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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여행2 - 진안박물관을 구경하면서 임진왜란 웅치전투와 이치전투를 회상하다!
2022년 9월 9일 승용차로 부산을 출발해 거제 - 대전간 고속도로를 타고 북상해서는 진안
으로 들어가 예약한 호텔에 체크인을 한후 나와 진안 박물관을 구경하니 웅치전투
그림이 보이는데 웅치전투는 이치 전투와 함께 거론되니 그 전의 임진왜란을 생각합니다.
1592년 음력 4월 13일 부산 영도에 상륙한 왜군은 다음날 4월 14일 부산진성을 함락하고 4월 15일 동래성
을 서너시간만에 빼았으니 판옥선 35척(이순신은 25척)을 가진 부산의 경상좌수영 박홍은 겁에
질려 단 한척의 배도 띄우지 못하고 대포를 바다에 버린후 배를 불지르고 수군을 해산한후 혼자 도주합니다.
전투 전에 동래성을 뻐져나간 경상 좌병사 이각과 경상 우병사 조대곤도 싸움한번 해 보지 않고 모두
도주했으며.... 4월 17일 김해성은 김해부사 서예원은 진남문에서, 초계군수 이유검은 해서문
에서, 의병장들이 해동문과 공진문에서 전투를 지휘했는데 부사와 군수가 도주하니 20일 함락됩니다.
대구에 모인 10만(?) 제승방략군을 지휘할 순변사 이일은 서울에서 병사 3백명을 구하지 못해 3일간
출발조차 못하니 대장은 오지않고 왜군이 온다는 소문에 흩어져 버리는데, 딱하게 여긴 유성룡
이 부관은 남아 병사를 모으고 이일은 5~ 6명과 함께 내려가라고 독촉하니 상주에 이르러 쌀
창고를 열어 농민 500명을 모아 훈련중 4월 25일 왜군의 기습을 받고 30분도 안돼 몰살당합니다.
4월 28일에는 도순변사 신립의 1만 6천(8천?) 대군이 고니시 유키나가군과 야전을 치르다가 기마병
이 돌격시도를 했지만.... 들판에 장애물이 많아 여의치 않았던데다가 창기병이 아닌 궁기병
이라 가까이 가지도 않고 활만쏘고 원을 그리며 도는 전술로 왜군의 3단 연속 사격
조총전술에 몰살당하니 겁을 집어먹은 병사들은 싸우지도 않고 도주하다가 강에 빠져 전멸합니다.
이순신과 원균의 수군은 5 월 7일 옥포해전에서 6월 5일 당항포 해전까지 6번의 해전에서 승리
했지만.... 육지에서는 김명원의 한강방어군과 이양원의 한성방어군이 겁을 집어먹고 전투
없이 도주했으며, 5월 18일 임진강 전투에서도 1만 3천명의 조선군은 적의 꼬임에 빠져
일부가 강을 건너 기습했다가 몰살시킨 가토군이 강변에 모습을 드러내자 전투없이 도주합니다.
육지에서 조선군 최초 승리는 5월 16일 해유령전투 인데 한강에서 싸움없이 도주했던
부원수 신각의 조선군은 함경도 병마절도사 이혼의 군사들과 합류해 마을에서
약탈중이던 왜군 70명을 맞아 포위해 60명을 죽이는 첫 승전보를 올리지만.....
신각이 탈영했다는 김명원의 장계를 받은 선조가 보낸 선전관에게 신각은 참수당합니다.
이후 용인전투가 벌어지니 전라감사 이광 2만, 전라 방어사 곽영 2만, 충청도 순찰사 윤선각
1만 5천에 경상 감사 김수등 5만 6천 남도근왕군이 북상하니 도중에 불어나서 8만명이
용인에 도착했는데, 수군인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경상도 조선 수군이 전투없이
도주하자 상륙해 자신은 1천으로 서울에, 부장은 600명으로 용인에 주둔중 이었습니다.
