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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의 멋진 암릉 위 풍광은, 험난한 길에 묻혀 빛이 바래다
1. 일자 :
2. 장소 : 속리산 (1058m)
3. 행로 및 시간
[시어동(
4. 동행 : 홀로 / 안전산악회
< 속리산 산행을 준비하며 >
속리산이란 단어를 접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 중에 가장 강렬한 것은, 결혼 전 어느 겨울 몹시 추운 날, 집사람과 함께 버스를 여러 번 갈아 타고 법주사 부근에 도착해서 들어간 평범한 민박집의 인상이다. 당시 집사람은 조금 더 좋은 숙박지를 원했는데, 연애 경험이 일천했고, 무척 추웠던 날씨 사정으로 법주사 인근 숙박단지 내에 적당한 곳을 선택한 것이다. 당시도 그랬고 지금 생각해 보아도 멋모르고 촌스러운 선택이었다. 혼전의 처자와 여행에 나섰다면 멋지고 오붓한 분위기를 연출해 내는 센스쯤은 발휘해야 되는데 말이다. 그래도 그 여행의 인연이 행운이 되어 지금, 애 둘 낳고 잘 살고 있으니 속리산과는 그리 나쁜 인연은 아닌가 보다. 산행을 준비하며 옛 추억이 떠오르는 것은 어인 연유인지 모르겠다. 잊혀져 가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자꾸 깊어가는 나이가 되었나 보다.
속리(俗離)란 말은 어순상 ‘속세가 산을 떠남’이라고 해석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속세를 떠난 산’이라는 의미를 살리려면 이속(離俗)이라는 표현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내 말이 아니고 장호 선행의 주장이다.) 속리든 이속이든 일상의 번뇌를 잠시 접고 산의 정기를 받아 심신을 새롭게 하려는 인간의 바램은 동일할 것이다.
속리산 산행을 준비하며, 지도를 들어다 보니 안전산악회 홈페이지에 올라 온 시어동-문장대-관음봉-묘봉-상학봉-운흥리 코스는 충청알프스 서북 능선을 타는 코스다. 산행지도를 자세히 살피니, 속리산하면 무심코 충청도의 산이라 생각했는데 절반은 경상도 지역에 속해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속리산에서 보듯이 우리나라는 대개 산을 중심으로 사람들의 왕래에 변화가 생기고 풍속과 기후가 바뀌고, 자연스럽게 행정구역이 산을 기점으로 나뉘게 됨을 알 수 있다. 같은 자연의 일부인데도 강보다는 산의 영향이 크다 할 것이다.
오늘 산행코스를 되집어 본다. 시어동 오송폭포 출발 2시간여 만에 문장대 부근에 도착할 것이고, 방향을 서쪽으로 틀어 속리산 최고의 전망대 문장대에 오르고, 이어 관음봉, 묘봉, 상학봉 등 험하기는 하나 경관이 매우 좋은 암릉을 타다가, 청탑바위를 지나 운흥리로 하산하는 코스다. 산악회 홈페이지에는 5시간 30분의 소요시간이 표기되어 있지만, 내 예상으로는 족히 7시간이 걸리는 긴 코스다. 문장대에 오르면 서북 방향으로 긴 암릉의 전경이 눈에 들어올 것이고, 동북 방향으로는 백두대간 산줄기가 밤재에서 늘재 넘어 청화산, 조항산, 대야산으로 이어지는 모습이 장관일 것이다. 인도어 클라이밍, 맛보기 만으로도 속리산의 많은 것을 알게 되어 출발 전부터 기대가 크다.
< 희망사항 >
주초부터 날씨가 무척 추워졌다. 다행히 주말이 되면 날씨는 점차 따뜻해 질 것이라 한다. 장쾌한 속리산 능선을 오르며 봄 볕이 마실 나온 듯한 포근함을 느껴 보고자 한다. 계절로 보아서는 단풍이 한창일 시절이다. 10월의 마지막, 색색으로 변하는 단풍의 바라보며 가을의 정취를 만끽해 보고 싶다.
