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 블록버스터의 탑 건. 토니 스콧 1944-2012.08.20
"리들리와 토니, 위대한 스콧 브라더스"
1. 토니 스콧과 리들리 스콧. 2. 리들리 스콧의 단편 영화 [소년과 자전거]에서 주인공을 맡은 17세의 토니 스콧.
토니 스콧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스레 그보다 7살 형인 리들리 스콧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큰형 프랭크가 있었지만, 토니는 둘째 형 리들리와 유독 친했다. 뛰어난 그림 솜씨를 지닌 리들리는 토니에겐 롤 모델과도 같았던 것. 토니 스콧은 이렇게 회상한다. "어린 시절 우린 늘 함께 게임을 하며 놀았다. 그리고 서로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한 자료를 경쟁적으로 스크랩했다."
이후 두 명 모두 영화감독이 되지만, 그들은 코엔 형제 같은 시스템의 형제 감독은 아니다. 코엔 형제가 꾸준히 공동 작업을 하고 있긴 하지만, 리들리와 토니는 프로듀싱 이외의 영역에선 공동 작업을 하지 않는다.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형의 경로를 그대로 밟았음에도, 비주얼에 대한 유전적 재능을 공유함에도, '영화감독'으로서 그들은 꽤 다른 길을 걸었던 셈이다.
1. BFI에서 단편영화를 연출하던, 20대 초반의 토니 스콧. 2. 토니의 단편영화인 [러빙 메모리]의 한 장면.
1944년 6월 21일 노스 이스트 잉글랜드에서 태어난 토니 스콧은, 형이 수석 졸업한 왕립예술학교(Royal College of Art)에 다닐 때만 해도 화가가 되려고 했다. 하지만 이후 (역시 형이 다녔던) 영국영화협회(BFI)에서 영화를 공부하며 [원 오브 더 미싱 One of the Missing](1969)과 [러빙 메모리 Loving Memory](1971) 등의 단편을 연출했다. 하지만 그의 첫 영화 경험은 감독이 아닌 배우였는데, 리들리 스콧이 1961년 BFI 시절에 만든 [
소년과 자전거]엔, 당시 17세였던 토니 스콧이 주인공을 맡아 출연한다.
BFI를 졸업한 후 토니 스콧은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었다. 이때 리들리는 RSA(Ridley Scott Associates)라는 광고 회사를 운영하며 한참 일손이 부족한 상태였고, 그는 재주 많은 동생을 꼬신다. 토니가 자동차광이라는 걸 떠올린 리들리. "괜히 BBC 같은 데 가지 말고 나한테 와라. 나와 일하면 1년 안에 페라리를 살 수 있다"는 유혹에 넘어간 토니는, 1970년대 초부터 1980년대 초까지 형과 함께 수천 편의 CF를 만들게 된다.
"할리우드의 탑 건이 되다"
1, 2. 토니 스콧의 첫 영화 [악마의 키스]. 특히 카트린느 드뇌브와 수전 서랜든의 레즈비언 신이 인상적이었다.
리들리 스콧이 [
결투자들](1977)로 칸영화제에서 황금카메라상을 수상하고, [
에이리언](1979)과 [
블레이드 러너](1982)를 만드는 동안 토니 스콧은 형의 CF 제작사인 RSA를 지키고 있었다. 물론 그에게도 상업 작품 연출의 기회는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이 합작한 TV 시리즈 [헨리 제임스의 소설들] 중 [벨트라피오의 저자](1976)를 연출하게 된 것. 제의가 들어왔을 때 누가 할지 리들리와 토니가 동전 던지기를 해서 토니가 연출하게 됐다고 하는데, 하지만 토니는 아직까지 '영화감독'은 아니었다.
토니 스콧이 할리우드로 갈 수 있었던 건, 형의 후광도 있었지만 당시 미국영화계에 불고 있던 이른바 '브리티쉬 인베이전'이 중요한 배경이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영국 출신의 CF 감독들이 할리우드에 진출하게 되는데, 리들리 스콧을 필두로 앨런 파커 감독은 [
페임](1980)과 [
버디](1984)를, 애드리언 라인 감독은 [
플래시댄스](1983)와 [
나인 하프 위크](1986)를 만들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당시 그들의 영화는 미국 관객들에게 일종의 '비주얼 쇼크'였고, 토니 스콧도 러브콜을 받게 된다.
