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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까치골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바우
구중궁궐에 떠있는 배 한 척 있으니
<경회루 관람기> 촌놈, 금지구역 경회루에 오르다
남간정사는 우암 송시열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계곡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물을 대청 밑으로 지나게 해서
연못으로 흘러들게 한 이 건물의 풍경은 독특한 멋과 흥취를 자아낸다.
그러나 평상시 이 건물은 산새들에게만 개방이 허용돼 있을 뿐
사람들에겐 철저히 접근이 차단돼 있다. 가끔씩 이곳에 들릴 때마다 난 늘 이 건물의 안쪽이 궁금한 나머지 깨금발을 하고 담장 너머를 기웃거리다가
하릴없이 발길을 돌린다.
그러던 남간정사가 드디어 지난 10월 우암 송시열의 학문과 사상을 기리는 우암문화제 기간에 그 굳게 닫힌
일각대문을 열어 단 하루 동안일망정 일반에게 자신의 폐쇄된 자아를 내보여주었다. 마침내 남간정사의 진면목을 들여다보게 된
것이었다.
가만히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그리고 뒷문을 활짝 열어젖힌 다음 연못을 바라보았다. 연못 한복판에 있는
인공 섬에는 가느다란 가지를 치렁치렁 늘어뜨린 왕버들이 홀로 앉아서 무심한 듯 세월을 낚고 있었고, 수면 위에는 새털구름이 노닐고 있었다.
<중용>에 나오는 "하늘빛과 구름 그림자가 어울려 함께 배회한다(天光雲影共徘徊)" 구절을 연상케 하는 풍경이었다. 풍경은 전염이
빠르다. 내 마음도 어느 새 평화롭고 고요해졌다.
이번에는 문이란 문을 모조리 닫아걸어 보았다. 창호지를 통과한 빛의 무리가 어두운
방 가운데다 가만히 문 그림자를 음각해냈다. 방안이 더할 나위 없이 아늑해졌다. 남간정사가 지닌 운치란 게 이런 것이었던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본다.
밖에서 바라본다는 것과 안에서 내다본다는 것은 어떻게 다를까 생각했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풍경의 주인공이 되느냐
아니면 여전히 객(客)으로만 머무느냐의 문제일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남간정사의 풍경을 그저 밖에서 바라보기만 했다면 난 여전히 객의 위치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한 채 어정쩡한 감수성으로, 건성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 자리를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건물의 쓰임새(用)를
체득해 보는 순간 나의 감흥은 한층 고조되었다. 그저 어떤 문화재를 답사하든 간에 내게 그런 순간이 생기길 바랄
뿐이다.
지난 13일 경회루 시범 개방 첫날 첫 관람에 참가했다. 초등학교 5학년 사회책에서 사진을 본 지 거의 40년만에,
경복궁을 드나든지 30여년 만의 일이었다. 그동안 경회루는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당신'이었다. 황지우 시인이 쓴 <커피자동판매기가
꿀꺽, 침을 삼킨다>라는 시의 한 구절은 "들어갈 수 없는 집; 탑은 우울한 건축이다"라고 규정한다.
그동안의 경회루야말로 그
말에 딱 들어맞는 집이었다. 들어갈 수 없는 집이었으며 따라서 우울한 건축일 수밖에 없었다. 귀하신 몸 경회루는 심지어 날짐승들에게조차 자신을
개방하지 않았다. '지각없는' 새들이 행여나 집을 짓거나 배설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공포에서 2층 바깥 기둥까지를 빙 둘러서 그물을
쳐놓았다.
▲ 경회루 전경 ⓒ2004 안병기
방지(方池)에다 네모난 섬을 3개 만들고 그 중 동쪽에 있는 가장 큰 섬에 웅장한
누각을 지은 게 바로 경회루다. 서쪽에 있는 두 개의 작은 섬은 그냥 나무만 심어 있다. 일설에 따르면 그 두 개의 섬은 연산군이 만들었다는데
만세산이라 부른다.
경회루로 건너가는 돌다리는 세 개가 있다. 남쪽에 있는 다리는 중간에 있는 다리와 북쪽에 있는 다리에 비해 폭을
넓게 하여 임금과 사신들이 다니고 나머지 두 다리로는 신하들이 다니도록 좁게 만들었다.
