 한편, 주요인물들인 이상설-유인석-이범윤 등의 체포와 인도까지 요구하였다.
이로 인해 러시아 당국은 8월 30일 선생을 비롯하여 성명회와 십삼도의군의 주요인물 42명을 체포하였으며, 이범윤 등은 중부시베리아의 이르쿠츠크로 유배되기까지 하였다. 이때 체포된 선생은 니콜리스크로 추방되었다가 1911년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할 수 있었다.
5. 권업회와 대한광복군정부 조직
1910년 무렵 연해주지역 한인들은 20여만 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들은 니콜리스크 등 연해주 각지에 정착하여 한인사회를 형성하였고, 이러한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중에서도 한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던 곳은 블라디보스토크였으며, 이곳에 ‘신한촌’이 형성되면서 연해주지역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십삼도의군과 성명회는 1910년 9월에 러시아 당국의 탄압으로 붕괴되고 성명회의 주동자인 이상설 선생을 비롯한 인물들이 체포, 투옥되면서 두 단체의 일체 활동이 금지되었다. 그후 이들이 1911년에 감옥에서 풀려나고 혹은 피신했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재집결하였다.
다시 모인 연해주 지역의 중요 인물들이 대거 참가하여 1911년 5월 권업회(勸業會)를 창립하였다. 창립 당시 회장에는 최재형(崔才亨), 부회장에는 홍범도(洪範圖)가 선임되었다. 권업회에는 연해주지역은 물론이고 간도지방에서 활동하는 인물들도 참여시키면서 세력이 급속히 성장하였다.
그해 12월 다시 총회를 개최하여 선생을 의사부의장(議事部議長)에, 이종호(李鍾浩)를 부의장에 선출하여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권업회는 표면적으로 상공업 등의 실업활동을 권장하는 한편, 민족교육과 한인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지위향상을 도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런데 권업회는 시베리아 한인사회의 여러 계통의 중요 인물이 모여 조직한 결사이므로 종래의 단체와는 성격이 달랐다. 권업회는 최고 권능을 총회(總會)에 두는 일반적인 결사의 체제를 따르고 있으나 실제 운용은 총회에 있지 않고 총회에서 선출 구성하는 의사부(議事部)에 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총회는 의사부의 의사원을 선출하고 그중에서 의장과 부의장을 선임하여 의사부를 구성하고, 의사부에서 보고된 회무를 의결하는 데 그쳤다. 따라서 권업회를 대표하면서 실질상 운영 책임은 의사부에 있었다.
권업회는 창립 후 세력 확장과 사업의 진척에 따라 회원 수도 크게 증가하여 1913년 10월에는 2,600명에 달하고, 그후 1914년에는 8,579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권업회는 초창기에 의장이던 선생과, 독립운동 자금 염출의 큰 몫을 담당한 부회장 이종호의 연합체제로 운영되었다.
권업회는 ‘독립전쟁론’을 구현하는 데 활동목표를 설정하였고, 이를 위해 비밀리에 광복군의 양성을 도모하고 있었다. 권업회가 광복군을 양성한 실상은 소상하게 밝혀져 있지 않지만, 우선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광복군을 양성하려고 하였다는 점은 밝혀졌다.
1913년 동북만주 나자구(羅子溝)에서 권업회의 중요 임원인 이종호. 이동휘. 김립(金立). 장기영(張基永). 김하석(金河錫). 오영석(吳永錫) 등이 대전학교(大甸學校)라 부르는 사관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대전학교의 운영이나 성과에 대해서는 일제가 압수한 '각처군용정세상세(各處軍容情勢詳細)'라는 문서에 의하면, “블라디보스토크의 사범학교 공지(空地)에서 총기를 소지하여 훈련받은 병력이 29,365명이고, 그밖에 총기 13,000정과 탄약 50만을 수장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권업회 의장인 선생이 이 계획을 주관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로써 권업회의 광복군 양성 활동은 선생에 의해 주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14년에 들어와서는 러시아가 일본과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풍문이 나돌았다.
적지 않은 광복군을 양성하고 있던 권업회에서는 이러한 시기와 기회를 이용하여 한인들의 민족의식을 높이고 광복군의 군자금도 마련한다는 계획 하에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의 건립이 추진되었다.
선생을 비롯하여 이동휘. 이동녕. 이종호. 정재관 등 권업회의 핵심인물들은 1914년 연해주를 비롯하여 북간도지역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자들을 규합하여 국외에서 최초로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운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은 정통령(正統領)이 되어 부통령(副統領) 이동휘 등과 함께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운영하는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었다. 대한광복군정부는 권업회가 양성한 광복군을 기반으로 하고,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면서 독립전쟁을 추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당국의 탄압을 받게 되면서, ‘정부’의 조직을 유지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고 더 이상의 활동도 어려웠다.
특히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와 일본은 동맹국으로 제휴하였다. 따라서 러시아 당국은 연해주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인의 주요 지도자들을 체포하거나 추방하였다.
그리고 권업회가 발행하던 '권업신문(勸業新聞)'을 정간시키는 등 한인들의 정치-사회적 활동을 일체 금지시켰다. 이로써 대한광복군정부는 건립 직후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고, 조직을 유지하거나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한 채 사실상 해체되고 말았다.
권업회의 해산으로 중국 상해로 이동한 이상설 선생은 상해지역의 신규식(申圭植). 박은식(朴殷植), 북경지역의 유동열(柳東說)-성낙형(成樂馨), 그 외에 이춘일(李春日)-유홍열(劉鴻烈) 등과 합세하여 1915년 3월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결성하였다.
이상설은 각지 독립운동가들이 상해 영국 조계지 서북천로 학숙에 모여 조직기구 임원선출을 완료하고 규칙과 취지서를 작성함으로써 정식으로 신한혁명당을 결성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신한혁명당의 본부는 북경 서단패루(西單牌樓) 김자순(金子順)의 집에 설치하였으며 본부에는 재정부-교통부-외교부를 두었다.
지부에는 지부장을 두고 각기 당원을 파견해 중국, 국내의 중요지역에 설치하여 재정, 통신 연락 및 당원 모집 등 주된 업무를 담당케 하였다. 이때 선생은 당의 본부장을 맡았고 박은식이 감독에 선임되었다. 독립운동에 열중한 나머지 건강을 돌보지 못한 선생은 1916년 초부터 하바로프스크에서 병석에 눕게 되어 투병생활에 들어갔다.
차도가 없자 기후가 온화한 니콜리스크로 옮겨 요양을 하였으나 병세가 호전되지 않아, 결국 선생은 1917년 3월 2일 48세를 일기로 순국하고 말았다. 선생은 임종을 지킨 동지들에게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서릿발 같은 유언을 남겼다. 임종을 지킨 이동녕과 백순(白純), 조완구(趙琓九), 이민복(李敏馥) 등은 선생의 유언을 따라 아무르강가에 장작을 쌓아놓고 화장하여 그 재를 북해 바다에 날렸다. 이때 선생의 문고(文藁)와 유품도 거두어 불살랐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