ೠ 친척이 모여 사는 곳으로 ೠ
우리 가족은 57년도에 백부, 중부가 사시던 홍도동으로 이사를 했고 그곳에서 사촌 남매들과 어울리면서 나의 본격적인 사회적 활동의 서막을 연다. 우리는 그 당시 보기 드문 대가족 씨족사회였다. 선친 삼형제분이 같은 울타리에서 사셨기 때문에 사촌들만 20여명이 넘었다. 삼성동 집과는 달리 홍도동에서는 우리집이 없었다. 둘째 아버님댁 문간방 한칸을 무상으로 빌려 여섯식구가 궁핍한 생활을 하였고 단칸방에서 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춥고 배고픈 시절이였지만 하루하루가 새롭고 즐거웠다. 비로써 나는 인간적 진화 활동이 시작되었던 곳이다.
우리 씨족사를 어른들에게 들었는데 선친대까지 동춘당 고택이 있는 곳에 살었는데 백부께서 해방후 지금의 홍도동으로 이사나왔다고 전한다. 송촌에서는 고래등같은 가옥에서 살았었는데 무슨 연유로 홍도동으로 이주를 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수는 없다. 큰 누님의 이야기를 빌리자면 선친께서 사셨던 가옥은 동네 빨갱이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너무나 가옥이 커서 한달동안이나 불길이 솟아 올랐다고 한다. 백부께서는 한의원을 하셨고 중부께서는 고고한 한학자이시며 명필이셨다. 선친께서는 일제시대에 도청 공무원을 하셨다고 한다.
그곳에서 나는 소극적 성격에서 적극적 성격으로 변모하였고 우글거리는 남매들과 서열다툼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나보다 두살위인 사촌형님이 계셨고 나보다 생일이 보름 늦은 사촌동생과 두살 아래인 사촌동생이 주로 어울리는 형제들이였다. 내가 살던 둘째댁 뒷마당에는 언덕이 있었고 그곳은 우리들의 전쟁놀이터였다. 두살위인 형이 항상 리더였고 우리는 무조건 순종해야 했다. 두살위인 사촌형은 우리에게 알지도 듣지도 못한 작위(?)를 부여했다.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어느날은 김춘추, 계백, 김유신, 이순신, 유비, 조조, 관우, 장비 등등. 초등학교 입학하기전이니 알 수가 있나. 무조건 하사품을 받아야만 했다.
그 시절 어린마음에도 주어진 환경에서 많은 체험을 통해 생각의 폭을 넓히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래서 낮이고 밤이고 골목길 악동으로써 명성을 떨쳤다. 삼성동에서의 어리버리하였던 아이가 사촌형의 비호를 받아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작대기를 들고 홍도동 골목길을 장악했다. 역시 난 골목길 체질이였나 보다. 무더운 여름날이면 온 종일 개울가에서 살았고 추운 겨울밤에는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밤길을 돌아다녔다. 모든 것이 새롭고 에너지가 넘쳐 흘렀다. 내 또래 아이들이 날 좋아했다. 수많은 동네 아이들이 내 주위로 몰려들었고 항상 사건의 중심에는 내가 있었다. 홍도동에서의 나의 소년시절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홍도동의 골목길은 유난히 구불거렸다. 조그만 집들이 총총히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승용차가 없었던 시절이라 구태여 길이 넓을 필요가 없었다. 그곳에서 장난 괴수들은 구석 구석 산적떼처럼 서식하고 있었으며 서로의 영역싸움을 벌이곤 했다. 경부선 철로길을 가운데에 두고 자주 패싸움을 벌이곤 했다. 내 휘하에는 공부도 잘하고 싸움도 제법 하는 문무를 겸비한 인재들이 많았다. 상대방에게는 우리가 공포의 대상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홍도동은 빈민촌이었다. 그곳에서 우리의 위상은 남달랐고 돋보였다.
지금은 대가족 제도에서 핵가족 중심으로 생활상이 변화하였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직업의 다양화, 주거 환경변화, 교통의 편이성 등등이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생활상의 변화에 따른 삶의 방식이 달라졌고 문화적 독립감을 중시하는 이기적인 공동체 관념의 해체라 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지켜져 왔던 친족간의 유대나 종족 보존의 중요성보다는 자신의 편안함을 우선시하는 시대적 가치관의 변화가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고적 조류가 되었다.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큰집 가운데 방에 수십명의 사촌들이 모여 앉아 재잘거리며 우애를 다졌고 문화시설이나 놀이문화가 전혀 없었던 시절에 그나마 서로 의지하며 나눔의 미학인 공동체 문화를 일찍부터 배우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많은 이야기들이 오고 갔지만 가치있는 정보라는 개념보다는 정보력없는 투박한 떠듬 그 자체였다. 어느 겨울날에는 사촌들끼리 시간가는줄 모르고 밤새 이야기를 하다 새벽녘에 마당에 나가면 장독대위에 눈이 소복히 내렸고 사촌들끼리 꽁꽁 언손을 불어가며 눈사람을 만들었던 기억도 난다. 그때 나의 삶 과정이 내 자신을 인간 친화적 사고를 갖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고 굳게 믿는다.
첫댓글 유년과 소년의 이음새/ 장독위에 소복하게 쌓여 있는 눈송이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든 기억? 가난해도 행복 했던 것 같아요
원장님의 관심있는 댓글이 용기를 솟게 합니다. 주제 넘게 소설을 쓰는 것 같아 민망했는데 하여튼 감사합니다. 전문가로써 문장의 맥이나 단어 선택의 미숙함을 지적하여 주시면 수정, 보완토록 하겠습니다. 계속 연재해도 무방한지 여쭙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