이광의 지시로 선봉장 이지시와 전라도 방어사 곽영, 방어사 백광언등 2,000명의 정예 군사
들이 함께 6월 5일 왜군을 공격했는데... 백광언은 적의 숫자가 적은 것을 보고 먼저
갔다가 선봉장 이지시 등과 함께 전사하니 믿었던 맹장들이 어이없이 죽자 조선군의
사기는 떨어지는데 저 무리 중에 그나마 전투를 아는 병사들이 전부 몰살당한 것 입니다?
다음날 6월 6일 군사들이 흩어져 아침 밥을 지어먹고 있을 때 왜군이 산골짜기를 따라 기습해 쳐내려오니
왜군은 불과 1,600명이건만 겁에질린 8만이나 되는 조선군은 너나 할것없이 무기도 챙기지 못한채
앞다투어 도주하다가 골짜기에서 넘어져서 그 위에 사람들이 쌓여 질식사하니 용인전투(龍仁戰鬪) 입니다.
이때 병사를 수습한 군대는 광주목사 권율의 1천과 별부장수 황진의 수백명 뿐이니 저 8만
(5만?) 을 칭하던 군대는 적의 총에 죽거나 도주하다가 계곡에서 넘어져 깔려 죽거나
산속을 헤메다가 굶어 죽었으며..... 나머지는 전라도 고향집 까지 도주한 것으로 보입니다.
전라도 근왕군이 서울을 수복할 것으로 큰 기대를 걸고 평양성에 10만석 군량미 까지
모아 쌓고는.... 명군이 구원병으로 올 때 까지 평양성을 사수하겠다고 결심
했던 선조도 근왕군이 몰살됐다는 소식에 기겁하고는 낙담해서 의주로 도망칩니다.
평양성은 광해군과 도원수 김명원에 윤두수와 이유원등이 4천으로 지키고 있었는데 6월
14일 고언백 4백명이 적을 기습했다가 실패하고 도망쳐오니, 그 뒤를 쫓아
일본군이 강을 건너자 조선군은 무기를 풍월루 연못에 빠트리고는 전투 없이 달아납니다.
웅치 전투의 배경을 살펴보자면.... 일본군은 한성을 함락한후 조선을 분할통치하는 방식을
결정하니 9명의 장수가 서울과 조선 8도를 하나씩 차지해서 다스리는 것이라 호남을
배정 받은 제 6군 고바야카와군은 서울에서 내려와 5월 부터 호남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일본은 임진왜란에 육군은 1군부터 9군까지 16만명에 수군은 1만명등 17만이 건너왔는데 그 중에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군은 1만 5,700명으로 고바야카와 다카가게 10,000명, 다치바나 무네도라 2,500,
모리 히데가네: 1,500명, 츠구시 고오몬: 900명 다카하시 나오지 800명으로 부관은 승려 안코쿠지였습니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1만명은 전라도 금산으로 공격해 들어왔으며 부장인 안코쿠지 에케이는 창원
에서 출발해 정암진을 건너 삼가, 함양을 지나 전라도로 진출하려고 했으니 5월 24일 안코쿠지
는 2,000여명의 선봉대를 정암진 인근으로 보내어 도하 지점을 골라 푯말을 세워두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날 밤 곽재우의 의병들은 일본군이 세워놓은 푯말의 위치를 늪지대로 옮겨 세워두도록
하였고.... 이를 몰랐던 안코쿠지의 주력군은 푯말을 따라 진격하였으나 결국 늪지대에
빠지게 되어 미리 매복하고 있던 곽재우의 의병 50명에게 일제히 기습을 받아 크게 패배합니다.
안코쿠지는 성주로 우회해 금산에서 고바야카와 다카카케와 합세하는 것으로 진로를 바꾸었으며
당시 전라도 군대는 용인 전투에서 대패로 많이 소진된 상태였으며 거기에다가 의병장
김천일과 전라병사 최원이 2만 2천의 병력을 이끌고 서울로 북상해 병력이 부족한 실정이었습니다.
왜군의 공격을 감지한 전라감사 이광은 전라도 방어사 곽영을 금산에, 이계정은 육십령에, 장의현은
부항에, 마지막으로 김종례는 동을거지에 배치해 방어태세를 갖추니 6월 17일 무주에 출현한
고바야카와 군은 6월 22일 금산의 제원에 도달해 조선군과 교전을 벌이니 금산 군수 권종
은 전사했고 곽영과 김종례는 고산현으로 퇴각했으며 6월 23일 금산성이 왜군의 손에 들어갑니다.
