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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평택 85코스 제1부
노양리마을회관-신대교차로-평택국제대교-
아산호호반길-신왕포구-신왕1리마두마을-
여선재-마안산등산로-대안4리구진마을
20240508
1.코스 소개
서해랑길 85코스는 길이 22.3km, 소요시간 7시간 30분, 난도 보통이다. 두루누비에서는, 평택호의 맑은 물에 깃든 역사와 문화를 만날 수 있는 코스라고 소개하며, 관광포인트는 다양한 조형물과 포토존으로 조성된 호반공원 '평택호예술공원'과 전통예술의 육성을 목적으로 개관한 '한국소리터'라고 안내한다. 시점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노양리 산21-9(구룡교 북단 동측 정자 옆)이고, 종점은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만호리 570-3(평택항국제여객터미널 앞 삼거리)이다. 주요 지점과 경로는, 노양마을회관정류장 1.5Km - 평택국제대교 8.9Km - 평택호예술공원 6.4Km - 신영2리마을회관 5.9Km - 평택항 삼거리이다.
서해랑길 85코스는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의 2개 리(里)(노양리, 신대리), 현덕면의 6개 里(덕목리, 신왕리, 대안리, 기산리, 권관리, 장수리), 포승읍의 3개 리(里)(신영리, 희곡리, 만호리)를 통과한다. 평택시 2개의 읍과 1개의 면, 전체 11개 리(里) 지역을 통과하는 먼 거리이다. 아름다운 아산호와 평택호 관광단지의 예술공원, 그리고 여러 조형물들에 가슴이 요동쳤다. 탁 트인 아산호 풍경, 그 건너편의 아산시를 병풍처럼 두른 산봉들, 예술공원의 설치 미술과 여러 조형물을 살피고 감상하는 데 시간은 쏜살같이 흐른다. 두루누비에서 소개하는 '한국소리터' 관람은 제한 시간 안에서는 관람하기가 어렵다. 대안리와 기산리, 장수리와 신영리의 드넓은 간척농지와 들녘의 풍경은 인위적인 관광단지와 예술공원 조형물과는 다른 인간의 원초적 마음의 고향처럼 다가왔다. 그리고 포승읍 희곡리 일대에 들어선 경기 경제 자유구역 포승지구와 만호리 평택항의 글로벌 물류 중심 기지는 평택의 눈부신 발달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름다운 들길과 물길, 산길을 걷고 눈부신 산업 발전의 현장을 살핀 85코스 탐방을 3부로 나누어 기록한다.
2-1.평택섶길
제1부 : 서해랑길 85코스 탐방을 위해 평택시 팽성읍 노양리 시작 지점에 왔다. 2주 전 이곳에서 84코스를 역방향으로 출발하였기에 이곳은 낯익다. 그렇지만 그때의 기분과 감정은 다르다. 그때는 봄비가 내리고 날씨가 잔뜩 찌푸린데다 우산을 날리는 바람이 불었다. 우울한 마음을 털어내며 아산호 남쪽 호반길을 걸었다. 이번에는 어제까지 비가 내린 덕분에 쾌청한 날씨가 더 맑게 투명하다. 투명한 날씨에 마음은 훌쩍훌쩍 뛰어오른다.
서해랑길 85코스는 경기도에서 개통한 경기둘레길 중 45코스, 평택시에서 개통한 평택섶길 중 장서방네노을길, 비단길, 명상길, 원효길과 동행한다. 그 중 장서방네노을길은 팽성읍 신대리와 노양리, 본정리 지역을 순환하는 짧은 거리여서 서해랑길은 시작 지점에서 장서방네노을길과 만나서 잠시 동행하다가 신대교차로 위에서 헤어진다. 그 지점에서 서해랑길은 경기둘레길 45코스와 평택섶길 비단길과 함께 만나 동행하다가 현덕면 권관리 평택호예술공원에서 비단길과는 헤어지고 경기둘레길 45코스와는 포승읍 만호리 평택항까지 동행한다. 평택섶길 명상길은 현덕면 신왕리 지역을 순환하는 코스인데, 서해랑길은 아산호 북쪽 호반에 조성된 평택자전거길 신왕2리 지역에서 만나 신왕포구를 지나 신왕1리 마두마을에서 작별한다. 그리고 평택섶길 원효길과는 비단길이 끝나는 평택호 예술공원에서 만나 평택항까지 동행하며 서해랑길 86코스 '수도사'까지도 동행한다.
섶길이 무엇일까? 그리고 평택섶길은 어떤 길인가? 궁금하여 알아보았다. 섶은 '한복의 저고리나 두루마기 따위의 깃 아래쪽에 달린 길쭉한 헝겊'을 말하며, '옷섶을 여미다'라는 관용적 표현으로 많이 쓰인다. 그래서 섶길은 좁고 작은 길, 오솔길을 의미한다고 한다. 평택의 정통 서예가(書藝家) 송정(松汀) 박석준 선생이 '평택숲길'에 대하여 얘기한 것을 요약해 보았다. "우리말 '섶길'에서 '섶'이란 한복의 깃 옆에 붙어 있는 작은 조각의 명칭이다. '강섶길'은 강변에 나있는 작은 길, '풀섶길'은 풀밭 사이로 난 길, '푸섶길'은 풀과 나무가 우거진 사잇길을 말한다. 푸섶은, 수풀(樹,草)의 경기도 방언이다. 그래서 '섶길'이란 중심이 아닌 변의 뜻을 가진 길이다. 우리 지역의 알려지지 않은 좋은 경관과 훌륭한 장소를 감상하며 걸을 수 있는 길을 발굴, 개발하여 시민들에게 알리는 작업은 우리 지역에 꼭 필요한 일이다."
이렇게 해서 평택섶길이 조성되었으며, 평택시에서는 평택섶길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평택섶길은 평택을 둘러보며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평택의 아름다움을 찾아볼 수 있는 길입니다. 물길, 산길, 마을길, 논밭길, 과수원길을 지나는 총16개 코스, 총연장 약 200km, 오백리로 이어지는 평택섶길에는 우리의 문화, 역사가 깃들어 있습니다. 평택섶길은 자연과 함께해 온 평택사람들의 생활이 숨쉬는 살아있는 박물관이며 미술관입니다." 여기 소개하는 내용은 평택섶길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걷는 모든 길은 이런 의미를 담고 있다. 오늘날 대중들의 인기가 높은 도보여행이 참다운 걷기가 되기 위해서는 걷는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배우는 인문지리적 탐방이 되어야 할 것이다.
2-2.아산호 호반에 찔레꽃 향기는 날리는데
이제 출발이다. 실제적 탐방은 탐방 전에 익힌 탐방길의 지형도와 관념적인 먹물과는 전혀 다른 체험을 준다. 서해랑길은 계양로를 따라 평택섶길 중 '장서방네노을길'과 동행한다. 장서방네노을길은 근현대 계양의 정서와 한을 담은 역사문화 이야기길로 팽성읍 도두리 출신 정태춘 가수의 노래 '장서방네 노을'의 배경이 되는 곳이라고 한다. 잠시 동행하지만 아침노을은 지났고 저녁노을은 멀었다. 안성천변의 삶, 미군 평택 기지 건설로 떠나는 사람들"당신의 고단한 삶에 바람조차 설운 날/ 먼 산에는 단풍 지고 바닷물도 차더이다/ 서편 가득 타오르는 노을 빛에 겨운/ 님의 가슴 내가 안고 육자배기나 할까요/ 비바람에 거친 세월도 님의 품에 묻고/ 여러 십년을 한결같이 눌 바라고 기다리오/ 기다리다 맺힌 한은 무엇으로 풀으요/ 저문 언덕에 해도 지면 밤 벌레나 될까요// 어찌하리 어찌하리 버림 받은 그 긴 세월/ 동구 아래 저녁 마을엔 연기만 피어나는데/ 아 모두 떠나가 버리고/ 해 지는 고향으로 돌아올 줄 모르네/ 솔밭길로 야산 넘어 갯바람은 불고/ 님의 얼굴 노을빛에 취한 듯이 붉은데/ 굽은 허리 곧추세우고 뒷짐지고 서면/ 바람에 부푼 황포 돛대 오늘 다시 보오리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되돌리기 비나이다/ 가슴 치며 통곡해도 속절없는 그 세월을/ 아, 모두 떠나가 버리고/ 기다리는 님에게로 돌아올 줄 모르네/ 당신의 고단한 삶에 노을빛이 들고/ 꼬부라진 동구길에 풀벌레만 우는데/ 저녁 해에 긴 그림자도 님의 뜻만 같이/ 흔들리다 멀어지다 어둠 속에 깃드는데 - 정태춘의 '장서방네 노을'.
