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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2. 2. 3. 20:51
■ 관찰사 이윤인(李尹仁)의 조선왕조실록 자료.
◇이윤인 검색어 : 총88건
◇원문 및 국역 : 세종(1), 단종(2), 세조(27), 예종(5), 성종(7), 연산군일기(1), 명종(1),
1. 세종실록 163권, / 부록 / 편수관 명단[壬申 1452년(문종 2/명 경태(景泰 3년)]
신(臣) 이문경(李文炯) 진용교위 우군 섭부사직 겸 승문원 부교리(進勇校尉右軍攝副司直兼承文院副校理) 신(臣) 이유의(李由義) 선
교랑 수 성균 주부 겸 남부유학 교수관(宣敎郞守成均注簿兼南部儒學敎授官)...기사관(記事官) 선무랑 통례문 봉례랑(宣務郞通禮門
奉禮郞) 신(臣) 이윤인(李尹仁) 선무랑 도관 주부(宣務郞導官注簿) 신(臣) 김용(金勇) 선무랑 행 예문 봉교(宣務郞行藝文奉敎) 신
(臣) 한서봉(韓瑞鳳) 무공랑 예문 봉교(務功郞藝文奉敎)...
【태백산사고본】 67책 163권 1장 A면【국편영인본】 6책 214면
【분류】 역사-편사(編史)
2. 단종실록 11권, 단종 2년(1454 甲戌年/명 경태(景泰 5년) 6월 10일 신묘 2번째 기사/
지사 이휘·정랑 조원희가 호조 정방이 난신의 가재를 사용한 일로 대죄하게 할 것을 아뢰다.
편안치 못하니, 청컨대 대죄(待罪)하게 하소서." 하였고, 이조 정랑(吏曹正郞) 최사로 (崔士老)·홍연(洪演)·조근(趙墐)·좌랑(佐郞) 이
윤인(李尹仁)·김덕원(金德源)도 또한 아뢰기를, "지난 3월 그믐날, 신 등이 장난삼아 송춘시(送春詩)를 지어 호조에 보냈더니 호조 낭
리가 소작(小酌)을 베풀고 청하므로, 신 등이 파사(罷仕)한 뒤에 지나다가 들려서 참여했습니다. 청컨대...
3.단종실록 12권, 단종 2년(1454, 甲戌年/명 경태(景泰 5년) 8월 9일 무자 3번째기사/
권우 등의 일로 이로부터 먼저 계문한 뒤에 정조의 비위를 핵문하게하다.
이유를 묻고, 또 김질(金礩) 등이 품계(品階)를 뛰어 벼슬을 제수 받은 까닭을 묻고, 인하여 홍연과 좌랑(佐郞) 이윤인(李尹仁)·판서(判
書) 정창손(鄭昌孫)·참판(參判) 최항(崔恒)·참의(參議) 어효첨 (魚孝瞻) 등을 핵문(劾問)하였다. 세조(世祖)가 이 말을 듣고 말하기
를, 물론(物論) 여러사람의 평판. "헌부(憲府)에서 묻는 바는 족히 대답할 만한 것이 못된다." 하니 홍연 등이...
4. 세조실록 2권, 세조 1년(1455 乙亥年) 12월 27일 무진 3번째기사/
의정부에 전지하여 연창위 안맹담 등을 원종 공신에 녹훈하다.
이문형(李文炯)·성임(成任)·강미수(姜眉壽), 좌랑(佐郞) 이계손(李繼孫)·행 부사직(行副司直) 오연(吳衍)·좌랑 배효숭(裵孝崇), 도
사(都事) 강효문(姜孝文)·직강(直講) 이익(李翊)·좌랑 이윤인(李尹仁)·부정(副正) 최효생(崔孝生)·판사(判事) 선형(宣炯)·사직(司
直) 이득림(李得霖)·호군(護軍) 지유원(池有源), 사직 맹득미(孟得美)·석자의(石子議), 좌랑(佐郞)...
5. 세조실록 19권, 세조 6년(1460 庚辰年) 1월 12일 경인 2번째기사/
경기우도 찰방 이윤인을 파직하다.
명하여 경기우도 찰방(京畿右道察訪) 이윤인(李尹仁)을 파직(罷職)하였다.
이조판서(吏曹判書) 구치관(具致寬)이 일찍이 임금 앞에서 이윤인이 현능(賢能)하다고 포상(褒賞)하였는데, 얼마 아니 되어 병조판서
(兵曹判書) 한명회(韓明澮)가 황해도에서 와서 이윤인이 잔열(孱劣=허약하고 옹졸함)하다고 말하였으므로, 드디어 그 직을 파면하였
다.
6. 세조실록 19권, 세조 6년(1460 庚辰年) 1월 19일 정유 2번째 기사/
이윤인을 다른 관직에 서용하다.
경기우도(京畿右道)의 역리(驛吏) 등이 상언(上言)하기를,
"빌건대 이윤인(李尹仁)의 관직을 그대로 두소서." 하니, 명하여 이조(吏曹)에 내렸다. 이조에서 아뢰기를, "임기[考]가 이미 찼으므
로 다시 임용할 수가 없으니, 마땅히 다른 관직에 별도로 서용(敍用)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7. 세조실록 24권, 세조 7년(1461 辛巳年) 5월 20일 기미 2번째기사/
조효문·김순·이교연·이효장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계손(金繼孫)을 평안도 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로, 문여량(文汝良)을 행 사헌집의(行司憲執義)로, 이영은(李永垠)을 사헌장령
(司 憲掌令)으로, 이윤인(李尹仁)을 수 사헌장령(守司憲掌令)으로, 이극균(李克均)·이영부(李永敷)를 수 사헌지평(守司憲持平)으로
삼았다. 처음에 행 첨지중추원사 황치신(黃致身)이 함길도에 사는 여자종[婢] 용로(容老)의 소생을 관청에 바치고...