1. 왼쪽부터 [탑 건] 현장의 돈 심슨과 제리 브룩하이머와 토니 스콧. 2. [탑 건] 현장의 토니 스콧 감독과 톰 크루즈.
처음 이야기가 오간 프로젝트는, 1994년이 되어서야 아일랜드의 닐 조던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는 [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존 카펜터 감독이 연출하게 되는 [
스타맨](1984)도, 제작 초반의 몇 달 동안은 토니 스콧의 손길이 닿은 작품이었다. 결국 그는 [
악마의 키스](1983)를 연출하게 되는데, 카트린느 드뇌브와 수전 서랜든과 데이비드 보위가 등장하는 섹슈얼한 뱀파이어 무비는 흥행은 물론 평단으로부터도 외면 받게 된다. 몇몇 장면에선 마치 향수 광고 같은 비주얼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BFI에서 동문수학했으며 최근엔 [
헬프](2011)를 촬영했던 스티븐 골드블랫의 뛰어난 솜씨와 함께, 토니 스콧의 화려한 미술 감각이 두드러지는 작품이었다.
토니 스콧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할리우드는 [
악마의 키스]를 싫어했다. 너무 예술영화 스타일이며 감독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다는 거다. 이 영화의 시사가 끝나자 영화사 주차장에 내 자리는 없어졌고, 그 후 2년을 쉬어야 했다." 결국 그는 광고계로 돌아가려 했지만, 이때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다. 그와 동년배인 제작자 돈 심슨(1943년생)과 제리 브룩하이머(1945년생)가 러브콜을 보낸 것. 그들은 [악마의 키스]의 광팬이었고, [
아메리칸 지골로](1980) [
캣 피플](1982) [
플래시댄스] [
비버리 힐스 캅](1984) 등을 제작하며 1980년대에 가장 '핫'한 프로듀서로 떠오르고 있었다.
1, 2. [탑 건]의 프로모션 컷. 1980년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이미지다.
리들리 스콧이 [
결투자들] 이후 [
에이리언]으로 구원 받았듯, 토니 스콧도 [
탑 건]으로 할리우드의 A급 액션 감독으로 단번에 도약했다. 비행기 조종사를 꿈꾸는 청춘들의 우정과 사랑을 담은 이 영화를 제안 받았을 때, 사실 토니 스콧은 조금은 어두운 느낌의 영화를 구상했다. 하지만 심슨과 브룩하이머의 기획 의도를 듣고 의견을 나누면서, 토니 스콧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선회했고 이 영화는 1986년 흥행 1위를 기록하며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시사 주간지 [타임]은 "파렴치한 방식으로 재미를 추구한 영화"라고 비난했지만, 토니 스콧은 [
탑 건]에서 아드레날린과 테스토스테론이 광적으로 휘몰아치는 맥시멈 파워 무비란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
악마의 키스]가 그랬듯, 이 영화도 플롯이나 스토리는 거의 생각나지 않지만, 특정 장면의 인상으로 관객에게 어필하는 작품이었고, 이것은 당시 심슨과 브룩하이머가 추구했던 상업영화의 스타일과 완전히 부합하는 것이었다. 한편 1년 전 리들리 스콧의 [
레전드](1985)로 흥행 참패를 겪었던 톰 크루즈는 토니 스콧의 [탑 건]으로 스타덤에 올랐고, 아직도 그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다.
"액션에서 스릴러로, 장인에서 거장으로"
당시 할리우드에서 돈 심슨과 제리 브룩하이머의 인정을 받으며 그들의 꾸준한 제안을 받는다는 사실은, 최고의 상업영화 감독이라는 걸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마틴 브레스트 감독을 기용해 엄청난 흥행을 기록한 [
비버리 힐스 캅]의 속편을 토니 스콧에게 맡긴다. 1984년 흥행 1위를 기록하며 북미 지역에서만 2억 3,476만 달러를 벌어들인 전편에 미치진 못했지만, [
비버리 힐스 캅 2](1987)는 그 해 흥행 3위를 기록하며 북미 지역에서 1억 5,367만 달러의 수익을 거두는 흥행을 기록한다. 리들리 스콧이 [
글래디에이터](2000)를 만들기 전까지, 1990년대까지 토니는 형을 능가하는 흥행사가 된 것이다.