속리산은 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산이다. 그러고 보니 속리산을 마지막으로 국립공원을 모두 다녀온 것 같다. 지난 봄 월출산을 가기 전에는 왜 이 산이 국립공원 반열에 들었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호남에 대한 배려겠지’라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했었는데, 막상 산에 올라 보고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산세에 반해 버린 생각이 난다. 명불허전, 속리산도 그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속리산 가는 버스 안에서 >
새벽 집을 나서는 공기가 서늘하다. 혹시 몰라 두꺼운 옷을 입고 나왔는데 잘 한 것 같다. 계절은 가을의 정취를 편히 느낄 사이도 없이 겨울을 향해 달려 가고 있다. 복정역에 도착해 보니 버스가 두 대다. 오늘 코스가 인기가 많은가 보다. 하기야 고속버스비보다도 싼 가격에 들/날머리 접근성 좋지, 밥 두 끼까지 제공하니 산꾼들이 아니 모이겠는가?
남이천에서 아침을 먹고 증평IC까지는 빠른 속도로 이동하였으나, 이후 국도 길이 한 시간이나 걸려
< 시어동에서 문장대 >
시어동 들머리 출발 시, 얼마 전 유료로 다운로드 받아 휴대폰에 저장한 산행지도의 궤적을 추적하기 위하여 GPS를 ON 시켰다. 배터리 소모가 어떨지 모르겠으나 산꾼 생활의 진일보한 발전과, 업무상 지도와 관계되는 일을 하므로 실전에서의 적용 상황을 확인도 해보고, 무엇보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하여, 일단 시도해 본다.
들머리 주차장 전봇대 사이로 속리산 지능선의 암봉들이 울퉁불퉁한 모습으로 어서 오라며 나를 반긴다(
어제 밤, 등산잡지에서 등산과 음식에 관한 글을 읽었다. 내용을 요약하면, 사람이 일상에서 소모하는 에너지는 평균적으로 탄수화물 65%, 지방 20%, 단백질 15%로 구성된다. 탄수화물은 1g당 열량이 4kcal로 일단 체내로 흡수되어 포도당으로 변해 혈액을 통해 운반되어 에너지원으로 사용된다. 이용되는 에너지보다 많은 양이 섭취되면 글리코겐 형태로 근육과 간에 저장되거나 중성지방 형태로 지방조직에 저장된다. 산행이 시작되면 먼저 몸에 저장된 탄수화물을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데 저장량이 평균 1시간 30분 정도 밖에 되지 않아, 다 소모된 이후로는 지방을 에너지원으로 쓰게 된다. 그런데 이 지방이란 놈은 탄수화물의 보조 없이는 스스로 에너지원으로 사용할 수 없다 한다. 마치 군불을 지필 때 잔가지 등의 도움이 없으면 나무에 불이 잘 붙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따라서 지방소모를 위해서는 산행 2시간 이내에 탄수화물 섭취는 필수적이다. 만약 제 때 탄수화물의 섭취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근육이나 간에 축적된 글리코겐을 에너지원으로 쓰게 되어 몸에 축이 나고 쉽게 피로가 오게 된다. 결국 나의 경우에 몇 년 간의 산행에도 불구하고 뱃살이 빠지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제 때에 탄수화물 공급이 이루어지지 않아 지방의 소모를 촉진시키지 못한 것이라 할 것이다. 반면 단백질은 아미노산으로 구성되는데 운동시 에너지원으로 사용되기 보다는 근육을 비롯한 신체조직의 구성요소로 역할만을 한다. 이치를 알고 나고 실천에 옮겨 보고 싶다. 오늘 당장 실천 해 보자.
허비한 시간을 만회하고자 오랜만에 들머리에서부터 속도를 내어 본다. 평상복
차림의 행락객들로 산길이 많이 붐빈다. 잰 걸음으로 한 두 명씩 앞서며 30여분을 쉼 없이 내 달린다. 좌측 하늘 위로 울퉁불퉁한 바위 봉우리가
나타나는가 하면 고운 단풍도 곳곳에 눈에 띤다. 오름 길 치고는 그리 힘들지 않는 길 사정이다. 좌우로 집채만한 바위가 있고 그 사이로 다리가 놓인 구간을 지난다(
고도가 800m가 넘어섰다. 눈
앞에
< 들머리에서 본 풍경 / 기묘한 바위 앞에서 >
문장대 밑은 길게 줄이 연결되어 있다. 문장대는 먼 발치에서 올려다 보는
것으로 눈 도장을 찍는다. 다음에 오더라도 인파를 피해 오를 수 있을까 모르겠다. 그래도 올려다 보는 커다란 바위 암봉의 장관은 명불허전이다. 멋지다(
스마트폰의 등산로 궤적 추적이 계획대로 되고 있나 확인한다. GPS가 바쁘게 신호를 찾고 있고 시어동에서 문장대까지의 길에 붉은색으로 궤적이 추적되고 있다. 배터리 소모가 빠르지만 만족할만하다. 집에 돌아가 결과를 확인해 보고픈 마음에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산행지도에 표기된 GPS 좌표, 고도, 시간은 아래와 같다. 내용을 살피니 제법 중요한 정보가 많다. 갑자기 내가 전문가가 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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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36.571506,127.889928,09-30-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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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d,36.568912,127.869634,09-30-2010,
t,d,36.568606,127.868354,09-30-2010,
t,d,36.567484,127.864863,09-30-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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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장대 부근 풍경 / 관음봉 가는 길의 풍경 >
< 문장대에서 관음봉 >
문장대에서 바라다 보는 관음봉 일대와 최근 개방되었다는 속리산 서북능선의 전경은 시원하나, 울퉁불퉁한 모습이 길의 사정이 만만치 않음을 예고하고 있다. 길게 내려서는 비탈을 간다. 이리 길게 내려가면 또 올라와야 할 것 인데 걱정이 앞선다.