8. 세조실록 25권, 세조 7년(1461 辛巳年) 9월 29일 병인 1번째기사/
의주를 침범한 야인을 문죄하고자 하다.
호군(行護軍) 봉석주(奉石柱)·행 상호군(行上護軍) 이거아첩합(李巨兒帖哈),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권경(權擎)·행 상호군 이
맹손(李孟孫)을 위장(衛將)으로 삼고, 사복소윤(司僕少尹) 이윤인(李尹仁)·이조좌랑(吏曹佐郞) 어세겸(魚世謙)·호조좌랑(戶曹佐
郞) 구치동(丘致峒)·도관 좌랑(都官佐郞) 허종(許琮) 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아, 경군사(京軍士) 1백 19명을...
9. 세조실록 26권, 세조 7년(1461 辛巳年) 11월 17일 계축 1번째기사/
황수신 박원형이 황산곶이에 사람을 옮긴 건에 대해 아뢰다.
하니, 전지하기를, "만약 또 사람을 보낸다면 폐단이 있지 않겠느냐?" 하였다. 황수신 등이 다시 아 뢰기를, "단기(單騎)로써 가게 하면
무슨 폐단이 있겠습니까?" 하니, 곧 명하여 황수신을 전라도 도체찰사(全羅道都體察使)로 삼고, 사복시 소윤(司僕寺小尹) 이윤인(李
尹仁)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고, 또 복승리에게 유시하여 사민(徙民)하는 것을 우선 정지하도록 하였다.
10. 세조실록 26권, 세조 7년(1461 辛巳年) 11월 25일 신유 1번째기사/
우부승지 김겸광을 인견하여 평안도의 일을 하문하다.
안관후(安寬厚)·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정문형(鄭文炯)·전 군사(郡事) 김영전(金永湔)·도관 좌랑(都官佐郞) 허종(許琮)을 종사
관(從事官)으로 삼고, 또 양정(楊汀)을 양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고, 사복 소윤(司僕少尹) 이윤인(李尹仁) ·이조좌랑(吏曹佐
郞) 정효상(鄭孝常)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는데, 무릇 교서(敎書) 등의 일은 신숙주와 한결같았다.
11. 세조실록 34권, 세조 10년(1464 甲申年) 12월 19일 무술 1번째기사/
최항·이석형·윤찬·이계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좌승지(左承旨)로, 신면(申㴐)을 우승지(右 承旨)로, 윤필상(尹弼商)을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오백창(吳伯昌)을 우부승지(右副承
旨)로, 허종(許琮)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박안성(朴安性)을 행 사헌장령(行司憲掌令)으로, 조민(趙岷)을 행 사간원헌납(行司諫
院獻納)으로, 송숙기(宋淑琪)를 행 사헌지평(行司憲持平)으로, 이윤인(李尹仁)을 겸 지병조사(兼知兵曹事)로 삼았다.
12. 세조실록 35권, 세조 11년(1465 乙酉年) 2월 13일 경인 1번째기사/
문무과 합격자를 발표하다.
윤자운(尹子雲)·예조참판 임원준(任元濬)·병조참판 송문림(宋文琳)·청성군(淸城 君) 한종손(韓終孫)·예조 참의 김수령(金壽寧)·지
병조사(知兵曹事) 이윤인(李尹仁), 승지(承旨) 등을 불러서 술자리를 베풀고, 성진(成晉)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권자(卷子)를 가져
오라." 하고, 친히 책제(策題)를 강(講)하니, 성진이 또한 읽고 또한 대답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대저...
13. 세조실록 37권, 세조 11년(1465 乙酉年) 9월 27일 신미 1번째기사/
사정전에서 중신들에게 진언을 해 줄 것을 당부하다.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이석형(李石亨)·호조판서(戶曹判書) 노사신(盧思愼)·형조판서(刑曹判書) 홍응(洪應)·이조판서(吏曹判
書) 한계희(韓繼禧)·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김국광(金國光)·병조... 이윤인(李尹仁) 및 상참관(常參官)이 모 두 입시하였
다. 임금이 최항에게 이르기를, "어제 정자영(鄭自英)·유희익(兪希益) 등과 《주역》의 이치를 강론하고 밤이...
14. 세조실록 37권, 세조 11년(1465 乙酉年) 10월 14일 무자 1번째기사/
사정전에서 선전관 등에게 학문에 힘쓸 것을 명하다.
진남군(鎭南君) 이종생(李終生)·좌참찬(左參贊) 최항(崔恒)·이조판서(吏曹判書) 한계희(韓繼禧)·공조판서(工曹判書) 윤사흔(尹士
昕)·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이석형(李石亨)·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정식(鄭軾),... 이윤인(李尹仁) 및 병조(兵曹)의 낭청(郞廳)·
선전관(宣傳官)·진무(鎭撫) 등을 불러 입시하게 하였다. 임금이 정식에게 이르기를, "경이 의금부(義禁府) 관원이 되어...
15. 세조실록 37권, 세조 11년(1465 乙酉年) 11월 8일 임자 1번째기사/
중신들에게 술자리를 베풀고 신숙주에게 세자 보필을 당부하다.
대군 이염(李琰)·밀성군(密城君) 이침(李琛)·영의정 신숙주(申叔舟)·호조판서 노사신(盧思愼)·공조참의 김수령(金壽寧)·예조참의
조근(趙瑾)·병조지사(兵曹知事) 이윤인(李尹仁)을...지사(兵曹知事) 이윤인(李尹仁)을 불러 술자리를 베풀었다. 세자(世子)가 입시
하여 술을 올리니, 임금이 신숙주에게 이르기를, "너도 마땅히 세자를 잘 가르치고 세자도 또한 사부(師傅)를...