사실 토니 스콧에게 [
비버리 힐스 캅 2]는 내키지 않는 프로젝트였다. 시나리오는 형편없었고, 속편이라는 점도 마음에 안 들었으며, 주인공 에디 머피와의 관계는 최악이었다. 하지만 [비버리 힐스 캅 2]가 토니에게 안겨준 진짜 '문제'는 다른 것이었다. 그는 이 영화에 출연한 덴마크 출신의 여배우 브리지트 닐슨과 사랑에 빠졌다. 당시 닐슨은 실베스터 스탤론의 아내였고(둘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토니 스콧도 유부남이었다. 그는 아내에게 닐슨과의 관계를 솔직하게 털어놓았고, 그 결과 결혼한 지 1년 만에 이혼하게 된다(이후 7년 동안 홀로 지내던 토니 스콧은, 1994년에 도나 윌슨과 결혼한다. 윌슨은 [
폭풍의 질주](1990) [
마지막 보이 스카웃](1991) 등 토니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한 여배우였다).
1. [리벤지]의 매들린 스토우와 케빈 코스트너. 2. [폭풍의 질주]의 톰 크루즈.
심슨-브룩하이머의 영역을 벗어난 토니 스콧은 [
리벤지](1990)에서 쓴맛을 본다. [
언터쳐블](1987) 이후 할리우드의 블루칩으로 부상한 케빈 코스트너가 주인공을 맡은 이 영화는, 스타일리시한 촬영과 앤서니 퀸의 명연기가 인상적이었지만, 흥행 성적은 전작인 [
비버리 힐스 캅 2]의 1/10 수준에 머물렀다. 게다가 노회한 제작자 레이 스타크는 편집실 문을 걸어 잠근 후 자기 마음대로 영화를 편집했고, 제작자의 손에서 난도질 당한 영화는 토니 스콧의 표현대로라면 "감독이 만든 영화와 무관한 영화"가 되었다. 그는 다시 심슨-브룩하이머의 품으로 돌아왔고, [
탑 건]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한 프로젝트인 [
폭풍의 질주](1990)를 가동시킨다.
톰 크루즈가 전투기 조종사에서 카 레이서로 옷만 갈아입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이 영화는, 시나리오도 없이 "톰 크루즈가 카레이싱을 한다"와 "그의 곁엔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라는 컨셉트 만으로 밀어붙인 영화. 매일 밤 로버트 타우니가 쓴 시나리오로 다음 날 촬영에 임했는데, 그 무모함에도 불구하고 8,267만 달러라는 나쁘지 않은 흥행 성적을 거두었으며, 톰 크루즈와 니콜 키드먼이 결혼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토니는 인터뷰에서 톰 크루즈를 "여자 끌어당기는 자석"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1. [폭풍의 질주] 현장에서. 왼쪽부터 토니 스콧, 돈 심슨(제작자), 로버트 타우니(작가), 제리 브룩하이머(제작자) 그리고 톰 크루즈. 2. [마지막 보이 스카웃]의 브루스 윌리스.
이어지는 [
마지막 보이 스카웃](1991)은 [
다이 하드 2](1990) 이후 네 편 연속 흥행 참패를 겪으며 급격한 하강세를 겪던 브루스 윌리스를 구원해준 영화다. 이 영화에 대해 토니 스콧은 아쉬움이 많았는데, [
리썰 웨폰] 시리즈로 주가를 올리던 쉐인 블랙의 시나리오는 토니가 할리우드에서 최초로 받았던 '퀄리티 있는 시나리오'였던 것. 제대로 된 시나리오 앞에서 토니는 오히려 당황했고, 영화를 완성한 후 "영화보다 시나리오가 낫다"고 인정했다. 한편 이 영화의 제작자는 [
프레데터] [
다이 하드] [리썰 웨폰] 등의 시리즈를 기획한 조엘 실버. 토니 스콧은 당대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명제작자들이 가장 탐냈던 감독이었던 셈이다.
