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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스크랩 러시아(Russia)의 근대화(近代化) - (西歐化政策)
임광자 추천 0 조회 124 08.06.01 08: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다. 러시아(Russia)의 근대화(近代化) - (西歐化政策)                 이길상

 

(1) 유년기(幼年期)의 표트르 1세(Pyotr I, AlekseevichRomanov. / 1672 ~ 1725. 2. 8)

 

"어떤정신이 이마에 새겨져 있고, 어떤 힘이 그 속에 간직되어 있을까. 그의 말(馬)에는 어떤 불이 붙어 있을까. 자랑스런 말이여 네가 뛰어 오를 때 어느 곳에 발을 내릴것인가."

 

상트페테르부르크(Sankt Peterburg)의 광장에 서 있는 표트르 대제의 기마상을 노래한 러시아의 국민적 시인 푸슈킨(Pushkin, Aleksandr Sergeevich / 1799 ~1837)이 남겼다는 시의 한 귀절이다.

 

러시아 로마노프왕조의 4대 황제 표트르 1세를 서구에서는大帝라는 수식 어를 하나 더 붙여 피터대제(Peter 1 the Great)라고 통칭해서 부르고 있다. 왜 그를 대제라고 불렀을까?

 

1721년 러시아 원로원(元老院)이 그에게 황제 칭호인 임페라톨(Imperator)을 수여하고 대제(大帝)라 불렀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그의 행적이 다른 황제들 보다 두드러지게 드러났기 때문이라고도 하며,

 

2 미터의 거구(巨軀)에 황소 같은 힘과 두주(斗酒)불사의 주량(酒量) 등이 황제로서 어울리지 않는 야인(野人)의 기질이 그렇게 부르게 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의 유년 시절은 매우 불행했다.

 

그가 부제(父帝) 알렉세이(Aleksei Mikhailovich Romanov/ 1629 ~ 76)의 14번째 아들로 태어난 것은 라진의 반란이 진압되고 1년이 지난 1672년, 그러나 생후 4년 후 아버지가 죽고(1676) 이복형 페드로 3세(Fedor Ⅲ / 1662 ~ 82)가 14살에 황제가 되면서 그의 고난은 시작되었다.

 

어머니 나타리아가 후처였기 때문에 나이 어린 새로운 황제 세력과의 마찰은 본인들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이들 모자(母子)를 그림자처럼 따라 다녔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위를 계승한지 6년 만에 20세의 젊은 나이로 페드로 3세가 죽었다(1682). 다음 제위를 누가 이어야 할 것인가? 이때 표트르의 나이는 10세 였지만 매우 영리했고, 그보다 6살이 더 많은 16세의 이복형 이반은 머리가 좀 모자랐다. 당연히 권력을 둘러싼 어른들의 줄 서기와 투쟁이 전개되기시작하였다.

 

결국 총주교와 대귀족들이 극적으로 타협, 나이는 어리지만 영리한 표트르를 황제로 추대 했다.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이반의 동복(同腹)누나 소피아(Sophia / 1657 ~ 1704)가 이반을 지지한 귀족들과 합세, 총병대를 앞세우고 반란을 일으켰다.

 

크렘린에 들어 닥친 반란군은 7일 동안 열 살의 어린표트르를 앞에 두고 별별 못된 짓을 다했다. 이런 것이 후일 표트르대제의 인격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입혔을 것이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 소집된 전국회의에서는 소피아를 섭정(攝政)으로 앉히고, 이반을 이반 5세로, 표트르를 표트르 1세로 하여 공동통치자로 결정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가장 원만한 타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권력은 섭정 소피아의 손으로 넘어갔고 표트르 일파는 사실상 제거되었다.

 

신변에 위험을 느낀 표트르 1세와 모후를 비롯한 그를 추종했던 일단의 무리들은 모스크바를 탈출, 어느 한촌(寒村)에서 실의와 불만으로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류리크 왕조의 마지막 황제 표트르 1세와 여기에서 말하는 로마노프왕조의 4대황제 표트리 1세는 다른 인물임)

 

여기서 표트르는 어른들의 불만 썪인 짜증을 외면하고 동네 아이들을 상대로 모스크바 무기고에서 빼내온 진짜 무기를 가지고 병정놀이에 열중했는데, 점차 일거리가 없는 매 사냥꾼이나 마부(馬夫) 등 어른들이 이런 놀이에 끼여 들었다.