'장서방네 노을' 노래는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장서방의 기다리는 마음을 노래한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갔을까? 고향을 떠나가는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여기에 답변하는 '애고, 도솔천아' 노래는 '장서방네 노을' 노래와 짝을 이루는 노래이다. 이 노래에 고향을 떠나는 마음이 나타난다. 노래는 이렇게 시작된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선말고개 넘어간다/ 자갈길에 비틀대며 간다/ 도두리벌 뿌리치고 먼데 찾아 나는 간다/ 정든 고향 다시 또 보랴" 선말고개를 넘어 도두리벌을 뿌리치고 먼 데, 도솔천을 찾아간다. 이 노래에 등장하는 선말 고개, 도두리벌, 선말산, 아리랑 고개, 보리원 등의 지명은 정태춘 가수의 태생지 팽성읍 도두리 지역의 지명이라고 한다.
장서방네노을길을 따라가는 길, 안성천 아산호는 드넓게 서쪽에 펼쳐지고 아름다운 아산고가 아치교가 흰색으로 빛난다. 저 북쪽 방향으로 서해랑길 85코스는 이어진다. 신대교차로 가는 언덕길에 아카시아꽃과 찔레꽃이 하얗게 피어 향기를 날린다. 순결한 찔레꽃 흰 빛과 향기가 아카시아의 그것보다 길손에게는 더 좋다. 두 대상의 비교는 그렇지만 아카시아와 찔레는 주체적인 특성으로 각각 빛난다. 아카시꽃이 높은 공중에서 쌀튀밥 알들을 주렁주렁 달고서 향기를 날린다면, 찔레꽃은 낮은 키에 흰나비 같은 꽃잎을 반짝이며 향기를 날린다. 아카시꽃은 동요 '과수원길'에서 아름답게 노래된다. "동구밖 과수원길 아카시아꽃이 활짝 폈네/ 하아얀 꽃 이파리 눈송이처럼 날리네/ 향긋한 꽃냄새가 실바람 타고 솔 솔/ 둘이서 말이 없네 얼굴 마주보며 쌩긋/ 아카시아꽃 하얗게 핀 먼 옛날의 과수원길." (박화목/ 작사, 김공선/ 작곡, 1972년) 찔레꽃은 이연실의 노래 '찔레꽃'에서 슬픔의 눈물로 호소한다. "엄마 일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가만히 따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이연실/ 개사, 박태준/ 작곡, 1972년. 원시는 이원수의 동시 '찔레꽃') 두 노래가 아침 햇빛에 눈물로 글썽인다.
지방도 제313호선 광덕계양로의 평택국제대교를 건넌다. 이 다리에서 북쪽과 동쪽 방향이 열려 있고, 남쪽과 서쪽 방향은 다리 난간에 의해 시야를 가로막는다. 동쪽에는 팽성읍 신대리 망해산이 조망되고, 그 북동쪽에 도두리와 대추리가 가늠된다. 팽성읍 도두리(棹頭里)는 안성천 동쪽에 자리하여 도두리벌 초입에 있고, 그 안쪽에 미군기지가 있는 대추리가 펼쳐져 있다. 북쪽에는 안성천 위를 가로지르는 국도 제43호선 세종평택로 평택대교가 동남쪽 팽성읍 도두리와 서북쪽 안중읍 삼정리를 잇는다. 안성천은 지난날의 역사를 끊임없이 들추어 주고 현재의 삶의 현장을 보여주며 유유히 흐른다. 아침 햇빛은 눈물처럼 번지는 강물을 은빛으로 반사한다.
2-3.아름다운 아산호 풍경과 역사의 상흔
아산호는 아름답다. 아산호 남쪽 아산시에서 바라보아도 아름답고, 아산호 북쪽 평택시에서 바라보아도 역시 아름답다. 그런데 아산호의 평택시 호반이 아산시 호반보다 더 높아서인지 평택시 호반에서 아산호를 바라보니, 좀더 높은 곳에서 내려보는 감각이 일어난다. 그래서 더 넓어 보이고 환하게 트여 보인다. 그것은 감각의 차이일 것이다. 민물가마우지 두 마리가 아산호의 고기잡이 설치물에 올라앉아 두리번거리고 있다. 겨울철 우리나라에 찾아오는 철새인 민물가마우지가 기후 변화로 인해 텃새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문제는 이들이 물고기를 닥치는 대로 잡아먹고 산성이 많은 배설물을 배설하여, 어민들의 생활을 어렵게 한다고 한다. 그래서 가마우지가 유해조수로 지정되었다. 불쌍한 가마우지, 아산호에서 너희는 보호새가 아닌 포획의 대상이다. 어디로 가야 할까? 이제는 이곳이 고향인데, 다시 어디로 떠나야 할까? 고향 떠나는 사람들의 아픔이 네게서 느껴진다.
아산호 평택 지역 호반길은 평택자전거길이다. 이 자전거길을 따라가며 물과 산과 들 풍경을 조망한다. 아산호 호면은 푸르게 넓고 아산호 건너편 아산 지역 영인면과 인주면 지역의 산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그 아래 들녘과 호수를 감싸고 있다. 아산호 북쪽 평택 호반에는 나즈막한 산들 사이에 마을이 자리하고 들녘이 펼쳐져 있다. 호반길 가에는 이팝나무들이 흰 이팝꽃들을 날리며 줄지어 서있다. 길고 가느다란 흰 꽃잎들이 흰 머리카락을 펄럭이듯 바람에 나풀거린다. 이 풍경은 아산호 호반길의 한 풍경으로 길손의 마음을 흔든다. 이 길을 따라가며 무엇을 해야 할까? 고요한 명상의 즐거움에 빠져야 한다. 그래서 평택섶길 명상길이라 명명된 것 같다.
신왕2리 신왕2 배수문 앞쪽에 옛 신왕포구 나루터를 알리는 흰 등대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이 신왕포 나루터 지역으로 예전에 주막들이 있었고 파시(波市) 때에는 기생을 둔 술집이 즐비하였다고 한다. 신왕포구 나루터 조형물 흰 등대를 지나 신왕1리 지역으로 나아가면 풍경이 아산호 서쪽으로 활짝 열린다. 아름다운 흰 색의 아산고가 아치교가 안성천 하구 아산호를 가로지르고, 아산시 지역의 명산 고용산, 영인산, 입암산이 병풍을 두르고 아산만방조제 남단 언덕에 공세리성당이 서 있다. 탐방한 서해랑길 84코스의 탐방길이 눈앞에서 춤을 춘다. 눈을 아산호 북쪽 호반으로 돌리면, 망해대산으로 불렸던 마안산이 말머리(馬頭)를 안성천으로 내리벋고, 광덕산이라 불렸던 고등산이 마두 들녘을 내려보면서 말안장 같은 부드러운 능선을 서쪽으로 이어간다.
