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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도중(黃州道中) - 황주로 가는 중에
野店人煙小(야점인연소) : 들판 주막에는 사람과 연기 드물고
江橋落日愁(강교락일수) : 강가 다리위로 지는 해 시름겨워라
誰憐千里客(수련천리객) : 누가 천리 먼 나그네 불쌍히 여기랴
今始到黃州(금시도황주) : 오늘에야 황주 고을에 당도했도다
유송경(留松京) - 송경에 머물며
故國遺墟在(고국유허재) : 옛나라 터만이 남아
荒城客子過(황성객자과) : 거친 성에 나그네 지나가다
半千無王氣(반천무왕기) : 반천 년에 왕기는 없어지고
百二有山河(백이유산하) : 백이 강산은 그대로구나
落日村煙冷(락일촌연랭) : 지는 해에 연기는 차갑고
餘寒野雪多(여한야설다) : 추운 날씨에 들에는 많은 눈 남아
南樓一惆悵(남루일추창) : 남쪽 누대도 한같이 서글픈데
弔古且長歌(조고차장가) : 지난일 슬퍼하며 길게 노래부른다
백상루3(百祥樓3) - 백상루
遠客愁無緖(원객수무서) : 먼 나그네 시름이 이유도 몰라
登樓暫解顔(등루잠해안) : 누데에 올라 잠시 얼굴빛 풀어본다
潮聲鳴薩水(조성명살수) : 밀물 소리 살수를 울리고
嵐氣撲香山(람기박향산) : 푸른 안개 향산을 때린다
驛路何時盡(역로하시진) : 역마 길은 언제나 끝나
鄕園只夢還(향원지몽환) : 내 고향은 꿈에서만 돌아간다
佳人知我恨(가인지아한) : 그리운 사람 나의 한을 알고서
停酒唱陽關(정주창양관) : 술잔 멎고 양관곡을 불러주는구나
백상루2(百祥樓2) - 백상루에서
向晩憑高閣(향만빙고각) : 저물녘 높은 누에 기대니
寒風起夕波(한풍기석파) : 차가운 바람에 저녁 물결 이는구나.
秋花石間早(추화석간조) : 돌 사이의 가을꽃은 이르고
霜氣水邊多(상기수변다) : 물가에 서리 기운 차가워진다.
去國年將晏(거국년장안) : 고향을 떠난 지가 해마다 늦어지니
傷時恨若何(상시한약하) : 시절을 아파하지 내 한을 어떻다 할까
悲吟臨海嶠(비음림해교) : 바닷가 높은 산에 이르러 슬피 읊다가
得句報羊何(득구보양하) : 싯귀를 얻어서 양하에게 말하여 보노라.
평양려야(平壤旅夜) - 평양여관의 밤
夕霽天氣冷(석제천기랭) : 저녁에, 비 개자 싸늘해지고
閒房來遠風(한방래원풍) : 멀리서 부는 여관방을 찾아든다
誰知今夜會(수지금야회) : 누가 알았으랴, 오늘 밤의 이 모임
却有故人同(각유고인동) : 갑자기 임과 함께 만날 줄이야
月射金蕉白(월사금초백) : 금초에 달빛 훤히 비치니
花依鳳蠟紅(화의봉랍홍) : 꽃 빛은 촛불에 어리어 붉도다.
鄕園望不極(향원망불극) : 고향 옛 동산 바라보기 끝없고
消息碧雲中(소식벽운중) : 소식은 저 푸르른 구름 속에 있으리
중화조료(中和阻潦) - 중화에서 홍수로 길이 막혀
積雨秋連日(적우추련일) : 가을 들어, 몇 날을 비 내리고
平郊潦映空(평교료영공) : 들판에 고인 물에 하늘이 비친다.
行人愁利涉(행인수리섭) : 나그네는 길 잘 건널 일 걱정하고
舟楫信難通(주즙신난통) : 배들은 소식조차 통하기 어렵구나.
野色孤煙外(야색고연외) : 한 가닥 외로운 이내, 넘어 보이는 들 빛
江聲亂樹中(강성란수중) : 어지러운 숲 속에, 흐르는 강물소리
停楹仍北望(정영잉북망) : 난간에 기대어, 저 북쪽을 바라보니
天際有賓鴻(천제유빈홍) : 하늘 가로 기러기 손님들, 높이도 날아간다
안성관(安城館) - 안성관
客裏經寒食(객리경한식) : 객지에서 한식을 지나니
春光奈老何(춘광내로하) : 봄빛이 늦어지니 어찌하리오
出門芳草遍(출문방초편) : 문을 나서면 온갖 곳이 봄풀
倚杖落花多(의장락화다) : 지팡이 기대서니 꽃잎이 진다
公子聯%987訪(공자련표방) : 공자는 말 타고 갔는데
佳人勸酒歌(가인권주가) : 가인은 권주가를 부른다
莞然開一笑(완연개일소) : 빙그레 한번 웃으니
足以慰蹉跎(족이위차타) : 출세못한 서글픔 잊기에 족하다
초좌헌(初坐軒) - 동헌에 앉자마자
客病經三月(객병경삼월) : 나그네 병이 들어 석 달이 지나니
危冠已二毛(위관이이모) : 높은 사모에 이미 이모가 비치는구나
淹留嗟汝拙(엄류차여졸) : 주저앉은 네 옹졸하고 가엽고
歸去是人豪(귀거시인호) : 고향으로 돌아가는 자가 바로 잘난 사람
日氣融殘雪(일기융잔설) : 날씨는 남은 눈도 다 녹이고
春寒勒小桃(춘한륵소도) : 봄 추위는 복사꽃을 죄어매는구나
東風動歸興(동풍동귀흥) : 봄바람이 돌아갈 흥을 일으키니
湖海有漁舠(호해유어도) : 호수와 바다에는 낚싯배가 떠있구나
5전(五傳)으로 살펴보는 허균의 작품세계
1) 도가 사상
<남궁선생전>은 허균의 시대를 전후로 출간된 각종 내단 수련해설서에 나열되어 있는 다양한 수련법이 체계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장생전>에서도 신선전이나 이인설화에 자주 등장하는 장생의 기이한 행적 및 죽음을 볼 수 있다. <장산인전> 역시 백성의 고통을 해결해주는 장산인의 비범한 능력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남궁선생전>의 결말은 도가사상이 추구하는 것과는 다른 내용이다. 남궁선생은 왜 수련을 하지 않느냐는 허균의 질문에 인간세상이 쓸쓸하고 재미없는데 오래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이는 현실세계의 재미를 추구하는 모습으로 도가사상에서 추구하는 바와 다르다. 즉 허균은 도가사상 자체보다는 내단학, 신선, 혹은 그들이 펼치는 이적기사에 동경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작품의 경향을 허균의 도가사상과 연관지어 살펴볼 수 있다. 허균은 5전에서 도교사상에 대한 많은 관심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도선관은 다소 모순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먼저 노자의 도덕경이나 장자의 남화경 등 중국의 도가 경전들을 언급함에 있어서 그 속에 부여된 신선사상 등의 요소를 후대인의 모사라고 배척했으며, 유가 경전과의 유사성을 강조했다. 또 도교의 제의나 수련방식을 혹세무민하는 것이라 하여 인정하지 않았다. 유가를 비판한 장자속의 글귀를 예기의 ‘앉아 있으면 제계하는 것 같고 서 있으면 시체와 같다’라는 글귀와 연결시켜 결코 그것이 유가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해명하려 했다. 묵자를 언급함에 있어서는 그 학문이 ?와 같기에 모두 묵자를 ?의 도라 일컬었다고 전제한 후 그 끝이 시속폐단에 흘러서 맹자를 애써 배척하기에 이르렀다고 비판했다. 또 그 문장이 비록 옛것을 본 땄으나 중간중간 번잡하고 유가 같지 못한 점이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문장의 판단기준까지도 유가 경전에 있었음을 뜻한다.1)
특히, <성소부부고>는 허균의 세계관을 파악하기에 적합한 작품이다. 곳곳에서 불가적 신선적 세계관이 보이기는 하나 이것은 허균의 세계관의 중심이 아니며 다만 지적호기심, 문장수련의 도구, 현실생활의 좌절에 대한 위안으로 보인다. 허균의 유가적 세계관은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주장하고 현실의 문제를 비판하는 무기였다. 그러나 그의 왕도정치에 의한 이상사회의 실현은 멀어져갔고, 자신은 수차례의 파직과 유배로 좌절을 겪었다. 그의 전은 이런 배경하에 저작된 것이다.
