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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워셔라는 미국목사가 언젠가 미국 복음주의 교회의 이단은
‘예수님 내 맘에 들어와서 제 안에 계세요’ 하면 예수께서 그 안에
계시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뇌피셜이죠.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회개와
세례를 통과하지 않으면 죄 사함이 되지 않으므로 성령이 임재하실 수 없습니다.
또 성령 안에서 진리를 따라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야만 믿음의 화합
곧 믿음의 결부가 이루어져 말씀이 체화가 되어 하나님의 집이 되어 안식이 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영광이 되고 드디어 사랑에 이르게 되어 주님을 닮게 되는 겁니다.
14절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안식에 대한 말씀이 나오고 12절 부터는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이 나온 그 다음에 다시 대제사장에 대하여 설명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안식,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 대제사장 이렇게 연결이 됩니다. 이 말은
살아 있는 말씀 ‘호 로고스’이신 그리스도가 바로 대제사장이다 말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 오르락내리락 왕래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왕래케 하는 것은 사도요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를 이해해야만 예배, 기도, 경배와 찬양이 실재가 되는 겁니다.
히브리서가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이 모든 날 마지막 때는
아들로 말씀’을 하시는데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사도며 대제사장’이시라는 겁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왕래하게 하십니다.
연결시키고 연합시키고 접촉하게 하십니다. 이를 교제라고 말을 하는 겁니다.
‘승천하신 자’ 이 말은 우리는 하늘로 올라갔다고 생각하는 개념인데
우리 눈에는 주님이 올라가는 것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차원이 바뀐 겁니다.
말하자면 땅과 하늘을 패스하고 계신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리스도는
만유의 주재이시며 만왕의 왕으로 하늘의 궁전을 프리패스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들에게 하늘나라의 사닥다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런 의미로 승천하신 우리의 대제사장이십니다. 우리는
그 분 안에서 자유 왕래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이전에는 아무도 그 길을 가지
못했지만 지금은 승천하신 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프리패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하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요1:12절을 두고 많은 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고 말하는데
사실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름은 그 분의 존재입니다.
그리고 ‘믿는’이란 말의 시제는 현재입니다. 현재분사라는 것은 어느 시점부터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믿는 자' 라는 말씀이 매우 중요합니다.
승천하신 자, 하나님과 우리를 자유 왕래하시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아들을 내가 믿고 있다는 겁니다. 단순하게 영생 얻기 위하여, 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하여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완전히 파악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믿는다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사심을 믿고 따라가는 믿~음에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믿~음을 가져야만
비로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되고 그 믿음에 상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땅에서 난 죄인과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아무 과정이 없이 하나님 우리 마음에
오셔서 좌정하시고 영원히 떠나지 마소서 아멘 주 예수 어서 오시옵소서 한다고
우리 속에 임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기독교가 과정이 없으므로 진보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영어권 목사들에게 말하길 no process이면 no progress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주로 믿는 것이 전부가 아닌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능과 역할까지 다 우리가 믿고 수용해야만 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는 곧 길이라고 하십니다. 만일 그분이 길이라면 우리를
어디로 끌고 가신다는 뜻입니다. 우리를 하나님께 이끄시기 위해 길을 내셨습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시므로 내려오는 길을 내시고 땅에서 하늘로 승천하시므로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는 길을 내셨습니다. 길을 냈으니 우리를 데려가시는 겁니다.
그리고 길이 났으면 우리가 그 길을 활용해야 되지 않느냐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길을 마지막 날에 천국에 한번 올라갈 그 때만 사용하겠느냐는 겁니다.
이 길을 그 때만 사용하려고 하는 사람은 전문바보입니다. 전문 바보란
어떤 학문을 전공을 했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현재 기독교인들 이와 같지 않을까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요14:6) 이 말씀은
‘나를 사용하지 않고는, 나를 활용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많이 활용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 분을 완전히 파악하라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젖히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절도와 강도가 됩니다(요10:1) 그럼에도 원시적인
종교성으로 하나님과 직거래를 하려고 하는 사람이 기독교 안에서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선 안 되죠.
‘호 로고스’ 이 말씀이 생명의 양식입니다. 이를 먹지 않으면 양식이 안 됩니다.