 

어린 나이에 권좌에서 밀려나 피해 다니는 불행한 처지였지만 그래도 그는 러시아 황제였다. 이런 병정놀이가 이웃에 살고 있던 외국인 장교(將校)와 기사(技士)들이 심심파적으로 거들게 되면서 훈련의 강도가 높아지고 작전(作戰)과 포술(砲術)·조선술(造船術) 등 군사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도 아울러 배웠다. 표트르 1세의 서방 유럽과의 접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런 소문이 섭정 소피아에게 알려지자 소피아는 그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서 궁정의 총병대를 보냈다. 그러나 병정놀이로 연마된 전술과 민첩한 행동으로 일단 위기를 모면하고, 표트르 1세는 오히려 총병대에게 "그대들은 끝까지 섭정인 소피아를 따르겠는가? 아니면 황제인 나를 따르겠는가?......"라고 의젓하게 한마디 하는 여유까지 보였다.

 

이 소리를 들고 약삭빠른 총병대는 그들의 전유물인 반란에 다시 가담, 그 길로 모스크바로 달려가서 크렘린을 점령해 버렸다. 믿은 도끼에 발등이 찍힌 소피아는 세상 인심을 한탄하면서 수도원으로 들어 갔고, 총병대는 표트르1세를 그들의 황제로 다시 마지했다.

 

러시아 사절이 청나라 관헌에게 예물을 올리는 모습도이것이 러시아와 청나라 성조 강희제 사이에 스타노보이산맥(Stanovoi Mts)을 경계로 국경선을 정한 네르친스크조약( Treaty of Nerchinsk)이 있었던 1689년의 일로서 모스크바의 러시아 사정은 이러했다.

 

이때 체결되었다는 네르친스크조약은 역사적으로 여러가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천하를 자기 것으로 알고 있었고, 무역이라는 것도조공의 형태로만 받아들였든 중국에서 이 벽안의 낯선 이방인들과 대등한 입장에서 조약을 체결하였다는 것은 중국 역사에서는 처음 있었던 일이다.

 

그렇지만 그 경계가 오늘날 양국 국경선 보다 훨씬 북쪽까지 올라가서 정해졌다. 지금 러시아 연방영토의 일부가 이때는 중국 청조의 영토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후 청조의 쇠퇴와 함께 러시아는 계속 남쪽으로 내려와 아무르(흑룡)강을 경계로 국경선을 정하였고 동쪽으로는 다시 연해주를 차지하고 여기에 블라디보스토크 군항을 건설하여 태평양으로 나가는 문호를 열었다.

 

앞에서 이야기 한 베이징 조약(1860)으로 양국의 국경선이 다시 정해졌고, 이때 정해진 국경선이 지금까지 이어 오고 있는데, 이런 러시아에 대해서 당시의 중국에서는 청조의 쇠퇴와 국 내외의 복잡한 사정으로 말 한마디 못하고 가슴만 앓고 지내야만 했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은 베이징을 점령하고 공산정권을수립, 사실상 중국을 재통일 하였고, 당시 냉전체제라는 이름으로 세계가 동, 서로 양분되었을 때, 중국은 소련과 함께 공산세계를 이끌어 갔다.

 

그러나 두 나라 사이에는 곧 금이 가기 시작했는데, 표면적인 이유는 중국은 소련을 수정주의자로, 소련은 중국을 교조주의자라고 서로가 비난하면서 국경지대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했으나 내면적으로는 이런 영토에 따른 해 묵은 감정과 실리가 엉켜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문제는 소련이 해체되고 독림국가연합이 성립되었으나 중국과 러시아연방이 앞으로도 풀어 가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네르친스크조약을 체결한지 얼마 후가 되는 1712년(조선 숙종 38년, 청 강희 51년) 청의 오라총관 목극등과 조선의 한성부 우윤 박권 사이에 백두산정계비라는 걸 세웠다. 그 전후의 사정을 여기서 다 설명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다.

