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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시 모음]
팔십 년 긴 장마
김혜순
무서워 무서워
소금 기둥 위에다 비옷을 걸친
내가 지나간다
십 년 장마에 반쯤 녹아
키가 줄어든
내가 지나간다
검은 우산을 끄고
다가온
네 검은 안경테 밑에서
소금물이 줄줄
녹아내린다
그래그래 다 녹자
이까짓 소금 기둥
다 녹여버리자
바닷물 더 짜지게
침묵
김혜순
침을 퉤퉤 뱉아
만들었다는 묵
칼로리도 없고 맛도 없어 양념 덕에 먹는다는 묵
우뭇가사리처럼 말갛게 굳은 것
그것을 길에 냅다 쏟아부으면
민방위날 서울 한복판처럼
자동차들이 몽땅 멈추고
새는 물론
새를 따라가던 총알이 공중에
그대로 멎는다 한다
말 또한 뱉아지는 대신 삼켜진다고 한다
그대 검은 장갑 낀 손에
들려진 침묵 한 사발
오늘 아침 얻어먹으니
느. 닷. 없. 이
ㄴㅐ ㄱㅏ ㅅㅡㅁㅅㅗㄱㅇㅡㄹㅗ
ㅍㅕㄹㅊㅕㅈ'ㅣ ' ㄴㅡㄴㅇㅗㅅ'ㅣ'ㅂㅁㅏㄴㅍㅕㅇㅇㅡㅣㅊ'ㅣ'ㅁㅁㅜㄱㅅㅏㅁㅏ
......ㄱ
나는 사막에다 말을 걸고 싶은 타조처럼
둥굴 벽에다 그림을 새기고 싶은 크로마뇽인처럼
자동차 사막 바퀴 사막을 달려간다
끈적끈적한 침으로 빚은
묵에다 시를 새기고 실어
어둔 밤 사막을 휘휘 저어 달려간다
말은 안 하고
침을 게워
묵을 만드는 사람들 사이로
그 묵에 갇혀 급기야 콘크리트 되는
사람들 사이로
들들들들
김혜순
침묵을 향하여
채찍을 들어
올리는 사람들
침묵을 향하여
개새끼들 하면서
달리는 차창을 열고
침을 칙---뱉는 사람들
들
들
들
들들들들
생쥐처럼 이빨을 세워
침묵의 벽을
일평생 쏠다가
그 벽에 갇힐 사람들
밤마다 아파트 밖으로
쏟아지는
침묵을 캐내는 소리들
신문지 밖으로 쏟아지는 채찍들
연설자의 강대상 밖으로
터져나오는 채찍들
채찍들이 공중에 맞부딪는 소리
채찍들의 교합
갈 곳 몰라 부유하는 채찍들
(내가 청스커트에서
혁대를 잡아빼
방바닥을 후려치며
던지는 대갈일성!
나쁜 놈의 자식들
방바닥에 죽어 널브러진
채찍)
침묵을 메꾸고 살다
침묵 속으로 잠겨가는 사람 들 들 들 들
종
김혜순
요새는 아무도 종을 치지 않는다
신부님도 잊어버렸나
염소같이 생긴 권정생 아저씨도 잊어버렸나
종소릴 들은 지 한참 된 것 같다
머리가 땡땡 울리지 않는다
울리지 않는 머리를
벽에 짓찧으면
물렁물렁한 내 머리가
지점토 반죽같이 찌그러진다
(종이 썩는다
종을 치면
종이 종이 뭉치처럼 부서져
썩은 책처럼 흩어진다)
깊은 밤 내가 이불을 쓰고 누워
물렁한 종을 베개 위에 얹어놓고
곰팡이처럼 어둠이 내리는 것을 본다
옆방에서도 긴 한숨 소리 들린다
구멍 散調
김혜순
1
내 몸의 구멍 참 많다
망양정 정자 위에 높다랗게 올라서면
동해 바다가
내 구멍을 채우러
들어온다
내 온몸엔 마구 흘러다녀도 될
구멍 참 많다
바다는 빈 구멍마다
들어와 샌다
흐른다
2
수도꼭지를 틀었을 때처럼
아니아니 위장 속으로 기름진 식사가
마구 쏟아져 들어올 때처럼
사람들이 에스컬레이터로부터
쏟아져 들어온다
난 지하도에 들어서면
전화 걸고 싶다
나 여기 있어요 이제 쏟아질 차례예요!
내장 속을 여행하는 사람들
내장 속에 있는 주제에
난 거기서 토했다
음식이 음식을 토한다?
여기 잠시 소화가 덜 된 음식물처럼 머물다
항문 괄약근 밖으로 실려가
역사 밖 더 어둔 곳으로
저절로 밀려나갈 사람들
그 안에서 내가 토한다
3
청천 하늘엔 별이 두개
우리네 하늘엔 오늘밤 별이 두 개
문풍지 구멍처럼 별이 두 개
그 구멍으로 하늘이 찔끔찔끔
쏟아져내리고
4
죽음도 나왔다가 들어가는 구멍
그 구멍 속에다
저마다 죽음을 기르는 사람들
그 구멍 속에서
죽음을 꺼내놓기 안타까워
저렇게 발 구르며
포효하는 저 남자
죽음을 안고
웅크린 나를 향해
내놓으라
내놓으라
그래야 사는 법
설교하는 저 성자 할아버지
참
기막힌 연설이야
5
올림픽대로로 자동차들 씽씽 달릴 때마다
뻥뻥 뚫리는 구멍
나 뛰어가고 난 자리
뻐엉 뚫리는 구멍
구멍 생산자들의 질주
이른 새벽 청소부 혼자 그 구멍들을
빗자루로 메꾸고 산다
6
내 팔뚝을 지나
풀밭 사이 개미길로
사라진 불개미 한 마리
아, 놓쳐버렸다
(텅 빈 공간의 확장)
날마다 보이지 않는 개미들이 달려와서
우리를 먹어치운다
(점점 우리들 시야가 멀어진다)
보이지 않는 개미들이
군장을 차고
삽 들고 와
나를
떠
먹는다
(내가 점점 파헤쳐진다)
개미만큼 줄어든 우리만
남고
우리 사이에서
구멍이 넓어진다
점점 넓어진다
자욱한 사랑
김혜순
세상에! 네 몸 속에 이토록 자욱한 눈보라!
헤집고 갈 수가 없구나
누가 가르쳐주었니?
눈송이처럼 스치는 손길 하나만으로
남의 가슴에 이토록 뜨거운 낙인 찍는 법을
세상에! 돌림병처럼 자욱한 눈보라!
이 병 걸리지 않고는 네 몸을 건너갈 수가 없겠구나
갓 세상에 태어난 어린 새들이
모두 이곳으로 몰려와 털갈이라도 하고 갔니?
어린 시절 뜬금없이 재발하던 결핵이라도 도졌니?
몸 속이 너무 자욱해
내 발등 위로 쌓이는 눈송이들
이 세상 시간 밖으로 쫓겨난 건 아니니?
네가 태어나기 전 먼먼 옛날부터
뜨거운 손길로 아가의 심장을 만들어오시는 그분이
아무도 몰래 넣어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주머니
그 별이 터져서 네 몸 속에서 쏟아지고 있는가 봐
이제로부터 이 별은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는 거야
모든 삶의 밑바닥에는 끔찍하게 무겁고, 끔찍하게
힘들고, 끔찍하게 뜨거운 것 있잖아?
그 뭉쳐진 것이 터지는 날
세상에! 눈보라처럼 흐느끼는 바이러스 같은 것!
나 어떻게 이 숨찬 눈보라 건너가지?
사랑은 사랑이 있는 곳에서 가장 많이 모자란다는데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김혜순
1
아침 일고여덟시경
나는 생각한다
서울에서 지금
일천이백만 개의 숟가락이 밥을 푸고 있겠구나
동그랗구나
숟가락들엔 모두 손잡이가 달렸다
시끄러운 아스팔트 옆
저 늙은 나무엔 일천이백만 개의 손잡이가 달린 이파리들이 달렸다
2
하늘 빛의 발을 서울의 동서남북
환하게 내다 걸면 태양이 일천이백만 쌍
우리들 눈 속으로 떠오른다 그러면
서울 사람들, 두 귀를
가죽배의 방향타처럼 쫑긋거리며
이불을 털고 일어난다
바람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그대 안으로
들어가고, 다시 그대 숨이 내 숨으로
들어오면 머리 위에서 신나는 풀들이
파랗게 또는 새카맣게 일어선다 오오
그러다 밤이 오면 죽음이 오백 년 육백 년 전 할아버지의
배꼽을 지나 내 배꼽으로
들어오고 일천이백만 개의 달이
우리의 가슴속을 넘나들며 마음 갈피갈피
두루두루 적셔준다
한밤중 서울의 일천이백만 개의 무덤은 인중 아래
모두 봉긋하고 오오오
또 한강은 일천이백만의 썩은 무덤 속을 헤엄쳐나온
일천이백만 드럼의 정액을 싣고 조용히 내일로 떠난다
다시 하늘이 빛의 발을 서울의 동서남북 내다 걸면
일천이백만 쌍의 태양이 눈을 번쩍 뜨고
저 내장들의 땅속 지하 삼천 미터 속까지
빛살 무늬 거룩하게 새겨진다
없음으로 있음보다
김혜순
사랑은 없음으로 주장한다
평화는 없음으로 피비린내나게
자유는 없음으로 더욱 크게.