16. 세조실록 37권, 세조 11년(1465 乙酉年) 12월 12일 을유 3번째기사/
강원도 관찰사 이윤인에게 실농한 백성들을 구휼하도록 하다.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이윤인(李尹仁)에게 이르기를, "본도(本道)가 근자에 실농(失農)한 것으로 인하여 백성이 믿고 살아갈
수가 없으니 내가 심히 측은하게 여긴다. 도내에서 천신(薦新)하는 이외에 진상하는 물선(物膳)은 모두 임시로 제거하게 하고, 영서
(嶺西)의 거민(居民)은 모두 복호(復戶)하게 하고, 공물(貢物)을 거두지 않은 것은 아울러 모두 견감하고, 금년...
17. 세조실록 38권, 세조 12년(1466 丙戌年/명 成化 2) 윤3월 8일 기묘 1번째기사/
생해채를 올리기를 명하다.
아뢰기를, 생 해 채(生海菜=생미역). "요사이 강원도에서 진상하지 아니하기 때문에 없습니다." 하므로, 관찰사(觀察使) 이윤인(李尹
仁)을 불러 전교하기를, "옛날에 공자(孔子)는 번육(膰肉)을 보내지 아니한다고 즉시 떠났는데, 해 채가 비록 작은 물건일지라도 신자
(臣子)가 위를 받드는 마음이 어찌 이와 같은 것이 마땅하겠는가?" 하니, 이윤인이 울면서 대죄(待罪)하므로 임금이 듣고 웃었다.
18. 세조실록 38권, 세조 12년[1466 丙戌年/明 成化(憲宗 2)] 윤3월 21일 임진 1번째기사/
강원도 관찰사 이윤인과 인견하다.
대가(大駕=임금이 타는 수레)가 지평(砥平=지금의 경기도 양평지역으로 당시엔 지금의 춘천지역의 영현이었음)에 이르니, 강원도관
찰사(江原道觀察使) 이윤인(李尹仁)이 하직하였다.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인하여 술을 올리기를 명하고, 어의(御衣) 1령(領)을 내
려 주며 유시(諭示)하기를, "네가 문무(文武)에 본디 뛰어난 재주가 아니나, 네가 민간의 일을 조금 알기 때문에 〈강원도〉 방면(方面)
의 벼슬을 제수하는 것이니, 직책을 공경하고 삼가서 내 명을 폐함이 없게 하라."하였다.
19. 세조실록 40권, 세조 12년(1466 丙戌年/명 成化 2) 11월 28일 병신 3번째기사/
한계미·황치신 등을 불러 내원에서 진법을 익히게 하다.
임금이 한계미(韓繼美)·황치신(黃致身)·허형손(許亨孫)·임득정(林得楨)·이형손(李亨孫)·유균(柳均)·한종손(韓終孫)·홍순로(洪純
老)·한서귀(韓瑞龜)· 이윤인(李尹仁) ·장진충(張進忠)·배맹달(裵孟達)·이맹손(李孟孫)·유흥무(柳興茂)·정인운(鄭仁耘)·권종손(權
從孫)·설성림(薛成林)·왕종신(王宗信)·권기(權期)와 여러 군사들을 불러서 친히 지휘를 하고, 그들로 하여 금 내원(內苑)에서 습진
(習陣)하도록 하였다.
위장(衛將) 유균(柳均)과 이형손(李亨孫) 등이 진(陣)을 치다가 군율(軍律)을 어기므로 파진(罷陣)하도록 명하고 사후(射侯)하도록
하니, 최적(崔適)이 맞힌 것이 가장 많았으므로 즉시 말 1필을 하사(下賜)하였다. 해가 저물자 술자리를 베풀어 종친(宗親)과 재상(宰
相)과 더불어 한껏 즐겼다. 세자(世子)에게 명하여 술잔을 돌리게 하고, 또 한명회에게 말 1필을 하사(下賜)하였다.
20. 세조실록 40권, 세조 12년(1466 丙戌年/명 成化 2) 12월 26일 계해 1번째기사/
화위당에서 신숙주 등이 입시하니 활 잘 쏘는 사람을 불러 사후하게 하다.
---등이 입시(入侍)하였다. 임금이 위장(衛將) 허형손(許亨孫)·권경(權擎)·어득해(魚得海)·임득정(林得楨)·오자경(吳子慶)· 이윤인
(李尹仁)·강곤(康袞), 제천부윤(堤川副尹) 이온(李蒕)·유균(柳均), 평성 도정(枰城都正) 이위(李徫)·수성 도정(壽城都正) 이창(李
昌)·금산 도정(金山都正) 이연(李衍)을 부르고, 또 내금위(內禁衛)·겸사복(兼司僕)·별시위(別侍衛)·갑사(甲士)중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 각 10명씩을 불러서 그들로 하여금 사후(射侯)하도록 하였다.
21. 세조실록 41권, 세조13년(1467 丁亥年/명 成化 2) 2월 13일 기유 1번째기사/
이파·이윤인·정칭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파(李坡)를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이윤인(李尹仁)을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으로, 정칭(鄭偁)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으
로 삼았다.
22. 세조실록 41권, 세조13년(1467 丁亥年/명 成化 2) 2월 17일 계축 2번째기사/
영동 염호에게 받는 세를 곡식으로 대납하게 할 것을 강원도 관찰사가 아뢰다.