금산을 점령한 고바야카와 군은 진안과 용담을 함락한 뒤 전주로 향하기 위해 남하했으니 용담에서 진안을
거쳐 들어오는 길목에 자리한 웅치고개에는 김제 군수 정담, 동복 현감 황진, 나주 판관 이복남, 전 전주
만호 황박이 방어선을 구축했는데 왜군 총대장은 고바야카와 부장인 안코쿠지 에케이 5천명(?) 이었습니다.
황진은 남쪽 장수 방면을 지키던 조방장 이유의가 달아나자 남원 방어를 위해 내려갔다가 7월 5일경 다시
웅치로 귀환하라는 지시를 받는데.... 조선군은 제 1방어선인 산 아래에는 의병장 황박을 배치하였고,
제 2방어선 산 중턱에는 나주 판관 이복남을, 최종방어선인 산 정상 제3방어선에는 정담이 배치되었습니다.
일본군은 음력 7월 7일 새벽 야음을 틈타 조총을 앞세워 공격해왔지만 조선군이 사력을 다해 싸워
막아내었지만 해가 뜨자 일본군의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되었고 1선의 황박군이 밀려났으며,
이에 따라 2선의 이복남 군이 나서 맞섰지만 제쳐졌고 산 정상의 정담군과의 혈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정담군은 사력을 다해 맞섰으며 지휘관 정담이 활을 쏴 적장을 쏘아 맞힐 정도의 혈전이었는데 치열한
육박전이 전개되었고 날이 저물고 일본군의 피해가 막심하자 퇴각했지만... 이내 조선군의 화살
이 다 떨어진 것을 알게 되자 재공격해 왔고 치열한 전투속에 정담, 강운, 이봉 등이 전사하였습니다.
날이 밝은 뒤 왜군은 조선군의 시체로 덮인 언덕을 넘어 전주로 향했으니 남은 조선군을 이끈 이복남
은 군사를 수습해 전주 동쪽 10리에 위치한 안덕원에 방어선을 쳐 재차 왜군을 맞았습니다.
때마침 귀환 명령을 받고 북상한 황진의 군사가 합류해서 지친 왜군을 공격해 간신히 왜군을 저지할 수
있었고 간신히 한숨을 돌린 조선군은 이광의 지시를 받은 의병장 이정란 지휘하에 전주성에서
방어태세를 갖추니.... 왜군은 전주로 진격하지 않고 진안에 머무르다가 7월 17일 금산으로 물러갑니다.
왜군도 조선군의 분전에 감명을 받았는지 퇴각하는 길에 조선군의 시신을 모아서는
조선국 충간의담(弔朝鮮國忠肝義膽) 이라는 비석을 세워주어 그들의 충절을
기렸다고 하는데..... 아마도 대장인 안코쿠지 에케이가 승려였기 때문인가 합니다?
조선군은 큰 피해를 입었으며 총지휘관이 전사하는 패배를 겪었고 왜군의 규모와 피해상황은
알수없으나 고바야카와가 이끄는 본대가 곧이어 벌어진 1차 금산전투에서 6천의 고경명군
에게 가볍게 승리하고, 웅치 전투에서 한달 이상 지나 벌어진 이치 전투에서 권율군을
압도하는 병력을 투입한 것을 감안하면 웅치에 투입된 병력이 대군은 아니었을 것으로 봅니다.
난중잡록에서는 앞서 곽재우와 교전한 안코쿠지 군의 진로를 기록하며 현풍의 쌍산역(雙山驛, 현풍
북쪽 15리)을 거쳐 뱃길로 경북 성주로 향한 안고쿠지 군의 배가 18척이었다고 적었으며
그리고 험한 고갯길을 점거하고도 그런 왜군에게 밀린 조선군은 그보다 더 적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치전투(梨峙戰鬪)는 1592년 전라도 진산군과 고산현 경계의 이치에서 전라도 절제사 권율이
이끄는 조선군 1,500명과 일본 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군 1만이 맞붙은 전투로
이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전라도 공략에 실패하게 되는데 전투일자는 웅치
전투 다음날인 음력 7월 8일과 한달 후인 8월 17일 또는 8월 28일 세가지 설이 있습니다?