이 아름다운 풍경 속에 이야기가 흐른다. 아산시 들녘과 산줄기, 평택시 들녘과 산줄기 둘 사이에서 아산호 호면(湖面)은 역사의 표정을 이렇게 들려준다. "올해 5월 11일이 갑오농민전쟁 130주년이란다. 130년 전 조선 정부가 청나라 정부에 갑오농민군을 물리칠 청나라 군대를 요청하였지. 청나라 군대는 1894년 6월 9일 안성천 하구의 아산시 영인면 백석포리에 도착하여 44일 동안 주둔하였었지. 이후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이 청군을 격파하여 승리한 뒤 일본군은 청군이 주둔했던 백석포리로 들어와 승전비를 세웠단 말이야." 그 표정이 일그러지는 듯, 어두워지는 듯,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호면이 검푸르게 일렁인다. 아산호 건너편 아산시 영인면 백석포리가 원랑산 오른쪽에 가늠되고, 서해선의 아산고가교가 백석포리 들녘 위를 가로지르고 있다.
2-4.여선재의 고요미와 구진마을 느티나무의 우아미
고등산 산줄기에 감싸인 신왕1리 들녘 농로 말머리 갈림목에서 동행한 평택섶길 명상길과 작별한다. 안녕! 서해랑길은 아직 외롭지 않다. 평택섶길 비단길과 경기둘레길 45코스가 서해랑길의 길동무가 되어 주고 있다. 현덕로를 따라 신왕1리 지역 마안산 동쪽 기슭을 올라가면 카페&갤러리 여선재가 나온다. 여선재가 뭐지? 여선재는 餘禪齋. 뜻은 '여유로움餘이 남아 풍요로움을 얻고, 고요함禪이 넘쳐 평온을 찾는다.'라고 한다. 자연예술가 김석환씨가 아내와 함께 4년에 걸친 공사 끝에 2007년에 완공한 나비집의 당호(堂號)가 여선재(餘禪齋)이다. 나비 지붕을 한 여선재는 나비가 꽃에 앉아 명상하듯 여유롭고 고요한 삶을 지향하는 철학을 나타낸다. 위쪽에서 여선재 지붕을 내려보아야 아름다운 나비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현덕로 고갯마루는 현덕면 신왕리와 대안리의 경계를 이룬다. 고갯마루에서 마안산 등산로를 따라오른다. 가파르지는 않지만 심장과 무릎이 약하여 오르막길은 힘들다. 능선에서 아산호 방향으로 활짝 열리지 않고 잔쯤만 열리고 북쪽 대안리 마을 방향으로는 숲에 가려 있다. 정월 보름날 달맞이를 하는 산이라서 망월대산으로 불리다가 이후 말안장을 닮아서 마안산이라 바뀐 이 산에 아산호를 활짝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었으면 한다. 대안4리 마을로 내려가는 곳에 쉼터정자가 있지만 풍경 조망은 열리지 않는다. 더 높이 올리면 괜찮을 것도 같다.
대안4리 마을은 구진마을이라 불린다. 간척되기 전에는 마을 앞 포구에 갈매기와 기러기가 많이 날아서 이 포구를 갈매기 나루라는 구진(鷗津) 또는 기러기 나루라는 홍진(鴻津)으로 불렀다고한다. 그래서 마을이 갈매기나루 마을 ‘구진(鷗津)마을'이 되었다. 구진마을로 들어서니 눈길을 끈 것은 대안4리 회관 앞의 느티나무다. 수령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노거수인 것 같다. 그런데 푸른 잎이 무성하며 나무 모습이 아주 품위가 있고 그윽하다. 아름답게 나이드신 어르신의 건강한 모습처럼 우아하다. 느티나무 아래에는 2017년에 세운 쉼터정자가 있다. 길동무와 함께 그윽한 바람을 일으키는 느티나무 아래 쉼터정자에서 요기를 우아하게 나누었다. 이 나무 아래서는 누구나 우아한 아름다움으로 꽃피는 것이 분명하다.
3.탐방과정
전체 탐방 거리 : 23.1km 중 8.12km
전체 소요 시간 : 6시간 13분 중 2시간 26분
위쪽에 둔포천을 가로지르는 세종평택로의 신둔포천교가 보인다. 그 아래에 구룡교가 있으며, 서해랑길 84코스는 구룡교를 건너 이곳에서 마치게 된다. 노양1리 구룡교 아래는 예전에 경양포구가 있었다고 한다. 둔포천은 충남 아산시 둔포면 신남리와 경기 평택시 팽성읍 노양리 사이를 흘러 안성천에 합류한다. 쉼터정자에 '山高水長' 현판이 걸려 있다.
'山高水長(산고수장)'은 송나라의 범중엄이 후한(後漢) 때의 은사(隱士)인 엄광(嚴光)을 기리며 한 말로, 산처럼 높고 물처럼 장구하다는 뜻으로 고결한 사람의 인품이 오래도록 존경받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구름 낀 산이 푸르고 강물은 깊고 넓도다. 선생의 유풍은 산처럼 높고 저 물처럼 장구하리라.(雲山蒼蒼 江水泱泱 先生之風 山高水長, 운산창창 강수앙앙 선생지풍 산고수장)
쉼터정자 기둥에 서해랑길 85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달려 있다. 쉼터정자 입구 오른쪽에 '미생지신(尾生之信)' 현판이 걸려 있다.
'미생지신(尾生之信)'은 신의가 두터운 것을 뜻하거나, 우직하여 융통성이 없음을 뜻하는 말로 각각 상반된 뜻을 보여 준다. 춘추시대(春秋時代) 노(魯) 나라 사람 미생(尾生)이 여인과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장대비가 쏟아져 개울물이 넘쳐도 다리 기둥을 부둥켜 안고 여인을 기다리다가 물에 떠내려가 죽었다고 한다. 미생은 신의 있는 사람의 본보기일까? 약속만을 굳게 지키는 융통성이 없는 사람일까? 믿음을 우직하게 지켜야 하느냐, 상황에 따라 융통성 있게 대처하느냐는 사람의 가치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지만, 믿음과 신뢰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서해랑길 평택 85코스 안내도 앞에서 출발하여 계양로를 따라 평택국제대교 방향으로 북진한다.
서해랑길 85코스는 경기둘레길 45코스, 평택섶길의 장서방네노을길, 명상길, 비단길, 혜초길과 동행한다. 거리 22.3km, 소요시간 7시간 30분, 난도 보통이다. 안내트레킹팀에서는 85코스 탐방에 7시간을 준다.
서해랑길 85코스 탐방을 출발하며 서해랑길 85코스 안내도와 함께 기념한다.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노양리 구룡교 북단 서쪽의 쉼터정자 옆에 서해랑길 85코스 안내판과 자전거 거치대가 설치되어 있다. 정자에 '山高水長' 현판이 붙어 있다. 평택섶길 장서방네노을길은 신대2리 버스 종점에서 출발하여 위쪽의 노양1리마을회관을 거쳐 순환하는 길이다. 평택섶길 2-1코스 '장서방네노을길' 이름은 정태춘의 노래 '장서방네 노을'에서 따왔다.
계양로 남서쪽 바로 옆에 노양리 계양 낚시터가 있으며 서쪽 멀리 아산호를 가로지르는 서해선의 아산고가교가 보인다.
노양리마을회관 버스정류소 삼거리에서 왼쪽은 계양낚시터 방향이고, 서해랑길은 오른쪽 계양로를 따라 이어간다.