자유는 없음으로 있음보다 화려하게
자유는 없음으로 있음보다 진하게
자유는 없음으로 있음보다.....더욱.
그는 없음으로 그의 존재를 주장한다
그는 없음으로 소리친다
그는 없음으로 끌어당긴다
그는 없음으로 나를 병들게 한다.
그러므로 나 또한 없음으로 있기
없음으로써 풍요롭기
없음으로써 있음으로 가기
한사코 있으려고 하는 몸뚱어리를
없음을 향하여
돌려 세우기.
풍경 중독자
김혜순
풍경이 나를 거닌다
내가 밤의 풍경을 쓰다듬는다
이렇게 비오는 오늘 밤, 풍경이 침대 위에서 돌아눕는다
풍경은 왜 거기 있지 않고 여기 있는가
소름이 돋아 우둘두툴한 풍경
두 팔로 껴안아도 여전히 온몸 떨리는 풍경
왜 풍경은 몸 속으로 들어와 고통이 되고 싶은 걸까요?
비 쏟아져 들어가는 지하도를 옆구리쯤에 품은 풍경
그 지하도 밖으로 나오자
녹슨 철골들이 산발한 채 붉은 물을 뚝뚝 흘리는
그 아래 입을 쓱 닦은 깨진 유리병이
피를 뚝뚝 흘리는 밤의 풍경
그곳, 우산도 없이 내가 서 있는 밤의 풍경
내가 베개에 얼굴을 파묻자
멀리 안 보이는 관악산이 비켜서고 새로운 풍경이 나타난다
풍경에게도 깊이가 있나 봐요
나날이 풍경이 깊어져요 명치 끝을 파고 들어요
호흡이 바뀔 때마다 풍경은 바뀌고
안개가 피어오르고 내 방이 녹아서 강물에 떠내려가요
왜 고통이 몸 밖으로 나가면
한낱 고물 집하장이 되어버리는 걸까요?
안에서 밖으로 내뿜어지는 풍경 속
나는 어째서 녹물을 칙칙 뱉는 짓다 만 우정병원 콘크리트에
기대고 서 있는지 비는 철썩철썩 내 뺨을 갈기고 있는지
조금만 몸을 움직여도 바뀌어버리는 예민한 풍경의 살갗
그래, 이제 그만 풍경의 문을 닫아 걸자
행복했어요 멀리서 바라보기엔
그러나 가까이 다가서면 참혹했어요
비 오는 밤의 풍경이 내 두 팔 안에서
나 없이도 울고, 나 없이도 헐떡거린다
비 오는 밤, 풍경의 한복판
온몸의 피가 밀려왔다가 밀려가는 그곳
벙어리 여자처럼 큰 소리로 울며 내가 지나갔지요
먹구름이 몇 가닥 얼굴 위로 흘러내려요
언제나 한 장의 표면밖에 가진 것이 없는
그런데, 이 풍경의 출구는 어디예요?
*달력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빗방울 하나
김혜순
저 머나먼 공중에 벙어리 방이 하나 떠 있어요
온몸의 구멍을 내 눈물이 다 막아버려서
구멍이 하나도 없는 방이 하나 떠 있어요
걸을 때마다 바닥이 물컹물컹 소리치는 방
내 피부 같은 물 도배지를 바른 방
나는 그 방에다가 밥상을 차렸어요
아버지가 집에 돌아올 때면
밥상 위의 그릇들이 벌벌 떨었어요
그래도 나는 벽장 속에다
갓 태어난 물방울 아가들을 숨겼어요
누군가 손가락 끝으로 누르기만 해도
기둥조차 없어 저절로 터져 버릴 방
천장도 창문도 없어 하늘이 그대로 눈부시지만
내 날개짓 멈추어 버리면 한없이
곤두박질쳐버릴 그 방이 하나 떠 있어요
아무도 모르게 나 혼자 너를 사랑하는 방
그 방이 하나 한없이 떨면서 떠 있어요
*시안, 2002
이제 멈추고 싶어
김혜순
나는 생각의 보따리를 가득 이고
날마다 커지는 보따리를 이고
덜컹거리며 덜컹거리며
아침마다 왕복열차를 탄다
그러나 내려서 그에게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늘 가면서도 한 번도 닿아본 적이 없는
그에게로! 날마다 커지는 생각의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먼먼 기억의 궁륭 저 편
그가 가고
또 내가 갔었는데
오늘 텅 빈 왕복열차를 타고
피곤에 지친 내가 덜컹거리며
그곳과 이곳을 왔다 갔다
생각의 보따리를 차창에 기댄채
이제 멈추고 싶어
날마다 커지는 보따리를 내려놓고
너는 거기에 나는 여기에
텅 빈 열차만 왔다 갔다
머리 없이라도 여기, 이곳에 멈추고 싶어.
슬픈 서커스
김혜순
그녀는 의자 앞에 대걸레를 세운다
대걸레의 손잡이는 푸른 플라스틱 바케츠에 담겨 있다
푸른 바케츠는 물찬 신발 같다
바케츠의 검은 물이 대걸레의 손잡이를 감싼다
그녀는 의자에 앉는다
의자에 앉아선 자신의 자켓으로 걸레를 감싼다
조금 전까지도 바닥을 닦던 걸레의 머리털에선 땟국물이 줄줄 쏟아진다
그녀는 그 걸레의 머리털 위에 모자를 하나 씌운다
그녀는 웃으며 자신의 팔 하나를 떼어 걸레의 팔에 달아준다
시궁창에서 놀던 십년 전 남동생을 안듯 그녀는 걸레를 안는다
마치 의자 위엔 그녀가 앉고
그녀의 무릎 위엔 한 남자가 안겨 있는 것 같다
그녀는 대걸레 남자의 포켓에 손수건 하나를 끼워준다
행복한 여자의 머리 위에서 손수건 꽃이 저절로 핀다
여자는 걸레를 안고 잠이 든다
걸레도 손을 들어 그녀의 꽃을 만져준다
그들은 너무 사랑하므로 포개어진 두 손은 하나처럼 보인다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보아도 둘이 합해
그들은 팔이 두 개다
푸른 바케츠 신발이 그녀의 다리 사이를 파고든다
현기증
김혜순
왜 이리 신호가 안 바뀌지?
횡단보도 앞에 멈춰서 있으려니
누군가의 시선이 길 건너편 은행 빌딩
검은 유리창에 매달려 있다
한참 마주 째려보니 그게 바로 나다
저 삐딱하게 선 여자가 바로 나로구나 하고
있는데 까만 그랜저가 지나가고
또 내가 거기 미끈거리는 차체에 들러붙어 있다
왜 이리 신호가 안 바뀌지?
횡단보도 옆 은행나무 잎들이 부르르 떤다
햇빛 받은 이파리 한잎 한잎 수정 거울 같다
징그러워라 거기 잎잎이 노란 거울에
내가 매달려 떨고 있다
다시, 그러나 고개 들어 쳐다보니 아, 푸른 거울!
저 하늘이 미끌미끌하다
입술을 대니 비릿하다
그 누군가의 동공 같다
그 푸른 동공 위에 확대경 같은
태양을 갖다 대고 누군가
나를 눈부시게 째려보고 있다
신호가 바뀌자 횡단보도 위로
내 사랑하는 검은 거울, 그림자가 나를 이끈다
그때 지나가던 사람이 내 검은 거울 상판때기에다
꽁초를 휙 던진다
이게 도대체 누구의 어항 속이냐?
거울 미로에 빠진 사람처럼 오늘 날 눈을 뜰 수가 없다
눈길 가는 데마다 전부 나다
겨울 나무
김혜순
나뭇잎들 떨어진 자리마다
바람 이파리들 매달렸다
사랑해 사랑해
나무를 나무에 가두는
등굽은 길밖에 없는
나무들이
떨어진 이파리들 아직도
매달려 있는 줄 알고
몸을 흔들어 보았다
나는 정말로 슬펐다. 내 몸이 다 흩어져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이 흩어져 버리는 몸을 감당 못해 몸을 묶고 싶었다. 그래서, 내 몸 속의 길들이 날마다 제자리를 맴돌았다. 어쨌든 나는 너를 사랑해. 너는 내 몸 전체에 박혔어. 그리고 이건 너와 상관 없는 일일 거야. 아마.
