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마산이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예향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출중한 예인이 많기 때문이다. 음악 분야도 예외는 아니다. 그 때문일까. 마산에는 일찍부터 음악감상실과 음악다방이 성업했고 그곳에서 크고 작은 행사들이 열리기도 했다. 훗날 시인이나 소설가, 음악가, 연극인 등이 된 당시 예술 지망생들은 그런 행사를 계기로 예인의 길을 걸어갈 각오를 다지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마산이기에 '음악의 집'이라는 불후의 클래식 음악주점이 있을 수 있었고, 그에 필적할 만한 팝 전문 음악감상실도 있을 수 있었다. '만토바니' 음악감상실도 바로 그중 하나다. '만토바니'는 1970년 가을 무렵에 열어 그다음 해까지 약 1~2년간 존재했던 본격적인 팝 음악감상실이다. 위치는 현재 신포동 삼익아파트 1동 입구 부근. 요즘과는 달리 당시에 그 지역은 황무지와 다름없는 미개발지역이었고 대형 창고가 많이 있던 지역이었다. 그런 후진 곳에 무모할 정도로 '만토바니'란 이름을 가진 음악감상실을 열었으니 그 주인공은 누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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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이상용 대표, 마산 토박이 박태홍 씨, 박종구 씨가 '만토바니'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승환 기자 | |
495㎡ 남짓 넓은 홀을 가진 '만토바니'는 다방이나 술집이 아닌 전문 음악감상실이었다. 물론 '만토바니'보다 먼저 생긴 음악감상실도 있다. 신마산 외교구락부 부근에 있던 '신신' 음악감상실과 '미화당' 음악감상실이 그것이다. 하지만, 최신식 음향기기(미제 스콧 260의 고출력 앰프, 굿맨 섹숀 212와 젠센 같은 고성능 스피커 등)와 많은 음반은 물론, 넓은 홀까지 제대로 갖춘 본격적인 음악감상실은 '만토바니'가 처음이기에 필자는 '만토바니'를 차린 주인공을 수소문해보기로 했다. 왜냐하면, 마치 일제강점기 만주 벌판에서 활동한 독립군처럼, 당시 번화가인 창동·오동동도 아닌 후미진 신포동에다 용감하게도 음악감상실을 연 당사자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가 돈키호테가 아니라면 그런 후미진 곳에다 팝 전문 음악감상실을 차릴 리가 없기 때문이고, 장사가 안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당사자 찾기가 어려울 줄 알았는데 예상 외로 쉬웠다. 바로 오동동 토박이 박태홍 형 때문이다. 그의 부친이 오동동 한복판에서 '박치과'를 했기에, 그리고 그의 집이 옛날 오동동의 고급 요정들과 인접해 있었기에 그는 창동·오동동 당시 사정을 훤히 꿰는 사람 중 하나다.
"형님, 혹시 '만토바니' 음악 감상실이란 말 들어봤습니까. 신포동 어딘가에 있었다던데예."
"만토바니? 그거 내 친구가 안 했나. 박종구란 친구가 '만토바니'를 했다카이. 옛날에. 그런데 그건 와 묻노?"
이런 횡재가! 그의 소개로 드디어 '만토바니'를 차린 주인공을 만나게 된다. 바로 박종구란 사람이다. 그 이름도 찬란한 '만토바니'를 개업한 사람이기에 그가 예인(藝人) 아니면 음악인쯤 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만나고 보니 그는 엉뚱하게도 테니스 선수 출신이란다. 한때는 전국 무대를 주름잡기도 했단다. 운동선수라고 해서 음악감상실을 차리지 말라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무슨 사연이 있을 것 같아 결례를 무릅쓰고 '만토바니'를 운영하게 된 배경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뜻밖에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는 단지 음악이 매우 좋아 '만토바니'를 차렸다고 했다. 그리고 비록 테니스를 했지만, 당시 서울의 '세시봉'에 필적했던 음악감상실 '디세네'(종로 소재)에도 자주 갔을 만큼 음악을 좋아했다고 했다. 당시 '디세네'의 DJ는 그 이름도 유명한 이종환이다.
그러고는 묻지도 않은 당시의 사연을 술술 털어놓기 시작했다. 제법 많은 자금을 투자했던 '만토바니'는 당시 마산 MBC 라디오 공개방송을 그곳에서 진행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고 했다. 다방이 아니니 커피를 파는 것이 아니라 입장 티켓을 팔았고, 한창때는 티켓을 사려고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기도 했단다. 그러나 의욕과는 달리 상술에 능하지 못했고 세상물정에도 어두워 한 2년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단다. 그 후 마산 음악다방 1세대인 남성동 '정원다방'과 오동동 '송학다방'의 창업 멤버가 되어 두 다방의 초대 DJ를 맡았다. 알고 보니 그는 이재수, 최동호, 김기호 등보다도 앞선 마산 DJ계 맏형이었다. 테니스 선수 박종구가 마산 DJ계의 맏형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만토바니'는 알지만 그 '만토바니'의 사장이자 DJ를 한 사람을 몰랐다니. 여차 했으면 DJ 박종구는 영원히 그 이름이 묻힐 뻔했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 마산에는 가히 음악다방의 전성기라 할 만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거의 1980년대 후반까지다. 한국 근대화의 주역이자 마산 발전의 원동력이랄 수 있는 한일합섬과 수출자유지역의 수많은 종업원, 그리고 경남대학이 종합대학으로 커지면서 급격히 늘어난 대학생들 때문이었다. 거리 곳곳마다 수많은 인파가 넘쳐나던 그 시절, 당시의 청춘남녀들은 마땅히 갈 곳도 없었기에 음악이 흐르고 낭만이 넘쳐나는 창동·오동동의 다방으로 부나비처럼 모여들었다.
그런 음악다방과 DJ들은 1990년대 중반부터 종적을 감추기 시작한다. 기업들이 문을 닫고, 시내 인구가 급격하게 줄어들었으며, 게임방, 오락실 등 새로운 오락시설이 등장하면서다. 그 결과 마산의 중심부인 창동·오동동은 침체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시작한다. 오늘날까지도. 아, 창동·오동동이여.
/이상용(극단 마산 대표) sylee51@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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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970년에 미제 TR.60W AMP SCOTT 260 와 영국제 풀레인지스피커 GOODMANS AXIOM 212 을 조합하였다니 teni 박종구는 대단한 오디오 선각자이다. 더구나 DJ까지 했다니 나는 그것도 모르고 도사앞에서 요령흔들었다.
<여차 했으면 DJ 박종구는 영원히 그 이름이 묻힐 뻔했다>.홍제 덕분에 종구의 도다른 면모를 알게되었군요,감사
'박종구'를 만나면 마음이 통하는 것 같아 즐겁운 친구의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연예와 체육, 문화와 지성으로 풍성한 면모를 갖춰서 그랬던가.
듣고보니, 감이 잡힌다.