노양리(老陽里)는 팽성읍에서도 가장 서남쪽이다. 경양포가 있었고 조창이 설치됐던 마을이다. 노양老陽이라는 지명은 1914년 노산의 ‘노’와 경양의 ‘양’에서 한 글자씩 빌려와 만들었다. 계양은 경양의 별칭이다. 노양리는 노양1리와 2리로 구분된다. 노양1리는 옛 경양포가 있던 인처리다. 1리의 자연마을로 건너말·창말·비석거리·뱃말이 있다. 노양2리에는 노산·꽃산·구르목과 같은 마을이 있다. 노산은 노산포로도 부르며, 구르목은 참나무쟁이라는 별칭과 계당말로도 부른다. 노양1리 경양포에는 고려시대 13조창漕倉의 하나였던 하양창이 설치됐다. 하양창은 조선건국 후 폐지됐고 대신 직산현과 평택현의 세곡을 모으는 해창이 됐다. 갑오개혁 후 조운제도가 폐지됐고 경양포는 안성천 하구 어업과 팽성읍-현덕면 사이 수로교통의 중심이 됐다. 경양포의 기능은 1974년 아산만방조제 준공으로 중단됐다. - 평택시史
노양리마을회관 버스정류소 앞에서 계양로를 따라간다. 계양로 도로명은 노양리의 옛 지명 경양(慶陽) 변화된 계양에서 왔다. 경양>겨양>계양, 이렇게 변화되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노양리마을회관 버스정류소 앞에서 출발 지점을 뒤돌아본다. 저 위쪽은 노양1리와 2리, 본정리로 이어진다.
노양1리에는 해방 전후 약 60호가 거주했다. 1970년대 이후 어업이 쇠퇴하고 이농현상이 발생하면서 현재는 약 50호(70여 세대, 170여 명)가 거주한다. 노양2리는 노산이 10호, 꽃산이 12호, 구루목이 4호 내외다. 해방 전후에는 노산에만 20호가 넘는 사람들이 살았으며, 고려시대에는 200호가 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일제강점기 이후 노양리 일대는 갯벌이 간척됐다. 하천부지는 아산만방조제가 준공된 뒤에도 간척됐다. 간척으로 평야가 발달하면서 어촌이 농촌으로 변모했다. 노양2리는 노산·꽃산·구르목과 같은 자연마을이 있다. 노산은 앞원안·뒤원안들 등이 간척되면서 인구가 증가했다. 꽃산은 본래 호 수가 몇 집 안됐으나 한국전쟁 당시 신대3리에 장단수용소가 설치되고 장단피란민들 일부가 거주하면서 마을이 커졌다. - 평택시史
계양로에서 서쪽을 조망하면 오른쪽 뒤의 마안산과 드넓은 아산호를 가로지르는 서해선의 아산고가교가 시야에 들어온다.
서해랑길은 계양로와 헤어져 오른쪽 마을길로 진입한다. 서해랑길은 평택섶길 장서방네노을길과 동행하고 있다.
국도 제43호선 세종평택로 지하통로를 통과하여 뒤돌아본다.
서해랑길은 왼쪽의 국도 제43호선 세종평택로 옆 임도를 따라 신대교차로 방향으로 이어간다.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신대리 신대교차로가 앞에 있고 서해랑길은 오른쪽으로 돌아간다.
임도를 따라 팽성읍 노양리에서 신대리로 넘어왔다. 위쪽에는 지방도 제313호선 광덕계양로의 평택국제대교가 지난다.
서해랑길은 오른쪽 광덕계양로의 평택국제대교 방향으로 올라간다. 평택섶길 장서방네노을길은 왼쪽으로 이어가고, 경기둘레길 45코스, 평택섶길 명상길과 비단길은 이곳에서 서해랑길과 만나 동행한다.
위쪽으로 700m 지점에 경기둘레길 45코스, 평택섶길 장서방네노을길, 명상길, 비단길의 시점인 신대리마을회관이 있다. 이곳에서 서해랑길은 장서방네노을길과 헤어지고, 경기둘레길 45코스, 평택섶길 명상길, 비단길과 동행하여 오른쪽으로 올라간다.
지방도 제313호선 광덕계양로의 평택국제대교가 안성천 위를 동서로 가로지르고 그 아래 국도 제43호선 세종평택로가 남북으로 달리며, 그 아래에 계양로가 있다.
계양로 옆 임도에서 계단을 통과하여 지방도 제313호선 광덕계양로로 올라왔다. 건너편 산은 신대리의 망해산인 듯. 신대2리 마을회관은 망해산 뒤 오른쪽에 있을 것이다. 망해산 정상에 평택통신소 송신탑이 솟아 있다.
팽성읍 신대리(新垈里)는 망해산 동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망해산은 조선시대 망해산 봉수가 있었으며, 봉화산 또는 봉우재산이라고 불렀다. 마을은 망해산을 중심으로 새터(1리), 영창(2리), 장단(3리), 말랭이(4리)로 형성됐다. 가장 오래된 마을은 새터이고 영창과 장단은 한국전쟁 뒤 피란민들과 충청도 이주민들이 정착하면서 형성됐다. 신대(新垈)라는 지명은 새터에서 왔다. 이 마을은 대략 15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새터마을은 해방 전후만 해도 50호 내외였다. 한국전쟁 뒤 외부인구가 유입되면서 65호로 증가했다. 영창은 형성시기에 80여 호가 정착했다가 현재는 100여 호로 증가했다. 장단마을은 초기에는 꽃산 기슭의 노양2리와 함께 도두3리에 속했다. 1970년대 중반 도두3리는 70∼80호 내외였다. 1980년대 초 마을이 나눠지면서 50호로 줄었고, 현재는 60호 정도가 거주한다. 신대4리 말랭이는 본래 함정2리 말랭이와 같은 마을이었다가 도로를 기준으로 마을을 나누면서 도두4리로 편제됐고, 현재는 신대4리에 편제됐다. 말랭이의 호수는 56호였는데 근래 미군기지 이전사업으로 조금 줄었다. - 평택시史
왼쪽에 안성천이 흐르고 중앙 뒤에 국도 제43호선 평택대교가 안성천을 가로지른다. 바로 앞은 팽성읍 신대1리 지역인 듯.
지방도 제313호선 광덕계양로의 평택국제대교로 이어간다. 건너편 왼쪽은 평택시 현덕면 신왕리, 오른쪽은 덕목리 지역이다.
아래는 신대교차로, 오른쪽은 신대1리 새터마을인 듯. 왼쪽 국도 제43호선 세종평택로는 위쪽의 평택대교로 이어진다.
신대리 망해산에 평택통신소 송신탑이 솟아 있다. 아래의 계양로를 따라가면 왼쪽 뒤에 신대2리 마을회관이 있을 것이다.
안성천이 유유히 흐르고 국도 제43호선 세종평택로의 평택대교가 안성천을 가로지른다. 오른쪽 위는 팽성읍 도두리 지역이다.
평택국제대교에서 아산호 서쪽 아산시 지역을 살핀다. 왼쪽에 고용산, 중앙에 영인산, 오른쪽 서해선의 아산고가교 서단 뒤에 채석장 상처가 있는 입암산이 보인다.
평택국제대교를 걷다가 뒤돌아보면 왼쪽 팽성읍 신대리 망해산에 송신탑이 솟아 있고, 중앙에는 레이더 통신 기지가 있는 듯. 그 오른쪽은 팽성읍 노양리 지역이다.