강원도관찰사 이윤인(李尹仁)이 치계(馳啓)하기를, "신이 삼가 전번에 내리신 유서(諭書)에 의하여 소금을 고는 철분(鐵盆) 1백 개를
영 동(嶺東)의 염호(鹽戶)에 나누어 주고, 다달이 1곡(斛) 씩을 세(稅)로 징수하여 그 소금을 영서(嶺西)의 빈민들에게 나누어 주는데,
평해(平海)와 울진(蔚珍) 등지와 같은 데는 길이 매우 멀어서 운반하기가 어려우니, 청컨대 가을철마다.
가을철마다 싯가(時價)에 따라 곡식과 바꾸어서 그 고을 비황(備荒=흉년을 대비하는 일)으로 납입(納入)케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
랐다.
23. 세조실록 41권, 세조 13년(1467 丁亥年/명 成化 2) 2월 25일 신유 1번째기사/
종친·재추·승지 들을 불러 술자리를 베풀고 제장들을 불러 진법을 익히게 하다.
또 여러 장수(將帥)들을 불러 내원(內苑)에서 습진(習陣)하게 하였는데,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이윤인(李尹仁)을 좌상대장(左廂
大將)으로 삼고,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 정문형(鄭文炯)을 우상대장(右廂大將)으로 삼고, 수성도정(壽城都正) 이창(李昌)과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 이형손(李亨孫)·좌부승지(左副承旨) 어세공(魚世恭)을 좌위장(左衛將)으로 삼고, 행행 호군(行護軍)
최적(崔適)과 병조 참의 박서창(朴徐昌)·행 호군 김용달(金用達)을 우위장(右衛將)으로 삼았으며, 좌상(左廂)·우상(右廂)으로 나누어
4위(衛)로 하였고, 각 위마다 50인씩으로 하였다..........
24. 세조실록 42권, 세조 13년(1467 丁亥年/명 成化 2) 5월 7일 신미 2번째기사/
모화관에 거둥하니 재추가 입시하고 장진충·정난종 등에게 진법을 익히게 하다.
참판 박중선(朴仲善)·형조 참판 정난종(鄭蘭宗)·한성부우윤(漢城府 右尹) 이윤인(李尹仁)·공조참판 안빈세(安貧世)와 종친(宗親)·
승지(承旨) 등이 모시었다.
임금이 장진충(張進忠)과 정문형·정난종·어유소(魚有沼)·금산 도정(金山都正) 이연(李衍)·평성 도정(平城都正) 이위(李徫), 이형손
(李亨孫)·어세공(魚世恭)·이돈인(李惇仁)·신말주(申末舟), 호산 도정(湖山都正) 이현(李鉉), 김유(金紐)·이의형(李義亨)·유흥무(柳
興茂)·이철견(李鐵堅)·이극균(李克均)·구치동(丘致峒)·최적(崔適) 등으로 하여금 장수를 삼아,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우전(羽箭)을
사용하여 쫓아가며 서로 쏘게 하고, 또 장사(將士)로 하여금 혹은 말을 달리며 쏘고, 혹은 격구(擊毬)하고, 혹은 멀리 쏘고, 혹은 말을
타고 창(槍)을 쓰게 하여, 그 뛰어난 것을 시험하고, 또 천례(賤隷)로 하여금 과녁을 쏘고, 손으로 치게 하여, 잘하는 자는 베[布]로 상을
주고, 이어서 술자리를 베풀었다.
25. 세조실록 42권, 세조 13년(1467 丁亥年/명 成化 2) 5월 10일 갑술 2번째기사/
신숙주·한명회 등에게 잠상(蠶桑)과 변방 방어 계책을 의논하다.
해롭지 않고 나라에 이익이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다. 의주목사(義州牧使) 이윤인(李尹仁)도 또한 부름
을 받고 입시(入侍)하니, 임금이 이윤인에게 이르기를, "우 공(禹貢)의 일을 귀감삼아 경은 본받지 말라. "하고, 이어서 변방을 방어할
계책을 물으니, 이윤인이 대답하기를, "의주(義州)가 여러 번 견양(犬羊)의 욕을 당한 것은 백성들에게 경계를 넘어 삼도(三島)의 밭을
경작하게 함이니, 원컨대 이를 버리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공이 전렵(田獵)에 빠져서 적의 지경에 깊이 들어간 것이 구적(寇賊)을 자초(自招)한 것이고, 삼도(三島)로 인해서가 아니다.
그런데 경은 이것을 빙자하여 말을 하니 불가하지 않은가? 하물며 작은 패배로 인하여 갑자기 국토를 버리겠는가?"하고, 여러 재상에
게 묻기를, "이 말이 옳은가?"하니, 신숙주가 말하기를,
"옳지 않습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일시(一時)에 강을 건너가게 하여 힘을 합하여 경작을 독려하고, 김매고 수확하는 것도 또한 그렇게
하면, 농력(農力)이 분리되지 않고, 책루(柵壘=나무 울타리로써 둘러친 보루)를 지키는 것이 매우 엄하면 군수(軍需)도 자연히 넉넉
하여져서, 욕을 당할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하였다. 도승지 윤필상(尹弼商)을 불러 말하기를,
"이윤인은 못나고 어리석어서 대사(大事)를 맡기기에 불가하니, 속히 서반직(西班職)으로 고쳐 제수하라."
하고, 신숙주 등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다시 다른 사람에게 제수하고자 한다."하니, 신숙주 등이 성귀달(成貴達)을 천거하기를,
"재주가 장수(將帥)를 감당할 만합니다."하니, 곧 기복(起復)을 명하여 의주 목사(義州牧使)를 제수하였다.