오전 10시가 되자 50여 관람객은 경회루를
오르기 위하여 흥례문 앞을 출발했다. 3개의 다리 중 가장 북쪽에 있는 다리를 건너 경회루 경내로 들어갔다. 본래 경회루와 그 연못 일대는
경복궁 내전에 딸린 누각이요 정원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내전인 강녕전과 교태전 쪽에서 들어가는 게 정식 경로라고 한다.
돌다리를 건너가자
제일 먼저 돌다리보다 한 단계 높게 한 외벌대 위에 자리한 1층 돌기둥들이 두 눈을 가득 메운다.
▲ 누하 돌기둥 ⓒ2004 안병기
바깥 둘레에 서 있는 네모난 돌기둥이 스물 네 개고 안쪽에 돌로 된 두리기둥들이
스물 네 개다. 이 돌기둥들은 모두 위가 좁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넓은 민흘림기둥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아래
층 바닥은 전면에 방전(方塼)을 깔았다. 옛날 방전은 표면이 약간 거칠면서 쥐빛이었다고 하는데 지금 깔아놓은 방전은 검은 빛이 짙고 반지르르해서
햇빛을 반사해 버린다. 그러다 보니 가벼워 보이고 깊은 맛이 없는 게 흠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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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난간 동자 법수에 새겨진 불가사리. 화재를 막으려는 뜻이다. ⓒ2004 안병기
▲ 선착장 옆 돌난간에서 바라본 만세산 ⓒ2004 안병기
경회루가 있는 섬 서쪽 돌난간을 따라가다 보면 그 중간에
난간이 끊긴 곳이 나오고 거기 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 배를 타는 선착장이라고 한다. 연산군은 경회루 연못에 임금이 타는 배인 용선(龍船)을
띄우고 놀았다고 한다.
▲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2004 안병기
누 이층으로 올라가는 층계는 남쪽 끝 간의 동편과 서편 첫 째 간에
하나씩 두 틀이 있는데 목조계단이다. 우리가 올라가는 층계는 서편 첫째 간에 있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문화유산 해설사는 관람객에게 종이
가방을 하나씩 나누어준 다음 그 안에 신발을 넣으라고 한다. 이제부터 누 안으로 직접 들어가는 것이니 더욱 더 근신하게 행동하라는 뜻이다. 하나
둘씩 층계를 올라가기 시작한다. 약간 급경사가 지고 층계가 높긴 하지만 좌우로 난간이 있어 염려할 정도는 아니다.
▲ 2층 우물마루 ⓒ2004 안병기
경회루 2층은 마루를 깔았는데 바닥 높이가 3단으로 되어 있다. 마루는 정면
7간 측면 5간해서 모두 35간인데 그 가운데 중앙에 있는 3간이 가장 높다. 그 3간을 둘러싼 12간은 한 뼘 남짓 낮고 가장 바깥을 두른
20간이 그보다 한 뼘 쯤 더 낮다. 이렇게 높이가 달라지는 경계 구역에다 한 번 젖혀 들어올리게 되어 있는 분합문을 달아
놓았다.
분합문을 내리면 그 안은 닫힌 방이 되고 들어올리면 터진 마루가 되어 한 공간으로 쓸 수 있게 되어 있다. 분합문을 단
문얼굴 위는 교창처럼 살대를 구성하고 거기에 한지를 발라 마감하였다. 중앙의 높은 자리는 당연히 임금의 자리요, 다음, 그 다음으로 내려오면서
지위에 따른 차등을 주어 자리를 정했다.
▲ 2층 평면도.2000년 문화재청 발간 <경회루> 책자에서.
ⓒ2004 안병기
이러한 경회루의
구조는 단순히 왕의 권위와 위계질서를 드러내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고종 때 사람 정학순이 쓴 <경회루전도>에 따르면 거기엔 주역의
원리 즉 우주의 이치를 내재하고 있다고 한다. 중앙의 가장 높은 3간은 정당(正堂)으로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를 상징하고 그 구간을
구성하는 기둥 여덟 개는 팔괘를 나타낸다.