아니나 다를까 긴 내리막이 끝이 나고 암릉 길이 보인다. 쉼 없이 걸어 온지라 조금이라도 완만한 평지 길을 걷고 싶은데 내 마음 같이 길이 대응해 주고 않고 있다. 다시 암릉 능선 길에 올라섰다. 동쪽으로 문장대의 정상부가 빤히 보이고 그 너머로 천황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길게 보인다. 북쪽으로는 바위 위 소나무 뒤편으로 이름 모를 산줄기들이 굽이치고 있다. 그 어딘가에 백두대간 길이 이어질 것이다. 멀리 마을도 보인다. 하산 길에 맞이할 운흥리가 서쪽 방향으로 어렴풋이 보인다. 다리가 힘들어서 그렇지 눈은 참 즐겁다.
< 속리산 서북능선의 전경 / 전망바위 위에서 >
11시 20분경 회사에서 전화가 와 있다. 긴급한 사항이 아니면 전화가 오지 않을 텐데, 짐작이 가는 사안이 있다. 전화를 시도하나 통신상황이 여의치 않다. 계속되는 길은 구멍바위를 지나고 길게 줄을 서서 올라야 하는 밧줄길이 이어진다. 이래서 다른 산꾼들의 산행일기에서 관음봉으로 가는 길은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소요된다 했나 보다. 몸은 고달프고 회사 전화로 인해 마음은 무거운데, 밧줄 길에서 퍼질러 앉은 아주머니들을 보고 있을라치니 스트레스가 몰려 온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화가 치밀어온다. 내 차례가 되어 밧줄을 잡고 암릉을 내려서는데 잡을 곳이 마땅치 않아 나 역시 큰 애를 먹는다. 남 탓할 상황이 아니었다. 안전시설이 크게 미비하다. 겨울철에는 이 코스를 택했다면 큰 낭패보겠다. 한 고비 넘겼다 생각했는데 다시 구멍바위를 지나자 긴 밧줄 길이 거의 수직으로 이어진다. 줄이 두 개인데 올라오는 아주머니들이 모두 사용하고 있다. 한 줄은 하산용으로 쓰자고 말하고 내려서다 마지막 착지를 잘못하여 다리에 경련이 왔다. 순간 크게 당황이 되었고 급하게 마음을 쓴 것이 후회되었다. 그래도 경련은 산에서 자주 있는 일이라, 잠시 그대로 서 있으니 다리가 풀린다. 가야 할 길이 먼데 걱정이다.
전망바위에 올라선다(
손을 잡을 곳도 마땅치 않고 길도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절벽으로 떨어지면 생사를 가름할 수 없는 험한 길을 여러
번 지나 문장대 출발 1시간 만에 관음봉에 도착했다(
문장대에서 관음봉 코스는 최근에 개방되었다 하는데 아직 안전시설이 많이 부족하다. 길 정보가 충분치 않는 상태에서 오르면 큰 일 당하기 십상인 코스로 판단된다. 관음봉 정상에서는 남쪽의 전경이 시원하다. 멀리 바라다 보이는 산너울 속에 지리산도 있을 것 같다. 눈으로는 판단이 생기지 않고 마음으로만 가름해 본다.