신숙주 등이 물러가니, 임금이 윤필상(尹弼商)에게 이르기를,
"대저 사람을 임명하는 것은 반드시 재상(宰相)이 모두 옳다고 함을 기다린 연후에야 임명하는데, 지금 우공과 이윤인이 모두 재상이
천거한 것인데도 오히려 이와 같은가?"
하였다. 밤에 좌찬성(左贊成) 조석문(曹錫文)과 서원군(西原君) 한계미(韓繼美)를 불러 이르기를,
"근일에 평안도에서 전패(戰敗)한 것은 모두 김겸광(金謙光)이 즉시 군사를 주둔시키지 않았기 때문으로 인한 것이다."
하고, 또 한계미에게 이르기를,
"경을 절도사(節度使)로 삼고자 하니, 경은 수고로움을 꺼리지 말고 적을 막아서 평정하게 하라."
하고, 이내 불러서 위유(慰諭)하기를 매우 돈독히 하였다. 그리고 윤필상에게 명하여 밖에서 술을 먹이어 보냈으니, 이때가 밤 3경
[鼓]이었다.
26. 세조실록 42권, 세조 13년(1467 丁亥年/명 成化 2) 5월 25일 기축 1번째기사/
종친·장상을 불러 친정을 의논하고 이극배·오자경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금산도정(金山都正) 이연(李衍)을 우사대장(右射隊將)으로, 평성 도정(枰城都正) 이위(李徫)와 형조 참판 정난종(鄭蘭宗)·수성 도
정(壽城都正) 이창(李昌)·행 대호군 (行大護軍) 이윤인(李尹仁)·의빈(儀賓) 심안의(沈安義)를...대호군 (行大護軍) 이윤인(李尹
仁)·의빈(儀賓) 심안의(沈安義)를 5부(部)의 장(將)으로 삼고, 각자 비장(裨將) 5인씩 선택하게 하였다.
27. 세조실록 44권, 세조 13년(1467 丁亥年/명 成化 2) 10월 1일 계사 4번째기사/
박식·윤말손·이윤인·함우치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박식(朴埴)을 형조참의(刑曹參議)로, 윤말손(尹末孫)을 공조참의(工曹參議)로, 이윤인(李尹仁)을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로, 함우치(咸禹治)를 행 함흥 부윤(行咸興府尹)으로 삼았다.
28. 세조실록 44권, 세조 13년(1467 丁亥年/명 成化 2) 12월 10일 임인 3번째기사/
전라도 관찰사·순천 부사 에게 순천부에 있는 침향을 살피게 하다.
승정원(承政院)에서 교지(敎旨)를 받들어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이윤인(李尹仁)·순천부사(順天府使) 유계번(柳季潘)에게
치서(馳書)하기를, "듣건대 순천부(順天府)의 해 농 창(海農倉) 가까운 땅에 침향(沈香)이 있어서 나무와 비슷하다고 하고, 또한 돌
산도(突山島)에도 많이 있다고 하니, 경(卿) 등이 자세히 살펴서 아뢰어라. 또 많은 사람이 베어가는 것 을 금지하라."...
29. 세조실록 45권, 세조 14년(1468 戊子年/明 成化 3) 1월 10일 신미 3번째기사/
전라도 관찰사에게 진산에서 산출되는 석자황은 더 채취하지 말 것을 명하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전지를 받들어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이윤인(李尹仁)에게 치서(馳書)하기를, "도내(道內)의 진산(珍山)
에서 산출(産出)하는 석자황(石雌黃)은 더 채취하지 말게 하라." 하였다.
30. 세조실록 46권, 세조 14년(1468 戊子年/明 成化 3) 5월 19일 무인 2번째기사 / 전라도 관찰사에게 표류한 중국인들에게 백포 철릭
을 주게 하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전지를 받들어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 이윤인(李尹仁)에게 치서(馳書)하기를, "이제 표류(漂流)한 중국
인[唐人] 쇄경(鎖慶) 등이 본도(本道)에 이르거든, 각기 백포철릭(白布帖裏) 1령(領)씩을 주어라." 하였다.
31. 예종실록 2권, 예종 즉위년(1468 戊子年/明 成化 3) 11월 19일 을해 2번째기사/
해남현 김유지가 오래된 원한으로 이윤인을 무고하니 김유지를 가두다.
행 상호군(行上護軍) 이윤인(李尹仁)이 아뢰기를, "진도군(珍島郡)에 정속(定屬)한 사람 박증(朴增)은 신과 관향(貫鄕)이 같은 족인
(族人)입니다. 신이 그 도(道)의 관찰사(觀察使)로써 순찰(巡察)하여 해남현(海南縣)에 이르니, 박증(朴增)이 신을 보기를 청하였으
므로 이를 허락하였습니다.
지금 듣건대, 어떤 사람이 신을 고소하였다고 하므로 신은 스스로 편안 치 못하니, 청컨대 대죄(待罪)하게 하소서." 하니, 전지(傳旨)
하기를, "내가 어찌 의심하겠는가? 경(卿)은 그리 하지 말라."
하였다. 이보다 앞서 해남현(海南縣) 사람 김유지(金有知)가 이윤인(李尹仁)과 더불어 오래된 원수(怨讎)가 있었는데, 와서 승정원
(承政院)에 고(告)하기를,
"이윤인이 절도사(節度使) 김치원(金致元)·장흥부사(長興府使) 김순신(金舜臣)·진도(珍島)에 유배(流配)된 사람 박증(朴增)과 더
불어 일찍이 본현(本縣)에 모여서 무리지어 술을 마셨으니, 그 정상(情狀)이 가히 의심스럽습니다. 청컨대 이를 국문(鞫問)하소서."