2) 뛰어난 재주와 한미한 출신
<손곡산인전>의 이달은 어머니의 태생이 천하기 때문에 등용되지 못한다. <남궁선생전>에서 두는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남들의 미움과 시기를 사서 산에 가서 도를 닦는다. <장생전>의 장생과 <장산인전>의 장산인 역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유교적 도학자들이 보기에 그들의 능력은 혹세무민하는 수상한 술법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들 역시 등용되지 못한다. <엄처사전>의 엄처사는 등용될 기회가 여러번 있지만 오히려 스스로 사양한다. 그가 진사에 합격한 것은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이처럼 그가 벼슬을 사양하는 이유는 뜻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벼슬을 하더라도 그 뜻을 펼치기 어려운 세상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엄처사는 자신의 후생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을 뿐이다. 이렇게 유교사회는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인재들을 외면하거나 배격했으며 허균은 자신의 작품에서 이러한 사회를 비판한다.
3)실제 인물을 적절히 차용했다.
허균의 전은 전사실의 기록으로 보이나 단순한 사실의 기록이라기 보다는 기록자의 창작의식이 보태진것 같다. <남궁선생전>의 주인공 남궁두에 관한 이야기는 어우야담, 지봉유설, 해동이적, 동야휘집 등에 실려 있는데 허균의 <남궁선생전>과 비교해 매우 짧고 단편적으로 쓰고 있다. 이를 통해 허균의 <남궁선생전>은 남궁두의 이야기를 확대, 재해석해서 창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장산인전>은 화담선생의 일화에 영향을 받은 흔적이 있고, <장생전>은 김려의 <장생전>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엄처사전>도 강릉인 박수량과 같은 인물을 허구화했으며, 또 <장산인전>, <장생전> 등은 <태평광기> 소재 설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 등에서 허균의 전들은 특정인물의 삶을 허균 나름의 방식으로 허구화하고 재창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 엄처사전과 손곡산인전
엄처사전(嚴處士傳) 요약
①엄 처사는 이름이 충정, 강릉 사람이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집안이 무척 가난하였으나 어머니에게 극진했다. 어머니의 충고를 따라 여러 번 향시에 뽑혔고, 사마시에 합격하여 어머니를 기쁘게 하였다. ②모친상을 당한 후에 벗들이 과거에 응하기를 권했으나 자신의 몸만 영화롭게 할 수 없다고 하며 은거하며 후진양성에만 힘썼다.
엄처사전(嚴處士傳)-허균(許筠)
嚴處士名忠貞(엄처사명충정) : 엄 처사(嚴處士)는 이름이 충정(忠貞),
江陵人也(강릉인야) : 강릉(江陵) 사람이었다.
父早卒(부조졸) :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家甚貧(가심빈) : 집안이 무척 가난하여
躬薪水自給(궁신수자급) : 몸소 땔감과 먹을 것을 마련하였다.
養其母極孝(양기모극효) : 그 어머니를 봉양하는 데 효성을 다하여
晨夕不離側(신석불리측) : 새벽이나 저녁에는 곁에서 떠나지도 않았다.
母稍恙則不解帶寢(모초양칙불해대침) : 어머니가 조금만 편찮으면 마음 편하게 잠자리에 들지도 않으며,
手調膳以進(수조선이진) : 손수 음식을 만들어 드시게 하였다.
母嗜山雀(모기산작) : 어머니가 비둘기 고기를 즐겨하자,
結網膠竿(결망교간) : 그물을 짜고 간대에 갖풀을 붙여서라도
必獲以供之(필획이공지) : 기필코 잡아다가 대접하였다
其母勸令學取第(기모권령학취제) : 그 어머니가 글을 배워 과거를 보도록 타이르자,
益孜孜着力於問學(익자자착력어문학) : 더욱 열심히 글을 배우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爲詩賦甚古(위시부심고) : 시부(詩賦)를 아주 아건(雅健)하게 지어 내서
屢擢鄕解(루탁향해) : 여러번 향시(鄕試)에 뽑혔고,
得司馬以榮之(득사마이영지) :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어머니를 기쁘게 하였다.
於書無所不通(어서무소불통) : 책이라면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而尤遂於易中庸(이우수어역중용) : 유독《주역(周易)》과《중용(中庸)》에 깊이 파고들어
理致超詣(리치초예) : 이치에 높고 멀리 나아가,
所著文墨(소저문묵) : 저술한 글들이
與河洛相契(여하락상계) : 하도낙서와 서로 부합되는 경지였다.
母病殆(모병태) : 어머니 병환이 위독하여
以身禱於天(이신도어천) : 자기를 데려가고 어머니 살려 주기를 하늘에 기도했지만,
不獲祜(불획호) : 회생하지 못하자
水漿不御數旬(수장불어수순) : 여러날 동안 물도 마시지 않아
杖而起(장이기) : 지팡이를 짚어야 일어날 정도였다.
三年廬啜粥(삼년려철죽) : 3년간 여묘(廬墓) 살이에도 죽만 마셨다.
制訖(제흘) : 복제(服制)를 마치자,
朋友勸應擧(붕우권응거) : 벗들이 과거에 응하기를 권했다.
處士泣曰(처사읍왈) : 처사(處士)는 울면서. 이르기를
吾爲老母也(오위로모야) : "나는 늙은 어머니를 위해서 과거보려 하였다.
今奚赴爲(금해부위) : 이제 왜 과거를 보아
身榮而母不享(신영이모불향) : 내 몸만 영화롭게 하고 어머니는 누릴 수 없게 하랴.
吾不忍是(오불인시) : 나는 차마 그럴 수는 없다."하면서
悲咽不止(비인불지) :목메인 울음을 그치지 않으니,
人莫敢更言(인막감경언) : 남들이 감히 다시는 말하지 못하였다.
晩年移居羽溪縣(만년이거우계현) : 만년(晩年)에 우계현으로 이사와 살며
擇山水幽絶處(택산수유절처) : 산수(山水)가 유절(幽絶)한 곳을 택하여
構茆舍(구묘사) : 띠집[茆舍]을 짓고,
若將終身焉(약장종신언) :거기서 일생을 마치려 하였다.
窮乏不自聊(궁핍불자료) : 궁핍하여 제 몸을 의탁하지 못했으나
晏如也(안여야) : 마음만은 편안하게 살았다.
爲人和粹夷曠(위인화수이광) : 사람됨이 화평하고 순수하며, 평탄하고 툭 트여
不與人忤(불여인오) : 남들과 거슬리지 않았다.
恒居肫肫如也(항거순순여야) : 평상시에는 공손하고 지성스러웠으나
及至鄕評臧否(급지향평장부) : 고을에서의 잘잘못을 평하거나,
辭受取與之間(사수취여지간) : 사양하고 받으며 취하고 주어야 할 것들에 있어서는
截然不可犯(절연불가범) : 확고부동하여 범할 수가 없었고,
一切以義裁之(일절이의재지) : 일체를 의(義)로만 재단하자
鄕人皆受而敬之(향인개수이경지) : 고을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고 공경하였다.
訓誨後進(훈회후진) : 제자들을 교육시킬 때도
必以忠孝爲先(필이충효위선) : 반드시 충효(忠孝)를 첫째로 하고
以其紛誶名利(이기분수명리) : 화려한 명리(名利) 따위야 완전히 벗어난 듯
則泊然不一出諸口(칙박연불일출제구) : 한마디도 말한 적이 없었다.
讀史至成敗治亂君子小人之辨(독사지성패치란군자소인지변) : 사서(史書)를 읽으며 성패(成敗)ㆍ치란(治亂)ㆍ군자(君子)ㆍ소인(小人)을 구별함에 이르러서는,
必慷慨論折(필강개론절) : 언제나 강개하여 명확히 판단하고
亹亹可聽(미미가청) : 막힘이 없어 들을 만하였다.