그 다음 12간은 정당을 보조하는 헌(軒)으로 1년 열두 달을 상징하며, 기둥 16개에는
각 기둥 사이에 네 짝 문이 달려 있으니 이것은 64괘를 이룬다. 가장 바깥의 20간은 회랑(廻廊)으로서 기둥이 모두 24개인데 이는 24절기를
상징한다. 이밖에도 기둥의 길이, 서까래 수효와 다리, 연못의 형상에 대해서까지도 주역의 숫자를 들어 풀이하고
있다.
▲ 기둥 사이를 장식한 낙양각 ⓒ2004 안병기
바깥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낙양각이 장식해 마치 액자의 테두리처럼
만들어 밖으로 보이는 경치를 한 폭의 그림으로 펼쳐 보인다. 낙양각이란 기둥 상부의 측면이나 창방 밑을 파련각(波蓮刻)으로 목각하여 돌려 붙인
것을 말한다. 이런 낙양각이나 계자난간은 경회루라는 근엄한 얼굴을 지닌 건물의 표정을 풍부하게 바꿔 놓는다.
경회루 2층에는 벽이
없고 문과 창도 없다. 누에 오른다는 것은 시야를 멀리까지 확보하기 위한 것인데 시선이 막히면 안 되기 때문이다. 누란 본디 자연 풍경을 넓고
멀리까지 대응적 자세로 바라보며 사유하는 장소가 아니던가.
▲ 2층에서 바라 본 근정전 ⓒ2004 안병기
▲ 2층에서 바라 본 만세산. 그 너머가 인왕산이다.
ⓒ2004 안병기
누에 오른 왕은 시선을 어디에다
두었을까. 마음이 심란한 날엔 어쩌면 왕은 수면의 움직임에 눈길을 주었을 같다. 그 고요한 움직임에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말이다. 마음이 외로운
날엔 어디를 바라보았을까. 근정전 너머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는 저자 거리나 멀리 육의전 쪽으로 눈길을 주지 않았을까 싶다. 아마도 아침에 물안개
피어오르는 시간과 저녁에 인왕산으로 해가 넘어갈 적에 경회루가 가장 아름다우리라.
이렇게 해서 약 40여 분 간에 걸친 경회루
관람은 끝이 났다. 총체적으로 정리하자면 경회루가 있는 방지의 길이는 남북으로 113m이고 동서로 128m이다. 호안(護岸)은 두께가 40cm
가량 되는 장대석을 사용했다. 경회루가 서 있는 네모난 섬은 동쪽 호안에서 9.36m 떨어져 있으며 그 넓이가 동서로 38.98m이고 남북
길이가 50.42m이다. 그 섬에 정면 7간, 측면 5간 해서 35간이나 되는 2층 누마루 집을 세운 것이 경회루다. 경회루는 그렇게 한 척의
배처럼 연못 위에 떠 있다.
2층 누각을 받치는 돌기둥 숲을 헤치고 밖으로 나왔다. 돌다리를 건너와 다시 한번 돌아서서 돌기둥들을
바라보았다. 모든 건축물에는 그 구조를 지탱하는 기둥이 있다. 경회루에는 모두 돌기둥 48개가 있다. 사람도 일종의 건축물이라면 나라는 一物을
받치는 기둥은 몇 개나 될까. 내 삶을 지탱해주는 관계 혹은 기둥을 생각하며 경회루를 나섰다.
*이 글은 다음 카페
<아름다운 오류>에도 올릴 예정입니다.
안병기(smreoquf) 기자
2004/11/29 ⓒ 2004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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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회루 주말부터
시범개방
경복궁안의 경회루(국보 224호)가 13일부터시범적으로 개방된다. 문화재청은 10일 문화유산 활용 방안의 하나로
경회루를 13일부터 11월30일까지 일반 관람객에게 제한 개방한다고 밝혔다. 경회루 관람은 하루 3차례(오전 10시, 오후 1시30분, 오후
4시), 1회당 60명으로 제한된다.
관람객들은 경복궁에 입장, 경회루 관람 안내원과 안전요원의 인솔 아래 경회루 누마루 등을
둘러볼 수 있다. 경회루는 국내에서 가장 큰 누각(290평)으로 경복궁 근정전과 더불어 빼어난 건축미, 왕궁의 권위를 드러냈으나 1961년
5·16 이후 일반인들의 관람이 금지됐다.