하니, 명하여 김유지(金有知)를 가두고, 해남현감(海南縣監) 성중성(成重性)과 박증(朴增)을 잡아와서 이들을 안문(按問)하게 하였
다.
32. 예종실록 2권, 예종 즉위년(1468 戊子年/明 成化 3) 12월 12일 무술 3번째기사/
이원로만을 파직시키고 김유지·박증·이윤인 등은 논하지 말게 하다.
의금부(義禁府)에서 김유지(金有知)·박증(朴增) 등을 안문(按問)한 옥사(獄辭)를 갖추어서 아뢰고, 또 이윤인(李尹仁)·김치원(金致
元)·김순신(金舜臣)·진도군사(珍島郡事) 이원로(李元老)를 국문(鞫問)하도록 청(請)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건이 이미 사유(赦
宥=죄를 용서하여 줌)를 거쳤고, 또 사실도 아니니 모두 묻지 말라. 이원로는 그가 다스리는 관내(管內)의 유이(流 移)하는 사람들이
지경을 넘어서 출입(出入)하여도 금(禁)하지 아니하였으니, 파직(罷職)하는 것이 가하다."하였다.
33. 예종실록 3권, 예종 1년(1469 己丑年/明 成化 5) 1월 1일 병진 5번째기사/
명나라 사신의 지대는 강옥과 김보의 예에 따르고 윤자운으로 주관케 하다.
삼고 낭청(郞廳)을 가정(加定)하였으며, 또 무송군(茂松君) 윤자운(尹子雲)을 원접사(遠接使)로 삼고, 이윤인(李尹仁)을 도사선위
사(都司宣慰使)로 삼았으며, 또 선위사로 호조 참판(戶曹參判) 정난종(鄭蘭宗)을 의주(義州)에, 행 호군(行護軍) 이교연(李皎然)을
안주(安州)에, 좌참찬(左參贊) 유수(柳洙)를 평양(平壤)에, 공조 참판(工曹參判) 성윤문(成允文)을 황주(黃州)에 좌찬성(左贊成)
김국광(金國光)을 개성부(開城府)에 보내고, 별도로 선위사 좌승지(左承旨) 이극증(李克增)을 평안도에 보내고, 동부승지(同副承
旨) 정효상(鄭孝常)을 개성부에 보내라."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윤자운이 근래에 자주 〈원접사로〉 왕래하여 또한 노고(勞苦)가 많
았으나, 이런 대사(大事)는 윤자운이 아니면 불가하다."하였다.
34. 예종실록 3권, 예종 1년(1469 己丑年/明 成化 5) 2월 16일 신축 1번째기사/
무고죄로 귀양가던 김유지가 두 번이나 도망치므로 참형에 처하게 하다.
처음에 김유지(金有智)가, 김호명(金好明)이 화약(火藥)을 훔쳐 반역(反逆)을 꾀한다고 무고(誣告)한 일에 좌죄(坐罪)되어, 강원도
회양부(淮陽府)로 귀양 가다가 중도(中道)에서 도망해...와서 고하기를, "이윤인(李尹仁)과 김치원(金致元)·박증(朴增) 등이 사사로
이 서로 모여서 일을 회의(會議)합니다." 하였으므로, 이를 조사하여 보니 그러한 사실이 없었다.
의금부에서 아뢰기를 "김유지는 남을 무고한 죄로 두 번씩이나 변경 지방에 귀양가다가 모두 도망하여 배소(配所)에 이르지 않았으니,
마땅히 처참(處斬)하여야 합니다."하였으므로, 그대로 따랐다.
이날이 세종(世宗)의 국기일(國忌日)이므로 사람을 형벌해서는 아니되는데, 의금부에서 다시 아뢰지 아니하고 곧 참형에 처하였다.
승정원에서 쫓아가 이를 저지하려고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의금부 지사(義禁府知事) 김길통(金吉通)과 동지사(同知事) 고태필(高台弼)이 대죄(待罪)하기를 청하였는데, 전지하기
를, "김유지의 죄는 진실로 용서하기 어려우나, 경들과 승지(承旨)들이 모두 살피지를 못하였으니, 과연 죄가 있다."하고, 술[酒]로
써 벌(罰)하게 하였다.
35. 예종실록 6권, 예종 1년(1469 己丑年/明 成化 5) 7월 17일 무술 5번째기사/
평양부윤 이덕량을 파직시키고, 이윤인으로 대신하게 하다.
평양부윤(平壤府尹) 이덕량을 파직시키고, 이윤인(李尹仁)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36. 성종실록 4권, 성종 1년(1470 庚寅年/明 成化 6) 3월 5일 갑신 7번째기사/
황효원·김종순·어세겸·한치의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대부(嘉靖大夫)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 겸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 병마 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로, 이윤인(李尹仁)을 가정
대부(嘉靖大夫)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겸 평양부윤(平壤府尹)으로, 이계손(李繼孫)을 가정대부(嘉靖大夫) 영안도관찰사(永
安道觀察使) 겸 영흥부윤(永興府尹)으로, 예승석(芮承錫)을 통정대부(通政大夫) 수 강원도 관찰사(守江原道觀察使) 겸 병마 수군
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로, 양순석(梁順石)을 통정대부(通政大夫) 수 황해도관찰사(守黃海道觀察使) 겸 병마 수군절도사(兵馬水
軍節度使)로 삼았다.
경기 관찰사로 유수를 겸하고, 평안도·영안도의 관찰사로 부윤을 겸하고, 경기·강원도·황해도의 관찰사로 절도사를 겸하는 것이 이때에
비롯되었다.
37. 성종실록 5권, 성종 1년(1470 庚寅年/明 成化 6) 5월 7일 갑신 5번째기사 / 건주위의 이우지가무가 내조하려
고 하니 명의 허락이 없음을 이유로 허락치 않다.