나는 편지를 썼다
바람도 안 부는데
굽은 길들이 툭툭
몸 안에서
몸 밖으로
부러져 나갔다
한 잔의 붉은 거울
김혜순
네 꿈을 꾸고 나면 나는 오한이 난다
열이 오른다 창들은 불을 다 끄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밤거리
간판들만 불 켠 글씨들 반짝이지만
네 안엔 나 깃들일 곳 어디에도 없구나
아직도 여기는 너라는 이름의 거울 속인가 보다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고독이란 것이 알고 보니 거울이구나
비추다가 내쫓는 붉은 것이로구나 포도주로구나
몸 밖 멀리서 두통이 두근거리며 오고
여름밤에 오한이 난다 열이 오른다
이 길에선 따뜻한 내면의 냄새조차 나지 않는다
이 거울 속 추위를 다 견디려면 나 얼마나 더 뜨거워져야 할까
저기 저 비명의 끝에 매달린 번개
저 번개는 네 머리 속에 있어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다
네 속에는 너밖에 없구나 아무도 없구나 늘 그랬듯이
너는 그렇게도 많은 나를 다 뱉어내었구나
그러나 나는 네 속에서만 나를 본다 온몸을 떠는 나를 내가 본다
어디선가 관자놀이를 치는 망치소리
밤거리를 쩌렁쩌렁 울리는 고독의 총소리
이제 나는 더 이상 숨쉴 곳조차 없구나
나는 붉은 잔을 응시한다 고요한 표면
나는 그 붉은 거울을 들어 마신다
몸 속에서 붉게 흐르는 거울들이 소리친다
너는 주점을 나와 비틀비틀 저 멀리로 사라지지만
그 먼 곳이 내게는 가장 가까운 곳
내 안에는 너로부터 도망갈 곳이 한 곳도 없구나
잠시 후의 나를 위하여
김혜순
내가 왼손에 담배를 들고
오른손으로 라이터를 켤 때는
기저귀찬 갓난아이 내가, 흰 칼라를
달고 선 소녀인 내가, 하이힐을 신고
기우뚱거리는 처녀인 내가, 오늘 밤
너와 욕설로 술 마시는 내가, 잠시 전
의 내가, 모든 사람인 내가, 수만 개의
내가 왼손으로 담배를 들고
오른손으로 라이터를 켜는 것입니다
잠시 후 내가 두 콧구멍에서 연기를 내품을 때도
수만 개의 콧구멍들이 두 줄기
흰 연기를 내보내는 것입니다
다시 내가 손가락 사이에 술잔을 끼우고
벌려진 입 속으로 술을 부으면
수만 개의 손가락 사이에 술잔이 끼워지고
수만 개의 벌려진 입이 술을 마시며
수만 개의 염통이 아앗 취한다!
그 중에서도 기저귀찬 갓난아기 나와 잠시 후에 나의 아가에게 기저귀 채울 내가 가장 큰 목소리로
아앗 취한다!
그런 잠시 후 네가 내 뺨을 정신차렷! 처얼썩 갈기며 일어서면
수천 수만 개의 내가, 내가내가내가내가내가
벌떡 일어서서
그 중에서도 서른 살 넘은 내가 가장 늦게 일어서서
수만 개의 입술을 벌려
수만 개의 파장을 울려
한 살짜리 고사리 같은 손가락을 곧추세워
두 살짜리, 세 살짜리, 네 살짜리
점점 길어지고 낡아가는 손가락을 곧추세워
오직 하나인 나를 가리키며
돼지 멱 따는 목소리로
나는 나란 말이야!
시인선 : 앵무새의 혀 / 김혜순
연옥
김혜순
중문 해변에서 낮술 마시고 들어와
밤까지 내처 잤나?
눈을 감아도 떠도 여전히 암흑이다
여기가 어딘가
이곳은 거울 속 세계처럼
빛은 어둡고 어둠은 벨벳처럼 밝다
어두운 창 밖의 바다는 은쟁반보다 단단하다
태양은 검고 별도 검다
이곳 사람들은 죽음으로 인생을 시작하고
태어남으로 인생을 마감한다
나는 죽음과 태어남의 중간 지점 어딘가에 누워
숨가쁜 하품을 해치웠다
여기가 어디인가
연옥은 내 몸 안으로 잠입해 눈 뜨는 것인가 보다
몸 속에서 눈을 뜨니 머릿속 한가운데
소용돌이치는 검은 심연이 떠 있고
눈 감으니 어둠을 빨아들이는
활화산이 염통쯤에서 무너져 내린다
나는 손을 뻗어 몸 속의 벽을 만져본다
벽은 검은 뼈 조롱 속에
물컹거리는 내장을 담아들고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다
이 벽은 수만 가지 동작을 삼킨
시간 주머니처럼 비밀이 많다
안간힘 다해 일어나 스위치를 올린다
입 안부터 불이 켜지자
빛은 어둡고 어둠은 밝은
연옥이 몸 속으로 오그라붙는다
모든 외부를 몸 속에 품은 내가
거울 밖 세상을 두리번거린다
다시, 여기는 어디인가
Earlymorning Bules
김혜순
누가 칠흑 같은 검정에서 파랑을 빼내고 있다
줄에 걸려 펄떡거리던 광목 한 필이 점점 더 푸르러졌다
(당연히 빨간 피도 한 줌 쏟아졌다)
나는 밤새도록 검정 속을 날아 이곳에 도착했다
푸른 광목에 묶인 할머니의 시신이 이곳으로 하관 중이었다
내 몸도 맘도 파랗게 절여졌다
갓 태어난 낙태아가 새파랗게 울었다 생생한 청색아였다
엄마는 흰 구름처럼 돌아누워 훌쩍이고 있었다
검정 속에다 밤새도록 눈물깨나 뿌린 모양이었다
아빠, 아빠 내 머리 속엔 파란 남자가 살아요
검정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남자가 살아요
나는 소리없이 울부짖었다
빨강 메니큐어를 칠한 해가 검정 실크햇을 쓴 앞산머리를 긁어댔다
앞산이 턱받이 냅킨 위로 빨강 피를 줄줄 흘렸다
그러자 머리 위에 원반처럼 떠 있던 동그란 하늘이 점점 더 새파래졌다
인생이란 이쪽 파랑에서 저쪽 파랑으로 건너가는 것
누가 던진 부메랑인지 희뿌연 하현달이 저쪽으로 기울었다
나는 또 안팎이 파란 아기를 밴 모양이었다
들숨 날숨 내 몸 안팎에서 파랑이 커다랗게 파도쳤다
벌써 여러달째다
누군가 화장실 쓰레기통에 임신진단시약을 버리고 있다
그동안 버려온 여인이 한 명인지 아니면 각기 다른 사람인지 나는 모른다
다만 내가 추측할수 있는 부분은
그 여인(들)이 결과가 나올때까지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기다렸을까 하는 것이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버려지는
빨강도 파랑도 검정도 아닌...
메아리가 갔다가 오는 만큼, 그만큼
김혜순
강 건너에서 모래 실은 트럭 한 대가
맹렬하게 달려오더니 귓속에 햇살 한 트럭 붓고 갔는지
메아리처럼 내게서 떠나갔다가
저 건너 산에서 내 귓속으로
다시 밀려들어오는 환한 꿈
공동묘지로 가득 찬 저 山中이 내 귓속까지
환하게 밀려들어와 와글와글 하는지
너 죽을래 하면 너 미쳤니 하면서
저 산 주름들 다 더듬고 돌아와서는
덤프 트럭이 쏟은 모래만큼 와글와글 하는 소리
이 편의 너 죽을래와 저 편의 너 죽을래 사이 공중에다가
그 허랑방천에다가 다달이 피를 쏟고 가는
이제 갓 암컷이 된 새
나는 왜 이 나이 먹어서도 그 새파란 시절로,
그리로 자꾸만 돌아가는지
따뜻한 눈물이 하늘을 스치고 지나가자
내 눈물로 따뜻해지는 강물
메아리처럼, 노을처럼 또 한번 핏방울 떨어지고
윤회의 소용돌이에 끼여 오도가도 못하는 한 영혼이
말잠자리처럼 저 편 山中과
이 편 강물 사이에 오래도록 떠 있고
메아리가 갔다가 돌아오는 그 사이, 그만큼
회오리처럼 오르다 다시 떨어지는 저 새가 저지르는
피 부신 노을 이부자리, 그만큼
너 미쳤니 하면 너 미쳤니 할 뿐
백년 묵은 여우
김혜순
나는 이번 생에 복숭아 하나 얻으러 왔어
당신이 떠나가며 한 모금 울컥 뱉어놓은
그 붉은 얼룩, 그것을 구하러 왔어
당신은 저 유령들의 세상에서 병들어 있다는데
나는 눈 내리는 이겨울밤 이 얼어붙은 골짜기
그만 눈밭에 홀려버렸나봐
어디에 있는 거야?