於武穆文山之死(어무목문산지사) : 두목이나 문산이 죽어간 대목에 있어서는
則輒掩卷流涕(칙첩엄권류체) : 별안간 책을 덮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爲文簡切有致(위문간절유치) : 문장은 간결하고 절실하여 운치가 있었고,
而詩亦壯麗(이시역장려) : 시도 역시 장려(壯麗)하게 지어 냈다.
所傳誦者百餘篇(소전송자백여편) : 그래서 전해지고 외어지던 것들이 1백여 편이었는데,
皆合作家(개합작가) : 모두 시작(詩作)의 규범에 합치되었으나
處士不屑爲也(처사불설위야) : 처사 자신은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었다.
朝廷聞而嘉之(조정문이가지) : 조정(朝廷)에서도 듣고, 가상히 여겨
再授齋郞(재수재랑) : 두 번이나 재랑을 제수(除授)했으나
終不赴焉(종불부언) : 끝내 부임하지 않고 말았다.
年七十八(년칠십팔) : 향년(享年) 78세였다.
將終之日(장종지일) : 생을 마치려던 무렵에
招所嘗往還者數人(초소상왕환자수인) : 오래 전부터 출입하던 몇 사람과
學者十餘人(학자십여인) : 학자 10여 명을 초대하였다.
設酒肴以飮之(설주효이음지) : 주안상을 차려 대접하고는
因言身後當葬先隴(인언신후당장선롱) : 이어서 자기 죽은 뒤의 일을 말했으니, 반드시 선산에다 장사지내 주고
而托其幼孫(이탁기유손) : 그의 어린 손자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以所玩圖書(이소완도서) : 아끼던 도서(圖書)들을
散給門人(산급문인) : 문인(門人)들에게 나누어 주고는
端坐穆然而逝(단좌목연이서) : 단정히 앉아 조용히 서거하였다.
閭巷爭來哭之(려항쟁래곡지) :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였고,
士夫識與不識(사부식여불식) : 평소에 알지 못하던 선비들까지도
皆相弔于家(개상조우가) : 모두 와서 조상(弔喪)해 주었다.
遺文散失(유문산실) : 유문(遺文)은 흩어지고 잃어버려
不克集也(불극집야) : 모아놓지를 못했다.
外史氏曰(외사씨왈) : 외사씨(外史氏)는 논한다.
處士孝於家廉於鄕(처사효어가렴어향) : 처사(處士)는 가정에서 효도를 다했고 고을에서 절도 있는 행실을 하였으니,
固當得位(고당득위) : 분명히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而以母死不賓于王(이이모사불빈우왕) :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이유 때문에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卒窮以終(졸궁이종) : 끝까지 궁하게 살다가 세상을 마쳐
其才不少售(기재불소수) : 그의 훌륭한 재능이 조금도 쓰이질 못했으니,
惜哉(석재) : 애석하도다.
巖穴間有士如(암혈간유사여차) : 선비들이 묻혀 사는 암혈(巖穴)에는 이분처럼
名湮沒而不傳者(명인몰이불전자) : 이름이 인몰(湮沒)하여 전해지지 않는 선비들로는
非獨處士(비독처사) : 처사 한 사람만이 아니어서,
悲夫(비부) : 더욱 슬퍼진다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 요약
①손곡산인 이달은 쌍매당 이첨의 후손으로 어머니가 천인이어서 세상에 쓰여질 수 없었다. 그는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며 시를 잘 썼다. ②사암 정승의 말을 따라 당시를 따라 훌륭한 시를 썼다. ③평생 동안 유리걸식 했으니, 사람들이 대부분 천하게 여겼다. 이는 그가 시 짓는 일에만 몰두했던 탓이었다.
작품분석
<엄처사전>과 <손곡산인전>은 허균의 전 들 중에서 앞선 시기에 쓴 작품으로 보인다. 전통적인 사전의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며 입전 대상인 엄충정과 이달에 대해 사실적으로 쓰고 있다.
<엄처사전>에서 엄충정은 효를 실천하는 인물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지만 자신의 이상과 동떨어진 현실에 화합하기를 스스로 거부한다. 허균은 이러한 인물을 통해 많은 선비들의 재능이 쓰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손곡산인전>의 이달은 엄처사와는 다르게, 신분문제로 사회에 진출하지 못하는 인물이다. 모친이 천인이기 때문에 이달의 시재는 등용되지 못하는데 허균은 자신의 스승의 이달의 모습을 통해 현실의 문제점을 비판한다.
이 두 작품은 외사씨왈(外史氏曰)로 마무리된다. 이는 정사에 입전되지 못한 엄충정과 이달을 허균이 사관의 입장에서 기록하고자 의도했기 때문으로 보이며 이 때문에 서술방법도 전통적인 사전의 경우와 같이 객관적인 사실의 기술에 치중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여타 3편의 전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2. 남궁선생전
남궁선생전 요약
① 두는 이름난 집안에서 태어나 재주가 좋지만 거만해서 모두 두에게 앙심을 품었다.② 두의 첩이 두의 성이 다른 당질과 사통하였는데 두가 이 사실을 알게 되어 첩과 당질을 죽이고 논에 묻는다. 두에게 죄를 지은 종이 논에서 그 시체를 찾고 두를 싫어한 현령이나 여러 아전들은 기뻐하며, 두가 사사로운 미움으로 당질을 죽였다고 죄를 꾸몄다. 두는 잡히지만 아내가 간수에게 술을 먹여 몰래 빠져나오게 한다. 아내와 딸은 옥에 갇혀 굶어죽고 두는 꿈에서 산신이 경계해주어 도망쳐 두류산 쌍계사를 갔다가 태백산으로 향한다. ③태백산으로 가는 길에서 한 스님을 만나는데 그는 두의 관상을 보고 모든 사건을 알아차린다. 두는 그에게 스승이 되어달라고 하나, 젊은 중은 자신보다 스승이 더 뛰어나다고 한다. 두는 젊은 중의 스승을 찾아 무주 치상산으로 가서 3일 동안 정성을 드리고, 장로(젊은 중의 스승)는 그에게 죽지 않는 방술을 가르쳐주겠다고 한다. 방술을 배우기 위해 두는 잠을 자지 않고, 점차 끼니를 줄이며 수련해나가지만 급한 마음에 수련에 실패한다. 장로는 두가 마음이 급해 신태를 이루지 못했으나 지선이 될 것이며 더 수양하면 8백세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④ 두가 장로의 이름을 묻자, 장로는 자신이 나병에 걸려 부모에게 버려졌다가 약초를 먹고 나았으며 신라 의상대사가 정양진인에게 받은 비결서를 전수받은 이야기를 해준다. 또 장로는 정월 보름 귀신들을 두에게 보여준다. 기이한 모습의 짐승들, 다섯 신, 선녀 10인, 7도 신장, 5대 신장 등이 나타난다. ⑤ 두는 스승의 말대로 하산해서 늙고 충직했던 한 종에게 찾아가 상민을 아내로 맞아서 아들 딸 하나씩을 낳았다. ‘나’는 자신을 찾아온 두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음식ㆍ거처가 보통 사람과 같음을 보고서 이상하게 여긴다. 두는, 재미가 없고 쓸쓸하여 오래살고 싶지 않다고 답한다. 두는 얼마동안 머물다가 떠나고, 사람들은 그가 용담으로 다시 갔다고들 한다.
작품 분석
이 작품은 소설적 긴장과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으로 남궁두가 신선술을 배우게 된 동기, 신선술을 연마하고 하산하는 부문, 그리고 허균과의 만남을 기술한 마지막 부분과 허자왈(許子曰)의 논평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봉유설>, <어우야담>등에 이미 간략히 소개되어 있는 남궁두의 일화는 허균 자신도 익히 알고 있는 소재였을 것이다. 허균은 그것을 토대로 남궁두가 피신하여 치장산 속으로 숨을 수 밖에 없는 사정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했고, 신선술과 신선세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이용하여 작품에 나타낸 것 같다.
남궁선생이 도피하게 된 이유는 단순히 첩을 죽였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사이가 나빠 모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선이 되는 수련을 못다하고 그는 다시 현실세계로 내려온다.