4월 27일 경상감사 김수의 구원요청을 받은 전라방어사 곽영은 조방장 이지시와 5,0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경상도 구원에 나서 4월 30일 경상 우방어사 조경, 군관 정기룡과
함께 금천역에서 교전을 벌여 수급 30여급을 얻고 5월 4일 전라도로 귀환했으며 조방장
이유의는 도순변사 신립에게 합류하기 위해 2,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북상하다가 후퇴합니다.
신립 패전소식을 접한 조정은 평양으로 몽진하는 한편 이광에게 근왕병을 모으게 했으니 전라감사 이광은
5월 1일 근왕병을 이끌고 북상하다가 공주에서 선조의 파천소식을 접하자 해산시키는데.... 장성
현감 백수종, 고선현감 신경희, 광주 목사 권율, 전 첨사 백광언이 싸울 것을 건의했으나 듣지 않았습니다.
모여든 이들이 실망하고 인심은 몹시 흉흉하여 불안해지니 사람들은 앞으로 조정의 명령이 통하지
않을것이다 하였으니 가뜩이나 4월 30일 선조가 한양을 떠나 몽진길에 오르는 파천으로 민심이
급격히 이반된 상태였는데 유교적 절대 왕정인 조선에서 임금의 파천은 민심을 크게 동요시켰습니다.
경상감사 김수가 그랬듯 전쟁 준비로 도민들을 꽤나 들볶았던 전라감사 이광은 근왕을 포기한
일로 민심을 크게 잃었고 때마침 근왕을 독려하는 조정의 교서가 도착하자 재차
근왕병을 모집해 나섰는데, 고을에 할당된 군사 숫자를 채우기 어려워 무리하게
징집하자 반발이 일어났으니....... 정여립 사건으로 유림들이 대거 사라진 영향도 컸습니다.
순천과 옥과의 군사들이 형대원과 조인을 맹주로 추대하고 노령을 근거지로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들은
순창으로 들어가 관에 불을 지르고 약탈을 저질렀으며 순창군수 김예국은 간신히 빠져나왔으니 근왕
을 위해 병력을 이끌고 오는 담양부사 이경린의 군사도 난군(亂軍)을 만나 담양의 군사들도 흩어졌습니다.
남원, 구례, 순천 군사들도 삼례에서 반란을 일으켜 제지하는 관리들을 찌르고 달아나자 이광이 고부군수
왕경조에게 퇴각하는 군사들을 참하라고 하자, 왕경조는 군사들에게 잡혔다가 전주에서 간신히
빠져나왔으며.... 훗날인 1592년 12월,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장계를 올려 팔도의 일을 전라도가 다
맡아서 하느라 피폐함이 이루 말할수 없다면서, 자신의 마음은 이미 죽고 형체만 남았다고 말합니다.
김예국이 조인을 잡아 죽임으로써 사태는 겨우 진정되었고, 이광은 근왕에 나섰으니 전라도 4만, 경상도
80명, 충청도 8천명의 삼도근왕병이었으나 6월 5일 용인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끄는 왜군
1,600명과 교전하니.... 산위에서 쳐들어 내려오자 겁에질린 조선군은 무작정 도주해 소멸해 버렸습니다.
6월 17일 무주에 출현한 고바야카와 군은 6월 22일 금산에 도달해 조선군과 교전을 벌여 금산 군수 권종은
전사했고 곽영과 김종례는 고산현으로 퇴각해 다음날 금산성이 왜군의 손에 들어갔으며 웅치에는 정담,
황진, 이복남, 황박이 방어선을 구축했고 금산 함락 소식을 듣고 남하한 고경명 의병대가 연산에 주둔합니다.
전라방어사 곽영은 고경명의 의병대와 합류해 금산 공격을 위해 나선 무렵인 7월 7일, 왜군부장
인 안코쿠지 에케이의 4~5천이 웅치 고개로 밀어닥치니 교전 끝에 정담이 전사하고
패한지라 후퇴한 이복남은 남은 군사를 수습해 전주 방어에 임했는데, 왜군이 전주를
공격하지 않고 물러간 것은..... 금산에서 고경명 의병대가 왜군 본진을 공격한 때문으로 봅니다?