이 눈밭을 한 바퀴 돌고 나면 붉은 아기는
하얀 할머니 되고 하얀 할머닌 붉은 아기 된다는데
복사꽃 난분분 난분분 흰눈은
밀려오고 다시 또 오는데
가도 가도 희디흰 백지
발자국 남기자마자 지워지는 내 평생의 족적
저 땅 속 깊은 곳 어디선가 눈뜨는 핏발선 눈동자 하나
벌어진 내 자궁 속에서 튀어나온 뜨거운 그것
연필은 똑 부러지고, 숙제는 많은데
그런데 정말 어디에 있는 거야
어디선가 복숭아 향기 그윽히 오는 것만 같은데
끓다
김혜순
밤하는 깊숙이 날아가는 너
그러나 나는 자다가도 너의 열원을 감지한다
공대공 미사일 발사!
먼 하늘에서의 가열찬 폭파!
잠시 후 냄비에서 물이 끓는다
잠자기는 글렀으니 커피나 한잔 마셔야겠다
하마터면 냄비 속에 손을 집어넣을 뻔했다
끓는 물이 너무도 시려 보여서
손 대신 냄비에 얼굴을 집어넣고 뭐라고 뭐라고 해본다
수만 겹의 고막이 끓는가?
아니면 탄생과 소멸의 은유인가?
졸아붙는 물 속에서 수만 개의 모스 부호가 요동친다
통성기도 중인 예배당 같다
상공으로 치솟아 거친 기류를 헤치고
천천히 선회하다가 급강하하는 콘도르
그 먼 시선으로 끓는 물을 내려다보기도 한다
누군가 숲 속에 헬리콥터라도 몰래 숨겨놓았나?
저 먼 곳에서 다시 숲의 나무들이 끓는 소리
몸 내부로만 꽂힌 수만 개의 붉은 전선들이
안으로 안으로 전기를 방출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감각이 아니라 초음파야 물결이야
손을 넣기만 해도 감전사해버릴 나의 내부
이번엔 내가 전파 냄비처럼 끓기 시작한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전파 탐지기야 미사일이야
귀에서 끓는 소리가 난다
내 몸에서 내가 쉭 쉭 빠져나간다
물이 다 졸아붙는다
그녀, 요나
김혜순
어쩌면 좋아요
고래 뱃속에서 아기를 낳고야 말았어요
나는 아직 태어나지도 못했는데
사랑을 하고야 말았어요
어쩌면 좋아요
당신은 나를 아직 다 그리지도 못했는데
그림 속의 내가 두 눈을 달지도 못했는데
그림 속의 여자가 울부짖어요
저 멀고 깊은 바닷속에서 아직 태어나지도 못한
그 여자가 울어요 그 여자의 아기도 덩달아 울어요
두 눈을 뜨고 당신을 보지도 못했는데 눈물이 먼저 나요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는 게 분명하지요?
그러니 자꾸만 자꾸만 당신이 보고 싶지요)
오늘 밤 그 여자가
한 번도 제 몸으로 햇빛을 반사해본 적 없는 그 여자가
덤불 같은 스케치를 뒤집어쓰고
젖은 머리칼 흔드나봐요
이파리 하나 없는 숲이 덩달아 울고
어디선가 함박눈이 메아리쳐 와요
아아, 어쩌면 좋아요?
나는 아직 태어나 보지도 못했는데
나는 아직 얼굴이 다 빚어지지도 못했는데
현대문학/ 2002년 / 3월호
가난
김혜순
나는 언제나 새는 중이야
그렇지 새고 말고
나만 새는 거 아냐
발바닥 밑의 모래밭도 새는 걸
모래밭 위의 지구도 새는 중이래
지고 가던 쌀자루가 자꾸 새더군
마시지 마 물이 새
이것 봐 막혔군 나만 새는 거 아냐 화내지 마
바다에 뜬 기선에서도 물이 새고 있다는데 뭘
구름에선 소나기
밤에선 아침이
모두 새나봐
새,새,샌다니까
게다가 비가 새는군
시집[또 다른 별에서]
그믐
김혜순
그날 밤 내 몸에서 달이 다 빠져나간 밤
어항 속의 금붕어도 발발 떠는 밤
별들이 우물물을 정수하다 말고
우물 밑바닥에 납작 엎드려 새끼고양이처럼 가르릉거리는 밤
어디에서도 너를 찾을 수 없는 밤
밤나무의 밤이 저절로 모두 떨어지는 밤
잊혀진 천문대가 숨어 들어오는 UFO들로 정신없는 밤
내 몸에서 빠져나간 달이 죽어버린 밤
내 전화벨 소리가 네 방을 태워버릴 듯 소리치는 밤
강물들이 너와 나의 이야기 녹은 물로 아주 아주 수다스러운 밤
마을의 불빛들이 항복 항복 하고 하나씩 꺼져 버리는 밤
네 안의 주름 속에 숨어 있다 걷어 채인 밤
어둠이 너를 착착 접어서 주머니에 넣고 내놓지 않는 밤 그날 밤
저 어둠의 장막을 내 비명으로 내리그으면
빛 한 파람 그 칼자국 사이로 터져 들어올 것 같은 밤 그날 밤
장롱
-김점선에게
김혜순
1
그 베이지색 몸통에
달려 잇는 무수한 서랍들
내가 젖꼭지를 잡고 쓰윽 당기자
열리는 서랍마다 뜨는 태양
서랍마다 들려오는 소리
점선아 도룡뇽알 잡으러 가자
엄마 배고파 (선죽교 위로 포탄 터지는 소리)
숫말 같은 아버지 당근 드세요
열쇠는 없지만 문틈으로 보이는 광경
당산나무같이 붉은 엄마
맨드라미 꽃밭같이 넓은 태반
그 탯줄가지에 매달린
거위떼 분홍핏물 초록 핏물 쪽쪽 빠는
자식 남편
2
나는 내 몸속을 휘젓는다
블랙홀처럼 깊고 검은 내 장롱 서랍
잊어버린 엄마손 찾아
난리통 그 너머까지 마구 휘젓는다
몇십 년 넘게 입은 그 옷더미 속을
미친 듯이
뒤져 낸다
날마다 맑은 유리처럼 떠올라
김혜순
넌 모를 거야
밤마다 내가
잠든 나를 살그머니 눕혀놓고
네게로 간다는 걸
이건 더욱 모를 거야
밤마다 네가
잠든 너를 벗어나
나를 맞으러 나온다는 걸
우리 둘이서 즐거이 손잡고
요단강을 넘나들며
벗은 몸에 수천의 꽃잎을 달고
아름다운 불꽃을
입으로 내뿜으면서
발목에 지구를 매달고 날아다닌다는 걸
정말 모를 거야
깊은 밤 우리 둘이서
맑은 유리처럼 떠올라
하늘을 마시고 달을 삼키며
그림자도 없이
사랑하고 포옹한다는 걸
넌 모를 거야
그리고 넌 이것도 모를 거야
밤이 가고 아침이 오면
우리는 헤어져
다시 잠든 몸 속으로 들어가
소리도 없이
드러눕는다는 걸
드러누워 불을 끄고
땅속 깊이 우리의 꽃대궁을
묻어둔다는 걸
그리고 잠 속 깊이 우리의 영혼을
감춘다는 걸
넌 더욱 모를 거야
나의 너에 대하여
김혜순
베틀에 앉은 외할머니가
베틀북을 높이 들 때처럼
길이 당겨 올라간다
지구 곳곳에 흩어져 살던 LH718 승객들의
긴장한 길이 비행기 안으로
팽팽하게 당겨진다
328개의 길이 이륙한다
숨이 찬 내 애인아
나무들 잎잎마다 들러붙어
숨 몰아쉬며 불어제친다
아직도 할말이 남았어
비행기 창밖에 구름 그림자 진다
나무들이 한쪽으로 쏠린다
몰려가는 구름처럼 그가 입만 벙긋거린다
낮고도 낮은 저 아래
푸른 머리칼 오그라붙은 자지러지는 산맥들
내 애인의 얼굴 위로 침 흘리는 강들, 단단한 바다들,
내 마음을 어디다 붙들어매었던가
내 애인은 어디쯤에서 솟구쳐올라
나를 덮쳤던가
낮고도 낮은 저 아래
눈발은 어디를 휘돌아 그 얼굴을 흰 붕대로 감았던가
아, 그러나 떠올라보면 떠올라볼수록
출구가 없는
너의 얼굴 속 산맥과 바다
높이도 없고, 깊이도 없는
납작한 네 얼굴
어쩌란 말이냐
베틀에 앉은 외할머니가
베틀북을 높이 들어
LH718을 서방에 갖다 걸자
다시, 나를 품에 넣는 내 애인
피륙이 길어진다
나를 언제 놓아줄 텐가
네 얼굴 위로 트렁크를 질질 끌고 나는 간다
코끼리 부인의 답장
김혜순
네가 보내온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코끼리 한 마리 풀어보낸다
얼마나 증오가 깊어야
두 눈동자 사이
미간에서 팔이 돋아나
통나무 둥치 같은 것
마구 감아올리게 되는지
맷돌 같은 어금니로 무시무시한
웃음을 갈아 삼키면서
탱크처럼 아무거나 밟아 터뜨리고
꿈틀거리는 것이면 무엇이건
감아올리게 되는지
얼마나 절망이 깊어야
몇날며칠 머리를 받치고
눈물을 받던
잿빛 베개가 두 귓가에 들러붙어
펄렁거리게 되는지
네가 보내온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사방에서 날아오는 소문의 화살이
귀찮아 죽겠다는 듯
두 베개를 연신 펄렁거리는
코끼리 한 마리 풀어보낸다
코끼리 발자국 닿을 때마다
글자들이 마구 지워진다
다시 또 얼마나 숨 막고 기다려야
앙 다문 입술 밖으로 불현듯
불멸의 상아가 치솟게 되는지
글자들의 숲속에 구멍 뻥뻥 뚫린다
이제 눈물 방울 얼룩진 편지를 찢어버리련다
그리고 창문 열어 코끼리처럼 딱딱하게
들어찬 잿빛 연기도 날려보내련다
아, 그러나 이 뾰족한 상아를 입가에 매단 채
어떻게 거리로 나가지?