 

다만 비문에 서로는 압록, 동으로는 토문이 예부터 갈라 흐르는 지점에 돌에 새겨 경계를 삼는다(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 勒石爲記)라고 했는데, 훗날 청나라가 조선의 종주권(宗主權)을 포기하면서 두 나라 국경선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서쪽의 압록은 압록강으로 양국 모두 이설이 없었으나, 동쪽의 토문을 두고는 이견(異見)이 팽팽히 맞섰다. 土門이 어느 강을 가리키느냐? 조선에서는 도문을 중국에서는 두만을 고집하고 이래서 이른바 간도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러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외교권이 일제에게 넘어가자 일제는 청과 1909년 간도협약이라는 걸 맺어 토문이 두만강이라는 중국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이 정해짐으로서 간도는 청나라의 영토가 되었고, 그 대가로 일제는 안봉선 철도 부설권을 얻었다.

 

냉혹한 국제사회에서 힘이 곧 정의라는 것을 일깨워 준 뼈아픈 교훈만을 우리들에게는 남겼다. 그리고 백두산정계비는 일제시대에 어디론가 사라졌고 지금까지 그 행적을 찾을 수 없다.

 

(2) 해머를 쥔 직공(職工) 황제와 바다로 나가는 길

 

크렘린으로 돌아온 17세의 표트르 1세는 모후에게 정치를 맡기고 그 자신은 전과 다름 없이 병정놀이에 몰두했다. 실세(實勢)의 황제가 하는 병정놀이란 말이 병정놀이지 사실은 강도 높은 군사훈련과 교육이었다.

 

그런지 5년 후가 되는 1694년, 섭정 자리에 있던 모후 나타리아가 죽었고, 22세의 청년으로 성장한 그는 단독으로 러시아를 통치하게 되었다.

 

친정(親政) 이듬해인 1695년, 표트르 1세는 바다 길을 열기 위해서 아조프(Azov)해 연안에 있는 투르크의 요새(要塞)를 공격하기 위해서 원정을 감행했다.흑해 북쪽에 있는 이 바다를 통해서 흑해를 거쳐 지중해로 나가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경험없이 서둔 원정은 완전한 실패로 끝났고, 패전의 쓰라린 경험을 안고 귀국 후, 자신이 이마에 구슬 땀을 흘리면서 함대(艦隊) 건설에 치중하여 이듬해 다시 원정, 육해(陸海) 협공으로 가까스로 투르크의 요새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흑해로 나가기 위해서는 아시아·아프리카·유럽의 3대륙에 걸쳐 있는 투르크제국과 정면으로 대결해야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러시아자체의 힘도 길러야 되지만, 유럽 여러 나라들과의 친선관계도 유지되어야 한다.

 

1697년, 투르크에 대한 서유럽 기독교국가들의 동맹체결이라는 표면적 이유를 내세우고, 내면적으로는 서방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 250명이나 되는 대규모 사절단(使節團)을 서유럽에 파견하면서, 자신도 황제의 신분을 속이고 표트로 미하일이란 이름으로 그 속에 끼여 네덜란드의 조선소(造船所)에서 평범한 직공(職工)으로 손수 해머를 잡았다. 신분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지만 그것이 오래갈 리가 없다. 해머를 잡은 러시아 황제를 보기 위해서 네덜란드 시민들이 모여드는 법석을 떨자 다시 암스텔담의 조선소로 자리를 옮겼다.

 

이렇게 4개월간 네덜란드에 머물면서 공장, 미술관, 병원, 양육원, 천문대, 해부학 교실 등을 두루 살펴 보았다.

 

이듬해는 영국으로 건너가 윌리엄 3세로부터 따뜻한 환영과 함께 요트까지 선물로 받고 최신식 군함을 직접 살필 기회도 얻었다. 그 밖에 대학, 극장, 조폐국, 국교회, 의회 등도 두루 살펴 보면서 자신이 직접 종이와 펜을 들고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빠짐없이 기록했다.

 

북방의 후진국 러시아 황제로서는 놀라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본국에서 총병대의 반란이 일어났다는 급보를 받고 급거귀국하는 바람에 영국과의 동맹체결이나 더 이상의 체류는 불가했지만 그가 보고 느낀 것은 너무나 많았다.

 

(3) 북방전쟁(Northern War / 1700 ~ 21)

 

발트해와 흑해 인근 지도북반구의 북단에 위치한러 시아의 방대한 영토는 한랭(寒冷)한 기후로 불모의 땅이 많으며,

 

북빙양이라는 바다와 북쪽으로 접해 있으나 북극의 찬 공기가 긴 겨울 동안, 이 바다를 얼음으로 덮어 버려 바다로서의 기능을 잃게된다.