맨 왼쪽에 평택대교, 그 오른쪽 안성천 남쪽은 팽성읍 도두리, 도두리 안쪽 동쪽은 대추리 지역인 듯. 정태춘 가수의 태생지가 도두리인데, 도두리벌은 평택대교 오른쪽 입구 도두리 입구일 것이며 미군 기지는 도두리 안쪽 대추리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팽성읍 대추리(大秋里)는 약 300여 년 전에 형성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에는 평택현 북면에 속했다. 1914년 평택군 서면으로 편제됐다. 옛 대추리는 북쪽으로는 낮은 구릉이 마을을 감싸고 구릉과 남서쪽 골짜기에는 문전옥답이 형성돼 사람살기에 좋은 마을이었다. 일제 말 일본해군시설대가 안정리 일대에 비행장을 건설하면서 마을 일부가 잘려나갔고, 1952년 미군기지 확장으로 곤지머리로 집단 이주했다. 집단 이주 뒤 흑무개들·황새울들을 간척했고, 초기 80호였던 마을도 140호를 넘어 나중에는 160호로 늘었다. 2003년 4월 발표된 용산 및 동두천 미군기지이전정책에 따라 반대투쟁을 하다가 2010년 노와4리에 이주단지를 조성하고 옮겼다. - 평택시史
국도 제43호선 세종평택로의 평택대교가 안성천 위를 가로지르고 왼쪽은 현덕면 덕목리 지역이다.
현덕면 덕목리(德睦里)는 고려시대 광덕현의 중심이었고, 근대 이전에는 수원부 안외면과 광덕면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백석동, 소당리蘇堂里, 광덕면 덕목리, 연화리蓮花里, 소외리 일부를 통합하여 진위군 현덕면 덕목리라고 했다. 덕목은 고려 말 두문동에 은거했던 어촌공漁村公 공부孔俯가 조선왕조의 출사를 거부하고 숨어살면서 덕행과 화목을 강조해 유래됐다. 소당蘇堂은 덕목 1리의 자연지명이며, ‘소댕이’라고도 한다. 중국 송나라의 시인 소동파의 글을 현판에 걸어놓은 집이 있어 유래했다. 백석白石은 덕목2리의 자연지명이며, 옛날 날개 달린 장수가 마안산 봉우리에서 북쪽을 향해 200여 근이 넘는 차돌을 던진 것이 마을 입구에 떨어져 차돌백이라고 했는데 차돌이 박힌 곳에 마을이 형성돼 유래됐다. 현재 차돌은 마을 서남쪽 공터로 옮겨졌다. 냉정冷井은 덕목 3리의 자연지명이며, 맑고 찬 우물이 있어 ‘찬우물’이라고 했던 데서 유래됐다. 원덕목元德睦은 덕목4리의 자연지명으로 광덕현廣德縣의 읍치邑治였던 곳이다. 은곡隱谷은 덕목5리의 자연지명이며, 어촌공 공부가 은거했던 마을에서 유래됐다. 영양 진씨의 열녀 정려가 있어 ‘정문골’이라고도 한다. 연화동은 덕목6리. 바닷가 마을이어서 물위에 뜬 연꽃과 같아서 유래됐다. 덕목리에는 전통사찰 심복사가 있다. 심복사는 조선 명종 때 건립된 것으로 전한다. 대적광전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신라 하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물 제565호로 지정됐다. 심복사는 평택시민들이 즐겨 찾는 문화재이다. - 평택시史
안성천 위를 가로지르는 국도 제43호선 세종평택로 평택대교는 동남쪽 팽성읍 도두리와 서북쪽 안중읍 삼정리를 잇는다.
팽성읍 도두리(棹頭里)는 도두리벌 초입에 있다. 마을 입구에는 도장산이 있고 정상에는 엄나무 고목, 기슭에는 돈두암이라는 바위가 있다. 예로부터 돈두암 아래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근대 이후 간척사업이 진행되면서 논으로 변했다. 도두리라는 지명은 ‘돛대머리’에서 유래됐다. 마을은 근대 전후에 형성됐고 도두리라는 지명은 1914년에 만들어졌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도두리는 도두2리 신흥·신대3리 장단·신대4리 말랭이를 포함해 모두 4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됐다. 장단과 말랭이가 신대리로 편입되고 2007년 경 도두2리가 미군기지확장사업으로 폐동되면서 다시 단일마을이 됐다. 동래 정씨와 밀양 박씨가 대성大姓이다. 폐동된 도두2리는 전형적인 각성바지다. 폐동 전에는 약 40호가 거주했다. 일제강점기 ‘암기원들’이 간척되면서 한두 집씩 마을을 형성하더니 한국전쟁 뒤 도두리벌이 간척되면서 조금 커졌고, 1960∼70년대 충남 공주·청양 등지에서 빈농들이 대거 이거하면서 큰 마을이 됐다. 도두리는 현재 미군기지 확장사업으로 도두2리가 폐동됐고, 도두1리 뒤쪽까지 미군기지가 조성 중이다. 도두리벌이 미군기지에 공여되면서 주민들은 생업기반을 잃었다. 마을은 남았지만 경작지를 상실한 주민들이 보상비를 받아서 하나 둘씩 마을을 떠났다. 몇 년 전 170호가 넘었던 큰 마을이 현재는 60호 남짓 남아있다. - 평택시史
지방도 제313호선 광덕계양로는 현덕면 덕목리에서 신왕터널을 통과하여 현덕면 신왕리로 이어진다. 터널 왼쪽 중턱에 전망공원과 전망대가 가늠된다.
지방도 제313호선 광덕계양로의 평택국제대교는 안성천 동쪽의 팽성읍 신대리와 안성읍 서쪽의 현덕면 덕목리를 잇는다.
전망공원에 올라가고 싶지만 시간이 없어 그냥 주차장으로 내려간다. 이정목의 노양리 날개는 신대리 방향으로 고쳐야 한다.
서해랑길은 평택자전거길 평택국제대교 시점인 현덕면 덕목리 주차장을 돌아서 남쪽의 평택국제대교 아래로 이어진다.
현덕면(玄德面)은 아산만 방조제를 사이에 두고 충청남도 아산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양성현과 직산현, 수원부의 땅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1895년 23부제 실시와 1896년 전국 13도제 실시로 수원군에 통합됐고,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진위군 현덕면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덕’이라는 지명은 '현암(검은바위)'과 ‘광덕’에서 왔다. 현암의 기원은 포승읍 석정리 현석마을이며, 광덕光德은 고려시대 광덕현이 설치되었던 덕목리·신왕리·대안리 일대의 지명이었다. 이 지역은 근대 전후에는 신흥포·계두진·구진·석화진을 중심으로 안성천 하류의 수로교통과 어업의 중심이었다. 또 동족마을이 발달했고 심복사, 덕목리성, 계두봉과 같은 문화유산이 남아 있으며, 평택호관광단지를 중심으로 한국소리터, 평택호예술관, 요트장 등이 관광객을 끌어 모으고 있다. - 평택시史
현덕면 덕목리 평택자전거길 주차장에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서해랑길은 평택자전거길을 따라 신왕리 방향으로 이어간다.
평택자전거길 본선은 덕목리 평택국제대교 시점에서 출발하여 아산호 북쪽 호반(湖畔)길을 따라 팽성대교를 건너 아산호 남쪽 호반(湖畔)길로 넘어와 팽성읍 신대리 평택국제대교까지 이어진다.
현덕면 덕목리에서 평택자전거길을 따라 평택국제대교 아래를 통과하여 현덕면 신왕리로 넘어간다.
왼쪽 건너편 둔포천이 안성천에 합류하는 곳이 노양리 경양포, 중앙 건너편은 아산시 둔포면 신남리, 그 오른쪽은 아산시 영인면 창용리 지역이다. 맨 오른쪽에 삼양사 아산공장과 대선제분 아산공장이 있으며 그 뒤에 고용산이 솟아 있다.
