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포은문화제‘가 10월 3일에서 5일까지 3일간에 걸쳐 3일 첫째 날 포은 정뭉주선생의 묘소에서 고유제를 시작으로 개최되었다.
이날 김장호 용인문화원장과 청찬민 용인시장, 신현수 용인시의회의장, 이우현 국회의원, 백군기 국회의원, 이상일 국회의원 그리고 도의원 · 용인시의원등과 각 사회단체장들 등이 대거 참여했다.
4일에는 포은문화제의 하이라이트인 천장행렬이 용인공설운동장에서부터 통일공원까지 도보행렬 행사가 300여명의 천장행렬 상여꾼들이 참여하여 진행되었으며, 오후에는 모현면 능원초등학교 운동장에서부터 능원리 포은선생 묘소까지 천장행렬이 공설운동장에 이어 연속적으로 진행 되었다.
한편 이번 제12회 포은문화제는 민, 관, 군이 서로 협심하여 새로운 문화행사의 장을 열었으며, 육군 제55사단 군악대가 행사에 참여하여 주옥같은 선율을 선보여, 행사장의 분위기를 더욱 업 시키기도 했다.
5일 마지막 날에는 가곡합창제와 거리아티스트공연, 포은 골든벨 등이 진행되었고, 제12회 전국 한시백일장과 제8회 경기도 청소년 백일장이 진행되었다.
상설행사로는 체험관 운영(전통공예체험, 전통문화체험, 친환경 놀이 체험 등)과 전시관 운영(포은 선생 한시전, 용인의 역사문화인물 조명전) 농특산품 전시판매(친환경 유기농산물, 용인 농특산품, 시설채소 등)과 먹거리 장터가 운영되어, 전국에서 포은문화제에 참여한 5천여명의 시민들의 먹거리를 해결 해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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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정몽주선생 |
정몽주 그는 누구인가?본관은 영일(迎日). 초명은 몽란(夢蘭)·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인종 때 지주사(知奏事)를 지낸 습명(襲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성균관 복응재생(服膺齋生) 운관(云瓘)이다. 포은 정몽주선생은 기울어가는 고려왕조를 회생시키려다 개성 선죽교에서 희생되었다.
그떄 나이 56세였다. 순절한지 9년 후에야 비로소 선생의 충절과 학문이 인정되었다.
조선 태종 즉위년(1401)에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와 익성부원군(益城府院君)의 작훈을 내렸다.
태종6년(1406) 3월에는 개성의 해풍(풍덕)에 평장 하였던 묘소를, 지금의 용인시 모현면 능원리 문수산 기슭으로 옮겨, 부인 경주이씨와 합장하였다.
본래는 포은의 면례지가 능원리가 아니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포은 선생이 신원(伸寃)되자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천장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면례행렬이 지금의 수지읍 풍덕천에 이르렀을 때 신기한 일이 생겼다.
앞에 내세웠던 명정이 바람에 날려 어디론가 날라 가 버렸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면례꾼들이 따라가 보니 그 명정은 지금의 묘역에 떨어졌다.
지관을 불러 확인 해 보니 보기 드문 명당이었다.
여러 사람들과 숙의한 끝에 포은선생의 뜻으로 알고 그곳에 장례를 모시기로 하였다. 오늘날 능원리는 영일정씨의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포은선생의 묘소와 관련된 지명으로 수지읍에 풍덕내가 있다.
이는 본래 '풍덕에서 오신다(豊德來)'는 뜻에서 비롯하였다고 전한다.
그런데 '오신다'의 뜻인 '來'가 후대에 '내(川)'로 변이된 것이다.
첫댓글 포은 선조님에 대해서 다시금 돌아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건강하십시요.
가까이 살면서 무심히 지났네요.
내년부터는 참관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