평안도관찰사 이윤인(李尹仁)이 만포첨절제사(滿浦僉節制使) 손효윤(孫孝胤)의 첩정(牒呈)에 의거하여 치계(馳啓)하기를, "금
년 4월 22일에 고(故) 건주도독(建州都督) 이두이(李豆伊)의 아들 이우지가무(李于之加茂)가 지휘(指揮) 이이시응거(李伊時應巨)
등 네 사람을 보내어 와서 말하기를, ‘내가 기축년 6월에 중국조정에 들어가서 숙배(肅拜)하였더니, 조정에서 본위 도독(本衛都督)을
주고 아울러 인(印)을 하사했습니다.
그리고 회동관(會同館)에 머물 때에 관원이 내게 이르기를, 「조선이 너희들을 토벌한 것은 마음대로 행한 것이 아니라 황제의 명에 따
른 것이다.」하고, 폐사(陛辭=황제에게 작별인사를 고하는 일)할 때에 황제가 조선과 화호(和好)하기를 특별히 명하였으니, 원컨대 아
비 이두이(李豆伊)의 예에 의하여 성상의 은혜를 바랍니다. 만약 우리 사인(使人)을 대접하기를 허락하신다면 나도 서울에 조현(朝
見)하여 숙배하겠습니다.’ 하였습니다."하였다.
원상(院相)에게 의논하도록 명하니,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구치관(具致寬)·최항(崔恒)·홍윤성(洪允成)·조석문(曺錫文)·
김질(金礩)·윤자운(尹子雲)·김국광(金國光)이 의논하기를,
"이이시응거(李伊時應巨) 등이 만약 다시 오거든 마땅히 말하기를, ‘너의 귀순(歸順)하려는 뜻을 가지고 이미 계달하였는데, 하교하
기를, 「선왕조(先王朝)에 이두이(李豆伊)가 우리 나라에 납관(納款351)하므로 대우하기를 후(厚)하게 하였는데, 이제 이우지가무
(李于之加茂)가 아비의 뜻을 이어 와서 귀순하고자 하니 가상하다.
만약 과연 성심으로 순종하면 예전처럼 대우하겠으나, 다만 중국 조정에서 서로 통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니, 형편상 서울에 오
기는 어렵다.」고 하였다.’라고 이처럼 설명하여 후하게 대접하여 보내게 함이 어떠합니까?"하니 전교하기를, "이것을 본도(本道)에
유시(諭示)하라."하였다.
38. 성종실록 6권, 성종 1년(1470 庚寅年/明 成化 6) 6월 3일 경술 5번째기사/
평안도 관찰사 이윤인에게 도내 연해고을의 해일의 피해를 보고하게 하다.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이윤인(李尹仁)에게 하서(下書)하기를, "듣건대 도내(道內)의 연해(沿海) 여러 고을에 해일(海溢)이
많이 볏곡식[禾穀]을 손상시켰다고 하니, 경(卿)이 친히 그것을 살펴서 아뢰어라." 하였다.
39. 성종실록 6권, 성종 1년(1470 庚寅年/明 成化 6) 7월 9일 을유 5번째기사/
평안도관찰사 이윤인이 백성으로 하여금 황충을 잡게 할 것을 청하다.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이윤인(李尹仁)이 치계(馳啓)하기를, "도내(道內)의 평양(平壤)·성천(成川)·영유(永柔)·자산(慈山)·
순안(順安)·삼등(三登)·상원(祥原)·중화(中和)·곽산(郭山)·순천(順天)·은산(殷山)·강서(江西)·용강(龍岡)·삼화(三和)·함종(咸從)
등의 고을에 청색·황색·흑색의 삼색(三色) 황충(黃蟲)이 화곡(禾穀)을 손상시키니, 백성들 로 하여금 잡아서 땅에 묻도록 하소서."하
였다.
40. 성종실록 10권, 성종 2년(1471 辛卯年/明 成化 7) 6월 14일 을묘 3번째기사/
평안도 관찰사 이윤인이 개천군의 백성을 진휼할 것을 청하다.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 이윤인(李尹仁)이 치계(馳啓)하기를, "이달 25일에 개천군(价川郡)에 우박(雨雹)이 내려, 전지 3백여
결(結)을 손상 시킨데다 양맥(兩麥)도 또한 미처 수확하지 못하여 거민(居民) 모두가 양식이 떨어졌으니, 청컨대 군자창(軍資倉)을 발
(發)하여 진휼하게 하소서." 양맥(兩麥) 보리와 밀. 하였다. 호조에서 이에 의거하여 오래 묵은 피곡(皮穀) 2천석(石)을 주어 진구(賑
救)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41. 성종실록 60권, 성종 6년(1475 乙未年)/明 成化(憲宗) 11年 10월 27일 계묘 1번째기사/
경연에서 경상도 관찰사 윤호에 대한 포상의 문제를 논의하다.
마치니, 장령(掌令) 이숙문(李淑文)이 아뢰기를, "경상도(慶尙道)의 66고을을 윤호(尹壕)가 어찌 영어(囹圄)를 다 비우게 할 수 있겠
습니까? 청컨대 성명(成命)을 거두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말하기를, "이윤인(李尹仁)이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가 되
고, 심선(沈 璿)이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었을 때에도 또한 공옥(空獄)으로써 상(賞)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강원도(江原道)·황해도(黃海道) 두 도의 인민은 경상도(慶尙道)에는 크게 미치지 못합니다. 신 등이 형조(刑曹)에 신문(訊問)
하니, 백정(白丁) 이중산(李仲山)은 재범 절도(再犯竊盜)로 바야흐로 의령옥(宜寧獄)에 계류되고, 향리(鄕史)중륜(仲倫)의 옥사[獄]
는 아직 국문(鞫問)을 마치지 못하였다고 하니, 윤호(尹壕)가 옥(獄)이 비었다고 아뢴 것은 기대하여 바람이 없지 않으며, 또 재상(宰
相)의 자급(資級)은 하관(下官)과 같지 않아, 가장 긴관(緊關)함이 되니, 신중히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하니, 임금이 원상(院相)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어떠한가?"하였다.