레인 피플
김혜순
밤비가 찬찬히 빌딩을 닦고 있다
가끔씩 내려오는 하늘 그림자는
언제나 투명하다
우리 모래 나라의 깃발도
조금씩 깨끗해지고 있다
투명하게 울고 있는 비
하늘나라엔 레인 피플이 사는데요
그들은 너무 울고 울어서
결국엔 모두 사라지게 된대요
물이 다 빠지면 꼭 우리같이 생겼대요
우산을 치우고 잠시 올려다보면
저 멀리 롯데호텔도
손을 들어 감은 머리를 빗어내리고 있다
모래 기둥이 조금씩 무너져내려 길가에 쌓이면
투명한 그림자가
그것들을 쓸어내가고 있다
내 팔짱을 풀고 그가 운다
밤비가 닦아놓은
길 위에
눈물이 덜 마른 그가 잠깐 서 있다 사라진다
내가 찬찬히 닦여진다
흐느낌
김혜순
그럴때가 있다 갑자기
느닷없이 내가 내 몸 속으로 깊이 깊이 숨어들 때가
그러면 또 내가 그걸 못 견뎌서
내 몸 속에서 춤추는 사람 천 명이 쏟아져 나온다
여름비가 오열하는 파도처럼
춤추는 사람 천 명을 때린다
격정적으로 때린다
숲의 천그루 나무들이
전신으로 물방울을 튀기며
쏴아 쏴아 군무에 빠져 있다
그렇 때가 있다 갑자기
느닷없이 내가 내 몸 속으로 깊이 깊이 숨어들 때가
들어가선 못 빠져나와 안간힘을 쓸 때가
그러면 또 내가 그걸 못 견뎌서
내 몸 속에서 북치는 사람 천 명이 쏟아져 나온다
그래도 아직 몸통 속에 갖힌
미친 멜로디가 다 풀리지 않았는지
내 눈물이 한 방울 몸 속으로 떨어지고
나를 싣고 흘러만 가는 조그만 땅
김혜순
간혹 우리는 좁은 길 걸어가면서
무섭지 않다고 말하겠지만
간혹 우리는 벽 밖으로 슬며시
주먹을 내놓아보았다고 말하겠지만
간혹 우리는 벽 위로 올라가
천방지축 호수와 산과 바다 위로 새 되어
날아봤다고 말하겠지만
간혹 우리는 좁은 길 따위 벗어나
길 없는 산 속을 혼자 헤매어 건너갔다고 말하겠지만
조그만 땅은 늘 내 발 아래 붙은 채
조그만 하늘은 내 머리 위에 얹힌 채
나를 싣고 흘러만 가네
강 위로 미끄러져 내리는 뗏목처럼
두근거리네
김혜순
밤 하늘 저 머나먼 별자리 하나는
내 눈동자가 있어야만
이 땅과 만날 수 있다네
오늘 밤 술취한 별자리 하나이신 이 몸도
중앙공원 잔디밭 위에서
앉을 자릴 찾아 두리번거리네
수만년 전에 그려준 그 길로는 더 이상 가기 싫단 말이야
빛의 자갈돌이 발에 턱턱 채이는 밤 하늘
영원히 내 손에 잡히지 않을 저 둥근 지붕이
무방비의 나를 옥죄어 오네
누구도 자기 별을 선택할 수는 없는 법
가끔 땅이 눈동자 속에서 솟구쳐 오르기도 하는 것처럼
눈 앞이 캄캄해지기도 하네
몸 속의 저 별들을 꺼내보고 싶네
시디신 전갈이 한 마리 목구멍 속에서 올라와
입술 밖으로 쏟아지고
밤보다 까맣게 반짝이는 전갈을 따라
딸 기다리는 집으로 또 돌아가야 하겠지?
잠깐 허공 중에 머물다
이 세상에 날 던져준 그 손바닥 위로
돌아가야 할 부메랑처럼
이미 돌아가는 길에 들어선 이 몸이지만
오늘 밤 웬일인지
저 별자리들 몸 속에서
두 근 거 리 네
얼굴에 쓴 글씨
김혜순
출근 지하철 안에서 새파란 처녀가
젖은 머리칼을 휘휘 내두르며
친구랑 떠들고 있다
신문 읽는 내 손등에 목덜미에
물이 뚝뚝 떨어져
옷 속으로 스며들었다
덩달아 신문도 젖어버렸다
소녀 시절
여러 번 같은 꿈을 꾸었다
누군가 붓에다 먹을 찍어
내 얼굴에다 자꾸 글씨를 썼다
눈을 떠보면(여전히 꿈속이었지만)
내 얼굴에 글씨를 쓰는 사람의
얼굴도 글씨로 가득했다
(그는 누구였을까)
(무슨 글자들이었을까)
실제로 출판사에 다닐 땐 내 입 안에
글씨로 엉킨 실 뭉치가 가득 찬
날도 있었다
(결핵성 늑막염으로 가래를 퉤퉤 뱉고 다녔다)
집에 돌아와 목욕탕에서 거울을 보며
먹을 찍어 얼굴에
글씨를 써보았다
그러다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 시절 내 얼굴에 글씨를
쓰던 사람의 얼굴을 보고 말았다
구름城의 여자
김혜순
걸어서 저 하늘까지
저 하늘의 구름城까지 걸어가요
저 구름城의 모습, 바로 내 모습이에요
나는 걸어서 저 하늘의 내 안으로 들어가요
구름城 문이 소리없이 닫히고
城 안에 나는 한없이 갇혀요
뭉싯뭉싯 살이 찌기도 해요 배가 부풀어오르고
어느 날 살찐 아기가 튀어나오기도 해요 장딴지가
파르테논 신전 기둥만해졌어요
차암, 낯뜨거운 날 창문 열고
나 한 번 쳐다본 적 있으셨겠지요?
거 구름 한번 좋다 하셨겠지요?
그러다 햇빛 양의 치맛자락 아래 그냥 그대 뜨거우시리라
놔두면서 나 혼자 마구 젖었던 거
구름 기둥 같은 두 다리 싸안고 이리저리 뒹굴었던 거
보신 적 없다 말하진 않으시겠지요?
내리지 않는 비로 누워서
혼자 소용돌이치다 혼자 온몸 다 젖었던 거
빗소리 어디서 아마득히 들리는데
빨랫줄의 그대 속옷 하나 안 젖는 날
있었던 거 생각나시겠지요?
큰 소리 마른번개로 눈물 없이 울던 거
말하려면 할수록 활자와 단어들이
후드득 후드득 뚱뚱한 내 뱃속으로만 떨어지던 거
입 안에 침만 고이던 거
어느 날인가는 파랗게 눈 닦고
그대 양철 지붕만 망연히 어루만지던 거
차마 알아채지 못했다고는 안 하시겠지요?
날마다 슬픔의 몸 바꾸며 소리쳐도
내 몸 밖으로 물길 열리지 않던 거, 보셨겠지요?
내 길 열어 그대 머릿결 따라 길을 내고
그대 뺨 위로 길을 내고 싶어 눈 껌뻑이던 거,
이제 몇십번째의 이승길 걸은 듯하고
저 높은 산 저 깊은 계곡 저 神話의 굽이굽이
다 지난 듯하여 水面 위에 내 말의 꽃 끝내 못 피우고
그대 지붕 위에 물꽃 소리 못 피우던 거
내 몸 혼자 뒤채고 부풀리던 거
정녕 모르신다곤 않으시겠지요?