 

따라서 러시아의 대외정책은 언제나 따뜻한 남쪽의 얼지 않는 바다, 곧 부동항(不凍港)을 찾아서 남쪽으로 향하는 남하정책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18세기 벽두 러시아는 우선 유럽으로 나가는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서 서쪽의 발트해에 눈길을 먼저 돌렸다.

 

그러나 발트해에는 30년 전쟁 후 북방의 강자가 된 스웨덴이 이 일대에 패권을 차지하고 있어서  접근이 쉽지를 않았다.

 

이런 스웨덴의 팽창과 독주(獨走)는 비단 러시아 뿐만 아니라 주변국 모두에게 크다란 부담인 동시에 위협이었다.

 

러시아의 표트로 1세는 우선 이해관계가 같은 당시 폴란드왕을 겸하고 있었던 독일의 작센공(公) 아우구스트 2세와 1698년 양국이 공동전선을 펴서 스웨덴에 대항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것이 대(對) 스웨덴 동맹의 시작으로서 후일 덴마크와 프로이센, 하노버 등이 여기에 참가하였다. 유럽의 사절단의 일원으로 갔던 표트르 1세는 귀국즉시 총병대의 반란을 진압하고 스웨덴과의 일전을 준비했다.

 

1700년 서유럽에서는 루이 14세의 손자가 펠리페 5세로서 스페인 왕위를 이어면서 스페인왕위계승 전쟁이 시작되었고, 북쪽에서는 폴란드가 스웨덴에 선전포고로 이른바 북방전쟁(北方戰爭)이 시작되었다.

 

1700년 7월, 러시아의 표트르 1세는 발트해를 수중에 넣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스웨덴으로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나갔다. 그러나 탄약과 장비, 훈련 모두가 부족했던 러시아 군은 그 해 11월 스웨덴의 나르바(Narva) 요새를 공격했으나 총병력의 1/3과 포병대와 지휘관급 80명을 잃는 쓰라린 패전으로 끝났고, 이때. 표트르 1세의 상대는 18세의 스웨덴의 소년 왕 캬를 12세(Karl 12 / 1682 ~1718)로서 28세의 이 러시아 황제에게 일격을 가하여 자존심에까지 심한 상처를 입혔다.

 

그런데 스웨덴의 이 소년 왕은 러시아와의 전쟁은 끝난 것으로 판단, 모스크바로의 진격을 멈추고 발길을 폴란드로 돌려 버렸다. 결과적으로 대(對) 스웨덴 동맹은 해체시켰으나, 한 숨 돌린 표트르 1세가 10개의 연대를 편성하고 교회와 수도원의 종(鐘)까지 거두어 300문 이상의 대포도 새로이 만들고, 네바강 하구에 요새를 구축할 수 있는 시간을 준 실수를 저질렀고, 그 결과는 10년이 채안되어 현실로 나타났다.

 

1709년 폴타바전투(Battle of Poltava)는 양국의 운명을 가르는 중대한 일전이었다. 뒤 늦게 모스크바로 진격한 카를 12세의 스웨덴군은 러시아 특유의 초토작전(焦土作戰 / scorched earth strategy)을 만나 모스크바 공략을 단념하고 남하하여 우크라이나·카자흐와 합류하려고 하였다.

 

표트르 1세의 러시아군은 1708년 레스나야의 전투에서스웨덴의 원군을 격파하고 카자흐 반란군을 패주시켰으며, 1709년 동우크라이나의 폴타바 부근에서 카를 12세의 본대와 결전을 벌여 그야말로 악전고투 끝에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러시아로서는 나르바 패전의 설욕을 9년 후에 갚은셈이고 동시에 對스웨덴 동맹(덴마크·작센·폴란드·러시아)을 부활시키면서 러시아의 위세가 갑자기 부상하게 되었다.

 

카를 12세는 투르크로 도망, 투르크를 선동하여 러시아와 싸우게 하였으나, 표트르 1세는 재빨리 투르크와 화평을 체결한 뒤 병력을 발트해로 집중시켜, 14년 한고해전에서 스웨덴 함대를 격파하고 발트해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1718년 카를 12세가 전사함으로써 전의(戰意)를 잃은 스웨덴은, 수도 스톡홀름이 러시아에 점령될 위기에 몰리자 1721년 8월 30일 프랑스의 중재로 필란드의 서해안 도시 니스타드에서 강화 조약(Treaty of Nystad)을 체결하므로써 20년 이상 지루하게 끌어온 북방전쟁은 막을 내렸다.

