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량(崔亮)은 경주(慶州) 사람으로,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하였으며, 글짓기[屬文]에 능하였다. 광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공문박사(攻文博士)가 되었고, 성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를〉 불러 사우(師友)로 삼았다.
〈성종이〉 왕위에 오르자 마침내 발탁하여 등용되니, 인망(人望)에 매우 합하였다. 여러 차례 승진하여 좌산기상시 참지정사 겸 사위경(左散騎常侍 叅知政事 兼司衛卿)이 되었으나, 병 때문에 해직되었다.
얼마 뒤 왕이 좌우 측근들에게 이르기를, “최량이 100일의 병가[告]를 받게 되자 선관어사[御事選官]가 규정에 따라 해직을 요청하므로, 내가 이미 허락하였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최량은 내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충정을 다해 부족한 나[眇昧]를 바로잡아주었다.
그 공로를 생각하니 감히 잊을 수가 없다.”라고 하며, 곧 복직을 명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하시랑(門下侍郞)으로 임명하였으며, 내사시랑 겸 민관어사 동내사문하평장사 감수국사(內史侍郞 兼民官御事 同內史門下平章事 監修國史)로 승진시켰다.
성종 14년(995)에 죽으니, 왕이 슬피 추모하며 태자태사(太子太師)로 추증하였고, 부의로 쌀 300석, 보리 200석, 뇌원다(腦原茶) 1,000각(角)을 보냈으며, 예법대로 그를 장사지냈다. 시호는 광빈(匡彬)이라 하였다. 뒤에 성종의 묘정에 배향하였고, 여러 차례 추증하여 태위 태보 태사 내사령 삼중대광(太尉 太保 太師 內史令 三重大匡)이 되었다.
아들은 최원신(崔元信)·최원좌(崔元佐)·최원억(崔元億)·최원위(崔元偉)·최원간(崔元偘)·최원보(崔元保)·최원준(崔元俊)이다. 최원신은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호부시랑 예빈경(戶部侍郞 禮賓卿)을 역임하였다. 현종 때 이수화(李守和)와 함께 송에 신년을 하례하러 갔는데, 귀국하자 사행을 받드는 데 있어서 욕보이게 했다고 하여 유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