겨울철에 찾아오는 철새인 민물가마우지가 기후 변화로 인해 텃새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문제는 이들이 물고기를 닥치는 대로 잡아먹고 산성이 많은 배설물은 나무를 말라 죽게 하여, 어민들의 생활을 어렵게 한다고 한다. 그래서 유해조수로 지정되었다.
지방도 제313호선 광덕계양로의 평택국제대교가 건너편 팽성읍 신대리에서 현덕면 덕목리로 이어지고 있다. 오른쪽 산 위에 레이더 통신소가 있는 것 같고 왼쪽은 망해산이다. 망해산 아래에서 위쪽으로는 도두리 지역이고, 그 안쪽은 대추리 지역이다.
150년 전통 옛 우물을 알리는 게시판이 붙어 있다. 올라가 보고 싶지만 여유가 없어 그냥 통과한다.
건너편 중앙은 둔포천이 안성천에 합류하는 팽성읍 노양1리 지역으로 예전에는 안성천 유역의 대표적 포구인 경양포가 있었으며 직산현과 평택현의 세곡을 담당했던 경양창(계양창)이 있었다고 한다. 그 오른쪽은 아산시 둔포면 신남리 지역이다.
안성천이 아산만방조제에 가로막혀 드넓은 아산호를 형성하고 건너편 아산호 남안의 아산시 둔포면 신남리와 영인면 창용리 지역에 드넓은 간척농지가 조성되었다.
아산호 건너편에 삼양사 아산공장과 대선제분 아산공장 건물이 있으며 그 뒤에 고용산이 솟아 있다. 그 앞쪽 아산호에는 아산만방조제에 의해 생겨난 쌀조개섬이 길게 누워 있다.
산기슭에 한 그루 오동나무가 의젓하게 자라나 연보랏빛 오동꽃을 피우고 햇빛에 반짝인다.
아산호가 아침 햇빛에 잔물결을 반짝이고 왜가리인 듯 물새 한 마리가 호수 위를 날아간다. 건너편은 왼쪽부터 아산시 영인면 창용리, 구성리, 백석포리 그리고 오른쪽 서해선 아산고가교 뒤쪽은 인주면 모원리와 공세리지역이다. 왼쪽에 고용산, 중앙에 영인산, 오른쪽에 입암산이 솟아 있다. 영인산 오른쪽 앞 아산호에 가까이 솟은 산은 원랑산이다.
평택자전거길에 가로수로 조성한 이팝나무 하얀 꽃이 흐드러진다. 앞의 굴곡진 곳은 예전에 신왕포구가 있었던 곳이라고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다.
오른쪽 뒤의 산이 고등산인 듯. 그 오른쪽 아래가 신왕2리 원신왕 마을인 것 같다. 신흥포(계두포)는 아산시 둔포면 신남리에 있는 포구인데 아래 '평택시史'에서는 신왕1리 지역을 신흥포라 하고 있다. 신왕포를 신흥포라고도 불렀을까?
신왕리(新旺里)는 조선후기 수원부 광덕면 지역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신왕골과 마두리, 와촌을 통합하여 신왕리라고 했다. 신왕리는 신왕1리 신흥포(계두포)를 중심으로 안성천 하류의 어업과 수로교통이 발달했던 마을이다. 해방 전후만 해도 신흥포에서 나룻배를 타면 팽성읍 경양포나 아산의 백석포로 건너갈 수 있었다. 신흥포는 신왕리에서 삼정리, 대반리를 거쳐 수원과 한양까지 육로교통과도 연결됐다. 그래서 근대 전후에는 충청도 사람들이 나룻배를 타고 신흥포에서 내려 이 길을 따라 한양을 오갔다. 신왕2리는 원신왕元新旺 마을로 신왕골이다. 신왕골의 규모는 32호로 신왕1리 마두마을보다 크다. 이 마을은 본래 배씨가 개척하였는데 450여 년 전 달성 서씨와 순흥 안씨가 이주하면서 규모가 커졌다. 신왕골은 마두에 비해 농업인구가 많았고 어업은 농업을 보완하는 수단이었다. 주민들은 모내기가 시작되기 전인 음력 4월에 어업활동을 시작했다. 주로 중선 1척과 작은 배 서너척으로 멀리는 어청도까지, 작은 배는 아산만 일대에서 강다리·거물치·뱅어·새우·조기·숭어·거물치·준치· 황새기 등을 잡았다. 잡은 고기는 농촌마을에 나눠준 뒤 가을에 곡식으로 받았다. 어업이 끝나면 모내기를 했다. 현재 신왕리는 변화에 직면했다. 평택시에서는 평택호관광단지를 신왕리 일대까지 확대하려고 하며, 옛 나루에서 팽성읍 노양리까지 교량이 건설될 예정이다. - 평택시史
오른쪽은 신왕2리 원신왕 마을로 이어지는 길이고 서해랑길은 평택자전거길을 따라 신왕포구로 나간다.
신왕포구 나루터임을 알리는 하얀 등대 조형물이 원신왕 마을 입구에 조성되어 있다.
현덕면 신왕2리 신왕포구 나루터 지역에 신왕2 배수문이 설치되어 있다. 아산호 건너편에 고용산이 솟아 있다.
아산호 북쪽 호반(湖畔)에 조성된 평택자전거길을 따라 평택국제대교 아래를 통과하여 원신왕마을 입구까지 왔다.
이곳에서부터 평택자전거길을 새로이 조성하는 것 같다. 신왕포구에는 파시波市 때에 기생을 둔 술집이 즐비하였다고 한다.
아산호 서쪽에 서해선의 아산고가교가 아산호를 가로지르고 왼쪽 뒤의 입암산과 그 오른쪽의 공세리성당을 가늠한다.
현덕면 신왕1리 신왕포구에 신왕1 배수문이 설치되어 있다. 평택자전거길을 연장하는 공사가 진행 중인 것 같다.
아산호 남쪽 호반(湖畔)의 아산시 영인면 창용리(왼쪽)와 구성리(오른쪽) 지역이다. 왼쪽 뒤에 고용산, 오른쪽 뒤에 영인산, 그 오른쪽 앞에 원랑산이 확인된다.
아산호 건너편 왼쪽은 아산시 영인면 구성리, 중앙 앞 원랑산 오른쪽은 갑오농민혁명의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 군사가 44일 동안 주둔했던 영인면 백석포리, 그 오른쪽 뒤는 인주면 모원리, 중앙에서 오른쪽에 있는 입암산 아래는 인주면 공세리, 입암산 오른쪽 아래에 공세리성당이 가늠된다. 맨 오른쪽에 서해선의 아산고가교, 중앙 맨 뒤에 영인산이 확인된다.
이곳이 광덕포구라고도 불린 신왕포구이며 서해선의 아름다운 아산고가교가 아산호를 가로지르고 오른쪽에 마안산이 있다. 서해랑길은 앞의 전봇대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마두마을 방향으로 진행한다.
서해랑길은 오른쪽으로 꺾어 이어간다. 마안산 줄기가 벋어 내리고 있다. 마안산은 산 정상부에서 정월 대보름에 달맞이를 하여 ‘망운대산’이라고 불렸는데, 이후 산의 형세가 말의 안장을 닮았다고 하여 ‘마안산(馬岸山)’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서해랑길은 농로를 곧장 따라가서 왼쪽으로 꺾어 왼쪽 뒤에 보이는 건물 앞쪽으로 이어간다. 오른쪽 뒤에 고등산, 그 아래를 마두라고 하는 것 같다. 마두는 신왕1리의 지명으로, 지형이 말머리를 닮아 ‘말머리’라고 하다가 한자로 ‘마두(馬頭)’로 표기했다고 한다. 고등산은 본래 고려시대 광덕현의 주산이라 광덕산이라고 했는데, 근대 이후에 고등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왼쪽 위 지역은 신왕1리에 속하고 오른쪽 뒤 지역이 신왕2리에 속하는 것 같다.
