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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받을 준비
2022.12.18.(강림절제4주일)
선한목자교회 김 명 현 목사
7/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진노를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8/ 회개에 알맞는 열매를 맺어라. 너희는 속으로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다' 하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9/ 도끼를 이미 나무 뿌리에 갖다 놓으셨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신다." 10/ 무리가 요한에게 물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11/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속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으러 와서, 그에게 물었다. "선생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13/ 요한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너희에게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 14/ 또 군인들도 그에게 물었다. "그러면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아무에게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 고소를 하여 빼앗거나, 속여서 빼앗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하게 여겨라." 15/ 백성이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던 터에, 모두들 마음 속으로 요한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그가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였다. (누가복음 3:7-15)
들어가는 말
기성세대는 어렸을 적 아버지의 퇴근을 기다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무언가 손에 조그마한 선물을 들고 오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말입니다. 저 역시 동생 둘과 함께 아버지의 문 여는 소리에 쪼르르 달려 나가 ‘안녕히 다녀오셨습니까?’ 라며 인사했던 것은 그렇게 예의를 배운 탓도 있지만, 우리의 내달음은 아버지의 손에 들려 있을 선물에 대한 기대이기도 합니다. 좀 구질구질한 이야기도 있는데, 제가 초등학교 1학년 때입니다. 이모가 고등학교를 우리집에서 잠시 다녔던 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모가 돌아올 때마다 이모의 빈 도시락을 열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없을 때 실망하는 저의 표정에 이모는 일부러 남겨 왔을지도 모릅니다. 그것마저도 선물이라고 여겼던 것이겠죠. 남겨진 도시락 반찬이라도 나에게 없는 것을 받아 본 경험은 선물이 주는 기쁨을 알게 합니다.
하지만 선물을 가지고 들어오는 사람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임을 잊곤 합니다. 그분이 진짜 선물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선물을 주는 사람이 되었을 때입니다. 선물을 주어본 사람은 진짜 선물이 무엇이고, 그 선물의 가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곧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이는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선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선물의 가치를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가 손에 들고 오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는 한, 부족함이 없는 사회에서 그리스도는 더 이상 선물로 인식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을 내 힘으로 전부 얻을 수 있을 것 같은 사회라면 굳이 선물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한 요한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라는 선물을 받을 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 봅시다.
자신에 대한 관심
“요한은 요단 강 주변 온 지역을 찾아가서,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3)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습니다.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왜 죄사함과 구원을 바랄까요? 그것은 바로 자신엔 대한 관심 때문입니다. 괴롭고 힘든 삶에서 해방되는 길이 있다는데 누군들 기대감을 갖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로마의 억압과 가난에 시달리고 있는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에서, 이러한 메시지는 정말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당시 정치나 종교 지도자들은 ‘함께 어려움을 이겨내자’ 라고 말했지만, 결국은 개인의 고통을 감내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편한 길로 빠져나가면서 시민들은 고난을 감수하라고 한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중간 관리자인 세리와 군인들의 모습에서 이러한 사회 분위기가 충분히 읽혀집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요한의 메시지는 시민들에게 해방감을 주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는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수많은 거짓 예언자들이 현실 도피적인 설교와 아무런 효과도 없는 처방을 남발하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일 수는 없었습니다. 요한은 현실을 피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은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들에게 말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진노를 피하라고 일러주더냐?”(7) 다가올 고난과 고통을 참고 견디라는 정치인들이나, 그것을 피할 수 있다는 종교인들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요한은 그들에게 피하는 대신 ‘회개에 알맞은 열매’(8)를 맺으라고 요구합니다. 세례를 받으면 다 될 줄 알았던 사람들에게 요한은 더 큰 부담을 안겨주는 것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선물 대신 짐처럼 느껴집니다.
정치인들의 말은 우리의 힘으로 열매를 맺어 나누어줄 테니 너희는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라는 것이며, 종교인들의 말은 우리의 신앙으로 열매를 맺어 나누어줄 테니 너희는 우리에게 믿음과 돈을 바치라는 것입니다. 요한에게 열매는 권력을 가진 그들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모두가 맺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요한은 기존 질서를 부정하는 혁명가로 보입니다. 요한은 모여든 사람들에게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다’(8)라는 생각 때문에 종교인들의 거짓 선동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8)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은 아무런 구원 조건도 될 수 없습니다. 요한은 ‘열매’를 맺는 것 외에 어떤 것도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음을 단호하게 선포합니다. 오로지 ‘좋은 열매’가 필요합니다. 좋은 열매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타인에 대한 관심
요한은 열매 맺음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합니다. “도끼를 이미 나무뿌리에 갖다 놓으셨다. 그러므로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신다.”(9) 요한의 이러한 선포에는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것과 그 대상은 정치, 종교 지도자들이 아닌, 말씀을 듣는 모든 백성이라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모두에게 요구하고 있는, 구원에 필요한 조건이 되는 ‘좋은 열매’란 무엇일까요? 일단, 이 열매는 정치인들이 말하는 인내도 아니며, 종교인들이 말하는 헌신도 아닙니다. 인내와 헌신은 요구하는 자신들을 위한 것이지, 인내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질 선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인내하고 언제나 헌신해야 할 뿐입니다. 그나마 그것이 자신을 위한 최선이라고 세뇌되었을 뿐입니다. 요한은 이렇게 만든 권력자들에게 회개를 선포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선물을 받을 가능성이 여전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그들에게 선물을 받을 준비를 시켰던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아무런 대가 없는 선물이지만, 그것을 가져오는 사람을 진정으로 환영하고, 그리고 그분이 진짜 선물인지 알아볼 수 있는 사람에게만 선물이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요한은 하나님의 선물을 받을 만한 사람이 갖추어야 할 조건을 하나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앞서 말한 ‘좋은 열매’인데, 그것은 바로 ‘자신에 대한 관심을 타인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선물을 베풀어 본 사람이 선물을 들고 오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열매를 맺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기적 관심을 가지고 찾아온 사람들을 향해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져진다’는 하나님의 불의 심판을 선언하면서, 먼저 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던 것입니다.