어머니 달이 눈동자 만드시는 밤
김혜순
나는 시방 바다로 걸어들어간다
머리를 베개 위에 반듯하게 얹고
두 손을 가슴 위에 나란히 포개고
그렇게 왼발 오른발 한밤내 걸어들어가면
우리 아버진 바다 깊이 잠들어 계시고
우리 어머닌 한 천 년째 바다를 휘젓고 계시다
그러면 세상의 파도란 파도
그 모든 파도의 물방울 방울마다
세상의 모든 아가들 영롱한 눈망울 하나씩 맺히고
우리 아버지 배꼽에선 연꽃 한 그루 억세게 높이 자라
그 연꽃 속에서 뛰어나온 청년이
바다 위 마을의 집집마다
영롱한 눈망울 두 개씩 배달 나간다
그러나 시방은 다시금 내가 그 바다에서 걸어나올 시각
나는 가슴에 나란히 포갰던 손을 풀고
오대양 육대주 넘실거리던
내 두 눈동자의 주름을 거두어 들고
이불 밖으로 몸을 솟구쳐올린다
Spoonful Blues
김혜순
폭풍우 끝난 저녁 하늘
수천개의 상처로 순간 순간
열리는 너의 이마
입천정의 검은 비닐
같은 저 먹구름을 걷어줘
푸른 바다가 소리친다
구구구 별들을 모아보지만
목숨이 잦아들고 잦아들고마는 별들
내 머리채는 이제 마악 떠오르는
달에 휘익 빨려들었다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살아있는 것은 모두 미치지
푸른 머리칼을 자근자근 씹으며
내가 너를 만나려면 내 푸른 색을 다 건너가야 하리
해변의 묘지 위에서
노부부는 젖은 그물을
거두어들고 들어가고
동해 휴게소 높은 유리창 안에서
머리칼 흠뻑 젖은 여자 혼자
찻잔 속의 먹구름을 티스푼으로 휘휘 젖고 있네
입천정에 와 부딪는 뜨거운 물결!
바다는 아직 흐느끼는 어깨를 내리지 않았네
눈오는 날의 갑갑함
김혜순
머얼리 소리치면
소리가 내 가슴에
얼른 돌아와요
무거운 돌처럼 돌아와요
가슴 속에도 산이
있고 바다가
있고 길도 있어요
그 산 속에 바다 속에 길 속에
돌아온 소리들이
흩어져요
수천 개 수억 개
자갈들로 흩어져 떨어져요
머얼리 소리쳐도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나봐요
눈 오는 날 노래 부르면
눈에서도 귀에서도 입에서도
함박눈이 쏟아져요
가슴 속에서도 가슴 밖에서도
눈이 내리고
아무도 태양을 보진 못해요
詩集, 어느별의 지옥
오늘의 이브
김혜순
스민다, 뱀이
내 몸 속으로
퍼진다, 스며 들어온 뱀이
내 몸 전체로
호수에 던진 잉크병처럼
꺼멓게
퍼진다. 독이
정수리까지
일용한 마치의 독이
스며 들어온 독이
나를 일으켜 세워
걸어가게 한다
금단의 나무 밑으로
그리곤 선이든 악이든
마구 따먹게 한다
칼을 안고
김혜순
너도 참, 이마에 이슬이 맺혔구나
나는 너의 날이 선 이마를 손끝으로 스윽 밀어 본다
네 몸은 내가 맞대고 누울 상처 하나 없이 날카롭구나
이불 속에서도 한 줄 번개처럼 시린 너의 몸
네 입맞춤은 내 몸에 차가운 화상 자국을 남긴다
한 자루 날선 칼이 내 몸에 꽂혀 있다
내가 그 칼을 안고 돌아누울 때
저 머나먼 절정에서 멈추는 나의 비명
빛이 가득한 그 한 점 공중에서 우리 잠들 수는 없어
내 머리가 쏟아지는 비명의 별들로 저며진다
너도 참, 자르지도 못하면서 저미기만 하는구나
저 더러운 마당의 흙이 저 일일이 제 몸 저며 낸
나뭇잎들로 자신을 표현하듯이
나는 얇디얇은 살점들처럼 아픈 그림자들을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내 몸 속에서 꺼내 놓는다
잘 자라 검은 이파리들아 내 비명으로
자라는 내 검은 물결, 그림자들아
나 오늘 밤, 내 몸에 꽂힌 칼의 입술에 내 입술을 스윽 베어 문다.
서울 길
김혜순
내 마음엔 웬 실핏줄이 이리도 많은지요 이 실핏줄을
다 지나야 그곳에 당도하게 되겠지요 왜구가 출몰하여 강
화도로 피난 가셨다고도 하고, 중공군 피해 해협을 건너
셨다고도 하였지만 나는 수백 년 길 속에 갇혀 걷고만 있
었지요 내 마음엔 웬 다리가 그리도 많은지요 매일 아침
다리를 건너 강 저쪽에 닿았다가 매일 저녁 다리를 건너
강 이쪽으로 돌아와요 마음의 저편 산자락 아래까진 가보
지도 못했어요 그쪽에서 약수가 터져 마음 한 자락 싱싱
하게 살아났다는 풍문 들었어요 당신이 그 물을 달게 마
셨다고도 하고, 그냥 지나치셨다고도 하는 소문 들었어요
가슴 밑 어두운 산을 뚫고 나도 모르게 굴이 뚫렸다는 소
식도 전해 들었어요 어디 계신지요 며칠 만에 시내에 나
가 보면 아직도 포장도 안 뜯은 새 건물이 제본소에서 마
악 도착한 신간 소설책 뭉치처럼 부려지고 있어요 날마다
당신에게로 가는 길이 늘어나요 길 속에 길이 있어요 지
금 막 도착한 저 빌딩의 몸 속을 좀 들여다보세요 층계와
층계 사이로 불 켠 실핏줄들이 보이잖아요? 저 길을 언제
다 지나 당신에게 당도하지요? 서울이 서울을 낳아요 마
음이 제 몸을 한껏 부풀려 또 마음을 낳아요 거기로 이삿
짐을 가득 실은 차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또 실핏줄이 엉
겨 붙어요 길이 나요 발을 딛지도 않았는데 또 길이 나요
언제 저 길을 다 뒤져 당신을 찾아내지요 당신이 보고 싶
어요
눈물 한 방울
김혜순
그가 핀셋으로 눈물 한 방울을 집어올린다. 내 방이 들려 올라간다. 물론
내 얼굴도 들려 올라간다. 가만히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으면 귓구멍 속으
로 물이 한참 흘러들던 방을 그가 양손으로 들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
다. 그가 방을 대물 렌즈 위에 올려놓는다. 내 방보다 큰 눈이 나를 내려다
본다. 대안 렌즈로 보면 만화경 속 같을까. 그가 방을 이리저리 굴려본다.
훅훅 불어보기도 한다. 그의 입김이 닿을 때마다 터뜨려지기 쉬운 방이 마
구 흔들린다. 집채보다 큰 눈이 방을 에워싸고 있다. 깜빡이는 하늘이 다
가든 것만 같다. 그가 렌즈의 배수를 올린다. 난파선 같은 방 속에 얼음처
럼 찬 태양이 떠오르려는 것처럼. 한 줄기 빛이 들어온다. 장롱 밑에 떼지
어 숨겨놓은 알들을 들킨다. 해초들이 풀어진다. 눈물 한 방울 속 가득 들
어찬, 몸속에서 올라온 플랑크톤들도 들킨다. 그가 잠수부처럼 눈물 한 방
울 속을 헤집는다. 마개가 빠진 것처럼 머릿속에서 소용돌이가 일어난다.
한밤중 일어나 앉아 내가 불러낸 그가 나를 마구 휘젓는다. 물로 지은 방
이 드디어 참지 못하고 터진다. 눈물 한 방울 얼굴을 타고 내려가 번진다.
내 어깨를 흔드는 파도가 이 어둔 방을 거진 다 갉아먹는다. 저 멀리 먼동
이 터오는 창밖에 점처럼 작은 사람이 개를 끌고 지나간다.
중앙박물관 길
김혜순
이조시대관에서 아이를 잃어버린 걸 알았다.