〈도재기기자 jaekee@kyunghyang.com〉
*경향: 2004년
1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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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로 경회루에 대한 자료를 덧붙입니다.
경회루(慶會樓) 일곽.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7칸(34.4m), 측면 5칸(28.5m)이다. 조선의 정궁(正宮)인 경복궁이 창건된 것은 1395년으로,
이때 경회루 주위에 작은 연못이 조성되었고, 1412년(태종 12) 태종의 명에 의하여 큰 방지를 파고 경회루를 창건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서 273년간 폐허로 남아 있다가 1867년(고종 4) 흥선대원군에 의하여 재건되었다. 방지의 크기는 동서가 128m, 남북이
113m인데, 못 안에 방형의 섬을 만들고 거기에 누를 세웠다. 이 섬에 들어가는 3개의 석교(石橋)가 있는데, 모두 하엽동자(荷葉童子)에
회란석(廻欄石)을 섬 주위까지 돌렸다.
(경회루 정면도)
경회루는 중루(重樓), 팔작지붕의 2익공(二翼工) 집으로, 누마루를 받는 48개의 높직한 돌기둥이 줄지어 서 있다. 외진주(外陣柱)는 방형석주(方形石柱)이고
내진주(內陣柱)는 원형석주(圓形石柱)이다. 기둥 둘레는 아래가 넓고 위가 좁아졌는데 그 체감률이 경쾌하여 조화적이다. 이 석주 위에 나무기둥을
세우고 중루를 만들었는데, 마루 밑은 우물천장을 하여 단청을 하였고, 위쪽 마루는 외곽 퇴간부분이 가장 낮고, 그 다음 고주(高柱)와
내고주(內高柱) 사이가 1단 높으며, 내고주 안의 깊은 오간(奧間)이 또 1단 높게 만들어졌다. 이는 외국 사신을 영접하고 연회를 베풀 때
품계(品階)대로 앉는 자리 구분이다.
고주와 내고주 사이에 하방을 돌리고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달아서 문을 내리면 방이 되게 되어
있다. 마루 끝 바깥 기둥에 낙양각이 장식되고 기둥 밖으로 계자난간(鷄子欄干)이 아름답게 설치되어 있고, 이 난간은 시각적(視覺的)으로 높은
기둥을 짧게 보이도록 끊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처마는 겹처마지붕이며, 용마루 끝에는 취두(鷲頭)가 설치되었고 추녀마루 위에는 용두(龍頭)와
잡상(雜像)이 설치되었다.
용마루를 높여 웅대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지붕의 물매가 급하고, 측면 지붕에는 큰 합각의 삼각형이
생겼는데 건물 평면이 커서 시각적으로 조화되어 있다. 이 집은 건축기술상 너무 커서 어려움이 있었으나 이를 잘 처리하여 견고하게 지었다. 한국
목조건축기술의 우수성을 과시하는 이 누가 화려한 단청의 집 그림자를 연못 속에 드리우면 그 영상이 아름답다. 또한 연못은 뱃놀이도 했던 곳이다.
(경회루)
수정전앞에는 넓은 연못이 자리잡고 있다 이 연못은 북악계곡의 물과 경복궁 뒤편의 향원지에서 나오는 물로 채워진다. 또한 이지대
자체가 원래 습한 지역이라고 한다. 연못안에는 세 개의 임공섬이 조성되어있는데, 하나는 경회루이고 두 개는 동산의 모습을 하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경회루는 연못의 물로써 불을 제압하여 궁궐을 지키며, 궁의 부족한 명당수를 확보하고 땅의 습기를 다스리기 위해 팠다고 한다.
경회루는 국보 제 224호이며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 연회를 베풀기 위해 지은 누각이다. 태종때 하륜은 기문에 그 뜻을 "경회는
임금과 신하가 덕으로 만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작은 누각으로 쓰여 그 규모가 작았으나, 태종 12년(1412)에 박자청이 연못을
확장하고 누각을 더 크고 화려하게 재건하였다. 그후 임진란으로 불타고 후에 대원군때 다시 더 크게 늘려 중건하였다. 현재 경회루는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고 있으며 당시에도 공식적인 행사 외에는 그 누구도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곳이었다.