<남궁선생전>은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에서 발단되어 그 해결 방안의 모색이 나타남 없이 도교로 빠져들어 갔다가 다시 실수로 인해 현실로 회귀하며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 이러한 한계는 홍길동전에 가서 극복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남궁선생전>에는 신선세계가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허균이 신선의 세계를 동경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현실과의 불화에 대한 위안을 구하려는 것이며, 신선술의 수련방법에 관심을 갖는 것은 신선이 되고자 함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남궁두가 허균에게 건강과 장수를 위해 선행을 하고 덕을 쌓을 것을 권하는 부분에서도 이러한 점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남궁선생전>은 허균의 도선적 세계관을 보인 작품이라고 보다는 오히려 건강과 관련한 신선술적 관심을 보여준 것에 가깝게 보인다.
전통적인 전양식에서 벗어나 작자가 직접 개입하여 논평을 하는 것은 허균이 남궁두의 이야기를 객관화 하지 않고 주관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가 남궁두에게 직접 들었다고 소개한 전의 내용도 확실히 믿을 만한 것은 못되고 그림자나 메아리 같이 실체가 없는 소리라고 하였고, 단지 두가 80이 넘은 나이에도 용모의 건강함이 기이하다고 한 것도 주관적인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3. 장산인전과 장생전
장생전(蔣生傳) 요약
① 장생은 기축년(1589) 무렵의 인물로 밀양좌수인 아버지가 첩의 속임수에 빠져 3살 때 그를 쫓아냈다. 15세에 결혼했는데 아내가 죽자 떠돌다 서울까지 왔다. 그의 용모는 수려했고 담소와 노래를 잘 했다. 창녀, 기생들과 친했고 술이 취하면 흉내를 잘 냈다. 매일 구걸해 서너 말을 얻어 다른 거지와 나누었다. ② 하루는 장생과 친한 소녀가 길에서 준수한 소년을 만난 후에 자주빛 봉미를 잃어버렸다. 장생은 계집의 허리를 띠로 묶어 매고, 몇 겹으로 겹친 경복궁 문으로 날아서 들어갔다. 경회루위에 두 소년이 상량 위에 있고 뚫어진 구멍에서 금구슬ㆍ비단ㆍ명주와 계집이 잃어버린 봉미가 있었다. 소년들이 봉미를 돌려주자 장생은 , "두 아우는 행동거지를 삼가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의 종적을 보지 못하도록 하게나."라고 하였다. 계집은 다음날 감사의 말을 하려 했으나 장생은 술이 취해 누워 자고 있고, 사람들도 밤일을 알지 못했다. ③ 임진년 4월 초하룻날 술에 취해 놀다가 수표교위에서 넘어졌다. 다음날 사람들이 그를 발견했는데, 시체가 부패하여 벌레가 되더니 전부 날아가 옷과 버선만 남았다. ④ 무인 홍세희는, 장생과 친하게 지냈었다.4월에 장생을 만났다. 그는 자신이 죽지 않았으며 동쪽 나라로 떠났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병화가 있으면 높은 곳의 숲으로 향해 가고, 물에는 들어가지 말고, 산성으로 오르진 말라고 말한다. 홍세희는 후에 이 말을 기억해 내서 죽음을 면하나 나중에는 이 말을 잊고 죽고 말았다.
[주]장생은 전우치, 홍길동처럼 도술을 행하는, 실존인물에다 민간에서 이적을 추가하여 만들어 낸 이인(異人)이다. 조선 후기엔 이런 인물전기가 많이 만들어졌다. 그 줄거리는 아래와 같다.
장생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기축년 간에 서울을 따라붙어 왕래하였는데 걸식으로 업을 삼았다. 그 이름을 물으면 곧 말하기를 "나 또한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거주를 물으니 곧 말하기를 "아비는 밀양좌수로 내가 3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비첩의 간계에 넘어가 나를 외거노비의 집으로 쫓아냈다.
15살이 되었을 때 노비는 나를 위해 양민 여자를 취하여 주었다. 수년이 지나자 부인이 죽고 인하여 호남 서쪽 여기저기를 떠돌아다니다 지금 서울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그 용모가 심히 준수하고 눈매가 그림 같았다. 우스개 소리를 잘하고 특히 노래를 잘하였다. 소리를 내면 처절하여 사람을 감동시켰다. 항상 자색 겹옷을 입고 춥거나 더울 때에도 갈아입지 않았다. 창녀의 집, 기생방을 드나들며 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술이 있으면 언제나 스스로 매우 취할 때까지 노래를 부르는데 그 기뻐함이 지극하였다.
혹 술이 한창일 때 눈먼 점장이, 술취한 무당, 게으른 선비, 소박맞은 여자, 걸인, 늙은 젖어미 등의 시늉 등을 잘 했으며, 또 얼굴로 십팔나한을 흉내내었는데 심히 비슷하였다. 또 찌푸려 입으로 호각, 피리, 쟁, 비파, 기러기, 개 닭 울음소리를 잘 흉내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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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생전(蔣生傳)-허균(許筠) 蔣生不知何許人(장생불지하허인) : 장생(蔣生)이란 사람은 어떠한 내력을 지닌 사람인 줄을 알 수가 없었다. 己丑年間(기축년간) : 기축년(1589) 무렵에 往來都下(왕래도하) : 서울에 왕래하며 以乞食爲事(이걸식위사) : 걸식하면서 살아갔다. 問其名則吾亦不知(문기명칙오역불지) : 그의 이름을 물으면 자기 역시 알지 못한다 하였고, 問其祖父居住則曰(문기조부거주칙왈) : 그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거주했던 곳을 물으면, 이르기를 父爲密陽座首(부위밀양좌수) : "아버지는 밀양(密陽)의 좌수였는데 生我三歲而母沒(생아삼세이모몰) : 내가 태어난 후 세 살이 되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父惑婢妾之譖(부혹비첩지참) : 아버지께서 비첩(婢妾)의 속임수에 빠져 黜我莊奴家(출아장노가) : 나를 농장(農莊) 종의 집으로 쫓아냈소.
十五奴爲娶民女(십오노위취민녀) : 15세에 종이 상민(常民)의 딸에게 장가들게 해주어 數歲婦死(수세부사) : 몇 해를 살다가 아내가 죽자 因流至湖南西數十州(인류지호남서수십주) : 떠돌아 다니며 호남(湖南)과 호서(湖西)의 수십 고을에 이르렀고 今抵洛矣(금저락의) : 이제 서울까지 왔소."하였다. 其貌甚都秀(기모심도수) : 그의 용모는 매우 우아하고 수려했으며 眉目如畫(미목여화) : 미목(眉目)도 그린 듯이 고왔다. 善談笑捷給(선담소첩급) : 담소(談笑)를 잘하여 막힘이 없었고 尤工謳(우공구) : 더욱 노래를 잘 불렀으니 發聲凄絶動人(발성처절동인):노래 소리가 처절하여 사람들을 감동시키곤 했었다. 常被紫錦裌衣(상피자금겹의):늘 자주색 비단으로 된 겹옷[裌衣]을 입고 다녔는데 寒暑不易(한서불역) : 추울 때나 더울 때에도 갈아 입는 적이 없었다. 凡倡店姬廊(범창점희랑) : 창녀(倡女)나 기생들 집에도 靡不歷入慣交(미불력입관교) : 다니지 않는 곳이 없어 잘 알고 지냈으며, 遇酒輒自引滿(우주첩자인만): 술만 있으면 곧바로 자기가 떠다가 잔뜩 마시고는 發唱極其懽而去(발창극기환이거) : 노래를 불러 아주 즐겁게 해주고는 떠나가 버렸다. 或於酒半(혹어주반) : 어느 때는 술이 한창 취하면 效盲卜醉巫懶儒棄婦乞(효맹복취무라유기부걸자로잉소위) 맹인ㆍ점쟁이ㆍ술취한 무당ㆍ게으른 선비ㆍ소박맞은 여인ㆍ걸인ㆍ노파들이 하는 짓을 흉내냈으니 種種逼眞(종종핍진) : 하는 짓마다 아주 똑같이 해댔었다.