이때까지도 토니 스콧은 철저하게 평단의 외면을 받는 감독이었다. 평론가들은 스콧 형제를 싸잡아서 "비주얼은 좋지만 주제 의식이나 깊이는 얄팍하다"고 매도했던 것. 그들은 할리우드에 고용된 '영국 용병'에 불과했다. 이때 시나리오를 들고 토니 스콧을 찾아온 사람은 바로 쿠엔틴 타란티노였다. 토니는 타란티노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기억한다. "그는 [
리벤지]와 [
폭풍의 질주]를 너무나 사랑한다고 했다. 나는 그가 '미친놈'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이건 빈말이 아니었다. 그는 토니 스콧에게 자신의 첫 시나리오를 맡기고 싶었고, [
트루 로맨스](1993)는 그렇게 탄생했으며, 이 영화부터 토니 스콧은 평단의 진지한 관심을 받게 된다.
1. [트루 로맨스]의 패트리샤 아퀘트와 크리스천 슬레이터. 2. [크림슨 타이드] 현장의 덴젤 워싱턴과 토니 스콧.
전작에 비해 매우 줄어든 1,300만 달러의 예산으로 만들어진 [
트루 로맨스]는 크리스천 슬레이터, 패트리샤 아퀘트, 데니스 호퍼, 크리스토퍼 워큰, 게리 올드먼, 브래트 피트, 톰 사이즈모어, 크리스 펜, 발 킬머, 제임스 갠돌피니, 새뮤얼 L. 잭슨 등 컬트 배우들이 총집합한, 지금으로선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캐스팅 라인의 영화. 토니 스콧은 엔딩을 제외하곤 타란티노의 시나리오를 그대로 살렸고, 완성된 영화에 타란티노는 크게 만족했다([
내츄럴 본 킬러](1994)의 올리버 스톤이 자신의 시나리오를 망쳤다며 노발대발했던 것과 판이하게 다른 반응이다). 흥미로운 건 이 영화의 해피 엔딩에 대해 당시 공화당의 밥 돌 상원의원이 언급했다는 것. 밥 돌은 두 주인공은 범죄자이며, 그들이 행복한 결말을 맺어선 안 된다고 비판했다.
[
컷스로트 아일랜드](1995) 연출 제안을 거절한 토니 스콧은, 다시 심슨-브룩하이머와 만나 잠수함 영화 [
크림슨 타이드](1995)를 만든다. 스탠리 큐브릭의 걸작 [
닥터 스트레인지러브](1964)를 폐소공포증 버전으로 만들었다는 평을 받기도 한 이 영화는, 토니 스콧이 비평적 성과와 함께 흥행에도 성공한 첫 작품. 이 작품 이후 그는 스릴러 장르로 조금씩 방향을 돌리는데, 이것은 그의 연출력이 진일보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 영화가 더욱 의미 있는 건, 덴젤 워싱턴과의 작업이 시작되었기 때문. 이후 워싱턴은 [
언스토퍼블](2010)까지 총 다섯 편의 영화에서 토니와 작업했다.
"액션의 완성. 멈추지 않는 역동성"
1. [더 팬] 현장의 토니 스콧. 2. [더 팬]의 로버트 드 니로와 웨슬리 스나입스.
토니 스콧의 영화는 1990년대 중반에 그 스타일이 완성된다. '아드레날린'과 '테스토스테론'은 그의 영화를 설명하는 키워드가 되었으며, 액션 장르에서 '토니 스콧'이라는 이름은 확실한 연상 작용을 일으키는 그 무엇이었다. 그의 영화는 할리우드에 서서히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데, 그 가장 훌륭한 계승자는 역시 심슨-브룩하이머에 의해 발탁된 감독, 바로 마이클 베이였다. 그는 초기 흥행작인 [
나쁜 녀석들](1995)과 [
더 록](1996)을 만들면서 "거의 모든 장면을 토니 스콧에게서 영향 받았다"고 한 인터뷰에서 고백했다.
