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12일 정보통신부는 본인확인절차를 의무화하는 강제적인 인터넷 실명제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최근 인터넷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이버폭력의 주요 원인이 익명성에 기인한다고 밝히고, 실명제라는 처방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이미 대부분의 포털들과 언론사 사이트가 실명제를 시행하고 있으며, 그럼에도 정부가 얘기하는 이른바 사이버 폭력이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연 인터넷의 익명성이 사이버 폭력의 원인인지 의문이다. 우리는 인터넷 실명제가 올바른 처방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강제적인 인터넷 실명제를 통해 오히려 인터넷에 대한 정부의 감시와 통제가 강화될 것을 우려한다. 인터넷 실명제는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통신비밀의 자유 및 언론과 표현의 자유 등 기본적인 인권을 위협할 수 있는 위험한 제도이다.
정부의 강제적인 인터넷 실명제는 해당 커뮤니티 이용자들의 자율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정보통신부는 일정규모 이상의 포털 사이트에 대해서 실명제를 의무화하겠다고 밝혔다. 문제는 정부가 제시한 인터넷 실명제는 해당 커뮤니티의 운영자나 회원들의 민주적인 결정에 의해서 도입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강제적으로 본인인증을 의무화한다는 것이다. 포털사이트에 있는 각 커뮤니티, 블로그, 카페 운영자들과 회원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모든 게시판에 강제적으로 도입되는 것이다. 현재 대부분의 인터넷 이용자들은 포털 사이트에서 제공되는 커뮤니티 서비스를 이용한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이것은 인터넷 전반에 대한 강력한 규제정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실명인증된 사람만 글을 쓸 수 있고, 정부가 그것을 하나하나 감시할 수 있다면 이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네티즌들은 앞으로 자신들이 올리는 글이 문제가 되지 않을까 사전에 자기 검열을 해야만 할 것이며, 이것은 표현의 자유와 커뮤니케이션의 권리를 크게 위축시키게 될 것이다. 국민의 모든 행위와 통신에 명찰을 붙이고자 하는 인터넷 실명제는 지금까지의 어떤 정부 정책보다 위헌적이며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정책임이 분명하다.
개인정보유출 등 프라이버시를 심각하게 위협한다.
사이버 폭력의 근본 원인 중 하나는 오히려 개인정보가 지나치게 수집되고, 노출됨으로써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보호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메일, 연락처 등 기본적인 개인정보 뿐만 아니라, 자신의 친구, 가족 등 인맥정보까지 홈페이지를 통해 과도하게 노출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정부가 시급하게 취해야 할 정책은 개인에 대한 정보 수집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법제도적 조치를 취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인터넷 실명제 정책은 개개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자신의 신원이 노출되도록 함으로써 개인의 프라이버시권을 오히려 위협하고 있다.
또한, 우리는 인터넷 실명 확인을 위해 정부가 어떠한 방법을 고려하고 있는 것인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대부분의 인터넷 업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주민등록번호를 통한 신원확인’에 대해서 주민등록번호 남용의 문제점이 오래 전부터 지적이 되어 왔다. 따라서 불필요한 신원 확인을 줄여야 한다는 사회적인 합의가 형성되고 있는 상황에서, 강제적 인터넷 실명제 정책은 시대적 흐름에 역행하는 움직임이 아닐 수 없다.
사이버 폭력의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
우리는 본인확인절차를 의무화하는 정부의 일방적인 조치가 과연 사이버공간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사이버폭력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 실효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미 대부분의 포털사이트를 비롯한 민간홈페이지에서 회원으로 가입할 때 주민등록번호와 실명을 확인하는 서비스를 도입하여 사용하고 있다. 인터넷 공간이 익명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익명성을 상실해가고 있다. 게시판에서 덧글을 쓸때 조차도 실명인증 로그인을 해야 하는 사이트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이버폭력의 문제는 여전히 심각한 상황이다. 이는 인터넷 실명제가 올바른 처방이 아님을 반증하는 것이다.
오히려 온라인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명예훼손이나 욕설, 비방 등과 같은 사이버폭력의 근본적인 원인은 성숙하지 못한 커뮤니케이션 문화나 타인에 대한 인권감수성의 부재에 기인한다. 대부분의 인터넷 명예훼손 가해자가 초・중고생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는 인터넷의 특성과 인권에 대한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학교 교육과 포털 사이트 등을 통해 사이버 문화와 인권에 대한 교육과 캠페인이 우선적으로 추진될 필요가 있다.
사이버 폭력이 발생했을 경우, 포털 사이트 등 운영자의 긴급한 대처가 필요하다는 점도 지적되고 있다. 다행히 포털 사이트 등에서도 이에 대한 심각성을 인식하고 자율적인 대응을 모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정부는 인터넷 기업의 이러한 자율 규제가 제대로 정착이 될 수 있도록 지원 및 감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할 것이다.
국제적인 흐름에도 역행하는 제도이다.
정부가 도입하려는 강제적인 인터넷 실명제는 사실상 전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제도이다. 미국의 조지아주가 인터넷 실명제와 비슷한 제도를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결국 위헌판결을 받은 바 있다. 또한 유럽의회 차원에서 작성된 보고서에 따르면 대부분의 유럽국가에서는 비용지불의 목적을 제외하고는 익명성의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며 익명성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한 바 있다.
인터넷 실명제는 졸속으로 제안된 관료주의적 발상이다.
이미 인터넷 실명제에 대해서는 사회적으로 다양한 문제제기가 있었다. 지난 2004년 공직선거및선거부정방지법이 개정되어, 선거기간 동안 인터넷 언론사의 게시판에 본인확인을 의무화 하는 인터넷 실명제가 도입되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국가인권위원회도 명백한 사전 검열이라며 반대의견을 표명한 바 있다. 또한 한국인터넷기자협회, 한국인터넷신문협회, 인권시민사회단체 및 많은 네티즌들이 인터넷 실명제가 표현의자유, 사생활비밀의자유, 평등권 등 헌법에서 보장하고 있는 기본적인 권리들을 침해하고 있다며 헌법소원을 제기한 바 있다. 인터넷 기업 역시 인터넷 실명제가 사이버 폭력에 대한 올바른 진단이 아니라고 지적하며, 사이버 폭력에 대응할 수 있는 자율적인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제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보통신부가 인터넷 실명제를 강행하고자 하는 것은 비민주적이고 관료주의적 작태라고 할 수밖에 없다. 만일 정보통신부가 인터넷 실명제 정책을 계속 추진하려 한다면, 우리는 인권 침해적인 정보통신부의 폐지와 무능한 관료들의 퇴출을 위해 끝까지 싸워나갈 것이다.
본 기자회견에 함께 참여한 인권시민사회와 노조, 언론계의 단체들은 인권을 위협할 수 있는 정부의 강제적인 인터넷 실명제를 졸속으로 도입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며, 사회적으로 충분한 의견수렴과 합의를 통해서 사이버폭력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세울 것을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