그 사이 고경명 의병대는 진안(웅치) 후방인 금산에서 왜군 고바야카와 다카가게군의 본진을
공격했으나 7월 10일 참패했고 고경명, 유팽로 등은 전사했으니 1차 금산 전투인데...
무려 6,700명의 의병 부대와 이들과 함께한 전라방어사 곽영의 관군이 와해
되면서 전라도 군민은 한층 부족해진 병력으로 왜군의 2차 공격에 대비해야 했습니다.
아래 알려진 시기 문제까지 고려하면, 조헌이 영규의 병력과 합쳐서 1,400여명의 병력이 죽은 제2차 금산
전투도 이치 전투 이전 시기에 포함된다고 치면 이 2번의 전투로 합쳐서 약 8,000여 병력 중 상당수
가 없어졌으니.... 이에 따라 이치전투에 참전한 조선군 총합이 1,500명 내지 2,000명 미만으로 봅니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웅치전투후 본대를 이끌고 이치로 진군하자 전주에 입성했던 권율은 황진, 황박,
권승격, 공시억, 위대기등과 이치로 이동하여 목책과 장애물을 설치해 방어전을 준비하는데
고바야카와는 부대를 2개로 나누어 교대공격하면서 조선군의 방어선을 무너뜨리려 했으니 일본군이
장애물 지대를 통과하자 조선군은 화포로 타격하고, 목책에 가까이 오자 화살과 돌 세례를 퍼부었습니다.
일본군 1만은 큰 피해에도 불구하고 후방의 조총 사격 지원을 받으면서 공격을 계속했으니 1,500명 내지
2천명 조선군의 권율은 방어진을 돌며 군사들을 격려하였는데, 전투를 피해 숨어있는 병사를 발견하면
몰래 그 병사의 군모에 표시를 한 다음 일본군의 공격이 잠시 주춤할 때 그 병사를 잡아 목을 베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일본군 공격에 조선군 전력이 조금씩 약해지기 시작했으니 이를 타개하고자
권율은 황진과 편장 공시억, 위대기에게 일부 병력을 이끌고 일본군의 측면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갑자기 측면에서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당황하여 공격이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황진의 활약이 눈부셨는데 황진은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에 샀던 일본도 2자루를 휘두르며 일본군을
베고 다녔으며 상대가 멀리 있으면 강궁으로 적을 사살하고 다녔으니.... 일본군이 황진을 포위해 참살
하려 했으나 황진의 무용에 당해내지 못했고 결국 조총으로 일제사격을 가해 황진이 부상을 입게 됩니다.
일본군은 다시 사기가 올라 조선군을 맹렬히 공격했고 결국 목책 일부가 무너져 내부로
일본군이 진입하는 사태가 벌어지니 황진의 부상으로 사기가 주춤한 조선군은 사기
가 더 떨어졌고 방어진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이에 권율은 도망치는 병사
들을 잡아 즉결 처분하면서, 몸소 일본군에 돌격하여 적병을 베며 사기를 독려했습니다.
예비 병력을 투입하여 일본군을 다시 방어진 밖으로 몰아내는데 성공했으며 오후 4시가 되도록 일본군은
조선군을 무너뜨리지 못했고 여기에 고경명이 이끄는 의병대가 금산성으로 진격한다는 첩보가 왜군에
들어오면서 후방이 염려된 대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철수를 결정하여... 일본군은 퇴각하고 말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이치 전투는 7월 8일 웅치 전투와 동시에 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이는 선조
수정실록과 임진전란사의 영향인데, 선조수정실록은 그달에 있었던 일들을 모아 1일
짜로 적어두었는데 거기에 이 두 전투가 나란히 실려있고 전산화가 되어있지 않아
60년대 저작인 임진전란사가 두 전투가 동시에 발발한 것으로 서술하면서 인식이 굳어졌습니다.