 

이로써 러시아는 리보니아·에스토니아·인그리아·카렐리아의 일부를 얻음으로써 발트해 진출의 오랜 꿈을 이루었고, 동시에 유럽의 열강에 들게되었으며, 러시아의 원로원은 표트르 1세에게 임페라톨(大帝 혹은 皇帝)의 칭호를수여했다. 반대로 스웨덴은 30년전쟁 이래 지켜온 북유럽 패자(覇者)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였다.

 

발트해의 패자가 되었고, 유럽의 열강 대열에 들어갔다면러시아 국민들은 과연 격양가를 부르고 베개를 높여 잠잘 수 있었는가? 250년 가까이 몽골의 지배하에 있었고, 비잔틴제국을 계승했다는 러시아에서는 동방적인 요소가 대단히 많았다. 이런 러시아에서 표트르 대제의 근대화 정책은 서구화 정책이라고말 할 수 있을 정도로 유럽의 문물을 수용했다.

 

이런 서구화 정책으로 모든 국민들이 고루 잘 살게되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그러나 모든 제도와 관습이 하루 아침에 바뀔 수는없다. 그 열매는 일부 특수 층에게만 돌아갔을 뿐, 다수의 서민생활은 그 반대로 치닫고 있었다.

 

- 다음호에 계속 -

Homeland - Kenny G

세계는 지금..........Sun. 9. Dec.2001

국가사적 제191호(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공양왕릉이
도굴꾼들에게 훼손되었다고 한다.
공양왕 그가 누구인가?
이성계일파의 쿠데타로 1389년 엉겹결에 왕은 되었지만
그것은 다만 조선왕조를열기 위한 수순일 뿐, 그는 끝내 유배지를 돌다가
허망한 죽음을마지하고 고려의 마지막 왕이라는 이름만 남길 수 있게 되었다.

1941년 12월 8일 미명(미국 7일)
일본 제국주의는미국제국주의의 간섭과 制約을
싫어하고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공격, 미국 해군 함대를
두들겨 태평양 전쟁은 시작되었고, 4년여에 걸친 전쟁의 결과는
일본의 패전으로 마감되었지만, 다시반세기가 지난 지금 그들 제국주의
후예들은 여전히 세계의 강국으로서자리 매김에는 한 치의 변화도 없는 듯 하다.
 

 

국경 없는 수천마리의 흰 기러기들이 멋있는비상으로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주의 삼각주에 있는 조류보호구역에날아들고 있다
이들 기러기는 매년 가을이면 멀리 러시아 시베리아지역의 섬에서 무려 5천km에
이르는 거리를 날아 시베리아의 차가운겨울을 피해서 이곳으로 모여든다. (로이터/Andy Clark)

Afghanistan과Uzbekistan의 우정의 다리로 일컬어진
 이 다리가 1주일 전에미군의 보급 수송을 맡기 위해 다시 열렸다
Dec. 8, 2001,(AP Photo/B.K.Bangash)
 

미국 해병대 병사들이6일(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 남부 캠프 리노 외곽 지역에서
먼지를뚫고 정찰 활동을 벌이고 있다. 아프간 남부 지역에서 작전 수행 중인이들은
한 걸음 한 걸음이 몹시 겁난 듯 앞을 예의 주시하면서 조심스럽게발 자국을 옮기고 있다.

미국의 대대적인 공중의 지원을 받은 북부동맹군의탱크들은
기세 등등하게 헤라트를 떠나 탈레반 진영으로 향하고있는데,
이미 탈레반 정권은 붕괴 일보 직전에 와 있다...
그렇다면누가 아프가니스탄을 이끌어 갈 것인가?
종족과 언어 구성이 복잡한이들 사회가 유목민 특유의 대립까지 보태진다면
내전은 이제부터시작이 아닐까? 강대국의 以夷制夷 논리에 휘말 리지 나 않는지?
Sunday Dec. 9, 2001. (AP Photo/Kamran Jebreili)

R&B그룹 "데스티니스 차일드" 멤버들이 4일(현지시간) 라스베이거스에서열린
2001 빌보드 뮤직 어워드 시상식에서 올해의 아티스트상을받은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베욘세 놀스, 켈리 롤랜드,그리고 미셸 윌리엄스 (로이터/Ethan Miller-Las Vegas 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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