‘말씀육신’(요1:14)이 안 됩니다. 말씀은 남성명사입니다. 육신은 여성명사입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육신인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1+1=1이 되어 져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늘 따로국밥이라는 사실입니다.
말씀은 말씀이고 나는 나고... 이러니까 화합이 안 이루어집니다.
‘주님, 당신 없으면 내가 없는 것, 당신 있으면 내가 있는 것입니다’
이 고백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긍휼을 받지 못하는 겁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성령을 내게 거두지 마소서’(시51:11) 하고요.
다윗은 성령을 거두어 버리시면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철저하게 압니다.
그래서 왕관보다도 금은보화보다도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애걸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겁니다.
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동정(체휼)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우리와 똑 같이 시험은 받지만 죄와 상관이 없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는
정과 욕심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죄인의 편에 서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대변하시고 변호하십니다. 지금도 그렇게 간구하십니다(히7:25)
그 다음에는 4장의 결론 16절입니다.
16절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1-2절과 16절을 연결시켜서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믿음의 결부(화합)가 안 되는 이유가 뭐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이 말씀대로 안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결부가 되기 위해선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됩니다. 왜 긍휼하심을 받고 은혜를 받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건 원함도 달음박질도 아니고 오직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만 되는 일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항상 베푸십니다.
다윗의 신앙의 특징은 답답하면 주의 성소를 향해 밀고 들어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가 아니면 아무것도 안 된다는 것이 다윗의 신앙입니다.
주님을 만나야겠다는 일념과 주님이 도우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신앙입니다.
은혜의 보좌는 지성소입니다. 법궤입니다. 법궤 위에 천사가 양 옆에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머뭅니다. 법궤 뚜껑이 곧 은혜의 보좌입니다.
거기에 제물의 피를 바릅니다. 법궤 뚜껑이 닫혀서 그 위에 있는 피를 보고
그 밑을 보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여기가 시은좌, 시은소, 속죄소, 또는 은혜의
보좌라고 합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임재 하셨던 곳인데 이것이 바로 골방입니다.
지금은 어디에서 발견을 해야 합니까? 바로 우리의 심령 안에서 발견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긍휼하심을 얻는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는 겁니다.
‘악한 자라도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물며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악한 자는 긍휼이 없어도 구하는 자에게
주지 않느냐 그런데 긍휼에 풍성한 하나님이 어찌하여 구하는 너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생명의 떡인 말씀을 구하고, 생명을 구해야 됩니다.
살고자 하면 반드시 긍휼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됩니다.
긍휼을 구하는 길은 ‘주님 나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 밖에 없습니다’
마리아와 같은 여자이며 수로보니게 여인, 바디메오, 삭개오 같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성령님을 구하지 않아도 육신의 생활에는 큰 불편함이 없는지는 몰라도
그분께 나아가지 않으면 진정한 안식이 없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 있나 우리 모두 다
예수를 친구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평화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은혜의 보좌를 우리의 심령에 세팅해야 합니다.
아니 이미 설치완료가 된 그대로 인정하시길 바랍니다. 내 중심이 바로
은혜의 보좌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입니다. 우주의 본부입니다.
여기에서 보혈의 능력도,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도 성령이 증거해 주십니다.
우리 심령에 주님의 보혈이 흐른다는 걸 증거해 주십니다. 아주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걸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 현찰이 안 되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아니 나아갈 자격을 늘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는 자격지심입니다. 그리고 천국을 침노하듯이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의 그 영광을 향해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믿음의 화합(결부)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입니다.
미국 영어 속담에 "The proof will be in the pudding" 내용이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주지 하셨듯이 하루하루 일상이 세속의 물결(특히 돈 자랑)로 내 눈앞까지 넘실거립니다.
이건 뭐! 아낙 자손 앞에 나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정말 새언약의 말씀으로 안경을 쓰고 있지 않으면 이게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을 못할정도로 내가 소유한 엄청난 보물의 가치가 희석이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신앙(믿고, 앙망)의 골인 지점인 하나님 아버지 은혜의 보좌까지 연결되어서 은혜와 긍휼을 받아야만
이 세속을 이기고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세상사람들에게 들려주고, 보여 줄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는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하므로 오직 믿음의 오메가 포인트를 향해 나아가는 마음 속의 진리의 공정 뿐입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