금산과 이치 사이에 진산이 아닌 연산에 고경명 의병대가 7월 2일부터 주둔하고 있었으나 진산과
연산은 25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고 대둔산의 험한 줄기로 가로 막혀 있어 이치의 전투에
고경명군의 참전은 어려웠을 것이니, 애초에 고경명은 전라도 방위가 아니라 근왕을
외치면서 한양 공격을 위해서 북상을 시도중이었다가 다시 금산으로 목적지를 바꾼 것이었습니다.
조경남의 난중잡록에서는 7월 10일조에 7월 20일 왜군이 진산으로 내려와 관사를 불태우고 금산으로
돌아갔다고 적고 뒤에 전라도 관군의 병력 집결 현황등 다른 내용을 적은 뒤에 다음 기사를
실었습니다. 금산의 적 수천여명이 진산(珍山)에 들어와 불을 지르고 약탈하니 이현(梨峴)
의 복병장(伏兵將) 인 광주 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 동복 현감 황진 등이 군사를 독려하여 막아 싸웠다.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금 퇴각하는 바람에 적병이 진채(陣寨)로 뛰어드니 우리 군사들이 놀라
무너지는지라, 권율이 칼을 뽑아들고 후퇴하는 아군을 베며 죽음을 무릅쓰고 먼저
오르고 황진도 역시 상처를 움켜쥐고 다시 싸워 우리 군사 한명이 백명의 적을
당하지 않는 자가 없으니 적병이 크게 패하여 기계를 다 버리고 달아났는데 30여명을 베었다.
이 기사를 근거로 이치 전투 개시 시점을 7월 20일로 보는 연구자들이 있으며 또한 난중잡록
기사가 전해들은 내용을 후에 모아 적은 것임을 감안해 황진행장에서 황진이
이치에 배치되었다고 기록된 7월 10일부터 7월 20일 사이였을 것 이라는 연구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난중잡록에서 왜군이 진산 관아를 불살랐다는 기사와 이치 전투를 연달아 벌어진 사건
으로 본 것인데, 난중잡록 기사는 조경남이 체험한 것 이외의 부분은 전해듣거나 본 것을 한데
몰아 적은게 많기에 진산 방화와 이치 전투도 연이은 사건이라 단언할수 없다는 반론이 제기됩니다.
선조수정실록에선 웅치 전투와 함께 7월 1일 기사에 실었으니 자세한 일시는 불명이나 어쨌든 7월에 일어
났다고 적은 것이니 웅치 전투에 참전했고 이치 전투에서 전사한 황박의 후손이 조상의 행적을 정리
해 펴낸 죽봉황공유적(竹峯黃公遺蹟)에선 이치 전투와 황박이 전사한 시점을 8월 28일로 기록했습니다.
권율의 행장과 행적을 담은 만취당실기(晩翠堂實記)에 실린 이치주첩서(梨峙奏捷書)에는
고경명과 조헌이 이미 순절했다고 적어 2차 금산 전투가 벌어진 8월 18일 이후의
일로 기록했는데 조익의 포저집(浦渚集)에 실린 황진행장에선 7월 10일에 이치에
도착해 공시억, 위대기, 황박과 며칠간 지키다 왜군이 공격하자 교전을 벌였다고 적었습니다.
오희문이 전란을 피해 피난하는 과정에서 보고 들은 일을 기록한 쇄미록(瑣尾錄)에선 광주 목사에서
나주 목사로 전임된 권율이 7월 15일 나주에서 장수로 향하다가 7월 17일 태인군에 있던
이광의 부름을 받고 그쪽으로 향했다고 하며 8월 9일 기사에 7일부로 전라도 각지의 관군이
금산성 탈환을 위해 집결하기 시작했다고 적었는데 난중잡록에선 7월 10일 기사에 적힌 내용입니다.
작전은 중간에 중지되었으나 일부 관군은 공격을 강행해 8월 9일 금산쪽으로 나아갔다가 패배해,
남평 현감을 비롯한 500여명의 전사자를 냈는데 쇄미록은 역공에 나선 왜군을 8월
17일에 격퇴한 전투가 이치 전투라 적고 있의니 이는 후대의 기록인 만취당실기와도 일치합니다.
