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람의 향기[한국학중앙연구원] 2024년 1월호 AKS 뉴스레터
갑진년, 청룡의 기운으로 비상하는 한해를 바라며
정은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책임연구원
올해는 갑진년 청룡의 해이다. 청룡은 봄과 동쪽, 오행 중 목, 시간은 오전 7~9시에 해당한다. 새해를 맞아 우리 일상에 파고든 용의 문화적 상징 의미를 살펴보자.
용은 대개 신이한 능력을 가진 상상의 동물로 인식된다. 이로 인해 사방을 호위하는 신수 중 으뜸으로 간주되었고, 십이지신에도 포함되었다. 『설문해자』에 의하면 “용은 비늘을 가진 동물의 우두머리로 눈에 보이지 않다가 홀연히 나타나며 크게도 되고 작게 되기도 하며 길게도 짧게도 될 수 있고, 겨울에는 못에 숨어 있다 봄에는 하늘로 올라가는 변화자재의 영력을 가진 동물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남송의 나원(羅願)이 편찬한 『이아익(爾雅翼)』에서는 용을 천지의 아홉 가지 동물 형상에 비유하기도 했다. 즉 뿔은 사슴을, 머리는 낙타를, 눈은 토끼를, 이마는 뱀을 닮았으며, 배는 이무기를, 비늘은 물고기를, 발톱은 매를, 발바닥은 호랑이를, 귀는 소를 닮았다고 했다(그림 1).
중국 문헌에는 많은 종류의 용이 확인된다. 『광아』에 의하면 이룡(螭龍)은 뿔이 없으며, 반룡(蟠龍)은 『남월지』에 의하면 승천하지 못한 용으로 신장은 4장(丈)에 청흑색이며 적색 띠가 둘러 있다. 『초사』 서문에서 규룡(虯龍)은 난봉(鸞鳳)과 함께 군자에 의탁한다고 하였고, 두 개의 뿔과 네 개의 다리가 있으며, 물고기 몸의 형상이고, 꼬리는 악어와 비슷하다. 교룡(蛟龍)은 한 개의 뿔과 비늘이 있는 용으로, 물에 잠겨 있다가 홍수와 비를 얻으면 승천한다고 하여 좋은 기회를 만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교룡득수’라고 했다. 응룡(應龍)은 황룡이라고도 하며, 날개가 있어 하늘을 날고 『산해경』에 의하면, 황제(黃帝)를 도와 치우를 물리치기도 했다.
명나라 호시(胡侍)의 『진주선(眞珠船)』에는 용이 낳은 아홉 마리 새끼를 각각 묘사했다. 먼저 비희(贔屭)는 돌비석 아래에 있는 귀부로 형상은 거북을 닮았는데, 무거운 것을 지기 좋아했다(그림 2). 이문(螭吻)은 동물의 형상으로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것을 좋아해 전각 지붕 위에 장식되는 용머리 모양의 치미와 용두의 형태를 보인다. 포뢰(蒲牢)는 용과 같은 형상으로 울기 좋아해 범종의 상부 고리에 매달았고, 폐안(狴犴)은 호랑이를 닮아 위력이 있어 옥문(獄門)에 세웠다. 도철(饕餮)은 마시고 먹는 것을 좋아해 주로 청동기 정(鼎) 덮개에 새겼고, 공복(蚣蝮)은 물을 좋아해 다리의 기둥에 세웠으며, 애자(睚眦)는 살생을 좋아해 검의 고리에 장식했다. 금예(金猊)는 사자를 닮았으며, 연기와 불을 좋아해 향로에 조형하고, 초도(椒圖)는 소라 조개 형태로 닫기를 좋아해 문고리에 붙였다.
한편 민간 신앙에서 용은 주술적 목적, 홍수와 가뭄을 주재하는 수신(水神), 왕권 및 절대 권력의 상징, 권위와 길상의 상징, 불교에서는 호국과 호법신으로 잘 알려져 왔다. 첫째, 주술적 목적의 용은 옛 건축의 와당, 용마루 등에 조형됐으며, 이는 악귀를 쫓거나 화재를 막는 벽사의 의미로 간주되었다.