[
크림슨 타이드]로 성공을 거둔 후 그는, 흥행적으로는 약간 들쑥날쑥하지만 장르적으로는 일관성을 보여주었다. 스릴러를 기본으로, 다른 장르적 요소를 결합한 작품들을 꾸준히 만든 것. 그런 면에서 [
더 팬](1996)은 스포츠 영화와 스릴러의 결합인데, 흥행뿐만 아니라 작품의 완성도에서도 아쉬움을 남기는 작품이며, [크림슨 타이드]로 자신감을 얻었던 토니 스콧은 이 작품으로 다시 의기 소침한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1.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현장의 스콧 감독과 윌 스미스. 2. [스파이 게임] 현장의 로버트 레드포드와 브래드 피트와 스콧 감독.
그렇다면 [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1998)는 반등의 기회였다. 도청에 대한 범죄 스릴러인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
컨버세이션](1974)을 연상시키는 이 영화는, [컨버세이션]의 주연이었던 진 해크먼이 출연하고 윌 스미스가 주인공을 맡았는데, 액션 스릴러 장르에선 당대 할리우드에서 토니 스콧을 따라올 만한 사람이 없다는 걸 증명한 작품이다. [
비버리 힐스 캅 2] 이후 거의 10년 만에 북미 지역에서 1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거두었다. 로버트 레드포드와 브래드 피트의 [
스파이 게임](2001)은 나쁘지 않은 흥행과 함께 평단의 호의적 반응을 얻어낸 작품.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와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 스파이 액션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시기 리들리 스콧과 토니 스콧이 비슷한 테마를 지닌 프로젝트를 동시에 제안 받았다는 것. 멕시코의 전설적인 혁명가 판초 비야에 대한 영화인데, 형제는 조심스럽게 각자의 프로젝트를 진행했지만, 결국은 둘 다 무산되었다. 이후 토니 스콧의 말에 의하면, 사실상 두 영화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작품이었다고 하는데 그는 "판초 비야라는 이름이 들어갈 뿐, 형과 나는 완전히 다른 영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형의 판초 비야 영화가 [
리썰 웨폰] 스타일이라면, 내 영화는 [
아라비아의 로렌스]에 가까웠다." 한편 토니 스콧의 판초 비야 프로젝트는 타란티노가 시나리오를 썼다.
1. [맨 온 파이어]의 다코타 패닝과 덴젤 워싱턴. 2. [데자뷰] 현장의 제작자 제리 브룩하이머와 토니 스콧.
이후 토니 스콧은 [
크림슨 타이드] 때 처음 만났던 덴젤 워싱턴과 일련의 작품을 이어간다. [
맨 온 파이어](2004) [
데자뷰](2006) [
펠햄 123](2009) 그리고 결국 토니 스콧의 유작이 된 [
언스토퍼블](2010). 중간에 키이라 나이틀리, 미키 루크와 함께 했던 [
도미노](2005)가 있긴 했지만, 토니 스콧의 최근 필모그래피는 덴젤 워싱턴과의 동행이었던 셈. [맨 온 파이어]를 제외하곤 북미 시장에서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긴 하지만(월드 마켓을 통해 손익분기점을 넘었음), 그래도 나름 소박한 흥행과 함께 평단으로부터도 장르 영화로서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다.
몇몇 프로젝트는 토니 스콧의 죽음으로 영원히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월터 힐 감독의 [
워리어](1979)를 리메이크 하는 것. 전작의 뉴욕에서 LA로 무대를 옮겨, 실제 갱스터들도 출연시키는 방식을 고려했는데 [
펠햄 123]이 먼저 들어가면서 미뤄졌던 계획이다. 한때 니콜 키드먼이 출연할 예정이었던 [
엠마의 전쟁]도 이젠 불가능한 프로젝트가 되었다.
1. [펠햄 123] 현장의 토니 스콧. 2. [도미노] 현장의 미키 루크와 토니 스콧.