권율이 전라 감사겸 전라 순찰사 승진에 대한 기록에서 실마리를 찾을수 있으니 선조 실록에서 권율이 전라
감사겸 순찰사로 임명된게 7월 22일인데 만약 그전에 이치 전투가 있었다면 실록 기사엔 간략히 하는
과정에서 들어가지 않을수 있다쳐도 개인기록에는 이치 전투의 공으로 승진했다는 기술이 있을 법 합니다.
하지만 실록의 해당 기사는 물론 사위 이항복이 지은 권율의 유사와 묘비명, 최립이 지은 권원수행
주비, 신흠이 지은 신도비명 어디에도 권율이 이치 전투에서 공을 세워 전라 감사가 되었다는
대목이 없으니 권율의 전라 감사 임명은 이치 전투와 무관할 수도 있다는 추정이 가능해집니다.
권율의 묘비명을 비롯한 개인 기록에 이치 전투 승전과 승진이 관련있다는 기술이 존재하지
않으며 참전자인 권율과 황박의 기록을 담은 만취당실기와 죽봉황공유적. 전라도
장수에 연고가 있었고 피난생활을 하기도 했던 오희문의 쇄미록이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8월 중하순이 가장 유력하긴 한데 이 기록들이 전투와 시차가 있는게 문제입니다.
시기 문제는 전투의 규모 문제와도 연동이 되어 있으니 웅치 전투와 동시에 일어났느냐, 양차 금산전투
이전이냐 이후냐에 따라 고바야카와가 동원 가능한 병력이 달라지는데 이치, 웅치 전투가 동시기
에 일어났다면 군사는 적었겠지만 한참 후에 일어났다면 만명이 넘는 대군을 동원했을 것으로 봅니다.
금산 전투는 용인 전투의 대패 이후 전라도는 방어 병력이 괴멸되었고, 잔존 병력들이 각 지역에 할거하는
수준이었으니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6군 2만 병력이 전라도 확보를 위해서 움직였으니 경상우도에서
전라도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곽재우 의병에게 방해를 받았던 고바야카와는 병력을 2로 로 나누었습니다.
1군 병력은 자신이 이끌고 금산으로 나아갔고, 2군은 부장 안코쿠지 에케이에게 줘서 무주를 점령하게
했는데 용인 전투의 패장인 전라 감사 이광이 두 지역의 요지인 팔랑치에서 막으려고 했으나
뚫렸고 이후는 파죽지세로 금산과 무주도 함락되니 다음 목적은 전라도의 요충지인 전주 였습니다.
무주에서 전주로 들어오는 길인 웅치에 정담, 이복남, 변응정, 황박, 황진이 방어선을 쳤고 7월 7일
웅치 전투가 벌어지니 조선군은 병력 대부분을 잃고 패했으나 이복남이 겨우 군을 수습해
안덕원에서 재차 적을 막았고, 때마침 도착한 황진의 원군에 힘입어 겨우 방어에 성공합니다.
이때 조선군은 굉장히 불리한 상황에서 전투를 벌였으니 난중잡록에 기록된 곽재우군과 안코쿠지
에케이군의 교전기록으로 안코쿠지 군의 규모를 추정해 볼 수 있는데 병력이 배 18척
에 나눠탔다는 것을 감안하면...... 웅치에서 적을 맞은 조선군은 2천도 채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경명은 서인의 일파로 동래 부사로 재직하다가 정철의 건저의 사건 이후 서인이 몰락하면서
지역으로 내려온 전라도의 유력자였으니, 선조가 피난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전라도
일대를 돌면서 의병을 모았던 고경명은...... 용인 전투 이후 최대의 병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용인 전투 이후 전라도 지역민들은 관군보다 고경명의 편을 들었으니 원래 고경명은 김천일과 함께
한양 진군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일본군이 전라도로 공격해오면서 전략을 변경해 조헌의
병력에 관군인 전라 방어사 곽영의 병력까지 합류해 일본군의 본거지인 금산을 노리기로
결정한 것이니 고경명 병력이 금산성에 당도한 것이 웅치 전투 바로 다음날인 7월 9일 이었습니다.