\
정인지(鄭麟趾)가 대답하기를,
"예전에 권진(權軫)이 형조판서가 되었을 때에, 장죄(杖罪) 이하를 모두 보방(保放)하고는 공옥(空獄)한 것으로서 아뢰니, 그 때의 조
사(朝士)로서 비웃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옥(獄)에 죄수가 없게 한 일은 반드시 속이는 데서 나왔으니, 상주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
다. "하고, 김국광(金國光)은 말하기를,
"이와 같은 일은 속이는 무리가 많으니, 상주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하고, 정언(正言) 최신한(崔信漢)은 말하기를,
"작상(爵賞)은 중한 일이니, 가볍게 사람에게 줄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중산(李仲山)의 일은 형방 승지(刑房承旨)가 심문(審問)하여 아뢰기를, ‘이미 나갔습니다.’고 하였다."
하니, 좌부승지(左副承旨) 현석규(玄碩圭)가 상고하여 아뢰기를,
"이중산(李仲山)의 심문을 마친 계본(啓本)은 공옥(空獄)을 아뢰기 전에 있었습니다. 사헌부(司憲府)에서 신문하고서도 알지 못하는
것은 계본(啓本)을 아직 형조(刑曹)에 내리지 않은 까닭입니다."하였다.
42. 성종실록 102권, 성종 10년 3월 11일 정묘 3번째 기사/
마전에 사는 죽은 관찰사 이윤인의 아내인 정부인 홍씨를 정문하도록 하다.
예조(禮曹)에서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의 계본(啓本)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마전(麻田)에 사는 졸(卒)한 관찰사(觀察使) 이윤인
(李尹仁)의 아내인 정부인(貞夫人) 홍씨(洪氏)는 아비의 상(喪)을 당하여 산소 옆에 여묘(廬墓)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친히 치전(致奠)
하고 항상 슬프게 울면서 우울해 하였으며, 집에 두 번이나 불이 났는데 자신이 불길을 무릅쓰고서 신주(神主)를 안고 나왔습니다.
무릇 철따라 나는 물건과 새로운 것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바친 후에 먹었으며, 종신토록 지키는 바를 변하지 않았으니, 그 품행이 특이
합니다. 청컨대 정문(旌門)하고, 그 자손을 녹용(錄用)하여 후인(後人)에게 장려하도록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43. 연산군일기 30권, 연산 4년(1498 戊午年/ 明 弘治(孝宗) 11년) 7월 12일 병오 5번째기사/
유자광의 심문으로 김일손이 사초에 기록한 이개·박팽년·하위지의 일에 대해 말하다.
조문숙(趙文琡)에게 들었고, 이개(李塏)·최숙손(崔叔孫)이 서로 이야기한 일과 박팽년 (朴彭年) 등의 일과 김담(金淡)이 하위지(河
緯地)의 집에 가서 위태로운 나라에는 거하지 않는다고 말한 일과,...일과, 이윤인(李尹仁)이 박팽년(朴彭年)과 더불어 서로 이야기 한
일과, 세조가 그 재주를 애석히 여기어 살리고자 해서 신숙주(申叔舟)를 보내어 효유하였으나 모두 듣지 않고...
44. 명종실록 24권, 명종 13년(1558 戊午年/ 明 嘉靖(明世宗의 연호 37)11월 16일 기축 2번째 기사/
예조가 가평군수 신여주와 비슷한 전례를 찾아 아뢰다. 예조가 아뢰기를,
"가평 군수 신여주는 밤중에 불이 나 창황한 참에도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고 활활 타는 불속에 뛰어 들어가 아비와 조부의 신주를 안
고 나오다가 미처 밖으로 나오지 못해 그만 타 죽었으니, 그의 특이한 성효(誠孝)는 비록 옛사람 중에서 찾아보아도 이보다 더한 사람
이 없을 것입니다.
본조(本曹)가 간수 하고 있는 《등록(謄錄)》을 일일이 찾아보니 혹 불속에서 어미를 업고 나온 사람도 있었고 【허중민(許仲敏)인데 태
인(泰仁) 사람이다. 성종조(成宗朝)에 벼슬을 제수하여 포장(褒奬)했다.】 혹 나오지 못하고 죽은 사람도 있었으며, 【김을시(金乙時)
인데 창성(昌城)사람이다. 성종조에 정려(旌閭)하고 쌀과 콩을 내렸다. 길씨(吉氏)인데 홍원(洪原) 교생(校生) 서윤문(徐允文)의 아
내이다.
중종 조(中宗朝)에 정려하고 복호(復戶)했다.】 혹 신주를 안고 나오다가 다행히 면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홍씨(洪氏)인데 관찰사 이윤인(李尹仁)의 아내이다. 성종조에 정문하고 그의 아들을 녹용(錄用)하였다.】
포상(褒賞)하는 특전은, 정문하고 복호하기도 하고, 정표(旌表)하고 물건을 상주기도 하고, 정문하고 그 자손을 벼슬시키기도 하여 그
때마다 같지 않았습니다. 본조가 함부로 하기는 어렵기에 감히 품합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정표하고 상품도 주고, 자손을 녹용하라."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