둘째, 수신으로서의 용은 바다, 강, 샘, 못 등 물속에 살면서 물에 관한 모든 일을 주관하는 역할을 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628년(신라 진평왕 50) 용 그림을 그려놓고 비를 바라는 화룡제(畵龍祭)를 지낸 것이 최초로 확인되며, 이후 용왕에게 제사하는 용왕전(龍王典)을 두어 사해제(四海祭), 사독제(四瀆祭) 등 용신제를 거행했다. 『고려사』에서는 1021년(고려 현종 12)에 흙으로 용을 빚어 비를 비는 제사를 지냈으며, 1098년(고려 숙종 3) 오해신(五海神)에게 기우제를 지냈다고 기록돼 있다. 바다 인근 마을에서는 용왕단을 설치하고 풍어제를 지냈으며, 현재도 용왕제라는 이름으로 전승되어 어민들이 고기잡이를 떠나기 전 용왕신에게 풍랑으로부터의 안전 및 만선을 빌고 있다. 이렇듯 용은 물 관련된 자연재해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으며, 수신으로서 강력한 지위를 차지했다.
셋째, 왕권 및 절대 권력의 상징으로서의 용은 제왕의 탄생설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왕비를 낳은 것은 계룡(雞龍)이며, 후백제 무왕은 지룡(池龍)의 아들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조모도 용녀(龍女)로서 태조가 왕위에 올라 그의 선조를 용궁에 결부시키고, 몸에 난 용의 비늘을 왕통의 상징으로 삼은 것도 용을 제왕과 관련시키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조선 세종 때 목조에서 태종에 이르는 6대조의 행적과 공덕을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지은 것을 비롯해 임금의 얼굴을 용안(龍顔), 임금의 자리를 용상(龍床)이나 용좌(龍座), 임금의 의복을 용포(龍袍)라고 한 것도 용의 조화능력과 그 상징적 권위를 활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그림 3). 한편 제왕의 위엄을 용의 비늘에 비유해 ‘용린(龍鱗)’이라 했는데, 제왕의 분노와 노여움을 ‘역린(逆鱗)’이라 한 것은 용의 비늘 81개 중 턱밑에 거꾸로 난 유일한 비늘을 건드리면 용이 반드시 그 사람을 죽인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넷째, 길상의 상징인 용은 출사(出仕)를 위한 등용문(登龍門)에서 찾을 수 있다. 황하 상류 하진(河津)을 용문이라고도 하였는데, 높은 급류로 인해 물고기 수천 마리가 용문 아래 모였지만, 좀처럼 오르기 어려웠다. 만약 물고기가 용문에 오를 수 있으면 용이 된다는 의미에서 유래한 것이다. 『후한서』에서는 선비들이 청렴하고 강직한 관리 이응(李膺, 110~169)을 만나 그에게 인정을 받고 벼슬에 천거된 것을 ‘등용문’이라 했다. 잉어가 물 위로 튀어 오르는 모습을 그린 <약리도(躍鯉圖)>가 과거 합격을 염원하는 민간에서 유행하고, 고려시대 문과에 장원한 사람들의 모임을 용두회(龍頭會)라 한 것도 비슷한 경우이다.
다섯째, 용은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의 신으로 묘사되었다.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원동력이 된 신라의 호국불교는 불교를 더욱 수호하며, 나라를 지키고 백성도 편안하게 하기 위한 수호신으로 용을 수용했다. 이에 용은 불법을 보호하는 팔부신중의 하나로 수용되어 선신으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석가모니 탄생 설화에서 아홉 마리 용이 감로수를 뿜어 그의 몸을 씻겨주었던 구룡토수(九龍吐水)도 이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 밖에 신라 황룡사의 창건 설화에 황룡이 등장한 바 있고,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가 당나라 등주에 머물 때 그를 사모한 선묘(善妙)가 바다에 뛰어들어 용이 돼 그의 안전한 귀국을 돕고, 부석(浮石)으로 변해 반대 종파를 물리쳐 화엄사상 전파에 기여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올해는 벽두부터 세계 각지에서 자연재해와 전쟁, 분열과 갈등이 벌어지는 등 새해가 편안하지 못하다. 그래도 갑진년 한해가 청룡의 기운으로 비상해 인류에게 일상의 평화와 미소를 되돌려 줄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