(경회루)
(옛 경회루 모습. -원래 경회루 주변에는 이처럼 담이 있었다고 한다.)
(옛 경회루 모습.-100년전 경회루)
- 경회루 살펴보기.
경회루가 있는 섬에는 세 개의 돌다리가 걸쳐져 있는데 남쪽에
있는 것은 다른 두 개의 돌다리보다 폭이 넓게 하여 어도로 삼았다. 또한 다른 반대쪽에는 배를 탈 수 있도록 돌계단이 내려와 있다. 경회루는
3개의 다리를 보유한다.
(3개의 다리를 가진 경회루)
그 다리의 기둥을 보면 마름모 꼴로 만들어져 있는데, 이는 물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다리 기둥의 모양이 마름모꼴이다:물이 자연스럽게 흐른다)
(마름모꼴의 다리 기둥 -다리 기둥의 모양이 마름모꼴이다:물이 자연스럽게 흐른다)
누각 둘레에는 하엽동자와 팔각의 '돌난대'를 두어 돌난간을 만들었고, 난간의 엄지
기둥에는 십이지상을 조각하였다.
(돌 짐승)
(돌 짐승. -불가사리?)
경회루는 중층의 누각이다. 아래층 기둥은 모두 48개이다. 그중 바깥기둥은 모가난 네모꼴이고 안기둥은 원모양의 두리기둥이다. 네모는 땅을 의미하고 원은 하늘을 의미한다.(天圓地方 사상)
바깥 모기둥은 아래가 넓고 위가 좁은 사다리꼴로서 미끈한 느낌을
줄뿐아니라 유난히 넓고 큰 기둥의 육중함을 (그림:2층행각 ) 시각적으로 감소시켜 주고 있다. 만약 사다리꼴이 아닌 직사각이라면 상당히 불안한
느낌을 줄 것이다. 성종떄는 둘기둥마다 용을 화려하게 장식했으나 임진왜란때 붙타면서 버려졌다.1층에는 기와를 깔고 2층벽체는 흙벽이 아닌 나무로
판벽으로 그 위에 종이로 도배하였고,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다. 마룻바닥은 그 높이가 일정치 않은데 바닥 놓이는 3단으로 되어있다. 물론 가운데
높은 곳은 왕의 자리다. 그 다음에는 신분에 따라 높이가 달라진다. 높이가 서로 다른 경계면에는 접어서 올릴 수 있는 분합문을 달아놓았다.
유사시 방처럼 사용앴다.
(분합문을 단 내부 모습)
(2층 천정 모습)
경회루의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물매를 급하게 하여 시각적으로 지붕을 크게 보이도록 하였다. 위엄을 갖추기 위해
용마루를 높이 올렸다. 그리고 지붕마루에는 각기 취두 용두. 잡상을 올리고 옆면의 합각머리를 크게 마련하였다. 경회루 잡상은 궁의 여느 전각의
잡상보다 그 수자가 많다.(11개)
처마밑에 걸린 처음 현판은 양녕대군의 글씨로 전해진다. 지금의 글씨는 추사의 제자인 신헌의 글씨로
알려져 잇다.
단일 평면으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누각이면서도 둔중한 느낌을 주지 않는 것은 날렵한 팔작지붕의 선과 깊숙한 겹처마 간결한
익공양식 무리없는 가구방식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붕마루를 덮은 흰색 양성도 전체 분위기를 밝게 해주고 있다.
'양성'이란 지붕의
용마루.합각마루.처마마루를 회로 두껍게 덮어올린 것을 말한다.
경회루의 연못바닥은 땅의 침하를 막기위해 전복대 같은 나무기둥을 수 없이
박아놓았다는 사실이 언젠가 연못의 물을 빼면서 밝혀졌다. 거대한 건물을 물속에 세우면서 그와같이 기초를 견고히 한점은 실로 놀랍다. 연못바닥은
물이 들어오는 동북쪽은 높게 물이 나가는 서남쪽은 낮게 하여 끊임없이 물이 흐르게하여 썩지 않게 하였다.