충격을 받은 무리가 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10) 세례만 받으면 죄사함을 얻을 줄 알았던 사람들의 물음입니다. 그러자 요한이 대답합니다. “속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11) 요한의 요구는 자신의 소유를 인정하고 타인의 비소유에 대한 관심을 가지라는 데서 출발합니다. 나의 ‘가지고 있음’은 타인의 ‘가지지 못함’을 이해하는 근거이며 선물의 출발입니다. 요한을 찾아 광야로 나온 사람들의 구원에 대한 관심은 ‘자신의 가지지 못함’ 때문이었습니다. 요한은 이러한 ‘나의 가지지 못함’에 근거한 이기심을 ‘나의 가지고 있음’과 ‘타인의 가지지 못함’을 보는 이타심으로 돌리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 받는 자가 맺는 열매란, ‘가지지 못한’ 타인에게 선물의 제공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가져오는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는 조건입니다.
요한은 그리스도인가?
선물을 베푼 자만이 그리스도의 선물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세례를 받으러 온 세리들이 요한에게 묻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12) 세리는 사람들이 가진 것의 일부를 가져가는 자입니다. 세리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빼앗긴 자’로 인식하게 합니다. 이렇게 세리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선물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구원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요한이 세리들에게 대답해 줍니다. “너희에게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13) 세리들이 이런 식으로 자신들이 ‘가지지 못한 자’라고 여기면서 그것을 스스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스스로 구원을 챙기려는 태도는 하나님의 구원을 선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자신의 부족을 남의 것으로 채우려는 자는 모두 세리와 같은 죄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세리와 같은 이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도 구원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이번에는 군인들이 요한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14) 군인은 그들이 가진 힘으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는 사람입니다. 힘을 남용한 군인은 억압받은 사림들이 스스로를 ‘잃어버린 자’로 인식하게 만듭니다. 군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열매를 맺을 힘을 빼앗아 버린 것입니다. 요한은 군인들에게 대답합니다. “아무에게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 고소를 하여 빼앗거나, 속여서 빼앗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하게 여겨라.”(14) 군인들에게 봉급으로 만족하라는 것은 자신을 ‘가진 자’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군인에게도 열매의 가능성이 생길 것입니다. 빼앗지 않음은 자신과 타인의 ‘가진 것이 있음’을 모두 인정하는 것이며, 이로써 모두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런 대화가 오가던 당시에, 유대인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15)
그들은 이리저리 빼앗긴 나머지, 스스로는 ‘가진 것이 하나도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풍족한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을 들고 올 그리스도를 고대하던 사람들은 모두 마음속으로 요한에 대해 ‘그가 그리스도가 아닐까?’(15)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요한이야말로 이스라엘이 고대하던 구원의 선물을 줄 수 있는 사람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상황은 누구라도 그리스도로 고대할 만합니다. 하지만 ‘가진 것이 하나도 없다’고 푸념하는 이들에게 무언가가 주어진다면 그것은 이기적인 채움을 위한 싸움으로 결론이 나거나,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며 외면할 것입니다. 선물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은 선물일 수 없습니다. 선물을 이해하는 것이 선물을 받는 것보다 먼저입니다. 요한에게 주어진 사명은 선물을 받을 준비를 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가는 말
선물을 받을 준비란 먼저 내가 가진 것을 조건 없이 선물로 주는 것입니다. 선물을 줄 수 있는 사람만이 선물을 알아보고 그것의 가치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선물은 돈으로 살 수도 빼앗을 수도 없습니다. 자신의 것을 선물을 줘본 사람만이 타인의 선물을 빼앗지 않을 것이며, 내게 주어진 선물도 소중히 여길 것입니다. 요한은 선물을 맞이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이렇게 요한은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요한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는 준비된 사람에게만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기적 태도를 이타적 태도로 바꾼 사람입니다. 타인의 것을 빼앗지 않음으로써 이웃 역시 구원의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나와 이웃은 서로 ‘가진 사람’으로서 서로에게 선물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면서 구원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탄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실제로 가졌는지를 따지는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결핍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선물을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물론 이기심 때문에 결핍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의 결핍을 채울 수는 없으며, 우리 또한 그 결핍을 채워줄 수 없습니다. 그들은 구원에서 제외된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가진 것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풍요로운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것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며 그들은 받는 선물의 가치도 이해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들과 함께 성탄의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수고는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며, 아이들의 미소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줄 수 있는 것들을 주고받는 사람들입니다. 이 가운데 하나님의 선물이 임할 것이며, 그 선물은 진정한 구원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