< 관음봉 부근 전망바위에서 / 관음봉의 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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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음봉에서 묘봉 >
정상 옆, 도저히 길이 있을 것 같지 않은 바위 틈을 타고 내려서자 또 다시 밧줄이 메어저 있는 난간이 나온다. 도대체 안전산악회는 길 사정이 이런지 않고 코스를 잡았는지 모르겠다. 내 생각으로는 7시간이 훨씬 넘는 코스인데, 인터넷에는 5시간 30분, 오전 안내방송에서는 6시간 만에 주파하란다. 늦으면 2호차로 늦게 귀경한다고 반 협박조로 이야기 한다. 낙오 당하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걸어야겠다. 점심도 사과 한 개로 그야말로 걸어가며 행동식으로 해결했다. 덕분에 관음봉까지는 내 예상보다 40여분 일찍 도착했으나 시간 압박이 심하다. 내가 선두권에 위치하고 있는데 후미가 걱정된다. 차라리 현실적인 시간을 알려주고 여유 있는 산행을 유도하는 것이 안내하는 자의 도리가 아니겠나 하는 생각을 한다. 산악회 이름에도 ‘안전’이라는 말이 들어 있는데 말이다.
암릉을 두 서 너 개 오르내리니 길은 흙 길로 변한다. 새 것의 냄새가 나는 이정표가 보인다. 묘봉까지 3.5km가 남았다 한다. 암릉은 없어졌지만 그래도 오르내림은 여전하다. 출발이래 문장대 전 조릿대 길 5분여를 제외하고는 평지 길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 본격 등산 이래 이렇게 험하고 오르내림이 심한 산은 처음이다.
< 소나무 전망대에서 / 속리산 단풍 >
속사치란 곳은 어디서 지났는지 모르겠다. 다시 이정표를 만난다. 묘봉 2.9km, 0.5km를
11분 만에 왔다. 휴대폰 배터리의 눈금이 하나만 남았다.
아무래도 궤적 추적은 묘봉까지만 가능할 것 같다. 에너지 소모가 극심하다. 탄수화물의 소모가 끝나고 지방을 써야 하는데 보충이 제 때 이루어지지 않아 근육 속의 글리코겐을 쓰고 있나
보다. 길가에 펑퍼짐한 바위가 있길래 주저 앉는다(
휴대폰 지도에 의하면 북가치가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곳에만 가면 한시름
놓을 것 같은데 관음봉 출발 이래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이 걸었다. 긴 내리막을 내려서니 이정표가 보인다. 북가치다(
묘봉까지는 0.6km 거리다. 그래도
가까운 거리에 목표에 있으니 다시 힘을 낸다. 관음봉에서 묘봉까지는 위험한 암릉은 없었으나 긴 길이었다. 묘봉도 정상 부근은 험한 밧줄 길이 이어진다. 멋진 소나무가 바위
위에 솟아 있는 곳이 묘봉이다(
< 묘봉 가는 길의 전경 / 묘봉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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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봉에서 상학봉 >
지금 시간이
예상대로 초입부터 밧줄 길이다. 좁고 긴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오르내리는 사람들로 정체가 발생한다. 하산 로프가 닳아 헤져 있다. 그 옆에 중간에 스프링을 끼워 놓은 로프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은 이용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압축된 스프링에 손가락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이 스프링 로프를 설치한 자들과 그들에게 비용을 지불한 공무원들은 한번이라도 사용자 입장을 생각해 본 것일까? 탁상행정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 욕이 나온다. 깊은 경사의 오르내림이 정말 지겹도록 반복된다. 곳곳에 안전시설이 부족하여 생명을 담보로 절벽 틈새를 뛰어 내려야 하는 곳도 곳곳에 있다. 혼자로는 힘이 부쳐 여자대장을 필두로 5명이 짝을 이루어 내려간다. 70대로 보이는 어르신이 앞에 가신다. 밧줄을 보면 “아이구 나 죽었네” 하신다. 그래도 잘 가신다. 고도계 시계를 차신 것으로 보아 베테랑이시다. 그분과 함께 100m 정도가 되어 보이는 수직 절벽을 밧줄에 의존하여 내려 오는데, 그분도 나도 마지막에 착지에 애를 먹었다. 오늘 일행 중에는 여성들도 많은데 이 길을 어이 내려 올런지 모르겠다. 내려 와서도 다시 긴 암릉을 올라야 한다. 씩씩한 여성대장도 이런 험한 산은 처음이라 한다.