나는 왕의 밥그릇, 술잔, 수저를 잊혀진 후궁처럼 바라보다 말고 백자 연적의 연꽃잎들을 주르르 흘리며 고려시대관으로 달려간다 나는 비취빛 화병들 사이로 뛴다. 병들이 한쪽으로 쏠리며 무너지는 것 같다. 튀어 오르는 가는 鶴, 어린 소나무, 바닥에 떨어지는 민물고기, 나는 정신없이 뛴다. 뛰면서 조그맣게 아이의 이름을 불러본다. 부르는 소리는 그룻 굽는 불가마 속으로 들어간 불쏘시개처럼 흔적이 없다. 나는 다시 달려나간다. 고려에서 신라로, 개성에서 경주로 문을 박차고 나간다. 금귀걸이 옥귀걸이 유리귀걸이 소리가 잘그랑잘그랑 나는 방 속을 뛴다. 금을 왕수에 녹일 때처럼 가슴속에서 기포가 보그르르 올라온다. 어떡하나. 파헤친 왕릉 사이로 아이의 머리가 언뜻 보인 듯하다. 나는 그 무덤의 부장품 사이로 손을 집어넣는다. 단단한 통유리가 손바닥 아래서 탁! 나를 막는다. 신라관에서 불현듯 토기시대관으로 건너뛴다. 박물관 밖으로 나가선 안 되는데. 그러면 더 못 찾을 텐데. 흙이 일어서 그릇이 된다. 흙이 일어서 사람이 된다. 흙이 일어서 물동이가 된다. 모든 그릇들이 아이로 보인다. 깨어진 아이를 본드로 붙여놓은 듯하다. 아이가 물을 담고 서 있다. 휘재야 휘재야 나는 운다. 눈물이 카펫 바닥에 스며들고 박물관 입구에서 산 엽서들이 쏟아진다. 석기시대관 입구에서 다시 아이를 부른다. 돌화덕에서 연기가 오르는 듯하여 경황중에 한번 더 쳐다본다. 돌칼 돌화살 돌창 저것들로 잡을 짐승이 있었다니 믿기지 않는다. 문밖으로 달아나는 노루 언뜻 보인다. 그 노루를 쫓아가다 말고 휴게실을 둘러보기로 한다. 어느 나라로 떠나는 대사에게 임명장이라도 내린 방일까. 웅장하고 두껍고 붉은 커튼이 어마어마하다. 한 손으로 머리 위에 종이를 내리며 아프리카로 가라, 그대는 칠레로. 아니면 남의 나라 사람들이 남의 나라 사람들에게 남작 백작 공작 자작 깃털을 하사하며 정오엔 깃을 펴라 뽐내어라 연극하던 방일까. 그곳에서 코카콜라를 판다. 나는 누군가와 부딪치면서 콜라 세례를 받는다. 흰 치마에 콜라가 썩은 피처럼 번진다. 징징거리면서 계단을 내려간다. 다시 올라온다. 사각의 미로 같다. 그러다 어느 방에 갑자기 고꾸라지듯 들어선다. 철기 시대. 철로 만든 검. 철로 만든 방패. 철로 만든 모자. 철로 만든 창을 등지고 다시 나온다. 그러나 계단 위로 꿈결처럼 아이가 걸어 올라오는 것을 본다. 엄마 이게 뭐야? 으응 이건 철갑옷이야. 칼로 싸울 때 맞지 않으려고 입는 거야. 무거운 옷일 거야. 우리는 철기 시대 철갑 병사 앞에서 두 손을 맞잡는다.
참 오래된 호텔
김혜순
참 오래된 호텔. 밤이 되면 고양이처럼 강가에 웅크린 호텔. 그런 호텔이 있다. 가슴속엔 1992, 1993......번호가 매겨진 방들이 있고, 내가 투숙한 방 옆에는 사랑하는 그대도 잠들어 있다고 전해지는 그런 호텔. 내 가슴속에 호텔이 있고, 또 호텔 속에 내가 있다. 내 가슴속 호텔 속에 푸른 담요가 덮인 침대가 있고, 또 그 침대 속에 내가 누워 있고, 또 드러누운 내 가슴속에 그 호텔이 있다. 내 가슴속 호텔 밖으로 푸른 강이 구겨진 양모의 주름처럼 흐르고, 관광객을 가득 실은 배가 내 머리까지 차올랐다 내려갔다 하고. 술 마시고 머리 아픈 내가 또 그 강을 바라보기도 하고. 손잡이를 내 쪽으로 세게 당겨야 열리는 창문 앞에 나는 서 있기도 한다. 호텔이 숨을 쉬고, 맥박이 뛰고, 복도론 붉은 카펫 위를 소리나지 않는 청소기가 지나고, 흰 모자를 쓴 여자가 모자를 털며 허리를 펴기도 한다. 내 가슴속 호텔의 각 방의 열쇠는 프런트에 맡겨져 있고, 나는 주머니에 한 뭉치 보이지 않는 열쇠를 갖고 있지만, 내 마음대로 가슴속 그 호텔의 방문을 열고 들어갈 수가 없다. 아, 밤에는 그 호텔 방들에 불이 켜지든가? 불이 켜지면 나는 담요를 들치고, 내 가슴속 호텔 방문들을 열어제치고 싶다. 열망으로 내 배꼽이 환해진다. 아무리 잡아당겨도 방문이 열리지 않을 땐 힘센 사람을 부르고 싶다. 비 맞은 고양이처럼 뛰어가기도 하는 호텔. 나를 번쩍 들어올려, 창밖으로 내던지기도 하는 그런 호텔. 그 호텔 복도 끝 괘종시계 뒤에는 내 잠을 훔쳐간 미친 내가 또 숨어 있다는데. 그 호텔. 불 끈 밤이 되면, 무덤에서 갓 출토된 왕관처럼 여기가 어디야 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자다가 일어나서 보면 내가 봐도 낯선 호텔. 내 몸 속의 모든 창문을 열면 박공 지붕 아래, 지붕을 매단 원고지에서처럼 칸칸마다 그대가 얼굴을 내미는 호텔. 아침이 되면 강물 속으로 밤고양이처럼 달아나 강물 위로 다시 창문을 매다는 그런 호텔.
月印千江之曲
김혜순
1
글러브에서 탁탁 두드려진 달이 플레이트를 떠나려 할 때
방망이가 철가면에게 보내는 싸인
빨리 끝내고 목욕이나 하러 가자
공이 명왕성 방향에서 날아오르는 것을 그는 가장 좋아한다
산봉우리 하나 만큼 큰 허벅지가 들리워지고
달이 떠오른다 그가 방망이를 높이 들어 올리면
그러나 이 달은 피칭 머신에서 나오는 것
그는 이미 순서를 다 외우고 있다
커브 다음은 그가 한 번도 때려 본 적이 없는
170킬로 이상의 직구
실내 야구연습장 친구들은 이 공을
‘달이 뜨지 않는 밤’이라 부른다
누군가 ‘달이 뜨지 않는 밤’을 두드린 모양이다
관중석에서 출렁거리던 수천의 강이 일어섰다 앉는다
달이 그 천 개의 강에 하나하나 도장을 찍어 주고 간다
다음 타자는 계곡에서 미끄러지다가 돌부리에 걸린다 발이 젖는다
오늘은 개기월식날처럼 하늘이 붉다
이번 달엔 29타석 노히트 최대의 슬럼프다
마지막 이 공도 붉다 이 직구는 흔들흔들 술취한 놈처럼 온다
바다는 고향 집 대문 앞까지 부풀어 있을 것이다
2
내가 내 몸 속의 산맥들을 내려다보네
몸 속에선 천 개의 강도 출렁거리네
이 속에 있으면서
저 곳으로 가고 싶은,
갇혀서, 갇혀서 흐르는 강이
출렁거리네
달이 그 천 개의 강에 하나하나
도장 찍어 주고 가네
도시를 건너온 구름이
달의 얼굴을 젖은 모포처럼 둘러싸안다가 놓고 가면
몸 속에 흐르는 내 천 개의 강이
너에게로 한없이 흐르고 싶은 이 물이,
하늘하고 수평으로 나란히 눕고 싶은 이 물이,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또 한 번 출렁거리네
――어쩌지, 어쩌지
저 물이 다 저무네
저 물이 가버리네 산허리를 밀치고
멀리멀리 가버리네
가서는 또 돌아올 수 있을까
잦아드네 저 물이
잦아들었다간 또 피어오를까
그가 골목길 밖을 돌아서 가 버리네
3
장마전선이 북상중이라는 소문, 시즌이 끝나가는 밤
시합 개시를 기다리는 야간의 스타디움
필드에서 캐치 볼을 하는 선수들의 나른한 팔
달은 아직 스타디움 근처에 얼씬도 않고 있다
달은 아직도 어두운 구름 속을 달리고 있다
러닝 연습 중이다 ‘내 생에 한 번이라도 도루할 수 있을까’
그는 오늘 밤 십 초에 한 번씩 달을 쾅쾅 쳐주고 있다
외야에게 월몰 연습시키는 중이다
이번엔 그가 글러브에 달을 척척 넣어주고 있다
같은 자리를 한 번도 떠나지 않고
달 그림자 척척 받아주는 웅덩이처럼
캐치볼 전문 기계처럼
주먹을 떠난 돌멩이가 웅덩이의 월면을
퍽퍽 때려 주고 있다
선풍기의 살인
김혜순
임종의 입회자는 선풍기뿐
바람이 그녀의 몸 위를 두리번 거리네 어젯밤
이 방에서 움직이던 두개의 장난감 중에 하나는 멈추고
하나만 남아서 여전히 심벌즈를 두드리듯
바람의 손뼉을 치고 있네
방은 뚜껑이 열리지 않는 유리처럼 밀봉돼 있고