이젠 유작이 된 [
언스토퍼블]의, 말 그대로 '막을 수 없는' 기세로 1980년대부터 우직하게 할리우드 장르 영화의 길을 걸었던 토니 스콧. 그는 결코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오르거나, 칸이나 베니스 같은 영화제에서 기립박수를 받는 감독은 아니었지만, 관객이 즐거워하는 영화가 무엇인지 알았고 그것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만들어낼 수 있었던 장인이었다. 역동적이면서도 툭툭 끊어지는 듯한 독특한 편집 감각은 토니 스콧 영화만의 힘이었으며, 진부한 소재나 주제를 다루더라도 장르의 틀 안에서 흥미진진한 영화로 만들어냈다. 번쩍이는 금속성에 매혹된 듯한, 풍부한 비주얼과 파격적인 카메라워크와 화려한 미술 감각이 결합된 그의 영화는 1980~90년대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어떤 전형이었고, 관객들은 '토니 스콧'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영화를 믿고 선택할 수 있었다.
형인 리들리가 강한 여성 캐릭터를 선호했다면, 토니 스콧의 세계는 굳건한 남성성이 지키고 있었다. 톰 크루즈, 에디 머피, 케빈 코스트너, 브루스 윌리스, 브래드 피트, 덴젤 워싱턴, 웨슬리 스나입스 등 당대의 굵직한 남성 스타들은 토니 스콧 영화의 단골 손님. 토니 스콧은 종종 남성성을 거의 아름다움의 차원으로 고양시켜 보여주기도 했으며(그런 이유로 [
탑 건] 같은 영화를 동성애 코드로 읽는 사람도 있었다), 남성적인 힘의 매력을 보여주었다.
1. 그의 유작이 된 [언스토퍼블]의 크리스 파인과 덴젤 워싱턴. 2. [언스토퍼블] 시사회에 참석한 그의 가족. 아내 도나와 쌍둥이 아들과 함께 했다.
그럼에도 그의 영화가 마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은, 토니 스콧의 남성 영화엔 묘한 사춘기적 판타지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초기작들에서 그런 판타지는 잘 나타난다. [
탑 건]과 [
폭풍의 질주]에서 전투기 조종사와 카 레이서가 된 톰 크루즈가 보여주는 '겉멋'(혹은 간지?)은 남성들에게 존재하는 소년적인 심성을 강하게 자극한다. 즉 영원히 철들지 않는 존재인 남성들에게 있어, [탑 건] 같은 영화는 완벽한 판타지의 덩어리인 것이다(게다가 곁엔 항상 아름다운 여인이 있다!).
하지만 리들리와 토니가 가장 달랐던 점은, 캐릭터의 성별이 아니라 그 세계관이었다. 리들리에게 허무주의와 염세주의의 경향이 강하다면, 토니에겐 생동감 넘치는 낙관주의가 있었다. 그래서 토니는 리들리의 [
델마와 루이스](1993)처럼 두 주인공이 차를 몰고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엔딩의 영화는 만들지 못한다. [
트루 로맨스]의 엔딩처럼, 영화 내내 처절하고 비장하고 피 흘리다가도 남녀 주인공은 해변에서 귀여운 아들(게다가 아들 이름이 '엘비스'라니!)과 함께 노을 속에서 행복한 엔딩을 맞이해야 한다.
1. [트루 로맨스]의 엔딩. 그의 낙관주의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장면이다. 2. 토니 스콧의 모습. 스태프들에게 직접 친필로 쓴 편지와 선물을 전하는,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였던 그는 언제나 평범한 모자를 쓰고 현장에 나타나는 수수한 사람이었다.
지난 8월 19일(미국 시간),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토니 스콧. 일부 외신에 의하면 수술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의 뇌 종양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었고, 그것에서 벗어나는 길로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고 한다. 아직 정확한 검시가 이뤄지진 않았고, 유서 내용이 밝혀지진 않았지만, 그가 겪었던 고통은 죽음을 선택할 정도로 심각했던 듯. 그렇게 그는, 다리 위에서 거대한 태평양의 물결 위로 몸을 던졌고, 이제 우린 그가 만든 16편의 영화를 하나하나 떠올리며 '토니 스콧'이라는 이름을 추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