又以面孔學十八羅漢(우이면공학십팔라한) : 또 가면을 쓰고 열심히 십팔나한(十八羅漢)을 흉내 내면 無不酷似(무불혹사) : 꼭 같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又蹙口作笳簫箏琶鴻鵠(우축구작가소쟁파홍곡추䳱아학등음) : 또 입을 찡그려서 피리ㆍ거문고ㆍ비파ㆍ기러기ㆍ고니ㆍ무수리ㆍ집오리ㆍ갈매기ㆍ학(鶴) 등의 소리를 내는데, 難辨眞贗(난변진안) : 진짜와 가짜임을 구별하기 어렵게 하였다. 夜作鷄鳴狗吠(야작계명구폐) : 밤에 닭우는 소리ㆍ개 짖는 소리를 내면 則隣犬鷄皆鳴吠焉(칙린견계개명폐언) : 이웃 개나 닭이 모두 울고 짓어대는 지경이었다. 朝則出乞於野市(조칙출걸어야시) : 아침이면 밖으로 나와 거리나 저자에서 구걸을 했으니, 一日所獲幾三四斗(일일소획기삼사두) : 하룻동안에 얻는 것이 거의 서너 말[斗]이었다. 炊食數升(취식수승) : 몇 되[升]쯤 끓여 먹고 나면 則散他丐者(칙산타개자) : 다른 거지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故出則群乞兒尾之(고출칙군걸아미지) : 그래서 밖으로만 나오면 뭇 거지 아이들이 뒤를 따랐다. 明日又如是(명일우여시) : 다음날에도 또 그와 같이 해버리니 人莫測其所爲(인막측기소위) : 사람들은 그가 하는 짓을 헤아릴 수 없었다. 嘗寓樂工李漢家(상우악공리한가) : 전에 악공(樂工) 이한(李漢)이라는 사람 집에서 더부살이한 적이 있었다. 有一叉鬟學胡琴(유일차환학호금) : 머리를 쌍갈래로 땋은 계집이 호금을 배우느라 朝夕與之熟(조석여지숙) : 조석으로 만나므로 서로 친숙하였다. 一日失綴珠紫花鳳尾(일일실철주자화봉미) : 하루는 구슬로 이어진 자주빛 봉미를 잃어버리고 莫知所在(막지소재) : 있는 곳을 모른다고 하였다 蓋朝自街上來(개조자가상래) : 연유를 들어 보니, 아침에 길 위에서 오다가 有俊年少調笑偎倚(유준년소조소외의) : 준수한 소년이 있기에 웃으며 농을 붙이고 몸이 닿고 스치더니 因而不見(인이불견) : 이내 봉미가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다. 啼哭不止(제곡불지) : 그러면서 애처롭게 울기를 그치지 않더란다.
生曰(생왈) : 그래서 장생이 이르기를, 唉小兒何敢乃(애소아하감내이) : "우습구나, 어린 것들이 감히 그런 짓을 하다니. 願娘無泣(원낭무읍) : 아가씨야 울지 마라. 夕當袖耒(석당수뢰) : 저녁이면 반드시 내 소매 속에 넣어 오겠다."하고는, 翩然而去(편연이거) : 훌쩍 나가버렸다.
及夕(급석) : 저녁이 되자 招叉鬟出(초차환출) : 계집아이를 불러내어 따라오게 하고서는, 迤從西街傍景福西墻(이종서가방경복서장) : 서쪽 거리 곁 경복궁(景福宮) 서쪽 담장을 따라 至神虎門角(지신호문각) : 신호문(神虎門)의 모퉁이에 이르렀다. 以大帶綰鬟之腰(이대대관환지요) : 계집의 허리를 큰 띠로 묶어 纏於左臂(전어좌비) : 왼쪽 어깨에 들쳐매고 奮迅一踊(분신일용) : 풀쩍 뛰어, 飛入數重門(비입수중문) : 몇 겹으로 겹친 문으로 날아서 들어갔다.
時曛黑莫辨逕路(시훈흑막변경로) : 한창 어두울 때여서 길도 분간할 수 없었지만 倏抵慶會樓(숙저경회루) : 급히 경회루(慶會樓) 위로 올라가니 上有二年少(상유이년소) : 두 소년이 있었다. 秉燭相迓(병촉상아) : 촛불을 들고 마중나와 相視大噱(상시대갹) : 서로 보며 껄걸 웃어대었다. 因自梁上鑑嵌中(인자량상감감중) : 그러더니 상량 위의 뚫어진 구멍에서 出金珠羅絹甚多(출금주라견심다) : 금구슬ㆍ비단ㆍ명주가 무척 많이 나왔다. 鬟所失鳳尾亦在焉(환소실봉미역재언) : 계집이 잃어버린 봉미 또한 있었다.
年少自還之(년소자환지) : 소년들이 그걸 돌려주자 生曰(생왈) : 장생(蔣生)이 이르기를, 二弟愼行止(이제신행지) : "두 아우는 행동거지를 삼가서 毋使世人瞰吾蹤也(무사세인감오종야) :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의 종적을 보지 못하도록 하게나."하였다.
遂引還飛出北城(수인환비출북성) :그런 뒤에 끌고 다시 날라서 북쪽 성(城)으로 나와 送還其家(송환기가) : 그의 집으로 돌려보냈다. 未明詣李家謝之(미명예리가사지) : 계집은 다음날 밝기 전에 이씨(李氏)의 집으로 가서 감사의 말을 하려 했더니 則醉臥齁齁(칙취와후후) : 술이 취해 누워 있으며 코를 쿨쿨 골고 있었고, 人亦不知夜出也(인역불지야출야) : 사람들 또한 밤에 외출했던 일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壬辰四月初吉(임진사월초길) : 임진년(1592) 4월 초하룻날 賖酒數㪷大醉(사주수두대취) : 값을 뒤에 주기로 하고 술 몇 말[斗]을 사와, 아주 취해서는 攔街以舞(란가이무) : 길을 가로 막으며 춤을 추고 唱歌不綴(창가불철) : 노래 부르기를 그치지 않다가는 遲明(지명) : 거의 밤이 되어 殆夜倒於水標橋上(태야도어수표교상) : 수표교(水標橋) 위에서 넘어졌다.
人見之(인견지) : 다음날 해뜬 지 늦어서야 사람들이 그를 발견했는데, 死已久矣(사이구의) : 죽은 지가 이미 오래 되었었다. 屍爛爲蟲悉生翼飛去(시란위충실생익비거) : 시체가 부패하여 벌레가 되더니 모두 날개가 돋아 전부 날아가 버려 一夕皆盡(일석개진) : 하룻밤에 다 없어지고 唯衣襪在(유의말재) : 오직 옷과 버선만이 남아 있었다. 武人洪世熹者居于蓮花(무인홍세희자거우련화방) : 무인(武人) 홍세희(洪世熹)라는 사람은 연화방(蓮花坊)에서 살았으니, 最與之昵(최여지닐) : 장생(蔣生)과 친하게 지냈었다. 四月從李鎰防倭(사월종리일방왜) : 4월에 이일을 따라 왜적을 방어했었다.
行至烏嶺(행지오령) : 조령(鳥嶺)에 이르렀을 때 見生(견생) : 장생을 만났다. 芒屩曳杖(견생망교예장) : 그는 짚신을 신고 지팡이를 끌면서 握手甚喜曰(악수심희왈) : 손을 붙잡고는 무척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吾實非死也(오실비사야) : "나는 사실 죽지 않았소. 向海東覓一國土去矣(향해동멱일국토거의) : 바다 동쪽으로 향하여 한 나라를 찾아 떠나버렸소."하더란다. 因曰(인왈) : 그러면서 이르기를, 君今年不合死(군금년불합사) : "그대는 지금 죽을 나이가 아니오. 有兵禍(유병화) : 병화(兵禍)가 있으면 向高林勿入水(향고림물입수) : 높은 곳의 숲으로 향해 가고, 물에는 들어가지 마시오.