신왕1리는 말머리(마두)·마산·새터말·기왓말(와촌, 기왕골)·속말과 같은 작은 마을로 나눠졌다. 1리의 마을규모는 30호가 조금 안 된다. 성씨는 경주 이씨, 교통 인씨가 많다. 주민들은 신왕포를 광덕나루터라고 부른다. 1974년까지 나루터에는 뱃사공도 있었고 주막도 있었다. 신왕1리 마을의 주산업은 어업이었고 일부는 농사도 지었다. 주민들은 중선배와 작은배(전마선)를 타고 안강망·건강망·삼중망으로 새우·거물치·동어·뱅어·숭어·준치·삼치를 잡았다. 9월~10월에는 민물장어와 참게도 많이 잡혔다. 봄과 가을 뱃터에는 간이주막이 성업했다. 주막에는 기생도 있었고 단오에는 그네뛰기도 했다. 신왕1리 주민들은 아산만방조제가 준공된 뒤 농업의 비중이 높아졌고 일부는 민물고기 양식업을 하고 있지만 수입은 예전만 못하다. - 평택시史
중앙의 고등산(高等山) 아래에 신왕1리 마두마을이 펼쳐져 있다. 서해랑길은 왼쪽 뒤 건물 앞을 거쳐 마안산 입구로 이어간다.
신왕리(新旺里)는 조선후기 수원부 광덕면 지역으로 1914년 신왕골·마두리·와촌을 통합해 신왕리라고 했다. 안성천 하류의 대표적인 나루이며 어항이었다. 마두馬頭는 신왕1리의 지명. 지형이 말머리를 닮아 ‘말머리’라고 하다가 한자로 ‘마두’로 표기했다. 신왕1리의 자연마을로 마산·새터말·기왓말(와촌)·속말이 있다. 원신왕元新旺은 신왕2리의 마을 지명이다. - 평택시史
평택자전거길 연장 공사 현장을 거쳐 왼쪽 산 모퉁이 오른쪽의 신왕1 배수문을 지나왔다. 오른쪽에 아산의 고용산이 솟아 있다.
연장 공사 중인 평택자전거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시멘트 농로를 따라오고 있다. 아산호 건너편 왼쪽 뒤에 고용산, 오른쪽 뒤에 영인산, 그 오른쪽 앞에 원랑산이 보인다. 고용산 앞쪽은 영인면 창용리, 그 오른쪽은 구성리, 맨 오른쪽은 백석포리 지역이다.
현덕면 신왕1리 마두 들녘은 예전에 바닷물이 들어왔던 신왕포구였다. 맨 오른쪽 말머리를 돌아 현덕면 대안리 구진개로 평택자전거길이 연장되는 듯. 아산호에 서해선의 아산고가교, 그 끝에 입암산, 그 오른쪽 끝에 공세리성당, 맨 오른쪽에 영인산이 보인다.
현덕면 신왕1리 시멘트 농로를 따라가다가 느티나무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 왼쪽 뒤 큰 건물 앞을 거쳐 마안산 입구로 이어간다.
서해랑길은 중앙 뒤 건물 앞을 거쳐 마안산 입구로 진행한다. 평택섶길 명상길과 비단길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명상길은 신왕2리 마을회관에서 출발하여 이곳에서 서해랑길과 만나 앞에 보이는 신왕1길 끝에서 왼쪽 말머리 방향으로 꺾어 서해랑길과 헤어지는 듯. 평택섶길 비단길은 평택국제대교 입구에서 서해랑길과 만나 평택호 관광지 혜초비까지 이어진다.
현덕면 신왕1리 말머리가 안성천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다. 이 들녘은 원장들인 듯. 건너편에 영인산과 입암산이 보인다.
평택지구 안성천 환경을 정비하는 사업 현장 사무소가 앞에 있으며 건너편에 왼쪽부터 고용산, 영인산, 입암산이 둘러서 있다.
서해랑길은 왼쪽 신왕1길 끝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현덕로를 따라 오른쪽 뒤 대형 창고인 듯한 건물 앞으로 이어간다.
현덕면 신왕1리 신왕포구 평택자전거길에서 신왕1리 지역의 농로를 따라 올라왔다. 아산호 건너편에 고용산이 솟아 있다.
대형 창고인 듯한 건물을 지나면 폐쇄된 아담한 건물이 나온다. 건물 앞 조경용 나무가 예쁘다.
카페&갤러리 여선재 입구에서 여선재의 뜻이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여선재는 자연예술가 김석환씨가 아내와 함께 4년에 걸쳐 공사하여 2007년에 완공한 나비집의 당호. 뜻은 '여유로움餘이 남아 풍요로움을 얻고, 고요함禪이 넘쳐 평온을 찾는다.'라고 한다. 위쪽에서 여선재 지붕을 살펴야 아름다운 나비 모습을 볼 수 있다.
현덕로를 따라오면 현덕면 신왕리와 대안리의 경계를 이루는 고갯마루에 이른다. 오른쪽 뒤 대안리 지역에 벌이랑꿀이랑 카페가 있으며 현덕로를 따라 내려가면 대안3리에 이른다. 서해랑길은 왼쪽 마안산 등산로 출입구로 이어간다.
이곳에서 마안산 정상까지는 약1.3km, 약23분이 소요되었다.
서해랑길은 현재 경기둘레길 45코스, 평택숲길 비단길과 동행하고 있다. 서해랑길은 평택관광지에서 비단길과는 헤어지지만 경기둘레길 45코스와는 끝까지 동행한다. 평택섶길 비단길과 경기둘레길 45코스는 신대2리 마을회관에서 출발하였다.
마안산 능선 어느 문중의 묘소 위에서 아산호와 건너편 아산시 영인면에 솟은 고용산을 조망한다. 왼쪽에 쌀조개섬이 보인다.
왼쪽은 약수터&야영장으로 가는 길로 그 아래는 안성천의 말머리일 것이다. 마안산 정상까지 250m가 남아 있다.
돌탑 3기와 해발 112.8m 마안산 정상 표석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왼쪽 돌탑 둘 사이에 버려진 옛 정상 표석이 놓여 있다. 산 정상부에서 정월 대보름날 달맞이를 하여 ‘망운대산’이라 불렸는데, 말의 안장을 닮았다고 하여 ‘마안산’이라 바뀌었다고 한다.
해발 126m라고 적은 마안산 옛 정상 표석이 돌탑 사이에 놓여 있다. 마안산의 높이는 해발 112.8m로 측정되었다.
현덕면 대안리 마안산 정상에서 대안4리 방향으로 내려간다.
쉼터정자에 올라가 조망하지만 아카시 숲이 무성하여 아산호가 조망되지 않는다. 오른쪽으로 내려간다.
쉼터정자에서 내려오다가 묘지 공터에서 서쪽의 석화봉이 나무 뒤로 보인다. 그 뒤 왼쪽이 평택호 예술공원일 것이다.