전투는 6,700명의 조선군이 금산성을 포위한 상황에서, 1만명의 일본군 병력중 일부가 성밖으로
나와서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는 것으로 9일 하루가 지났으며 이날 저녁 곽영은 고경명
에게 철군을 권유하는데 어차피 이치 전투(?)로 전주에 대한 위협이 사라졌고
따라서 일본군이 철수할 것이기 때문에, 금산을 굳이 공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고경명은 곽영의 말을 듣지않고 금산 공격을 강행했으니 10일에는 고바야카와가 곽영군을 공격했고, 소수
이고 급하게 모았던 곽영의 군대가 버티지를 못하면서 붕괴되니 곽영은 몸을 피했고, 고경명은 병력을
후퇴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무시하고 계속 공격할 것을 주장하다 전사하면서 병력이 완전히 붕괴되었습니다.
그리고 고경명의 장남 고종후가 남은 병력을 추스러서 다시 금산성으로 나갔을 때는, 이미 일본군
은 후퇴한 다음이었으니 결국 고종후가 사망자들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뤘으며
고종후도 의병이 되어 일본군과 맞서게 되는데 그후 고종후는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고경명이 전사하면서 대표적인 임진왜란 시기 의병장인 임진사충신의 대표격으로 불리게 되지만 이에
대해서는 고경명이 서인이었던 것이 높이 평가받았다는 이야기도 존재하며, 전주 방어전에는
불참하면서 필요없는 전투를 강행해서 괜히 없는 병력을 분산, 괴멸시켰다라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청주 전투에서 청주성을 공동 탈환한 의병장 조헌과 영규대사는 이 당시 논쟁을 벌이고 있었으니 영규
대사는 병력이 700에 불과하니 관군과 합동 공격을 하자고 하였으나, 조헌이 단독 출전하니 승장
영규도 자기 휘하의 병력 800을 이끌고 따라나섰으니 조헌은 변명으로 관군과 연합해 금산을 공격
하기로 했는데.... 관군측에서 기한을 변경했고 그 사실이 미처 조헌에게 전해지지 못했다고 적었습니다.
충청도 순찰사 윤국형은 의병들이 조헌에게 합류하지 못하게 가족을 인질로 잡자 의병은 대다수의 병력이
해산되어버리고, 청주성을 탈환한후 금산에 도착하니 남은 병력은 700명 뿐이었다고 하지만 영규의
승병은 합산되지 않은 숫자인 듯 하니 도합 1,500여 명이 금산에서 1만명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듯 합니다.
이에 마주한 적군인 일본군은 거의 3배 ~ 10배에 달하는 숫자로,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전투
였으며 게다가 후속 부대가 없는것을 알자 고바야카와 군이 후방을 막아 퇴로를 점거하고
포위 진형을 갖춰 공격하기 시작했으니 기재사초에서는 비가 오는 와중에 조헌 군은
진영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했고 영규가 이대로는 전투 속행이 불가능하다고 다시 지적합니다.
조헌은 이 적은 본래 우리가 대적할수 없는 것인데도 속히 싸우려고 하는 것은 오직 충의의 격동으로
사기가 한창인 이 때를 이용하려는 것이오. 라고 답했다는 내용이 있으니 이튿날 새벽 왜군이 공격을
가해왔고 영규 군은 대강 진영을 꾸렸으나 조헌 군은 들판에서 왜군과 백병전을 벌여서 무너지고
영규의 진영 쪽으로 퇴각했는데...... 왜군이 그대로 육박해 오자 조헌과 영규 모두 포위되어 전사합니다.
첫댓글 진안역사박물관 잘 만들어놓앗네요.임진왜란 설명도 잘 보앗습니다.
호남을 지켜낸 아주 중요한 전투인가 합니다.
@은혜 임진왜란때 중요한격전지였군요
저는 지난주에 임진왜란때 3대대첩인 명량대첩 노량대첩 행주대첩중에 권울장군의 행주대첩
행주산성 둘러보고왔습니다
행주산성은 입구에서 다 둘러보고나온데
한시간정도 소요됩니다
전시관에는 임진왜란당시 상황을
잘 기록해 놓은걸 볼수있었습니다
@나라 아... 행주대첩?
놀라운 전투인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