丁酉年(정유년) : 정유년에는 愼毋南來(신무남래) : 삼가고 남쪽으로는 오지는 마시오. 或有公幹(혹유공간) : 혹 공사(公事)의 주관한 일이 있더라도 勿登山城(물등산성) : 산성(山城)으로 오르진 마시오."하고는 言訖(언흘) : 말을 끝마치자 如飛而行(여비이행) : 날아서 가버리니 須臾失所在(수유실소재) : 잠깐 사이에 있는 곳을 알 수 없더란다. 洪果於琴臺之戰(홍과어금대지전) : 홍세희는 과연 탄금대(彈琴臺)의 전투에서 憶此言(억차언) : 그가 해 준 말을 기억해 내서 奔上山得免(분상산득면) : 그산 위로 달아나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丁酉七月(정유칠월) : 정유년(1597) 7월에 以禁軍在直(이금군재직) : 금군(禁軍)으로 숙직을 할 때, 致有旨於梧里相(치유지어오리상) : 오리(이원익) 정승에게 임금의 교지(敎旨)를 전해 주느라 都忘其戒(도망기계) : 그가 경계해 준 것을 모두 잊었었다. 回至星州(회지성주) : 돌아오면서 성주(星州)에 이르러 爲賊所迫(위적소박) : 적군의 추격을 당하자, 聞黃石城有備(문황석성유비) : 황석성(黃石城)이 전쟁 준비가 잘 되어 있다 함을 듣고는 疾馳入(질치입) : 급히 달려갔는데, 城陷倂命(성함병명) : 성(城)이 함락되자 함께 죽고 말았다. 余少曰狎游俠耶(여소왈압유협야) : 내가 젊은 시절에 협사(俠士)들과 친하게 지냈고, 與之諧謔甚親(여지해학심친) : 그와도 해학(諧謔)을 걸 정도로 아주 친하게 지냈던 탓으로 悉覩其技(실도기기) : 그의 잡기놀이를 모두 구경하였다. 噫其神矣(희기신의) : 슬프다, 그는 신(神)이었거나 卽古所謂劍仙者流耶(즉고소위검선자류야) : 아니면 옛날에 말하던 검선(劍仙)과 같은 부류가 아니랴
<출처: 블로그-바람따라구름따라> |
장생전 비교
홍만종의 <해동이적>- 허균의 장생전과 거의 유사하나 무씨명집이라 출전하고 있다. 또한 감사 홍명원이 장도령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하며 그가 장생전의 인물과 동일인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김려의 <장생전>- 허균의 장생전과 거의 유사하나, 장생이 청파 약포에 살았다고 하는 점, 소녀의 자주빛 봉미를 빼앗은 소년들을 장생의 아우들이 모두 죽이는 점이 다르다.
장산인전(張山人傳) 요약
① 장산인의 이름은 한웅으로, 그의 할아버지로부터 3대에 걸쳐 양의(외과의사) 업무에 종사했고 그의 아버지는 전에 상륙(한약재 이름)을 먹고 귀신을 보고 부릴 수 있었다 한다. 그분이 집을 떠날 때 <옥추경>과 <운화현추>를 한웅에게 주었는데 수만 번을 읽고나자, 한웅 역시 귀신을 부리고 학질도 낫게 했다. 그런데 갑자기 하던 일을 그만두고는, 마흔살에 출가하여 지리산에 입산했다. ② 하루는 두 사람의 중이 그를 따랐다. 숲으로 가자 호랑이가 나타났다. 산인이 꾸짖자, 호랑이들은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태도를 보였다. 산인은 한 호랑이에 올라타고, 두 중이 다른 하나에 타게 하여 절까지 갔다. ③ 산에서 머문 지 18년 만에 서울로 돌아와 흥인문 밖에서 살았다. 이웃집의 주인이 귀신을 물리쳐 달라고 청해, 집에 가 보자 두 귀신이 뱀을 물리쳐 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뱀을 물리치자 집은 깨끗해졌다. ④ 사람들과 어울려 놀며 죽은 물고기와 꿩을 약으로 살려냈다. 글자를 읽지 못한다고 했지만 글을 잘 지었고 밤눈이 어둡다고 했지만 어두운 곳에서도 잔글씨를 읽었다. 이외에도 사람들을 놀라게 한 많은 일이 있었다. ⑤ 임진왜란이 나자 소요산에 들어가 그곳의 중에게 금년에 자신이 죽으면 화장해달라고 말했다. 오래지 않아 적군의 칼을 맞아 죽었는데 그의 피는 하얀 기름 같았다. 산승이 다비를 하자 서광이 3일 동안 나타나고 사리 72개를 얻었다. ⑥이 해 9월에 산인은 강화도에 사는 정붕의 집에 왔었는데, 정붕은 그의 죽음을 몰랐다. 산인은 3일이나 머물다가 가면서 금강산으로 간다고 말했다. 다음 해 정붕이 비로소 그가 죽었음을 알았는데, 사람들은 장산인이 죽은 뒤에 신선이 된 사람이었다고 했다. 정붕도 점과 관상에 능한 상률가였다.
분석
<장생전>에서 장생은 비범한 능력을 통해 선행을 베푼다. 또 <장산인전>에서 장산인은 기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단순히 현실생활과 멀리 떨어져 있는 초월자가 아니라 백성들의 현실생활과 직결된 곤란을 해결해주는 사람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인과적 관계라기보다는 몇 개의 단편적인 이야기를 모아져 병렬적으로 쓰였다. 또한 입전자의 평을 붙이지 않은 전통적인 입전양식과 다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이들 작품이 역사적인 사실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허균은 장한웅과 장생에 빗대어 자신의 깊은 내면의지를 담아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작품은 전라도 함열 유배전후에 <성소부부고>를 저작하던 기간에 썼을 가능성이 크다. 함열 유배기는 그의 삶의 전환기였다. 원대한 포부를 안고 궁에 들어가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펴 합리적인 이상사회를 이루어 보려 했으나, 세상과 융합하지 못하고 끊임없는 좌절을 겪으며 탁월한 능력을 펴볼 기회조차 상실했다. 이 시기 그의 심정은 장한웅과 장생이 느꼈던 절망과 비슷할 것이다. 장한웅은 국가위기에 직면했으나 자신의 재능을 쓰지 못하고, 장한웅은 금강산으로, 장생은 해동일국토를 찾아 떠난다.이 시기 이후 역적으로 참형을 받을 때까지 허균의 삶은 <장산인전>과 <장생전>의 문맥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홍길동전[洪吉童傳]

1916년 전주서 발견된 홍길동전 목판본
이 작품은 이식(李植)의 〈택당잡저 澤堂雜著〉를 바탕으로 해서 허균이 지은 것으로 믿어왔으나 근래에 와서 한문본의 발견으로 작자와 국문원작설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같은 문제제기가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로서는 허균의 국문원작설을 완전히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허균의 작품으로 볼 경우에도 현재 전하는 작품이 그의 원작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간다.
원작자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작가가 멸문의 화를 당하는 극형으로 인하여 작품이 판매금지되었다는 사실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법적으로는 조선 사회를 비판한 <금수회의록>이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지만, 실상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최초의 국문소설로 발표된, 1511년 왕명으로 불태워진 채수의 <설공찬전>도 판금소설에 해당한다. <홍길동전>은 독자의 수요에 호응하여 목판이 만들어지기까지, <열하일기>는 연암 사후 100년에 이르기까지 필사에 의해 전승되었다고 보면 된다.
〈홍길동전〉에는 현재 30종 가까운 국문본과 후대의 번역으로 보이는 한문본이 하나 있다. 이들 이본들의 내용은 부분적으로는 약간씩의 차이가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비슷하다.
〈홍길동전〉은 한국 최초의 국문소설이며, 고소설 가운데 작자를 알 수 있는 극소수의 작품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 소설의 발생과 작자연구를 위한 중요한 자료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이 작품은 당대의 사회현실을 절실하게 반영하면서 탐관오리를 힘으로 응징하고, 억압받는 서민들의 한을 대변함으로써 서민독자들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
감상
이 작품은 영웅적 인물의 제시와 전기성을 바탕으로 한 사건 전개 등에서 고전 소설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당대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대담하게 고발하고, 적서 차별철폐, 탐관오리 응징, 이상국 건설에 대한 작가의 견해를 제시하여 고대
소설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대부분의 고전소설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대부분의 고전소설이 소재와 인물, 배경 등을 중국에서 취해 온 반면, 이 작품은 우리나라를 무대로 삼고 있으며 한글로 표기하여 서민들에게까지 독자층을 확대 시킨 점에서 진정한 한글 소설의 출발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비교적 사실적인 묘사를 통해 전기적 성격을 탈피하려 했다는 점에서 비로소 소설의 형태를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내용상으로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비판 의식이드러나 있는 현실 참여적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허균이 지은 우리 나라 최초의 국문 소설이며 봉건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한 사회 소설이다. 홍길동전은 크게 '길동의 가출 -> 의적활동 -> 이상국 건설'로 구성되어 있다. 길동의 가출로 적서차별의 부당함을 드러내고, 의적활동으로 의적이 된 길동이 탐관오리의 부패상을 고발하고 그 대안으로 율도국이라는 이상향을 제시한다. 이 이상향은 박지원의 허생전에도 드러나 있다.