< 상학봉 부근에서 / 상학봉에서 >
이제 상학봉이 바로 눈 앞에 있다. 회사에 전화를 한다. 불길한 예감은 적중하는 법, 예상대로 별일 아닌 것으로 생각했던 일이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다. 근본은 모두 오해와 커뮤니케이션 오류에서 발생한 일이다.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일련의 상황의 연속 속에서가 아니라 자기에게 유리한 단편적인 상황의 조합을 통해 일을 침소봉대하고 자기의 자존심만을 인정해 달라 한다. 참 아쉬운 상황이다. 문득 생각해 보니 산 길도 이리 험한데, 인생 길은 더 험한 것 같다. 산 길은 힘은 들지만 그래도 길이 보이고 걷고 나면 잊혀지고 추억이 되지만, 인간 사이의 벌어진 틈은 좀처럼 간극을 메우지 못하니 더욱 안타깝다.
< 상학봉에서 운흥리 >
하산 길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 청탑바위, 토끼봉를 거친다는 것 말고는 지도도 너무 두리뭉실하다. 초입부터 만만치 않다.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관음봉 능선 초입부터 고도는 850m-950m 수준인데 평지는 거의 없는 업다운이 매우 심하다는 것이다. 운흥리 하산 길은 거칠면서도 이제와는 달리 길도 희미하다. 낙엽이 벌써 두텁게 쌓여 있다. 한참을 내려서는데 이정표가 보인다. 운흥리 3.5km, 길 사정으로 보아서는 한 시간이 훨씬 넘을 것 같다. 암릉 하나를 넘으면 눈 앞에 또 하나가 보인다. 어르신이 말씀하신다. “저 봉우리는 우회하겠지”. 내가 말한다. “그럴리가요. 그 넘어 또 암봉이 있을 것 같은데요.” 가보면 안타깝게도 내 말이 옳았다. 하산 도중 만난 긴 나무 계단 길이 이루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편하게 느껴지니 나머지 길의 사정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 운흥리 하산 길의 전경 >
문흥리 3km 이정표에서 길이
이상하다(
< 에필로그 >
귀경 버스 안에서 문뜩 오늘 산행의 정서를 대변할 수 있는 문구 하나가 머리를 스친다. “처음 찾은 속리산의 멋진 암릉 위 풍광은, 험난한 길에 묻혀 빛이 바래다”. 오늘 산행은 서어동에서 문장대까지는 일반인에게도 무리가 없는 편한 길이었고, 문장대 정상 어귀에 평지 길이 있어 체감되는 난이도는 더 낮게 느껴졌다. 문장대는 인파로 먼 발치에서만 감상하였고, 이어지는 관음봉-묘봉-상학봉 암릉은 난이도도 심했지만 안전시설이 미비하여 큰 고생을 했다. 꼬인 회사 일만큼이나 내 산행도 험난한 하루였다.
속리산 서북능선 길은 공룡능선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V자 형태의 오르내림은 공룡능선보다 더 심했고, 운흥리로의 하산 길은 마등령에서 설악동 하산 길과 비견되는 길고 험한 길이었다. 오늘 산행은 길의 사정을 모르고 가는 산행에 대한 경각심을 확인시켜 준 교훈적인 산행으로 내 뇌리에 깊게 남을 것 같다. 배터리가 더 있어 하산 길에 GPS 궤적을 볼 수 있었다면, 이리 허무하게 길을 잃고 헤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7시간의 긴 길을 함께한 내 다리와 오랜만에 산에서의 존재가 확인된 내 손에 대해서도 감사의 말을 전한다. “니들이 참 수고가 많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교훈을 새긴다. , ‘산에서는 절대 급히 서두르지 말자. 그리고 조금 더 시간에 대해 너그러워지자’.
PS)
중국 고전 ‘안씨가훈’에 관한 글을 읽다가 “삼밭에 쑥은 굳이 붙들어 주지 않아도 곧게 자란다’, 蓬生麻中 不扶而直(봉생마중 불부이직) 라는 글귀를 한참이나 되새겨 본다, 오늘 부서에서 발생한 불미스러운 일에 대한 반성의 생각이 들어서다. 사람도 환경의 지배를 받는 생물이므로 좋은 환경이면 좋은 환경대로, 나쁜 환경이면 나쁜 환경대로 영향을 받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이유야 어쨌거나
나를 비롯한 중간 관리자가 제 역할을 못해 부서의 기강이 서지 않고 있나 보다. 사람이든 식물이든 자라는
환경이 중요한데, 그 환경을 만들지 못하는 것 같아 반성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