경회루 기단의 서쪽으로는 계단을
두어 연못의 배를 탈 수 있도록 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이 연못에는 수백명이 탈 수 있는 황룡주가 떠다녔고, 연회가 있을 때면 촛불을 켠 꽃과
동물 모양의 등을 물위에 띄었다고 전한다. 연산군때 연못 위에다 두 개의 네모난 만세산을 조성하였는데 이를 '당주'라 하였다.
이 당주에는
나무와 쫓들을 심어 아름다움을 더했다. 그러나 연산은 '흥청'이라는 전국의 기생들을 불러모아 밤낮으로 흥청거렸다 고 한다. 현재 연못 북쪽에는
육모지부의 하향정이 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곧잘 찾아와 낚시를 즐기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 경회루는 경복궁 내에서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곳이다. 주변에는 옛날 같으면 많은 궐내각사들이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한가로운 공원처럼 벤치도 있고 나무들이 심어져 있어 연인들도
많고 소풍을 나온 가족들도 둘러앉아 쉬어가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회루의 바로 앞 쪽에서만 잠시 앉아있다. 사진 몇장
찍고는 돌아가 버린다.관광객들이 대부분이니 안내인의 설명만 듣고 잠시 쉬면서 사람들이 던져주는 모이를 얻어먹으러 떼로 몰려드는 물고기들에 정신을
팔 뿐이라 그렇다.
우리는 지금 조선 시대의 최고의 연회장소를 보고 있는 것이다. 옛날에는 경회루 연못을 따라 담장이 사방으로
둘려있고,동쪽으로 함홍문(含弘門). 서쪽으로 천일문(天一門), 남쪽에 경회문(慶會門)이 있었다. 하지만 문이 있었다고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경회루의 바로 옆에 왕과 왕비가 계시는 침전이 있는데 어찌 아무나 들어올 수 있었겠는가!
국가의 큰 경사가 있을 때, 연회를 열 때에나 들어오게 했을 터이니 왕이 아니고서는 지금 우리들처럼 이렇게 편안히 이 주위를 걸어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참으로 운이 좋은 것이다.
왕과 왕비가 거처하는 침전구역의 바로 옆의 서쪽에 위치한 경회루는 왕실 전용의 휴식공간이라 할 수 있다. 조선 시대가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만큼 경회루의 구조도 이에 적합하게 만들었다. 섬의 한가운데 떠 있는 경회루는 섬의 동쪽 편으로 돌다리 셋을 두어 왕과 왕비가 침전을 통해 쉽게 경회루로 접근 할 수 있게 했으며, 남쪽의 다리를 다른 다리들에 비해 넓게 만등어 시위를 거느린 임금이 사용케 하여 신분에 따라 건너는 다리도 이처럼 차별을 두었다.
다리를 건너 2층의 누각으로 올라가면 바닥이 마루로 되어있는데 그
바닥의 높이가 일정하지 않다. 높이는 3단계로 나뉘어져 있는데 가장 바깥 쪽의 툇간이 가장 낮고 조금 안쪽이 그보다 조금 높아지면 가장 안쪽의
중심부가 제일 높게 되어있다.
이는 연회가 진행 될 때에 신분에 따라 앉는 자리에 차별을 두기 위함이었다. 왕이 가장 높은 곳에 자리했고
그 신분에 따라 상석과 하석에 자리를 잡았다.
이러한 구조는 단지 왕의 권위화 신분 위계를 드러내는데 그치지 않는다.
옛
기록에 따르면, 여기에는 주역의 원리가 담겨져 있다 한다. 즉, 중앙의 가장 높은 3칸은 천(天), 지(地). 인(人) 의 삼재를 상징하고, 그
주위를 둘러싼 8개의 기둥은 8괘(八掛)를 상징한다. 내측과 외측의 사이의 공간은 12칸으로 12계절을 상징하고 이를 둘러싼 기둥 16개의
사이에는 각각 4짝식의 분합문이 달려있어 모두 64짝으로 64괘를 이룬다. 그리고 가장 외곽의 20칸은 회랑으로서 그 기둥수가 24개이며 이는
24절기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건물 하나를 지음에도 조선시대의 건축가들은 그것에 의미를 담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