이 작품은 소재를 당대의 사회 현실에서 택했고, 의적을 등장시켜 모순된 사회 제도를 개혁하려는 혁명성과 서민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아울러 도교적인 둔갑술, 축지법, 분신법 등을 담고 있으면서도 당대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다룸으로써 리얼리티를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의 경향은 작가의 세계관이나 삶의 자세가 어느 정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문장으로 당대를 풍미했고 출세가도를 달렸음에도 그의 가슴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반역의 정신을 그는 어쩔 수 없었다. 스승 이달과 형 봉의 반역은 그를 행동하는 지성인으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특히 죽림칠현의 교유와 기행적 삶은 도교적인 상상력을 불러 일으켰을 가능성이 크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염원을 누구보다 강하게 품다가 간 그의 꿈이 이 작품에 잘 드러나 있다. 후반부에 나타난 율도국의 건설은 당대의 제도적 모순을 극복할 이상국이라 볼 수도 있다.
이 작품은 중국의 '수호전', '삼국지연의', '서유기' 등의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주인공의 기본 모델은 국내에 존재한다. 즉, 연산군 때 가평, 홍천을 중심으로 활약한 명화적 실명 '홍길동', 명종 대의 양주 백정 임꺽정, 선조대의 충청도 홍산을 중심으로 거사한 이몽학의 난 등에 흐르고 있는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상국 건설에 대한 것은 조선 선비들이 갖고 있던 이상향에의 동경 사상이 일부 노출된 것으로 허균도 평서 참위설을 신봉하였다는 것과 표리를 이루고 있다. 문학사적인 위치에서 보면 김시습의 '금오신화'가 괴기와 염정을 주제로 한 여성적인 문학을 열어보였다면 '홍길동전'은 서얼문제, 탐관오리, 의적, 이상향을주제로 설정한 남성적 문학의 전형이라고 할 만하다. 또 당시 사회의 현실문제를 제재로 삼았다는 점도 획기적이라 할 만하다. 한편 서사시나 전기소설적인 전체의 흐름은 영웅의 일대기를 기술하는 한국 소설의 전통적인 면에서 설화시대와 소설시대의 교량적 역할을 하였으며, 그 도술적 요소는 이후의 군담소설에 계승되어 갔다고 볼 수 있다.
홍길동전에 나타난 현실 인식의 시각
작자 허균은 임진왜란을 직접 체험한 세대의 사람이다. 당시는 봉건 집권층의 가혹한 수탈로 농촌이 피폐해지고 군도가 횡행했다. 중세적 질서가 해체되기 시작하고 민중의 저항이 일어났다. 홍길동전은 이러한 사회적 상황에서 민중의 편에 서서 민중을 옹호하고 있다. 능력이 있어도 적서 차별이라는 신분적 제약 때문에 세상에 나가지 못하는 사회적 모순을 통박하고, 착취를 일삼는 탐관오리들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민중들에게 돌려준다.
율도국의 의미
허균이 설정한 이상 사회이다. 조선에서 자신의 갈등 요소가 하나하나 해결되자 길동은 어디론가 떠나야 했다. 그래서 그는 조선도 중국도 아닌 새로운 공간인 율도국을 무력으로 점령하여 차지한다. 율도국은 봉건 지배 체제에서 탈피한 국가도 아니며 '허생전'의 빈섬과 같은 특별한 이상을 실현한 공간도 아닌 단순히 태평한 시대를 유지할 뿐이다. 율도국은 '산무 도적하고 도불습유하는 이상국으로 조선인도 중국인도 출입하지 않는다. 그러나 율도국은 허생전에 앞서 고전 소설사에서는 처음으로 등장하는 일종의 유토피아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더구나 이 공간은 단순한 유토피아가 아니고 사회의 여러 모순에 대한 적극적 비판과 저항의 연장 선상에 놓인 것이기에 그만큼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율도국'의 존재로 '홍길동전'은 해외진출의 이상을 작품 속에서 실연한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된다
줄거리
홍길동은 조선조 세종 때 서울에 사는 홍판서의 시비 춘섬의 소생인 서자다. 홍판서가 용꿈을 꾸어 길몽이기에 본부인을 가까이하려 하였으나, 응하지 않으므로 춘섬과관계를 하여 길동을 낳았다. 길동은 어려서부터 도술을 익히고 장차 훌륭하게 될 기상을 보였으나, 천생인 탓으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한을 품는다. 가족들은 길동의 비범한 재주가 장래에 화근이 될까 두려워하여 자객을 시켜 길동을 없애려 한다. 길동은 위기에서 벗어나 집을 나와서 방랑의 길을 떠난다. 그러다가 도적의 소굴에 들어가 힘을 겨루어 두목이 된다. 먼저 기이한 계책으로 해인사의 보물을 탈취하고 활빈당이라 자처하며 기계와 도술로써 팔도지방 수령들의 재물을 탈취하여 빈민에게 나누어주고 백성의 재물은 추호도 다치지 않는다. 길동은 함경도 감영의 불의의 재물을 탈취하면서 '아무 날 전곡을 도적한 자는 활빈당 행수 홍길동'이라는 방을 붙여둔다. 함경감사가 도적을 잡는 데 실패하자 조정에 징계를 올려 좌우 포청으로 하여금 홍길동이라는 대적을 잡으라고 한다. 팔도가 다같이 장계를 올리는데 도적의 이름이 홍길동이요, 도적당한 날짜가 한날 한시였다. 국왕이 길동을 잡으라는 체포명령을 전국에 내렸으나 길동의 도술을 당해낼 수 없어서 홍판서를 회유하고 길동의 형 인형도 가세하여 길동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고 병조판서를 제수, 회유하기로 한다. 길동은 서울에 올라와 병조판서가 된다. 그 뒤 길동은 고국을 떠나 남경으로 가다가 산수가 수려한 율도국을 발견, 요괴를 퇴치하여 볼모로 잡혔던 미녀를 구하고 율도국 왕이 된다. 마침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고국으로 돌아와 삼년상을 치른뒤 율도국으로 돌아가 나라를 잘 다스린다.
<출처: 지구촌대한민국>
호민론(豪民論)
[주]성소부부고(惺所覆螺藁) 권11, 문부8에는 12편의 '論'이 있다. 그 가운데 유명한 것은 '호민론'과 '유재론(遺才論)'이다. 후자는 지역 차별, 서얼등용 제한 등을 철폐하여 인재등용에 제한을 두지 말자는 주장인데, <홍길동전> 때문인지 전자가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원문과 번역을 함께 읽어본다. 이 글은 맹자의 民本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천하에 두려워할 대상은 오직 백성뿐이다
天下之所可畏者(천하지소가외자) : 천하에 두려워할 대상은
唯民而已(유민이이) : 오직 백성뿐이다.
民之可畏(민지가외) : 백성을 두려워해야 함은
有甚於水火虎豹(유심어수화호표) : 홍수나 화재 또는 호랑이나 표범보다도 더 심함이 있다.
在上者方且狎馴而虐使之(재상자방차압순이학사지)
: 그런데도 윗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백성들을 업신여기면서 가혹하게 부려먹다니
抑獨何哉(억독하재) : 도대체 어째서 다만 그러한가?
이 호민은 몹시 두려워해야 할 존재이다
夫可與樂成而拘於所常(부가여악성이구어소상견자)
: 이미 이루어진 것을 여럿이 함께 즐거워하고, 늘 보아 오던 것에 익숙하여
循循然奉法役於上者(순순연봉법역어상자)
: 그냥 순순하게 법을 받들면서 윗사람에게 부림을 당하는 사람들은
恒民也(항민야) : 항민(恒民)이다.
恒民不足畏也(항민불족외야) : 이러한 항민은 두려워할 것이 없다.