냉장고 안에선 생선이 썩고
그녀의 입속에선 혀가 썩네
이 방을 가득 채웠던 흔적들이
좌로 한 번 우로 한 번 몰려다니는 통에
고장난 그녀는 도저히 잠을 깰수 없었다네
몸속에 플러그처럼 박힌 아기를 잘라버리자
이제 열린 책처럼 알몸으로 펄럭거리는 그녀
아무것도 더 할일은 없었다네
전력회사와 아직도 연결된 불쌍한 선풍기만
벙어리 증인처럼 그녀의 뺨을 이쪽 한 번
저쪽 한 번 밤새도록 갈기고 있었을 뿐
*달력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늙은 갈대의 독백
김혜순
해가 진다
갈새는 얼마 아니하야 잠이 든다
물닭도 쉬이 어느 낯설은 논드렁에서 돌아온다
바람이 마을을 오면 그때 우리는 섧게 늙음의 이야기를 편다
보름달이면
갈거이와 함께 이 언덕에서 달보기를 한다
강물과 같이 세월의 노래를 부른다
새우들이 마른 잎새에 올라 앉느 이 때가 나는 좋다
어느 처녀가 내 잎을 따 갈부던 결었노
어느 동자가 내 잎닢 따 갈나발을 불었노
어느 기러기 내 순한 대를 입에다 물고 갔노
아, 어느 태공망이 내 젊음을 낚아 갔노
이 몸의 매딥매딥
잃어진 사랑의 허물 자국
별 많은 어느 밤 강을 날여간 강다릿배의 갈대 피리
비오는 어느 아침 나룻배 나린 길손의 갈대 지팽이
모두 내 사랑이었다
해오라비조는 곁에서
물뱀의 새끼를 업고 나는 꿈을 꾸었다
ㅡ 벼름질로 돌아오는 낫이 나를 다리려 왔다
달구지 타고 산골로 삿자리의 벼슬을 갔다
노아
김혜순
당신과 함께 보낼 수 없는
시간은 이제 더 이상 흐르지 않소
흐르지 않고 내 머리 속 깊은 곳에
고이고 있소
큰 깊음의 샘물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렸나 보오
온 세상 통곡 소리가 내 머리 속으로 오고 있소
몸 속에서 이제
당신과 함께 걸은 길들이 녹고 있소
큰 물결이 우리 환한 산책 길을
덮치고 있는 것이 보이오
물쥐들이 기둥 갉아먹는 소리에
창문 열고 가끔 내다보오
땅에 기는 것들이 모두 죽었다 하오
코로 숨 쉬는 것들이 모두 죽었다 하오
가슴 밑바닥에서 우물이 넘쳐 솟아 오르오
당신이 입 대고 마시던 우물은 이제 흙탕물이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떠 있구려
숨을 내뱉었다 들이마셨다 하는 것 멈추지 않아
나는 아직도 떠 있다오
홍수 속에 숨을 멈추지 않는 배는
이제 세상에 나 혼자인가 보오
아무도 나에게 소식을 보내오지 않소
또 물쥐들이 배 밑바닥을 갉아먹는 소리 들리오
- 이 몸에 번호를 매기고
채널을 바꿔 버릴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음화
김혜순
오늘 아침에는 아직도 우리가
피난중이라는 생각
아직도 어린 새끼 등에 업고
총칼 대포 피해 피난 보따리 이고 지고
우왕좌왕 쫓기는 꿩떼 같다는 생각
누가 굶어죽는지 누가 얼어죽는지
걸음아 나 살려라 힘껏 내달린다는 생각
이 보따리 잃을까 이 보따리 빼앗길까
웅크리고 두리번거린다는 생각
(누가 이리 꼭 묶어놓았나 피난 보따리
우리들의 골통 보따리
들어온 것 못 나가고
나간 것 못 들어오라고
누가 와 자근자근 밟아놓았나
무덤 보따리)
오늘 아침 청계천을 꽉 메운 차들
내려다보고 있을 때 문득 스치는 풍경
길고긴 피난민 행렬, 우리들의 무의식
울지도 못하고 떠밀려가는 보따리 행렬
죽어서도 못 썩을 우리들의 음화
모든 것을 기억하는 물
김혜순
직육면체 물, 동그란 물, 길고 긴 물, 구불구불한 물, 봄날 아침 목련꽃 한 송이로 솟아오르는 물, 내 몸뚱이 모습 그대로 걸어가는 물, 저 직립하고 걸어다닌 물, 물, 물……내 아기, 아장거리며 걸어오던 물, 이 지상 살다갔던 800억 사람 몸 속을 기억하는, 오래고 오랜 물, 빗물, 지구 한 방울.
오늘 아침 내 눈썹 위에 똑, 떨어지네.
자꾸만 이곳에 있으면서 저곳으로 가고 싶은
그런 운명을 타고난 저 물이
초침 같은 한 방울 물
내 뺨에 타고 어딘가로 또 흘러가네.
아침을 읽는 법
김혜순
정월에, 많은 별들이 비 오듯 떨어졌으나 땅에까진 이르지 않았고 강에만 떨어졌다
이월에, 우리나라 밖으로 내가 매일 읽던 경전이 가방을 싸서 달아났다 우주 미아처럼, 떠가는 챌린지 물고기처럼(나쁜자식!)
삼월에, 고기들이 언 강 밖으로 나오더니 다 죽었다
사월에, 별들의 비늘이 쉬지 않고 떨어져 쌓였다 북쪽에 아직 살기가 있다
오월에, 어디서든 장애물, 꺼지지 않는 화면, 고기 없는 텅 빈 강물이 흘렀다
유월에, 한강 남쪽의 백화점이 땅속으로 함몰되어 웅덩이가 되고, 꿈에 사과를 본 사람은 살아나왔다
칠월에, 땅속의 우물들이 넘쳐 흘러 민가가 떠내려 가고,돼지들이 지붕 위에서 울었다 기찻길로 기차 대신 붉은 강물이 기적 소리를 내고 흘러갔다
팔월에, 동남쪽의 붉은 기운이 한 필의 비단처럼 펼쳐졌다 그 다음 비가 오는데 그 속에 물고기들이 섞여 떨어졌다
구월에, 바람이 문 앞에 와서 문 열어 문 열어 울었다 아침에 보니 바람의 머리칼이 문고리에 잔뜩 감겨 있었다 그날은 보름이었고, 동도 서도 남도 북도 아닌 곳이 가장 길했다 그도 여섯 발의 총알을 다 썼을까?
시월에, 늦가을에 갑자기 매화가 피었다 그때마다 그가 자꾸 생각났다 강기슭으로 죽은 고기들이 하얗게 떠올랐다
동짓달에, ......
섣달에, 이제 꿈꿀 시간 삼십 초, 강이 다시 얼어붙었다 White Out 발을 헛디딜 때마다 수천 길 크레바스 아래, 시퍼런 강의 이빨 속으로 떨어졌다 이불은 남극처럼 하얗고, 그 밑으로 빙하가 흘렀다 그는 나를 다시 똑같은 회로에 납땜하여 갖다 붙였다
다시 정월에,
핏덩어리 시계
김혜순
내 가슴속에는 일생을 한번도
쉬지 않고 뚝딱거리는 시계가 있다
피를 먹고 피를 싸는
시계가 있고, 그 시계에서 가지를 뻗은
붉은 줄기가 전신에 퍼져 있다
저 첨탑 위의 시멘트 시계를 둘러싼
줄기만 남은 겨울 담쟁이처럼
나는 너의 시계를 한번도
울려보지 못했다 그리고 누구도
내 핏덩어리 시계를 건드리지 않았다
참혹한 시계에게도 생각이 있을까
백년은 짧고 하루는 길다고 누가
나에게 가르쳐준 걸까
태양 시계를 쏘아보다 기절한 적도 있지만
바닷속으로 시계를 품은
내 몸통을 던져버린 적도 있지만
어떤 충격도 어떤 사랑도
이 시계를 멈추진 못했다
각기 출발한 시각이 다르므로
각기 가리키는 시각도 다른 우리 식구 셋이
식탁에 둘러앉아 묵묵히 시계에 밥을 먹이고 있다
우리 중 누구도 시계를 풀어
식탁 위에 놓지 않았다. 아직
아아, 안간힘 다해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너의 귀에 대고 말해본다
네 시계까지 들리라고, 네 시계를 울리라고
큰 소리로 말해본다
그러나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오후 세시의
뚝딱거리는 말, 정말일까?
우리는 우리의 시계까지 들어가본 적이 없다
시계 밖으로 일진 광풍이 일자
겨울 담쟁이 붉은 줄기들이
우수수 몸 속에서 바람에 흔들리고
내 눈에 눈물이 고인다
잠시만이라도 내 시계 바늘을 멈추어볼 수 있니?
이 바늘 없는 시계를 네 품에 안을 수 있니?
김혜순
김혜순씨는 1979년 계간 『문학과 지성』을 통해 시단에 데뷔했다.
시집
또다른 별에서,아버지가 세운 허수아비,
어느 별의 지옥, 우리들의 陰畵,나의 우파니샤드, 서울, 불쌍한 사랑기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