현덕면 대안4리 구진개를 가로지르는 서해선 아산고가교와 왼쪽 뒤에 현덕면 권관리의 석화봉, 오른쪽에 기산리의 원기산이 보인다. 석화봉 뒤에 평택호 예술공원이 있을 것이다. "구진(鷗津)은 대안4리의 자연 지명이다. 엣날에는 ‘홍진鴻津’ 또는 갈매기가 많이 날아들어 ‘구진개’라고 했다. 구진개는 안성천 하류의 대표적인 어항이었다." - 평택시史
대안리(大安里)는 마안산을 중심으로 작은박골(1리), 사랑현과 뱀골(2리) 큰박골(3리), 구진개(鷗津浦)(4리)로 형성되었고, 박골이라는 지명은 함양 박씨들이 마을을 개척하여 ‘박골’이라고 했던 것을 큰박골과 작은 박골로 분동되었다는 설이 있다. 옛날에는 부유해 사랑(난간)만 딛고도 건너다닐 수 있었다는 데서 유래한 사랑현, 뱀골은 본래 마을에 서당이 있어서 배움골이라고 했던 것을 소리 나는 대로 뱀골이라고도 했다. 구진은 ‘홍진(鴻津)’ 또는 갈매기가 많이 날아들어 ‘구진개’라고 했으며, 아산만 어업의 대표적인 어항이었다. - 평택시史
대안4리 회관 앞에 한 그루 느티나무가 우아하다. 느티나무 아래 쉼터정자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대안4리 구진개(鷗津浦)는 아산만 어업의 대표적인 어항이었다. 마을 이름도 ‘갈매기 나루’라는 뜻의 ‘구진(鷗津)’ 또는 기러기 나루라는 뜻의 ‘홍진(鴻津)’이었다. 그래서 예전에는 이른 봄이면 하얀 돛을 단 어선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어부들이 잡는 고기는 숭어, 강다리, 병어 등이었다. 구진마을에는 성공회 구진교회가 있다. 구진교회는 1936년에 한옥양식으로 건축된 교회당 건물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어업과 농업이 공존하였던 반농반어의 마을이다 보니 당제와 풍어제를 함께 지내는 것도 구진개만의 특징이다. 구진개 주변의 갯벌은 일제강점기부터 간척되다가 1974년 아산만방조제 준공으로 완성됐다. 어업에 의존하던 마을이 농촌마을로 탈바꿈한 것도 이 때였다. - 평택시史
대안4리 회관 옆에 대안4리(구진부락) 표석과 청주한씨세거기념비, 기념비 설명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청주한씨 세거 기념비 내용을 옮겨 놓는다.
대개 땅은 사람으로써 이름을 드러내고 사람은 땅으로써 영혼이 내리니. 이는 자연의 이치가 서로 마땅함이며 예전과 지금에 다름이 없음이라. 그러므로 청주한씨의 시조[태위공 휘 난]의 20세손이며 저명한 조상[문정공 휘 계희]의 7세손인 [가선대부 휘 연], [통덕랑 휘 간]께서 이 땅에 내려와 터전을 여시고 마을 이름을 구진이라고 호칭한 지 지금으로부터 삼백여 년이라 뒤를 배경으로 산을 둘렀으니 이름 부르기를 망원대[현 마안산]이라 하고 눈앞에 강을 띠었으니 이름 부르기를 아산호라 한다. 산이 곱고 물이 맑으니 숨은 선비가 편안하게 쉴 곳이라고 할 만하였다. 간혹 벼슬길에 나가기를 권하면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부유함과 존귀함과 영예와 출세는 사람들이 바라는 바이지만 낮에 밭 갈고 밤에 책 읽으며 선조를 받들고 후손을 가르치는 것도 사람들의 삶의 큰 도리이거늘 어찌 벼슬길을 추구 하리오], 나물 캐고 고기 잡으며 봄에 꽃 피고 가을에 달 뜨는 시절에는 멀고 가까운 선비 벗들과 강가 정자에 모여 바람을 옳고 달을 노래하며 거닐고 마음을 달래셨다고 하니 이것은 이른바 어찌 숨은 선비의 풍류가 아니겠는가.
후손들이 대대로 장례 지내고 대대로 거처하니 구진동에는 다른 성씨가 그리 많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 흩어져 거처하는 후손도 이 동네의 배가 되니 이것이 어찌 선조의 음덕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선조의 숭고한 음덕을 찬양하고 후손의 번창과 명예와 출세를 우러러 소원하며 조상을 숭배하는 정신이 영원히 계승될 것을 기원하며 여기에 대대로 거처함을 기념하는 비석을 삼가 세우노라. 9대손 오계 우동이 삼가 지음. 10대손 이학박사 유담 준택이 삼가 씀.
우리나라 으뜸 가문이여 배경에는 인자한 산이라, 소나무와 국화의 주인이여 선조의 음덕이로다. 이 땅에 숨어 거처하니 눈앞은 지혜로운 물이라 향기로운 숲에 묻힌 선비여 영원토록 이어지리라. 단기 4318년, 서기 1985년 을축년 음력 2월 한식절.
구지마을의 연자방아를 복원한 것을 복원비와 연자방아 설명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復元碑 : 이곳에 설치한 연자방아는 이 마을 1218-2번지에 연자 방앗간이 사라짐에 따라 마을 주민들이 힘을 모아 현 위치로 옮겨 주민의 화합과 역사 공동 의식체를 되살려 후세에 길이 보전하기 위해 복원하였다. 2005. 1. 10. 건립에 참여하신분 : 리장 한철우, 새마을지도자 한형우, 추진위원 대안 4리(구진) 주민 일동
연자방아, 디딜방아 : 연자방아는 「연자매」, 「돌매방아」라고도 하며 방아틀에 연결된 돌을 말어나 소가 끌어 돌림으로써 곡물 껍데기를 벗기거나 밀 같은 곡물을 빻아 가루로 만들고 팥, 콩, 메밀. 녹두 등을 거칠게 타거나 물에 불린 콩을 갈기 위해 고려시대부터 사용되었던 농기구이다. 둥글고 판판한 돌판 위에 그보다 작고 둥근 돌을 옆으로 세워 얹어 아래위가 잘 맞닿도록 겹쳐놓고 윗돌 옆에 수직으로 달려있는 맷손을 잡고 뱅뱅 돌리면서 사용되었다. 밑돌을 「알돌」, 「바닥돌」이라 하며 그 위에서 굴리는 돌을 「웃돌」, 「방엣돌」, 「맷돌」이라 일컫는다. 디딜방아는 발로 디디어 곡식을 찧는 방아로써 방아의 채는 길어 뒤뿌리가 제비꼬리처럼 좌우로 갈라졌고 채의 앞머리에 달린 공이는 돌로 만든 확 속의 낟알을 벗기는 구실을 한다. 디딜방아는 곡식 이외에 떡을 찧거나 고추를 빻고, 메주콩을 이기는 일에 사용되었다. 이곳의 연자방아와 디딜방아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함께 방아를 찧고 서로 돕는 강력한 협동의 기능을 다하여 왔으며 이곳에 마을이 형성되었던 약 1700년부터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제 그 후대들이 선조들의 뜻을 받들어 문화재로 보존하기 위해 새로이 발굴하여 이곳에 복원하였다.
수령이 얼마나 되었을까? 그윽한 느티나무 아래 2017년 세운 쉼터정자에서 길동무와 함께 요기를 우아하게 나누었다.
대안4리 회관 앞 느티나무 정자에서 15분 동안 요기를 나누고 구진마을 입구에서 대안길을 따라 구진개(鷗津浦)들로 나간다.
서해랑길은 대안길을 따라 호림농장 앞을 지나 그 뒤쪽 구진개들 농로를 따라간다. 아산호를 가로지르는 서해선의 아산고가교, 그 뒤의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와 입암산, 맨 왼쪽 뒤의 아산시 영인면 영인산이 확인된다.
맨 왼쪽 연자방아 옆 구진마을 입구에서 대안길을 따라 호림농장 앞으로 와서 마안산과 구진마을을 뒤돌아본다. 목적지까지는 아직도 14km가 넘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