厲取之而剝膚椎髓(려취지이박부추수) : 모질게 착취당하여 살가죽이 벗겨지고 뼈가 부서지면서도
竭其廬入地出(갈기려입지출) : 집안의 수입과 땅에서 산출되는 것을 다 바쳐서 .
以供无窮之求(이공무궁지구) : 한없는 요구에 이바지하느라,
愁嘆咄嗟(수탄돌차) : 혀를 차고 탄식하면서
咎其上者(구기상자) : 윗사람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怨民也(원민야) : 원민(怨民)이다
怨民不必畏也(원민불필외야) : 이러한 원민도 굳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潛蹤屠販之中(잠종도판지중) : 자신의 자취를 푸줏간 속에 숨기고
陰蓄異心(음축이심) : 몰래 딴 마음을 품고서,
僻倪天地間(벽예천지간) : 세상을 흘겨보다가
幸時之有故(행시지유고) : 혹시 그 때에 어떤 큰일이라도 일어나면
欲售其願者(욕수기원자) : 자기의 소원을 실행해 보려는 사람들은
豪民也(호민야) : 호민(豪民)이다.
夫豪民者(부호민자) : 이 호민은
大可畏也(대가외야) : 몹시 두려워해야 할 존재이다.
豪民伺國之釁(호민사국지흔) : 호민이 나라의 허술한 틈을 엿보고
覘事機之可乘(첨사기지가승) : 일의 형편을 이용할 만한때를 노리다가
奮臂一呼於壟畝之上(분비일호어롱무지상) : 팔을 떨치며 밭두렁 위에서 한번 소리를 지르게 되면,
則彼怨民者聞聲而集(칙피원민자문성이집) : 원민은 소리만 듣고도 모여들어
不謀而同唱(불모이동창) : 모의하지 않고서도 소리를 지르고,
彼恒民者(피항민자) : 저들 항민도
亦求其所以生(역구기소이생) : 또한 제 살 방법을 찾느라
不得不鋤耰棘矜往從之(불득불서우극긍왕종지)
: 부득불 호미, 고무레, 창, 창자루를 가지고 쫓아가서
以誅无道也(이주무도야) : 무도한 놈들을 죽인다.
秦之亡也(진지망야) : 진나라가 망한 것은
以勝廣(이승광) : 진승과 오광 때문이었고,
而漢氏之亂(이한씨지란) : 한나라가 어지러워진 것은
亦因黃巾(역인황건) : 또한 황건적 때문이었다.
唐之衰而王仙芝黃巢乘之(당지쇠이왕선지황소승지)
: 당나라가 쇠퇴하자 왕선지와 황소가 그 틈을 타고 일어나
卒以此亡人國而後已(졸이차망인국이후이) : 마침내 백성과 나라를 망하게 한 뒤에야 그쳤다.
是皆厲民自養之咎(시개려민자양지구)
: 이러한 일들은 모두 백성들에게 모질게 굴면서 저만 잘 살려고 한 허물이며,
而豪民得以乘其隙也(이호민득이승기극야) : 호민들이 그러한 틈을 잘 이용한 것이다.
夫天之立司牧(부천지립사목) : 무룻 하늘이 벼슬아치를 세운 것은
爲養民也(위양민야) : 백성을 돌보게 하기 위해서였지
非欲使一人恣睢於上(비욕사일인자휴어상) : 한 사람이 위에서 방자하게 눈을 부릅뜨고서
以逞溪壑之慾矣(이령계학지욕의) : 계곡같이 커다란 욕심을 부리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彼秦漢以下之禍(피진한이하지화) : 진나라, 한나라 이후의 화란은
宜矣(의의) : 당연한 결과였지,
非不幸也(비불행야) : 불행했던 것은 아니다.
지금 조선 관료들의 부패와
백성들의 시름과 원망은 고려 말보다 더 심한 상태다
今我國不然(금아국불연) : 조선은 중국과는 다르다.
地陿阨而人山(지협액이인산) : 땅이 비좁고 험하여 사람도 적고,
民且呰寙齷齪(민차자유악착) : 백성 또한 나약하고 게으르며 잘아서,
无奇節俠氣(무기절협기) : 뛰어난 절개나 넓고 큰 기상이 없다.
故平居雖无鉅人雋才出爲世(고평거수무거인준재출위세용) : 그런 까닭에 평상시에 위대한 인물
이나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 나와서 세상에 쓰여지는 일도 없었지만,
而臨亂亦无有豪民悍卒倡亂首爲國患者(이림란역무유호민한졸창란수위국환자) : 난리를 당해도
또한 호민이나 사나운 병졸들이 반란을 일으켜 앞장서서 나라의 걱정거리가 되었던 적도 없었으니
其亦幸也(기역행야) : 그 또한 다행이었다.
雖然(수연) : 비록 그렇긴 하지만
今之時與王氏(금지시여왕씨시불동야) : 지금의 시대는 고려 때와 함께해보면,
前朝賦於民有限(전조부어민유한) : 고려 때에는 백성들에게 조세를 부과함에 한계가 있었고,
而山澤之利(이산택지리) : 산림(山林)과 천택(川澤)에서 나오는 이익도
與民共之(여민공지) : 백성들과 함께 했었다. .
通商而惠工(통상이혜공)
: 장사할 사람에게 그 길을 열어 주고, 물건을 만드는 기술자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하였다.
又能量入爲出(우능량입위출) : 또 수입을 잘 헤아려 지출을 하였기
使國有餘儲(사국유여저) : 나라에는 여분의 저축이 있어
卒有大兵大表(졸유대병대표) : 갑작스럽게 커다란 병화나 상사(喪事)가 있어도
不加其賦(불가기부) : 조세를 추가로 징수하지는 않았다.
及其季也(급기계야) : 그러고도 그 말기에 이르러서는
猶患其三空焉(유환기삼공언) : 오히려 세가지가 비게 됨을 걱정할 정도였다
我則不然(아칙불연) : 우리 조정은 그렇지 아니하여
以區區之民(이구구지민) : 구구한 백성이면서도
其事神奉上之節(기사신봉상지절) : 신을 섬기고 윗사람을 받드는 범절을
與中國等(여중국등) : 중국과 대등하게 하고 있었는데,
而民之出賦五分(이민지출부오분) : 백성들이 내는 조세가 다섯 푼이라면
則利歸公家者纔一分(칙리귀공가자재일분) : 조정에 돌아오는 이익은 겨우 한 푼이고
其餘狼戾於姦私焉(기여랑려어간사언) : 그 나머지는 간사한 자들에게 어지럽게 흩어져 버린다.
且府無餘儲(차부무여저) : 또 관청에서는 여분의 저축이 없어
有事則一年或再賦(유사칙일년혹재부) : 일만 있으면 한 해에도 두 번씩이나 조세를 부과하는데,
而守宰之憑以箕斂(이수재지빙이기렴)
: 지방의 수령들은 그것을 빙자하여 칼질하듯 가혹하게 거두어들이는 것
亦罔有紀極(역망유기극) : 또한 끝이 없었다.
故民之愁怨(고민지수원) : 그런 까닭에 백성들의 시름과 원망은
有甚王氏之季(유심왕씨지계) : 고려 말보다 더 심한 상태였다.
호민을 두려워하고 전철을 고쳐야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上之人恬不知畏(상지인념불지외) : 그런데도 윗사람들이 태평스레 두려워할 줄 모르니
以我國無豪民也(이아국무호민야) : 우리 나라에는 호민이 없기 때문이다.
不幸而如甄萱弓裔者出(불행이여견훤) : 불행하게도 견훤이나 궁예 같은 자가 나와서
奮其白挺(분기백정) : 백성을 빼앗아 일어난다면
則愁怨之民(칙수원지민) : 근심하고 원망하던 백성들이
安保其不往從而祈梁六合之(안보기불왕종이기량륙합지변)
: 가서 따르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보증하겠는가?
可跼足須也(가국족수야)
: 기주·양주에서와 같은 천지를 뒤엎는 변란은 발을 구부리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爲民牧者(위민목자) :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이
灼知可畏之形(작지가외지형) : 두려워해야 할 만한 형세를 명확하게 알아서
與更其弦轍(여경기현철) : 전철 (前轍)을 고친다면,
則猶可及已(칙유가급이) : 여전히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블로그 '바람따라구름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